퓨처 워커 1권 – 1장 사라진 시인의 추모곡 1화

퓨처 워커 1권 – 1장 사라진 시인의 추모곡 1화


1

“생일 선물.”

미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말했다.

“그래.”

“미가 골라도 되는 거야?”

“고르기 귀찮아. 11년 동안 열한 가지 선물을 했지만 한 가지 빼놓고는 모조리 마음에 안 든다고 그랬잖아. 그러니까 이번에는 네가 골라. 그걸 사줄 테니까.”

“그런데 말이야, 쳉은 달력 보는 법 아직 못 배웠니? 미 생일은 9월이야.”

쳉은 피식 웃었다. 미는 쳉의 표정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했다.

“아아. 이번에 출발했다가 다음에 여기 들를 때쯤이면 거의 네 생일쯤 될 거야. 게다가 내가 널 12년 동안 겪은 몸이다. 네가 고를 것이 뭔지는 모르 지만 꽤나 황당할 거라는 건 짐작해. 그러니까 준비 기간을 길게 잡은 거야.”

미의 고개가 이번엔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래? 이번 여행은 꽤 기나 보네.”

“응, 한 5개월쯤 걸릴 거야. 이번엔 남쪽으로 해서 토린 지방을 주로 지날 거야. 우리 보스가 수달 가죽 장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거든. 그래서 대 략 5개월 정도 걸릴 것 같고, 그러면 거의 네 생일이잖아. 그러니까 말해 봐.”

“쳉 줘.”

“응? 뭐라고.”

“쳉을 달라니까. 쳉을 선물해.”

“……그거 좀 보편타당하고 다른 사람들도 알아듣기 쉬운 말로 다시 말해 줄래.”

“결혼해. 미의 생일이랑 결혼기념일이랑 같은 날이니까 편하잖아. 미가 쳉 밥도 해주고 빨래도 해주고 멘스할 땐 히스테리 팍팍 부리며 바가지도 복 복 긁어줄 테니까 미랑 결혼해.”

쳉은 등골이 쭈뼛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바가지를 복복 긁는다라, 그거 재미있는 조어(語)네.”

“쳉 말 돌린다, 말 돌린다?”

“에, 그, 그러니까.”

“쳉 더듬거린다, 더듬거린다?”

•싫어.”

“왜 싫어.”

“난 독신주의야.”

쳉은 자신의 변명이 지독하게 유치하다는 점에 당황했다. 내가 말했지만 정말 유치한 변명이군. 애들 장난치는 것 비슷한 말이지만 미랑 이야기할 땐 항상 이 모양이니까. 하지만 이젠 좀 유치함에서 벗어나……………

“그럼 미랑 결혼하려면 그거 포기해야겠네? 미안해라. 하지만 뭐 자기 이상을 끝까지 지켜가면서 사는 사람이 괴물이지. 그러니까 쳉도 힘내라. 대 부분의 남자애들은 엄마 젖을 더 이상 만지지 않게 되었을 때 이미 자신의 이상을 사회와 적당히 타협시킬 필요성을 깨닫지만 예외적으로 느린 남자 애들도 있다더라. 그게 바로 쳉 같은 사람을 말하는 거였구나. 음, 다른 건.”

쳉의 머리가 차가워졌다. 조금 더 유치해져도 될 것 같다.

“다른 여자가 있어.”

“아아? 그럼 우리의 첫 번째 부부 싸움은 결혼 전 옛 애인에 관한 것이 되겠네? 시시해라. 다른 사람도 다 하는 거잖아. 어, 다른 걸 한번 찾아봐야 지. 쳉의 순결을 의심한다든가..”

유치의 한계를 넘어서 잔인에 닿아도 될 것 같다.

“나 너 싫어.”

이번엔 미의 대답은 없었다. 미는 그저 무관심한 듯한 미소만 지은 채 쳉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쳉은 미의 무릎 위에 있던 손가락이 슬그머니 꼬이는 것을 잘 볼 수 있었다. 그 손가락을 보는 동안 강박 관념이 쳉을 엄습했다. 그래서 쳉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고 말았다.

“원래 싫은 사람하곤 결혼 안 하는 법이야.”

말을 마치고 나서야 자신이 무슨 말을 한 건지 깨달은 쳉은 속으로 절규하고 말았다. ‘어머님! 죄송합니다. 한 번도 뵙진 못했지만, 혹시 뵙게 되었을 때 제가 어머님의 배를 빌려 태어났다는 것을 부인하셔도 할 말이 없습니다.’미는 참으로 별스러운 인간을 본다는 듯한 시선으로 쳉을 바라보았고, 왠지 그 시선이 합당하다는 느낌은 쳉으로 하여금 보다 농도 짙은 당혹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럼 쳉은 평생 독신이겠구나?”

“그거 무슨 말이야?”

“쳉은 세상 모든 사람을 다 싫어하잖아.”

쳉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감정 결핍에 대한 미의 지적은 신랄했다. 그래서 쳉의 대답은 조금 거친 음색을 띠었다.

“쳇. 그래서 말했잖아, 독신주의라고.”

“아무도 좋아할 만한 능력이 못 되어서 결혼 못하는 걸 가지고 독신주의라고 표현하는 것은 독선주의야.”

“독선주의라는 말이 어디 있냐.”

“말해 봐. 여자에게서 결혼하자는 말 들은 거 이번이 처음이지?”

“응.”

“몹시 긴장되고 동시에 당황스러우며 이 자리를 피하고만 싶어지지?” “응.”

“에구, 예뻐라. 솔직해서 좋다.”

“솔직하게 말 안하면 때릴 거잖아…………… 악!”

“그럼 끝까지 여자에겐 관심도 안 둔 채로 방랑이나 하며 살겠다?”

“난 방랑이 더 편해. 야외가 집보다 편하고. 여자는 내 호기심 목록에서 순위가 낮아.”

“헤에? 웃기네. 쳉이 고참 방랑자 흉내를 다 내고.”

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치마를 탁탁 털고 난 미는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미의 시선을 따라 쳉 역시 언덕 아래로 펼쳐진 들판과 야산, 그리고 그 너머의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미의 풍성한 소맷자락이 바람의 리드에 따라 경쾌한 춤을 추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가만히 서 있어도 많은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쳉의 의견에 따르자면 이 북부의 땅은 여자 외엔 볼 것이 없다. 아니, 쳉의 의견을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미 이외엔 볼 것이 하나도 없다.

둥글둥글한 언덕들과 고원들. 그리고 그 사이로 한없이 펼쳐진 대평원, 가도가도 끝이 없다. 대지는 이 땅에 들어와 졸음에 빠져버린 것 같다. 날카 로운 산봉우리, 건너편이 보이지 않는 대하, 낮을 거부하는 울창한 숲,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협곡, 이런 케케묵은 말들이 이 땅에서처럼 신비롭게 들 리는 곳도 없을 것이다.

북부 사이들랜드. 헤게모니아의 이마에 해당하며, 양떼들의 천국이다. 시야에 들어오는 가장 높은 곳에 올라서서 주위를 둘러보라. 나무를 다섯 개 이상 발견한다면, 당신은 사이들랜드의 울창한 밀림 지대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번엔 흙을 찾아보라. 만일 100제곱큐빗 이상 의 풀이 덮이지 않은 노출된 흙을 볼 수 있다면, 당신은 사이들랜드의 대사막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다시 한번 마음을 가라앉히고 주위를 세심히 둘 러보라. 새카만 머릿결과 긴 다리를 가진 미인을 볼 수 있다면, 당신은 사이들랜드의 스카니아 마을에 있는 것이다.

스카니아 마을의 미 V. 그라시엘. 양떼를 좋아하고, 다리가 여섯 개 이상인 생물을 무서워하고, 넓은 그릇에 담긴 물로 미래를 볼 줄 알지만, 5분 후 무슨 일을 해야 될지에 대해서도 자주 까먹는 여자. 그리고 쳉이 입 밖으로 꺼내어 말하지는 않지만 그의 소견에 따르자면 대륙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다. 쳉과 결혼하고 싶어 하는 희귀한 여자이기도 하며, 쳉이 결혼하고 싶지 않은 지상의 모든 여자들 중의 한 명이기도 하다, 슬프게도.

미는 치마를 쓸어내렸다.

“언제 갈 거야?”

쳉은 안도를 느꼈다. 조금 전의 당황스러운 주제는 이제 거론하지 않아도 되나 보다.

“으음. 보스는 양모 구입을 끝냈어. 그래서 빨리 길을 떠나고 싶어 해. 마을에 오래 머물면 수중에 가진 돈 모조리 도박으로 날릴 사람이니까. 아마 내일 저녁을 여기서 먹기는 힘들 거야.”

“토린 쪽으로 간다고?”

“지금 계획으로는. 토린 쪽에서 양모를 팔고 수달 가죽을 산 다음 그쉬룹으로 가는 것이 전체적인 계획이야. 그쉬룹은 사냥용품으로 유명하거든? 거 기서 수달 가죽은 꽤 잘 팔리는 품목이야.”

“흐음. 쳉은 정말 보스의 사업을 이어받을 생각인가 보구나.”

“응?”

“쳉 저번에 들렀을 때만 해도 보스의 사업에 대해서는 도통 아는 것이 없었잖아. 음, 그게 넉 달 전인가? 미가 기억하기로는 넉 달이야. 넉 달 사이에 꽤 많이 바뀌었네.”

“뭐…………, 보스도 언제까지고 이 사업 계속하기는 힘들 테고, 정리해 버리기에는 부피가 큰 사업이니까 내가 인수할 수도 있겠지. 나 역시 상단(商團) 의 호위 무사는 체질에 안 맞아.”

“방랑자인 것처럼 굴더니.”

“방랑생활을 할 수 있어서 호위 무사라는 이 웃기는 직책에 붙어 있는 거지, 뭐.”

“미랑 결혼해서 정착해라, 응?”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끼며 쳉은 벌렁 누웠다. 푸른 하늘에는 양치기도 없는 양떼들이 한가로이 거닐고 있었다.

“미, 네가 평범하지 않은 여자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말이야. 12년 동안 만나면 인사하고 명절이나 기념일이면 소박한 선물을 나누는 사이 정도로 있다가 갑자기 결혼하자고 말하는 것은 정말 이상해. 너 무슨 일 있니?”

미는 고개를 숙여 드러누운 쳉을 내려다보았다. 새카만 머릿결이 아래로 늘어뜨려지며 미의 얼굴을 살짝 가렸다. 미는 머리카락 속에서 해죽 웃었 다.

“응. 쳉이 미랑 결혼해 주지 않으면 미는 귀족의 첩으로 시집가거나 마법사에게 잡혀가 실험 재료로 쓰이거나 드래곤에게 제물로 바쳐지게 될 거야. 어느 게 제일 무서워?”

“……셋 다 무서운데.”

“그럼 세 개 다 당할 거야. 첩으로 팔려가는 도중에 마법사에게 납치당해서 드래곤의 부활을 위한 제물로 바쳐지게 될 거야. 아아, 불쌍한 미. 가련 한 미. 그러면 안 되겠지? 이런 걸 가리켜 협박이라고 하지.”

미는 심드렁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저런 농담을 해댔다. 그래서 쳉은 더 우울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쳉이 뭐라고 말하려 했을 때 미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그녀의 오똑한 콧날과 턱만이 눈에 들어왔다.

“디도스 활이나 하나 가져다줘.”

“응?”

“토린에 갔다가 그쉬룹에 들른다며? 그쉬룹에서 조금 더 서쪽으로 가면 디도스잖아. 설마 그 유명한 디도스 활을 모르는 것은 아니겠지? 디도스 활 이나 하나 선물해.”

“네가 활은 뭐하려고?”

“미가 원하는 걸 선물한다며? 미는 디도스 활이 가지고 싶어.”

“누굴 쏴 죽이려고?”

“응? 천만에. 미가 누굴 죽이려면 시시하게 활로 쏘지는 않아. 세상의 누구도, 심지어 살해 당사자도 내가 범인이라는 것을 알 수 없는 방법으로 죽 일 거야.”

쳉은 당장 죽이고 싶은 사람의 명단을 떠올리면서 반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어떤 방법이지?”

“늙어죽게 만들 거야. 꽤 끔찍한 방법이지. 인생의 길이만큼의 기나긴 기간 동안 인생의 고통만큼의 끔찍한 고문을 줘서 결국 고문에 못 이겨 죽게 만드는 거지. 살해 성공률 백 퍼센트의 완벽한 암살법. 미는 꽤 사악하거든.”

쳉은 대답할 말이 곤궁해지는 것을 느꼈고,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멀리 지평선 쪽을 바라보던 미는 쳉에게는 얼굴을 돌리지 않은 채 그대로 언덕을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마을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여행 잘 다녀와.”

쳉이 황급히 몸을 일으켰을 때 미는 이미 저 멀리 걸어가고 있었다. 쳉은 그녀의 뒤통수를 향해 외쳤다.

“어, 음. 나는 내일 출발할 건데, 오늘 저녁에 찾아가도 될까? 저녁 식사에 초대하지 않을래?”

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의 대답 소리는 꽤 가늘게 들려왔다.

“안 돼. 미는 오늘 저녁엔 바빠. 그리고 모레까지는 계속 손님 사절이야.”

손님 사절이라고? 금제를 치겠다는 건가? 쳉은 다시 고함을 질러 그녀를 불러 세울까 했지만 이미 미는 언덕을 다 내려간 후였다. 그래서 쳉은 그녀 가 마을의 입구로 들어가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언덕 위에 앉아 있었다.

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자 쳉은 다시 드러누웠다. 등에 짓눌린 풀들이 가늘게 투덜거렸다. 그리고 쳉은 곤란에 봉착해 버렸다. 아무리 머 리를 굴려봐도 당장 죽이고 싶은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쳉은 다시 몸을 일으킨 다음, 옆에 던져둔 롱 소드를 들어 어깨에 걸치고는 마을 쪽으로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을이 여기로 와줄 리는 없으니 까.

쳉의 보스는 주점 앞에서 무진장한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상식이 부족한 이들이 보기엔 재미있는 구경거리임에 틀림없었지만 조금이나마 상식이 있는 사람들에겐 곤욕으로 보일 것이다. 보스의 나이 반도 안 될 청년에게 멱살을 틀어잡힌 채 이리 비틀 저리 비틀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이 휘둘리고, 차라리 쓰러지려고 해도 다시 끌어올려지고 있으니 나이 40줄을 넘겨 귓가에 허연 머리카락을 얹어둔 사나이로서 곤욕도 이런 무지스러운 곤욕이 없다.

이미 몇 번 땅에 나뒹굴었던 모양이다. 그 옷에 묻은 흙덩이나 허옇게 먼지를 뒤집어쓴 머리에서 짐작할 수 있다. 대로 어귀에서 그 광경을 본 순간 쳉은 걸음을 딱 멈췄다. 다행히도 거리를 걸어가는 사람들은 모두 이 재미있는 구경거리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기에 쳉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 었다. 그래서 쳉은 재빨리 옆의 골목으로 몸을 숨긴 다음 주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 광경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보스는 다이내믹하게 외쳤다. 그는 원래 꽤나 다이내믹한 사나이다.

“이봐, 이보라고. 제발 놓고 말하지, 놓고 말해! 말로 하자고!”

“어디로 달아나려고? 말은 무슨 얼어 죽을 말. 말인지 소인지 내 알 바 아니고 돈이나 내놔요!”

“누가 떼먹는다고 그랬나, 이보라고, 젊은이! 노름빚에 사람 잡는다는 말은 없었네. 제발 좀 놓으라고!”

쳉은 골목 옆의 건물 벽에 뒤통수를 가져다댄 채 길게 한숨을 쉬었다. 감이 온다, 방랑 생활을 지독하게 싫어하는 쳉의 보스가 이 사업을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저거다. 노름을 너무 좋아해서 알뜰살뜰 정착 자금을 모으질 못하는 것이다.

쳉은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호위 무사의 임무 따위 개나 물어가라지. 핏대 오른 젊은 녀석하고 대거리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 저 녀석이 나이 프라도 빼들면 어쩌라고? 노름기를 주체하지 못한 보스가 알아서 해결하라고. 어음이니 뭐니 하는 말만 나오지 않는다면 쳉은 절대로 나서지 않을 것 이다.

“좋아! 좋다고. 그럼 어음을 쓰지. 쓴다고!”

그 순간 쳉은 어깨에 걸치고 있던 롱 소드를 허벅지쯤에 늘어뜨린 채 골목을 나서고 있었다. 그러고는 눈을 지극히 전투적으로 뜬 채 무한한 경악을 담은 목소리로 외쳤다.

“어라? 아아니, 뽀오쓰! 이게 또대체 무쓴 일입니까!”

쳉은 종종걸음으로(달리지는 않았다.) 보스와 그 젊은 녀석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젊은 녀석은 느닷없이 롱 소드를 든 남자가 걸어오자 꽤 놀란 기색이었지만, 그렇다고 한참 기세가 오른 판에 갑자기 멱살을 놓아주기도 뭣해서 쥐똥 씹은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쳉은 얼굴에 보기에 상당히 불쾌 할 만한 표정을 만들어낸 채 걸어가면서도 속으로는 초조하게 생각했다. 어디 보자, 만일 저 녀석이…………

“이 새끼, 넌 뭐야!”

…………라고 고함을 지른다면 저 녀석은 나이프를 빼들 가능성이 별로 없는 녀석이다. 쳉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짖는 개는 무서울 것 이 없다. 그리고 그 점에선 사람도 개보다 낫다고 주장할 건덕지가 별로 없다. 만일 젊은 녀석이 싸움을 대비해서 보스의 멱살을 놓고 아무 말 없이 쳉을 노려보기 시작했다면 쳉은 그 즉시 보스 대신 사과를 시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젊은 녀석은 여전히 보스의 멱살을 틀어쥐고 있었고, 따라서 쳉으로서는 겁날 것이 없다. 쳉은 용감하게 외쳤다.

“뭐야? 너 이 자식, 뭐라고 했어?”

칼을 뽑을 필요도 없다. 그냥 뽑을 듯이 힘 있게 들어올리면 된다. 예상대로 쳉이 롱 소드 손잡이를 쥐자마자 녀석은 기겁하며 보스를 놓아주었고, 그러자 보스는 재빨리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실행했다. 쳉에게 매달려 그가 칼을 빼지 못하게 말리기 시작한 것이다.

“쳉! 쳉, 어이구, 무슨 짓이야! 참아, 참으라고!”

“이거 놔요! 아니, 저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녀석이 보스의 멱살을 쥐어? 내게 욕을 해? 참을 수 있는 게 있고 없는 게 있지! 너 이새꺄, 어딜 비 실비실 물러나? 거기서!”

“쳉! 안 돼, 다시는 사람을 죽이면 안 돼! 한 달 동안 잘 참았잖아?”

보스의 능청스러운 대사는 젊은 녀석으로 하여금 파랗게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 치게 만들었다. 정확하게 그 순간을 노려 보스는 과장된 동작으로 쳉 을 놓칠 뻔했다.

“어어어?”

그 순간 젊은이는 회오리바람이 일어날 정도로 맹렬하게 뒤로 돌아서서는 그대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아이고, 사람 살려! 사람 잡아요! 살인이야!”

“서랏! 서! 안 서면 쫓아가서 죽여야 된단 말이다. 그건 귀찮으니 거기 서!”

“우와아아악!”

곧 젊은이의 뒷모습은 대로의 끝을 향해 사라져갔다. 그러자 주위 사람들은 곧 너털웃음을 터뜨렸고 보스는 쳉을 놓아주었다. 그는 한 손으론 옷을 털면서 다른 손으로는 젊은 녀석이 사라져간 방향으로 보스의 어머니나 할머니가 가르쳐주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손짓을 하기 시작했다.

쳉과 그의 보스를 잘 알던 스카니아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웃으며 흩어져갔고 그중에서 주점의 마스터 오옴은(그는 보스가 곤욕을 치르고 있을 때 가장 즐 거워하고 있었다.) 두툼한 턱을 긁적거리며 쳉에게 말했다.

“수고했다, 쳉.”

보스는 여전히 그 험악한 손짓을 해대고 있었기 때문에 쳉은 오옴에게 물어야 했다.

“저 녀석 누구지요?”

“뭐, 뜨내기야. 솜씨가 괜찮아서 네 보스가 왕창 뒤집어쓰고 나서야 알게 되었지. 그러니 내가 어떻게 손쓸 수가 없더군.”

“그래도 좀 말려주시지 그랬어요.”

“네 보스는 뜨거운 맛을 좀 봐야 정신을 차릴 거라고 생각하는데.”

“하긴, 동감입니다.”

오옴의 말에 대답하고 나서 쳉은 곧장 허리를 뒤로 뺐다.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날리다가 허공을 헛친 보스는 몸의 중심을 잡기 위해 몇 발자국 비틀 거렸고, 이어서 빽빽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이놈아! 어딜 갔다가 이제 나타난 거야? 자칫하면 객사할 뻔했잖아?”

“허풍이 점점 늘어가는 것도 노화의 증거겠지요, 보스.”

“이이이놈아!”

보스는 이번엔 날렵한 동작으로 스핀킥을 시도했고, 역시 허공을 걷어찬 다음 핑그르르 돌며 대로에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쳉은 그 모습을 보며 통 쾌하게 웃으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웃는 사람이 있었다.

“파하하하!”

뭔가 잘 깨지는 물건이 깨지는 듯한 웃음소리에 쳉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는 대로 한가운데서 파 L. 그라시엘의 목소리로 웃고 있는 양털 더미 를 볼 수 있었다.

파는 벗긴 양모를 머리에 뒤집어쓴 채 쳉 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언니만큼 다리가 길지는 않은 도리암직한 몸매라 양모를 머리에 이자 상체가 거의 다 덮여버렸다. 그래서 언뜻 보기에 양에 사람의 다리가 달린 것처럼 보였다. 또 한 명의, 북부 사이들랜드가 아니라면 보기 힘든 종류의 처녀. 쳉은 파에게 말했다.

“파. 항상 느끼는 거지만 말이야, 넌 참 좋겠어.”

파는 양모 아래에서 대답했다.

“무슨 말이지?”

“자기 이름으로 웃을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에에? 쳉이 이름을 가지고 나를 놀려? 자기 이름으로 싸울 수 있는 사람이? 쳉, 쳉, 쳉!”

파는 마치 칼 부딪치는 소리를 내듯이 쳉의 이름을 불러 젖혔다. 오옴과 쳉의 보스는 킥킥 웃기 시작했고 쳉은 뭔가 뇌리에 오래 남는 말을 떠올리기 위해 고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파는 어깨에 메고 있던 양모를 쳉에게 건네었다. 얼떨결에 양모를 받아든 쳉은 의아한 얼 굴로 물었다.

“뭐야?”

파는 흐트러진 머릿결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이거 가져가. 그리고 돌아올 때 나 뭣 좀 사다줘.”

“뭘 원하는데? 격투용 장갑?”

“말 다 했어!”

“아냐? 그럼 뭘 원하는데. 군용 나이프? 화약? 암살용 독침?”

“……꽃씨!”

보스는 다이내믹하게 딸꾹질을 시작했고, 오옴은 ‘해장술이 과했나?’ 어쩌고 하는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쳉은 그저 상냥하게 웃었다.

“아아. 키타나의 식인 식물? 아니면 그쉬룹의 흡혈초? 정원에 그런 거 심으면 미가 화낼 텐데.”

“이하하하하!”

파는 하늘을 우러러 거대한 신음을 뱉고 나서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코스네위의 씨를 좀 구해다 줘.”

“코스네위? 그게 뭔데?”

“남부 쪽으로 가거든 물어봐! 까불다가 잊어먹지 말고 잘 기억해. 알았지? 코스네위!”

“알았어. 얼마나 구해다 주면 되는데?”

“그 양모 가격만큼.”

쳉은 당황하고 말았다. 설마 이 팔팔한 처녀가 남부의 양모 시세를 모르는 것은 아닐 텐데. 보스의 입이 쩍 벌어지는 것을 보다가 쳉은 그럴듯한 해 답을 떠올렸다.

“코스네위인가 하는 꽃이 얼마나 비싸길래 그래? 흐음. 뭐, 내가 신경 쓸 것은 아니지. 알았어. 그런데 수고비는 없냐?”

파는 우물쭈물하더니 천천히 대답했다.

“수고비는……, 코스네위가 피면 네게도 줄게.”

“와! 이제 알았다. 그거 먹는 거구나?”

“아하, 아하아아아악!”

쳉은 의아했지만(‘파는 왜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내며 나를 마구 때리기 시작한 걸까?) 그 의아함을 풀 기회는 가지지 못했다. 쳉의 의아함은 POG(Pot of Gold) 상단이 머무르고 있던 야영장으로 돌아온 뒤에야 해결되었다.

어깨에 양모를 걸머진 쳉과 그의 보스가 스카니아 마을의 교외에 설영된 POG 상단의 야영지로 돌아왔을 때, 상단은 수레꾼 우두머리 킬로이의 지 휘 아래 수레를 점검하던 중이었다. 상단의 수레들은 야영지를 둥글게 에워싸듯 대어져 있었고 킬로이는 손에 장부와 펜을 들고 혁대에는 망치와 가 위 등을 꽂은 채 수레들 사이를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상차를 끝낸 나머지 수레꾼들이 모두 늘어져 노닥거리는 가운데 혼자서 부지런을 떨고 있는 킬로이를 향해 보스는 칭찬을 던졌고 쳉은 인사를 던졌다.

“여어, 킬로이, 바빠 보이는군요.”

킬로이는 쳉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수레 위로 기어오르며 말했다.

“상단의 단장은 도박에 빠져 있고 고용 무사는 사랑에 빠져 있으니 나라도 정신차려야 되지 않겠냐.”

보스는 작게 투덜거렸다.

“웃기는군. 검사 끝나거든 내 천막으로 오게, 킬로이. 예정표 문제를 끝내자고.”

“알겠습니다, 보스.”

보스가 자신의 천막으로 걸어간 뒤 쳉은 수레 쪽으로 다가서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킬로이. 물어보고 싶은 것을 가지고 있는데요.”

“나 줄 거야?”

“예.”

“그럼 줘.”

“파가 코스네위라는 꽃의 씨를 가져다달라고 그러던데, 혹시 그게 뭔지 압니까.”

킬로이는 수레의 끈을 잡아당기다가 이마의 땀을 쓱 닦으며 말했다.

“코스네위? 짝사랑을 위한 꽃이잖아.”

“잠깐. 자상이나 골절, 혹은 타박상에 달여 먹으면 좋다………… 또는 암살용으로 사용되는 자이펀 비전의 독초라든가, 뭐 그런 게 아니라?”

“넌 도대체 파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거냐? 그 상냥한 아이를.”

쳉은 만족한 얼굴로 킬로이를 바라보았다. 기쁘게도 킬로이가 드디어 농담을 할 줄 알게 되었구나. 그러나 킬로이의 얼굴에는 농담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짐더미 위에 올라가서 밧줄을 힘차게 잡아당기고 있던 킬로이는 말했다.

“끄으……응. 게으른 녀석들. 밧줄 좀 단단히 매지 못하고. 그러니까 코스네위는 자신을 봐주지 않는 연인을 사로잡을 때 선택하는 꽃이다. 옛날에 사귀던 어떤 여자가 말해 준 건데, 이잇차! 코스네위의 꽃잎에 매달린 이슬 천 개를 모아서 마법의 묘약을 만들 수 있다던데.”

“천 개라고요?”

“그건 파 같은 순진한 아가씨나 좋아할 이야기야. 혼자서 천 개의 이슬을 모으려면…………, 어디 보자, 이슬 한 개를 받는 데 5초씩 걸린다고 계산하면 5000초 정도가 걸리겠군. 대략 한 시간 23분 정도면 다 모을 수 있다는 말인데, 그렇게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

쳉은 그 계산 결과가 정확한지 암산하기 시작했고, 꽤 시간이 흐른 후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요. 한 시간 23분이라…………, 이슬이 먼저 말라버리겠는데요.”

킬로이는 잠시 일손을 멈추고는 짐더미 위에 앉은 채 쳉을 내려다보았다. 침묵의 시간은 만만찮게 길었고 결국 쳉은 짜증을 느꼈다.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거지요, 킬로이?”

킬로이는 턱수염을 쓸어내리면서 말했다.

“응? 아아. 너 정말 감정 결핍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쳉은 별말 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킬로이는 다시 고개를 돌려 매듭을 마저 묶으면서 말했다.

“뭐라고 말은 못하겠다. 자매가 끼인 삼각관계라니. 게다가 남자 녀석이 하필이면 감정 결핍이라 사태가 더 괘씸하군.”

킬로이는 매듭을 단단히 묶고 나서는 수레 위에서 뛰어내렸다. 그러고는 쳉의 어깨를 툭 치면서 지나가듯이 말했다.

“그냥 아무나 골라.”

“고르긴 뭘 골라요?”

킬로이는 쳉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계속 말했다.

“아무나 고른 다음 결혼해. 이유 같은 것 찾을 필요 없어. 네 녀석 같은 감정 결핍증 환자도 살다보면 정 비슷한 거라도 들겠지. 사실 대부분의 부부들도 죽을 만큼 사랑해서 같이 사는 건 아니야. 그냥 사는 거지.”

그리고 킬로이는 그대로 쳉을 지나쳐 보스의 천막 쪽으로 걸어갔다. 쳉은 잠시 제자리에 서서 땅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뭐가 뭔지 모 르겠군. 쳉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들이 묶여 있는 장소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의 말 ‘캐시헌터’의 안장에 숨겨두었던 술병을 꺼내들고 야영지를 둘 러싼 수레 중 하나를 골라 그 위에 올라가 누웠다.

태양이 서쪽 지평선과의 복된 만남을 이룩하는 시간까지, 쳉은 독신주의와 독선주의, 감정 결핍과 삼각관계, 그리고 코스네위와 디도스 활에 대해 고찰해 보았다. 하지만 쳉에게 남은 결과물은 비어버린 술병과 눈에 매달린 눈곱 외엔 없었다.

쳉이 수레 위에 누워 있는 동안 킬로이는 상단의 야영터를 오가며 먼빛으로 그를 관찰하곤 했지만 말을 걸지는 않았다. 다섯 번째인가로 수레를 보 았을 때 그는 쳉의 모습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킬로이는 고개를 돌려 스카니아 마을 쪽을 바라보았고, 스카니아 마을로 들어가는 크고 작은 두 개 의 그림자가 쳉과 캐시헌터일 거라고 생각했다. 킬로이는 아무 말 없이 요리장 쪽으로 걸어가선 상단의 요리사에게 오늘 저녁 식사는 1인분 줄이라 고 지시했다.

쳉은 약간 취한 채 스카니아 마을의 중심 대로를 걸어갔다. 타박, 타박. 대로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캐시헌터의 가벼운 발굽 소리뿐이었다.

스카니아 마을 사람들의 대표적인 직업을 들어보라면, 용사, 마법사, 기사, 프리스트, 트레저 헌터, 괴물 사냥꾼 등의 직업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 는 양치기와 농민과 그의 가족들이다. 그들은 일찌감치 잠자리에 드는 사람들이었으므로 해가 진 후의 마을 대로는 조용한 산책 속에 사색에 잠기길 원하는 이에겐 꽤나 훌륭한 장소였다. 혹 벌거벗고 대로를 걸어보고 싶다는 유니크한 욕망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도 훌륭한 장소라고 말 할 수 있다.

쳉은 양식이 있는지라 벌거벗고 말을 타지는 않았지만, 조용한 밤거리는 그에게도 만족감을 주었다. 지금은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한담을 나누 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하긴 다른 때라면 인사를 건네고 한담을 나누는 일을 좋아하느냐고 물어보면 쳉으로서는 대답할 말이 없을 것이다.)

별은 누군가 방금 만들어 매달아 놓은 것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시야에 땅보다 하늘이 많이 들어오는 장소에서 별은 요괴스러울 만큼 번득이고 있었 다.

쳉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다지 큰 마을은 아니지만, 그래도 스카니아 마을의 반대편 에 있는 미와 파 자매의 집까지는 10분 정도가 걸렸다. 집과 집 사이에 텃밭이나 가축 우리 등이 있는 전형적인 농촌이었기 때문이다.

대로의 끄트머리에서 쳉은 캐시헌터를 멈춰 세우고는 말에서 내렸다. 오른쪽으로는 작은 개울이 통탕거리며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개울 건너 별 들이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언덕 위로 작은 불빛이 일렁거렸다. 대개들 일찌감치 잠드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인지라 환한 불빛은 이채로웠다. 불빛이 새어나오는 창문은 작았고 그 안은 몹시 따스할 것 같다.

쳉은 캐시헌터의 고삐를 쥔 채 첨벙거리며 개울을 건넜다.

발이 물에 젖자 약간 취해서 달아올라 있던 몸의 열기가 식어 내리며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개울을 건넌 쳉은 그대로 물에 젖은 발자국을 남기며 언덕을 올라갔다. 언덕 중간쯤에 다다랐을 때 쳉의 발걸음은 다시 멈췄다.

그의 진로 앞쪽에서 두 개의 불빛이 번득였다. 불빛은 쳉의 얼굴을 똑바로 향한 채 매섭게 빛났고, 캐시헌터는 불안하게 푸르릉거렸다. 캐시헌터의 고삐를 더 단단히 틀어쥔 쳉은 침착하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좋은 밤이지, 아달탄?”

아쉽게도 쳉은 아달탄의 호의를 얻어내는 데 실패했다. 주인의 명령에 따라 금제를 치고 있는 아달탄은 냉정한 시선으로 쳉을 바라볼 뿐 꼼짝도 하 지 않았다. 하지만 쳉이 더 접근하면 아달탄은 경고 없이 공격할 것이다. 그 점에 대해서 쳉은 불평할 수 없다. 아달탄은 개였고, 따라서 말을 할 줄 모르니까.

흔히들 키타나 하운드라 불리는 이 종의 은근성과 그에 잘 어울리는 맹폭성은 유명하다. 원래 키타나의 산야를 떠돌던 들개에서 그 혈통을 찾아볼 수 있는 이 종의 개들은 어떤 공격에도 묵묵히 참으며 끈기 있게 기다릴 줄 안다. 어쩌면 대륙에서 가장 미련스럽게 매를 맞는 종일지도 모른다. 하지 만 기회가 왔다고 판단되면 키타나 하운드는 그 즉시 악마로 돌변한다. 오죽하면 집에서 오래 기른 키타나 하운드는 화렌차의 세 기사를 막아낸다는 식의 전설이 다 있겠는가. 게다가 눈앞의 아달탄은 키타나 하운드 중에서도 괴수에 가까운 녀석이었다.

아달탄의 흉포성에 대해서는 쳉이 잘 안다. 키타나의 투기장에 볼일이 있었던 쳉은 그리폰의 목을 물어뜯고 있던 녀석을 떼어내기 위해서 사내 일곱 명이 매달려야 하는 모습을 보고서 감동했고, 그 흉포성과 야만성이 마음에 들었기에 녀석을 사서 미에게 선물했다. 이 개만도 못한(?) 개를 미에게 선물하는 것은 쳉으로서는 일종의 재미있는 유머인 셈이었고 주위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나 미는 아달탄을 마음에 들어 함으로써 주위 사람들을 두 손 들게 만듦과 동시에 쳉으로 하여금 미소 짓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추억은 쳉으로 하여금 배신감을 느끼게 했다.

“이 자식아. 널 그 사지에서 끄집어내어 네 주인께 데려온 사람이 누구냐? 그런데 네가 나에게 그런 칙칙한 시선을 보낸단 말이야?”

아달탄은 그에 적절한 신체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콧방귀를 뀌지는 않았다. 다만 깨끗한 이를 드러내 보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술에 취한 상태라고 하지만 쳉으로서는 아달탄이 미소를 지어 보인다고 생각하기 힘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뒤로 조금 물러난 쳉은 자존심이 몹시 상 했다.

“좋아, 좋다고. 그럼 미는 안 되겠군. 파나 불러보지. 파! 파!”

쳉은 세 번 부를 생각이었지만 아달탄이 갑자기 몸을 일으키는 바람에 세 번째 외침은 목구멍 어디쯤에서 걸려버렸다. 스르르 일어난 아달탄은 친근 해 보이지는 않는 동작으로 쳉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 눈높이가 자신의 허리에 이른다는 것을 숨 가쁘도록 인지하며 쳉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봐, 이봐. 그 표정 마음에 들지 않아. 좋아 보이지는 않는데, 그날이니?”

아달탄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계속 걸어왔고 쳉은 절망적인 심정으로 가까운 곳에 나무가 돋아나길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쳉의 간절한 기도가 하늘에 닿아 언덕 위에 나무가 돋아나더라도 취한 상태인 쳉이 아달탄의 공격이 개시되기 전에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물론 쳉은 나무만 돋아난다면 얼마든지 그 위로 기어 올라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그러면서도 곧장 캐시헌터에 올라탄 다음 죽어라 도 망치면 된다는 생각은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언덕 위에서 낮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달탄! 아달탄!”

“오, 맙소사. 파! 빨리 좀 오라고! 기대해도 좋아! 지금 나를 주 메뉴로 한 근사한 만찬이 일어날 것 같단 말이야. 너 만찬에 초대되어 본 적 없지? 내 가 주 메뉴의 권한으로 널 초대하지!”

취한 채 횡설수설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쳉은 아달탄의 눈빛을 경계하며 조심스럽게 물러나는 동작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아달탄은 파의 목소리 가 들려오자 곧 그 자리에 멈췄다.

이윽고 언덕 위에서 쳉의 눈을 즐겁게 만드는 근사한 것이 달려내려 오기 시작했다.

쳉은 자신의 위험을 잠시 잊은 채 히죽 웃었다. 파는 탄탄하고 도리암직한 그 몸 위에 셔츠 한 장만 달랑 걸친 모습으로 언덕을 달려내려 오고 있었 던 것이다. 산봉우리 위를 뛰어다닌다는 산과 은닉의 일세인이 저런 모습이 아닐까.

달려내려 온 파는, 쳉의 기대대로, 곧장 아달탄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깨갱!” 참으로 품위 없는 비명을 지르며 아달탄이 뒤로 물러나자 파는 숨을 고르며 그제서야 쳉의 얼굴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후아, 후아. 무슨 일이야? 금제를 치면, 헥, 소란을 피우면 안 된다는 거 몰라? 저 똥개는 언니 말이라면 못할 짓이 없는, 후우우, 미련한 녀석이라 는 건 쳉이 더 잘 알 텐데?”

쳉은 잠시 말을 못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쳉은 간신히 말을 꺼냈다.

“좋은 밤이지?”

파는 어이없는 얼굴로 쳉을 바라보다가 의심스럽게 물어왔다.

“그거 알려주려고 온 거야? 음…………, 그렇네. 좋은 밤이네.”

쳉의 머릿속으로 다시 온갖 말들이 와글거렸다. 하지만 쳉은 이번에도 의연하게 헛소리를 했다.

“나랑 산책하지 않을래?”

파는 한 대 맞은 표정으로 쳉을 바라보았다.

“산책이라고?”

파는 어이가 없었지만 어쨌든 마구간에서 자신의 말 화이트풋을 꺼내왔고, 이번엔 쳉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파는 안장도 올리지 않은 채 그대 로 말에 올라탄 다음 쳉을 물끄러미 바라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물론 그녀의 복장은 언덕을 달려내려 올 때 그대로의 복장, 즉 헐렁한 셔츠와 짧은 속 바지 하나 입은 모습이었다. 도대체 이 자매들의 부모는 어떻게 된 사람들이었을지 궁금하게 여기던 쳉은 파의 재촉하는 시선을 느끼고서야 간신히 캐시헌터에 올라탔다.

파는 언덕 위를 힐끗 바라보고는 말했다.

“흐음. 그렇잖아도 언니가 물그릇 들여다보고 있던 중이라 답답하던 참이었어. 내가 심심해하던 참이라는 거 어떻게 알았어?”

“내가 마법사라는 거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

“물론 다른 사람들이 나를 미친 사람 보듯이 보는 것은 싫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다행이군. 가볼까.”

언덕 위의 아달탄이 물끄러미 바라보는 가운데 쳉과 파는 그대로 개울을 따라 말을 걸렸다. 루미너스는 이미 하늘 중간에 걸려있었고, 동녘 지평선 에서는 셀레나가 밤의 여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사이들랜드 대평원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풀잎들을 올올이 빗어 내리며 흥얼거리고 있었다. 쳉은 파의 복장에 꽤 신경이 쓰여서 자주 그녀를 곁눈질했다. 파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말했다.

“내 다리가 멋있다고 생각해?”

“네 다리가 불쌍하다고 생각해.”

“그래, 그래. 예쁜 말 해줄 리가 없지. 으이그.”

“안 추워?”

“안 추워.”

쳉은 고개를 끄덕였고 대화는 다시 멎었다. 둘은 달빛을 밟으며 가느다란 개울을 따라 계속 갔다. 수면에 어리는 별빛은 말발굽 아래 빛의 카펫인 양 깔려 있었고 환한 밤하늘 아래로 말을 몰아가는 두 남녀의 그림자는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하지만 그런 모든 수식어는 파의 취향이 아니었고 쳉의 취 향은 더더욱 아니었다.

대략 10분쯤 묵묵히 걸어간 후, 파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좋아, 말해 봐. 할 말이 뭐야?”

쳉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아달탄에게 위협당하고 차가운 밤공기 속을 산책하는 동안 술기운은 깨끗이 사라져 있었다. 그래서 쳉은 자신의 맑은 정신이 부담스러웠다.

“아까 낮에 꽃씨 이야기인데…………, 킬로이에게 물어봤어.”

파의 얼굴엔 별다른 변화가 없었지만, 그녀의 손은 손마디가 하얗게 변하도록 고삐를 꽉 쥐었다. 쳉은 앞만 바라보고 있었고 파 역시 그를 돌아보지 는 않았다. 그래서 두 사람은 여전히 앞만 바라본 채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킬로이가 뭐라고 그랬는데?”

“다 말해 줬어.”

“나 웃기지?”

“……조금은.”

“몰라. 나도 내가 그렇게까지 유치해질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

쳉은 호흡을 가다듬은 다음 나직하게 말했다.

“너희 언니를 웃기게 만들었던 이야기를 해볼까?”

“뭔데?”

“나는 독신주의야.”

파는 웃지 않았다. 쳉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거야 당연하지. 쳉은 아무도 좋아하지 않으니까. 그렇게 부지런한 사람이 못 되잖아.”

회청색 공기 속으로 달빛이 소르르 가루져 내리는 밤이었다. 그 암흑 속에 백만 가지 것들이 꿈을 꾸고 있고, 그 달빛 속에 백만 가지 것들이 몸을 뒤 척이고 있었다. 하지만 고요한 밤이었다. 쳉은 자신의 심장 고동 소리까지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왜?”

파는 대답이 없었다. 쳉은 캐시헌터를 제멋대로 걸어가게 내버려둔 채 가만히 파의 대답을 기다렸다. 마침내 화이트풋은 멈춰 섰고, 쳉은 등 뒤로부 터 짙은 습기가 밴 목소리를 들었다.

“마음 가닥을 못 잡겠어.”

쳉은 캐시헌터를 멈추게 하고서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파의 두 눈 가득히 달이 반짝이고 있었다. 또르르.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 속에 도 달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파는 눈물을 닦아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하늘을 바라보며 흐느끼듯 노래 부르듯 말했다.

“다른 사람의 것이라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은 이해해. 하지만 내 것인데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은 가혹해. 왜 그럴까. 내 마음이야. 내 마음을 내가 마음대로 다룰 수 없는 것은 왜 그럴까.”

파는 눈물이 가득 넘쳐흐르는 눈을 들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마구 일그러지고 이상스럽게 보이는 달과 별들. 파는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다시 솟 아난 눈물 때문에 달의 모습은 다시 찌그러져 보였다.

쳉은 묵묵히 파를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득 대평원에 뿌려진 별빛을 모조리 모은들 지금의 파의 눈빛만큼이나 반짝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쳉은 우울했고, 난감했으며, 싫었다. 하지만 입은 열었다.

“넌 내 독신주의를 깨뜨릴 만한 여자가 못 돼, 파. 미안하지만, 네 마음과는 별개로 난 네게서 매력을 못 느껴.”

파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파하하. 그만둬. 무슨 흉내를 내는 거야. 차라리 미움 받는 것이 편하다는 거야? 소설을 너무 읽었나 보네.”

“……여행 동안에는 소일거리가 적거든. 그건 그렇고 잘 안 되네, 쩝.”

“쳉답게 정직해야지. 그래…………, 신경 쓰지 마. 네게 부담주긴 싫어.”

“부담이 오는걸.”

“제길, 그 정도 부담은 참아 넘겨! 나는 가슴이 터질 것 같다고!”

파는 날렵한 동작으로 말에서 뛰어내려서는 곧장 쳉에게 걸어갔다. 쳉이 주춤하는 사이에 파는 캐시헌터의 고삐를 잡아채 재빨리 손목에 감으면서 말했다.

“내려!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마. 나를 질질 끌고 다니고 싶다면 또 모르지만.”

내 마음은 이미 질질 끌고 다니다가 아예 갈가리 찢어놓았지만. 파는 뒷말을 삼켰다. 물론 쳉에게는 파를 매달고 달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쳉은 아무 말 없이 말에서 내렸다. 파는 여전히 한 손은 캐시헌터의 고삐를 감아쥔 채 다른 손으로 땅을 가리키며 말했다.

“거기 앉아.”

쳉은 순순히 풀밭 위에 앉았다. 파는 손에서 고삐를 풀고는 쳉의 맞은편으로 다가서서 허리에 두 손을 얹은 채 쳉을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어쩐지 이상한 구도였다. 땅에 주저앉은 사내와 그 앞에 당당한 자세로 선 옷차림이 부실한 여자. 그리고 주위에서 조용히 들려오는 말의 호흡 소리. 어떻게든 꺼내야만 하는 말이었기에, 파는 밤의 목소리를 빌려 말을 시작했다.

“좋아. 주위에는 아무도 없어. 여기는 대평원이야. 그리고 밤이고. 너와 내가 무슨 말을 나누든, 무슨 짓을 하든 아무도 알 수 없는 곳이라고.”

“어차피 나는 다른 사람에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

“난 신경 쓰이니까 입 닥치고 들어. 정직하게 대답해. 무슨 대답을 하든 나는 죽을 때까지 입 밖에 내지 않을 테니까 걱정 마.”

쳉은 그 말을 완전히 믿을 수 있었다. 파라면 죽고 나서도 입 밖에 내지 않을 것이다. 문득 그 차가운 진실, 인생의 길이 동안 비밀을 지켜내고도 남 을 파의 모습을 보며 쳉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파는 가슴을 크게 부풀렸다가 입술을 깨물면서 말했다.

“언니를 사랑해?” “응.”

파는 자신이 대답을 들은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쳉의 대답은 너무 빨랐고 그 얼굴에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 파가 질문을 했고 쳉이 대답을 했다는 사 실에는 아무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하지만 세상의 어느 누가 이런 질문에 이렇게 빨리, 여상스럽게 대답한다는 말인가. 그래서 파는 정말 바보 같은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정말 사랑하는 거야?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잘못 들었다고 말해 줘.

쳉은 눈을 조금 크게 뜨더니 평온한 목소리로 대답을 되풀이했다.

“잘못 들은 거 아니야. 나는 미를 사랑해.”

듣고 싶지 않았던 대답. 파는 허벅지 위로 나풀거리는 셔츠 자락을 신경질적으로 틀어쥐었다. 꼭 쥐어진 주먹은 밤의 어둠 속에서도 두드러질 만큼 하얗게 변했지만 파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래? 그런 거야? 확실히? 그런데 왜?” 그럴 리가 없어.

“확실해. ‘그런데 왜?” 라니?”

“왜……, 왜 언니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거지?” 왜 내게 희망을 가지게 만든 거지?

“왜 다른 사람들 같지 않으냐는 질문인 것 같군. 그런데, 파, 먼저 좀 앉지 그러니 올려다보며 말하려니 힘들다.”

쳉의 제안은 적절한 시기에 나온 것이었다. 파는 더 이상 서 있을 힘이 없었다. 그래서 파는 거의 주저앉듯이 아무렇게나 앉아버렸다. 쳉은 잠시 근 심스러운 얼굴로 파를 쳐다보았지만 파는 시커먼 땅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숨을 크게 몰아쉬느라 파의 어깨가 들썩였다. 하지만 그녀는 극히 낮은 목소리로 질문했다.

“사랑한다면서……………, 왜 언니와 결혼하지 않아?” 만일 결혼하겠다면 난 자살할 거야.

“파. 나는 네 언니를 사랑해. 하지만 나는 너희 언니와 결혼하지도 않을 것이고 연애하지도 않을 거야.”

“왜?” 사실은 사랑하지 않는 거지?

“내가 사랑하는 네 언니 옆에 쳉이라는 녀석이 붙어 있는 꼴은 못 봐줄 것 같아.”

파는 고개를 들어 쳉의 얼굴을 살폈다. 하지만 파는 쳉의 얼굴에서 그녀가 찾던 표정은 찾지 못했다. 쳉은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뭐야, 자학이라는 거야?” 웃기지마, 이 개자식아.

쳉은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파는 몸이 딱딱하게 굳어오는 것을 느꼈다. 과연 남자들은 알까? 여자에게 짓는 아첨의 미소보다 자신의 내면을 향한 슬픈 미소가 더 여자를 굳어버리게 만든다는 것을. 쳉은 슬프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자학을 할 정도로 부지런한 사람이 못 돼.”

파는 쳉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파의 시선을 받던 쳉은 잠시 후 거북함을 느꼈고, 그래서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파는 아 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런 쳉의 옆얼굴만을 노려보았다.

쳉은 별빛을 바라보며 파에게 말했다.

“미안하다고 말해야 될까………. 그런 말이 듣고 싶니.”

“그따위 말 하면 죽여버리겠어.”

그럴 줄 알았지. 쳉은 마음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파는 갑작스레 추위를 느끼는 것처럼 무릎을 끌어안았다. 모아 감싼 무릎 위에 이마를 떨군 파는 조용히 흐느끼기 시작했다.

“파?”

쳉은 당황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 순간 젖은 목소리가 뾰족하게 들려왔다.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마!”

쳉은 파의 말을 무시했다. 세상의 모든 남자들 가운데 쳉만이 그렇게 할 수 있는 동작으로, 쳉은 천천히 파에게 다가갔다. 파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다시 한번 비명처럼 외쳤다.

“가까이 오지 마, 오지 말라고! 이 개자식아, 오지 말라고 한 말 못 들었어?”

쳉은 파의 앞쪽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무슨 말을 꺼낼까 생각하던 쳉은, 말을 하는 대신 조용히 오른손을 뻗었다.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파는 쳉의 손가락이 왼쪽 귓불에 닿는 순간 진저리를 쳤다. 꽈악 오므라든 발가락과 귓불 중 어디에 신경을 써야 될지 갈 등을 느끼면서, 파는 동시에 이대로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것인지 몸을 일으켜 쳉의 따귀를 올려붙일 것인지에 대해서도 갈등했다.

그러나 쳉의 손길은 무참했다. 파의 조그마한 귓바퀴를 천천히 쓰다듬는 쳉의 손길은 부드러운 만큼 단호했고 느린 만큼 집요했다. 쳉은 귓바퀴의 복잡한 굴곡을 모조리 감지하려는 듯이 파의 귀를 쓸어내렸다. 마지막으로 파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긴 쳉은 메마르게 말했다.

“눈을 보여줘, 파.”

파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하지만 턱 선을 따라 움직인 쳉의 손길이 마침내 파의 턱을 부드럽게 들어올렸을 때까지도 파는 어떤 저항도 하지 않았다. 쳉은 꽉 감겨진 파의 눈꺼풀을 바라보았다. 눈물 어린 파의 속눈썹이 미세한 반짝임으로 쳉의 시선을 어지럽혔다. 파는 눈을 꼭 감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넌 나쁜 놈이야…………, 나쁜 놈이라고…………….”

파의 어깨가 크게 오르락내리락했다. 쳉은 여전히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눈을 뜨고 나를 봐, 파.”

“싫어. 이 개새꺄. 안 봐. 안 볼 거라고. 보면서도 보지 않는 눈 따위…………, 내가 왜? 싫어.”

쳉은 한참 동안 뚫어지게 파의 눈꺼풀을 내려다보았다. 파의 눈꺼풀은 극도로 떨리고 있었지만, 그러나 쳉을 향해 열려 그 눈동자를 보여주지는 않 았다. 쳉은 한숨을 내쉬며 파의 턱에 닿았던 손을 천천히 끌어당겼다.

쳉이 일어서는 순간, 파는 재빨리 손을 뻗어 쳉의 손아귀를 낚아채었다. 쳉은 의아해하며 파의 얼굴을 쳐다보았지만 파의 눈은 여전히 감겨 있었다. 파는 그대로 뒤틀려 버리지나 않을까 걱정될 만큼 떨리는 입술을 힘들게 열었다. 그녀의 혀가 재빨리 입술을 적시는 모습을 보면서 쳉은 호흡을 낮추 었다. 파는 말했다.

“마음을 두 개로 나눠줘.”

쳉은 아무 말 없이 파를 내려다보았다. 다시 한번 숨 막히는 정적이 지난 후, 파의 입에서 잔뜩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중 하나만…………, 하나만…….”

쳉은 이를 악물었다. 자신의 입 속에서 들려오는 불길한 소리에 씁쓸해하며, 쳉은 가장 명확하게 말하려 애쓰면서 말했다.

“나는 누군가를 위해 나눌 수 있을 만큼의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아.”

“있어, 분명히 있어!”

“만약 내게 나눌 만큼의 마음이 있었다면.” 쳉은 짙은 한숨을 내쉬지도 않았고 하늘을 한번 바라보지도 않았으며 목소리를 떨지도 않았다. 그냥 말 했다. “그건 미에게 가 있겠지. 더 이상은 없어.”

말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쳉은 몸을 일으켰다. 파의 손이 힘없이 풀리면서 쳉의 손을 놓쳤다. 그리고 쳉은 그대로 캐시헌터를 향해 걸어갔다. 쳉이 안장에 올라앉을 때까지, 파는 떨어뜨린 손을 그대로 내버려둔 채 꼭 감은 눈으로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쳉은 캐시헌터를 출발시켰다.

말의 푸르릉거리는 소리가 들려올 때 파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러나 파는 눈을 뜨지 않았다. 쳉은 돌아보지 않고 걸어갔다. 캐시헌터의 발굽 소리가 멀어졌을 때, 꼭 감긴 파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주저앉은 파와 그녀의 말 화이트풋만이 대평원에 가장 작은 점들이 되어 남겨졌다.

대평원의 바람은 파에게서 받은 화물에 당황했다. 파가 대평원의 바람에게 준 것은 지금껏 한 번도 실어 나르지 못했던 목소리였다.

“아…………, 아으아…………, 으으”

가장 야비한 폭력을 당한 가장 가녀린 짐승의 목소리로 파는 말했다. 그러고도 파의 입술이 몇 번이나 더 움찔거렸지만, 제대로 된 말이 만들어지지 는 않았다. 파는 목구멍 속으로 절규했다. 그러나 제멋대로 움직이는 이와 입술은 마치 다른 사람의 몸처럼 느껴졌다. 하늘을 향해 수없이 달싹거리 던 입술이 마침내 열렸을 때, 파는 목을 놓아 울부짖었다.

“죽여 버릴 거야! 미! 반드시 죽일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