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 워커 1권 – 2장 시인의 귀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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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잘 되고 있지는 못합니다. 레니 양이 돌아와 주었으면 좋겠군요.”
루미너스의 달빛을 바라보며 칼은 중얼거렸다. 그의 등 뒤에서 낮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대답했다.
“레니가 돌아오길 바란다고?”
칼은 빙긋 웃으며 몸을 돌렸다. 달빛이 쏟아지는 테라스 난간에 기댄 칼은 어두운 방 쪽을 바라보았다. 그가 서 있는 위치에서는 달빛에 드러난 두 개의 발과 의자 다리, 그리고 그 위의 로브 약간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머지는 방의 어둠 속에 숨겨져 있었다. 칼은 그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자를 향해 말했다.
“레니 양이 돌아오면 당신도 오게 되는 것 아닙니까, 위대하신 분이여.”
“그녀는 고향에서 얻을 수 없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당신은 어떠십니까.”
“나의 라자 곁에 있는 것이 좋아. 그녀는 생선 요리를 잘하지.”
“생선 요리요? 음………….., 요즘은 어디에 기거하고 계십니까?”
“델하파의 앞바다.”
“허어, 선원들이 난리가 났겠군요? 아니, 온 일스가 난리 아닙니까?”
“아니. 그들은 아직 모르고 있다.”
“흐음. 폴리모프 하신 채로 지내십니까?”
“녀석들은 내가 퇴직한 공무원 정도인 걸로 생각하고 있지.”
“설마…………, 낚시질을 하고 계신 겁니까?”
“재미있더군.”
칼은 빙긋 웃을 수밖에 없었다. 델하파의 방파제에 앉아서 낚싯바늘에 미끼를 끼우고 있는 블루 드래곤이라니. 그가 정체를 드러내는 순간 심장 마 비로 쓰러져버릴지도 모르는 뱃사람들의 인사를 받으며 말이지? 허허, 참.
“그런가요. 그녀가 마음에 드십니까, 지골레이드?”
칼의 질문은 앞쪽의 질문에 그대로 이어지듯이 나왔고, 그래서 기습적이었다. 어둠 속의 지골레이드는 잠시 말을 잊은 채 앉아 있었다. 칼은 속으로 숫자를 세기 시작했고, 대략 열대여섯쯤 세었을 때 지골레이드의 대답이 들려왔다.
“드래곤과 드래곤 라자의 관계는 호오를 뛰어넘는 것이다. 칼. 너는 네 오른팔과 왼팔 중 어느 것이 마음에 들지?”
비록 평범한 목소리였지만 지골레이드의 말은 삼엄했다. 블루 드래곤다운 맹포함이 미미하게 배어나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칼은 어깨를 움츠렸다. “질문이 잘못되었군요. 죄송합니다. 글쎄요. 저는 단지 당신의 슬픔이 그녀로 인해 조금 희석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지라……………”
“칼.”
칼은 고개를 들어올리다가 조금 전 보았던 위치에서 지골레이드의 발이 사라진 것을 깨닫고는 당황했다. 거기에는 이제 빈 의자만이 남아 있을 뿐이 었다. 어디로 간 거지? 그때 날카롭고도 나직한 목소리가 그에게 날아왔다.
“크라드메서를 죽인 것은 나다.” 칼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에게 부채를 지고 있는 셈이지. 내가 그를 죽였으므로, 나는 그가 이루지 못 한 것들을 이뤄야 할 의무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그게 드래곤다운 일이지. 이해하겠는가?”
칼은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생각에 잠겼다. 최강의 이그누스 드래곤이 이룩하지 못했던 것? 그가 그 비탄스러운 죽음의 순간에 바랐던 것…………, 바이 서스의 멸망. 칼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떨릴 수조차 없었으니까.
“하실 겁니까?”
“나의 라자가 싫어할 거야.”
털썩 소리가 들리며, 칼은 다시 의자에 앉은 지골레이드의 발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조금 전 그의 왼쪽 귀 바로 옆에서 들려왔던 낮은 목소리는 아 직껏 여운을 남기며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칼은 쿵쾅거리는 심장을 천천히 억제했다.
지골레이드는 피로한 목소리로 말했다.
“본론을 말하지. 내일 아침까지는 일스로 돌아가야 하니 밤을 틈타 날아갈 생각이네. 이미 루미너스의 눈길이 서쪽을 향하는군.”
칼은 이를 악물었다. 빠르게 평정을 되찾은 칼은 이제까지와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델하파의 앞바다에 계신다고 하셨지요?”
“응.”
“그렇다면………, 루펠만 해변 앞의 항로에 대해 들어보셨는지요.”
“그건 알고 있다만. 자이펀의 뱃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는 항로지.”
“그 항로가 막힌다면 어떻겠습니까?”
지골레이드는 칼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신을 이용해서 이 쓸모없는 전쟁을 중단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쪽에서만 발을 뺄 수는 없지요. 휴전을 제안할 상황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지골레이드는 피식 웃었다.
“웃기는군. 내가 널 도와야 할 이유를 다섯 가지만 말해 봐.”
“다섯 가지? 예. 첫째, 중도를 지키는 이그누스 드래곤의 이름으로 부탁하겠습니다. 그리고………”
“뭘 하면 되지?”
이번엔 칼이 웃을 차례였다.
이틀 뒤, 루펠만 해안 앞 4펜큐빗 해상. 이 계절에는 보기 힘든 강렬한 폭풍이 해원을 할퀴고 있었다. 파도의 끄트머리에서 피어올라 비산하는 포말 은 허공에 시린 은선을 그어대었고(꽈아아앙!), 먼 수평선에 그려지는 벼락들은 회색 하늘을 극채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꼼꼼한 장인의 손으 로 그려진 듯한 무수한 동심원들 사이로 가라앉는 배의 모습은 낙뢰의 기괴한 은광 속에 예리한 윤곽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요란한 천둥소리에 묻혀버린 비명은 모두 자이펀 어였다. 그러나 그 소리를 듣지 않아도 노련한 뱃사람이라면 수평선 위로 이상한 각도를 그린 채 번득이고 있는 마스트만 보고도 이 배가 자이펀 바크임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삼장범선(三橋帆船)이며, 원양 항해에서도 발군의 성능을 나타내는 자이펀의 무역선이다. 어쨌든 웬만한 폭풍은 쉽사리 견뎌내는 배다. 하지만 이 ‘바다를 떠도는 금고’라 할 만한 배는 이 세계의 것이 아닌 것만 같은 위력적인 공격 앞에 비참할 만큼 무력한 모습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꽈루루룽! 다시 한번 몰아친 파도는 배의 옆구리를 통째로 뜯어낼 듯했다. 벼락에 물든 하늘은 이제 초절적인 보랏빛으로 번득이고 있었고 군데군데 불타고 있는 배의 갑판에서는 지독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 불타는 갑판 위로 선원들은 보트를 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엉켜버린 밧줄과 뒤흔들리는 갑판은 선원들의 필사적인 노력을 무위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튜르릉! 몰아쳐온 파도에 다시 나동그라진 선원들은 절망적인 눈으 로 포마스트 쪽을 바라보았다. 포마스트 아래쪽에서는 한 사나이가 돛줄을 움켜쥔 채 고래고래 고함지르고 있었다.
군데군데 그을려 있긴 했지만 입고 있는 옷은 선장의 옷이었다. 몰아치는 광풍과 파도가 배를 가랑잎처럼 뒤흔들고 있었기에 선장은 당장이라도 쓰 러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돛줄을 움켜쥔 선장은 비틀거리면서도 쓰러지지 않았다. 분노가 그를 쓰러지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선장은 핏발선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외쳤다.
“언젠가, 언젠가 반드시!”
꽈웅, 튜르르릉! 뱃전을 넘어선 파도가 선장의 몸 위로 거센 물보라를 쏟아놓았다. 거의 돛줄을 놓칠 뻔했지만, 그러나 선장은 쓰러지지 않았다. 물 에 젖어 달라붙은 머리카락 사이로 선장의 눈은 시퍼렇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선장은 목이 터져라 외쳤다.
“반드시, 나의 아들이나 손자, 그 손자의 손자라도! 나의 후예가 기필코 너의 그 악독한 심장에 검을 꽂아넣을 것이다! 너의 피를 받아낼 것이다!”
“선장님! 빨리 보트에 오르십시오!”
뒤에서 달려든 갑판장이 선장의 팔을 거칠게 잡아당겼지만 선장은 갑판장의 팔을 뿌리치며 미친 듯이 외쳤다.
“비켜라! 배가 선장을 떠날 수는 있어도, 선장이 배를 떠나는 법은 없다! 나는 배와 함께……”
선장의 외침은 중간에서 끊어져버렸다. 다음 순간 하늘로부터 엄습해 들어오는 거대한 그림자가 선장의 입을 막히게 만든 것이다. 몰아치는 광풍을 찢어발기며 무서운 속도로 날아든 것은 선장의 시야 전체를 가혹하게 유린했다.
“캬아아아아악!”
거센 포효 소리에 폭풍마저 잠시 숨을 멈추는 것 같았다. 어떻게든 보트를 내려보려고 안간힘을 쓰던 선원들은 이제 손을 놓아버린 채 하늘을 올려 다보았다. 그곳에는 이 배를 불태워 침몰시키고 있는 존재가 거대한 날개로 하늘을 가리며 날아들고 있었다. 번득이는 번갯불은 그 날개를 희게 물들 였고 쏟아지는 빗발에 번들거리는 동체는 현란한 푸른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선원들은 처절한 절망 속에서 모든 것을 포기한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선장을 이끌던 갑판장도 부지불식간에 선장을 놓고서 하늘을 응시했다. 그 때였다. 선장은 갑자기 돛줄을 놓고 달려가기 시작했다.
“서, 선장님?”
한 자루 단검을 품고 적진으로 뛰어드는 암살자의 몸놀림으로, 선장은 뒤흔들리는 갑판 위를 날듯이 달려갔다. 앞갑판을 단숨에 가로지른 선장은 이 물로 뛰어올랐고 서 있기조차 힘든 선원들은 망연히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윽고 포마스트 앞 선수루에 이른 선장은 얼굴을 가리는 물기를 닦 아내고는 다시 하늘을 쏘아보았다.
선장은 몰아치는 비바람 속에서 두 팔을 벌렸다.
번쩍이는 번개 속에 선장의 모습이 이물 위로 하얗게 솟아올랐다. 결연히 펼친 두 팔은 마치 배를 향해 날아드는 드래곤을 멈춰 세우기라도 할 듯한 모습이었다. 선원들은 모두 눈을 부릅뜬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선장은 목이 터져라 외쳤다.
“가져가라! 그러나 너 역시 네가 가져간 것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캬아아아악!”
잠시 후, 블루 드래곤이 토해 놓은 벼락의 폭포는 침몰하는 배를 두 동강내 놓았다.
바이서스의 이파실 시는 질병과 까마귀의 게덴의 성지이다.
사우스그레이드의 중심에 해당하는 이파실 시는 게덴의 사자인 두 머리 까마귀 체로이의 둥지가 있는 곳이며 대륙의 모든 질병이 시작되는 곳, 동시 에 모든 질병의 치료약을 찾을 수 있는 곳이다. 질병이 시작되는 곳에 치료의 수단이 가장 잘 발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니까 저 못된 녀석의 Demunizairo를 치료할 약도 있어야 될 거 아냐.”
이파실 시의 한적한 펍에 앉아 있는 드워프가 텁텁한 목소리가 말을 꺼냈다.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있던 젊은 프리스트는 고개를 갸웃했다. 엑셀핸 드가 인용한 단어를 알아들을 수 없었던 제레인트는 고개를 돌려 의자에 깊숙이 앉아 있는 갸름한 얼굴의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마법사 아프나이델은 쓰게 웃으며 말했다.
“뭐…………, 지랄병이라고 번역하면 되겠군요. 드워프 어입니다.”
제레인트는 웃음을 터뜨리기 직전의 표정으로 말했다.
“하하, 엑셀핸드. 성격은 병이 아닙니다.”
엑셀핸드는 굵은 눈썹을 한쪽은 찌푸리고 다른 쪽은 위로 올리며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글쎄. 저 녀석이나 네 녀석의 경우를 보면 성격도 병이 될 수 있는 것 같은데.”
“예? 제 성격이 어때서요?”
“관두지.”
액셀핸드는 드워프답지 않게 대답을 회피하며 맥주잔을 들어올렸다. 제레인트나 아프나이델이 1파인트짜리 맥주잔을 앞에 놓고 그것을 관상용으로 바꿔버린 것에 비해 볼 때, 엑셀핸드는 드워프에겐 지나치게 커 보이는 2파인트짜리 잔을 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굵은 팔꿈치 로 턱수염을 닦아내던 엑셀핸드는 다시 눈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썹을 찌푸리며 카운터 쪽을 바라보았다.
“오빠, 오빠! 오빠 너무 멋있어. 응? 그런 말 많이 듣지? 안 그래요?”
카운터 뒤에 앉아 있던, 덥수룩한 수염은 능히 빗자루질이라도 가능할 듯하며 얼굴 가득한 주름살로 능히 사포질이라도 해댈 수 있을 것 같은 풍모 의 주인장은 기막힌 표정으로 카운터 앞의 소녀를 쳐다보았다. 열대여섯 살쯤으로 보이는 소녀는 카운터에 기대선 채 치렁치렁한 금발머리를 이마 뒤로 쓸어넘기며 고혹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노인장은 치근이 부실한 이를 드러내며 카랑카랑하게 말했다.
“너 지금 뭐하는 거냐?”
“너하고 사귀어보려는 거예요. 제 속엔 너무 많은 외로움이 있거든.”
엑셀핸드는 테이블 옆에 놓여 있던 거대한 배틀 액스를 발작적으로 움켜쥐었다. 엑셀핸드가 소녀를 향해 배틀 액스를 집어던지기 직전에 그의 팔을 부여잡은 제레인트는 황급하게 말했다.
“엑셀핸드, 엑셀핸드! 참아요. 여긴 시내라고요!”
오른손이 붙들린 엑셀핸드는 아무 대답 없이 재빨리 배틀 액스를 왼손으로 바꿔쥐었다. 바람처럼 날아든 아프나이델의 손이 그의 왼손을 붙들자 엑 셀핸드는 끔찍한 신음을 뱉어내었다. “끄으으응! 이거 놔!” 엑셀핸드가 맹렬하게 일어나는 통에 하마터면 집어던져질 뻔했던 프리스트와 마법사는 이 제 결사적으로 엑셀핸드의 팔에 매달렸다. 그러자 엑셀핸드는 양팔에 매달린 두 젊은이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앗! 하늘을 나는 기분이야!”
“제, 제레인트. 저, 정말 날고 있는 겁니다만, 으으아아아!”
그러나 금발의 소녀는 홀 한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묘기(신력과 마력을 양손에 쥐고 흔드는 드워프의 모습은 모험가들의 전설이 아무리 길었다 한들 이것이 최초 일 것이다.)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촉촉이 젖은 입술을 꿈틀거리며 말하고 있었다.
“세상엔 정이 없어. 정이 많은 이 동생이 기댈 어깨가 없어요. 오빠 어깨는 참 넓어 보이네요. 그리고 네 눈은 정말 예뻐. 그런 눈은 처음 봤어요.” 달그락. 노인장이 입을 쩍 벌리자 그 입에 불안하게 걸려 있던 파이프가 카운터로 떨어졌다. 숨 막히는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다른 손님 들 역시 입을 쩍 벌렸다. 노인장은 황급히 파이프를 주워올리고 카운터에 흩어진 재를 닦아내며 외쳤다.
“이 못된 계집애! 무슨 봄날 망아지 흉내를 내는…..”
금발 소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전 못된 계집애야. 그래서 못된 짓도 할 수 있다고요. 기대되지 않니? 너 해달라는 대로 해드릴 수 있는데. (입술을 앞으로 조금 내밀며) 상상하 기 어려운 일까지 말이에요.”
노인장은 기어코 폭발했다. 그러나 노인장이 노성을 지르기 직전 굉장한 소리가 나며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엑셀핸드가 배틀 액스를 집어던지기를 포기한 대신 아프나이델을 집어던져 버린 것이다.
“으아아악! 비켜, 아일페사스!”
아프나이델은 사지를 휘두르며 날아들었다. 하지만 소녀는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살풋 몸을 틀었고 그러자 아프나이델은 카운터에 부딪히고는 나가 떨어졌다. 허리를 한 번 뒤트는 것만으로 날아드는 마법사를 피해 낸 소녀는 한심스럽다는 표정으로 쓰러진 아프나이델을 내려다보았다.
“나이드, 나이드. 제 이름을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왜 제 말을 안 들어요?”
아프나이델은 격렬한 통증에 몸을 뒤틀면서도 간신히 미소를 지었다.
“아일페사스……………, 제발 부탁이니 지금 하고 있는 해괴한 짓 좀 멈추고……”
“머리가 나쁜 것은 용서가 되어도 노력까지 안 하는 것은 용서가 안 되잖아요, 나이드. 몇 번이나 말했잖니. 그런 퀴퀴한 분위기 나는 이름으로 부르 지 말라고. 그러니까……”
그때 아프나이델보다는 완력이 조금 낫다는 이유 때문에 아직껏 휘둘리고 있던 제레인트가 펍이 떠나갈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펫시! 달아나!”
아일페사스는 시익 웃으며 엉덩이 뒤로 두 손을 모으곤 제레인트에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꽤나 귀엽다고 생각할 만한 동작이었 다.
“착한 제리. 역시 제리뿐이야. 음………, 엑스 오빠가 좀 취한 거 같네요. 저 먼저 가볼 테니 여관에서 만나, 알았지? 미안해요. 눈이 예쁜 오빠. 제 동 행들이 질투하나 봐. 아쉽지만 다음날을 기약하자꾸나. 그때까지 다른 여자에게 한눈 팔면 안 돼요?”
노인장은 기어코 졸도하는 표정이 되었다. “끄어어…………” 그리고 엑셀핸드는 제레인트를 몽둥이 휘두르듯 휘두르며 달리기 시작했다. “어딜 달아나! 게 섰거라!” 만일 아일페사스가 그대로 서 있었다면 틀림없이 매우 신성한 몽둥이 찜질을 당했을 것이다. 프리스트로 맞는 것이니까. 하지만 아일페 사스는 미소만 남겨두고는 재빨리 펍의 입구를 통해 사라져버렸다.
결국 아프나이델이 펍의 주인장과 다른 손님들에게 몇 번씩이나 사죄를 하고 나서야 세 사람은 펍을 나올 수 있었다. 엑셀핸드는 아직까지도 수염을 꼿꼿하게 곤두세운 채 으르렁거리고 있었고, 뜻하지 않은 중노동에 시달린 두 사람은 지친 표정으로 그 뒤를 따라 걸었다. 따라서 세 사람의 모습은 이파실 시의 별 특색 없는 대로에 매우 이채로운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아프나이델은 힘없는 동작으로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후우. 그냥 인상적이어서 그랬을 겁니다, 엑셀핸드. 그 애한테는 작부의 모습이 희한했을 테지요. 그리고 작부들이 그렇게 말하면 남자들이 빙긋빙 긋 웃는 것을 보고서는 그게 좋은 건 줄 알았던 것일 겝니다.”
제레인트는 주위에서 쳐다보는 사람들을 향해 으르렁거리고 있던 엑셀핸드를 말리며 말했다.
“맞아요. 착한 아이니까요.”
“착, 한, 아, 이?”
“엑셀핸드. 그렇게 끊어 말하면 입 아프지 않아요?”
“제에엔장, 관두자고. 그건 그렇고 도대체 얼마나 더 있어야 되는 거야? 아일페사스가 점점 이상한 버릇만 들지 않는가! 벌써 사흘째야!”
엑셀핸드는 두 팔을 허리에 얹으며 제레인트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제레인트는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계면쩍게 말했다.
“글쎄요…………. 정말 너무 늦는군요.”
“젠장. 더 못 기다리겠어. 오늘 밤에도 연락이 없으면 그냥 떠나자고!”
아프나이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엑셀핸드, 일부러 이 도시를 지정했으니 여기에서 기다리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오래 기다려야 된다는 말은 없지 않았나!”
제레인트는 빙글거리다가 말했다.
“그렇지. 저랑 내기하시겠습니까, 엑셀핸드? 저는 오늘 밤에는 연락이 올 거라는 데 걸겠습니다.”
엑셀핸드는 기막힌 표정으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지만 뭐라 반박하지는 못했다. 어느새 세 사람은 숙소로 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이파실 시의 외곽 에 위치한 그렇고 그런 여관 중 하나인 ‘몰리스인’이 그들의 숙소였다. 여관 입구로 들어선 엑셀핸드는 홀 가운데 테이블에 앉아서 종업원을 향해 추 파를 던지고 있는 아일페사스의 모습을 보고는 그만 분통을 못 이겨 까무러치고 말았다.
“술을 안 주겠다면, 난 사랑을 할 거예요!”
아일페사스는 당당하게 선언했다.
제레인트는 환호를 지르며 박수를 쳤고 아프나이델은 마시던 맥주의 절반가량을 입으로, 그리고 나머지 절반가량은 코로 뿜어내었다. 아프나이델이 주위의 모든 사람에게 동시에 사과를 보내며 발갛게 된 얼굴을 손수건으로 가릴 때 엑셀핸드는 파이프를 짓씹으며 말했다.
“뭘 하겠다고?”
박수를 치던 제레인트가 얼떨결에 손을 공중에서 딱 멈춰버릴 정도로 냉랭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아일페사스는 자기 나이프와 포크를 접시에 아무 렇게나 던지며 당돌하게 말했다.
“사랑. 지고지순하며, 거기에 약간의 성적인 의미도 몰래 덧붙이고, 대개 연애라는 활동을 통해 증진 발전되는 총체적 감정의 흐름을 표현하는 것 인, 그런 보통 사랑 말이야.”
엑셀핸드는 크르렁 거리며 말했다.
“어째 협박치고는 이상하군. 게다가 저녁 식사 직후에 나오는 말 치고는 괴상할 정도다. 소화에 도움이 전혀 안 되는걸.”
“말 돌리지 말아요, 엑스 오빠.”
“오빠라고 부르지 맛! 나는 네가 지금까지 본 일몰의 숫자만큼의 첫눈을 본 드워프다!”
아일페사스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래서 그녀는 팔짱을 끼고는 허리를 꼿꼿이 폈다. 의자에 푹 파묻힐 정도로 작은 체구가 약간이나마 거대하게 보 이도록 애쓰며 아일페사스는 말했다.
“아빠.”
“네 아버님은 드래곤 로드지!”
“할아버지.”
“뭐야? 할아버지?”
“마이 달링.”
그제서야 아일페사스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본 엑셀핸드는 그 눈이 장난기로 번득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엑셀핸드는 아일페사스를 잡아먹는 대신 맥주잔을 잡아먹기로 결심했다. 제레인트는 엑셀핸드가 술 마시는 모습을 감동 어린 눈길로 바라보다가 아일페사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래, 펫시, 술을 안 주면 사랑을 하겠다고?”
“예.”
아일페사스는 제레인트의 대답에 당황했다. 제레인트는 이렇게 말했다.
“좋은 결심이야. 훌륭해! 내가 뭐 도와줄 것 없겠어? 누구를 노리고 있는 거지?”
“내가 알 게 뭐람?”
아일페사스의 대답은 다른 사람이 예상했던 것보다는 세 배쯤, 그리고 본인이 예상했던 것보다는 두 배쯤 냉랭했다. 제레인트는 당황한 표정으로 아 일페사스를 바라보았으나 아일페사스는 스스로 당황한 채 멍한 눈으로 제레인트를 마주보았다.
“펫시, 왜?”
“어, 씨. 알 게 뭐야! 남자도 없는데!”
“그래?”
“그렇긴 뭐가 그래요? 젠장! 재미도 없네!”
제레인트가 완전히 넋나간 표정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아일페사스는 의자에서 와라락 일어났다. 거칠게 일어서던 아일페사스는 그만 테이블 다리를 걷어차고 말았다. 접시와 나이프, 포크들이 요란한 소리를 냈으며 아프나이델의 맥주잔은 옆으로 쓰러졌다. 제레인트는 입을 쩍 벌렸고 아프나이델 은 입가를 닦던 손수건을 멈춘 채 아일페사스를 바라보았다. 아일페사스는 창백한 표정으로 테이블을 바라보다가 고함을 질렀다.
“익! 테이블이 왜 이래? 엉터리야!”
“아일페사스?”
“바보 같은 테이블! 젠장이잖아요! 에엑!”
아일페사스는 고함을 지르면서 몸을 돌렸다. 그래서 크게 꾸짖으려던 엑셀핸드는 그만 시기를 놓쳐버렸다. 아일페사스는 바람 같은 동작으로 2층 계단으로 사라져버렸고 제레인트는 멍한 얼굴로 계단참을 바라보았다.
아프나이델은 손수건을 주머니에 우겨넣으며 얼굴에 떠오르는 표정도 속으로 우겨넣었다. 이 노릇을 어찌한다. 엑셀핸드는 눈썹을 몹시 곤두세운 채 말했다.
“도대체 저 애가 왜 저래?”
제레인트는 아직껏 당황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글쎄요? 내가 뭘 잘못 말했나?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 정말 이상하군요.”
“이상하다니, 뭐가 말이야?”
“펫시 말입니다. 처음에 우리랑 함께 여행을 떠나게 되었을 때는 참 즐거워했다고요. 처음 보는 인간 세상의 것들에 대해서도 순진하게 재미있어했 고요. 그런데 요즘 들어 점점 이상한 것들을 찾게 되고……………. 아까 낮에도 그렇잖습니까? 저는 펫시가 작부의 행동에 흥미를 느낀다는 것이 사실은 이 해되질 않아요. 그리고 며칠 전에 대로에서 저지른 짓도 그렇고……”
엑셀핸드는 파이프를 깊이 빨아들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듣고 보니 그렇군. 혹시 병에 걸린 것 아닐까?”
“병이오? 어, 병이라니? 어디가 아프다는 말인가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아프나이델은 씁쓸한 표정으로 먼저 주위의 사람들에게 사과를 보냈다. 그러고는 열과 성을 다해 당황하고 있는 동료들 을 구제하기 시작했다.
“제레인트, 엑셀핸드.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
아프나이델은 스스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로 단순한 상황이다. 다른 두 일행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지만 아프나이델만은 조금씩 느끼 고 있던 것이 무자비하게 표면에 떠오른 것이다. 즉, 그들은 아일페사스를 드래곤 로드의 자손으로 보고 있었지만…………
“사실 아일페사스는 아직은 정서의 균형이 잘 잡히지 않은 틴에이저로 봐야 되는 거 아닐까요?”
엑셀핸드는 아프나이델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제레인트는 반대로 눈을 가늘게 떴다. “틴에이저라고요?”
엑셀핸드는 흥분해서 파이프를 휘두르려다가 간신히 참으며 말했다.
“이봐! 아일페사스는 드래곤이라고. 비록 폴리모프했지만 어떻게 자네가 저 아일 인간으로 착각하나? 10대 소녀라니, 원 참! 드래곤 로드께서 그 말 을 들었다간 기절하실지도 모르겠군.”
아프나이델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엑셀핸드. 아일페사스는 인간 소녀 쪽으로 보는 것이 차라리 낫겠습니다.”
“뭐야?”
“생각해 보십시오. 그녀의 경험 중 가장 강렬하고 중요한 것들은 저희들과 함께 여행하면서부터 겪은 일일 겁니다. 즉 인간 세상의 일들이지요. 그 전의 그녀에게 어떤 성격을 규정지을 수 있을 정도의 경험과 학습이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말게. 두더지를 물 속에서 키운다고 물쥐가 되던가?”
“글쎄요…… 엑셀핸드, 그랜드스톰의 프리스티스 에델린의 경우를 생각해 보시겠습니까?”
엑셀핸드는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아프나이델이 거론하는 에델린은 미드그레이드에서 ‘치료하는 손’으로 알려진 상당히 명망 높은 프리스티스 이다. 미드그레이드 전역을 주유하며 병든 자를 치료하고 굶주린 자에게 은사를 베풀고 도움이 필요한 모든 이들에게 자신을 바치기에 거의 성녀로 추앙받는 유명한 인물이지만, 그녀는 인간이 아니다. 사실 그녀는 트롤이었으며, 그것은 그녀의 명성에서 더욱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트 롤 토벌대의 병사에게 붙잡혀 우여곡절 끝에 대폭풍의 신전 그랜드스톰에서 자라난 그녀의 과거가 현재의 그녀를 설명한다. 즉, 지금 아프나이델은 원래 사람 잡아먹는 몬스터인 트롤도 인간 세계에서 자라나면 신을 노래하며 인간에게 봉사할 수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그렇다면 드래곤의 경우는?
“드래곤은 무한히 현명합니다만, 신은 아니겠지요. 그들도 어릴 때에는 어리석을 수 있으며 번민할 수도 있겠지요. 아일페사스같이 명민한 소녀라 도 다가올 날에 비할 때 지나온 날들이 보잘것없는 시점에서라면 마찬가지 아닐까요?”
“쉽게 말해, 쉽게! 그러니까 뭐야, 지금은 철없는 나이다 이 말 아냐?”
“그렇게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나 원 참. 이런 엘프 나무 찍는 소리가 다 있나.”
아프나이델은 어깨를 움츠리며 싱긋 웃었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여기서 우리는 중대한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제레인트는 동그래진 눈으로 아프나이델을 바라보며 역시 어깨를 움츠렸다. “그게 뭔가요?”
“우리 중에는 10대 소녀의 감수성에 동조할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죠.”
지금 아일페사스는 답답한 자기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일행에 대해 짜증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일행이라는 사람들이 프리스트에, 마 법사에, 드워프인 것이다. 프리스트는 신에게 다가가는 사람이다. 지상의 욕망에 대해서는 아예 처음부터 담을 쌓은 사람인 것이다. 그리고 마법사는 서커스를 볼 바에는 책이나 한 줄 더 읽고 촛불이 일렁이는 근사하고 멋진 식탁보다는 냄새나고 기괴한 마법 재료를 찾아 헤맬 사람이다. 게다가 드 워프는 가슴속의 번민과 소화 불량의 거북함 사이에서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종족이다.
“뭐야? 그게 무슨 뜻이야?”
“일종의 비유니까 신경 쓰지 마십시오. 어쨌든 제가 말하고 싶은 바는, 우리들 중에는 틴에이저의 꿈을 이해하고 들어줄 만한 사람이 없다는 뜻입니 다.”
제레인트는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그것 참…………. 정말 그렇군요.”
“제 생각에는 말입니다, 지금 아일페사스에게 필요한 것은 친구가 아닐까요?”
“친구? 우리가 그 애의 친구잖아.”
“그렇긴 합니다만, 글쎄요. 제 생각에는 청소년에게 있어 신성한 프리스트나 음험한 마법사, 혹은 고귀한 드워프의 노커라는 것은 이해하기도 귀찮 고 꺼려지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아일페사스에게는 그보다는 더 대하기 쉽고 이해하기도 쉬운 존재, 그러니까 동년배라고 해도 좋고 또래라고 할 수 도 있겠지요, 그런 사람이…………, 사람이 아니라도 좋으니 어쨌든 그런 존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엑셀핸드는 다시 한번 파이프를 깊이 빨아들이려다가 담배를 모두 태운 것을 발견했다. 엑셀핸드는 그 굵은 손가락을 보기 좋게 놀려 다시 담배를 채워 넣으며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 잘하던 꼬마 녀석 같은?”
“아아, 예, 네드발 백작 말입니까? 하하, 예. 그런 유쾌한 친구가 있다면 좋겠지요.”
“갑자기 녀석의 팬케이크가 그리워지는군…………. 흐음. 어쨌든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어. 응? 그 눈길들은 뭐야? 내가 이해했다는 말이 믿어지지 않는 다는 거야?”
제레인트와 아프나이델은 동시에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고 엑셀핸드는 불편한 기침 소리를 내었다. 그러고 나서 엑셀핸드는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 “하지만 무슨 수로 그런 친구를 만들어준다는 거지?”
“고민해 봐야 될 일 같습니다.”
아프나이델은 그렇게 말한 다음 마치 생각하는 데 방해되는 것을 치우듯이 손을 허공으로 휘저었다. 그들의 테이블에 놓여 있던 식기들이 춤추듯 우 쭐거리며 떠오르더니 차곡차곡 겹쳐지기 시작했다. 겹쳐진 식기 위로 포크와 나이프, 스푼 등이 쌓아올려지고 나서 식기들은 둥지를 향해 날아가는 새처럼 주방 쪽을 향해 휘익 날아갔다.
홀 안의 다른 손님들이 모두 감탄의 눈길을 보내왔지만 아프나이델은 그저 깨끗하게 치워진 테이블 위로 팔꿈치를 올리고는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겼 다. 엑셀핸드는 테이블 위의 촛불을 이용하여 파이프에 불을 붙인 다음 팔짱을 끼고는 땅바닥에 닿지 않는 그 다리를 앞뒤로 흔들기 시작했고 제레인 트는 의자에 몸을 턱 기대고 다리를 쭉 뻗은 채 앞머리를 꼬기 시작했다. 즉 세 사람은 떨어지는 낙엽이 슬픈 이유를 백 가지는 댈 수 있는 시기에 들 어간 드래곤의 공동 보호자로서 반드시 맞이해야 되는, 그러나 몹시 거북스러운 상황에 대해 엄숙하게 대처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래서 여관 주인 몰리는 감히 ‘물 드시겠어요?”라는 말도 꺼내지 못한 채 물주전자와 컵을 들고는 매우 어색하게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바이서스와 자이펀의 두 주점 주인이 같은 시각에 똑같이 곤경에 처해 있다는 점은, 어떻게 보면 그다지 대수로울 것이 없는 사건일지도 모른다. 주 점이라는 것이 원래 다른 모든 곳에서 해결되지 못한 고민들이 모여들어 더 더욱 심각한 고민거리로 승화되는 곳이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오히려 당 연하다고까지 할 수 있다.
하지만 자이펀의 남쪽 아름다운 항구 도시 졸란 시의 외곽 언덕배기에 위치한, 그래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항상 기막힌 전경을 자랑하는 주점 ‘다이 퍼스’의 테라스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최소한 주점 주인의 일상에 속하는 사건은 아니었다. 그래서 다이퍼스의 주인 다이퍼는 어쩔 도리 없이, 그래선 안 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포자기에 가까운 심정으로, 헛기침을 했다.
“으흠.”
테라스 곳곳의 귀퉁이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노예들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테라스의 이곳저곳에 놓여있는 테이블에 앉아 서 졸란의 야경을 감상하던 손님들은 못 3파운드 정도를 삼키는 기분을 느끼고 말았다. 주점의 주인이 헛기침을 하다니! 결국 노예 우두머리는 그 지 위에 어울리는 날렵하고도 정교한 수화를 던지기 시작했다.
‘주인님, 이 개탄스러운 상황은 어떤 악마의 노릇함인지! 어찌할까요?”
다이퍼는 무표정한 얼굴로 역시 빠르게 수화를 했다. 이 전무후무한 상황에도 단련된 수화에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정화의 힘을 나에게로. 현관의 깃발 중 붉은 기를 들고 가라.’
노예 우두머리는 거의 목소리를 낼 뻔했다. 그의 손놀림이 몹시 흐트러진 모습은 그의 당황을 여실히 나타내 보이고 있었다.
‘부, 붉은기입니까?’
‘그렇다. 빨리!’
노예 우두머리는 혼절할 듯한 정신 속에서도 역시 그 지위에 어울리는 민첩한 몸놀림으로 스르륵 사라졌다. 벽의 무늬와 흔들리는 촛불의 그림자, 그리고 사람들의 등 뒤를 이용하여 눈에 띄지 않게 오가는 자이펀 노예들의 재주를 십분 발휘한 노예 우두머리의 종적은 그 누구에게도 감지당하지 않았다. 최고로 단련된 자이펀 검사라 할지라도 자이펀 노예의 이 이동법에는 두 수를 접어야 된다는 절묘한 재주.
원래 하탄의 궁전에서 시작된 예법으로 지금은 모든 자이펀의 주점들이 채택하고 있는 예법, 즉 손님들에게 절대로 인기척을 내지 않고 봉사한다는 정신이 극도로 발전하게 되었을 때 이 신묘한 재주는 탄생했다. 그 점에서 볼 때, 손님들의 테이블 위로 깨끗하게 잘린 주점 주인의 머리가 올라온다 해도 주점 주인이 헛기침을 한 사건보다 더 놀라울 수는 없다. 다이퍼는 그 사실을 씁쓸하게 인정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노예 우두머리가 사라지고 나서 다이퍼는 다시 찌푸린 얼굴로 테라스 한켠의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앉아 있는 두 남자는 모두 태평한 얼굴이었다. 표정을 바꾸는 것은 두 남자들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남자들 중 하나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주인이 있었군.”
말을 꺼낸 남자의 용모는 턱수염을 기른 것이 강인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 턱수염이 군데군데 희게 변한 것은 사내를 더욱 노회해 보이게 만들 뿐 노쇠해 보이게 만들지는 않았다. 남자의 말은 다이퍼가 헛기침을 함으로써 인기척을 낼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조용히 인정하며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의미이다.
반대쪽의 남자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고개를 들어 졸란 앞바다로 떨어지는 별빛을 바라보았다.
“자네의 취소는 그를 평화롭게 만들겠지.”
“아니, 그는 누군가에게 최후의 자리를 제공할 영예를 누리게 될 걸세.”
“……내 복수는 내 아들이 맡게 될 것이네, 신차이.”
“알았어. 그리고 내겐 처자가 없네. 자네는 복수에서 자유로울 것임을 선언하네.”
마지막 확인의 말까지 끝나자, 신차이는 상대방을 따라 밤바다로 떨어지는 별빛의 소나기를 바라보았다.
졸란의 앞바다에 떠 있는 많은 배들의 마스트는 검은 밤바다 위로 솟아오른 은빛 숲처럼 보였다. 간혹 밤 늦게까지 하역 작업이나 그 외의 작업을 하 는 배들 주위로 횃불의 빛이 타올라 숲의 모습을 더욱 아름답게 물들였다. 그리고 그 너머의 수평선은 루미너스의 빛을 받아 은실처럼 반짝인다.
밤바다에서 불어온 미풍이 신차이의 볼을 간질였다. 신차이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매우 빠르게 떴다.
“시작하세, 라울.”
테이블 맞은편의 라울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순간 다이퍼스의 넓은 테라스 전체는 잘 정리된 고요함 속으로 빠져들었다. 모든 손님들은 기품 있 는 정적으로 그들을 무시했다. 그리고 다이퍼스의 다이퍼는 지독한 감정 속에 노예 우두머리를 저주했다. 이 멍청이는 도대체 왜 이렇게 안 오는 거 야! 다이퍼는 시 정화대 건물이 이 주점에서 달려서도 5분이 걸리는 거리에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었다.
신차이와 라울이 일어나자 노예들은 머뭇거리며 다이퍼를 바라보았다. 테라스 한 귀퉁이의 어두운 곳에 서 있던 다이퍼는 차마 내키지 않는 동작으 로 수화를 보냈고 그러자 노예들은 소리가 나지 않도록 주의하며 테이블과 의자를 옆으로 치웠다. 신차이와 라울을 위해 공간이 준비되자, 노예들은 그들이 치워버린 테이블과 의자들처럼 보이지 않는 곳으로 사라졌다.
까드드득. 라울은 손가락을 꺾으며 짐짓 유쾌한 어조로 말했다.
“이봐, 선장. 그 검이 바닷바람에 얼마나 녹슬었는지 볼까?”
신차이는 피식 웃었다. 입고 있던 긴 가브론을 벗어 옆으로 던지자 신차이의 허리에 걸려 있던 기다란 목검이 드러났다. 신차이는 목검을 틀어쥐면 서 말했다.
“녹슬지 않는다네, 내 검은.”
“이런, 이런……………. 아직도 그런 것을 가지고 다니나. 선조들께서 처음으로 파도에 배를 띄울 때 사용하던 것 아니었나. 그런 것으로 나를 찌를 수 있을 성싶은가?”
“글쎄, 나는 이 검으로 자네를 찌를 생각은 없네.”
“살기로 찌르겠다는 말인가? 우문현답일세, 신차이.”
살기가 적을 꿰뚫으면, 손에 쥔 것이 검이든 활이든 똑같은 법. 라울은 빙긋 웃으며 역시 가브론을 벗어 옆으로 팽개쳤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노예 들의 손이 신차이와 라울의 가브론을 조용히 수거했다. 드러난 라울의 손목에는 둔한 빛을 뿜어내는 쇠뭉치가 매달려 있었다. 라울은 두 손을 천천히 뒤틀었다. 철컹! 라울의 손목에 매달려 있던 쇠뭉치는 길고 날카로운 클로로 변했다.
신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발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허리는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그의 손에 쥐어진 목검은 세월처럼 떠올라 과거처 럼 고정되었다. 약간 끌어당긴 턱 위에 날카로운 두 개의 안광은 곧추세운 검 끝을 지나 라울의 눈을 향해 쏘아졌다.
라울은 허리를 끌어올렸다. 두 팔을 아무렇게나 뒤로 던진 자세로 턱을 내민 라울은 자신의 콧등을 이용하여 신차이를 겨냥했다. 두 남자의 자세는 완전히 반대였다. 언뜻 보기에 라울은 신차이의 검 끝에 가슴을 내민 자세로 서 있었다.
발자국이나 기합, 숨소리는 없었다.
들려온 것은 끔찍스럽고도 극히 짧은 소리. 손님들은 잔을 움켜쥐었다. 털썩. 반듯하게 깔린 테라스의 포석 위로 피가, 마치 번개가 치는 모양처럼 기하학적으로 번져나갔다.
다이퍼는 신음 소리를 낼 뻔하다가 입술을 사리물었다. 두 번은 절대 안 돼. 그래서 다이퍼는 테라스에 서 있는 한 개의 석상이 되어 각기 다른 자세 로 있는 두 남자를 바라보았다.
신차이는 찢어진 어깨를 내버려둔 채 조용히 숨결을 가누고 있었다. 흘러내린 피가 얇은 겉옷 위로 빠르게 번져나가는 것 외에는 어떤 움직임도 찾 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라울 역시 하늘을 바라보며 숨을 가누고 있었다. 부러진 클로의 조각들이 주위에 흩어져 예리한 빛을 뿜어냈다.
“… …”
라울은 입을 열었으나 그의 입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의 얼굴 근육이 파르르 떨렸다. 잠시 후, 라울은 다시 시도했고 이번에는 목소리가 나왔다.
“라울 트리그로스는 하늘의 뜻을 수용한다. 트리그로스의 나무는 신차이 발탄의 손으로…………”
신차이는 떨리는 손으로 목검을 회수했다.
“트리그로스의 나무는 오늘로 그 뿌리를 대지 위로 드러낸다. 잘 가게, 라울.”
테라스의 한켠 어둠 속에 서 있던 다이퍼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탁탁탁탁. 테라스로 통하는 계단에서 거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이미 늦었어. 다이퍼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윽고 졸란 시의 정화 대원들이 테라스에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권위의 상징인 노란 제복을 입은 정화 대원들의 선두에는 붉은 깃발을 든 우두머리가 있었다. 주인의 요청을 의미하는 붉은 기를 든 이상 이들은 주 점의 어떤 예법에도 구애됨이 없이 자유로이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도착은 늦은 바 되었다. 급하게 입을 열려던 우두머리는 테라스의 광 경을 보고서는 입을 다물었다. 상황은 이미 이야기를 전하는 신성한 바람의 손에 넘겨진 후였다.
정화 대원들의 우두머리 사라스는 다이퍼에게 가벼운 눈인사를 보내고는 곧장 쓰러진 라울에게 걸어갔다. 신차이에게는 눈짓도 보내지 않은 채, 사 라스는 라울 곁에 한쪽 무릎을 꿇고 그의 안색을 살폈다. 신차이는 그 모습을 보다가 몸을 돌려 사라졌다.
라울은 힘겹게 입술을 열었다.
“사라스 왔는가.”
“라울 님.”
“내 어머님의 지우의 아들이여. 자네를 보고 갈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로군.”
사라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더 이상의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라스는 조용히 라울의 마지막 숨결을 지켰다. 라울은 진저리를 치고서 는 고요히 숨을 거두었다. 한참 후에야, 사라스는 몸을 일으켰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손을 휘저어 정화 대원들로 하여금 테라스를 떠나게 했다. 다이퍼가 붉은 기를 동원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건만 자신들은 아 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으니, 최소한 예의만이라도 충분히 갖추어야 될 것이다. 정화 대원들은 극도의 정숙을 유지한 채 테라스에서 물러났다. 다시 테라스는 손님들의 한담과 조용히 잔을 들어올리는 소리로 가득 찼다. 조금 전의 결투는 있지도 않은 사건처럼 신속히 잊혀졌다. 물론 노예들의 민첩 한 손놀림에 의해 라울의 몸과 그 핏자국들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정화 대원들을 모두 물러나게 만든 사라스는 다이퍼에게 다가섰다. 다이퍼와 사라스는 서로의 팔꿈치를 가볍게 쥔 채 볼을 부딪쳐 재빨리 인사를 나 누었다. 그리고 최대한 낮춘 목소리의 대화가 오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거리가 있으니까요.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는 어디에 있습니까?”
“별실에서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따라오시죠.”
다이퍼의 안내를 받아서 사라스는 다이퍼스의 은밀한 곳에 마련된 별실로 찾아갔다. 육중한 문을 열자 그 안에서 노예들의 손에 치료를 받고 있는 신차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신차이는 웃옷을 벗은 채 바닥의 쿠션에 정좌해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로는 서너 명의 건장한 노예들이 숨소리마저 낮춘 채 신차이의 상처를 돌보 고 있었다. 붕대를 끊어내는 소리마저도 허용되지 않는 분위기였다. 사라스는 먼저 자신의 검을 풀어 테이블에 놓고는 신차이의 맞은편에 앉았다. 신 차이는 가벼운 어투로 말했다.
“몸이 이런지라.”
“괘념치 마시오.”
사라스는 인사를 나눌 기분도 아니라는 말이 하고 싶었지만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가 앉기 직전 어디선가 나타난 노예의 손이 쿠션을 준비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므로 사라스는 거의 신경 쓰지 않았다. 사라스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당신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오.”
신차이는 고개를 들어 흘끗 사라스를 바라보고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당신과 나 사이에 구축된 감정으로 당신과 나를 격리시키고 있는 보통 사람일 따름이오.”
저음인 신차이의 목소리 속엔 피로가 담겨 있었다. 사라스는 세 호흡 가량은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네 번째 호흡에서 사라스는 참을 수 없는 감정 으로 토로했다.
“이젠 트리그로스 가문까지 끝장내는 것이오?”
신차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라스는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심의 푸른 날개를 꺾고, 그리거스의 아흔아홉 꽃잎을 흩어버리는 것은, 그것까지는 용납될 수 있소. 하지만 트리그로스의 나무의 뿌리를 파헤치 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소. 왜 그러신 거요? 그는 좋은 사람이오.”
“훌륭한 검사지요.”
“그렇소이다. 라울 님은 우리 마음의 정화에 닿아 계시는 존경받는 분이오. 그분께 이런 최후가 다가올 줄은 졸란도, 아니 전 자이펀도 상상할 수 없 었을 거요. 그런데 왜?”
신차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노예가 건네는 깨끗한 윗옷을 받아 입을 뿐이었다. 사라스는 짓씹듯 말했다.
“다음은 어디요? 코다슈 가문? 팔자익 가문? 다키다스 가문? 자이펀의 명문이라는 명문은 모조리 끝장낼 작정인 거요?”
신차이는 허리띠를 단정하게 묶고 나서야 조용히 대답했다.
“그런 가문이 명가라면 자이펀은 당장 멸망해도 좋은 나라일 테지요.”
노예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신차이는 아무 거리낌 없이 이런 말을 꺼냈다. 사라스 역시 노예들이 있는 데서 이런 말이 나왔다는 점에는 아 무 신경도 쓰지 않았다. 다만 그 자신 앞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는 사실에 매우 경악했다.
“뭐, 뭐라고 한 거요?”
신차이는 자신이 한 말을 다시 반복하는 대신 음울한 눈으로 사라스를 바라보았다.
“술 한 잔 하시겠소?”
“선장!”
사라스의 울부짖음에도 아랑곳없이 신차이는 고요히 손을 들었다. 사라스는 무릎 위에 놓인 두 손을 꽉 움켜쥐다가 문득 자신이 매우 경직해 있음을 깨달았다. 졸란의 정화 대장 사라스는 이를 갈았다. 말을 시키려면 다른 도리가 없겠군.
잠시 후 그들 두 사람 사이로 작은 쟁반이 내려왔다. 한쪽 팔이 불편한 신차이 대신 사라스가 술병과 잔을 들어 두 개의 잔을 채워놓았다. 신차이는 유려한 동작으로 잔을 들어올려 입가로 가져갔다. 신차이가 천천히 술을 한 모금 머금은 것에 비해볼 때 사라스는 단숨에 잔을 비움으로써 자신의 심 경이 불편하다는 것을 명확하게 했다.
신차이는 사라스의 태도를 모른 척하고 유유자적하게 잔을 비웠다. 잔을 내려놓은 신차이는 고개를 조금 숙이며 말했다.
“카레한 탑에 가보신 적이 있소, 사라스?”
“당신보다는 더 자주 가봤을 거요, 선장.”
“그렇겠지. 카레한 탑의 3층 인간의 층에는 많은 석상들이 있소. 그중 이름 없는 명가의 상을 아시오?”
사라스는 얼굴을 찌푸렸다.
“물론 잘 알고 있소만?”
신차이는 사라스의 대답을 무시한 채 설명을 시작했다.
“굳센 오른팔로 하탄을 섬기고 곧은 왼팔로는 심장을 가리고 있지. 부릅뜬 눈은 경계하고 경계하는 정신을 나타내며 굳게 다문 입은 살기를 갈무리 한 그 마음을 드러내고 있지.”
사라스는 이런 초보적인 교양에 대해 논하는 신차이 선장의 화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로서는 조금 전 자이펀의 가장 유서 깊은 명가 중 하나를 결딴낸 사나이의 심정이 어떨지를 도저히 짐작할 수 없었고, 그래서 잠자코 듣고 있었다. 신차이는 울림이 적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알고 있는 명가란, 그 이름 없는 명가의 상의 모습뿐이오.”
“선장. 그건 모든 가문의 지향하는 바 아니오?”
“틀렸소!”
신차이는 낮고 강하게 외쳤다. 사라스는 고개를 들기 전 먼저 신차이 선장의 살기를 감지했다. 사라스는 숨을 들이마시며 재빨리 기감을 약화시켰 다. 세련된 예의를 사용해서 나쁠 것은 없겠지. 사라스는 신차이 선장의 살기에 대항하지 않는 겸손한 자세를 취하며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선장. 무슨 말을 하시려는 건지 내 모르나…………”
“모든 가문의 지향하는 바라고 하셨소? 그래서 발탄 가문이 끝장났단 말이오? 발탄 가문의 최후의 적손이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로 가야 했던 것은 모든 명가가 그 참람된 몸을 사렸기 때문 아니오.”
사라스는 다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에 본 신차이의 눈을 잊기 위해선 술 한 잔이 필요하겠는걸. 사라스는 짧은 생각 하나를 떠올렸 다. 신차이에게는 정말 머맨의 피가 흐르는 것이 아닐까?
“알고 계시었소?”
“바다에 나가 있다고 해서 나를 없는 사람 취급한 것은 그 가문들의 실수였소!”
신차이는 거칠게 말을 맺고는 술잔을 탁 소리나게 내려놓았다. 그는 방 한쪽 구석을 바라보았고, 그러자 곧 담배가 가득 채워진 해포석 파이프가 공 손한 노예의 손길에 의해 그의 입으로 다가왔다. 신차이는 파이프를 받아들고는 깊이 빨아들였다. 문득, 상처 입은 신차이의 어깨가 미미하게 떨렸 다.
사라스는 마음속으로 몇 가지 말들을 빠르게 정리해 보고는 그중 어느 것도 적당하지 못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라스는 내키지 않는 어투로 말했다.
“말씀하시는 바에 일리가 없지는 않소만……………”
“그건 다른 말이 필요 없는 야합이오.”
“……과격하게 단정하고 싶으시다면, 그렇소. 야합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전통이 요구하는 바를 무시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선장, 당신의 행동은 우리의 전통을 흔들고 있단 말이오.”
으드득.
사라스는 신차이 선장이 파이프를 물어 깨뜨리는 모습을 보며 아연해지고 말았다. 신차이는 부서진 파이프를 옆으로 집어던졌고 바닥에 이마를 대 고 있던 노예들의 얼굴에서는 핏기가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신차이는 낮게 으르렁거렸다.
“대가를 치른 거래에 다시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 자랑스러운 전통이란 말이오?”
사라스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 역시 신차이 선장이 발탄 가문의 계승권을 포기하고 바다로 나가버린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모든 이들이 다 그 부모된 자의 축복을 받으며 태어나지 못한다는 것은, 인간들이 그 자식에게 가지는 유별난 애정을 생각해 볼 때 기괴한 일이라 하 지 않을 수 없다.
발탄 가문의 미녀와 라이브스 가문 호남아의 결합은 모든 이들의 축복이 함께한 경사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남의 아내된 여자에겐 곁눈길도 주지 못 하는 자이펀의 풍습에 수많은 남자들이 오장 육부를 끊어내는 아픔을 느꼈다는 것은 논외로 치도록 하자. 그 축복된 결합의 산물이 이 기박한 운명의 남자라니.
신혼의 꿈이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어느 날, 아름다운 신부는 신랑과 함께 라이브스 가문의 해변을 걸었다. 주위에 어떤 눈도 없었기에 신부는 자 유롭게 얼굴을 드러냈으며, 그 자신만을 위해 지상에 잠시 모습을 드러낸 이 기적을 보며 신랑은 행복했다.
하지만 두 사람만 있었기에, 라이브스의 바람을 계승한 신랑도 머맨의 습격으로부터 신부를 지키지는 못했다.
광포한 파도, 바람이 바람을 찢어발기는 극도의 혼돈. 휘몰아치는 백사장의 모래는 이미 흉기들의 난무나 다름없었다. 신랑은 용감했다. 라이브스의 바람은 그 앞에 자랑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미쳐버린 신랑의 소문이 온 졸란을 어둡게 만들었을 때 신부는 돌아왔다. 성미 급한 자들은 이 기적에 기뻐했지만 사려 깊은 자들은 고개를 가로저 었다. 의심은 부질없는 것, 그러나 치명적인 것. 태어난 아기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글쎄. 신랑은 그에게 라이브스의 이름을 허락하지 않았 다. 우는 아기에게 젖을 물리며 신부는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을 느꼈으리라. 결국 신차이는 거친 밧줄에 손바닥이 다치지 않을 정도의 나이가 되자 두 가문의 불행을 일신에 짊어진 채 표표히 바다로 떠났다.
그리고 14년이 흘렀다.
담배 담당 노예는 모든 용기를 짜내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했다. 신차이는 부들부들 떨면서 다가오는 새 파이프를 낚아챘고 노예는 죽다 살아난 기분을 느꼈다. 파이프를 입에 물며 신차이는 불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14년이 흘렀다 해서……” 신차이의 목소리에는 14년의 피로 속에서 울려나오는 고독이 스며 있었다. “발탄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여겼단 말이오? 그 적손을 사지에 몰아넣어도 아무 소리 못할 만만한 가문으로 보였단 말이오?”
그렇다. 이건 명가들의 실수다. 사라스는 마음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들은 발탄의 또 다른 핏줄인 이 남자를 떠올리지 못했던 것일까. 독자 (獨子)는 보호했어야 옳았다. 운차이로 하여금 발탄의 이름을 계승하도록, 이 아름다운 땅에서 행복을 추구하도록 내버려두었어야 했다. 하지만 발탄 은 명가가 아니었기에……………. 저 바다의 어두운 손길이 닿은 이후로 발탄은 더 이상 명가일 수 없었다. 신차이 선장이 그 모든 것을 짊어지고 떠났다 해 도 기억은 남는 법이다.
사라스는 일어났다.
신차이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파이프만 태웠다. 사라스는 갈라지려는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으며 말했다.
“선장. 당신의 감정이나 이유 같은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소. 내가 듣는다 해도 당신의 반만큼이나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는 것들이 니까. 따라서 나는 졸란의 정화 대장으로 말하겠소.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을 중지하시오. 이런 무모한 행동은 당신의 안위에도 별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오.”
신차이는 술잔을 들어올릴 뿐 대답하지 않았다.
사라스는 한 번 더 말하려다가 포기했다. 그리고 사라스는 그 숫자를 짐작할 수도 없는 그림자 속의 노예들 사이에 신차이를 남겨둔 채 떠났다. 덜 컹. 홀로 남겨진 신차이는 두 다리를 쭉 펴고 고개를 들었다.
‘그래. 쓸모없는 짓이지. 하지만……………’
신차이는 별실 천장에 뚫려 있는 채광창을 통해 사라지는 담배 연기를 바라보았다. 담배 연기는 루미너스의 얼굴을 살짝 가리는 베일이 되어 밤하늘 로 번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