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 워커 1권 – 1장 사라진 시인의 추모곡 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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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처 워커 1권 – 1장 사라진 시인의 추모곡 5화


5

사이들랜드 대평원이 느닷없이 끝나는 장소에 위치한 고스빌은 그 특수한 위치 때문에 여러 가지 지형과 기후대의 대회전(回戰) 같은 느낌을 주는 장소다.

서쪽으로는 한없이 펼쳐진 사이들랜드 대평원이 물밀듯이 밀려온다. 북으로는 드라일 산맥이 대륙의 늙은 얼굴에 달린 고집스러운 굵은 눈썹처럼 뻗어 있다. 남으로는 절대로 정복되지 않는 영원의 숲의 최북단이 고스빌을 위협한다. 그리고 동으로는…………, 아이가 걸음마보다 헤엄을 먼저 배운다 는 이야기로 유명한 마시랜드가 있다. 헤엄치는 자가 뛰어가는 자보다 목적지에 더 빨리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땅이라는 속설도 따라다니는 이 마시 랜드는, 정확하게 말해서 77개의 호수와 14개의 하천이 얼기설기 뒤얽혀 있는 땅이었다. 그럼에도 마시랜드의 익사자 숫자는 다른 지방보다 훨씬 낮 다.

“이유는?”

“수달이 익사한다면 우습겠지요?”

“아아.”

“마시랜드의 주민들은 모두 헤엄을 잘 치니까요. 그래서 그쪽 사람들의 별명은 스플래시맨이지요.”

미의 설명은 운차이의 낮은 목소리를 통해 네리아에게 전달되었고 그 퉁명스러운 통역은 네리아의 머릿속에 해괴한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그 사람들은 왜 아무데서나 침을 뱉는데요?”

네리아의 질문을 전해들은 미는 잠시 당황해 버렸다. 일행의 후미에서 소리 없이 낄낄거리던 그란은 고스빌의 시내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래서 이렇게 이상한 도시란 말이지.”

그란은 기이한 주위의 풍경에 감탄했다. 아랫도리만 대충 가린 채 어깨엔 생선을 꿴 밧줄을 메고 맨발로 걸어가는 소년은 아마도 그 마시랜드에서 온 소년일 것이다. 그리고 두툼한 털옷을 입고 롱부츠까지 신은 채 그 소년을 향해 반가운 손짓을 하며 걸어가고 있는 소녀는 아마도 드라일 산맥의 산등성이에서 내려온 소녀인가 보다. 그 소년과 소녀의 반가운 대화는 그란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대화 자체야 아무것도 이상할 것이 없지만, 도대 체 저렇게 어울리지 않는 옷차림들이라니. 그란은 그 감상을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 일행 같은 마을이군.”

운차이는 그란을 한번 흘겨보고는 곧장 가장 가까운 주점을 향해 걸어갔다.

길가에서 조금 들어간 공터에는 여행객들을 위한 몇 개의 테이블과 벤치들이 준비되어 있었고 그 위로는 나뭇가지들이 푸른 지붕처럼 드리워져 있 었다. 그 뒤로 주점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입구 위에는 ‘파타로 주점’이라고 멋지게 흘려 쓴 간판이 보였다.

테이블에는 많은 사람들이 앉아서 떠들고 노래하고 술 마시고 있었고 그 사람들의 다종다양한 옷차림은 그란과 네리아를 다시 감탄시켰다. 하지만 미에게는 익숙한 광경이었고 운차이는 벗지만 않는다면 어떤 옷이든 상관이 없다는 표정으로(설사 벗고 다니더라도 크게 상관치는 않을 태도였다) 곧장 빈 테이블을 골라 앉았다. 그가 테이블을 고르는 방식은 미를 놀래게 만들었는데, 먼저 말뚝에 말을 묶고는 안장을 풀어내어 어깨에 멘 다음 커다란 테 이블을 혼자서 차지하고 있는 사내에게 걸어가 아무 말 없이 매섭게 쏘아보기 시작한 것이었다.

잠시 후 사내는 술병과 잔을 들고는 황급히 다른 자리로 옮겨갔고 운차이는 당연하다는 듯이 테이블 옆에 안장을 집어던지고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 다. 주위가 갑자기 고요해졌지만 운차이는 별로 느끼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과격하시군요.”

미의 말에 잠시 고개를 돌렸던 운차이는 다시 고개를 돌려 주점 입구를 쏘아보며 말했다.

“셋을 셀 때까지 누군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더 과격해질 거요. 하나, 둘.”

“어서 오십시오!”

스스로 파타로 주점의 꿈나무라고 주장하는 종업원 데브는 자신이 원래 손님 접대를 빨리 하는 착실한 성격이라고 주장하는 듯한 얼굴로 나타났고 그 모습에 미는 미소를 지었다. 실제로 파타로 주점의 데브는 손님이 세 번쯤 고함을 지르기 전에는 절대 나타나지 않는 성격이었다. 데브는 어깨에 걸쳤던 수건을 움켜쥐고 마치 대패질을 하듯이 테이블을 닦은 다음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운차이는 턱으로 옆의 테이블의 사내를 가리키며 말했다.

“도대체 저게 뭐야?”

운차이는 퉁명스럽게 말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단지 ‘맥주’에 해당하는 헤게모니아 어가 갑자기 기억나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 게 말했을 뿐이다. 하지만 데브는 당황해 버렸고, 그래서 미가 대신 말했다.

“맥주……들 드시겠지요? 네. 맥주 넷 부탁해요.”

운차이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던 데브는 그제서야 미를 발견하고는 반갑게 외쳤다.

“미! 오래간만이군요. 고스빌에는 웬일입니까? 누가 미래를 걷겠다고 했습니까? 어이쿠, 아달탄. 오래간만이네.”

아달탄은 데브를 무시해 버렸지만 미는 상냥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데브. 퓨처 워킹은 아니에요. 미는 그저 여행 중이에요.”

“여행이라고요?”

데브는 조금 더 질문할 것이 무척 많았지만 그때 운차이의 시선을 느꼈다. 그리고 그 시선은 왠지 빠른 속도로 맥주 네 잔을 대령하지 않으면 상상하 기 힘든 일이 벌어지고 말 것만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래서 데브는 두말없이 건물 쪽으로 달려갔다. 자신은 원래 걷는 것보다는 뛰어다 니기를 좋아하는 성격이라고 주장하는 듯한 얼굴을 한 채.

네리아는 벤치에 앉자마자 운차이를 구박하기 시작했다. 주로 더불어 사는 사람들 간의 예절에 대한 매우 교훈적인 내용이었지만 그것은 전부 바이 서스 어였고 그래서 미는 네리아가 운차이를 협박하고 있다고밖에 상상하지 못했다. 그것은 주위에서 놀란 눈으로 네리아와 운차이를 바라보던 고스 빌 시민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란은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가로젓더니 의자에 앉는 미를 향해 말했다.

“내가 알고 싶은 퓨처 워킹은 뭔가?”

“’퓨처 워킹이 뭔지 알고 싶다’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건 미래를 보는 것을 말해요.”

“물그릇?”

“예. 그거예요. 그런데 미도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그란은 기다렸다. 미는 심호흡을 하고는 사람이 많은 장소로 올 때까지 섣불리 던지지 못했던 질문을, 그러나 주위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 의 낮은 목소리로 꺼냈다.

“저, 세 분은 바이서스의 반역자를 뒤쫓고 있다고 하셨지요?”

네리아와 악다구니를 나누던 운차이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미를 바라보았고 그러자 네리아 역시 고개를 돌려서 미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란은 고 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소.”

“그런데…

미는 바이서스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하지만요, 세 분의 모습은 관리나 병사의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아요.”

“하는 동안 비밀이니까.”

“그래요? 으음. 뭔가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요?”

“증명?”

미는 되도록 미소 띤 얼굴로 말하려 애썼다.

“예. 아무런 증명이 없다면, 미는 그란 씨에 대해 사이들랜드에서 누군가를 죽인 살인자라는 것밖에 알지 못하거든요. 오해라는 것은 간단히 생길 수 있는 것이잖아요? 어쩌면 미는 세 분이 바로 그 쫓기고 있는 바이서스의 반역자라고 오해해 버릴 수도 있을 테고요.”

그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겠군. 그란은 미의 의심이 합당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운차이는 그렇게 느끼지 못했다.

“이거 보시오, 미 양.”

“예?”

“왜 쓸모없는 질문으로 우리를 불쾌하게 만드는 거요? 보면 될 거 아니오.”

“본다고요?”

“우리 과거 말이오. 당신은 원하는 시간을 볼 수 있다면서? 우리의 과거를 보면 될 거라고 생각되는데.”

그란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운차이의 질문이 합당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러분의 과거요? 봐도 상관없나요?”

“상관이라고?”

“조금 전 그란 씨는 비밀리에 하는 일이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미가 여러분의 비밀을 마음대로 봐도 되는 건가요? 이상하네요.”

미의 말이 합당하다고 생각한 그란은 어쩔 수 없이, 부득이하게도, 돌이킬 수 없이, 세 번째로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하루 종일 고개만 끄덕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 속에서 그란은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어떤 합당한 말을 할 거지?

그란은 배신감을 느꼈다. 운차이는 합당한 말을 하는 대신 품 속에서 파이프와 부싯돌을 꺼냈다.

운차이는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얻기 위해 한참 동안 파이프를 빨았다. 그가 입에 물고 있는 것은 대륙 전체를 통틀어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로 진귀한 파이프였다. 대륙의 모든 드워프들 중에서 가장 발언권이 높은 드워프를 뜻하는 노커(물론, 드워프들이므로 가장 발언권이 낮은 드워프라 하더 라도 노커의 의견을 묵살해 버릴 수 있다. 하지만 또한 드워프들이므로 타인의 의견을 묵살하는 데서는 별 쾌감을 얻지 못한다.)인 엑셀핸드 아인델프가 선물한 파이프 였으니까. 엑셀핸드 쪽에서야 선물했다고 느끼고 있을지 미지수이지만 어쨌든 운차이는 선물 받았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는 잠시 가장 위대한 드워 프와 함께 여행했던 추억에 잠겼다.

“죄송해요. 미의 질문은 대답하기 어려운 것이었나요?”

운차이가 눈을 들자 테이블 반대편에는 다리가 긴 북부 미녀가 앉아 있었다. 사실 북부엔 안 예쁜 여자가 없지. 운차이는 허공을 향해 담배 연기 고 리를 몇 개 날려 보낸 다음 천천히 말했다.

“좋아, 과거를 볼 필요는 없소. 그런데 몹시 복잡한 이야기 좋아하시오?”

“이야기라면 보통 복잡한가 하는 것보다는 재미있는가에 더 중점을 둬요.”

운차이는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재미는 별로 없을 거요. 안 들을 거요?”

“차갑게 말씀하시네요. 미는 운차이 씨의 이야기에서 재미를 느껴볼게요. 들려주세요.”

운차이는 다시 파이프를 던져 넣듯 입에 물었다. 그러고는 불분명한 발음으로 말했다.

“당신은 미래를 보는 사람이지. 나는 정원에 심긴 잡초였소.”

“스파이셨어요?”

그 얼굴에는 아무 변화가 없었지만 운차이와 그란은 놀라버렸다. 운차이는 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고 그러자 미는 어깨를 으쓱였다. “정원은 나라를 말하는 것이고 잡초는 숨어서 자라나는 스파이 아닌가요?”

“그냥 짐작한 거요?”

“그랬다면 즐겁겠지만, 미의 남자 친구가 들려준 이야기예요.”

“당신 남자 친구는 뭐하는 사람이기에?”

“상단의 고용 무사예요. 상단을 따라 국경 지대, 면세 지대 따위를 돌다 보면 간첩이나 밀입국자들과 함께 술 마시게 될 때도 있다던데요.”

“그런가. 어쨌든 나는 자이펀의 스파이였소.”

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운차이는 반대로 눈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 거요? 자이펀 인이라고 해서 괴물은 아니오.”

“아, 죄송해요. 하지만 바이서스라면 몰라도 자이펀은…………. 미는 자이펀인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거리가 워낙 멀잖아요. 미는 대륙 북단에 살고 있고 자이펀은……”

“그래 봐야 바이서스 하나가 사이에 끼여 있을 뿐이오. 어쨌든 나는 간첩으로 바이서스에 침투했다가 체포되었소. 죽기 싫어서 전향했지. 전향 간첩 으로 반역자를 추적하게 하는 것은 어울리는 일 아니겠소? 어차피 신뢰받기 어려우니 신뢰성과 별 상관이 없어도 되는 일을 맡게 된 거요.”

“아, 그런가요. 그래서…………”

“그래서?”

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전향하셔서……………, 그래서 자이펀 분이신 데도 여자와 이야기를 하실 수 있는 것이군요.”

자이펀인은 아내 아닌 여자와는 이야기를 나누지 않을 뿐더러 방 안에 함께 있지도 않는다. 운차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소. 그리고 여기 그란 녀석은 그 반역자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나와 함께 다니게 된 것이오. 따라서 우리들에게 뭔가 증명할 것이 없 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오. 나는 전직 간첩이었고, 그란은 원한으로 추적하고 있는 것이니까. 따라서……………”

운차이의 말이 갑자기 멎었다. 그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리던 미와 그란은 의아함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고, 운차이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이 네 리아의 얼굴임을 알 수 있었다.

네리아는 무관심한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 시선은 단조로웠고 그란은 다시 한번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운차이는 왜 미와의 대화를 멈추면서까지 네리아를 바라본 거지? 운차이와 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네리아가 저렇게 딴청을 피우고 있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는데. 그때 한 손으로 맥주잔 네 개를 솜씨 좋게 든 데브가 그들의 테이블로 다가왔다.

데브는 멋들어진 동작으로 맥주잔을 내려놓았다. 미는 기쁜 표정으로 맥주잔을 들었지만 운차이는 맥주잔을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그래서 그란은 더욱 당황스러워졌다. 운차이는 여전히 네리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뭐지?

그때 네리아가 이상한 행동을 시작했다.

네리아는 천천히 손가락을 맥주잔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잔 가장자리로 끓어 넘치고 있는 거품을 살짝 들어내듯이 퍼 올렸다. 맥주 거품이 묻은 그 녀의 손가락은 그대로 잔을 타고 아래로 내려왔다. 즉, 네리아는 맥주 거품으로 맥주잔에 수직선을 그어 보인 것이다. 그란은 갑자기 동상이라도 걸 린 듯한 기분을 느꼈다. 차가워지며 동시에 뜨거워지는.

운차이는 이미 예상했던 것, 그리고 그란은 이제서야 알아차린 것, 그리고 미는 그때까지도 짐작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경쾌한 옷차림을 한 남 자 하나가 일행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다가왔다. 건장한 체구의 남자는 긴 갈색 머리를 목쯤에서 땋아 내리고 있었다. 그는 다가와선 그대로 의자를 빼고 앉았고 미는 당황해 버렸다.

“이미 늦었지만, 합석해도 되냐고 물어봐 주시겠어요?”

미는 어처구니없어하며 제안했지만 남자는 미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남자는 네리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디서 왔소?”

네리아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야, 당신 헤어스타일 마음에 든다. 어머니가 땋아줬어?”

남자와 네리아는 각자 헤게모니아어와 바이서스 어로 말했고 그래서 운차이와 그란만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말했 다.

“외국인인가? 우리나라 말 몰라요?”

네리아는 운차이를 쳐다보며 말했다.

“바이서스에서 왔다고 말해 줘.”

운차이는 그대로 전했고 그러자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역시 운차이를 향해 말했다.

“당신 손가락 사이에는 어떤 바람이 불지요?”

“바람은 일곱 갈래. 세 번째 바람은 슬프죠.”

“네 번째 새끼 돼지가 죽을 때는 어떤 조문객이 옵니까?”

“이마에 푸른 띠를 매고 왼발로만 걷는 문상객이 와요.”

“당신은 어떤 일이 있어도 비밀을 지키는 재수 없는 타입이오?”

“뜨거운 감자 수프와 시든 아스파라거스의 명예에 걸고, 나는 비밀을 지켜요.”

운차이는 품격이 대폭 추락하는 기분을 느끼면서도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양자의 대화를 통역해 주었다. 그 으르렁거림은 대화를 나누는 양자보다 는 주로 자기 자신의 한심한 처지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미와 그란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비록 두 사람 모두 그 말의 숨은 의미는 알지 못했지만 그래도 네리아와 남자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대충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남자는 나이트호크였던 것이다. 고스빌의 나이트호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코렐.”

“네리아.”

코렐은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

“희한하군요. 난 이런 농담을 외워두기는 했지만 오늘 처음 써보는 거요. 간신히 떠올렸어. 물론 다른 나라에 오려면 알고 있어야 되기는 하겠지만, 어떻게 이런 오래된 농담을 알고 있는 거요?”

농담은 아마도 ‘암호’를 말하는 거겠지. 그란은 그 정도는 추측할 수 있었다. 운차이의 통역을 통해서 코렐의 말을 전해들은 네리아는 상냥하게 웃으 며 말했다.

“나는 바이서스에서는 제법 깃발 날리거든요. 그리고 당신 말마따나 외국에 왔으니 그런 농담도 할 줄 알아야 되고.”

“아아, 그래요. 내 농담이 정확했는지 궁금한데.”

“한 군데만 빼놓고는 정확해요. 조문객은 왼쪽 눈을 찌푸리고 말하는 거예요.”

“음. 그렇군요. 고마워요. 어쨌든 오래된 농담도 알고 있고 신호도 정확했으니 당신은 내 오랜 친구요. 도와주겠습니다. 물론 아까의 농담에서도 나 왔지만 오랜 친구답게 너무 과중한 것을 요구하지는 않겠지요? 원하는 것이 뭡니까?”

네리아는 잠시 말을 멈추었고 그래서 양자의 말을 통역하던 운차이는 간신히 맥주 한 모금을 마실 기회를 얻었다. 네리아는 묻는 듯한 시선으로 그 란과 운차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란은 헤게모니아 어로 코렐에게 직접 질문했다.

“보여진 근래의 사람은 이상한가?”

코렐은 눈을 크게 끔뻑거렸다. 그리고 그때까지 끼어들지 못하고 있던 미는 재빨리 말했다.

“근래에 이상한 사람 본 적이 없냐는 질문이세요. 이 분은 헤게모니아 어가 서툴거든요. 그리고 저는 미예요.”

“아, 그래요? 이상한 사람이라면…, 당신들이 제일 이상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겠는데.”

“이상한 일은 특별하게 없어지는가?”

“……특별히 이상한 일은 없다는 말인가?”라는 질문일 거예요.”

코렐은 그만 피식 웃었다.

“뭐야? 여기 이분은 저 네리아 양의 통역이고 미 양은 저 남자분의 통역인 거요? 참 재미있는 일행이군.”

네리아는 상반된 평가를 동시에 받고 있는 바이서스의 나이트호크였다. 고금을 막론하고 그 실력의 우수함에 있어 비할 데가 없다는 그녀 자신의 평가와, 그럭저럭 바보짓은 하지 않겠지만 감옥 탈출법에 대해서는 익혀두는 것이 좋을 정도의 실력이라는 다른 사람들의 평가. 그녀는 후자의 의견에 분개하며 바이서스의 반역자를 헤게모니아까지 추적한 나이트호크라면 그 우수성은 이미 증명되지 않았냐고 반문했다. 하지만 운차이는 그 반문에 대해 차가운 시선만을 보냈고, 그란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배의 오래된 목재에서 묘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좌우로 천천히 삐걱이는 느낌은 그란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고스빌의 나이트호크인 코렐의 안내를 받아 일행이 찾아간 곳은 고스빌 교외를 따라 흐르는 네인 강의 한적한 나루터 한쪽에 정박 중인 폐선이었다. 겉보기에는 폐선처럼 보였고 내부로 들어가면 수장용 관에 들어온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물건. 햇살은 뱃전에 달린 작은 창보다 천장의 목재들 틈 사 이로 더 많이 쏟아져 들어와 코렐의 얼굴에 세로 줄무늬를 만들고 있었다.

“그런데, 미 양이라고 했던가요? 그래도 같은 나라 사람이 끼여 있으니 좋군요.”

코렐은 선실 구석의 궤짝에서 꺼낸 술잔을 미에게 건네주고는 색깔이 매우 짙은 술을 부어주었다. 미는 선실을 이리저리 세로로 가르는 햇살 속으로 술잔을 잠시 들어올렸다. 그녀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밤하늘색이네요.”

코렐은 빙긋 웃었다.

“좋은 표현이군요. 아, 그거 색깔은 좀 그렇지만 좋은 술입니다. 시시한 밀주 나부랭이와는 비교도 안 되지요. 고급이라고요, 고급.”

미는 ‘어딘가에서 슬쩍한’이라는 말이 따라 나오기를 기다렸지만 코렐은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코렐은 바이서스 일행들에게도 잔을 돌리면서 말했다.

“그런데 미 양은 어쩌다가 바이서스 사람들과 같이 다니게 된 거죠? 정말 내 짐작대로 그란 씨의 통역인 겁니까?”

“아, 어쩌다가…………. 그냥 야외에서 만났고 방향이 같아서 함께 다니는 거죠.”

코렐은 당황해 버렸다. 그 점은 그란이 작게 불평한 것에서 증명된다. 왜냐하면 코렐은 부어주던 술을 그란의 무릎에 흘리고 말았으니까.

“뭐요? 그럼 그냥 길동무라는 말입니까? 동료가 아니고?”

“그래요.”

코렐은 고개를 휙 돌려서는 날카로운 표정으로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헤게모니아 어가 서툰 네리아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멍한 얼굴로 코렐 을 마주보았고, 그러자 코렐은 운차이에게 말했다.

“어찌된 거요? 그럼 저 미 양은 나이트호크가 아니란 말이오?”

“아니오. 그리고 그 점에서라면 나나 저기 술 좀 흘렸다고 토라져 있는 녀석도 마찬가지고.”

그란은 차갑게 웃었지만 코렐은 이제 화가 나기 시작했다.

“뭐야? 그럼 저 여자만 나이트호크란 말이야?”

“그렇지.”

“어떻게 된 거야? 제길, 이봐!”

코렐은 네리아를 향해 버럭 고함을 질렀지만 트롤을 향해 고함을 지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네리아는 아무 영문도 모른 채 그저 코렐의 험악한 표정과 목소리에 대한 그녀 나름대로의 반응을 취했다. 즉 마주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코렐은 한심한 기분 반, 분노 반으로 운차이에게 고개를 돌 렸다.

“좋아. 아주 긴 설명이 있어야 될 거야. 하지만 나는 긴 것을 싫어하니까 간단하게 말해. 어떻게 저 네리아라는 여자는 너처럼 나이트호크가 아닌 녀 석 앞에서 나이트호크들의 옛농담을 한 거지?”

운차이는 참으로 불쌍하다는 듯한 눈으로 코렐을 바라보고는 그의 부탁대로 짧게 말했다.

“내가 통역이니까.”

코렐은 목 근육을 부르르 떨고 나서야 조금 침착을 되찾을 수 있었다.

“장난치지 마라. 나이트호크의 둥지에 들어와서 장난이 통할 것 같나? 여기 나 혼자 있는 줄 아는 모양인데, 내가 한마디만 하면 곧장 튀어나올 내 친구들이 배 곳곳에 숨어 있지.”

미는 곧 놀란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고 그란은 찌푸린 표정으로 손을 검 손잡이 쪽으로 가져갔다.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네리아는 분위기를 감지하고 몸을 긴장시켰다. 그러나 운차이는 태평하게 말했다.

“자네 친구들의 취향은 좀 이상하군.”

“뭐라고?”

“자네가 한마디만 하면 곧장 튀어나온다는 자네 친구들 말이야. 모두 입이 길고 나무를 갉는 취미가 있군. 자네들 사이의 우정의 기반이 뭔지 궁금 해지는데.”

코렐은 당황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대신 더욱 사나운 얼굴로 무시무시하게 말했다.

“내 말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군. 잘못된 판단으로 죽음을 재촉한 건 네 실수야.”

코렐의 살벌한 태도는 미를 겁나게 만들었지만 운차이를 겁주는 데는 실패했다. 운차이는 특별한 말 없이 싸늘한 시선으로 코렐의 얼굴을 똑바로 바 라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코렐은 아무 일도 당하지 않았는데 비명을 지르는 것이 합당한 것인가 의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로서는 비명을 지르고만 싶었다. 어두 운 선실 속에서 희미하게 번득이는 운차이의 눈은 허공에 뚫린 두 개의 구멍처럼 보였다. 이를 악물고 참던 코렐은 간신히 다음과 같이 말했다. 

“꾸르르륵.”

“헤게모니아 어에는 희한한 말이 있군.”

털썩. 코렐은 선실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고 미는 당황한 눈으로 운차이와 코렐을 바라보았다. 그란은 침착한 태도로 조용히 말했다.

“저 눈에서부터 자이펀 남자의 살기를 느낀 너의 무서움이 이유다.”

그란은 말을 끝내고 나서 갑자기 불안한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어두운 선실 한구석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는 미의 멍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잠시 후, 미는 손뼉을 딱 치며 말했다.

“아! ‘네가 무서운 이유는 저 자이펀 남자의 눈에서 나오는 살기를 느꼈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살기가 뭐죠?”

그란은 뭐라고 대답하려다가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코렐이 바닥에 주저앉은 시점으로부터 운차이는 술잔에 관심을 돌렸고 그래서 코렐은 주로 그란에게서 설명을 들어야 했다.

“길게 말하지 않겠다. 알다시피 우리들은 바이서스에서 왔고 헤게모니아의 나이트호크에게 어떤 해코지를 하고 싶어 할 까닭은 없다. 당신이 나이 트호크들 사이의 의리에 따라 우리들에게 유용한 정보만 제공해 준다면 그걸로 끝이다. 그리고 원하지 않는다면 정보 제공을 거절해도 상관없다. 우 리는 당신을 고발한다거나 할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 임무는 급하고 도둑 길드로부터 추격을 받는 것은 우리 임무의 수행에 도움 될 것이 하나 도 없으니까.”

그란은 대략 위의 의미에 해당하는 그리 길지 않은 말을 전달하는 동안 미의 무수한 친절을 받게 되었다.

“고맙소, 미.”

“천만에요.”

덱체어를 끌어와 앉아서는 그란의 말을 경청하던 코렐은 잇사이로 바람 새는 소리를 내었다.

“스우우웁. 쩝. 좋아. 원하는 것이 도대체 뭐지?”

“우리는 어떤 사람을 추적하고 있다. 근래에 헤게모니아에 들어온 누군가에 대한 정보가 없을까.”

그란은 미의 도움을 받아 질문을 하면서도 별다른 기대는 하지 않았다. 어쨌든 이곳은 헤게모니아에서도 북부에 위치한 고스빌이다. 물론 영원의 숲 때문에 거의 절단되다시피 한 헤게모니아에서 이 도시가 양쪽을 이어주는 회랑에 해당한다는 이점은 있지만, 그렇더라도 수도는 아니다.

그란은 코렐이 쓸 만한 정보를 가졌으리라고 믿기는 어려웠다. 그 스스로도 옛 농담을 사용해 본 것이 생전 처음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과연 코렐은 턱을 쓸어 만지며 불평스럽게 말했다.

“글쎄. 근래 헤게모니아에 들어온 누군가라는 것은 너무 막막하잖아? 내가 국경 경비 대원인 것도 아니고.”

“아무거나 생각나는 대로 들려줬으면 좋겠는데. 어쩌면 우리에겐 유용할지도 모르니까.”

잠시 생각에 잠겼던 코렐은 갑자기 엉뚱한 말을 꺼냈다.

“글쎄…………, 신스라이프의 문제를 아나?”

“신스라이프의 문제? 그게 뭔데?”

그란은 고개를 갸웃하며 질문했고 그 대답은 바이서스 어와 헤게모니아 어로 동시에 들려왔다.

“66년 동안 풀리지 않은 문제야.”

그란과 운차이, 그리고 코렐은 동시에 대답한 두 여자를 바라보았고 두 여자들도 서로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미는 고개를 옆으로 살짝 꺾으며 말했 다.

“네리아 양이 말하세요. 코렐 씨와 미는 그 이야기를 아니까 바이서스 어로 설명하는 것이 낫겠군요.”

네리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운차이와 그란을 향해 바이서스어로 말했다.

“응……, 그러니까 그건 문제야. 아마 턴빌일 텐데, 여기서 조금 남쪽으로 내려간 곳에 턴빌이라는 도시가 있어. 옛날 그 도시에 살았던 어떤 부자가 죽기 전에 유언을 남겼거든. 그 유언에 의하면 자기가 남긴 문제를 푸는 사람에게, 그 사람이 누구이든 간에 모든 재산을 넘겨준다고 되어 있어.” 

운차이가 날카로운 표정으로 질문했다.

“잠깐, 조금 전에 66년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맞아. 66년 동안 그 문제는 풀리지 않았고 그래서 아직도 그 재산은 그대로 있어.”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재산이 어떻게 66년 동안 남겨질 수 있는 거야?”

“음…………, 그러니까 신탁 관리 같은 거지. 턴빌 시청이 신탁 관리인으로서 그 재산을 관리하며 거기서 발생하는 이익금을 시 재정으로 사용하는 거지.”

“그렇군. 재미있는 이야기인데.”

그란은 다시 고개를 돌려 코렐을 바라보며 헤게모니아 어로 말했다.

“그런데 그게 왜?”

“그 문제를 풀겠다면서 남쪽에서 올라온 친구들이 있거든.”

그란은 눈살을 찌푸렸다. 돈에 미친 모험가들에 대한 정보가 과연 그들에게 유용할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란보다 더 서슴없는 성격을 자랑하 는 운차이가 헤게모니아 어로 질문했다.

“돈에 미친 모험가들은 발길에 차이는데, 그게 뭐 특별할 것이 있단 말이지?”

필사적인 표정으로 알아들어 보려고 애쓰고 있음에도 대화의 많은 부분을 알아듣지 못하고 있던 네리아를 제외하고, 코렐과 미가 보여준 반응은 운 차이와 그란을 의아하게 만들었다. 미는 새실새실 웃기만 했고 코렐이 대신 설명했다.

“당신들은 바이서스 인이니까 모를 수도 있겠지. 이봐, 돈은 생활을 쾌적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죽고 나면 돈 따위 쓰지도 못해.”

“무슨 말이지?”

운차이는 코렐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코렐은 한참 동안 킬킬거리며 뜸을 들인 다음 설명했다.

“그 문제에 도전하기 위해선 목숨을 걸어야 해. 만일 도전하고도 풀지 못하면 턴빌 시청의 주관 하에 사형을 당하게 돼.”

“뭐라고?”

운차이의 얼굴에 의혹을 떠올리게 만든 것은 코렐에게 꽤 기쁨을 주었다. 이 녀석, 이제서야 좀 인간 같은 표정을 짓는군. 코렐은 으스스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66년 전, 턴빌 시에는 한 노인이 있었다.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는 점에서는 그 노인도 다른 노인들과 큰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이 노인에게 는 다른 노인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점이 두 가지 있었다.

첫 번째 특성은 그렇게 희귀한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개를 가로젓는 것이었다. 노인은 죽음의 공포에 체념하지 않고 그에 대해 정면 대결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특성은 정말 독특하다. 노인에게는 그런 액수를 한번 흘긋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1년은 악몽에 시달릴 정도의 막대한 재산이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세무 공부를 하던 한 야심찬 젊은이가 노인의 재산에 대해 감사를 시작했다가 과로로 사망한 적이 있다 고 한다. 그래서 죽음을 부르는 재산이라는 웃기지도 않는 별명도 붙어 있었다.

하지만 그 별명이 사실이 되고 말 것은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신스라이프의 사후 치러진 장례식은 화려한 것이긴 했지만 결국 장례식이었고, 조문객들도 충실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신스라 이프의 유언 집행자로 선임된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들은 유언장을 개봉하곤 그 내용에 아연했다. 별로 친하지도 않았던 지인들에게 보내는 가 식적인 감사의 말과 듣자마자 잊어버리고 말 교훈적인 내용, 그리고 길고 복잡한 인용구와 법률 용어를 배제하고 단순히 말하자면 신스라이프의 유 언은 다음과 같았다. 

‘내가 남겨둔 문제를 푸는 자에게 나의 모든 재산을 무조건적으로 증여한다. 그러나 그 문제에 도전하고자 하는 자는 목숨을 걸 어야 한다. 잘해봐.’

코렐의 기나긴 설명을 듣는 동안 계속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던 운차이는 설명이 끝나자마자 곧장 질문했다. 

“그게 그것과 무슨 상관이지? 그 친구가 죽기 싫어했다는 것과 그 유언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다는 거지?”

운차이의 질문은 합당했고 그래서 그란은 머리를 끄덕여야 했다. 코렐은 의도적으로 대수롭잖은 어투로 말했다.

“아아, 그건 말이야, 형이상학적으로 말할 때 유피넬의 저울대에 올려질 또 다른 추를 찾아내는 것이지. 더 간단하게 말하자면 다른 사람들의 죽음 을 통해 부활하시겠다는 뜻이고.”

몹시 당황한 그란은 그만 바이서스 어로 말해 버리고 말았다.

“부활이라고?”

운차이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지만 대신 무서운 눈길로 코렐을 쏘아보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이야기꾼과 마찬가지로 코렐은 듣는 사람들의 긴장과 경악 속에서 행복했다.

“그래, 부활, 누구도 풀 수 없는 문제를 내놓고, 그 문제를 풀지 못한 자는 목숨을 내놓게 한 거지. 그런 식으로 죽은 자들의 영혼은 신스라이프의 부 활에 대한 대가가 되는 것이고.”

그란은 간신히 흥분을 가라앉히고 헤게모니아 어로 말했다.

“말을 도대체 하는 것이 뭐냐!”

그리고 곧장 미가 통역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는 질문이실 거예요.”

코렐은 즐겁게 킥킥거린 다음 무시무시해 보이는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고양이와 꿈의 콜리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어?”

운차이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그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답답한 표정으로 대화를 바라보던 네리아가 입을 열었다.

“그란, 쟤가 도대체 뭐라고 그러는 거야? 그리고 왜 분위기가 이렇게 화끈화끈한 거지?”

네리아의 맑은 목소리가 들려오자 선실의 어두운 조명과 코렐의 어두운 어투 속에 억눌렸던 그란은 간신히 바짝 마른 입술을 축일 정도의 여유를 되 찾았다. 고양이와 꿈의 콜리라. 그렇다면 대충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또 다른 의문이 생긴다. 그러나 그가 의문을 피력하기도 전에 운차이가 질문했 다.

“고양이와 꿈이라니, 난 그런 신의 이름은 듣지 못했다. 그리고 그 신이 거론되는 이유는 더 더욱 짐작하기 어렵고 말이야. 아마 이 선실 내에 있는 누군가가 내게 설명해 줄 것 같은데.”

그란은 천천히 바이서스 어로 설명했다.

“고양이와 꿈의 콜리의 신앙은 고대 종교야. 그리고 그 신전은 모조리 파괴되었어. 그러니까 바이서스의 제4대 에리네드 대왕의 북방 정벌 당시 고 양이와 꿈의 콜리의 종단은 북방의 호족들과 연합해서 대왕에게 반항했다. 그리고 그들 전부는 완전히 궤멸되었지. 무지개의 솔로처가 그들을 싹쓸 어버렸어. 그래서 네가 모르는 것이야. 그런데 고양이와 꿈의 콜리라면……”

그란은 말꼬리를 흐리며 코렐을 바라보며 다시 헤게모니아 어로 말했다.

“지금까지 몇 명이지?”

“일곱 명.”

그란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운차이는 다시 그란을 쏘아보기 시작했고, 그란은 테이블 위에 놓인 술잔을 노려보며 느리게 말했다.

“고양이는 목숨이 아홉 개지.”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콜리의 프리스트들은 여덟 명의 생명을 대가로 죽은 사람을 부활시킬 수 있었다고 들었어. 물론 부활은 대단히 고명한 프리스트라면 자연사가 아 닌 경우에 한해서 사용할 수 있는 권능이지만, 콜리의 프리스트들의 경우는…………, 여덟 명의 생명을 대가로 지불할 경우 자연사한 사람도 부활시킨다. 그리고 여덟 명이 아니라 아홉 명의 생명을 이용할 경우에는…………”

그란의 말은 늘어졌고 그 점은 운차이의 신경에 거슬렸다. 그가 알기로 그란은 쓸데없이 말을 늘어뜨리는 성격이 아니다. 운차이는 약간 사나운 목 소리로 물었다.

“아홉 명일 경우에는?”

“영생을 부여할 수 있다고 들었다.”

운차이는 파이프를 깨물어 기괴한 마찰음을 내고 말았다.

“영생이라고?”


파는 화이트풋을 멈춰 세우고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쉬었다 가……………. 나 힘들어서 더 못 가겠어.”

쳉은 미간을 찌푸렸지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파, 아직 해가 많이 남았잖아. 부지런히 달리면 셀레나가 떠오를 때쯤이면 고스빌에 닿을 수 있어.”

“셀레나? 그럼 네 시간은 더 달려야 된다는 말이잖아? 도저히 그렇게는 못하겠어. 이런 식으로 달렸다간 오늘 안에 고스빌에 도착할 수 있을지는 몰 라도 내일 고스빌을 떠나기는 어려울 거라고오오!”

“너 무척 건강하다고 알고 있었는데, 잘못 알았나 보군.”

“그래도 우리 언니보단 내가 훨씬 건강해.”

“그리고 너희 언니가 너보단 훨씬 다리가 길지. 동생이 못 쫒아갈 정도군.”

파는 불끈해서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그 전에 쳉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그는 멀리 지평선 쪽을 바라보며 고민에 잠겼다. 하지만 그답게 고민의 시간 은 짧았고 결정도 빨랐다. 그리고 말도 빨랐다.

“좋아. 내가 먼저 갈 테니 넌 천천히 따라와. 아무래도 지금쯤은 미가 고스빌에 있을 것 같다. 어젯저녁의 야영 흔적으로 볼 때 오늘은 거기 있을 거 야. 내가 먼저 가서 미를 붙잡아 놓고 있을 테니 파 너는 천천히 뒤를 따라오도록 해.”

“뭐야? 싫어!”

쳉은 깜짝 놀라면서 고개를 돌렸고 역시 깜짝 놀라고 있는 파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파는 비정상적으로 높은 자신의 외침 소리에 질겁해서는 멍한 얼굴로 쳉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지?”

“뭐?”

파는 쳉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반문해 왔고 그래서 쳉은 또박또박 천천히 말했다.

“뭐가 싫다는 거지?”

“혼자 남는 것은 싫어.”

“파, 파! 내 말 이해하지 못했어? 난 미가 오늘 밤 고스빌에 있을 거라는 것을 상당한 확신을 담아 말할 수 있단 말이야. 하지만 내일까지도 거기 있 을지는 모르겠어. 그러니까 오늘 밤 내에 고스빌에 도착해서 미를 찾아봐야 한단 말이야.”

“이…………, 하지만 혼자는 싫다고!”

“그럼 날더러 어쩌라는 거야?”

“잠시만 쉬었다가 같이 가. 응? 쳉 말마따나 언니가 오늘 밤 고스빌에 있다면 내일 아침까지도 거기 있을 테잖아. 그럼 내일 아침까지만 도착하면 돼. 잠시만 쉬었다 가도 안 늦잖아?”

“하지만 찾아볼 시간은? 사람들이 다 침대에 들어가고 나면 물어볼 수도 없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깨워서 물어봐야 된단 말이야?”

“뭐? 으음. 차라리 말이야, 내일 아침에 찾는 것이 더 나을 거야. 고스빌에 여관이라고 해봐야 몇 개 되지도 않잖아. 언니는 꽤 많은 말 탄 사람과 같 이 있잖아? 발견하기 쉬울 거라고.”

“……아침에?”

“그래, 아침에! 아니, 새벽에 아주 간단해. 고스빌 중앙 우물터만 지키고 있으면 된다고. 그럼 파타로 주점의 데브나 선셋 여관의 미키 같은 녀석들 이 물 뜨러 오겠지? 그럼 그때 그 녀석들을 붙잡고 물어보면 되잖아. 새벽에 도착하려면 차라리 여기서 잠시 눈 붙였다가 출발하는 편이 낫지 않겠어?”

쳉은 턱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며칠 동안 면도를 못한 턱의 수염이 까칠까칠했다.

“으음……, 중앙 우물에, 새벽에 말이지. 괜찮은데.”

“그래. 그러자고. 나 너무너무 피곤해. 제발 날 좀 생각해줘, 응?”

“좋아. 알았어. 그럼 잠시 눈 붙였다가 루미너스가 질 무렵에 떠나기로 하지.”

파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에서 내렸다. 쳉이 커다란 돌멩이를 찾아 말의 고삐들을 매어두는 동안 파는 모포를 꺼내어 대충 몸에 두르고는 그대 로 옆으로 쓰러졌다. 그 모습을 보던 쳉은 피식 웃었다.

“뭐라도 좀 먹고 자는 것이 낫지 않겠어?”

“아니……, 생각 없어. 피곤해. 쳉도…………… 어서 눕지 그래? 뭐 먹고 잘 거야?”

“아니. 귀찮군.”

쳉은 캐시헌터의 안장에 매어둔 주머니에서 작은 수통을 꺼내들고서는 드러누운 파 곁에 앉았다. 쳉이 수통의 마개를 열자 헤센빌의 면세 지역에서 구입한 바이서스 특산품 ‘드래곤의 숨결’의 짜릿한 향취가 파의 코를 간질였다.

“술이야?”

쳉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수통 뚜껑에 술을 따라 천천히 마시기 시작했다. 누운 채 쳉을 올려다보던 파는 몸에 감고 있던 모포를 턱까지 끌어올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쳉이 술 마시는 것 처음 보는 것 같네.”

“별로 즐기지는 않아.”

“그런데 왜 가지고 다니는 거야?”

쳉은 밤하늘과 구분할 수 없이 무한으로 사라져가는 지평선을 바라보며 말했다.

“가끔은 쓸모 있거든. 마음이 착잡할 때나 쓸데없이 조바심이 날 때.”

조바심. 파는 그 단어의 의미가 싫었다. 목이 조금 답답해져오는 듯한 느낌을 애써 참으며 파는 말했다.

“쓸데없이 조바심 내지 마. 언니는 잘 있을 거라고. 쳉이 조바심한다고 해서 언니가 더 안전해지고 유쾌해지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그럴 시간이 있 으면 잠이나 자둬.”

“응? 아아, 그렇잖아도 잠이 잘 올 것 같지 않아서 마시는 거야. 빨리 자야 내일 아침 일찍 떠나지.”

쳉은 말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뚜껑도 비워버렸다. 입 안을 뜨겁게 달구는 드래곤의 숨결의 감각 속에서 쳉은 잠시 눈을 감았다. 감긴 눈꺼풀 속에 별들이 떠다녔다. 그 별들 사이로 미의 모습이 잠시 스쳐 지나간 것은 쳉에게 묘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쳉이 눕는 모습을 보며, 파는 가슴속 쌉싸름한 감정을 느끼면서도 잠시 감탄했다. 며칠 동안 함께 다니면서 보아온 모습이지만 여전히 낯선 모습이 다. 그녀와는 전혀 다른 물질로 만들어진 듯한, 투박하고도 느릿하며 딱딱한 동작으로 눕는 쳉의 모습은 생경스러우며 야만스러웠다.

방금 전설을 만들고 돌아온 남자든 아니면 방금 멋진 밭고랑을 만들고 돌아온 남자든, 남자의 눕는 모습은 모두 동질감을 가진다. 그것은 이룩된 성 취 속에서 그 성취를 깨끗이 잊어버리고 모든 것을 무로 돌리는 행위다. 파에게는 그렇게 느껴졌고, 그래서 파는 마음껏 감탄했다.

그리고 초조한 한 시간이 지나고 나서 파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천천히, 손가락 하나를 움직일 때도 모든 신경을 곤두세워 쳉의 숨결을 감시하며 파는 일어나 앉았다. 거의 5분이나 걸려서 간신히 일어나 앉은 파 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파는 제자리에 앉아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쳉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12년 동안 보아온 얼굴이지만 잠든 얼굴을 볼 수 있게 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그대로 터져나갈 듯이 쿵쾅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은 채 파는 쳉의 굵은 눈썹과 얇은 입술, 그리고 약간 두드러진 광대뼈까지 꼼꼼히 관찰했다. 그의 왼쪽 볼에 있는 희미한 흉터를 바라보며 파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까슬까슬한 수염을 바라볼 때 파는 손이 뻗어나가려는 것을 억누르기가 퍽 힘들었다. 그리고 두드러져 나온 목울대의 모습은 신기했다. 파는 쳉의 목 울대를 보며 자신의 목을 쓸어내리다가 자신의 목이 땀에 흠뻑 젖어 있는 것을 깨닫고는 깜짝 놀랐다. 그때 쳉이 몸을 움직였다.

“으음……”

심장이 그대로 멎는 느낌을 받으며 파는 굳어버리고 말았다.

‘만일 지금 쳉이 눈을 뜨면 내 심장은 그대로 딸깍 멎어버릴 테고 나는 쓰러지기도 전에 죽고 말 거야. 쳉은 몹시 놀랄 테고 그 다음에는 슬퍼해 주겠 지. 고스빌이 가까우니까 아마 풍장을 하지 않고 정식으로 매장해 줄 거야. 그리고 쳉은 매년 하절기 여행 때 평소의 경로를 잠시 벗어나 내 무덤에 찾아와 주겠지. 내 무덤에 뿌려진 꽃은 자줏빛 코스네위.’

번갯불이 번득이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파의 머릿속으로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쳉은 뒤척거리다가 옆으로 몸을 돌려 파에게 등을 보였고 파는 그 등을 돌리는 모습이 야속하다고 생각하는 자신에 당황했다.

그리고 10분 후, 파는 소리 없이 쳉의 주위를 돌아서 반대편으로 와서 앉았다. 사이들랜드에는 밤새의 울음이나 밤짐승의 울음 같은 것은 없다. 들 려오는 것은 오로지 대평원의 노래뿐. 혼을 부르는 대평원의 감미로운 허밍 속에서 파는 숨소리도 없이 쳉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방을 아무 리 둘러봐도 자신의 무릎보다 더 높은 장애물은 없는 이 완벽하게 개방된 공간 속에서 외로운 여자가 잠든 남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깊은 어둠 속에서, 파의 볼을 타고 흐르는 별 조각이 한번 반짝였을 뿐이다. ‘이아!’ 하고 고함지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파는 조용하면서도 날렵한 동작으로 말을 달렸다. 오늘 낮 동안 늑장을 부리고 엄살을 피우면서 말의 힘을 비축시켜 둔 파의 계획성은 칭찬받아 마땅할 것이다. 화이트풋은 사 이들랜드의 밤바람에게 허락된 속도보다 훨씬 더 빠르게 고스빌을 향해 달렸다.

마상에서 뚜렷하게 반복되고 있는 생각은 어둡고 날카로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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