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 워커 2권 – 5장 거짓된사랑의 진실(상) 2 (2권 끝)

퓨처 워커 2권 – 5장 거짓된사랑의 진실(상) 2


2

상대를 미치광이 취급하고 싶지 않았던 치터리는 차마 여자를 찾고 있느냐고 물을 수 없었고, 완고한 육전 대원들은 창피스러워서 차마 쥐를 잡고 있다는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의 대화에서는 목적어가 생략되거나 모호한 대명사로만 처리되었고, 결과적으로 아주 이상한 대화가 되고 말았다.

“어, 뭘 찾고 있소?”

“예, 뭘좀.”

“음. 그러니까, 쉽게 찾아질 것 같습니까?”

“그렇지 못하군요. 겁을 먹었는지 꼭꼭 숨어서 나오지를 않습니다.”

“뭐, 선원들이 무서워서겠지요.”

“예. 잡히기만 하면 바다에 던질 테니까요.”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예. 배에 큰 재앙이 올지도 모르니까요. 도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저 에, 그것, 그것 때문에 배가 침몰하기까지야 하겠습니까?”

“배야 침몰하지 않겠지만 선원들이 문제잖습니까.”

“선원? 아, 그렇군요. 예, 선원들이. 음…………, 이렇게 고립된 곳이니.”

“그렇습니다. 프리스트님. 그런데 정말 잘 숨어다니는군요.”

“그렇지만, 그렇다면 뭘 먹고 있겠습니까? 조리실에는 항상 선원들이 있는데.”

“예? 당연히 배 아래의 식량 창고에서 음식물을 훔쳐먹겠지요.”

“아, 그렇겠군요. 예.”

치터리는 암담한 심정으로 확신하게 되었다. 육전 대원들은 정말로 이 배에 여자가 타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배에 여자가 타면 재수 없 다는 뱃사람들의 믿음에 따라 발견하기만 하면 바다에 던져버릴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피해망상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을 게다. 여자 때문 에 바다에 빠져 죽기는 싫을 테니 육전 대원들은 목숨을 걸고 여자를 찾겠지. 그러나 아무리 찾아봐도 여자를 발견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데 자신을 위협하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 정상적인 사람과 피해망상에 걸린 사람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는 법이다. 정상적인 사람 이라면 자신을 위협하는 것이 사실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판단하고 수색을 중지할 테지만, 피해망상에 걸린 사람은 이제 꼼짝없이 파멸하게 되었다고 여기고 자포자기하게 되거나, 아니면 더욱 집요하게 찾아 헤매다가 결국 자기 눈에만 보이는 환상을 만들어내게 될 것이다. ‘저, 저기 칼 든 여자가 나를 노리고 있어! 저길 봐!’ 이런 식으로………………

그래서 신실한 프리스트 치터리 무스는 열과 성을 다해 육전 대원들이 발광의 흔적을 보이지 않는지 감시하게 되었다. 이제 상황은 묘하게 바뀌어 치터리가 육전 대원들의 그림자가 되어 움직이게 되었고, 그 광경을 보며 이시도는 배부른 미소를 지었다. 신차이는 이시도가 과연 어떤 방식으로 일 처리를 했기에 손님들이 이런 이상한 모습을 보여주는지 궁금하게 여겼지만 ‘신뢰하는’ 일등 항해사의 일처리 방식을 가지고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 았기에 아무 질문도 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 손님들은 이제 전혀 심심해 보이지 않았으니까.

“상황이 좋다면 이유는 따질 필요가 없는 거지.”

신차이는 그렇게 말하며 장기판 옆에 놓아둔 술잔을 들었다.

하늘은 시뻘겋고 바다는 불타오르는, 망망한 바다 한가운데서 맞이하는 황혼이었다. 신차이는 갑판 위에 술통을 엎어 그것을 장기 테이블로 삼고 그 앞에 덱체어를 놓고 앉아 황혼을 감상하고 있었다. 역시 술통 옆에 앉아서 선장을 상대하고 있던 이시도는 싱긋 웃으며 자기 술잔을 끌어당겼다. 그 속에는 술 대신 물이 담겨 있었다. 선장과 일등 항해사 모두가 취해 버릴 수는 없기 때문에 이시도가 자신의 풍부한 상상력을 활용하기로 마음먹은 결과다.

장기판 위로 말들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배가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임에 따라 그림자가 짧아졌다 길어졌다 하고 있어서 장기판 위는 매우 소란 스럽게 보였다. 실제로는 장기판이든 말들이든 꼼짝도 하지 않았지만, 이 장기판은 조금 독특하게 생겨서 칸마다 구멍이 뚫려 있었고 말들의 아래쪽 에는 구멍에 끼울 수 있는 작은 요철이 있었다. 배에서 사용되는 물품다운 고안으로, 말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스트와 밧줄들의 그림자가 그려놓은 복잡한 그림을 제외하면, 갑판의 나머지 부분은 모조리 따스한 붉은색뿐이었다. 바람이 잠잠했기에 선원들 역시 뱃전에 몸을 기대고 석양을 바라보거나 갑판 구석에 앉은 채 조용조용히 잡담을 나누거나 하고 있었다. 고요한 배의 황혼이었다.

신차이는 수평선에서 불타오르는 노을에 시선을 맞춘 채 술잔을 기울였다.

“바람이 잠잠하군.”

“하지만 구름은 움직입니다.”

먼 하늘을 바라보던 신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조만간 괜찮은 바람이 있겠어.”

“예. 장군입니다.”

신차이는 당황하며 술잔을 내리며 장기판을 바라보았다.

“잠깐, 구름이 움직인다는 것은…..?”

이시도가 지금 손을 떼고 있는 말은 ‘구름’이었다. 넓은 장기판의 하늘에서 이시도의 ‘바람’과 ‘달’에 협공당하던 신차이의 ‘태양’은 이제 더 이상 도 망칠 자리가 없게 되었다. 이시도는 잔혹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말씀드렸잖습니까?”

“으으음!”

신차이는 신음을 토했고 이시도는 야유하는 태도로 물잔을 들어올려 건배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잔을 들이키는 대신 이시도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바로 그때 기다리던 바람이 불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 왔다!”

이시도는 신차이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장기판에서 달려나와 조타수에게 명령을 내렸고, 홀로 남겨진 신차이는 장기판을 쏘아보며 안타까운 고민에 빠져들었다. 이때 ‘별’을 움직였어야 되는데, 아니, ‘달’을 희생시키고 ‘드래곤’을 움직였다면………

신차이는 피식 웃으며 술잔을 비웠다. 돌이킬 수 없는 거지, 뭐. 어쨌든 신차이의 태양은 죽었고, 오늘의 태양도 수평선 아래로 떨어졌다.

항해 나흘째, 육풍과 국지적 해류의 영향을 피해 원양으로 나온 레드 서펀트는 기다리던 바람을 맞이하여 서서히 걸프스트림에 합류되는 방향으로 항로를 변경했다. 조타수가 힘차게 타륜을 돌리자 레드 서펀트는 그 거체를 유연하게 비틀었다. 레드 서펀트는 이제 나침반의 바늘을 따라 똑바로 북 쪽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엑셀핸드는 씩 웃으며 제레인트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뻗어 제레인트의 허리를 쿡 찔렀다.

“죽었냐?”

땅바닥에 역동적인 자세로 널브러져 있던 제레인트는 뱀에 물린 것처럼 펄쩍 뛰어올랐다.

“허어억! 엑셀핸드, 찌르지 말아요!”

“왜?”

“허리가 끊어질 지경입니다. 흐으윽.”

“그렇다면 이 소식은 말해 주지 않는 편이 좋겠군.”

“그건 말하고야 말겠다는 뜻이잖아요. 무슨 소식이지요?”

“봉우리 하나를 더 넘어야 해.”

“에, 에, 엑셀핸드. 그 동안 즐거웠어요. 그럼……….”

제레인트는 눈을 뒤집고 죽은 시늉을 하기 시작했다. 엑셀핸드는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안 되네, 제레인트! 도끼로 무덤을 파는 것은 중노동일세! 난 그렇게 못하니 자넨 죽어선 안 돼.”

미주르의 아름다운 봉우리들 사이로 테페리의 프리스트의 처절한 신음 소리가 울려퍼졌다. 아프나이델은 당황해서 돌아보다가 곧 제레인트와 엑셀 핸드가 일상적인 대화를 주고받고 있음을 깨닫고 다시 고개를 돌려 하던 일을 계속했다. 즉, 발에 각반을 다시 묶는 척하며 이루릴과 아일페사스를 계속 훔쳐보았다.

두 비인간들에게서는 미주르 등반이라는 험악한 고역의 흔적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아프나이델 자신이 물집이 가득한 발을 부여잡고 낑낑거리는 것이나 에델린이 앉은 자세로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것에 비해 볼 때 아일페사스와 이루릴은 피크닉을 나온 처녀만큼의 피로도 보여주지 않고 있었다. 아일페사스야 강인한 드래곤이라 그렇다지만 이루릴은 어떻게 저렇게 평온한 모습인지. 일행들이 식사와 휴식을 위해 잠시 멈춘 동안 이루릴은 바위 에 걸터앉아서 산바람에 흐트러진 머릿결을 빗어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아프나이델의 눈을, 그리고 그 앞에서 입을 조금 벌린 채 바라보고 있는 아일페사스의 눈을 붙잡고는 놓아주지 않고 있는 것이다. 서툰 동작, 쓸데없는 동작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아프나이델은 그렇게 판단했다. 머리를 빗는 여자의 모습을 볼 기회가 많았던 것은 아니지만, 아프 나이델은 어떤 인간의 여자도 저런 식으로 머리를 빗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빗은 나무로 만들어진, 단순하다 못해 투박한 것이었고 손동작에도 특별한 화려함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완만하고 정숙했으며 도무지 인간처럼 보이지 않는 이질적인 손놀림이었다.

황홀한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아일페사스는 불쑥 손을 내밀었다.

“저 빗 좀 빌려줘. 루리.”

섬세하게 빗어내린 머리를 손수건으로 묶던 이루릴은 미소지으며 말했다.

“돌아앉아요. 빗겨줄게요. 펫시.”

이루릴의 친절함은 목표를 잘못 포착했고 아프나이델은 미소를 짓고 말았다. 아일페사스는 머리를 정돈하고 싶다기보다는 빗질 그 자체를 해보고 싶었던 것이리라. 어차피 지금의 모습은 그녀의 원래 모습이 아닌 만큼 가꾸거나 다듬어보아도 폴리모프해 버리면 다 사라질 모습이다.

그러나 아일페사스는 냉큼 돌아앉았다. 빗이 머리에 닿는 순간 아일페사스는 어깨를 움찔했지만, 이루릴이 그녀의 금빛 머리카락을 천천히 빗어내 리자 곧 아일페사스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그녀의 입술이 무의식중에 오물거리는 것을 보며 아프나이델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다른 사람의 머리를 빗겨주는 데 있어서도 이루릴의 손놀림은 정확하고 민첩하고 부드러웠다. 풍성하고 고운 머릿결이긴 했지만 원래 모습이 아니 라는 것 때문에 아무렇게나 내버려두었던 아일페사스의 머리카락은 이루릴의 손길 아래 깔끔하게 정돈되어 갔다.

“시간이 정지한다는 건, 무슨 뜻이죠, 루리?”

아일페사스는 눈을 감은 채 질문했다. 이루릴은 흠칫하지도 않았고 심호흡을 하지도 않았다. 태연하게 아일페사스의 머리카락을 빗어내리며 이루릴 은 대답했다.

“당신의 시간 말인가요, 아니면 내 시간 말인가요. 아니면 인간의 시간?”

“그게 무슨 말?”

“글쎄요. 당신이나 나에겐 시간이 많지요. 오크분들이나 인간분들에 비해서는 말이에요.”

아프나이델은 흠칫하며 신경을 곤두세웠다. 거의 지각하지 못할 뻔했지만 지금 눈앞에 펼쳐진 것은 드래곤과 엘프의 대화인 것이다. 그들 인간보다 월등히 위대하고 심원한 종족들이 우주에 대해 논하고 있는 것. 아프나이델은 자신이 보통 인간으로서는 꿈도 꿀 수 없는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는 것 을 알아차렸다. 그는 각반을 손에 쥔 채 정신없이 둘의 대화에 빠져들었다.

“흐응. 시간을 가지고 많다느니 적다느니 말할 수 있나? 우습잖아, 루리.”

“네?”

“한 통의 물은 피라미에겐 많은 물이지만 크라켄에겐 턱없이 적은 물이잖아요. 하지만 그건 같은 물.”

“예, 그렇지요. 하지만 절대적인 시간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를 본다면 역시 당신에겐 많은 시간이 있어요. 당신은 여기 있는 인간분들이 모두 늙 어서 인생의 허허로움을 말할 때까지도 지금의 모습을 지킬 수 있을 거예요. 그렇지요?”

아일페사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입술을 꼭 깨물었을 뿐이다. 그녀의 표정을 볼 수 없었던 이루릴은 조용조용히 말을 이 어나갔다.

“그렇다면 여기 있는 인간분들이 보기에 당신은 정지된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요. 하루가 지나도, 1년이 지나도, 10년이나 100년이 지나도 당신 은 지금 그대로의 모습일 테니까요. 하지만 그건 산이나 바다, 혹은 언덕이 예전 그대로의 모습이라고 말하는 것과는 달라요. 당신은 살아 있는 존재 니까요.”

“살아 있는 것이 뭔데?”

“모든 무생물들에게 공평하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자신만의 다른 흐름을 가질 권리를 받은 것을 의미하지요. 그게 살아 있다는 것이에요. 제가 알기 로 인간들의 경우에는…………….”

이루릴은 말을 꺼내다가 잠시 멈추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레인트는 엑셀핸드와 악담을 덕담처럼 나누고 있었고 아프나이델은 각반의 매듭에 관 해 심도 있는 고찰을 수행 중이었다. 이루릴은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그들은 자신에게 부여된 다른 흐름을 더 가속하는 일에 관심이 많지요.”

“가속이라고요?”

“인간들이 날짜와 시간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알고 계시지요?”

“예. 어제, 오늘, 내일, 시간, 분, 초, 한 달, 1년, 세기…………..”

“때가 되면 찾아올 시간의 흐름에 그런 이름을 붙이는 이유는 뭘까요. 저는 인간들이 그것을 앞지르겠다는 의미일 거라고 생각해요. 그저 걷고 싶어 서 산책을 한다면 목표가 없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목표점을 가지게 된다면, 거기까지 달려간다거나 걸어간다거나 언제까지 도착하겠다고 하는 의 지와 힘, 방법론 등이 생길 수 있겠지요. 인간들이 시간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닐까요. 다음 주까지는 이 일을 끝내겠다거나, 올해 안 에 뭔가를 하겠다거나……………. 만일 인간들이 시간에 붙인 이름을 상실하게 된다면, 그런 일들은 표현할 수조차 없게 되겠지요.”

이루릴은 갑자기 생긋 웃었다.

“제가 인간어를 배울 때 가장 힘들었던 것은 시제에 대한 것이었지요. 인간들의 말에는 시간을 지칭하는 말들이 너무 많았어요. 그리고 시간에 따라 행동의 형식이 바뀌더군요. 심지어는 행동의 가치도 바뀌는 것 같았어요. 인간들의 말에서 ‘사랑했다’와 ‘사랑한다’는 우리들이 느끼는 것보다 훨씬 많은 차이를 가져요. 그리고 사랑할 거라는 말 역시.”

“그거 아주 달라요. 전 알아.”

“그런가요? 당신은 제레인트와 아프나이델과 많은 시간을 보냈으니까 저보다는 그들에 대한 이해가 깊을 수도 있겠군요. ‘사랑했다’와 ‘사랑한다’가 어떻게 다른가요?”

이루릴은 어느새 빗질을 마쳤다. 그러나 아일페사스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말했다.

“그건 말이야, 음. 사랑했다는 말은, 예전에는 사랑하지만 지금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지. 그리고 사랑한다는 말은 지금도 계속해서 사랑한다는 말이고요.”

아일페사스는 이 단순한 설명을 퍽 자랑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이루릴은 조용히 말했다.

“그럼 예전의 사랑은 사라지나요.”

“응?”

“인간들의 말은 그렇더군요. ‘사랑했다’라는 짧은 말로 예전의 가치를 모조리 소멸시키는 것처럼 행동하는 듯했어요. 하지만 그들에게서 정말 그것 이 소멸되었나요?”

“그건・・・・・・ 몰라요.”

이루릴은 노련한 모험가들이 그러듯이 검집에 친친 묶어두었던 끈을 조금 잘라내서 아일페사스의 탐스러운 머리채를 세심하게 묶어주었다. “인간들은 잊고 싶어 하더군요. 기록과 역사를 남기는 것이 인간이라지만 그것에 속으면 안 되겠지요. 오로라와 망각의 이사가 그의 처녀들에게 극 지에서만, 인간들이 살지 않는 극지에서만 오로라를 짜도록 허락한 까닭은 뭘까요. 그들이 모든 하늘에 그 아름다운 천을 펼친다면 완전한 망각을 꿈 꾸는 인간들은 모두 그것을 정신없이 바라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겠지요.”

둘의 대화를 듣던 아프나이델은 무심코 각반을 세 번이나 묶고 말았다. 그래, 잊고 싶어 하지. 제레인트는 그의 부모를, 나는 나의 과거를 내 원래 이름은…………….

아프나이델은 한숨을 내쉬면서 세 번이나 묶어버린 매듭을 어떻게 하면 칼을 대지 않고 풀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인간들에게 있어 시간은 망각의 축복이겠지요. 그리고 인간들에게 시간이 정지했다는 것은………….”

“더 이상 망각할 수 없다?”

“그렇겠지요.”

“그래서 과거가 돌아오니까 그렇게 소스라쳤군요. 음. 하지만 전 이해가 안 돼. 루리도 말했잖니? 기록과 역사를 남기는 인간이라고요. 잊고 싶어 하 는 인간이라면 왜 그런 것을 남기는 거야?”

“저로선 잘 모르겠군요.”

“그건 사망 증명서지요.”

이루릴과 아일페사스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아프나이델이 각반의 매듭을 부여잡고 낑낑거리고 있었다. 아프나이델은 고개를 숙여 각반 에 눈을 준 채 말했다.

“과거는 이제 죽었음을 증명함. 과거에 대한 기록은 그런 사망 증명서겠지요. 죽은 몬스터는 무섭지 않아요. 그리고 죽은 과거 역시. 인간은 기록 을 보며 안심할 테죠. 아아, 이건 확실히 죽었구나. 그럼 마음껏 자유스럽게 과거를 대할 수 있게 되겠지요. 과거 시제도 그런 의미예요, 이루릴. 사랑 했다는 말은, 이제 그 사랑은 죽었음을 선포하고, 그 감정에 대해 가슴 아파하지 않겠다는 의미겠지요. 찢어지는 아픔 없이 그때의 사랑에 대해 추억 해 볼 수 있는 거죠. 그게 되살아나 다시 자신을 괴롭히는 일은 없을 거라고 믿으며.”

이루릴은 천천히 아프나이델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종이나 천이 아닌 나무처럼 아프나이델의 말을 흡수했다. 천천히, 섬세하게. 그러나 아일페 사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아프나이델을 바라보았다.

“나이드. 너 실연했니?”

당황한 아프나이델은 그만 네 번째 매듭을 묶고 말았다. 결국 칼을 대고 만 아프나이델은 상당히 짧아진 각반 끈을 묶느라 고생을 했다. 아프나이델 을 이런 곤경에 몰아넣고도 아일페사스는 집요하게 질문에 대한 대답을 받아내려 했지만 아프나이델은 대답 대신 꾸벅꾸벅 졸고 있던 에델린을 책망 했다.

“에델린 양, 일어나세요! 갈 길이 바쁘단 말입니다!”

“어, 예, 이런, 졸았군요. 으아아암.”

아프나이델의 계략은 맞아떨어졌고 에델린이 하품하는 모습은 아일페사스를 감탄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아일페사스는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생각했 다. 흥. 나도 드래곤이 되면 저보다 훨씬 멋진 이빨을 가지게 될걸? 음, 오후에는 원래 모습으로 다녀볼까? 그러나 아일페사스는 말끔히 정돈된 머리 카락을 살짝 흔들어보고는 생각을 바꿨다. 이왕 바꾼 머리 모양이니, 좀더 이대로 있자.


루손은 주저앉고 싶었다. 주위를 오가는 이 많은 숫자의 인간들이라니! 지독한 인간 냄새에 루손은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루손은 절망적으로 코를 벌름거리며 레이저의 옆에 바싹 붙어 서서 중얼거렸다.

“안 돼. 더 못 버티겠어, 레이저, 무서워!”

“이 친구야. 네가 본모습을 드러내면 여기 오가는 녀석들이 더 무서워할 거야. 그런데 그런 사람은 없잖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단 말이다.” “누, 눈치챘어! 눈치챘다고!”

“뭐?”

“인간놈들이, 놈들이 자꾸 나를 보고 있어. 이젠 끝장이야! 레이저, 셋에 곧장 마법을 써, 하나, 둘.”

“그만! 정지, 정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인간놈들이 나를 흘끔흘끔 보고 있단 말이다!”

레이저는 의아쩍은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자신과 루손을 훔쳐보고 있는 많은 행인들의 시선을 발견하게 되었다. 어라?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그러나 레이저는 순간적으로 이유를 파악했고, 그래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실수했군.”

레이저의 이 탄식에 루손은 심장마비를 일으킬 뻔했다. 루손은 곧장 레이저를 땅바닥에 메다꽂아 놓고는 목을 졸라쥔 채 변신의 어떤 부분에서 실수 했냐고 고래고래 고함지르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때 레이저가 말했다.

“너무 예쁘게 만들어버린 모양이군. 원참.”

“뭐야?”

레이저는 뒤통수를 긁으며 실실 웃었다.

“흐음, 흠, 루손. 네가 미인이라서 인간 수컷들이 너에게 매력을 느끼는 모양이다.”

루손은 입을 쩍 벌린 채 레이저를 바라보았다. 뭐라고? 인간 수컷들이 나를………………

다음 순간 루손은 온몸에 돋는 소름을 참지 못하고 엄청난 기세로 글레이브를 휘둘렀다. 하마터면 레이저의 파편들이 될 뻔한 위기에서 아슬아슬하 게 빠져나가는 레이저를 보며 주위의 행인들은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그 비명을 집어삼키며 루손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아니 앙칼지게 울려퍼졌다. “이 자식아! 네가 날 이런 꼴로 만들었지!”

행인들의 비명은 제대로 나오지도 못한 채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레이저는 머리 끝까지 화가 나서 외쳤다.

“야! 누구한테 뒤집어씌우려는 거야! 너도 좋다고 그랬잖아!”

행인들은 이제 뭐라 말할 수 없는 표정이 되었다. 예의바른 패거리들은 그냥 웃으며 떠나가 버렸고 호기심이 강한 패거리들은 이제 걸음을 멈추고 뻔뻔스런 자세로 사태의 귀결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루손은 주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이 계속 글레이브를 휘두르며 외쳤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단 말이야! 이 나쁜 놈아!”

“젠장, 그럼 나더러 이제 어쩌라고! 그만두지 못해!”

그때 행인들 틈에서 분노에 목을 떠는 호통 소리가 터져나왔다.

“저런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놈을 봤나!”

루손은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고서야 루손은 자신이 행인들의 시선을 한몸에 붙잡아 놓았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래서 가련하기 짝이 없는 모 습으로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한숨 돌린 레이저는 이 용맹무쌍한 고함 소리가 어디서 울려나왔는지를 찾아보았다.

그리고 레이저는 한 키 작은 사내가 머리 끝이 곤두설 정도로 화난 얼굴을 한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내는 등에 커다란 하프 를 지고 허리에도 커다란 검을 차고 있었다. 그 팔로 쓸 수 있을지 의심이 될 정도로 길다란 검이라서 레이저는 잠시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그 검을 보았다. 그러나 사내는 레이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곧장 루손을 향해 걸어갔다.

루손은 패닉 상태에 빠져서는 글레이브를 들어올려 걸어오는 사내를 겨냥했다. 그러나 무릎을 꿇고 있던 사내는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사내는 곧 열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용서하소서! 레이디의 부름 비록 없었으나 여기 파하스라 불리는 광대가 왔나이다. 저 불측한 자가 레이디께 어떤 불명예를 끼쳤는지 감히 여쭤볼 수도 없사옵니다만 원하신다면 이 미력한 검을 들어 저 불측한 자를 응징하겠다는 것만은 저의 보잘것 없는 명예를 걸어 약속드리겠나이다!”

“가까이 오지 마!”

“아아, 일신에 닥친 불행 때문에 모든 남자들을 의심하시진 마시오, 아름다우신 레이디여! 여기 레이디 앞에 무릎꿇은 어리석은 광대는 저 아리따운 꽃을 상징으로 삼는 신으로부터 이 불쌍한 가슴에 담을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정의를 부여받은 자일 뿐이올시다. 그 외에는 인간이 말하는 것이든 말 할 수 없는 것이든, 그 어떤 것도 원하지 않나이다. 무엇이든지 하명만 하십시오!”

루손은 거의 울고 싶어졌다. 이 미치광이 같은 인간 녀석이 뭐라고 중얼거리는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무릎을 꿇은 것을 보니 공격 의사는 없 어 보여 안심이 되었지만 지껄이는 목소리가 마치 싸움을 거는 것처럼 쩌렁쩌렁했다. 루손은 이 작자가 무릎을 꿇은 지금 단숨에 목을 쳐버리고 달아 나면 어떨까 하는 생각마저 떠올렸다. 자신에게 닥친 위험을 전혀 알지 못하던 파하스는 격정적인 얼굴을 들어 루손을 올려다보았고, 때마침 글레이 브를 휘두르려고 마음먹었던 루손은 질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얼굴이 너무 무서웠다! (실제로 그것은 자긍심에 가득 찬 사나이의 얼굴이었을 뿐이지만.)

“으, 으아…….”

레이저만이 파하스의 위기를 알아차리고 있었다. 흥분한 루손이 글레이브를 꽈악 움켜쥐는 것을 보며 레이저는 파국을 예감했다. 이제 끝장이구나. 빌어먹을, 저건 도대체 어떤 품질의 미치광이야?

암담한 심정으로 루손을 날려버릴 것인지 파하스를 날려버릴 것인지 고민하던 레이저의 시선 앞으로 붉은 머릿결이 물결쳤다. 좋은 향기. 레이저는 자신도 모르게 잠시 코를 벌름거렸다. 눈을 똑바로 뜬 레이저는 손에 창날이 세 개나 달린 희한한 창을 들고 있는 날씬한 체구의 빨강머리 아가씨를 보게 되었다.

느닷없이 나타난 처녀는 무릎을 꿇은 파하스의 엉덩이를 창대로 톡톡 건드렸다. 파하스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낭랑하게 말했다.

“내버려두고 일어나요, 파하스.”

“예? 하지만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외다, 네리아 양! 레이디의 명예가 진흙탕에 빠진.

네리아는 한숨을 내쉬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당신이 이렇게 떠들고 있으면 저 여자는 처지가 더 이상하게 되잖아요. 어서 일어나요! 뭐예요, 저 여자가 저 남자를 죽이라고 하면 정말 죽이기라 도 할 거예요?”

파하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났다. 물론 네리아에 대한 찬양 한 마디를 빼놓지는 않았다.

“유피넬과 헬카네스의 이름으로 레이디 네리아 만세! 지혜롭고 사려 깊으십니다, 네리아 양. 예, 이런 일은 조용히 처리되어야 마땅하겠지요. 제가 그만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오, 헬카네스! 오, 위대한 혼돈의 추의 주인이시여. 추를 배치하는 그 손길에 영광 있으라. 저 붉은 머리 여자가 저 미치광이에게 준비된 추였구나. 레이저는 헬카네스를 맹렬히 찬양하면서 빙긋 웃었다. 그러나 그때 레이저는 파하스가 자신을 향해 똑바로 걸어오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파하스는 레이저의 턱 바로 아래에 서더니 고개를 한껏 쳐들고 레이저를 쏘아보기 시작했다. 뭐지? 레이저가 뭐라고 말하려 할 때 파하스가 먼저 으 르렁거리듯 말했다.

“아이야 이켈리나의 파하스가 자네에게 경고하네. 무릇 사내구실을 하는 길은 길고 고단하지. 자네가 어깨에 걸머져야 할 명예나 자존심, 또는 나는 알지 못하는 자네 소망의 무게가 대단할 거라는 것도 잘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장 소중한 짐을 버려서는 안 된다! 열과 성을 다해 저 레이디 를 아끼고 보살펴라. 알았냐?”

파하스는 참으로 감동해야 마땅하지 않느냐는 얼굴로 연설을 마쳤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레이저는 ‘아이야 이켈리나의 파하스……………’이후부터는 파 하스의 말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고품질을 보장받는 미치광이였군. 레이저는 애써 머쓱한 미소를 지어냈다.

“예, 예.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형씨.”

“파하스다!”

“파하스 씨.”

“흐음. 알아들었으니 이만 물러나겠어. 하지만 내 귀는 도움을 요청하는 레이디의 목소리를 듣는 데 있어서는 드워프의 귀도 부럽지 않다는 것을 명 심하게나.”

“물론입죠, 파하스 씨.”

파하스는 분명히 아이야 이켈리나의 파하스라고 이름을 밝혔는데도 눈앞의 사내가 전혀 놀라지 않는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자식도 나 를 미치광이로 생각하고 있군. 파하스는 보다 맹렬한 한 마디를 던져주기 위해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그때 네리아가 다가왔다.

“어서 가요, 파하스. 일행과 떨어지겠어요.”

“아, 예. 음……………, 너, 명심해!”

“예, 예.”

그러고 나서도 파하스는 뭔가 더 해줄 말이 있다는 것처럼 미적거렸지만 네리아가 재빨리 팔짱을 끼고 당기자 무력하게 끌려가기 시작했다. 레이저 는 그 뒷모습을 보며 빙긋 웃다가 고개를 돌려 루손을 돌아보았다.

루손은 처량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서 있었다. 글레이브를 쥔 두 손은 아래로 늘어뜨리고 어깨는 축 처져 있었다. 레이저에게 다가오고 싶지만 조 금 전까지 레이저가 파하스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서 다가오지 못했다는 사정이 그 표정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레이저는 웃으며 말했다.

“가자, 루손.”

루손은 힘없는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그는 무서웠고, 달아나고 싶었고, 끔찍한 기분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루손은 그의 조악한 어휘 체계에서 적절한 단어들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루손은 다른 것을 질문했다.

“조금 전에 그 녀석이 도대체 뭐라고 그런 거야?”

“응?”

“뭐라고 길게 말하기는 하는데 도대체 못 알아들을 소리만 하잖아.”

“아아, 신경 쓰지 마. 그건 정신병자였어.”

맥을 탁 풀려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루손의 놀라움은 더 컸다. 앞으로 고꾸라질 뻔한 루손은 입을 쩍 벌린 채 말했다.

“저, 정신병자?”

“응. 자기가 100년 전의 대시인인 파하스라고 생각하고 있더라. 완전히 돈 녀석이지.”

“이 나쁜 놈아! 그 녀석이 미친 녀석이라면, 세상에! 내가 미친 놈하고 상대하고 있도록 내버려뒀단 말이야?”

“나도 이야기를 나눠보고서야 알게 된…………!”

레이저는 갑자기 말끝을 삼켰다. 레이저의 눈이 경악으로 순식간에 커졌다. 그는 고개를 휙 돌려 파하스와 네리아가 사라진 방향을 쏘아보았다. 

“파하스도……?”

“뭐? 왜 그래?”

목구멍 저 안쪽에서 당장이라도 터져나올 것 같은 비명을 억누르며 레이저는 자기 주먹을 깨물었다. 손에 통증을 느끼며 레이저는 간신히 침착을 되 찾을 수 있었다.

“잠깐……, 잠깐만! 그덴 산의 거인도.. 살아났지. 그, 그럼 파하스도? 저건 진짜 파하스인가……………? 따라와!”

“뭐, 어? 레이저?”

레이저는 고함 소리만 남겨놓고 달려가기 시작했다. 앞에 거치적거리는 사람을 거침없이 밀어붙이며 달려가는 레이저의 뒤통수에 행인들은 욕설을 퍼부었다. 루손은 그 욕설들을 잘 들어두었다가 기필코 써먹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사람들 틈에 홀로 남겨지지 않기 위해 기를 쓰며 레이저의 뒤 를 따라 달렸다.

“뭐야, 뭐냐고!”

“닥치고 따라와! 확인해야 돼.”

“뭘 확인해!”

루손은 다급하게 고함지르며 달리다가 하마터면 레이저와 부딪힐 뻔했다. 레이저가 갑자기 멈춰 섰기 때문이다. 루손은 그에게 조금 전에 배운 욕설 을 퍼부어 주려고 했지만, 레이저의 얼굴을 보고서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레이저는 이를 악문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헤어진 지 채 몇 분도 되지 않 았는데 파하스와 네리아의 모습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제길! 그새 어디로 간 거지?”

레이저는 씩씩거렸다. 그러나 문득 고개를 돌리자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자기를 쳐다보는 루손이 있었다. 이런, 이 친구는 이 무시무시한 인간의 도시에서 나 외엔 기댈 데가 없었지. 레이저는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천천히 찾아보지. 아까 그 사람들, 배낭이나 뭐 다른 짐이 없었으니 이곳에 살고 있거나 아니면 어딘가에 묵고 있는 것일 거야. 찾을 수 있어. 그러 니 일단 저녁이나 먹자, 루손, 잠자리도 알아보고.”

“왜 그래? 조금 전의 그 인간, 네가 아는 인간인가?”

레이저는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알긴 알아……, 괜찮은 친구지. 나보다 나이가 100살이나 많다는 것 빼곤 말이야.”

“뭐라고?”

<3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