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 워커 1권 – 1장 사라진 시인의 추모곡 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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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처 워커 1권 – 1장 사라진 시인의 추모곡 4화


4

네 마리의 말과 네 명의 기수, 그리고 한 마리의 번견은 사이들랜드의 초원을 달려갔다.

사이들랜드의 대평원은 말들에겐 축복이고 기수에겐 악몽이다. 자신의 다리로 달려야 되는 말은 그 광막함을 사랑하지만 자기 다리로 달릴 필요가 없는 기수는 그 광막함에 기가 죽어버린다. 시야를 뚜렷이 가로지르는 지평선은 극히 맑고 차가운 공기 때문에 극명하게 보여서 현실성이 없다. 마치 그 너머로 넘어가면 땅이 뚝 잘리고 낭떠러지가 나타날 것 같은 모습. 구름은 지평선에서 피어올라 하늘에 닿기 위해 갖은 애를 쓰고 있었고, 하늘 은………… 새나 물고기와 달리 그 두 눈이 얼굴 앞쪽에 몰려 있는 인간에겐 사이들랜드의 하늘은 너무 넓다.

결국 네리아는 질려버린 채 미에게 말을 걸었다.

“너무 넓어. 그치?”

어깨 너머로 주워들은 실력이기 때문에 네리아의 헤게모니아 어는 단조로웠다.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사이들랜드의 광막함을 잘 표현하고 있었다. 미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예민한 사람에겐 위험한 곳이지요. 파하스는 아직도 이곳을 떠돌고 있어요.”

네리아는 무슨 말인지 몰라서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하늘에 짓눌리고 대지에 갈피를 잃은 정신 속을 떠돌던 네리아는 한참 후에 말을 꺼내었 다.

“정말 잘 뛰네.”

네리아의 손을 보고서 미는 그게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었다. 아달탄은 말들과 함께 뛰어야 한다는 독특한 상황을 자신에게 익숙한 상황으로 바꿔버 렸다. 아달탄은 무리 없이 말들을 덩치가 약간 큰 양 정도로 판단해 버렸고, 마치 양떼를 몰아대듯이 말을 쫓아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좀더 인상적인 것은, 말들 역시 자신들이 약간 큰 양인 것처럼 믿어버리고는 아달탄에게 쫓기듯이 달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기수들은 미소를 지었고 미는 고개를 끄 덕이며 말했다.

“키타나 하운드고, 사이들랜드의 번견이니까요.”

“그래? 음. 그런데 북해 가?”

“예.”

“왜 가?”

“가야 하니까.”

네리아는 단념하고는 운차이를 불러대었다. “운차이! 이리 와봐!” 운차이는 뭐라고 혼자말로 구시렁거린 다음 말의 속력을 늦춰 네리아와 미 사이로 들어서면서 네리아의 말을 전해 주기 시작했다.

“이유를 설명해 줬으면 좋겠다는군. 북해 정복이라도 하는 탐험가처럼은 보이지 않는데, 그렇게 보기엔 복장이라든지…………, 짧게 말해, 짧게!”

운차이는 통역하면서까지 네리아와 말다툼을 벌였고 그 시간은 미로 하여금 당황스러운 질문에 대처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그래서 운차이가 겨우 네리아와 말다툼을 끝내자 미는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대답할 수 있었다.

“글쎄요. 미에겐 퍽 중대한 일이라는 것 외엔 말씀드릴 수가 없네요.”

운차이의 통역을 들은 네리아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더 따지고 들지는 않았다. 다시 침묵이 찾아든 가운데 네 명의 기수는 지평선을 추적해 갔다. 날개를 단 듯 가볍게 질주하는 말 등에서 세 명의 바이서스 인들은 곧 주위의 경관에 압도되어 넋을 잃었다. 그리고 미는 자신의 생각 속으로 잠겨들 었다.

이들에게 미래에 대해 이야기해 줘야 될까? 미는 마음속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래는 세상 모든 사람에게 관계된 일이지만, 세상 모든 사람이 알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들에게 미가 본 것에 대해 말해 줄 필요는 없다. 사실 무엇을 보았단 말인가? 들려줄 것도 없다.

태양을 오른쪽 어깨 뒤로 받으며 일행은 사이들랜드 평원의 남동쪽을 향해 달려갔다.

지평선은 그들의 추적을 비웃듯 계속해서 달아났지만 왼쪽으로 차츰 드라일 산맥의 희푸른 모습이 나타났다. 북해의 맹포한 눈 폭풍으로부터 사이 들랜드 대평원을 보호하는 드라일 산맥은 회색 구름을 베일처럼 둘러쓴 채 대평원을 주시하고 있었다. 차츰 그림자가 앞쪽으로 늘어지기 시작했다. 늘어지는 그림자의 길이에 비례해서 일행의 속력은 점점 빨라졌다. 대평원은 잠자리로도 그렇지만 식탁으로도 볼품없는 장소이다. 양들에게라면 눈 에 보이는 모든 곳이 식탁이겠지만 인간에게는 그렇지 못하다. 점점 빠르게 달리는 일행의 선두에서 그란이 외쳤다.

“그림자가 왼쪽 앞으로 늘어지게 달리면 돼.”

그란이 그렇게 고함치자 미가 말했다.

“잠깐, 잠깐만요. 뭐라고 하셨어요?”

“좌전방을 향한 그림자의 유지를 달린다.”

“아녜요. 그림자를 따라가야 해요. 이대로 달리면 노드를 지나치게 돼요.”

그란은 당황하며 멈춰 섰다. 이윽고 운차이와 네리아도 멈춰 서고 나자 그란은 운차이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운차이는 미를 돌아보다가 먼저 얼굴 정면으로 쏟아지는 노을에 눈을 찌푸렸다.

“뭐라고 했소?”

“그림자를 따라가야 한다고요. 이 방향으로 달리면 적어도 모레 아침까지는 아무것도 만날 수 없어요. 여기서 북쪽으로 조금 방향을 틀어야 노드가 나타날 거예요.”

“노드? 그게 뭐요?”

“양치기들이 양떼들에게 물을 마시게 할 때 들르는 장소예요. 셀레나가 뜰 때쯤이면 도착할 수 있을 거예요.”

운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과 동행해서 다행이군. 알았소. 그런데 그 노드라는 것은 그저 우물이오?”

“예. 우물과 양떼들 물 마시도록 만든 도랑, 그리고 지붕도 있어요.”

자신이 있었던 모양이군. 운차이는 속으로 생각했다. 북해까지 아무 생각 없이 가려고 했던 것은 아닌가 보군. 하지만 그래 봐야 북해에 간다는 것 자체가 생각 없는 행동이지.

셀레나가 떠오를 무렵 일행은 양치기들의 쉼터인 노드에 이르렀다. 캄캄한 대평원의 밤에, 대평원에 비해 보면 미세하달 정도로 작은 노드를 찾아내 는 것은 미의 안내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노드는 주위로 돌을 두르고 덮개를 덮어둔 우물과 사람들이 들어가 쉴 수 있도록 돌로 쌓아둔 피난처로 구성되어 있었다.

노드 안에 비치된 땔감으로 모닥불을 피우면서 일행은 느지막한 저녁 식사를 끝냈다. 미는 큼직한 건육 덩어리를 꺼내어 아달탄에게 던져주었고 그 모습을 보던 네리아는 미의 소지품이 궁금해졌다. 운차이의 통역을 통해 질문을 던진 네리아는 예상대로 미의 큼직한 배낭 안에 든 짐 대부분이 아달 탄의 먹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운차이는 건육 덩어리를 씹어 삼키고 있는 아달탄을 보며 미심쩍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개를 데리고 다니는 거요?”

“예?”

“말이라면 빠르게 달릴 수 있소. 또 내가 알던 옛 친구 중 하나는 황소를 타고 다녔지만, 그 경우에는 짐이라도 많이 실을 수 있지. 하지만 개는 무슨 소용인지 모르겠군. 보디가드인 셈이오?”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아달탄은 미와 함께 있어야 되거든요.”

“왜?”

“미가 주는 것만 먹거든요. 집에 놔두면 미쳐서 마을 사람들을 공격할지도 몰라요.”

“그렇소? 대단한 개로군.”

모험가들이나 방랑자가 대개 그러하듯 일행은 식사를 빨리 끝냈다. 식사를 마친 바이서스 인들은 곧장 잠자리에 들려고 했으나 미가 머뭇거리는 것 을 보며 동작을 멈추었다. 그란이 입을 열었다.

“왜?”

“저……, 죄송하지만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미는 지금부터 뭘 좀 해야 되는데 주위 사람들이 모두 조용히 있어줘야 하거든요.”

네리아는 운차이를 바라보았고 그러자 운차이가 대신 질문했다.

“무슨 일이기에 그러시오? 우리도 도와야 하는 거요?”

“아니오. 그저 가만히 계시면 돼요. 피곤하시면 누워도 좋고요. 하지만 주무시면 안 되거든요. 시간이 많이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운차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주변의 사람들이 잠들면 안 된다는 거지? 그러나 운차이는 별 질문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른 바이서스 인들에게 도 말을 전했다.

나머지 두 명이 모두 고개를 끄덕이자 미는 감사의 표시로 고개를 마주 끄덕이고는 배낭에서 큼직한 그릇을 꺼냈다. 모닥불 옆에 길게 누워 있던 아 달탄은 미가 그릇을 꺼내는 것을 보자 흠칫 일어나 앉았다. 아달탄은 경계하듯 주위를 살폈지만 미는 조용히 손을 휘저어 아달탄을 안정시켰다. “괜찮아, 아달탄, 금제를 치지는 않아. 누워 쉬렴.”

그러나 아달탄은 한결같은 자세를 유지했고 미는 싱긋 웃어버리고 말았다. 주위에서 그 광경을 보던 바이서스 인들은 모두 의아해했지만 별말은 하 지 않았다.

미는 우물에서 물을 퍼 올려 그릇에 담아 모닥불 가로 가지고 왔다. 모닥불 주위의 땅을 조금 파헤쳐 그릇을 안정되게 놓은 미는 배낭에서 작은 꾸러 미를 하나 꺼낸 다음 차분히 기다렸다.

물그릇을 바라보며 가만히 앉아 있는 미의 모습을 보면서 바이서스 인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는 살짝 웃으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수면이 잔잔해져야 되거든요. 그래서 조용히 계셔달라고 한 거예요.”

“그럼…………, 잠을 자면 안 되는 이유는 뭐요?”

운차이 역시 속삭임으로 질문했다. 어차피 대평원에서 말소리를 높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여러분들의 꿈이 비칠지도 모르니까요.”

운차이는 고개를 더 심하게 갸웃거렸다. 그때 그란이 바이서스 어로 작게 속삭였다.

“무녀였군.”

네리아가 눈을 커다랗게 뜨며 그란을 바라보자 캄캄한 어둠 속에서 그녀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란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게 말했다.

“미래를 보는 헤게모니아의 무녀. 저 물을 통해서 보지. 아마 우리가 잠들면 미래 대신 우리들의 꿈이 비치는 모양이군.”

“미래를 봐? 점쟁이?”

“좀 다를걸.”

그때 미가 손을 들어올렸다. 그란은 신전이나 교실에서 떠든 아이가 된 기분을 느끼며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네리아 역시 무의식중에 얌전한 자세 를 취했다. 하지만 운차이는 어둠 속에 드러누운 채 날카로운 눈으로 쏘아볼 뿐 아무 반응이 없었다.

허공을 향해 올라간 미의 손은 잠시 밤하늘을 받치듯 그대로 들려 있었다. 그러고는 다시 천천히 내려와 물그릇으로 향했다. 특별히 경건하거나 화 려한 동작도 아니었다. 마치 기지개를 켜는 것처럼 단순한 동작이었다. 그러나 아래로 내려온 미의 손이 수면 위를 천천히 움직이자 물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네리아는 자신의 숨소리가 커지는 것을 느끼고는 당황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그란의 눈은 날카로워졌고, 그는 자신도 모르게 상체를 앞으로 조금 기 울였다. 일렁거리는 모닥불 때문에 잘못 본 것인가? 그러나 그릇 속의 물은 확실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물결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그릇 속의 물의 움직임은 출렁이는 파문이라든가 끓는 물의 보글거림, 혹은 빗발이 떨어지는 호수의 퐁당거림 같 은 물의 일반적인 움직임과는 전혀 달랐다.

물은 마치 안개처럼 움직였다. 담배 연기 같은 기체처럼, 가늘게 갈라지고 가볍게 흔들리는…………. 그란은 자신이 선택하는 어휘들이 물의 움직임을 표현하기에는 너무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겼다. 그러나 기체처럼 움직이는 액체를 표현하는 말은 바이서스 어는 물론 자이펀 어나 헤게모니아 어에도 없었다.

움직임이 멎었다. 물은 마치 거울처럼 단단한 무엇이 되었다. 그 수면에서는 금속성의 광택이 번득거렸다. 그러자 미는 옆에 놓아두었던 꾸러미를 풀었다. 그 속에서는 작은 가면이 나타났다.

가죽으로 만들어진 가면은 하얀색이었고, 아무 장식이나 무늬가 없었다. 미는 익숙한 동작으로 가면에 달린 가죽끈을 머리에 묶었다. 하얀 가면 전 체에 뚫려 있는 것은 눈 부분의 긴 슬릿뿐이었다. 슬릿은 양쪽 관자놀이까지 뻗어 있었고 뭔가 하얀 금속으로 테두리를 둘러쳐 벌어지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 마치 투구에 달린 눈구멍처럼 보였다.

‘가면은 이상한 거야.’

가면을 착용한 미를 보면서 네리아는 약간의 불안감과 초조감을 느꼈다. 가면에는 아무 표정도 없다.

네리아와 그란은 상당한 긴장감을 맛보고 있었기 때문에 물그릇을 노려보던 미가 심드렁한 동작으로 팔짱을 끼며 밤하늘을 올려다보기 시작하자 영 문 모를 배신감까지 느껴야 했다. 미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그때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을 느끼고는 그란과 네리 아를 바라보았다.

“아…………, 잠시만요.”

미는 그런 영문 모를 말을 하고는 다시 그릇을 내려다보았다. 잠시 후 그릇에 비치는 영상을 보던 그란은 숨 막히는 소리를 내었다.

금속 표면처럼 단단하게 반짝이던 물 표면에 떠오른 것은 낮에 죽은 남자의 모습이었다.

그란은 호흡을 거의 잊은 채 물그릇을 바라보았다. 수면으로 떠오르는 것은 정신없이 달리는 말과 그 위의 남자였다. 굉장히 멀리서 본 듯한 모습이 라 그렇게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그란은 단숨에 알아볼 수 있었다. 지난 이틀 동안 추적했던 모습이었으니까. 곧이어 맞은편에서 미의 모습, 그리고 그란 자신의 모습이 나타나자 그란은 약간의 전율을 느꼈다.

자신의 동작을 제3자의 시각으로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불가능한 모습을 본다는 것은 어색한, 어쩌면 공포스럽다 할 수 있는 경험이었다. 그 란은 자신이 고함지르는 모습, 미를 지나쳐서 남자에게 육박하는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격렬한 검의 교환. 잠시 후 미 쪽을 향해 달리던 말에 서 남자가 떨어지는 모습까지 명확하게 보였다.

그란이 정상적인 호흡을 되찾은 것은 네리아의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였다.

“으음. 그란. 저렇게 잡았구나. 역시 핫소드야.”

미는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생긋 웃더니 물그릇 위로 손을 흔들었다. 수면 위로 떠오르던 영상은 사라졌고 물은 다시 물이 되었다. 그란은 목이 졸 렸다가 풀려난 듯한 기분을 느꼈다.

“아까 당황해서 제대로 보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미는 다시 보고 싶어졌어요.”

그란은 무의식중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동시에 입으로는 질문을 던졌다.

“원하는 시간의 시각(視覺)인가?”

“예? 아아, 예. 원하는 시간을 볼 수 있어요. 미는 무녀예요.”

“무녀. 음. 미래도 보지?”

이 질문을 예상했어야 했어. 그릇을 향해 뻗어가던 미의 손이 멈칫했다. 그녀는 그릇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예.”

“나의 보이는 미래가 가능한가?”

미의 목소리에서 음색이 사라졌다. 그녀는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가가 커요.”

“얼마나?”

“몹시 커요.”

미는 그렇게 말하며 그릇을 들어 올려 물을 쏟아냈다. 네리아는 물이 쏟아지자 뭔가 이유 모를 상실감 같은 것을 느꼈다. 의아해하던 네리아는 미의 동작 자체에서 그런 느낌이 전해져 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는 조심스럽게, 마치 거푸집에 쇳물을 붓듯이 조심스럽게 물을 비우는 것이었다. 긴장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아달탄은 물이 쏟아지자 곧 긴장을 풀고는 다시 드러누웠다. 아달탄의 동작을 보던 바이서스 인들은 모든 의식이 완전히 끝난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미는 가면을 벗어 원래대로 잘 감싸서 갈무리했다.

어색한 침묵이 일행 사이를 감돌 때 모닥불 저편의 어둠 속에서 운차이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좋아, 이젠 자도 되지?”

운차이는 바이서스 어와 헤게모니아 어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잠시 후 일행들은 모포를 뒤집어쓰고 누웠다. 사이들랜드의 대평원에서는 불침번이 필요 없었기에, 일행들이 잠자리에 들고 얼마 있지 않아 가느다란 연기를 내던 모닥불은 사그라들었다.

사그라드는 모닥불을 보며 그란은 팔을 바꾸어 베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그란은 조금 전 미가 보여준 것을 계속해서 되떠올리고 있었다. 그것은 완벽한 모습이었다. 그란이 익히 알고 있던 점쟁이의 예언이나 신탁 등에서 당연하다는 듯이 나타나는 모호성이나 불투명함, 불가해함이 전혀 없었다. 극히 객관적이고 깨끗한 영상. 만일 미래 역시 그런 식으로 볼 수 있다 면…………. 그란은 자연스럽게 뒤척이는 것처럼 보이도록 몸을 돌려 미를 바라보았다.

셀레나가 떠올라 대평원은 환했다.

모포는 두꺼웠지만 그런대로 그 아래에 여자가 누워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정도의 선은 나타났다. 미는 그란에게 등을 보인 채 누워 있었다. 그 뒷모 습을 바라보며 그란은 심각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미래를 알 수 있다면…………, 그것은………….

‘하지만 그렇다면 왜 헤게모니아는 진즉에 대륙을 통일해 버리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란은 자신의 생각이 그토록 선명하게 미래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오는 반대급부치고는 왠지 속물적이라고 느꼈지만 다른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 다.

대가가 크다는 말은 무엇일까. 비싸다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 미래는 보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일까?

일찌감치 잠들긴 다 틀렸다고 생각하며, 그란은 불현듯 담배 생각이 간절해졌다. 기가 막히게도 바로 그때 코끝을 스치는 담배 냄새를 맡을 수 있었 다. 그란은 몸을 반대쪽으로 돌렸다.

운차이였다. 그는 모포 속에 엎드려 누운 채 파이프를 피우고 있었다. 그란은 별말 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며 그의 또 다른 기이한 일행에 대해 생각 해 보았다.

운차이. 성은 모름(어쩌면 운차이가 성일지도 모른다.). 나이 불명. 고향은 자이펀. 전직 간첩. 자이펀의 간첩으로 바이서스에 파견되었다가 체포되어 전 향한 남자. 그래서 일행 중 유일하게 3개 국어를 모조리 할 줄 아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전향한 간첩이 반역자를 쫓는 것은 어쩐지 꽤나 어울 리는 면이 있었다. 쓰레기를 처리하는데 폐품을 사용하는 것은 합리적이다. 그리고 그란 자신은 한때 바이서스의 반역자였다. 역시 전향한 반역자가 반역자를 쫓는 데에는 실리적 요소가 있었다. 반역자만큼이나 반역자의 심리를 잘 꿰뚫어 보는 자는 없을 테니까. 네리아………, 유일하게 제대로 된 바이서스 인이라 할 수 있는 네리아는 원래 밤도적이었다.

웃기는군. 우리 일행은 모조리 바이서스에서는 범죄자들이었어. 범죄자가 범죄자를 쫓아 헤게모니아까지 건너온 것이다. 정말 웃기는군. ‘그것이 인 생’이라는 말에 참 잘 어울리는 일행인 셈이다.

그리고 인생을 생각하자, 그란은 의기소침해져 버렸다.

어른과 어린이의 차이는 뭔가. 어른도 어린이도 모두 세상에는 악당이 있고 배신자가 있고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이 있으며 불행한 사람이 있다는 것 을 알고 있다. 하지만 어린이는 그 사실에서 나오게 되는 당연한 결론, 즉 세상에 그런 것이 있으므로 자신 역시 성장하면 그런 사람이 될 명백한 가 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도통 모른다. 어른은? 어른은 이미 악당이 되었고 배신자가 되었으며 고통스러워하고 불행해졌기 때문에 따로이 인식할 필요 가 없어서 어린이에게 가르쳐줄 필요를 모른다.

“자, 아이야. 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어린이’라는 희귀한 생물이지. 너는 커서 모든 사람을 속이고 지독한 중병에 걸리고 만인의 증오를 받은 끝에 황야에서 개죽음을 당할지도 모른다. 그런 가능성이 절대로 없다고 말하겠니? 재수 없으면 오늘 밤 당장 너희 집에 불이 나서 넌 노린내가 날 때 까지 구워질 수도 있거든. 그게 바로 네가 가졌다는 무한한 가능성이라는 것의 정체지. 인생이 아름답지 않니?”

그러나 미래를 알 수 있다면…………. 그란은 다시 몸을 돌려 미 쪽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밤새도록 뒤척이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그란의 머리를 스쳤다.


같은 시각, 미와 바이서스 인들에게서 직선거리로 20펜큐빗 정도 떨어진 곳에서는 파와 쳉이 달리고 있었다. 바이서스의 목동들과 헤게모니아 평원 인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두 사람은 말을 재촉하지 않으면서도 쉴 사이 없이 달리게 만드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대륙 전체의 말들이 다 그 렇듯이 캐시헌터와 화이트풋은 기수를 재촉하지 않으면서도 쉴 틈을 주지 않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훌륭한 기마술 덕분에 말은 지치지 않았지만 그 위의 기수들은 지쳐버렸다.

“쳉! 쳉! 기다려봐.”

화이트풋을 멈춰 세우며 파가 고함을 질렀다. 긴 스카프로 얼굴을 가린 채 달려왔지만 끊임없이 파고드는 먼지 때문에 목은 반쯤 쉬어 있었다.

쳉이 캐시헌터를 멈춰 세우자 파는 그의 곁으로 말을 몰아가며 말했다.

“밤새도록 달릴 거야?”

쳉은 잠시 대답을 보류했다. 계속해서 달리고 싶어 하는 캐시헌터를 제자리걸음하게 만들면서 쳉은 달려온 길과 앞으로의 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상하군. 미는 확실히 걸어간 거지?”

“말은 안 가지고 갔어.”

“그래. 다음 노드가 어디에 있지?”

“걸어가면 내일 밤쯤에 닿을 수 있을 거야. 언니는 걸음이 빠르니까.”

“그렇다면 이상해.”

“뭐가?”

쳉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앞의 대평원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쯤 미는 야영을 시작했어야 하지. 그런데 어디서도 불빛이 보이지 않아. 여기는 대평원이란 말이야. 불빛을 가릴 것이 없는데.” 파는 당황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한 시간 전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사람으로서는 꽤 훌륭한 표정이었다.

“그, 글쎄? 으음…………, 언니는 평원에서 불을 피우는 것을 싫어하잖아.”

“불을 함부로 다루는 것을 싫어하는 거지 무조건 불을 피우지 않는 것은 아니잖아.”

“지금은 초여름이라고. 불을 피우지 않아도 얼어 죽지는 않아. 요리할 때 잠시 불이 필요하겠지만…………. 게다가 언니는 땔감도 가져가지 않았어. 그 똥개 먹일 것만 가득 가져갔는걸.”

쳉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미는 특별히 추위를 타는 체질은 아니다. 그리고 파의 말마따나 지금은 불을 피우지 않더라도 모포 한 장만 있으면 대평원 에서 얼마든지 잠들 수 있는 계절이다. 게다가 대평원에서 땔감을 구하는 것은 귀찮은 일이다. 만일 그 여행자가 혼자고, 개 먹이를 가득 가지고 다니 느라 짐이 많고(미다운 행동이다), 말은 타고 있지 않다면.

그때 파가 말했다.

“저게 뭐지?”

생각에 잠겨 있던 쳉은 파의 손길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처음에 뭘 가리키는지 몰라 당황하던 쳉은 잠시 후에야 달빛을 받아 조금 반짝이는 것을 발 견할 수 있었다. 쳉은 캐시헌터를 출발시켰다.

쳉과 파가 발견한 것은 땅에 박혀 있는 파이크였다. 그리고 파이크 옆에는 사람 하나가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잠들어 있다고 보기에는 주위를 떠도 는 피 냄새가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다. 파는 낮은 신음을 흘렸지만 쳉은 재빨리 말에서 내려 시체에게 다가갔다.

어디로 보든 헤게모니아 평원인은 아니었다. 갖춰 입은 무장은 굉장한 고가품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상당히 실용적이었다. 모험가인가? 남자의 얼굴은 이미 퍼렇게 부어 있었다. 근육은 모두 나무토막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아무리 봐도 사후 몇 시간은 지난 상태였다.

쳉은 남자의 사인을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었다. 누군지 모르지만 칼질에 있어서는 명인의 칭호를 주어도 아깝지 않은 작자가 이 남자를 대상으로 실력을 선보였던 것이다. 이 친구를 이렇게 만들어놓은 작자의 신경을 건드리는 것은 고려해 볼 가치가 없는 행동일 것 같다. 그런데 쳉을 당황하게 만든 것은 상처의 크기와 그 깊이였다.

파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다가오지 않은 채로 말했다.

“뭐야?”

“대답할 말이 없군. ‘시체’라고 대답하면 화낼 테지.”

“어떻게 죽은 거야?”

“칼을 맞았는데…………, 이거, 도대체 힘이 얼마나 좋은 거야? 칼이 아니라 무슨 닻 같은 것에 찍혀버린 것 같은데. 아니, 잠깐.”

쳉은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얼마 있지 않아서 쳉은 자신이 찾던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군. 이 발굽 자국은 전속 질주를 나타내는데, 말을 탄 채 서로 부딪친 거야. 그래서 이런 어마어마한 상처가 난 거군.”

“그 남자, 그런 식으로 입고 걸으려고 했다간 3펜큐빗도 못 가서 지쳐 쓰러질걸. 분명히 말이 있었을 거야.”

“그래. 그리고 이렇게 눕혀두고 갔단 말이지. 이상하군. 대평원에 강도가 있다면 북해에도 꽃이 피겠지. 그리고 뒤진 흔적은 있는데…………. 이것 봐. 피 에 젖은 손자국이야. 누가 이 친구를 뒤졌어. 하지만……………, 역시. 옷가지는 물론이거니와 돈도 그대로 있어.”

파는 쳉의 무심하면서도 빠른 손길을 보다가 입술을 바르르 떨면서 말했다.

“쳉……, 신경이 참 굵은가 봐. 어떻게 만져?”

“나야 감정 결핍이니까. 상단의 고용 무사는 하루에 한두 번쯤은 파트타임 요리사가 되어야 하고 1년에 한두 번쯤은 아마추어 장의사가 되기도 하 지. 내가 배 위에서 결혼식 사회를 본 적도 있다는 거 말해 줬던가?”

평생에 한 번쯤 누군가의 반쪽이 될 가능성은? 파는 입 속으로 질문을 던졌다. 물론 쳉은 다른 사람의 입 안에 있는 질문까지 새겨들을 정도로 민감 하지는 않았다.

남자의 시신을 정돈한 쳉은 손을 털었다. 이미 말라버린 피는 쳉의 손에서 가루가 되어 떨어져나갔고 쳉은 그 단순한 동작을 반복하면서 생각에 잠 겼다. 파는 쳉의 모습을 보며 말했다.

“누가 왜 이렇게 해놓았을까?”

쳉은 여전히 생각에 잠긴 채로 지나가듯 말했다.

“두 가지 질문이군. 누가, 왜, 뒤의 것은 모르겠고 앞의 것은…………… 오른손잡이고, 이 남자와 원한 관계는 없으며, 헤게모니아 인은 아니야. 성격은 진 지한 편이지만 간혹 터무니없는 실수를 저지르는 스타일이군. 그가 누군가에게 자기 힘을 증명해 보이고 싶어진다면 그 대상은 매우 감동을 받게 될걸.”

20펜큐빗 앞쪽에 있는 그란이 들었다면 가슴이 서늘해졌을 추리였다. 파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말했다.

“설명해 줄 거지?”

“상처를 보면 오른손잡이고, 돈을 남겨두고 파이크를 꽂아둔 것은………… 헤게모니아 인이 아니라는 뜻이지.”

“무슨 말이야?”

“너라면 대평원에서 누가 죽었을 때 매장해 줄 정도의 여유가 없다면 어떻게 했겠어?”

파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쳉의 말을 알아들었다. 갑옷만 벗겨 아무 데나 던져두면 그만이다. 새와 들짐승, 벌레들이 그의 장례식을 성대히 치러줄 것이다. 헤게모니아 인들은 매장의 풍습을 가지고 있지만 조장이나 풍장에 대해서도 그다지 거부감을 가지지 않는다. 따라서 지나가던 누군가가 보 라는 의미로 파이크를 세워둘 필요는 없다. 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돈을 남겨둔 것은 파이크를 보고서 이 시체를 발견한 누군가에게 대신 매장을 부탁하는 거야. 정식으로 장례식을 부탁한다는 거지. 원한 관계의 누군가가 생각하기는 어려운 일이겠지? 따라서 원한 관계는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럼 외국인일까?”

“그래. 그리고 이 친구도 외국인이군. 여기 동전을 봐.”

파는 쳉의 들어올린 손에서 달빛을 반사하며 반짝이는 동전을 보았다. 처음 보는 모양이었다.

“바이서스 동전이야.”

“바이서스 인? 그럼 바이서스 인들이 사이들랜드 대평원에서 서로 싸운 거야? 이상한 일이네……………. 왜 그랬지?”

쳉은 파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사실 대답할 말도 없었다.) 다른 말을 꺼냈다.

“미가 걱정이군. 이 사건에 어떻게 관련이 되어 있을까.”

“언니가?”

쳉은 주위를 더 꼼꼼하게 살폈다. 무거운 편자가 밟고 지나간 자취는 찾기 쉽다. 풀이 파헤쳐진 것을 보면 어느 정도의 거리에서 격돌했는지도 대충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도대체 몇 명이 이 자리에 있었는지는 도저히 자신할 수가 없었다. 먼저 이 남자와, 이 남자를 죽인 사람. 그런데 대단히 큰 발자국이 다른 발자국들을 뭉개놓은 것이 여러 개 보인다. 그리고 죽은 남자의 말은 어디로 간 것일까? 죽은 남자의 복장으로 보건대 승마용 말을 타 고 다닐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훈련받은 전투마라면 주인을 버려두고 떠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남자를 죽인 자가 남자의 말을 끌고 간 것이리 라.

그리고 미가 만일 이 살해 장면에 관계되어 있다면………… 쳉은 아달탄의 발자국은 찾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키타나 하운드들은 이런 초원에 발자국을 남길 정도로 둔하지 않다. 쳉은 불길한 기분을 느꼈다.

“가자. 바이스제 살인자가 돌아다니는 대평원은 미가 있어야 할 장소가 아니야. 빨리 찾아내야겠어.”

대신 헤게모니아제 감정 결핍증이 그녀를 상처 입히는 것은 괜찮고? 파는 다시 한번 입 속으로 질문했다. 달빛에 비친 파의 얼굴을 보던 쳉은 미소 를 지었고 그러자 파는 당황했다. 쳉은 쾌활하게 말했다.

“불안해하지 마. 언니는 아무 일 없을 거야.”

“……고마워.”

사흘 후, 쳉은 자신의 말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미를 추적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제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들이 발견하게 되는 야영터는 항상 양치기들이 자주 찾아드는 장소였다.

게다가 모닥불 주위에서는 물을 버린 흔적도 발견되었다.

따라서 파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설명하기 힘든 무엇이 꾸물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미는 혼자가 아니었다. 사흘을 추적했는데 따라잡지 못했다는 것은 미 역시 말을 타고 있다는 뜻이다. 게다가 야영터에서는 미의 발자국 외 에도 최소 둘 이상의 다른 발자국이 발견되었다. 묵직한 롱부츠 특유의 발자국. 쳉은 사람들의 발자국보다는 편자들의 자취에서 확신에 가까운 결론 을 얻을 수 있었다. 최소한 네 필 이상의 말이다. 절대로 그 이하는 아니다.

그렇다면 미는 대평원 어디에서 세 사람 이상의 동행을 찾아냈다는 뜻이 된다. 희귀한 일이긴 하지만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야외에서는 뭉치는 편 이 수월하니까. 대평원에서 동행을 쉽게 찾아낸다는 점이 좀 의외였지만.

하지만 쳉으로 하여금 불안에 빠지게 만드는 것은 미의 일행 중 하나가 몹시 좋은 칼솜씨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그 칼솜씨라는 것이 요 리사의 덕목에 해당하는 종류의 칼솜씨는 아니었다. 혹시 살해 장면을 목격했다는 이유 때문에 강제로 끌려가고 있는 것일까? 쳉은 그런 의문을 드러 냈다가 파에게 비웃음을 샀다.

“물 버린 거 보면 몰라? 자유롭게 물그릇 들여다보고 있다는 말이잖아.”

“강제로 시킬 수는……”

“그건 강제로 되는 게 아니야. 주위에서 고요히 있어줘야 되는데 협박당하는 분위기에서는 절대로 안 될걸. 쳉은 누가 협박한다는 이유로 딸꾹질할 수 있어?”

“그래? 그럼 뭐냐, 미는 지금 정신적으로 평온한 상태라는 건가?”

“그럴 거야. 걱정 안 해도 돼. 무엇보다도, 아달탄이 가만 있을까?”

“아, 그렇군. 맞아.”

그 시점에서, 쳉은 갈등을 시작했다.

이미 상단과의 약속일은 넘겨버렸다. 지금부터 되돌아간다고 하면 아무리 빨리 달리더라도 툰가드까지는 내려가야 상단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 다. 고용 무사의 자리를 너무 오래 비우는 것이다. 물론 견실하다는 평가가 훼손될 염려는 없다. 원래 그런 평가는 받고 있지 않으니까. 그러나 보스 는 화를 낼 것이다.

그리고 느닷없이 가출해 버린 미는 지금 태평하게 여행 중이다. 쳉은 방랑자로서 여행이 나쁘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리고 미가 나쁘다는 말 에는 주먹을 날릴 것이다(먼저 상대의 싸움 실력을 가늠해 보겠지만, 결국 주먹은 날아갈 것이다.).

그러나 미 V. 그라시엘과 여행이 합쳐지면 쳉은 몹시 불안해졌다. 거기에 덧붙여, 미의 여행 동료 중 하나는 깔끔한 칼솜씨에서 약간의 품위까지도 느껴지는 칼잡이다. 그런데 미는 그런 작자와 함께 있으면서도 아무런 불안 없이 물그릇을 들여다보고 있다. 즉, 걱정을 못 이겨 그녀의 뒤를 추적하 고 있는 사람들을 바보로 만들어버리고 있었다.

쳉은 눈을 가늘게 뜨고서는 드라일 산맥의 음영 속을 바라보았다.

“음…………, 파, 물어볼게. 그럼 넌 지금 언니에 대해 걱정을 하고 있어?”

파는 ‘설마?’라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당연하지.”

“그런데 말이야. 만일 그 칼잡이가 미에게 호의를 보이고 있다면, 난 미에 대해 별로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사실 여행 동료라 는 것은 성격을 보고 고르는 것보다는 솜씨를 보고 고르는 것이 항상 낫지. 성격은 언제나 믿을 수는 없지만 솜씨는 항상 믿을 수 있으니까. 그런데 난 그 작자를 보지 못했으니 성격에 대해서는 모르겠지만, 그 솜씨에 대해서는 높은 점수를 주고 싶거든?”

파는 눈살을 찌푸린 채 쳉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막 입을 열려고 할 때 쳉이 먼저 말했다.

“이 감정 결핍증아!’라고 고함치려는 거지?”

“안 해도 되겠네. 뭐야? 전혀 걱정이 안 된다는 거야?”

“전혀 안 된다고 할 수는 없지만.”

파는 쳉의 반응이 미적지근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파는 그런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어디로 갈지, 뭘 만날지도 모르지만 그냥 가보라는 거야? 그래? 도대체 쳉은 언니 친구 맞아?”

“바로 그게 문제인데…………”

“웅얼거리지 말고 똑바로 말해!”

“어디로 갈지, 뭘 만날지도 모른다는 부분 말이야. 우리는 모르지만, 그래서 불안하지만 말이야. 미는 알고 있지 않을까?”

“무슨 말이야?”

쳉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미는 미래를 보잖아. 내일 죽을지 몰라서 불안한 사람과는 다르잖아.”

파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미래를 보니까 여행에 대해 전혀 걱정이 없는 거였구나…………’라는군.”

“예? 무슨 말인데요?”

미는 다시 운차이를 바라보았고 그러자 운차이는 네리아에게 그 말을 바이서스 어로 옮겨주었다. 그러자 네리아는 손을 허공에 휘저으며 흥분한 목 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운차이는 냉랭한 어투로 통역했다.

“만일 다른 사람이 북해로 가겠다면 미친 짓이라고 하겠지만, 미래를 볼 수 있는 사람이니까 그 여행이 틀림없이 성공한다는 것을 안 상태에서 출발 한 것 아니냐는군. 정말 좋겠다고 말하는데.”

“좋다? 글쎄요. 좋은 건지 모르겠어요.”

“왜 그렇지?”

미는 고개를 숙여 레이븐의 말갈기를 내려다보았다. 일행은 말 달리기 좋은 시간인 오전 동안 대평원의 풀들을 뒤로 날리며 상당 거리를 질주했다. 그리고 작열하는 태양이 대평원을 향초 깔린 프라이팬으로 만들어버리는 시간이 되자 천천히 느긋한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말과 기수 모두 더위를 느꼈지만 아달탄만은 더위가 뭔지 모르는 생명체인 양 단단한 걸음걸이로 일행의 옆을 걷고 있었다.

미는 시선을 조금 들었다. 그러나 광막한 지평선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미는 레이븐의 귀에 초점을 맞춘 채 말했다.

“미가 여섯 살 때였어요. 세수를 하려다가 물그릇 속에서 아버지가 죽는 모습을 보았죠. 미는 그게 바로 그날의 일이라는 것도 알았어요.”

네리아가 궁금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운차이는 잠시 기다렸다. 미는 조용히 말을 이어나갔다.

“여동생을 끌어안고 펑펑 울었어요. 어릴 때는 그렇잖아요? 미의 여동생은 이유도 묻지 않고 덩달아 펑펑 울었어요. 어릴 때는 그렇잖아요? 어머니 는 미소를 지으시며 우리들을 다독거렸지요. 마지막엔 미도 왜 울고 있는지 모르게 되어버렸어요. 그냥 목놓아 울다가 ‘왜 울더라?’ 하게 되는 것. 어 릴 때는 그렇잖아요?”

운차이는 왠지 입을 열고 싶지 않았다. 미 역시 잠시 말을 멈추기는 했지만 운차이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은 아니었다. 북받치는 감정 때문도 아니었 다. 미에게는 그냥 호흡을 조절하는 여상스러움밖에 없었다.

“그날 하루는 참 길고 이상한 하루였어요. 자줏빛 먼지들이 바람에 휩싸여 대평원 위를 흘러갔고, 햇빛은 완전히 미쳐버렸어요. 이 넓은 하늘에서, 간혹 눈을 잘못 돌리면 해를 발견하기 어려울 때도 있지요. 그날이 그랬어요. 하지만 동시에 참 평범한 하루이기도 했지요. 미는 언제나 그랬듯이 아 침에 입었던 옷을 점심 식사 시간도 되기 전에 더럽혔고, 벌로 저녁이 될 때까지 그 옷을 입고 있어야 했어요. 그때는 그게 왜 벌인지도 몰랐지만 벌 을 받았다는 것 자체에서 수치심을 느꼈죠. 부끄러웠어요. 더러운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이 부끄럽다기보다는 미가 벌을 받고 있다는 것이 부끄러운 거 죠. 밖으로 나가면 모든 아이들이 미가 벌을 받고 있다는 것을 가지고 놀릴 것 같았어요.”

미는 잠시 눈을 돌려 드라일 산맥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미는 방구석에 쪼그려 앉은 채 몹시 울었어요. 점심을 먹고 나서 아이들이 찾아와서 미를 불러도 나가지 않겠다고 앙탈을 부렸어요.

미의 어머니는 화를 냈지만 변덕을 부리고 있는 여섯 살 꼬마의 시중을 들기에는 너무 어른이었죠. 모든 부모들이 그렇듯이 말이에요. 그들의 생에 갑자기 뛰어든, 도저히 그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없는 기묘한 생물이라는 것은 모든 부모들에게 너무 큰 당혹감이에요. 미의 어머니도 그러셨던 거지 요.

그날 저녁 아버지는 일찌감치 집에 돌아오셨지요. 베란 의식이 있는 날이었거든요. 그래서 아버지는 저녁 식사를 일찍 드시고는 깨끗한 옷을 입고 나가셔야 했어요. 저녁 식사 시간에 아버지는 화가 나 있는 미를 보시고는 웃으면서 거래를 제안했어요. 베란 과자 한 상자 대 착한 아이가 되는 것. 지금 생각해 보면 거의 도둑 심보나 다름없는 제안이었지만 그래도 깨끗한 흥정 기술이었고, 아버지에겐 유리한 점도 있었지요. 아버지는 흔히들 딸 들이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지는 법이잖아요. 그리고 미는 그렇게 희한한 딸도 아니었거든요. 베란 과자는 너무 매력적이었어요.”

미는 다시 말을 멈추었다. 그녀는 골똘한 시선으로 레이븐의 귀를 노려볼 뿐이었다. 미와 마찬가지로 말의 귀를 노려다보고 있던 운차이는 한참 동 안이나 미가 다시 말할 것인지 아닌지를 놓고 고민하다가 결국 입을 열고 말았다.

“그래서?”

미는 말을 시작했다. 마치 멈췄던 적이 없는 것처럼 곧장 튀어나오는 식의 말이었다.

“베란 의식 도중에 공회당에 불이 났어요. 의식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전부 조금씩 다쳤지만 빠져나올 수 있었어요. 딱 한 사람만 죽었지요. 그 사람 은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나오지 못했던 거지요. 귀여운 두 딸에 대해 자랑하다가 술이 과했다나 봐요. 그래서 미는 아마도 별로 고통스럽지 않게 돌 아가셨을 거라고 믿어요. 간혹 그때의 공회당을 볼까 하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좀 끔찍스럽더라고요.”

운차이는 이번에는 미의 말이 정말 멈췄을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뭔가 위로가 될 만한 단어를 헤게모니아 어로 떠올려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미는 계속 말했다.

“미는 지금도 아버지에게 ‘베란과자 따위 먹지 않아도 되니 상심한 미와 함께 있어요.’라고 말했다면 어떨까 하고 생각해요. 20년 동안 계속해서.”

20년. 운차이는 20년 동안의 후회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노력하지는 않았다. 쓸모없는 짓이니까.

“미래를 볼 수 있는 재능을 가진 것이 후회스럽소?”

“예? 왜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그럴 것 같았어. 그래서 운차이는 네리아에게 들려줄 말을 묻기로 했다.

“그럼 말이오, 이거 하나 물읍시다. 당신은 당신 여행의 성패를 알고 있소?”

“운차이 씨 좋을 대로 생각하세요.”

운차이는 그 상황이 싫었다. 그 상황이란, 네리아가 궁금함 때문에 반쯤 미쳐버린 듯한 눈길로 그를 쏘아보고 있는데도 들려줄 만한 대답이 없는 상 황이었다. 그래서 운차이는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최대한 과장하고 비극적인 무엇으로 바꿔서 들려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운차이는 미가 들려준 이야기에는 겉보기와는 달리 쓸 만한 내용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운차이의 대략적인 이야기를 듣고 난 네리아는 새삼 감탄한 눈으로 미를 바라보고는 다시 운차이를 보며 말했다.

“음, 음.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뭘까? 미는 자기 여행이 성공할지 실패할지 말하지 않았지만, 실패로 돌아갈 여행을 출발하지는 않았겠지? 그렇잖 아, 운차이?”

“바보.”

“자학하지 마.”

운차이는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한숨을 쉴 자유는 가지지 못했다. 하늘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을 네리아가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 다. 그래서 운차이는 바이서스 어로 독백하듯이 말했다.

“미가 북해의 빙판에서 얼어 죽는 자신의 모습을 봤다면?”

“뭐?”

“그랬다면? 미는 북해에 있지 않아. 그 미래가 사실로 진행되려면 미는 북해에 가야 돼.”

네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살하러 간다는 말이야?”

“그럴 수도 있다는 말이다, 미래를 본다면. 따라서 그녀에게 성패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보는데.”

“무의미? 왜? 어째서?”

“그녀에겐 미래가 불확실하지 않으니까.”

“무슨 말이야, 도대체? 바이서스 어 맞아?”

“바보. 그리고 네게 하는 말이야.”

“헤에에엥!”

원하지 않았지만 세 사람의 대화를 모두 알아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란은 그 모든 대화를 주의 깊게 들었다. 그리고 그란은 생각에 잠겼다.


“미래를 본다는 것 때문에 언니는 바보짓을 할지도 몰라.”

파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쳉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파의 얼굴을 살피려 했지만 파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무슨 말이야?”

파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안장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언니는 그래…………. 이건 언니와 나만 아는 이야기인데, 언니는 아빠의 죽음을 내버려뒀어.”

“……자세히 말해 봐.”

“언니가 어릴 때였어. 언니는 세수를 하려다가 수면에 떠오른 아빠의 모습을 보았지. 아빠가 죽는 모습이었지. 그리고 그날 밤, 우리 아빠는 베란 축 제가 벌어지던 공회당에 화재가 나서 돌아가시게 되었어.”

“그날 하루 종일, 미는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던 것이군.”

쳉은 특별히 잔혹하게 말할 의도는 없었지만 파에게는 잔혹했다. 파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언니는 미래를 보지만 보는 것뿐이야. 사실 나는 상상도 못하겠어. 내일의 내가 어떻게 될지 알고 있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모르겠 어. 하지만 언니는 분명히 그날 하루 종일 그 이야기에 대해 말하지 않았어. 자기가 본 것을 믿지 않았던 건지…………. 어쨌든, 언니에게서 그 이야기를 듣게 된 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도 4년인가가 지났을 때였어. 그것도 지나가는 말로 한 말이었지. 내가 더 캐물었지만 언니는 대답하지 않았어.” 

쳉은 주의 깊게 생각에 잠겼다. 그 태도는 확실히 주의 깊어 보였지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파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모르겠어. 만일 언니가 들판에서 죽는 자신의 모습을 봤다면?”

“뭐야?”

“만일 바다에 빠져죽는 자기 모습을 봤다면? 만일 맹수에게 잡아먹히는 자기 모습을 봤다면? 사이들랜드에서는 일부러 그렇게 되려고 해도 안 되는 일들이야. 그렇다면?”

“무슨 말이야, 도대체?”

“언니는 사이들랜드를 떠났을 거야. 언니는 그렇게 할 것 같아. 아빠의 죽음을 내버려뒀으니, 자기의 죽음도 내버려둘 거야. 그럴 거라고!”

파는 이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고 그런 자매애의 표출은 감정 결핍증 환자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언니는 말했어. 미래에 어떤 안 좋은 일이 있다고. 따라서 언니가 나서야 된다고 말했어!”

“미, 미래가?”

“그래! 그런데, 그런데 그 안 좋은 미래라는 것이 뭘까? 언니는 아빠가 죽는 것도 내버려뒀어. 미래를 보지만 거기에 뭔가 손질을 하려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단 말이야! 그런데 언니가 나서다니, 그게 말이 돼? 말도 안 돼. 제기랄! 왜 그럴 깨닫지 못했을까? 그건 절대로 말이 안 돼!”

“좀 천천히 하자, 응? 그러니까, 네 말은 미가 자신이 본 미래를 완성시키러 떠났을 거라는 말이니?”

“어? 어, 그러니까…………”

쳉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다면 네 걱정은 무의미해. 만일 미가 물그릇 속에서 이런 걸…………, 그러니까 고스빌쯤에서 누군가를 구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면? 그렇다면 미는 어떻게 행동할까?”

파는 입을 딱 벌렸다.

“쳉 맞아?”

“칭찬하려는 의도는 아니겠지만 넘어가지. 만일 내 가정이 맞다면 우리들은 지금 괜한 소동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내 가정이 맞을 수도 있잖아!”

“그리고 전혀 엉뚱한 일일 수도 있고, 어쨌든 미는 자신이 본 어떤 미래를 완성시키러 떠난 것이라는 데에는 동의해?”

“그럴 ・・・ 수 있겠지. 하지만 말이야. 언니는 이렇게 말했어.”

“뭐라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고.”

말을 끝낸 파는 갑자기 벼락이 친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하지만 그 느닷없는 섬광은 쳉의 눈에서 번뜩인 것이었다. 쳉은 파에게 돌진하려다가 파의 놀란 눈을 보고는 자신을 가누었다. 캐시헌터의 고삐를 꽉 쥔 채 쳉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왜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

“몰라. 급해서…………, 그리고……”

“제기랄, 아무리 급해도 그 이야기는 했어야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니, 그런 불확실한 말을 했다는 말이야?”

“어, 뭐, 불확실?”

쳉은 이를 북북 갈면서 다시 전방을 주시했다. 그에겐 미를 삼켜버린 지평선의 모습이 오늘따라 음흉하게 보인다. 지평선을 주시하던 쳉은 낮게 외 쳤다.

“……가자!”

파는 쳉의 갑작스러운 출발에 당황했다. 그녀가 쳉의 뒤를 따라 출발했을 때 쳉은 이미 100큐빗 정도 앞서 달리고 있었다. 파는 온 힘을 다해 달리 면서 외쳤다.

“갑자기, 왜 그래! 설명은, 해야 되잖아!”

쳉은 마치 달리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말했다.

“네 언니는 돌아온다거나 돌아오지 않는다거나 둘 중의 하나로만 말하는 사람이야. 어떻게 될 건지 다 알고 있으니까! 너를 괜히 놀라게 하려는 것 이 아니라면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어. 그건 돌아오지 못한다는 이야기였을 거야.”

“아!”

“제길,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절대로 그렇게 되도록 놔두진 않겠어. 빨리! 서둘러!”

쨍그랑 파는 세계가 깨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깨어진 것은 그녀의 가슴속에 있는 무엇이었다. 그녀의 손놀림이 흐트러지며 화이트풋의 걸음 도 조금 늦춰졌다. 하지만 쳉은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달려갔고, 그래서 파는 이를 악물면서 쳉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쳉의 이런 얼굴, 이런 모습은 12년 동안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감정 결핍증 환자에게서는 도저히 볼 수 없을 것이라 믿었던 표정. 쳉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여러 가지였다. 분노, 허탈감, 결의, 기타 등등. 그러나 파를 놀래게 만든 것은 그중 가장 미약하지만 가장 강렬한 것이었다. 그것은 그리움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파로 하여금 모종의 결심을 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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