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 워커 1권 – 1장 사라진 시인의 추모곡 3화
3
운차이는 투덜거렸다.
“녀석이 그리운데.”
“녀석이라니?”
“네가 만들어준 팬케이크를 씹어야 하는 고통 속에서 내가 떠올릴 인물이 누굴 것 같은가?”
“먹기 싫으면 관둬!”
네리아는 즉시 팬케이크를 치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운차이의 접시를 치우고 나서 그란의 접시에 손을 뻗던 네리아는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콰악! 그란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맹렬한 동작으로 나이프를 접시에 꽂아버렸다. 아달탄은 고개를 휙 돌렸다.
나이프는 팬케이크와 양철 접시를 한숨에 관통하여 땅에까지 박혀버렸다. 미는 기겁했고 아달탄은 낮게 으르렁거렸으며 네리아는 어이없는 얼굴로 그란을 바라보았지만 그란은 그 초췌한 얼굴을 들어올려 네리아에게 말했다.
“……세 끼 만에 먹는 거다. 제발 부부 싸움은 다른 데 가서 해라.”
미는 운차이가 고개를 돌린 순간 틀림없이 바람이 일어났다고 확신했다. 운차이는 그런 무서운 기세로 고개를 돌려 그란을 쏘아보다가 말했다. “부부 싸움이 성립되려면 남편과 아내가 있어야 한다. 최소한 내 고향에서는 그랬지.”
그란은 나이프를 뽑으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야.”
“그렇다면 부부 싸움은 불가능하다. 무슨 억하심정으로 내 미래를 파멸시키려는 거냐.”
“나는 따사로운 식사 풍토를 조성하려는 것뿐이다. 식사 때마다 네 녀석 불평하는 소리 더 못 듣겠다. 비록 이게 인간이 먹기엔 많은 난점이 있는 음 식이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잠깐. ‘음식’이라고? 음식의 개념을 확대 해석하겠다는 말이지?”
“응.”
결국 네리아는 더 못 참게 되어버렸다.
“야이, 망할 자식들아앗!”
대개의 경우 사람은 주는 대로 받아서 군말 없이 먹어야 요리사의 사랑을 받는 법이다. 네리아는 바이서스 어를 모른다는 이유만으로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식사중인 미와, 어차피 인간들의 말을 하나도 모른다는 이유로 역시 식사에만 전념하는 아달탄을 몹시 기특하게 여겨 미와 아달탄의 그릇에 팔뚝만 한 고깃덩이를 넣어주었다. 영문을 모르는 미는 그저 감사의 미소를 보냈지만 운차이와 그란은 분통을 터뜨렸다. 하지만 네리아는 살벌한 눈 길로 말했다.
“당신들, 밤에는 잠을 자고 싶지?”
운차이와 그란은 의심스러운 눈길로 네리아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났을 때 바지가 팽팽하지 않으면 서글프겠지?”
떨떠름한 끄덕끄덕.
“다시 한번 입을 놀리면 뭔가 허전한 듯한 아침을 맞이하게 될 거야. 어서 먹어!”
힘찬 와구와구.
무척 살벌한 내용의 말들이 오갔음을 전혀 알지 못했던 미는 조용한 식사 분위기가 연출되자 평온함을 느꼈다. 식사가 끝나고서 그란은 시체에서 수 거한 소지품들을 조사하기 시작했고, 운차이는 태평하게 하늘을 바라보며 드러누우려다가 네리아에게 구박을 받으며(“네가 헤게모니아 어를 잘하잖아! 뭐 라고 설명해 줘. 얼마나 놀라고 궁금하겠어?”) 마지못한 듯 일어나 앉았다.
운차이는 먼저 찌푸린 눈으로 바라봄으로써 미를 당황하게 만들며 동시에 아달탄의 눈꼬리가 올라가게 만든 다음, 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음. 미라고 했소? 먼저 우리들은 산적이나 강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 주고 싶소.”
미는 그만 웃고 말았다. 이 넓은 대평원에서 산적질을 하려면 인내심이 대단해야 될 것이다. 8만 제곱펜큐빗의 넓이를 돌아다니며 고객을 찾아야 되 니까.
“물론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사이들랜드에서 산적이나 강도라니. 그러면?”
“죽은 남자는 바이서스의 배신자들 중 하나요.”
“배신자요?”
“그렇소. 바이서스에서 반역을 꾀하던 녀석들 중 하나인데 이 나라로 도망쳐 왔지. 그래서 우리들도 이 나라까지 추적해 온 거요. 저기 저 친구가 체 포하려고 했지만 반항하는 바람에 죽일 수밖에 없었다더군. 나는 보지 못했지만 당신은 보았을 테니 잘 알겠지?”
“아아, 예. 그러시군요.”
“놀라게 한 것 사과하지. 목적지가 어떻게 되오? 다리를 다쳤으니 사과의 의미로 데려다주겠소.”
미는 불안했다. 하지만 사이들랜드의 스카니아 마을, 양떼들의 천국에서 자라난 미의 소박하다면 소박하달 수 있는 의식 세계에서 ‘반역자’는 죽어 마땅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공포의 감정은 그렇게 짙지 않았다. 반역자는 죽어 마땅한 자라는 미의 관점을 계속 확장시키자면 그런 자를 죽인 이 일행 은 믿어 마땅한 사람들이었다. 결국 미는 마음을 굳혔다.
“미는 북해 쪽으로 가는데요.”
“뭐요?”
운차이는 마치 화를 내듯이 놀람을 표시했기 때문에 미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란과 네리아도 놀란 눈초리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 다. 운차이는 조금 후에야 어이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말이오? 당신, 북해로 간다고?”
“예.”
“얼어 있거나 아니면 얼고 있는 중인 물 중에서 어느 쪽에 관심이 있는 거요? 그 어느 쪽도 내게는 흥미롭게 들리지 않는데. 게다가 북해에 그 두 가 지 외에 다른 것이 있다고는 더 더욱 믿어지지 않고.”
“미에겐 관심 가질 만한 게 있어요.”
운차이는 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이유는 둘째 치고, 먼저 가능성의 문제를 따져보지. 여기가 아무리 사이들랜드라지만 북해까지 가다니. 도대체 여정을 얼마로 잡은 거요?” “여정? ‘도착할 때까지’로 잡았지요.”
운차이는 이제 기막힌 얼굴로 미를 바라보았다. 이곳은 사이들랜드. 인간이 사는 곳으로는 대륙 최북단에 해당하는 곳이며, 따라서 북해에 가장 가 까운 인간 거주지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동쪽이나 서쪽이라면 몰라도 북쪽으로 여행할 경우 다시는 인간들의 마을을 만날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이봐요, 당신. 여기서 북해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아시오? 그 거리를 걸어간다고?”
미는 방긋 웃었다.
“물론 북해까지 걸어갈 생각은 아니에요. 그러려면 산더미 같은 음식을 가지고 가야 될 텐데요. 미는 탄느완으로 가서 배를 타고 갈 생각이에요.” 운차이의 경악은 가라앉았지만 짜증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당신은 아마 당신 말이 합리적으로 들릴 거라고 믿는 모양이지만, 내게는 전혀 합리적으로 들리지 않아.”
“예?”
“탄느완은 얼마나 되는지 아시오? 동쪽으로 100펜큐빗은 될 거요. 걸어서 가려면 한 달은 걸려. 그것도 지치지 않고 쉼 없이 매일 3, 4펜큐빗 정도 걸을 수 있다고 볼 때 말이오.”
“미는 걷는 것에는 자신이 있어요. 차넬의 후예니까요. 아달탄도 마찬가지고요.”
운차이는 콧방귀를 뀌었다.
“아아, 그러시오? 더욱 불가능하오.”
“예?”
“바이서스의 목동이나 자이펀의 캐러밴이라면 그 거리를 걸어갈 수도 있겠지. 하지만 헤게모니아의 양치기라면 절대 불가능하오. 왜냐고 물어보시 오.”
“왜 그런데요.”
“사이들랜드를 벗어나자마자 몬스터들이 나타날 거요. 자이펀의 캐러밴은 제자리에 서 있으면 피로를 느끼는 사람들이오. 그리고 바이서스의 목동 들은 원래 몬스터와 함께 뒹구는 자들이고. 하지만 사이들랜드의 양치기는 도대체 언제 몬스터를 구경해 봤겠소?”
“예. 미는 한 번도 몬스터를 본 적이 없어요.”
“사이들랜드의 대평원이 정말 신비한 장소라는 점은 인정하오. 대륙에서 몬스터가 나타나지 않는 장소는 드물지.”
미는 조금 시간이 걸려서야 간신히 바이서스의 명소 하나를 떠올릴 수 있었다.
“바이서스의 레브네인 호수도 몬스터가 나타나지 않는 장소라고 아는데요?”
“그리고 자이펀의 실칸 계곡도 있소. 어쨌든 이 땅이 신비하다지만 그 땅의 양치기나 번견까지 신비하지는 않을 거요. 그런데, 그 개가 정말 번견이 오?”
“예? 그런데요?”
운차이는 잠시 신음을 흘렸다.
“헤게모니아의 양은 완전한 괴물인 모양이군. 어쨌든 당신은 절대 탄느완까지 갈 수 없소.”
“그래도 가야 해요. 미와 아달탄은 갈 거예요.”
운차이는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미는 문득 앞의 남자를 만난 것이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그 동안 미소를 짓거나 웃는 표정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는 것을 깨달았다. 운차이는 그 날카로운 시선으로 미의 얼굴 뒤에 숨겨진 것을 헤아려보는 듯했다. 이윽고 운차이는 차분하게 말했다.
“난 당신을 강제할 권한은 없소. 외국인의 말을 듣는 것은 어리석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당신이 탄느완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다면 네리아의 요리 솜씨가 나아지거나 오크에게서 감미로운 애정시를 들을 수 있다고 해도 난 놀라지 않겠소.”
농담을 할 때도 웃지 않네. 미는 네리아 쪽을 바라보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운차이는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우리끼리 잠시 의논 좀 하겠소. 실례.”
미는 고개를 끄덕이려고 했으나 운차이는 말을 끝내자마자 몸을 돌려버렸다. 그래서 미는 잠시 당황한 채 세 사람의 대화를 바라보았다. 알아듣지 못하는 대화를 듣고 있어야 하는 것은 참 따분하고 재미없는 상황이라는 생각을 떠올리며.
운차이는 먼저 남자의 소지품을 조사하던 그란에게 말했다.
“뭐 좀 나왔나?”
“아니. 이틀 동안 요리조리 도망친 것, 아무래도 속임수였던 것 같다.”
“속임수?”
네리아는 얼떨떨한 얼굴로 질문했다. 그란은 죽은 남자의 소지품들을 바라보면서 분통을 터뜨렸다.
“이 녀석은 미끼야!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아. 편지, 서류, 뭔가 후작의 위치를 짐작해 볼 것은 아무것도 없어. 아마 이 녀석이 디코이로 우리들을 따돌리는 동안 다른 밀사가 출발했나 봐. 젠장! 어쩐지 방향도 없이 이리저리 달리더라니.”
네리아는 낙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우웅……, 후작 아저씨는 늙지도 않나 봐. 어떻게 계속 영리해지지?”
운차이는 쌀쌀맞은 눈으로 땅을 쏘아보다가 말했다.
“그럼 우리가 따라붙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군. 또 석 달 정도는 꼼짝도 하지 않겠지?”
네리아는 한탄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응. 이게 석 달 만에 움직인 거니까……………. 도대체 어디서 자금을 대고 있는 걸까? 도망중인 사람이 자기 끼니뿐만 아니라 그 많은 부하들까지 먹여 가며 데리고 있을 수 있나?”
운차이는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우리 고향엔 거상(巨商)은 망해도 3년은 간다는 말이 있다. 후작이 비록 부리나케 도망쳤다지만 도피 자금에 부족을 느끼려면 아직 멀었을 거다.” 그란은 무거운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미 쪽을 흘긋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데, 저 여자는? 겉모습으로 봐선 여행자인 것 같은데. 칼도 제대로 쓸 줄 모르는 여자 혼자 여행이라니 좀 이상하군. 게다가 말도 없이 걸어가 고 있었어. 물론 저 키타나 하운드라면 웬만한 위험은 다 물리치겠지만.”
“여행자 맞아. 말도 안 되는 여행을 한다는 점이 문제지만.”
“말이 안 되다니?”
“북해로 간다는군.”
네리아와 그란이 동시에, 그러나 목소리의 높낮이는 정반대로 외쳤다.
“뭐야?”
그란은 그 이상 자신의 감정을 드러낼 필요를 느끼지는 못했지만 네리아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과장되게 지으며 계속 말했다.
“잠깐 잠깐만. 북해에 가서 뭐할 건데? 아무것도 없는 곳이잖아?”
“대답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더군.”
“물어봤어야지.”
“젠장. 난 여자에게 이것저것 묻는 것이 싫어. 이미 잊었는지 모르지만 난 자이펀 인이란 말이다.”
“나한테는 말 잘하잖아?”
“여자에게 말하는 것이 싫다고 했어.”
운차이는 말을 마치자마자 뒤로 스르르 움직이며 네리아의 주먹을 피했다. 허공을 치고 만 네리아는 균형을 잡기 위해 깡총깡총 뛰기 시작했고, 그 런 네리아를 보면서 그란은 낮게 중얼거렸다.
“그럼, 그 빙하와 눈보라를 뚫고 걸어갈 생각이란 말인가? 죽겠다는 말이잖아.”
“아니. 탄느완으로 가서 배를 타고 가겠다더군. 저 여자는 완전히 돌았나 봐.”
“그래? 탄느완이라……………. 그럼 같이 가면 되겠군.”
“뭐?”
“어차피 우리도 남쪽으로 다시 내려가야 하는데…………. 올라올 때는 서쪽으로 올라왔지만 별 소득이 없었지, 오히려 후작에게 희롱만 당했고. 그러니 이번에는 동쪽으로 해서 해안선을 따라 조사해 보고 싶은데.”
운차이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네리아는 갑자기 미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영문을 모르던 미는 약간 멍한 미소 외엔 다른 표정을 짓지 못했다. 미를 바 라보던 네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시 그란을 바라보았다.
“친절하네? 딸 생각나는 거야?”
그란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네리아를 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이없군. 저런 말만 한 처녀를 보고? 쓸데없는 소리 마. 저 여자, 기어코 탄느완으로 가겠다면 우리와 같이 가는 게 낫겠지. 내버려두면 사이들랜 드를 벗어나자마자 어느 몬스터가 잡아갔는지도 모르게 죽을 텐데.”
운차이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여자가 끼는 건 싫은데.”
“너 자꾸 나 무시할래? 나도 여자라고!”
네리아가 고함을 빽 지르자 운차이는 별로 놀라지 않았지만 미는 상당한 불안감이 담긴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만일 저 이상한 사람들 이 동행하자고 제의하면 어쩌지? 그 때 손을 휘저어 네리아의 어퍼컷을 쳐낸 운차이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던 그란이 태평한 표정으로 미에게 말했다.
“미, 동행의 제안이 당신을 향하는데?”
미는 여행에 들어선 이후로 두 번째 맞이하는 위기에 난감했다.
쳉은 차분하게 말하자고 마음먹었다. 마음만 그렇게 먹었다는 말이다.
“뭐야! 그게 무슨 소리야!”
파는 귀가 떨어져나가지 않았는지 의심했다. 양쪽 귀를 꽉 틀어막은 채 쳉을 올려다보며 눈물을 글썽이는 파의 모습에 쳉은 이번에는 차분하게 말할 정도의 냉정을 되찾았다.
“어, 소리 질러서 미안해. 그런데 그게 무슨 말이야? 떠나다니?”
파는 귀를 틀어막았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그러나 허리춤으로 내려간 그녀의 두 손은 곧 단단히 감아쥐어졌다. 파는 주먹을 불끈 쥔 채 쳉을 독살스 럽게 노려보았다.
“바보야! 바보 쳉아! 왜 언니를 가게 내버려둔 거야, 엉!”
미가 떠나고 나서 열 시간이 넘도록 연습한 대사였기 때문에 파의 말은 매우 매끄럽게 흘러나왔다. 쳉은 귀를 틀어막지는 않았지만 대신 눈을 크게 끔뻑거렸다.
“무슨 말이야?”
“언니를 붙잡았어야지! 언니는 쳉이 떠나고 나자 곧 출발을 결심했어. 왜 그랬겠어? 말해 보라고, 말해 봐!”
“무슨……. 무슨 말이야, 도대체?”
“쳉이 언니를 잡아주길 원했던 거야!”
“잡아줘?”
“이 빌어먹을 감정 결핍증 환자 녀석아, 그걸 몰라? 언니는 쳉이 떠나고 나자마자 떠났단 말이야! 그러니까 쳉에게 마지막으로 매달렸던 거라고! 제 길, 내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떠났어. 왜 그걸 모르냐고!”
쳉은 잠시 혼란을 느꼈다. 그럼 그 웃기는 구애가 자기를 붙잡아 달라는 의미였나? 젠장! 바보 같으니. 자기 걸음은 자기가 결정하는 거야. 쳉은 머 리를 절레절레 흔들고 나서 고개를 돌려 주위를 바라보았다.
미의 흔적은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다. 미가 미래를 볼 때 사용하던 넓은 대야도 방 한구석의 삼발이 위에 그대로 놓여 있었고, 쳉이 선물한 대륙 각 지의 토산품들도 벽의 자기 자리에 그대로 걸려 있었다. 하다못해 옷걸이에는 미의 옷가지들까지 그대로 걸려 있었다. 미는 아무런 정리도 하지 않고 떠났다. 그래서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이웃으로 놀러갔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쳉은 생각했다. 미라면 그러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밤중에 일어나 잠옷 바람으로 대륙 종단 여행을 출발할 수도 있을 거라고. 미는 뒤에 남는 것들에 관심이 없다.
남은 것들은 그 용도가 미래에 나타난다. 그러나 미는 미래를 미리 본다.
그녀는 원한다면 자신이 죽고 나서 자신을 회상하는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미리 볼 수도 있다.
쳉은 다시 파를 바라보며 빠르게 말했다.
“어느 쪽으로 갔어?”
의자에 앉아서 쳉을 쏘아보고 있던 파는 잠시 후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했을 것 같아?”
“뭔가 들은 것 없어? 지나가는 말에 언급한 거라든지, 그런 것 없냐고?”
“없어! 아무것도!”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쳉은 제자리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건장한 체구의 쳉이 왔다 갔다 하자 미와 파 두 자매만 살기 때문에 그렇게 크지 않은 집이 꽤나 비좁게 느껴졌다. 파는 서글픈 눈으로 테이블을 바라볼 뿐 쳉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쳉은 느닷없이 외쳤다.
“디도스 활!”
파는 얼떨떨한 눈초리로 쳉을 바라보았다. 쳉은 손가락을 딱 튕기며 말했다.
“됐다, 됐어. 파, 며칠만 기다려. 네 언니를 붙잡아 올 테니까.”
쳉은 그 말만 남기고서 곧장 문을 향해 달려갈 태세였다. 파는 다급하게 일어나며 말했다.
“잠깐, 잠깐만!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해할 수 있게 말하고 가라고!”
“젠장, 급한데! 다녀와서 들으면 되잖아?”
파는 순간적으로 쳉을 후려쳐 기절시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이…………, 감정 결핍증아. 남겨진 사람도 좀 생각해야 할 거 아냐? 불안해서 어떻게 견디라는 거야?”
“후우, 좋아, 좋다고. 엊그제 헤어질 때 미는 디도스 활을 사달라고 말했어. 만일 네 말대로 내가 자기를 붙잡아 주길 원했다면, 미는 틀림없이 자기 행선지를 말했겠지? 디도스 쪽이야. 틀림없어.”
파는 입을 쩍 벌리지는 않았다. 대신 빠르게 말했다.
“반대쪽이야.”
“뭐?”
“디도스의 반대쪽이라고, 얼간아! 도대체 12년 동안이나 언니를 봐왔으면서……쳇. 디도스의 반대쪽이면 아마 고스빌 쪽이겠네. 됐어, 따라와.”
쳉은 당황해서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파는 이미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곧장 옷장을 열어젖힌 파는 옷장 가장 안쪽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쳉도 알 고 있는 상자로 자매의 생활비 전부가 들어 있는 금고였다. 테이블 위에 상자를 놓은 파는 그 옆에 손수건을 펼치고는 상자를 뒤집어 손수건 위에 내 용물을 쏟아놓았다. 짤그랑짤랑. 요란한 소리가 나며 금화들이 다 쏟아지자 파는 상자를 방구석으로 집어던져 버리고는 손수건을 대충 묶어서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놀란 쳉이 간신히 말을 꺼낼 때쯤 되었을 때는 이미 파는 문을 나서는 중이었다. 황급히 그녀의 뒤를 따라 집을 나온 쳉은 마 구간 쪽으로 향하는 파를 볼 수 있었다.
“어, 어? 어디 가는 거야?”
파는 대답 없이 마구간에서 화이트풋을 끌어내었다. 안장을 올리는 파를 향해 쳉은 다급하게 질문했다.
“잠깐, 설명 좀 해봐. 반대쪽이라니?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파는 쳉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반대쪽이야. 언니는 미련을 남기지 않는 성격이야. 헤어질 때 말했다면 반대로 말했으면 말했지 사실대로 말하지는 않았을 거야. 왜 그걸 몰라?”
쳉은 고개를 끄덕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네 말마따나 감정 결핍이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내 병에 대해 알고 있는 거지?”
파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안장을 단단히 매면서 생각했다. 언니라면 틀림없이 반대로 말했을 거야. 틀림없어. 반대로 말했을 거야. 반대로… 그러니까 나는 ‘쳉과 함께 반대 방향으로 가는 거야.
소스라치게 놀란 파는 고삐를 떨어뜨렸다.
화이트풋이 고개를 흔들며 푸르릉거렸지만 파는 깨닫지 못했다. 파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되뇌었다. ‘쳉과 함께’ 반대 방향 으로 가는 거야. 만일 언니가 디도스 방향으로 갔다면? 쳉과 함께 ‘반대 방향으로 가는 거야. 언니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쳉을 안타깝게 부른 거라 면? 나와 쳉 단둘이서 디도스가 아닌 고스빌 방향으로………….
“왜 그래?”
파는 쳉의 목소리에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그녀는 충분히 느릿한 동작으로 화이트풋의 고삐를 마저 채우고 나서는 고개를 돌렸다.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쳉을 향해 파는 또박또박 말했다.
“아, 아냐. 고삐에 가시가 있었어. 괜찮아. 빨리 가야지.”
쳉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는 캐시헌터 쪽으로 걸어가다가 확인하는 것처럼 말했다.
“너도 가는 거지?”
너도 간다면, 확실히 미는 반대쪽으로 간 거지? 함께 가면서 나를 속일 리는 없는 거지? 파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러고는 쳉의 얼굴을 똑바로 쳐 다보며 말했다.
“응. 언니를 만나고 싶어.”
잠시 후, 쳉과 파는 말머리를 나란히 한 채 스카니아 마을의 외곽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미는 결국 이상한 바이서스 인들과의 동행을 기쁜 마음으로 승낙했다. 바이서스 인들은 자신들에게는 필요가 없는 말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녀에게 죽은 사내의 말을 주기로 했고, 그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다. 게다가 탄느완으로 가는 길이니 같이 가자는 제안은 사실 퍽 반가운 것이었다.
미는 말에게 이름을 붙이려다가 운차이에게 그의 말 이름을 물어보았다. 운차이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내 말? 앰뷸런트 제일이오.”
“예? 앰뷸런트 제일…………? 미에게는 이상하게 들리네요. 말 이름이 왜 그렇죠?”
“부른다고 알아듣는 것도 아닌데 아무러면 어떻소.”
“그래도 이왕이면 예쁜 이름이 좋잖아요.”
“당신 말의 이름이나 예쁘게 정하면 될 거 아니오.”
미는 운차이의 냉랭한 대답에 얼굴을 굳혔다. 그러나 미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주의 깊게 보고 있던 네리아가 먼저 고함을 질렀다.
“운차이! 너 무슨 표독한 말 했지?”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 거야?”
“미의 얼굴이 굳어졌잖아. 헤게모니아 말 모른다고 나 속일 생각하지 마! 얼굴만 보면 다 알아. 그리고 그란도 헤게모니아 말 할 줄 아니까 물어보면 돼. 그란! 운차이가 뭐라고 했어.”
조금 떨어진 곳에서 우울하게 하늘을 쏘아보고 있던 그란은 서툰 실력이나마 천천히 그 대화를 바이서스 어로 번역해서 반복해 주었고, 그러자 네리 아는 그럴 줄 알았다는 식의 시선으로 운차이를 쏘아보았다. 운차이는 얼굴 근육의 신축성을 최대한 강조하면서 말했다.
“젠장, 내 말투 원래 그런 거 잘 알잖아. 게다가 나는 여자랑 이야기하는 거 싫어. 답답하면 네가 말하든가.”
“뭐야? 내가 끝끝내 헤게모니아 말 못 배울 것 같아? 배우면 어쩔래, 어쩔래!”
운차이와 네리아가 다시 아옹다옹하는 것을 바라보던 그란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미에게 말했다.
“저 아옹다옹하는 둘은 사랑하는 사실이다.”
“예? 아아, 저, 아옹다옹하지만 사실은 사랑하는 사이라고요?”
“음. 음. 그렇다. 그런데 저 개의 주력이 말의 주력과 동일을 이룬다는 말에 대해 확신을 내게 주겠나.”
“그러니까…………, 음. 저 개가 말을 따라서 뛸 수 있느냐는 말씀이죠? 예. 말을 앞질러 달려갈 수도 있어요.”
“놀랍군. 그건 그렇고, 어, 음. 시간을 소모하는 작명은 길도록 부적합하다.”
“그러니까, 말 이름을 짓는데 시간이 많이 걸릴 필요는 없다는 말씀이죠?”
미는 그란의 말을 일일이 되잡아 주었고 그란은 그럴 시간이 있으면 빨리 말 이름이나 지은 다음 출발하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말을 헤게모니아 어로 똑똑하게 전달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간단하게 말했다.
“말 이름?”
“새까만 색이니까 레이븐.”
그란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미는 손을 들어 그란의 말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말의 이름은 뭐예요?”
“……어벤저. 출발에 도달한다.”
헤게모니아 어가 서툴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어쩐지 꽤나 형이상학적으로 들리는 말을 해버린 다음, 그란은 아옹다옹하는 두 사람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달려가기 시작했다. 미는 당황했지만 운차이와 네리아가 서로 말싸움을 주고받으면서도 그란의 뒤를 따라 달리는 것을 보고는 감탄할 수밖 에 없었다. 그 둘은 앞을 보는 대신 서로를 노려보며 악다구니를 쓰며 달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