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 워커 1권 – 2장 시인의 귀환 5

랜덤 이미지

퓨처 워커 1권 – 2장 시인의 귀환 5


5

“난해하군.”

헤게모니아 어 실력이 모자라다는 점도 있겠지만, 원래 그란은 자신의 감정을 여러 단어로 표현하는 일에 익숙하지 못하다. 그래서 그가 느낀 당혹 감은 이처럼 상당히 점잖게 표현되었다. 그러나 네리아는 보다 생동감 있는 감정 표현을 보여주었다.

“유피넬과 헬카네스의 이름을 걸고, 그 문제는 엉덩이야!”

그란은 깨닫지 못했고 운차이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리고 미는 방긋 웃으며 네리아의 실수를 정정했다.

“엉터리라고 하는 거야.”

“아? 어, 그래. 그 문제는 엉터리야! 엉터리라고? 엉터리, 엉터리.”

네리아가 잘못 인용했던 헤게모니아 어를 다시 반복해 보는 동안 그란은 운차이에게 질문했다.

“내 동감이 네리아의 말에서 느껴진다. 엉터리인 문제를 네가 말했나?”

“네리아의 헤게모니아 어 실력은 그런대로 괜찮아지는데, 그란 자네는 왜 아직도 그 지경인가.”

“그 문제가 맞냐.”

“내가 들은 바로는.”

그란은 고개를 가로젓더니 물끄러미 미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시선을 느낀 미가 그란을 마주보자 그란은 자신의 턱수염을 한 올씩 건드려보다가 말 했다.

“헤게모니아식 농담인가?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그런 건 아니에요. 별로 우습지 않은걸요.”

네리아는 입술을 주욱 내밀며 말했다.

“하지만 그런 것이 어디 있어? 과거로 향하는 흐름과 미래로 향하는 흐름…………, 그 다음이 뭐라고?”

운차이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두 흐름의 교차점을 찾아오라.”

“그게 뭔데?”

“몰라.”

턴빌. 일명 아이야 이켈리나. 대시인 파하스의 출생지로 음유 시인들의 성지. 그 아름다운 도시의 하늘을 향해, 정확하게는 펍의 천장을 향해, 네리 아는 얌전히 욕설을 퍼부어 대었다. 주로 바이서스 어로 이루어진 것이라 주위에서 술잔을 기울이던 사람들은 그 험악한 욕설의 내용을 알지 못했으 나 운차이와 그란은 아득히 하강하는 기분 속에 우울해했다. 결국 그란이 입을 열었다.

“존재할지도 모르는 바이서스 어 지각 능력 소지자에 대한 유의가 없는가.”

네리아는 욕설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란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깊은 고민에 빠져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는 빠르게 말했다.

“바이서스 어를 아는 사람이 있으면 어쩌려고 그러냐…………는 말씀일 거야.”

“아, 그래? 미인이 하는 말은 욕설도 밀어로 들리니까 걱정 마.”

운차이는 으르렁거리려다가 테이블 옆에 주저앉아 있는 아달탄을 보고서는 자신을 억눌렀다. 개와 형제로 보이면 어쩔 것인가.

“왜 그렇게 신경질을 내는 거지.”

“답을 모르니까!”

“그 문제를 풀겠다는 건가?”

“66년 동안 보관된 재산이야. 엄청날 거라고!”

“우리가 여기로 온 것은 후작의 자취를 붙잡기 위해서다. 외도는 사양이야.”

“으응, 으응! 후작도 쫓고, 돈도 쫓고.”

“그래? 그럼 부탁이니 바이서스 어로 고함지르는 짓 좀 그만두시지. 우리 여기 왔다고 후작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네리아는 그제서야 깜짝 놀라며 입을 가렸다. 그녀는 그란과 운차이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황급히 허공을 향해 팔을 내저었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같은 네리아의 동작을 보던 미는 고개를 갸웃하며 질문했다.

“뭐하는 거야, 네리아?”

“응, 말 주워담고 있어.”

미는 까르륵 웃었지만 운차이는 이제 네리아를 완벽하게 무시했다. 그는 의자를 창 쪽으로 끌고 가서는 창턱에 팔을 올려놓고 바깥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골목에는 인적이 드물어가고 있었다. 음유시인들의 성지라지만 그것은 음유시인들이나 문재가 모자라는 문인들의 미사여구일 뿐 실제의 턴빌은 여느 도시와 마찬가지였다. 적당히 지저분하고, 적당히 냄새 나고, 적당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당히 분포된 도시.

이 보편성을 찬양하는 듯한 도시에서, 단 하나 보편적이지 않은 존재가 있다. 운차이의 일행들이 뒤쫓는 인물.

운차이는 골목 건너편 인을 바라보았다. 인의 옆 벽은 생선 비늘처럼 닥지닥지 달라붙은 나무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운차이는 시선을 조금 올렸 다. 그러자 그 나무판들의 배열 속에 시커멓게 뚫린 구멍이 눈에 들어왔다. 창문. 모두 다섯 개. 창문들은 일스 방향으로부터 바이서스 방향으로 배열 되어 있었다. 운차이는 그중 일스 방향의, 그러니까 가장 동쪽의 창문을 바라보았다.

불은 꺼져 있다. 후작이 과연 저기에서 자고 있을까? 운차이는 그렇게 믿기 어려웠다. 턴빌 시로 들어와서 첫 번째로 만나는 사람에게 ‘이봐요. 바이 서스 어를 쓰는 사람들 본 적 있소?”라고 묻자 그는 이 인을 가르쳐주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저기서 자고 있을 가능성은 적다. 쥐가 자신의 행적을 적 은 초대장을 고양이에게 보낼 리가 없는 것처럼.

하지만 후작의 일행은 대인원이다. 그토록 오랫동안 추적했건만 아직도 운차이는 후작의 일행들이 몇 명이나 되는지 모른다. 그런 대인원이 행적을 쉽게 숨길 수 있을까?

“왜 이 도시에 들어온 걸까. 행적이 탄로 날 위험을 무릅쓰고.”

운차이의 질문은 방향성이 없었다. 그러나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있던 그란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동일한 목적으로 우리 일행 중 한 명의 욕망이 있는 것 아닐까.”

‘우리 일행 중 한 명의(네리아의) 욕망과 같은 목적이 있는 것 아닐까.’ 운차이는 그렇게 해석하기로 마음먹었다.

“돈? 글쎄. 후작이 궁핍해졌다?”

“가능성 있다.”

가능성이 있을 뿐이지. 운차이는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녀석들은 왜 후작의 곁을 떠나지 않는 걸까. 주위의 녀석들만 없어지면 이런 개고생을 하지 않아도 될 텐데.”

“후작의 재기를 확신하는 모양이다.”

“미래를 볼 줄 모르는 녀석들이군.”

투덜거리던 운차이는 스스로의 말에 조금 놀라며 미를 바라보았다. 미는 자신의 접시에 맥주를 따라서는 테이블 아래의 아달탄에게 내려주고 있었 다. 저 개는 술도 마시나? 그녀가 다시 몸을 일으키자 운차이는 질문했다.

“미, 미래를 보는 대가가 얼마요?”

“뭐가 보고 싶으세요?”

“후작의 내일 아침 식사 장면. 어디서 식사하는지 알아낸 다음 가서 식사에 독을 타게.”

운차이는 평온한 어조로 말했지만 미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죽일 거예요?”

“말하지 않았소?”

“미에겐 실종 상태로 만들겠다고 말씀하셨어요.”

“그게 그 말이오. 당장 죽이지 못하는 까닭은 아직 녀석의 일행이 너무 많기 때문이오. 내가 만일 녀석의 생존은 그 자체로 죄악이라고 주장한다면 여기 있는 사람 중 최소한 한 명은 내 말에 강력히 동의할 거요.”

미는 그란의 눈을 바라보고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두번 다시 쳐다볼 마음은 들지 않았다.

“말도 안 돼요.”

“왜? 살인이 죄악이라는 글은 이미 읽었소.”

“아니, 아니. 그게 아니에요. 미가 만일 그 후작의 아침 식사 장면을 본다면, 그렇다면 후작은 내일 아침에 식사를 할 거예요. 독을 먹고 죽는 것이 아니라.”

운차이는 잠시 혼란을 일으켰다.

“잠깐. 그걸 보고서 내가 독을 타도? 그래도 후작이 식사를 끝내게 된단 말이오?”

“예. 그렇게 될 거예요.”

“미래가 고정되어 있단 말이오?”

“미래가 고정되어 있는지 어떤지는 미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미가 본 미래는 그대로 된다는 것은 이미 말씀드렸는데요, 미의 아빠 이야기.” 

운차이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후작이 언제 어떻게 죽는지는 볼 수 있소?”

네리아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아, 그렇다면 우리 여정이 얼마인지 알 수 있겠구나! 그렇지? 앞으로 얼마가 지나면 후작을 붙잡을 수 있는지, 아니면 우리가…………. 미, 미! 그걸 볼 수 있어?”

그란은 네리아의 말에서 생략된 부분을 생각해 보았다. 우리가…… 실패해서 후작에게 죽임을 당하는지. 미는 네리아의 얼굴을 마주보다가 고개를 떨구었다.

“미안해요. 볼 수 없어요.”

“볼 수 없는 거요, 아니면 안 보겠다는 거요?”

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조용히 입을 다물기로 마음먹은 운차이는 문득 자신이 한 번도 그녀를 다그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그럴까? 내가 원래 여자를 다그치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자이펀인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건 이상하군. 미는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을 무수히 보여주었지만 나는 한 번도 그녀에게 설명 을 요구해 본 적이 없어. 게다가 그란과 네리아마저도 그녀를 다그치지 않아. 왜 그럴까?

그때였다. 그란이 보기 드물게 정확한 헤게모니아 어로 말했다.

“미 양. 나는 이 나라에 들어서면서 석비를 하나 보았소.”

“석비? 아아, 시간의 바늘 말씀이시군요.”

“그 석비의 이름이 시간의 바늘인가. 어쨌든 거기에는 인상적인 글귀가 있었는데.”

“헤게모니아. 당신의 운명은 다시 쓰여진다.”

“그 말에 의하면 미래는 가변적이라는 말이 되는데, 당신 말로는 그렇지 않나 보군. 말해 주시오. 미래는 고정되어 있는 거요?”

미는 숨을 깊숙하게 들이마셨다.

“예.”

“어째서?”

“쉽게 설명하자면, 과거가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죠.”


“목검이 갑옷을 뚫는다면 자넨 믿겠나.”

늦은 밤, 이미 모든 손님들과 네리아와 미는 침실로 사라진 시각. 운차이는 주점 주인에게 조용한 눈빛을 보냄으로써 그와 그란 두 명이 홀을 장악했 음을 선언했다. 주점 주인은 포기하는 심정으로 이미 청소가 끝난 테이블에서 의자 하나를 내려서는 테이블에 팔을 괴고 엎드렸다. 잠들기 직전, 남 아 있는 자존심에 주인장은 고함을 빽 질렀다. “나 깨우지 말고 술은 알아서 가져다 먹어요!” 그리고 주인장은 그대로 곯아떨어졌으며 운차이는 아무 런 양심의 가책 없이 술통을 통째로 들고 왔다. 그란은 묵묵히 손을 뻗어 술통의 뚜껑을 뜯어내었고 그러자 운차이는 거대한 술통과는 너무도 어울리 지 않는 작은 컵으로 술을 퍼서 마시기 시작했다. 두 사람에 의해 술통이 3분의 1쯤 비워졌을 무렵, 운차이는 처음으로 입을 연 것이다.

그란은 바이서스 어로 대답했다.

“무슨 말이지? 목검이라면, 나무로 만든 검 말인가?”

“응.”

“그건 애들이나 쓰는 거야, 아니면 연습용이지. 그런 걸로 갑옷을 뚫지는 못한다.”

“가능해.”

“뭐야?”

운차이는 다시 술통으로 잔을 가져갔다. 그란은 손에 끼고 있던 장갑을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물론 이런 장갑을 끼고 있다면 가능하겠지.”

“멍청이. 네가 그 OPG(오거 파워 건틀릿) 낀 상태에서 목검을 쥐고 갑옷을 쳐봐. 목검이 부러지기는 할 거다.”

“음. 그렇겠군. 그렇다면 어떻게 가능하다는 거지?”

운차이는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가만히 팔짱을 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부 철검보다 목검을 좋아한 사람들이 있었다. 선원들이지. 이유는 짐작하겠지?”

“녹이 스는 것 때문이겠군. 나도 그 이야기는 들었어.”

“맞아. 우리나라 사람들이 나무를 잘 다루기도 했지만, 짠 바닷바람 속에서 철검 관리하기가 너무 귀찮았기 때문이다. 모르지, 바이서스의 드워프들이라면 바다 속에 던져 넣었다가 꺼내도 까딱없는 검을 만들지도. 하지만 우리는 드워프가 아니야. 그래서 우리는 목검으로 시작했지. 자이펀 검법이 바이서스 검법보다 지독하게 빠른 이유는 목검의 전통 때문이다.”

“검법 치고는 너무 가벼워, 너희 검법은.”

“시끄러워. 어쨌든 우리 사촌 형은 목검을 아주 잘 썼지. 그가 일등 항해사였을 때, 이제리스 해협에서 그의 배가 서펀트의 공격을 받은 적이 있었 다. 그때 그는 배를 휘감은 서펀트의 몸 위로 뛰어올라서는 목검으로 서펀트의 비늘을 뚫었지. 서펀트의 비늘이 갑옷보다 무르다고는 말하지 않겠 지.”

“놀랍군.”

그란은 운차이가 그냥 향수병을 달래고 있다고 생각하고는 ‘헛소리하지 마라!’ 하고 말하는 대신 조용히 맞장구쳐 주었다. 하지만 운차이는 옛 추억 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

그란은 눈썹을 조금 치켜뜨며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운차이는 허리에 매달린 롱 소드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이런 검으로도 서펀트를 공격한다는 것은 어려워. 서펀트의 비늘은 상상할 수 없이 단단하다. 자넨 수압이라는 말을 들어보았나? 그건 물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면 느끼게 되는 압력이야. 서펀트가 돌아다니는 수심은 천차만별이고, 그래서 막대한 수압 차를 견뎌내야 하지. 서펀트의 비늘은 그런 수압 차를 견디는 강인함을 가지고 있어. 하지만 신차이는 그걸 뚫었지.”

“사촌 형의 이름이 신차이인가?”

“응.”

“대단한 사람이었나 보군.”

“그래. 그게 대답할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이지. 잘 단련되었기 때문에.”

그란은 술잔을 내려다보다가 역시 술잔을 조금 밀어놓고는 팔짱을 꼈다. 그러고는 운차이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군.”

“조금 전 미는 과거가 미래를 결정짓는다고 말했지. 그녀는 사실 미래를 보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볼 줄 아는 거라고 했지. 그러기에 미래도 안다 고.”

“나도 들었어. 그런데?”

“그 말이 맞는 것 같아. 신차이는 목검으로 서펀트를 공격하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신기하게 생각하겠지만 우리가 오랜 세월 목검을 써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걸 이해할 수 있어.”

“그건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한다는 이야기 아닌가? 과거를 살펴 미래를 예측한다는.”

“그래, 그렇지.”

운차이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다시 잔을 들어올렸다. 그란은 잠자코 기다렸다. 잠시 후 잔을 내려놓은 운차이는 다시 말했다.

“미래가 왜 결정되어 있냐고 물었을 때, 미는 뭐라고 대답했지?”

“과거가 결정되었기 때문이라고 했지.”

“목검으로 서펀트의 비늘을 뚫을 수는 없어.”

그란은 혼란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운차이의 화법이 오늘따라 몹시 이상했다.

“잠자코 있으면 설명하겠지?”

“우리에겐 오랜 세월 동안 목검을 써온 전통이 있다. 이건 과거지. 그리고 내 사촌형 신차이는 목검으로 서펀트의 비늘을 뚫어버리지. 이건 현재야. 얼핏 보기에 논리적으로 연결되는 것 같지.”

“그렇군. 순수하게 논리로만 본다면.”

“그래. 그렇군.”

운차이는 입을 다물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란은 무시당하는 기분을 느꼈지만 별말 없이 잔을 들어올렸다. 턴빌 시의 밤은 새벽을 향 해 하염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운차이는 의자를 뒤로 당겨 편한 자세가 된 다음 테이블에 두 발을 올리며 말했다.

“내가 먼저 불침번을 설 테니, 자넨 올라가서 쉬도록 해. 생각을 좀 해봐야겠어.”

“불침번? 이 도시에서 왜?”

“후작과 같은 도시에 있잖아.”

“우리 동정을 파악했을까.”

“반반.”

“졸리면 깨우도록 해.”

그란은 그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란이 침실로 사라진 다음, 운차이는 주인장을 깨울까 하다가 내버려두고서는 대신 홀의 불을 모두 껐다. 캄캄한 홀 가운데서 운차이는 창문을 통해 쏟아지는 달빛을 조명삼아 조용히 술잔을 비워갔다.

운차이가 마치 엄숙한 의식이라도 되는 것처럼 장엄한 동작으로 술잔의 술을 자신의 뱃속으로 옮기고 있던 그 시각, 주점의 뒷문으로는 미가 조용히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녀의 한 손엔 가면이, 그리고 다른 손에는 그릇과 물주전자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뒤로는 아달탄이 조용히 따라 걷고 있었다.

미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점의 뒷문은 뒷마당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거기에는 게으른 하녀가 아직 걷어들이지 않은 빨랫감들이 밤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코를 스치는 꽃향기에 미는 기분 좋은 얼굴이 되었다. 봄밤의 미풍은 꽃가루들을 고요히 흩날리고 있었다.

투숙객들의 꿈에 방해받지 않기 위해 미는 건물에서 충분히 멀어지기로 했다. 미는 뒷마당을 둘러싸고 있는 낮은 담벼락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주 위로는 관목들과 정원수들이 적절히 배치되어 마치 벽과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어 안성맞춤이었다.

“아달탄, 거기 앉아.”

아달탄을 앉힌 미는 물그릇을 주의 깊게 배치하고는 물을 따라 부었다. 익숙한 동작들이었지만 미는 더욱 주의를 기울였기에 물을 따르는 동작에만 도 몇 분씩 걸릴 정도였다. 이윽고 그릇에 물이 가득 차자 미는 가면을 쓰고 땅바닥에 앉아서 기다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수면이 잔잔해졌다. 미는 눈을 감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썼다. 진정해야 돼, 미. 진정해. 이런, 미! 쳉 생각을 해서야 어떻 게 진정하겠어? 그럼 못써, 미. 미는 스스로를 꾸짖을 뿐만 아니라 달래고 으르기까지 하며 침착성을 되찾았다.

두려워 말고, 보자. 뭔가 보일지도 몰라. 미는 눈을 떠서는 수면을 바라보았다.

수면에서는 과연 뭔가가 보였다. 미는 하마터면 탄성을 지를 뻔하다가 간신히 입술을 깨물며 참았다. 그러나 조금 후 미의 감정은 정반대로 바뀌었 다. 그래서 미는 이번에는 울음을 터뜨리지 않기 위해 입술을 계속 깨물어야 했다.

잔잔한 수면에 비친 것은 보름달이었다. 검은 밤하늘을 배경으로 달빛에 희게 물든 구름들이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미는 거칠게 가면을 벗어서 옆에 팽개치고는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미의 무릎을 타고 가녀린 울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말도 안 돼. 이젠 그것도 보 이지 않아.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것일까.

볼을 스치는 차가운 느낌에 미는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다가온 아달탄이 눈물로 범벅이 된 그녀의 얼굴을 핥고 있었다. 미는 아달탄의 목을 확 끌어 안았다. 그러고는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르며 울었다. 아달탄은 킁킁거리며 그녀에게서 불안과 좌절의 냄새를 맡았다.

“왜 그래?”

미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달빛을 받으며 서 있는 네리아의 모습이 몹시 흔들려 보였다. 네리아는 머쓱한 표정으로 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는 목멘 소리로 말했다.

“깼어? 미가 깨웠나 보네.”

네리아는 미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응, 그러니까, 아까 방을 나갈 때부터 알고 있었어. 난 나이트호크잖아. 웬만하면 상관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어, 우는 거 같더라고. 왜 그러는 거 야? 내가 알면 안 되는 거야?”

“너무 슬픈 모습을 보았어.”

“어떤…… 슬픈 모습?”

미는 몹시 구슬픈 목소리로 대답했다.

“시집가서 애를 셋 낳고 나니 내 허리가 두 배가 되어 있는 모습. 가슴은 추욱 늘어지고, 다리는 이마안해지는 거야. 으흑! 끔찍했어…

“깔깔깔!”

네리아는 거의 데굴데굴 구를 뻔했다. 쳉이나 파라면 가장 슬플 때조차도 진지한 얼굴로 침착하게 농담을 해버리는 것이 미의 성격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네리아는 아직 그녀의 성격 전부를 파악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네리아는 그녀가 태평하게 농담을 하는 것을 보고서는 안심해 버렸다. 그렇게 슬픈 일은 아닌가 보지.

“하아, 하아. 아이고 죽겠다. 그건 물그릇을 들여다보지 않고서도 알 수 있는 일 아냐? 놀랐잖아! 음냐.”

네리아는 눈물을 닦으며 일어섰다.

“이만 들어가. 에고…………, 난 추워. 이 북쪽은 봄이 봄 같지를 않네.”

“으응.”

미는 심드렁하게 대답하며 물그릇과 주전자, 가면 등을 챙겼다. 조금 전까지 몹시 울고 있던 여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네리아 는 자신이 본 것을 거의 믿지 않게 되어버렸다.


멋진 달밤이었다.

레이저는 자신의 즐거움을 하나하나 음미해 보았다. 주머니에는 몇 달 동안 놀고먹을 재산이 들어 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쫓아오던 도박꾼 패 거리들도 감쪽같이 따돌렸다. 그리고 지금 오랜 친구를 찾아가는 길이다. 그 친구의 집에서 몇 달 숨어 있으면 세상의 그 누구도 레이저를 찾지 못할 것이다. 이 정도면 멋진 밤 아닌가?

“감촉 좋은 계집애라도 하나 있으면 금상첨화일 텐데.”

아쉽게도 그것만은 조달할 수 없었다. 레이저가 걷고 있는 곳은 보름 달빛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붉은 산맥이었다. 이 광막한 산맥 어디서 여자를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아무래도 숨어 있는 몇 달 동안은 공상을 즐길 도리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레이저는 공상했다.

파 L. 그라시엘. 그날도 이런 달빛이 쏟아지고 있었지. 월광은 사방으로 은은하게 비치며, 따라서 햇빛이나 촛불 빛으로 드러나는 얼굴의 그림자와 는 전혀 다른 윤곽과 음영을 만들어낸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드러나는 음영은 월광 아래의 사람을 신비로 치장한다. 하지만 레이저에게 있어 파는 그 이상의 저릿한 인상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쓰러진 도박사들과 시체 앞에서 흘리던 파의 눈물은 레이저가 죽을 때까지도 잊지 못할 추억으로 자 리 잡았다. L은 도대체 어떤 이름의 이니셜일까. 로리타? 로라? 루시아? 린다? 하하하.

낮이라도 걷기 힘든 험한 산길이었지만 레이저는 익숙하게 걸어갔다. 발 아래 펼쳐지는 붉은 산맥은 달빛 아래에서는 푸르게 보였다. 레이저는 몇 개의 산봉우리를 바라보며 자신의 위치를 짐작해 보았다. 저 멀리로는 영원의 숲도 눈에 들어왔다. 달빛을 받은 영원의 숲은 산봉우리들 사이로 마치 바다처럼 보였다. 은빛으로 출렁이는 바다.

“취이이익! 서라!”

레이저는 멈춰 섰다.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린 레이저는 조금 높은 바위 위에 솟아오른 작고 단단해 보이는 그림자를 보았다. 모두 세 명. 조잡한 갑옷에 잘 어울리는 흉맹스러운 얼굴들이 레이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짧은 팔로 움켜쥔 글레이브는 둔한 은회색으로 반짝거렸다.

세 마리의 오크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산 위에서의 움직임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날랜 동작으로 다가선 오크들은 글레이브를 위로 쳐들어 레이저를 겨냥한 채 거침없이 걸어왔다. 오크들의 면면을 확인한 레이저는 천천히 두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항복의 의미는 아니었다. 레이저는 두 팔을 옆으로 펼친 채 오크들을 향해 달 려들기 시작했다.

“잘 있었나, 이 친구들아!”

“레이저? 취이이익! 레이저구나!”

오크들 역시 고함을 지르면서 기쁜 듯이 캑캑거렸다. 단신의 오크들을 껴안기 위해 레이저는 재빨리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레이저는 세 마리 의 오크를 한꺼번에 끌어안으며 웃었다.

“루손! 이 친구야. 살 좀 빼라고 하지 않았나? 하하하. 여전히 풍만한데?”

“이놈아, 취이익! 네놈 역시 볼따귀에 살이, 취칙! 디룩디룩 붙어 있는 걸 보니, 취엑. 잘 먹고 지내는가 본데? 이놈 엉덩이 좀 봐라. 취엑!”

“아, 잘 먹고 잘 산다. 인마. 하하. 아니? 이게 누구야, 노라쉬! 드디어 정찰대에 소속된 모양이군?”

“취이이익! 당연하지요! 아저씨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췻. 3년 전이군요?”

서로를 얼싸안고 좋아라 끼들거리던 레이저와 오크들은 잠시 후에야 평정을 되찾았다. 오크들 중 정찰대의 우두머리인 루손은 사마귀 투성이인 턱 을 득득 긁으며 기분 좋게 말했다.

“그래, 취엑. 어쩐 일로 이렇게 왔지?”

“친구 보러 온 거지, 자식아. 아, 그래. 나크둠 잘 있나?”

“응? 어, 취, 어. 나크둠 말이야?”

루손은 잠시 당황했다. 오크와는 그렇게도 친한 레이저였지만 오크의 얼굴에서 이 정도의 불안이 떠오르는 것은 그렇게 많이 보지 못했다. 게다가 오크가 머뭇거리는 것을 보기는 거의 처음이었다. 번들거리는 작은 눈을 여기저기로 보내며 난감해하는 루손의 모습은 거의 희극적이었지만, 레이저 는 크게 웃는 대신 걱정스럽게 말했다.

“뭐야? 나크둠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나?”

루손은 갑자기 고개를 돌리더니 침을 탁 뱉었다.

“제길. 취췻! 가면 알게 될 테니까, 취치치칙. 미리 말하지. 나크둠은 죽어가고, 췻, 있다.”

“뭐라고? 싸움이라도 있었나?”

“싸움? 아, 취치치치…………, 그래. 싸움이 있었지.”

“다른 오크들과?”

“치익! 아냐!”

“그럼?”

루손은 다시 머뭇거렸다. 의아해하던 레이저는 루손을 자세히 살펴보고는 그가 겁을 집어먹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루 손은 마지못한 말투로 말했다.

“첵! 취익. 거인이야.”

“뭐라고? 거인? 무슨 농담을 하는 거야?”

“칵! 취악! 농담이 아냐! 거인이 나타나, 취익! 나타났어!”

레이저는 뭐라고 반문하려다가 먼저 다른 두 명의 오크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오크들의 얼굴에 루손과 똑같은 공포가 떠올라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레이저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게 무슨 어처구니없는 일인지. 좋아, 일단 나크둠에게 안내해.”

오크들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장 몸을 돌렸다.

오로지 오크들과 대비해서만 그렇게 보인다는 말이지만, 어쨌든 오크들의 뒤를 따라가고 있는 레이저의 모습은 껑충하고 호리호리해 보였다. 그래 서 그의 얼굴에 떠오른 수심을 더욱 강조하고 있었다. 날쌔게 산을 타는 오크들의 뒤를 별로 힘들이지도 않고 따라가면서, 레이저는 나크둠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나크둠은 나이가 얼마인지 그 자신도 모를 정도로 늙은 오크다. 인간들과 싸우고, 때론 서로 싸우며(동족끼리도 싸운다는 점에서 오크와 인간은 으스스한 공 통점을 가지고 있다.) 착실하게 평균 연령을 낮추고 있는 오크들의 사회에서 나크둠은 정말 희귀한 존재였다. 그 스스로는 언급하지 않지만 많은 오크들 은 나크둠이 루스휴레인 전투에도 참가했다는 전설을 믿고 있다. 그 전설이 사실이라면 나크둠은 최소한 200세가 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레이저는 때때로 나크둠이 루트에리노 대왕의 시대에도 살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공상을 해보곤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크둠을 인간의 노인과 비슷한 모습으로 연상하면 곤란하다. 오크들의 사회에서 나이는 그만큼의 전투 능력이다. 그리고 나 크둠은 불가피하게 싸워야 될 경우, 그러니까 상대 오크가 나크둠이 싫어하는 노래를 불러댄다거나 나크둠이 싫어하는 이빨 형태를 가지고 있는 경 우 그 오크의 모습을 자신의 취향에 따라 재조립해 버릴 능력이 충분하다. 적어도 레이저가 아는 바로는 그렇다.

그런 불굴의 오크 나크둠이 죽어가고 있다고 한다. 바위에서 바위로 건너뛰며, 레이저는 조금 전에 들었던 이름을 생각해 보았다. 거인이라고? 거인 이라면 오거나 트롤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일까? 그러나 레이저는 섣불리 세워보았던 가설을 빠르게 포기했다. 오크들의 어휘 체계가 아무리 조악하다 한들 오거나 트롤 등을 보고서 ‘거인’이라고 표현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진짜 거인인 것일까? 하지만 레이저로서는 그 가설도 빠르게 포기하 고 싶었다. 거인이 이 대륙에 남아 있을 리가 없다, 절대로.

거대한 바위를 돌아간 곳에서 갑작스럽게 절벽이 나타났다.

숲으로 가려 있는 절벽 아래쪽으로 외부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동굴의 입구가 보였다. 지면보다 조금 높은 동굴 입구로 바위와 자갈들이 정성스럽게 쌓여 경사로를 이루고 있었다. 드워프였다면 이곳에 돌계단을 만들고 그 주위에 석상까지 몇 개 세우고도 모자라서 심심풀이 삼아 미로를 몇 개 건설 해 놓았을지 모르지만 이 동굴이 드워프의 동굴이 아니라 오크의 동굴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꽤 공을 들인 장소라 하겠다.

문지기 오크 노마라는 입구를 지킨다는 명분과 자신의 졸음을 잘 조화시키고 있었다. 입구에 주저앉은 채 졸고 있었던 것이다. 주르르륵! 갑자기 들 려온 자갈 흩어지는 소리에 놀란 노마라는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가 경사로를 올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으하하암……!”

기지개를 켜며 앞을 바라본 노마라는 그 자세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새벽녘의 검푸른 어둠 속에서 노마라가 볼 수 있었던 것들을 모조리 끌어 모아 이끌어낸 최선의 결론은 정찰대로 나간 오크 세 명이 모두 돌았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오크들이 인간과 저렇게 사이좋게 걸어 올라 온단 말인가.

노마라는 발작적으로 글레이브를 꼬나들었다. 그러나 검푸른 새벽하늘을 등진 채 걸어오고 있던 인간은 멈추지도 않은 채 말했다.

“그래. 네 글레이브 멋지다. 잘 봤으니 이제 치워, 노마라.”

“취이이이이익! 레이저!”

노마라는 글레이브를 집어던지고 곧장 앞으로 달려들었다. 훌쩍 뛰어오른 노마라를 껴안으며 레이저는 하마터면 허리가 부러질 뻔했다.

“이 자식아. 허리 부러지겠다! 빨랑 내려와. 그리고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나크둠이 안 좋다던데?”

레이저를 껴안고 춤이라도 춰댈 듯한 모습이던 노마라는 곧장 시무룩한 모습이 되었다.

“취칙. 그래. 늙은 오크들이, 취이이익칙! 그는 곧 화렌차의 곁으로 갈 거라고 하더군. 취칙!”

레이저는 찌푸린 표정으로 동굴을 바라보았다. 새벽하늘에 던져진 검은 종잇조각 같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부드럽게 날아든 박쥐는 위로 길게 갈라 진 동굴의 틈을 매끄럽게 스치듯 하며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이제 동틀녘이군.

“안내해. 음, 시간이 시간이니 다들 잠자리에 들었겠군.”

“아니, 그렇지 않아. 취이익.”

“응? 무슨 말이야?”

노마라는 뭐라고 설명할 듯하더니 곧 루손에게 말했다.

“취익. 루손, 데리고 가서 보여줘.”

“알았다.”

다른 오크들은 돌아가고 루손이 레이저를 안내했다. 루손은 그대로 동굴 속으로 들어가려다가 레이저를 흘긋 바라보고는 아무 말 없이 동굴 입구 옆 에 쌓인 짐무더기 쪽으로 걸어갔다. 온갖 잡동사니를 집어던지며 짐무더기를 뒤지던 루손은 잠시 후 그럭저럭 쓸 수는 있을 듯한 홰 하나를 발견해서 는 레이저에게 건네었다.

“안 보이지?”

“고마워.”

레이저는 홰를 받아들고 잠시 눈을 감았다. 그가 눈을 팍 뜬 순간 홰에서는 화르르르 소리와 함께 불이 피어올랐다. 루손은 눈을 찡그리며 물러났고 레이저는 횃불을 조금 위로 쳐들었다.

레이저와 한번이라도 도박을 했던 도박사가 이 광경을 보았다면 레이저를 죽이려 들었을 것이다. 설령 프리스트와 도박을 할 수는 있을지 모른다, 속이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마법사라니! 레이저가 아무리 도박할 때는 절대로 마법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변명한다 하더라도 통할 리가 없다. ‘당연하지.’ 레이저는 생각했다. ‘간혹 마법을 쓰기도 하거든?”

그다지 잘 만들어진 홰는 아니어서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지만 캄캄한 동굴 속을 걸어갈 정도의 조명은 충분했다. 레이저는 루손의 뒤를 따랐다. 

“오크들이 왜 안 자고 있다는 거야?”

레이저의 질문에 대한 루손의 대답은 꽤 긴 시간이 지나서야 들려왔다.

“취익. 그의 임종을 기다리고 있다.”

통로를 걸어가는 동안 느닷없이 비치는 불빛에 많은 오크들이 당황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레이저를 알아보았고 그에게 최상의 환대를 보내었다. 물론 모두 오크식의 환대였기에 레이저로서는 온몸에 멍이 들 지경이었다. 레이저는 할 수 없이 횃불을 조금 흔들어 그들이 지나치게 다가오지는 못 하도록 해야 했다. 최소한 주먹으로 등을 후려치기에는 어려운 거리만큼. “하하! 취취이악! 레이저 아닌가!” 퍽! 으윽.

그러나 레이저가 예상했던 것만큼의 환대는 아니었다. 오크들이 오랜 친구 레이저를 보게 되어 몹시 기뻐하고 있다는 점은 유피넬과 헬카네스의 이 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제는 들고 다니지 않는 그의 지팡이의 이름을 걸고, 그들이 상당한 불안감과 슬픔을 억누르고 있다는 점도 맹세할 수 있었다.

나크둠은 정말 죽어가고 있는 것일까?

나크둠은 그 점에서도 독특하다. 비록 동료 오크들에 대한 분해 재조립 취미가 있었다지만 그것은 오크에게는 일상사였다. 그는 정말 존경받는 오크 였으며, 그래서 이 오크들은 ‘슬퍼하고 있는 것이다.

레이저가 돌아왔다는 소식은 곧장 동굴 곳곳으로 전해졌다. 그래서 레이저는 잠시 후 떠들썩한 오크의 대무리를 이끌고 동굴 가장 깊은 곳, 나크둠 의 방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방이라고 해봐야 갈라진 작은 동굴 하나에 모피 하나를 커튼처럼 붙여둔 것에 불과하지만,

레이저가 나크둠의 방에 다가섰을 때였다.

“그르르……………, 어떤 녀석이야! 취익! 누가, 쿨럭! 츄우웃! 불을 피우는 거야!”

휘익! 하마터면 오크들의 친구, 올로레인 학파의 마지막 전승자, 사기 도박사 레이저는 유명을 달리할 뻔했다. 모피를 뚫고 날아온 손도끼는 레이저 의 다리 사이를 지나쳤다. 아마 틀림없이 복부 쪽을 겨냥하고 집어던진 것일 게다. 까깡! 땡그렁! 레이저를 빗맞춘 손도끼는 뒤의 동굴 벽에 맞아 요 란한 소리를 울렸다. 그 소리는 넋이 나가버린 레이저에게 아직 한 번은 더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볼 수 있음을 깨닫게 해줌과 동시에 도끼의 투척자 에게 겨냥이 빗나갔음을 알려주는 효과도 가져왔다. 모피 안쪽에서 미친 듯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미친놈! 불을 꺼어엇! 취이익! 불을 끄라고! 켈록!”

레이저는 루손이 허벅지를 툭툭 건드리자 간신히 제정신을 차렸다. 루손은 말없이 손을 내밀었고 레이저는 고마움을 느끼면서 횃불을 그에게 건넸 다. 루손은 잔뜩 찡그린 얼굴로, 그러나 아무 말 없이 횃불을 받아들어 높이 쳐들었다.

레이저는 모피를 걷어올리기 전에 먼저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크둠, 나 레이저입니다.”

“취, 칵! 쿨럭. 불을 끄라니까!”

“나크둠! 나 레이저란 말입니다. 갬블러, 아니 인간 레이저요!”

“불을 끄라니까! 쿠, 쿨럭! 이놈들! 취이이익! 나를 벌써 죽은 놈 취급하는 거야! 취이익! 날 태우려는 거냐!”

미친 듯한 고함 소리와 기침 소리는 동굴 속에서 몇 배나 증폭되어 레이저의 귀를 거의 먹어버리게 만들 지경이었다. 피가 머리 끝까지 솟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레이저는 모피를 확 걷었다.

“나크둠!”

그 외에 다른 어떤 말도 꺼내놓지 못했다. 등 뒤에서 비쳐드는 미약한 불빛 아래 드러난 나크둠의 모습을 본 순간 레이저는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말 았다.

레이저의 머리의 두 배는 됨직한 머리나, 당장이라도 비어져나올 듯이 꽉꽉 뭉쳐진 어깨의 힘줄 같은 것은 레이저가 알고 있던 나크둠의 모습 그대 로였다. 상체 곳곳에 새겨진 하얀 상처들은 불굴의 오크의 지나온 날을 증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 전 발광하면서 걷어차 버린 모포 아래 그의 하 체는 말이 아니었다. 나크둠의 허리 아랫부분을 표현하기에 적당한 말은……………. 레이저는 요리를 위해 다져둔 고깃덩이를 떠올렸다. 엉망진창으로 찢 어진 살 곳곳에서 비죽이 튀어나와 있는 하얀 뼛조각들은 산산이 박살나 있었다. 다리 아래에 흘러내린 피는 걸쭉하게 반쯤 굳어 있었지만 나크둠이 발광할 때마다 요란하게 철벅거렸다.

“오, 화렌차여!”

레이저는 간신히 그렇게 말하며 앞으로 쓰러지듯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 순간 재빨리 그의 허리를 낚아채는 손이 있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돌아보자 루손이 그를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취익. 다가가지 마. 물어뜯어 죽일지도 모른다. 취취칙! 그는 미쳤어, 고통과 공포 때문에 취이이익!”

레이저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래, 미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저런 고통 속에서 아직 살아 있는 것이 신비로울 정도다. 나크둠이기에 아직도 살 아 있는 것이리라.

레이저는 천천히 손을 내려 루손의 손목을 붙잡았다.

“치워. 나는 친구를 시체 취급하는 취미는 없다. 그와 이야기를 나눠야 해.”

루손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손에 더욱 힘을 가해 왔다. 레이저에게는 루손의 강인한 팔을 치워버릴 만큼의 힘이 없었다. 하지만 레이저는 눈을 치켜 뜨며 낮게 말했다.

“손 치우지 않으면 태워버리겠어!”

루손은 으르렁거리며 그를 올려다보았지만 레이저는 눈을 돌리지 않고 똑바로 마주보았다. 잠시 후 루손은 체념한 듯한 모습으로 손에서 힘을 뺐다. 레이저는 나크둠에게 다가갔다.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횃불 빛에 불과하지만 오크에겐 너무 강한 빛이었고, 게다가 고통 때문에 시력이 거의 상실된 모양이다. 발광하고 있는 나크 둠의 시선은 이리저리 번뜩였지만 레이저에게 맞춰지지는 못했다. 레이저는 심호흡을 하고는 천천히 나크둠 옆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나크둠.”

“크아아아악! 불을 치우란 말이다! 어떤 놈이냐! 취이이이각! 쿨, 쿨럭! 오냐, 나를 죽이러 왔구나! 루손이냐? 킬림보냐! 쿠우울럭!”

“나크둠, 제발! 납니다. 레이저라고요!”

나크둠은 잠시 어리둥절한 듯했다. 오크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레이저는 희망에 찬 표정으로 나크둠의 안색을 살폈다. 그러나 곧 나크둠은 눈빛을 희번덕거리며 으르렁거렸다.

“솔로처!”

레이저는 기가 막혀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맙소사, 솔로처라니! 300년 전의 마법사 아닌가! 나크둠은 아마도 어린 시절에 듣던 옛이야기 속의 마법 사를 떠올린 모양이다. 정신 구조 자체가 거의 붕궤된 것이 아니면 나올 수 없는 퇴행 현상. 더 참을 수 없게 된 레이저는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뻗어 나크둠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나크둠!”

죽으려고 작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레이저의 손이 어깨에 닿자 나크둠은 곧장 레이저의 위치를 파악했다. “취이이이이익!” 화살처럼 날아온 나크둠 의 손이 레이저의 목에 휘리릭 감겼다. 그리고 끔찍하게 굵은 열 개의 손가락이 거침없이 레이저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컥, 나, 나크둠!”

레이저는 미친 듯이 나크둠의 손을 떼어내려고 했지만 힘으로 해서 나크둠의 상대가 될 리가 없다. “레이저어!” 루손이 곧장 횃불을 휘두르며 다가 섰다. 루손은 침착하고도 냉정한 동작으로 횃불을 들이밀었다. 나크둠은 눈 바로 앞으로 다가오는 횃불에 경련을 일으켰다. “쿠아아아악!” 그러나 레 이저의 목을 움켜쥔 손은 놓질 않았다. 루손은 비장한 표정을 짓더니 횃불을 위로 쳐들었다.

“안 돼, 루소온!”

루손은 레이저의 고함 소리에 주춤하며 횃불을 거둬들였다.

“기다려봐, 기다려!”

레이저의 연이은 고함 소리에 루손은 어깨로 숨을 쉬면서 뒤로 물러났다.

“레이저? 취긱, 괜찮나?”

“그래. 손에서 힘을 뺐어! 나크둠, 나크둠?”

툭. 레이저의 목을 감아쥐고 있던 나크둠의 손이 아래로 떨어졌다. 레이저는 섬뜩한 기분을 느끼며 재빨리 나크둠의 가슴에 귀를 가져갔다. 그때 나 크둠의 손이 다시 튕겨지듯 솟아올랐다. 나크둠의 손이 머리에 닿는 순간 레이저는 피가 식는 기분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레이저인가.”

놀랍도록 똑똑한 발음. 레이저는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여전히 초점이 맞지 않은 나크둠의 눈은 그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오크의 표정을 인 간의 표정만큼이나 분명하게 구별하는 레이저는 나크둠의 눈에 미소 비슷한 것이 떠올라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크둠!”

“너무 밝군. 취르르…………. 네 얼굴이 보이지 않아. 거기, 취익! 횃불을 들고 있는 녀석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옆으로 좀 비켜. 취이익! 대가리에 뭐가 든 녀석이야.”

루손은 반가움으로 침을 질질 흘리며 옆으로 비켜났다. 횃불 빛이 멀어지자 이젠 거꾸로 레이저에게 나크둠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게 되었다. 나크 둠은 레이저의 머리를 만지던 두 손으로 그의 머리를 붙잡아서는 천천히 자신의 얼굴 가까이로 가져왔다. 나크둠의 숨결에서 느껴지는 비릿한 냄새 는 레이저에게는 그가 살아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증거나 다름없었다.

“껄껄. 레이저로군. 취이익! 돈 많이 벌었나?”

“나크둠.”

“아, 그래. 취익. 넌 돈보다는 암컷에 관심이 많았지. 암컷들은 많이 가졌나? 취이이익.”

나크둠의 따스한 관심은 레이저로 하여금 눈물을 펑펑 쏟아내게 만들었다. 나크둠은 노회하고 현명한 오크였기에 인간 사회의 보편 가치를 이 정도 로 이해하고 있었다. 레이저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흉하게 찡그리며 벌쭉 웃었다.

“아니오. 하하. 전 인간 암컷들에게는 인기가 없습니다.”

“컬컬컬! 취이익!”

기분 좋은 코울림 소리를 내던 나크둠은 다시 안온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죽기 전에 네 얼굴을 보다니. 취익! 화렌차가 보낸 선물인가 보군.”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나크둠. 일어나셔야지요. 강으로 예, 나크둠, 제가 아직 지키지 못한 약속이 있지 않습니까? 수영을 가르쳐드린다고 했지요. 강으로 갑시다, 나크둠. 이번엔 기필코 그 약속을 지키겠습니다.”

“이 다리로 수영을? 핫하하!”

나크둠의 핀잔에 레이저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이런 멍청이! 스스로를 비판하기 위해 머릿속에 온갖 욕설을 주욱 늘어놓고 심사하고 있던 레 이저를 향해 나크둠은 싱긋 웃었다.

“넌 여전하군, 레이저. 취치칙.”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아무리 어두웠지만, 레이저는 그 순간 불굴의 오크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다. 희디흰 공포의 빛깔, 나크둠의 몸이 가늘게 떨 리기 시작했다.

“나크둠?”

“거인이야.”

“예?”

“멍청아. 취이익! 너는 이 산의 이름도 모르냐?”

갑자기 혼돈스럽게 진행되는 대화에 레이저는 얼떨떨해졌다. 산의 이름? 그가 뭐라고 대답하기 전에, 나크둠은 씹어뱉듯이 말했다.

“그덴 산의 거인, 그덴 산의 거인 말이다!”

레이저가 보여준 반응은 나크둠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레이저는 허탈한 한숨을 내쉰 것이다. 조금 전에는 솔로처의 이름을 부르더니 이젠 그덴 산의 거인인가? 아무래도 그는 옛날, 잠도 자지 않고 늙은 오크들의 이야기를 너무 열심히 듣던 어린 오크였던 모양이다. 레이저는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나크둠. 그덴 산의 거인은 죽었습니다. 300년도 더 전에 드래곤 슬레이어 루트에리노 대왕과 신궁 우타크, 그리고 양치기 차넬에게 죽었다고요.” “취이익! 네 이놈! 그렇다면 넌 내 상처를 어떻게 설명할 테냐!”

상처? 레이저는 조금 전 횃불 빛에 떠올랐던 나크둠의 하체를 떠올렸다. 그의 목 뒤가 아프도록 경직했다. 비록 한 번도 그런 것을 본 적은 없었지 만, 나크둠의 상처는 그야말로 ‘거인이 집어던진 바위에 깔린 듯한 상처였다. 정말 거인이라도 하나 나타난 것일까?

“하지만 나크둠. 당신도 알지 않습니까? 그덴 산의 거인은 300년 전에…………”

“취킥! 닥쳐라, 이놈아! 한 번만 300년이 어쩌고 했다가는 네놈의 혀를, 쿨럭! 쿠, 쿠우울럭!”

나크둠은 허파를 토해 놓을 듯한 격심한 기침을 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그의 몸을 억누르기 위해 레이저는 혼신의 힘을 기울여야 했다. 안 돼, 너무 누르면 안 돼! 그럼 호흡이 불가능해! 머리 한편의 이성은 그에게 계속해서 경고를 보내왔지만 레이저는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나크둠을 거의 껴안듯 이 한 채 내리누르고 있었다.

기침은 시작되었던 것만큼이나 순식간에 멎었다. 나크둠은 숨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들어라! 췻! 오른쪽 눈이 멀었다. 칙! 칙! 오른쪽 다리 뒤에는 시커먼 상처가 있다! 취이익! 넌 그런 모습의 100큐빗 크기의 거인이 뭐라고 생각하느 냐!”

레이저는 혀를 깨물 뻔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레이저는 나크둠이 환상에 시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나크 둠의 진술에 대해 자신이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설명을 확인받기 위해, 레이저는 재빨리 루손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루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힘주어.

레이저는 미칠 것 같았다. 주위의 모든 상황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그의 정신은 아득한 옛날, 기억도 희미한 추억 속으로 도피하기 시작했다. 의자에 앉은 어머니의 발치에서 뒹굴며 듣던 그 옛날이야기의 추억 속으로.

그덴 산의 거인을 완전히 속여 넘긴 우타크와 차넬은 마침내 그의 심복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루트에리노 대왕이 그덴 산의 거인에게 도전장을 보냈을 때 자신의 무릎에도 닿지 않는 인간의 거만한 도전장은 그덴 산의 거인을 반쯤 미치도록 만들었던 것인데, 우타크와 차넬은 더욱 광분하는 모 습을 보여주었다. 그들이 주워 삼긴 저주와 욕설을 모조리 거론하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우타크는 루트에리노 대왕의 몸에 몇 개의 화살을 꽂을 수 있는지를 궁금해 했고 차넬은 루트에리노 대왕의 내부 기관의 모습에 대한 호기심을 피력했다고만 하자. 결국 그덴 산의 거인은 루트에리노 대왕 으로 하여금 어제의 부하들의 공격 아래 죽음을 맞이하도록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떠올리게 되었다.

우타크와 차넬은 당연하게도 그 제안을 수용했다. 우타크는 도무지 빗나가지지를 않는 그의 활을, 그리고 차넬은 헤게모니안이 루트에리노 대왕에 게 보낸 선물 중 가장 값진 것이었다는 그의 검을 힘차게 부여잡았다.

그러나 결전의 순간, 우타크의 활은 최초로 엉뚱한 과녁을 겨냥하게 되었다. 루트에리노 대왕의 심장을 겨냥하던 우타크의 활이 빙그르르 돌며 자신 을 향하는 것을 보았을 때까지도 그덴 산의 거인은 단지 의아함만을 느꼈다. 그러나 날아온 화살은 무참하게 그의 오른쪽 눈을 유린했다. 경악과 고 통, 그리고 분노로 발광하는 거인의 다리 사이를 빠져나간 차넬은, 양치기 차넬답게 조용하고 깔끔하게 거인의 오른쪽 다리를 절개했다.

남아 있는 왼쪽 눈으로 루트에리노 대왕을 바라보고, 멀어버린 오른쪽 눈으로 지옥을 바라보며, 거인은 포효했다. 그 포효 소리는 멀리 자이펀까지 도 울려퍼졌다고 한다. 지금도 그덴 산의 산봉우리를 지나치는 산 폭풍은 거인의 포효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커르, 쿨럭! 그덴 산의 거인이야. 취이이엑…………, 갑자기 나타났어. 나는 싸웠어. 취, 취이익! 그러나 거인은 바위를 던졌어. 화렌차여! 취이익! 레이 저, 너도 알지? 길잡이 바위 말이야. 취이익! 쿨럭! 켁! 그걸 던졌다고! 그게 굴러가다가, 헉, 취헉! 내 다리를 뭉개놓았어. 치착!”

레이저는 자신이 아랫입술을 떨어져나갈 정도로 깨물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나크둠의 작은 눈에는 한없는 공포가 담겨 있었다.

“이제 모두 그덴 산에서 떠나야 돼. 발 달린 것은 걸어서. 날개 달린 것은 날아서. 췻. 발도 날개도 없는 것은 기어서…………. 그래, 난 가야 해! 취이익! 뱀처럼 기어서라도 가겠다! 난 뱀이야!”

“나크둠!”

“레이저, 레이저! 츄, 취이익! 나를 데리고 가줘, 응? 췻, 취치칙!”

나크둠은 사방으로 걸쭉한 침을 날려보내며 미친 듯이 머리를 흔들었다.

“나를 데리고 가! 제에에발 부탁이야, 부탁한다고!”

어느새 나크둠의 눈은 다시 광기로 희번덕거리고 있었다. 레이저는 돌멩이라도 하나 삼키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나크둠은 레이저의 목에 매달리며 고래고래 고함질렀다. 제발 그를 데려가 달라고, 비굴하게. 나크둠이 비굴하게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레이저가 단 한 번도, 보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 도 못해 보았던 모습으로.

“살려줘, 살려달라고! 취킥! 제발, 레이저. 응? 나를 데리고 가. 취익취익. 난 걸을 수 없어. 저놈들은 나를 죽일 거야, 너 외엔 아무도 없어! 취, 췻! 쿠울럭! 허어, 쿠후울럭! 레이저어!”

레이저의 귀에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레이저는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은 채 나크둠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의 눈에서 흘러나온 눈물이 나크둠의 가슴을 흠뻑 적셨다.

루손은 조용히 횃불을 집어던졌다.

동굴 안은 삽시간에 캄캄해졌으며, 그 암흑 속에서 나크둠의 고함 소리는 점점 잦아들었고 레이저의 울음소리는 점점 커졌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