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 워커 1권 – 1장 사라진 시인의 추모곡 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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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처 워커 1권 – 1장 사라진 시인의 추모곡 6화


6

미는 담배 연기에 작게 콜록거렸지만 운차이는 원래가 꽤 과격한 성격이기 때문에 미의 반응을 무시해 버렸다. 파이프를 깊이 빤 운차이는 담배 연 기와 말을 뒤섞어 내뱉었다. 그래서 그의 말은 허공을 떠도는 것처럼 들렸다.

“영생이란 말이지.”

운차이는 단조롭게 말했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이 엄청난 거짓말쟁이인 것처럼 느끼게 만들고, 그래서 뭔가 부연 설명을 꽤 많이 해야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게 만드는 어투였다. 그래서 그란은 부연 설명을 했다.

“그래. 영생이라고. 다른 말로는 영원히 산다는 의미지.”

운차이는 이번엔 눈빛만으로 상대로 하여금 자신이 바보인 것처럼 느끼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란은 조금 당황하며 말했다.

“내가 궁성 수비 대원이었을 때 대장님과 한담하다가 들은 이야기야.”

“대장님이라면, 임펠리아의 그 마법사 조나단 아프나이델 말인가.”

그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란의 고향인 바이서스에는 재미있는 전통이 내려오고 있었다. 국왕이 거처하는 궁성의 수비대 대장은 항상 마법 사다. 300여 년 전 드래곤 슬레이어 루트에리노 대왕과 함께 바이서스를 건국한 대마법사 핸드레이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전통으로, 바이서스에는 항상 대마법사의 가호가 함께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래. 솔로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들었다.”

“마법사가 말한 것을 50퍼센트 이상 믿는 녀석은 바보라던데.”

운차이는 농담이라도 하듯 말했지만 그란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말 조심해…………. 그분은 나와 내 딸의 은인이시다.”

운차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일 뿐 별말을 하지 않았고 그란도 더 이상 말꼬리를 붙잡지는 않았다. 동그래진 눈으로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네 리아가 말했다.

“말이 한 가지면 좋겠는데. 히잉. 나 지금 무슨 말이 오가는지 전혀 모르겠다고.”

네리아가 지적한 대로 그란과 운차이는 바이서스 어와 헤게모니아 어를 번갈아 사용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자상’이라든 가 ‘상냥’이라고 하는 덕목과는 관계가 소원한지라 네리아에 대한 배려를 하기보다는 코렐에게 고개를 돌려버렸다. 네리아의 눈썹이 몹시 곤두섰지 만 운차이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좋아. 잘 알았다, 코렐. 그런데 이상하군.”

“뭐가?”

“일곱 명이라면, 지금까지 그 악취미한 문제에 도전했다가 죽은 사람이 일곱 명이라는 말이지?”

코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운차이는 얼굴 주위를 감도는 담배 연기 사이로 코렐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떻게 그런 숫자가 나오는 거지? 66년이라는 건 긴 시간이다. 그 기간 동안 일곱 명이 사망했다면 대략 9년에 한 명꼴로 그 문제에 도전했다는 말 이 되는데, 내 생각이긴 하지만 세상에 자기 목숨과 일확천금의 꿈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지 못하는 녀석은 꽤 많을 것 같단 말이야.”

코렐은 씩 웃으며 말했다.

“옳은 말이야. 물론 사망한 녀석만 일곱 명이라는 말이지. 문제에 도전했다가 실패한 후 그대로 달아나 버린 녀석들도 꽤 많지. 턴빌 시에서는 문제 풀이에 실패한 죄수들을 사형시키는 데 그다지 열성적이지 않았거든. 실제로는 그 세 배쯤 되는 숫자일 거야. 대략 2, 3년에 한 번씩 그런 미친 녀석 들이 나타나지.”

운차이는 가늘게 뜬 눈으로 코렐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이번에 남쪽에서 나타났다는 녀석도 2, 3년 만에 나타난 미치광이인가 보군. 그런데 남쪽에서 왔다는 것은 무슨 뜻이지?”

남쪽이라면 바이서스 방향이다. 그란은 운차이의 질문에 눈을 번뜩이며 코렐을 바라보았다. 코렐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이서스에서 온 것 같아. 자네들과 비슷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던데. 우리나라 말이 서툴러.”

“좀더 정확한 정보는 없겠나?”

코렐은 대답하는 대신 조용히 듣고 있던, 듣고 있는 척하고 있을 뿐 알아듣지도 못하는 이야기 때문에 몹시 우울한 표정을 하고 있으며 동시에 불친

절한 남자 동료들 때문에 화가 나 있는 네리아를 흘끗 보았다. 네리아는 다시 눈을 동그랗게 떴고 그러자 운차이는 바이서스 어로 네리아에게 말했다.

“이 녀석에게 좀 더 좋은 정보가 없겠냐고 물어보니 너를 쳐다보는군. 나이트호크들 사이의 에티켓에 관련된 뭐라도 있는 건가?”

“두 사람 미워.”

“알았어. 미워해. 그런데 뭐라고 말하면 돼?”

네리아는 체념하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어후후후…………. 성숙한 내가 참아야지. 흥. 이렇게 말해 줘라. ‘물 마시고 소화 불량에 걸린 모든 성자들의 이름에 걸고 알고 싶다’고.”

·정확하게 그거 맞아?”

“맞아.”

네리아는 새침한 표정으로 대답했고 그러자 운차이는 참담한 얼굴로 코렐을 돌아보며 헤게모니아 어로 진지하게 말했다. 

“물 마시고 소화 불량에 걸린 모든 성자들의 이름에 걸고, 좀더 나은 정보를 알고 싶은데…………”

그란은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었지만 미는 그냥 웃었다. “으힛!” 그리고 코렐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거 참……, 좋아. 오늘은 돈 안 되는 운수가 내 발등을 때리는 날이군. 좋아, 좋아. 그 작자들의 인원은 네 명인 것 같다. 그리고 나흘 전 턴빌 시에 나타났고, 그 문제를 풀기 위해 턴빌 시청에 신청서를 내둔 상태야. 믿을 수 있는 턴빌 시민 세 명을 공증인으로 세우는 작업인데 이게 시간이 좀 걸 리는 모양이더군. 하지만 그것도 곧 끝날 거야.”

“어떻게 그렇게 잘 알지?”

코렐은 조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운차이를 마주보며 말했다.

“턴빌 시청에 잡초가 하나 있거든. 아마 이번 주말이면 서류 통과가 끝날 테고 일요일쯤에 시작될 거야.”

“시작되다니? 뭐가?”

“뭐긴, 문제 풀이지. 그거 턴빌 시에서는 좋은 구경거리거든. 완전 잔치판이지. 턴빌 녀석들은 도시락 바구니 싸들고 가서 구경할걸. 나도 가서 구경 해 볼까 생각중이야.”

운차이는 문득 코렐의 전문가적 소양은 혹 소매치기 쪽으로 발달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면 소매치기에 게는 좋은 작업 환경일 것이다. 코렐은 계속 말했다.

“그 사람들의 이름은 대충 알고 있지만 알려줄 필요는 없을 것 같군. 가명임에 틀림없는 이름들이야.”

“가명이라……”

운차이는 담배 연기를 깊숙이 빨아들였다. 거의 파이프 째로 삼켜버릴 듯한 진지한 모습이었다. 바이서스에서 왔고, 가명을 사용하는 사람들이라. 운차이는 왠지 즐거운 예감이 들었다. 그 때 코렐이 손가락을 딱 튕기며 말했다.

“아! 그렇지. 우리 잡초 중 하나가 그중 한 녀석의 이름을 알아냈어. 일행 중 누군가가 그 녀석을 이렇게 불렀다던데. 자무엘이라던가?”

“사무엘!”

멍하니 듣고 있던 네리아가 갑자기 고함을 질러서 미는 꽤나 놀랐다. 운차이는 기어코 파이프를 입에서 떼더니 그란을 바라보았다. 그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사무엘 드라이첵이군. 녀석들이었어.”


하오의 햇살이 뱃전에 부서진다.

도대체 누가 나무를 가리켜 투박하다고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네인 강에 떠 있는 작은 폐선의 뱃전은 그야말로 금속성의 반사광으로 번 쩍이고 있었다. 뱃전에 박힌 리벳과 못대가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 그리고 강물 위로 떠다니고 있는 빛의 편린들. 이물에 놓인 낡은 그물더미는 눈 을 멀어버리게 만들 지경이었다. 말라붙은 그물에서 반짝이는 빛의 구름……………

선실 입구 옆에 기대앉아 파이프를 피우고 있던 운차이는 배가 쿵쿵거리는 소리를 듣고 누군가가 계단을 올라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 발걸음 소리만으로 배후의 인물이 누구인지도 알았다. 곧 등 뒤에서 듣기 좋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운차이 씨.”

“맞소.”

“예?”

“그게 내 이름이 맞다고. 무슨 일이오, 미 양?”

운차이의 왼쪽 선실 문에서 나타난 미는 해죽 웃으며 뱃전을 가로질렀다. 그러고는 운차이의 앞쪽, 이물의 난간에 걸터앉았다. 몸을 뒤로 기울이면 그대로 강물에 빠져버릴지도 모르는 위치였기에 운차이는 약간 조바심을 느껴야 했다. 게다가 미는 몸을 배 밖으로 조금 기울여 강변을 바라보기까 지했다.

약간 떨어진 강변 쪽에는 그들의 말이 묶인 채 한가롭게 서성이고 있었다. 나무들이 주욱 늘어선 뒤쪽으로 건물들의 지붕이 석양을 받아 빛나고 있 었다. 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운차이를 바라보면서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냐는 식의 질문은 참 이상해요.”

“뭐가 이상하오?”

“그 질문은 사실 아무것도 묻고 있지 않아요. 그 질문의 의미는 아마도 내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말일 거예요. 즉 뭔가를 들려줘서 납득시키고 싶고 확인받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좋다는 허락일 거예요.”

“………나는 들려주고 싶은 말이 없소. 그리고 당신에게 내 목적이나 이유 같은 것을 들려줘서 당신을 납득시켜야 될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하고.”

“그러실 것 같았어요. 당신에게는 그런 분위기가 있어요. 혼자 걷고 혼자 생각하고 혼자 해결하고, 해결이 안 되면 혼자 아파하고. 미에게도 비슷한 친구가 있어서 이해할 수 있어요. 사이들랜드에는 당신 같은 사람을 표현하는 말이 있어요. 당신 같은 사람을 가리켜 ‘누구보다도 날씨에 대해 잘 알 지만 정작 날씨 이야기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사람’이라고 하지요.”

“무슨 말이오?”

미는 뱃전의 목재를 만지작거렸다.

“당신은 주위의 사람들을 보기보다는 혼자 하늘을 볼 때가 더 많아요. 그래서 날씨에 대해서는 잘 아실 테죠. 하지만 날씨 이야기는 거의 하시지 않 을 거예요.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든 이야기를 이어나가야 된다는 강박 관념을 느낄 때 흔히 날씨 이야기를 하게 되지요. 하지만 당신은 아마도 할 말 이 없으면 그냥 입을 닫아버리는 성격일 거예요. 맞나요?”

운차이는 피식 웃었다.

“그렇소. 친구로 삼기엔 피곤한 타입이지.”

“미에게 설명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아까 여러분들의 얼굴이 몹시 밝아지던데, 뭐 좋은 일이 있나요?”

운차이는 잠시 대답을 보류한 채 뱃전에 앉아 있는 미를 바라보았다. 네인 강은 고요했고 뱃전에는 작은 흔들림도 없어 마치 육상에 앉아 있는 것 같 았다. 하지만 미의 모습은 왠지 흔들려 보였다.

“거래 좋아하시오?”

“공정할 경우에 한해서.”

“당신이 한 번 묻고 그 다음 내가 한 번 묻는 식은 어떻소?”

“좋아요. 먼저 하시겠어요?”

“당신 먼저 아직 질문이 정리되지 않았소.”

“알았어요. 당신들에게는 어떤 좋은 일이 있나요?”

“조금 전 코렐이 말했던 턴빌에 나타난 모험가들이 우리가 쫓고 있는 그 바이서스의 반역자라는 확신을 얻었소. 우리가 쫓고 있는 사람은 한때 바이 서스의 후작이었소. 이 점은 반역이란 상류 사회의 풍습임을 증명하는 좋은 예가 될 거요. 어쨌든 그 후작에게는 사병이 있었고, 후작이 바이서스에 서 도망쳤을 때 꽤 많은 사병들이 함께 사라졌소. 그중 하나의 이름이 사무엘 드라이첵이었소. 마상무예가 퍽 뛰어난 녀석이었지.”

“아아………, 그렇군요. 그럼 이제 턴빌로 가셔서 그 사람을 체포할 건가요?”

“아니. 체포하지는 않을 거요.”

“예? 그게 무슨 말씀이죠?”

운차이는 어떻게 설명해 주면 미의 머리가 아프지 않을까 고민하다가 자신의 머리부터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대충 말해 버렸다.

“간단히 말하면 증거가 없다는 말이오. 그 친구의 반역 음모에 대한 증거는 모두 객관성이 떨어지는 종류의 것들이오. 그런 경우가 있다는 것은 알 고 있겠지요? 죄가 있는 것은 뻔히 알지만 공식적으로 단죄할 방법은 없는 경우 말이오. 그렇소. 체포할 수가 없지. 게다가 원래 후작이었기 때문에 체포하면 사회적 반향도 심각하고. 그래서 우리는 그 친구를 일종의 실종 상태로 만들 생각이오.”

“실종이오?”

“그렇소. 다행히도 외국에 나와 있지 않소. 그래서 고국에 절대로 돌아오지 못하게 방해할 생각이오. 어떤 사람에게도 연락하지 못하고, 어떤 도시 에도 나타나지 못하고, 누구도 그를 만나지 못하고…………… 그런 상태로 만들어줄 작정이오.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의 그 친구 기억하시오? 당신 말의 원 래 주인.”

“아, 예.”

“그 남자도 사무엘 드라이첵과 마찬가지로 후작의 부하요. 훈트라는 이름이었지. 우리는 그 훈트가 후작이 누군가에게 보내는 밀서를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아마도 평소의 지인인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밀서일 것이고, 그런 것을 가로채거나 해버리면 후작을 점점 외롭게 만들어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친구를 덮친 거요. 우리 세 명으로는 후작에 대한 정면 공격이 어려우니까 그를 약화시키기 위해 그런 수단을 동원해 본 거요. 하지만 실패했어.”

“실패요?”

“그 친구는 미끼였소. 우리들을 다른 곳으로 유인하기 위한.”

“아아…………, 그렇게 된 것이군요. 이제 대충 이해한 것 같아요.”

미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던 운차이는 턱으로 선실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가 지금 당장 부리나케 턴빌로 출발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오. 우리는 그 작자가 어디에 있는지만 정확하게 알고 있으면 만족이거든. 그리고 뭔가 활동을 계획하고 있는 것 같으면 충심으로 그 활동에 재를 뿌려줄 작정이오. 현재 우리들의 최대 야망은 후작이 히스테리를 부리다가 심장 발작 으로 죽어주는 것이지.”

농담할 때 미소라도 좀 짓지. 까르르 웃으려다가 운차이의 냉정한 얼굴 때문에 머쓱하게 웃음을 멈춰야 했던 미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리고 미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머릿속으로 질문거리를 정리하던 운차이는 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내가 묻겠소. 당신은 북해로 간다고 했는데, 거기에 왜 가는 거요?”

미는 잠시 당황한 얼굴로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운차이와는 달리 그녀는 대답할 말을 정리해 두지 않았던 것이다.

“음음. 거짓말을 지어내기 어렵군요. 사실대로 말하자면 미는 말하고 싶지 않아요.”

운차이는 물끄러미 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적어도 그는 ‘약속했지 않소?”라고 재촉할 정도의 인격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만사태평이 행복 의 지름길인 호인도 아니었다. 그래서 운차이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거짓말이라도 지어내 보시오. 사기 당했다는 기분은 느끼지 않아도 되게.”

미는 겁먹은 눈으로 운차이를 바라보았지만 운차이는 그저 태평한 얼굴로 지루한 오후의 마지막을 장식할 재미있는 이야기를 기다리는 사람의 표정 을 구사할 뿐이었다. 미는 안심했다.

“미는 음식 재료를 구하러 북해에 가요.”

운차이는 물끄러미 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깊이 끄덕였다.

“알았소. 절대 누설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마시오.”

“고마워요.”

운차이는 가볍게 몸을 일으켰다. 그는 파이프에 담긴 재를 강물에 털면서 약간 어렵게 말했다.

“해가 지는군. 내려가서 코렐이 저녁 식사를 어떻게 대접하는지 봅시다.”


“워, 워. 조용히, 화이트풋.”

파와 화이트의 앞쪽으로 드라일 산맥의 발 아래 아늑하게 자리 잡은 고스빌의 모습이 펼쳐졌다. 화이트풋은 잠자리와 맛있는 풀을 생각하며 푸르 릉거렸지만 파는 화이트풋의 갈기를 쓸어내리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이들랜드 근방의 도시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이 도시에도 도시를 둘러싸는 목책이나 야경꾼, 경비 대원의 모습 같은 것은 없다. 그것은 보다 덜 신 비로운 땅의 모습이며, 고스빌은 꽤 신비로운 땅의 언저리에 위치한 도시인 것이다. 그래서 화이트풋이 소란을 떨었지만서도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 은 느껴지지 않았다. 파는 꽤 늦은 시간에 도착했고 예상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잠자리에 든 지 오래였다.

파는 천천히 고스빌 내로 들어섰다.

딸깍거리는 말발굽 소리가 대로에 울렸지만 깊이 잠든 사람들은 깨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고스빌의 시내 지리를 잘 알고 있는 파는 특별히 길을 물 어볼 사람이 필요하지 않았다. 파는 익숙한 골목과 광장을 지났다.

이윽고 파와 화이트풋이 멈춰 선 장소는 지금껏 지나왔던 다른 곳과 특별한 차이가 없는 장소였다. 밤이라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적당히 더러운 데 다가 적당히 냄새나는 평범한 건물들이 평범한 모습으로 늘어선 거리였다. 파는 그중 한 평범한 건물을 향해 걸어갔다. 입구 옆에 있는 평범한 말뚝 에 고삐를 묶은 파는 그 건물의 평범한 문을 평범하지 않게 노크했다.

딱, 따다닥, 딱딱.

건물 안에서는 역시 평범하지 않은 대답이 들려왔다.

“암호는?”

“시끄러워, 스테드. 꼭 이런 짓거리를 해야 되는 거야?”

문이 열리며 갑자기 쏟아져나온 빛에 파는 얼굴을 찌푸렸다. 누군가가 램프를 들어올려 파의 얼굴을 확인하고 있었다. 잠시 후 램프가 아래로 내려 간 다음 어둠 속에서 젊은이의 재미있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명색이 비밀 도박장이잖아.”

“비밀 같은 소리하고 있네. 그 암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는데? 옷가게 노라 아주머니도 그 멍청한 암호는 알고 있더라.”

“아아. 사장 고집이니 불쌍한 문지기에게 떠들어 봐야 소용없어. 그런데 파, 여기는 웬일로 온 거지? 내가 보고 싶어서? 아니면 도박하고 싶어서?”

“둘 다 관심 없어. 파타로 주점의 그 얼간이, 또 여기에 죽치고 있지?”

“데브? 물론이지. 개구리가 연못을 떠나면……………, 아니, 잠깐! 그 데브 녀석이 내 연적이었어?”

“저녁에 도대체 뭘 먹은 거얏! 왜 헛소리를 주절대?”

“어, 파?”

스테드로서는 몹시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가벼운 농담일 뿐이잖은가? 이런 지루한 밤에 도박장 입구에 주저앉아서 멍청한 암호 따위나 물어야 되는 문지기가, 만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던 미인 친구를 만났다면 당연히 건넬 수 있는 그런 농담. 그러나 파는 그런 농담에는 상당히 어울리 지 않는 눈길을 보내왔고 스테드는 꽁무니를 빼기로 결심했다.

“아, 좋아, 좋아. 뭐 기분 좋잖은 일이라도 있나 보군. 데브는 확실히 여기 있어. 뭐 말이라도 전해 줄까?”

“여기서 기다릴 테니 불러내.”

스테드는 파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즉각 몸을 돌리지는 않았다. 대신 비실비실 웃으며 미안한 듯이 말했다.

“이것 보라고, 파. 도박 도중에 여자를 만나면 패가 무지 더럽게 나온단 말이야.”

파는 거기까지를 오늘의 한계로 설정했다.

5분 후, 파는 지하 도박장의 길고 비좁은 통로를 지나면서 통로 양쪽에 달린 문들을 하나씩 벌컥벌컥 열어젖히고 있었다. 파가 문을 열 때마다 안에 서 터져나오는 비명 소리(?)는 처절했다.

“뭐야? 어떤 새끼야!”

“뭐가 이리 시끄러워? 어라? 이런, 맙소사! 여자 아냐?”

“이런, 빌어먹을. 야야, 패 엎어! 제길. 재수 옴 붙었다. 다시 돌려!”

“니기미, 개소리 하지 말고 카드 다시 잡아! 난 이 패 포기 못해!”

파는 안에서 들려오는 험악한 대사들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은 채 그 작업을 계속했다. 다섯 번째 문을 열어젖혔을 때 파는 찾고 있던 인물을 발견 했다. 손에 가득 쥔 카드 뒤에서 파를 바라보고 있는 데브의 얼빠진 얼굴을 보며 파는 배부른 미소를 지었다.

데브는 당황하면서,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카드를 테이블에 엎어놓으며 말했다.

“어? 파?”

“여기 있었군. 이리 나와.”

그때였다. 상당히 거친 손길이 파의 어깨를 잡아채었다. 파는 휘청하면서 몸을 돌렸고, 눈을 부라린 채 그녀를 쏘아보고 있는 키 큰 남자를 발견하게 되었다. 남자는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나가.”

“나는 저기 데브 녀석에게 볼일이……”

“나가!”

파를 거칠게 돌려세운 남자는 레이저라고 불리는 사나이였고, 그의 직업은 도박사였으며, 그의 속은 뒤집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조금 전 레이저는 소지금의 3분의 2를 베팅한 상태였다. 그러나 문을 열어젖힌 여자를 보자마자 그는 패를 집어던지고 통로로 달려 나왔다. 이 여자를 빨리 내보내지 않으면 다른 미친 녀석들이 이 여자에게 처녀에게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종류의 일을 저질러버릴 것이 불을 보듯 빤하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이 밤중 에 단신으로 도박장에 뛰어든 여자라니. 그런데 이 여자는 남의 뒤집어지는 속도 모른 채(레이저의 패는 정말 기가 막혔다.) 눈을 홉뜬 채로 그를 올려다보 는 것이다.

이제는 늦었다. 레이저는 등 뒤로 들려오는 욕지거리와 구둣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자포자기 하는 심정으로 달려 나왔기에 레이저는 통로 한가 운데를 점하고 뒤의 남자들과 이 미친 여자 사이를 가로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레이저의 등 뒤쪽 분위기는 계속 험악해지고 있었고 이제 이 여자가 통로의 끝까지 걸어가기란 트롤과 춤추기보다 더 어렵게 느껴졌다. 레이저는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

‘제길. 엘프와 순결의 그랑엘베르, 나 좀 먹고 살게 해주시오. 당신 오늘 내게 빚지게 되었어. 다음에 기필코 아까 쥐었던 패와 같은 패를 보내주셔야 됩니다?”

그랑엘베르에 대한 공갈을 끝낸 레이저는 곧장 파의 팔을 잡아채었다. 파는 뿌리치려고 했지만 곧이어 들려온 레이저의 말에 얼이 빠지고 말았다. “이리 나와! 이 망할 여편네야. 집에서 애나 보고 있지 미쳤다고 여기까지 찾아와? 내가 너 때문에 늙는다, 늙어! 그래, 잘못했다, 잘못했어! 마지막 으로 딱 한 번만 할 생각이었단 말이다. 어이구, 이런 개망신이 있나!”

으르렁거리며 달려들려던 남자들은 주춤하고 말았으며 레이저는 파의 팔을 거머쥔 채 남자들 사이를 재빨리 빠져나갔다. 남자들은 비웃음이 담긴 시선으로 레이저와 파를 쏘아보고 있을 뿐 제지하지 않았고, 그래서 레이저는 파를 잡아끌면서 단숨에 통로의 반대쪽 끝까지 달려 나왔다. 통로의 끝 에 이른 레이저는 문으로 통하는 계단 옆의 벽에 기대앉아 있는 남자를 보았지만 그에 괘념치 않고 단숨에 계단을 뛰어올랐다. 건물 밖으로 뛰쳐나온 레이저는 무릎에 손을 짚은 채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헉헉헉!”

운동 부족이야. 제길. 레이저는 곧장 이 도박장에서 최대한 멀어져야 된다고 느끼면서도 허리를 펴지 못한 채 땅을 향해 헉헉거리고 있었다. 매일 저 녁 술 마시고 눈이 시뻘개지도록 카드나 들여다보는 녀석의 평균 수명이란 빤한 거지. 너라고 별다를 줄 알아, 레이저? 헉헉헉. 앞으로 몇 년이야. 재 수 없으면 이번 한 철도 못 버티고 등에 칼 맞을지도 모르지.

겨우 숨을 돌린 레이저는 감사의 인사를 듣기 위해 그가 구해온 처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의아해져 버렸다.

“그 표정은 뭐야? 그런 해괴한 얼굴로 감사의 표시를 하는 것이 가풍인가?”

파는 헝클어진 머리를 짜증스럽게 헤집으며 말했다.

“당신에게 감사하다고 말해야 된다는 건가요?”

“고맙다고 해도 돼.”

“내가 왜요? 나 저 안의 한 멍청이에게 볼일이 있어요. 나야말로 당신 멋대로 날 끌고 나와서 날 방해한 것에 대해 사과를 받아야 한다고요.”

레이저는 무지무지 화가 날 경우 씩 웃는다. 그리고 레이저는 파를 향해서 씩 웃었다.

“이봐, 꼬마. 빅뉴스가 있는데, 나는 너 때문에 60셀을 포기했어.”

파는 경멸에 찬 웃음을 지어 보였다.

“바보군요. 6셀만 있어도 나보다 훨씬 그럴듯한 여자 세 명은 살 수 있을 텐데.”

파의 말은 레이저에게 일종의 반칙성 타격의 효과를 발휘했다. 급소를 가격당한 기분을 느끼며 레이저는 얼굴을 찌푸렸다.

“치마끈이 짧은 여자였나? 이런 제기랄. 내 눈도 이제 갈 데까지 갔군.”

“치마끈 같은 소리 하시네. 내가 어디가 거리의 여자로 보여요?”

“아냐? 오오, 역시 내 눈은 정확해. 그럼, 꼬마야,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에 화내지 말거라. 너 미쳤지?”

“가끔은 그런 것 같아요.”

파의 말은 다시 한번 같은 효과를 나타내었다. 레이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점점 유쾌한 기분을 느끼기 시작했다.

“하하하! 재미있는 꼬마군. 그래. 이 밤중에 도박장에 뛰어들고서도 네가 안전할 거라고 생각했어?”

파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심한 남자 같으니라고. 그 의도가 좋았다는 것이 당신 행운이야. 그렇잖았다면 오래 전에 거기 길게 누워 있게 되었을걸. 파가 여기까지 아무 반항 없이 얌전히 끌려나온 이유는 레이저와 같았다.

“이봐요. 멍청한 도움이었지만 어쨌든 당신 도움에 감사는 해드리지요. 그러니 나를 두 번째로 방해해서는 안 돼요. 알았죠?”

레이저는 뭔가 대답하려고 했지만 그 전에 이미 파는 몸을 돌려 방금 그들이 뛰쳐나온 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이제 이 남자는 안전하니 파는 자 신의 볼일을 볼 생각이었다. 레이저는 당황하며 파의 어깨를 붙잡았다.

“이 미친 꼬마가…………”

“두 번째는 용서 안 해!”

퍽! 레이저는 어디를 맞았는지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고꾸라지고 말았다. 평생토록 이런 식으로 맞았던 기억이 또 있던가? 혼미해지는 정신 가 운데 레이저는 계단 옆 벽에 기대앉아 있던 사내를 떠올렸다. 잠깐, 그 녀석 자세가 좀 이상했던 것 같은데? 입에서 침을 길게 흘리고 있지 않았 나…………? 해답을 떠올리지 못한 채 레이저는 흔히들 졸도라고 부르는 상태로 직행했다.


코렐은 몸을 일으켰다. 그 자신조차 자신이 몸을 일으키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는 조용한 동작이었다.

선실 안은 어둡고 고요했다. 코렐은 잠들기 전에 보았던 광경을 떠올리며 그란과 운차이가 어느 쪽에 누워 있을지를 추측할 수 있었다. 그 빨강머리 나이트호크와 맹한 여자는 옆 선실에서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을 것이다. 코렐은 천천히 일어섰다.

창문으로 비춰드는 달빛은 어둠을 서서히 푸른색으로 물들였다. 코렐은 벽 쪽으로 몸을 붙였다. 그는 벽을 따라 걸으면서 바닥에 대충 쓰러져 잠들 어 있는 그란과 운차이의 몸을 피했다. 선실 문을 열 때 낮은 삐걱 소리가 났지만 코렐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저녁 식사에 섞어둔 수면제는 지금쯤 최고조의 효과를 나타내고 있을 것이다.

선실을 빠져나온 코렐은 어둠 속에서 히죽 웃었다. 그 남자가 제시한 금액은 꽤나 단위수가 높았다. 그런데 이렇게 쉬운 일일 줄이야. 코렐은 저녁 식사 시간 동안 그 빨강머리 나이트호크를 가장 주의 깊게 살폈다. 그녀 역시 나이트호크였고, 따라서 요리에서 뭔가 이상한 맛을 느낄 가능성이 높 았다. 하지만 이 괴상한 일행은 저녁 식사 동안 끊임없이 서로 싸워대느라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조차 모르는 모습이었다. 그러 고는 이렇게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는 것이다. 코렐은 크게 웃고 싶었지만 입을 다문 채 조용히 복도를 빠져나갔다.

갑판으로 통하는 승강구를 올라가자 달빛이 휘영청한 네인 강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 남자는 고스빌 시내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지. 좋은 달빛 이군.

코렐은 갑자기 이 밤중에 시내까지 가야 된다는 사실이 귀찮아졌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냥 나루터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할걸. 괜한 조심이 었군. 저렇게 멍청한 녀석들에게 그 비싼 수면제까지 사용했단 말이지? 으음. 코렐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갑판에 올라섰다.

그리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콰당!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눈앞에 온갖 해괴한 색깔들이 가물거렸고 갑판에 대책 없이 부딪힌 이마와 코는 떨어져나갈 듯이 아팠다. 이 찝찔한 맛은, 퇘! 이런 제기랄! 혀를 깨물었나?

“우리나라 속담에 집에서 새는 주머니 밖에서도 샌다는 말이 있다.”

등 뒤에서 들려온 싸늘한 목소리는 그냥 목소리였을 뿐이다. 당황과 경악 속에서 코렐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헤아려보지도 못했다. 코렐은 재빨리 몸을 굴려서는 뒤를 돌아보며 일어났다. 일어선 그의 손에는 나이프가 들렸고, 그의 눈은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운차이는 한 손에 롱 소드를 든 채 문 옆에 길게 기대어 서 있었다. 네인 강에 쏟아지던 달빛의 일부가 그의 얼굴에 쏟아지며 그의 인상 전체를 몹시 이질적이면서도 냉혹해 보이게 만들었다.

“집 안에서 조심할 줄 모르는 나이트호크는 집 밖에서도 별 볼일 없지.”

운차이는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롱 소드를 뽑아들고서는 칼집을 옆으로 던졌다. 뎅그렁. 코렐은 자세를 낮추며 나이프를 눈앞으로 들어올렸다. 빠르 게 열린 코렐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운차이와 마찬가지로 나직했다.

“줄은 언제 묶었지?”

운차이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코렐은 그 대답을 깨달을 수 있었다. 오후에 갑판에 올라가서 파이프 피울 때였겠지. 그때 이 남자는 갑판으로 통하는 승강 계단 입구에 철사를 장치해 놓은 것이다. 승강 계단에 장식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걸까? 코렐은 싱긋 웃었다.

“자기 집 안에서 함정에 걸리는 바보가 있을 거라고는 믿지 않았는데, 내가 그 꼴이 날 줄은 몰랐군.”

“칼 치워.”

“달빛도 좋은데 이야기나 좀더 나누고 나서. 왜 수면제가 통하지 않은 거지?”

운차이는 조금 전 선실을 빠져나오기 전에 들었던 그란의 무지막지한 콧소리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면제를 탔나? 칼 치워.”

“저녁 식사에 조미료가 좀 부족한 것 같아서. 그런데 넌…………..?”

“체질이 그래. 칼 치워.”

“아, 그래? 놀라운데! 망할 약재상 녀석. 오거도 때려눕힐 수면제니 어쩌니 하더니. 그럼 말이야, 어떻게 해서 나를 의심하게 된 건지도 물어봐도 될 까?”

“너무 친절하더군. 칼 치워.”

“타인의 친절을 의심하다니! 역시 생긴 대로 삭막하게 사는 친구였군?”

“칼 치우지 않으면 그 팔 잘라버린다.”

운차이는 지금까지 목소리를 전혀 높이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 눈빛은 점점 사나워지고 있었다. 그 눈빛과 그의 마지막 말을 결부시켜 본 코렐 은 상황이 몹시 지저분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코렐은 절망적으로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 미소와 함께 운차이에게 나이프를 선물했다. 휘익!

운차이는 고개를 살짝 돌려 날아오는 나이프를 피했다. 퍽! 나이프는 선체에 꽂히며 둔한 소리를 냈고 코렐은 배 바깥으로 뛰어내렸다. 쿠당! 운차이 는 미끄러지듯 갑판을 움직여 뱃전으로 다가갔다. 부두로 뛰어내린 코렐은 이미 나루터 저편을 향해 맹렬히 달려가고 있었다. 운차이는 뱃전을 걷어 차며 배 바깥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고는 코렐의 등을 향해 낮고 강하게 외쳤다.

“너 붙잡은 다음에 도망친 발걸음 수만큼 때려준다. 알겠지? 마음대로 달아나 봐.”

코렐은 휘청할 뻔했지만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정말 삭막한 녀석이군.


“이봐요. 정신차려요.”

레이저는 자신의 뺨을 톡톡 두드리는 손길이 꽤나 감미롭다고 느꼈다. 그리고 이대로 조금 더 눈을 감고 기절한 척하고 있으면 이 손길을 좀더 즐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까지도 떠올렸다. 하지만 등에서 느껴지는 냉기와 허리 쪽을 찌르는 돌멩이의 감각은 아무리 과장하더라도 안락하다고는 말하 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래서 레이저는 눈을 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여자의 얼굴을 보았다.

둥근 얼굴. 어쩐지 바라보고 있는 사람을 나른하게 만드는 얼굴이다. 달처럼 창백한 이마 아래 눈은 깊다. 그리고 깊은 만큼 반짝인다. 레이저는 눈 을 몇 번 끔벅였다.

“꼬마구나……”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레이저를 내려다보고 있던 파는 그의 눈빛에 싱긋 웃었다.

“됐네요. 어서 일어나서 좀더 따뜻한 잠자리를 찾아봐요. 한데서 자면 감기 들어요.”

레이저는 거의 고맙다고 말할 뻔했다.

“병 주고 약 주냐? 으윽. 창자가 끊어지는군.”

“일으켜 세워줘요?”

“좋지.”

파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레이저의 팔을 붙잡아 일으켰다. 레이저는 간신히 일어섰지만 그러고서도 한참 동안 허리를 펴지 못했다. 복부를 부여잡은 채 레이저는 침울한 눈으로 파를 쏘아보았다.

“주먹이 참 맵더구나, 꼬마야.”

파는 허리에 손을 얹은 채 레이저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 참 불쌍하군요. 벌써 자신이 남자로서는 별 볼일 없는 나이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레이저는 얼빠진 얼굴로 파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무슨 말이니?”

“그렇지 않다면 나 정도 나이의 여자에게 그렇게 말할 리가 없잖아요. 당신보다 훨씬 나이 먹은 남자들도 나를 아가씨라고 불러요, 아니면 레이디라거나. 어쨌든 꼬마라고 부르는 사람은 처음 보겠군요. 자신이 도저히 젊은 여자를 넘볼 만한 나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레이저는 이제 기막힌 표정을 지은 채 눈앞의 당당한 레이디를 바라보았다. 그 당당한 레이디는 재빨리 레이저의 위아래를 훑어보고서는 고개를 갸 웃했다.

“30대 후반은 넘기지 않았죠?”

“그래요, 누나.”

“귀엽구나. 착한 어른이 되어야 돼. 누나는 이만 가봐야겠어.”

파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대답한 다음 화이트풋을 묶어둔 장소로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면서 레이저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하하하! 이봐, 꼬마 아가씨! 이름이 뭐야? 그리고 괜찮다면 나이도 좀 말해 줄래?”

“파 L. 그라시엘. 23년 전에는 세상에 없었던 여자랍니다.”

“좋아. 나는 레이저라고 하지. 남자들이 얼굴에 문지르는 거. 다시는 서른두 번째 생일을 맞이하지 않을 거야.”

파는 화이트풋에 올라탄 다음 레이저를 향해 걸어왔다. 그가 대로를 가로막듯이 한 채 서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좋은 여행 되세요, 늙다리 아저씨. 그리고 좀 비켜줘요.”

레이저는 옆으로 비키는 대신 손을 뻗어 화이트풋의 고삐를 붙잡았고 파의 눈썹은 위로 조금 올라갔다.

“질문 몇 가지만 하고. 이 도시에 살아?”

“아니오. 그리고 질문이 많다면 한꺼번에 물어줘요.”

레이저는 파의 요구를 무시한 채 하나씩 질문했다.

“그럼 말이야. 이 아저씨가 꼬마 아가씨가 보고 싶어질 땐 어떤 바람을 타면 되지?”

“어떤 바람이든 아저씨를 태우면 바스락바스락 말라붙어 버릴 테죠.”

“왜 이래. 첫인상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나도 알고 보면 습기 찬 우수를 가진 남자라고.”

파는 멀거니 레이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남자들이란 정말 못 말릴 족속들이군. 조금만 기분을 맞춰주면 자신이 천하에 둘도 없는 바람둥이나 되 는 것처럼 행동한다니까.

쳉은 그렇지 않은데.

“이봐요, 늙다리 아저씨. 나 오늘 저녁에는 인내심을 그다지 많이 발휘하진 못했어요. 그렇다고 해서 남아도는 인내심 아저씨에게 쓰고 싶은 생각도 없어요. 아까 아저씨 마음 씀씀이가 고와서 지금까지 참은 거네요. 그러니 이제 나를 그만 귀찮게 하고 당장 비켜요. 그렇잖으면 남자도 하혈할 수 있 다는 것을 가르쳐드리지요.”

파의 말은 단조로웠고 그 마지막 말에 대한 레이저의 당황은 좀 늦었다.

“……남자가 어떻게?”

“방광 있는 부분을 짧게 끊어치면 돼요. 소변에 피가 섞여 나오게 해드릴 수 있는데, 어때요?”

레이저는 그냥 웃어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웃음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는 다시 계단에 쓰러져 있던 남자를 떠올렸다. 그리고 조금 전 그가 기절할 때 눈앞의 이 꼬마 아가씨는 도박장으로 들어갔던 것을 기억해 냈다. 그런데 지금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으로 나와 있으면서 그를 향해 몹시 꺼림칙한 제안을 하고 있다.

레이저는 자신도 모르게 옆으로 비켜섰다.

그를 내려다보던 파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떠올랐다. 레이저는 문득 이 꼬마 레이디의 입술이 달빛 아래 굉장히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사실을 깨달았 다. 파는 천천히 고삐를 틀어쥐고는 레이저를 향해 고개를 까닥였다.

“좋은 선택이에요. 헬카네스가 당신 손길을 보살피길 기원드리죠. 이랴!”

파는 그대로 푸른 달빛을 부서뜨리며 대로의 저편을 향해 달려갔다. 남겨진 레이저는 멍한 얼굴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문득, 레이저는 조금 전 파에게 맞은 곳이 명치 쪽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의식중에 명치께를 쓰다듬던 레이저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으악! 사람 살려! 비명도 제대로 나 오지 않는 고통 속에서 레이저는 조심스럽게 심호흡을 했다. 이마엔 이미 땀이 흠뻑 배어 있었다.

레이저는 이마를 닦은 다음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도박장 쪽을 향해 걸어갔다.

계단에 주저앉아 있던 녀석은 이제 모로 쓰러진 상태였다. 입가에서 침을 질질 흘리며 기절해 있는 스테드를 조심스럽게 넘어서 레이저는 아래로 내 려갔다. 그리고 잠시 한숨을 쉰 다음, 각 방마다 돌아다니며 테이블 위에 흩어져 있는 돈들 중에서 정확히 3분의 1씩을 꼼꼼하게 쓸어 모으기 시작했 다. 남자들은 레이저의 행동에 대해 화를 내지는 않았다. 기절한 자들은 주위에 대해 관대한 법이니까. 레이저는 맞으면 기절할 정도로 아플 만한 부 위만 골라 맞고서는 뒤죽박죽으로 쓰러져 있는 남자들을 향해 진한 동지애를 느꼈다.

도박장 한켠에서 발견한 주머니에 돈을 쓸어 넣은 레이저는 기절한 사내들을 향해 돈주머니를 익살스럽게 흔들어보였다. ‘이봐, 도박판에서는 원래 따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법이야. 내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기절한 남자들은 무언의 긍정을 보내왔고 레이저는 휘파람이라도 불고 싶어졌다. 참 좋은 밤이었다.


“이천 걸음.”

“이 자식아! 그렇게 말하면 진짜 세고 있는 것 같잖아!”

“이천열 걸음.”

“………독한 놈! 재수없는 놈! 삭막한 놈! 몸서리쳐지는 놈! 으아아, 뭐 저런 녀석이 다 있어!”

“이천스무 걸음.”

코렐은 그만 몸을 돌려 운차이를 향해 달려가고 싶은 강한 욕망을 느꼈다. 틀림없어. 저놈은 일부러 날 보내주고 있어. 제기랄! 코렐은 이제 말도 되 지 않는 상상을 할 정도까지 되어버렸다. 만일 저놈이 원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날 붙잡을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저놈은 더 많이 때리기 위해서 나를 일부러 달아나게 내버려두는 거야. 저놈은 순종 사디스트야. 그건 저 녀석의 가문에 내려오는 전통일 거야. 저놈 핏줄에는 혹시 오크의 피가 흐르는 것 아닐까? 코렐은 그 점을 확인하기로 결심했다.

“이 자식아! 네 조상 중에 오크가 섞여든 건 몇 대째의 일이냐?”

나루터와 고스빌 시내를 잇는 오솔길은 고요했다. 밤이 펼치는 암흑의 그물은 대기 중에 흩어진 빛의 파편들을 남김없이 거두어들였다. 그러나 물처 럼 스며드는 달빛만은 이곳에서도 마찬가지로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코렐이 멈춰 선 곳은 오솔길이 끝나고 고스빌 시의 건물들이 눈앞으로 바싹 다가서는 위치였다.

코렐은 몸 곳곳에서 나이프를 꺼내어 양손에 하나씩 들고, 혁대에 세 개를 찔러둔 채 운차이를 쏘아보기 시작했다. 나루터에서 이곳까지 코렐을 뒤 쫓아 오면서 그를 반쯤 미치게 만들던 운차이는 천천히 멈춰 서서는 롱 소드를 들어올렸다.

“전부 이천서른두 걸음. 내 조상 중에는 오크가 없다.”

“거짓말! 나는 믿지 않아. 네놈은 틀림없이 오크의 피를 타고 태어난 놈이야!”

운차이는 화를 내지는 않았다. 오히려 곰곰이 생각에 잠기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우리 가계에 오크에게 붙잡혔던 여자는 없었다. 음. 글쎄. 어쩌면 우리 가계에 머맨의 피가 흐르고 있을지는 몰라. 하지만 오크의 피는 아 마 없을 거야.”

코렐은 화를 낼 기운도 없어졌다.

“머맨? 인어 말이야? 젠장, 농담은 좀 농담 같이 말하는 것이 듣는 사람도 편한….”

“농담이 아니다. 졸란에 사시는 내 고모님께서 고모부님과 함께 해변을 거닐다가 머맨에게 붙잡혀 갔던 적이 있지. 몹시 아름다운 분이셨거든. 고모 님은 다행히 도망치셨고, 신차이라 불리는 내 사촌 형을 낳았지. 그리고 사람들은 그가 머맨의 피를 타고 태어났다는, 약간은 낭만적이지만 악취미한 농담을 하곤 하지. 물론 내 사촌 형 면전에 대고 그렇게 말하는 간 큰 녀석은 없지만, 음…………, 잠깐. 그러고 보니 내 외가 쪽으로 맨티코어에게 붙잡혀 갔던 아주머니가 한 분 계시는 것 같은데. 기억을 좀더 떠올려 보지. 어쩌면 오크도 있을지 모르겠는데.”

달빛은 푸르고, 운차이는 추억에 잠겨들었고, 코렐은 입에서 거품을 뽀골뽀골 뿜어내고 싶어졌다. 그러나 그러는 대신 코렐은 오른손을 뒤로 당겼 다.

추억에 잠겨들었던 운차이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옆으로 달리는 코렐에 맞춰 운차이의 몸도 스르르 미끄러졌다. 그리고 그 순간 코렐의 몸 전체에서 매우 긴박하고 드라마틱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대지에 닿는 발에서 전달된 신호는 해석의 과정을 뛰어넘어 결론을 이끌었고 그 결론은 코렐의 다리를 즉각 제어했다. 자세 제어는 반사적으로 이루 어진다. 운차이의 움직임과 자신의 움직임을 한꺼번에 고려한 눈길은 무섭도록 빠르게 움직인다. 한껏 이완되었던 오른팔의 이두근은 팽팽하게 수축 된다.

어깨로 던진다. 손목으로 던지면 스냅이 들어가니까. 하지만 그 급박한 순간순간마다 허파는 노력을 다해 호흡을 부드럽게 이어나간다.

코렐의 나이프는 빗나갔다.

운차이는 코렐을 향해 육박해 들어갔다. 코렐은 왼손에 남아 있던 나이프를 막기 까다로운 각도로 던진다. 남은 평생 동안 한 번 더 이렇게 던질 수 있을까? 무섭게 날아오는 나이프를 보며 운차이는 씁쓸함을 느낀다. 묘기를 시도해야 된다는 것은, 멍청한 상황에 몸을 던져 넣었다는 증거. 운차이 는 자신의 무릎이 충분히 부드럽기를 바란다.

스르륵.

마치 눈앞을 가로지르는 나뭇가지를 피해 가듯, 운차이는 머리를 살짝 숙이며 날아오는 나이프의 아래쪽을 지나친다. 운차이의 머리카락들이 나이 프의 궤도에 휘말리며 진저리친다. 혁대 쪽으로 움직이는 코렐의 손은 그의 좌절을 담아 느렸고, 운차이는 발을 내뻗어 그 손 바로 위를 주의 깊게 찬 다. 손등과 복부를 한꺼번에 걷어차인 코렐은 뒤로 쓰러진다. 곧장 아래로 내리꽂히는 운차이의 롱 소드. 쉬시식.

롱 소드의 끝은 정확히 코렐의 목젖 앞에서 멈춘다. 두 사람의 움직임이 동시에 밤의 고요를 닮아버린다. 떠도는 바람의 결을 타며 운차이의 목소리 가 흘러나온다.

“누구지?”

롱 소드의 끝뿐만 아니라 운차이의 몸 어느 부분에서도 움직임은 찾아볼 수 없다. 운차이는 입술만 움직여서 질문했다. 그리고 땅에 쓰러진 코렐은 ‘코렐이야’라고 대답하면 몹시 위험한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씁쓸히 웃었다.

“몰라.”

“몇 놈이지?”

“내가 본 건 두 명.”

“얼마 받기로 했지?”

“300셀.”

“좋아. 나는 3셀이야. 만나기로 한 장소는 어디지?”

코렐은 겨우 100분의 1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배신을 요구하는 운차이에게 화를 낼 수 없었다. 그 요구를 거부할 경우 운차이의 롱 소드는 앞에 있 는 장애물에 구애됨이 없이 뻗어 나올 것이 분명했으니까. 그런데 그 장애물이라는 것이 코렐에게는 꽤 소중한 것이었다.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노 래도 부르고………… 누설도 할 수 있다.

“고스빌 시내 중앙 광장에서 2층에 불 켜진 창을 찾으면 돼.”

운차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코렐의 목에 롱 소드를 겨눈 채 그의 몸을 뒤지기 시작했다. 코렐은 입술을 꾹 깨문 채 하나만이라도 들키지 않기를 기 원했지만 운차이는 야속하게도 모든 나이프와 블로건, 다트들을 다 뒤져내었다. 코렐의 무장을 모조리 해제한 운차이는 아무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자신에게 엄격한 사나이답게 코렐에게 동전 세 개를 던져준 다음.

달빛 고요히 쏟아지는 오솔길에 주저앉은 채, 코렐은 배 쪽으로 사라져가는 운차이의 뒷모습을 넋 잃은 얼굴로 바라보았다. 여름을 부르는 벌레들의 울음소리가 간신히 그의 의식을 현실에 비끄러매었고, 그제서야 코렐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고개를 숙인 코렐의 눈에 길바닥에 떨어진 동전들의 반짝임이 들어왔다. 코렐은 동전을 노려보다가 쓰게 웃어버렸다.

“망할 놈……”

운차이와 그 자신 중 누구를 가리키는 말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말을 한 다음, 코렐은 그대로 주저앉은 채 내일의 해가 뜨자마자 해야 될 일에 대해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이대로 고스빌을 떠버릴까? 밥 먹고 살기에는 좋은 동네였는데. 에라, 턴빌에서 적당히 한 탕한 다음 잠시 나이트호크 영업 쉬 면서 여름 한철 모험이라도 다녀보는 것이 가장 괜찮겠는데. 그런데 지금 당장은 어쩐다? 배로 돌아가기도 그렇고 시내로 간다 해도 별 볼일이 없겠 군. 잠시 고민하던 코렐은 시내의 비밀 도박장에 가서 개평이나 뜯어보자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내일 아침 사태를 관찰한 다음 거취를 명확히 하 기로 결정했다. 스스로의 결정에 어쩔 수 없이 승복하면서 코렐은 운차이가 던지고 간 동전들을 주워 올렸다. 손바닥에 놓인 세 개의 동전을 바라보 던 코렐은 다시 한번 쓰게 웃으며 짐짓 쾌활하게 말했다.

“뭐, 이 정도면 오늘밤 보낼 밑천은 되겠는데? 하하하!”

코렐은 손바닥의 동전들을 위로 튕겨 올렸다. 달빛을 받은 동전들이 예리한 빛을 뿜었다. 마땅히도 동전들은 코렐의 손바닥에 떨어져야 되지만, 그 러나 그렇게 되지는 못했다.

동전들은 바닥에 떨어져 데굴데굴 굴러갔다.

한때 코렐의 꿈을 꿈꾸고 코렐의 즐거움에 즐거워하던 몸뚱이는 천천히 기울어갔다. 풀썩. 땅에 닿는 순간까지 코렐은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더럽 게 아팠다. 그리고 허락된다면 한번만 더 일어나서 휘파람을 길게 불어보고 싶었다. 아무도 듣지 않아도 좋으니, 구슬픈 음색으로 흩어져가는 휘파람 을.

신기했다. 코렐은 자신의 마지막 호흡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게 내 최후의 호흡이구나. 평생 동안 아무 생각 없이 하던 호흡이 이 순간 한번만 더 해 보고 싶은 소중한 것이 될 줄은 몰랐어.

코렐은 죽었다.

허공에서 내려온 발이 코렐의 등을 밟았다. 그리고 뒤따라 나타난 손은 코렐의 등에 꽂힌 대거를 틀어쥐었다. 대거가 뽑히면서 코렐의 몸이 꿈틀거 렸지만 그의 등을 무자비하게 밟고 있는 발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대거를 쥔 손은 코렐의 옷에 대거의 피를 닦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손 조금 위쪽 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배로 갔는데, 어떻게 하지?”

뒤이어 다른 목소리가 대답했다.

“배로 가서 다른 녀석들을 데리고 오겠지.”

“뒤따라가서 혼자 있을 때 치는 것은 어떨까.”

“좋지 않아. 저 자이펀 녀석은 상대하고 싶지 않은데.”

단조로운 목소리로 단조롭지 않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남자는 두 명이었다. 평범한 옷차림들이었지만 웬만한 문에서는 약간 비좁은 기분을 느낄 만 한 체구의 사나이들이었다. 투구를 많이 써서 시원하게 벗겨진 이마 아래 쭉 찢어진 눈들은 장미 향기보다는 피 냄새 쪽에서 안정감을 느낄 남자들임 을 확실히 깨닫게 해주고 있었다. 운차이가 사라져간 방향을 지그시 바라보던 남자들 중 하나가 체념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이 마을을 떠나야겠다.”

“음.”

코렐을 찌른 남자가 대거를 회수하자 두 사람은 지체하지 않고 곧장 발걸음을 떼었다. 그들은 조금 전 운차이가 사라져간 방향과 반대 방향, 즉 고스빌 시내를 향해 걸어갔다. 그들의 등 뒤로 남겨진 코렐의 시체에는 희푸른 달빛만이 떨어져내렸다.


파는 떨리는 손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잘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면서 파는 코렐에게 다가갔다. 코렐은 바닥 가득히 깔린 달빛의 웅덩이 속에 외롭게 떠 있었다. 파는 진저리를 치며 입 을 틀어막았다. 쳉, 이게 어떻게 익숙해질 수 있는 거니? 이 못된 감정 결핍증 환자 녀석아.

그대로 부서져나갈 듯이 떨리는 손을 간신히 뻗어, 파는 코렐의 이마에 손을 가져갔다.

손가락이 닿은 순간 끔찍한 기분이 들었을 뿐 눈꺼풀을 감겨주는 것은 간단했다. 파는 그 옆에 무릎을 꿇은 채 한참 동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윙윙 거리는 귓속으로는 자신의 맥박 소리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때였다.

“죽은 거야?”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기겁하며 파는 재빨리 몸을 돌렸다. 이마 가득히 푸른 달빛을 받으며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남자는 코렐의 시체를 내려다보다가 짓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 남자, 네가 죽인 거냐? 아, 아니군. 칼을 맞은 거지?”

파는 멍청한 얼굴로 남자를 올려다보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레이저 씨?”

레이저는 시체를 흘끔흘끔 바라보다가 힘들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네가 발견한 거야? 이런. 이 친구는 왜 이 밤중에 이런 오솔길에서 칼에 맞아 죽어 있는 거지. 이 친구가 네가 찾는다는 그 나이트호크야?”

“어떻게 아는 거죠?”

“데브가 안부 전해 달라더군. 이를 꽤 갈던데.”

“왜 따라온 거죠?”

말을 마친 파는 이미 똑바로 일어서 있었다. 그녀는 도발적인 표정을 담은 얼굴을 옆으로 약간 기울인 채 레이저를 올려다보았고 레이저는 다시 한 번 별로 매력이 없는 미소를 지었다.

“아아. 꼬마 아가씨는 자기가 받아야 될 돈을 챙기지 않았더라고. 그래서 내가 대신 챙겨 왔지.”

“돈………… 이라고요? 무슨 돈이오?”

레이저는 히죽 웃으며 품속에서 돈 주머니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파의 얼굴 앞으로 주머니를 흔들며 익살맞은 목소 리로 말했다.

“아가씨는 도박장을 휩쓸었잖아. 비록 도박으로 휩쓴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휩쓴 건 휩쓴 거지. 그러니 그 돈은 아가씨 거야.”

파는 이제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당신? 그 도박꾼들이 기절한 사이에 돈을 챙긴 건가요?”

“기절시킨 건 꼬마 아가씨지. 이 아저씨는 돈만 챙겼고.”

파는 기막힌 표정으로 레이저를 쏘아보다가 두말없이 몸을 홱 돌렸다. 파는 땅에 쓰러진 코렐을 바라보지 않으려 주의하면서 그대로 화이트풋을 묶 어둔 장소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레이저는 당황해서 말했다.

“어? 이봐. 파. 돈 가져가라고.”

“기절시킨 건 나고 돈을 챙긴 것은 당신이잖아요. 그러니 그 돈은 당신이나 챙겨요.”

“뭐가 그렇게 급한 거야? 언니가 도대체 무슨 사고라도 만난 거야?”

“당신 알 바 아니에요.”

파는 화이트풋에 올라탔으며 레이저는 다시 한번 파를 놓치게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좋지 않았다. 그래서 레이저는 재빨리 화이트풋의 앞 을 가로막았다. 파의 눈이 가늘어지며 동시에 레이저의 눈은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꼬마 아가씨. 하혈이니 뭐니 하는 끔찍한 소리는 하지 마시고, 에, 또. 이 아저씨가 꼬마 아가씨를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아가씨는 뭔가 매우 위험 한 일에 뛰어들려고 하는 것 같단 말이야. 저 시체를 봐도 그렇고.”

“엘프 나무 찍는 소리하고 있다고 말해 드리겠어요. 비켜요.”

파는 앞에 레이저가 없다면 그대로 달려 나갈 태세였다. 그리고 레이저에게 있어 더 인상적인 것은, 파는 앞에 레이저가 계속 서 있을 경우 밟고 지 나갈 태세였다는 점이다. 그래서 레이저는 다급하게 말했다.

“파 L. 그라시엘! 당신은 주먹도 세고 배짱도 충분해. 여자에게 이런 칭찬을 해본 것은 처음이군. 하지만 아가씨에게는 뭔지 모르게…., 젠장. 아가 씨를 보면 누구나 도와주고 싶어질 거야! 꼬마, 너에겐 그런 분위기가 있단 말이야. 내버려두면 다 타버릴 불꽃같은. 그게 이 아저씨를 자꾸 자극하는 데.”

마지막 말은 ‘그냥 달려 나갈 경우 레이저가 알아서 피하겠지.’ 정도로 생각하고 있던 파를 멈추게 만들었다. 파는 미심쩍은 눈으로 레이저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뜻이죠?”

“아가씨는 원하지 않는 것을 향해 숨이 끊어져라 달려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단 말이야.”

파는 고삐 든 손을 내렸다. 완전히 확신하기에는 조금 모자란 동작이지만 어느 정도 안정을 느낄 수는 있었다. 그래서 레이저는 조금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데브 말이야. 그 녀석은 아가씨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더라고. 이건 그대로 전하는 말이야. 괄괄하긴 하지만 시원스러운 애인데 왜 저렇게 뒤가 없는 사람처럼 구는 건지 모르겠다더군.”

파는 아직껏 입을 열지 않았다. 레이저는 힘겨움을 느끼며 말을 이어나갔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이건 모르는 사람의 일에 대해 보통 사람이 던지는 의문으론 좀 이상하게 보일 거야. 하지만 아가씨의 분위기가 그러니 까…………, 도대체 아가씨를 채근하는 것은 뭐지?”

“죽여버리고 싶은 사람에 대한 사랑.”

파는 레이저의 놀란 얼굴을 보고 나서야 자신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레이저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하늘의 비탈을 거슬러 올라가는 달의 수레의 궤적이 레이저의 눈에 가득 들어왔다.

오로라와 망각의 이사는 오로라를 짜내는 그의 처녀들의 탄원을 받아들여 하늘에 있는 빛 중 태양의 광휘를 제외한 모든 빛을 날실로 허락했다. 콧 등에 떨어지는 달빛을 보던 레이저는 오늘 밤의 달빛은 화렌차의 세 기사 중 의미의 기사의 망토를 짜는 데 사용하면 멋있으리라는 생각을 떠올렸다. 

“뭐, 그럴 수도 있어. 복수도 의미와 같이 다니기 싫어하는 것들 중의 하나니까.”

“복수 아니에요.”

“의미가 없다면, 복수가 아니라는 거야? 음. 그런데 꼬마 아가씨, 너는 말했잖아. 죽여버리고 싶은 사람에 대한 사랑이라니. 그럼 그건 아주 희귀한 종류의 의미를 가져다붙여야 되겠는데. 그 죽여버리고 싶은 사람이 언니야? 언니를 사랑하는데, 죽여버리고 싶다고?” 레이저는 점잖지 못하다. 

“언니 의 애인이라도 사랑하는 거야?”

“그럼 안 되나요?”

이런 대답은 예상하지 못했던 레이저는 고개를 내려 파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뒤로 두 걸음 물러나며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레 이저가 본 것은 이사의 가장 큰 은혜가 있다 해도 잊을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얼굴이었다.

서늘한 파의 눈빛 속에서 예리하게 번뜩이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레이저는 파의 굳은 입술이 (아까는 저 입술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움직이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만은 레이저를 향해 아프게 날아왔다.

“그럼 안 되냐고 물었는데, 레이저 씨.”

파의 얼굴을 보며 뒷걸음질 치던 레이저는 땅에 쓰러져 있던 코렐의 시체에 발이 걸리고 말았다.

“어, 으어엇!”

뒤로 나동그라진 레이저는 코렐의 시체 위를 뒹굴게 되었다. 아직 근육 경직이 일어나지 않은 코렐의 팔은 기묘하게 꿈틀거리다가 레이저의 얼굴을 때렸고 레이저는 지독한 감정을 맛봐야 했다.

“끄아아아악!”

레이저는 소스라쳐 코렐의 팔을 밀어버리며 일어났다. 하지만 다리가 꼬여버린 레이저는 절반쯤 일어나다가 다시 쓰러졌다. 탄력이 사라져가는 코 렐의 시체는 레이저의 몸 아래에서 다시 한번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모습으로 출렁거렸다. 레이저는 미쳐버리고 싶어졌다. 그리고 파는 시체와 나뒹 굴고 있는 레이저의 모습을 싸늘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음 순간.

휘이익. 파는 코렐의 시체와 뒤엉켜 있던 레이저의 몸 위로 날아올랐다. 화이트풋의 거대한 동체가 밤하늘을 모조리 가리는 순간 발광하고 있던 레 이저는 숨이 딱 멎는 느낌을 받으며 멈춰버렸다. 가장 짧은 순간에 가장 긴 비행. 코렐의 몸 위에 드러누운 채 레이저는 입을 쩍 벌리고서 파를 바라 보았다.

레이저가 정신을 수습해 뒤를 돌아보았을 때 화이트풋의 모습은 이미 오솔길 저편의 어둠 속으로 사라진 후였다. 다그닥다그닥. 맑은 밤공기를 때리 는 말발굽 소리만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레이저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제엔장. 저 계집애는 아무래도 일세인이 현신한 모습일 거야.”


쳉은 얼굴을 간질이는 뭔가의 느낌을 받았다. 미세한 느낌. 벌레인가? 쳉은 오른손을 얼굴 쪽으로 휘둘렀다. 그러나 쳉의 손길에 닿는 것은 매우 부 드러운 어떤 것이었다. 쳉은 눈을 떴다.

“파?”

“일어났어? 미안해. 잠 깨웠구나.”

“뭔데?”

파는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아, 얼굴에 뭐가 붙은 것 같아서 떼어주려고.”

쳉은 일어났고, 여전히 파의 귀를 바라보며 말했다.

“늦었나? 음. 지금 달이 어디쯤이지?”

지평선에 둘러싸인 밤은 둥글고 넓다. 방랑자들의 고질병, 매일 눈을 뜰 때 뭔가 잘못된 장소에서 깨어난다는 느낌을 이번에도 받으며 쳉은 머리를 휘둘렀다. 주위는 새벽 직전의 가장 어두운 공기였고 쳉은 그 속에서 풍겨오는 온갖 것들의 냄새를 가슴 깊이 빨아들였다.

땀 냄새? 이상하군. 기지개를 켜던 쳉은 손을 내리며 의아한 눈초리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파는 여전히 등을 보여준 채 고스빌 쪽을 향해 앉아 있었 다. 말들을 보던 쳉은 화이트풋이 약간 땀에 젖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저 말이 왜 저래? 그러나 쳉은 대수롭잖게 생각하고는 더 급한 일을 떠올렸다. “자, 가자. 늦겠어. 아무래도 세수와 아침 식사 등은 고스빌에 도착한 다음으로 미루지.”

파는 등을 돌린 채 낮게 말했다. 웅얼거리는 것 같았다.

“피곤하지 않아?”

“괜찮아. 그런데 넌 졸리니?”

“가.”

파의 그림자가 스르륵 일어났다. 부지불식간에 쳉의 눈길을 붙잡아 두는 몸놀림이었고, 그래서 파에게 뭐라고 말을 걸려던 쳉은 입을 다물고 말았 다. 어두운 파의 음영은 그대로 일어서더니 몸을 돌려 말을 향해 걸어갔다. 쳉 쪽은 바라보지 않았다.

새벽의 어둠 속에 희미하게 보이는 파의 모습은 신비로웠다. 언뜻언뜻 드러나는 옆얼굴. 그리고 하얀 손. 무릎과 팔꿈치가 잠시 어둠 위로 드러났다 가 뒤로 사라지며, 파는 말 위에 올라 있었다.

“어서 타. 빨리 가야지?”

“응? 아, 그래.”

쳉은 화급히 모닥불에 남은 불씨를 밟아버리고는 캐시헌터에 올랐다. 쳉이 말에 오르자 파는 그대로 아무 말 없이 달려 나갔다. 쳉은 그 뒷모습을 잠 시 바라보다가 파의 머리 위 희미한 다크 블루로 물드는 새벽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랴!” 쳉은 파의 뒤를 따라 달려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출발하고 남겨진 모닥불에서는 가느다란 연기가 피어올랐다. 평원의 바람을 탄 연기는 희미하게 갈라져 사라지며 사라진 시인 파하스의 추모곡을 부르기 시작했다.

ㅎㅎㅎㅎㅎㅎㅎ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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