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 워커 3권 – 5장 거짓된 사랑의 진실 (하)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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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저가 파하스를 찾지 못하고 애태우고 있을 때, 파하스와 네리아는 사실 그에게서 100큐빗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다만 그들 사이에 담장과 약간의 나무가 있었기 때문에 레이저가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이 들어와 있는 곳은 턴빌의 시청 정원이었다. 나머지 일행들, 즉 운차이와 파, 아달탄, 그리고 쳉은 먼저 이곳에 도달해 있었다. 파는 걸어오는 파하스를 보며 물었다.
“뭐였는데요?”
“아아, 별것 아니었습니다, 파 양. 어떤 몰지각한 사내가 자신의 존엄성을 땅에 팽개친 것에 불과하지요. 그것은 참으로 애달픈…
파하스는 거창한 어조로 설명하려 했지만 운차이가 그의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곧 해가 지겠군. 시청이 언제까지 업무를 보는지는 모르겠지만 서두르는 것이 어떻겠나?”
파하스는 씩씩거렸지만 이미 운차이는 황혼빛을 받아 붉게 물들고 있는 시청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나머지 일행들도 그 뒤를 따라 걸어갔 다.
운차이의 예상대로 오늘의 업무를 마치는 것인지, 시청 안은 고요했다. 긴 복도에는 창문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 이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운차 이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눈앞에 보이는 첫 번째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안에는 여러 개의 책상이 규칙적으로 놓여 있었지만 대부분 비어 있었고, 두어 명의 시청 직원들만이 자리에 앉아 뭔가를 쓰다가 고개를 돌려 운차이를 보았다.
“실례하겠소. 나는 신스라이프의 문제에 대해 물어보려고 왔는데, 어디를 찾으면 됩니까?”
직원들 중 가까이 앉아 있던 남자가 말했다.
“아…………, 그게 어떤 문제인지는 알고 있소? 하도 이상한 소문이 많이 퍼져서 별별 뜨내기들이 다 찾아오거든.”
“문제를 풀면 신스라이프가 남긴 재산을 가지고, 풀지 못하면 목숨을 내놓는 거 아니오?”
시청 직원은 운차이의 차가운 대답에 눈살을 찌푸리더니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고, 그 뒤의 일행들도 주욱 둘러보고 나서 대답했다.
“음, 정확하게 알고 있군요. 목숨이 걸린 문제라는 것을 알고 찾아왔단 말이지요?”
“나는 그 문제를 풀겠다고 말한 적은 없소.”
“예?”
“물어보러 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물어보다니, 뭘 말입니까?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은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이 전부입니다. 시청에 정식으로 요청하지 않는 이상 그 문제에 대해 뭔가 더 설명해 준다거나 할 수는 없습니다.”
운차이는 잠깐 고민하다가 질문했다.
“내가 신청하면, 당장이라도 그 문제에 도전할 수 있는 거요?”
“음, 그건 안 되겠군요. 당신 앞에 신청한 사람이 있어요.”
운차이는 속으로 쾌재를 올리면서도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다른 사람이 있다고?”
“예. 모레 정오에 신스라이프 씨의 집에서 유언장이 집행될 겁니다. 그 사람은 이미 세 명의 턴빌 시민들을 공증인으로 선임했고, 서류를 작성하여 시장님과 신스라이프 씨의 유가족 대표들에게 심사도 받았습니다. 당신도 그 문제를 풀어보고 싶다면 그런 일들을 해야 되지요.”
모레 정오라, 좋아. 운차이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물론 속으로만.
“흐음. 만일 그 친구가 문제를 풀어버리면 내겐 기회가 없겠군. 그런 거요?”
“그렇습니다.”
“그래요…………. 구경할 수 있소?”
“물론입니다. 그날은 아마도 많은 턴빌 시민들이 신스라이프 저택에 모여들 겁니다.”
시청 직원은 히죽 웃으며 덧붙였다.
“개인적인 충고를 하자면, 꼭 와서 구경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왜지요?”
“소중한 목숨이 얼마나 쉽게 달아나는지를 눈으로 봐야 헛된 꿈을 포기하게 되니까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만은 그 문제를 풀 수 있다고 여기는 작자들이 많지요. 하지만 그런 작자들도 한번 눈앞에서 단지 문제를 풀지 못했다는 이유로 사람이 그런 식으로 죽는 것을 보게 되면 진저리를 치고 달아나 버립니다. 옛말에 있는 것처럼, 가지고 태어나는 것 이외엔 자신의 재산은 없는 법이죠.”
운차이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런 식이라니?”
“아아, 실패한 도전자에게는 좀 희귀한 사형법이 적용됩니다. 척살법이지요.”
다른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몰라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운차이와 파하스는 움찔했다. 운차이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질문했다.
“자이펀식 척살법 말이오?”
“어? 그걸 압니까? 예, 그런 방식으로 합니다.”
네리아는 운차이의 허리를 쿡 찔렀다. 긴장하고 있던 운차이는 욱하며 돌아보았지만 네리아는 천진스러운 얼굴로 질문했다.
“척살법이 뭔데?”
“……때려 죽이는 거야.”
“뭐?”
운차이는 착잡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머리나 복부, 심장 등은 때리지 않아. 치명적이지 않은 팔 다리부터 시작하지. 메이스 같은 것으로 말단부부터 때리기 시작해. 죄수는 자신의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지. 한 마디로 고기 다지는 식이야. 그렇게 팔다리를 계속 후려치다가 차츰 몸을 때리지. 결국 죽기 직전에야 머리를 때 려서 끝장내 주는 거야. 사형 집행인도 죽도록 힘든, 아주 골치 아픈 사형법이지.”
사람들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시청 직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뭐, 당신이 그걸 끔찍스럽게 여기지 않을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끔찍해합니다. 그래서 어린애를 데리고 구경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 습니다.”
그때 쳉이 느닷없이 말했다.
“문제를 풀려고 했던 자가 죽음을 당한다는 말씀이지요?”
“예? 물론 그렇습니다만.”
“만일 그 문제 풀이에 도움을 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아무런 위해가 가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요?”
“아아, 예.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신스라이프 저택에 오기 전에 어떤 사람에게 답이 뭐냐고 물어볼 수는 있겠지요. 그런 경우라면 조언을 해준 사 람에게는 아무 해도 가지 않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 문제에 도전할 경우, 여러분들이 합의 하에 어떤 대답을 찾아낼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그 문제 에는 여러분들 중 한 사람만이 나서야 하고 대답이 틀렸을 경우 처형당하는 것도 그 사람뿐입니다.”
시청 직원은 ‘너희들 중 하나가 희생양이 될 뿐이니 그런 짓엔 나서고 싶지 않겠지?’ 하는 눈빛으로 일행을 죽 둘러보았다. 그러나 문제를 푸는 일에 관심이 있는 유일한 사람인 네리아만이 잔뜩 겁먹은 표정을 지었을 뿐 다른 사람들은 별 표정이 없었다. 네리아는 포기하지 않겠다는 결의가 돋보이 는 얼굴로 질문했다.
“어, 저, 그런데요. 이거 하나 물어봐요. 가령 내가 그 문제에 대해 대답을 말했다고 치고, 그 답이 맞는지 틀리는지는 누가 판단하지요? 아무도 답을 모른다면, 그게 맞는지 틀리는지도 역시 아무도 모르는 거 아니에요?”
“물론이죠, 아가씨. 우리도 역시 어떤 것이 정답일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유언장에 의하면 정답이 말해졌을 경우 모종의 상징이 나타나게 됩니다. 상징은 뭐 별거 아닙니다. 유언장과 함께 남겨진 상자입니다.”
“상자요?”
“예. 그 상자는 마법으로 잠겨 있어서 정답을 말했을 경우에만 열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 신스라이프의 제2유언장이 들어 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아무도 못 열어봤으니 안에 뭐가 있을지야 나도 모르지요.”
그러자 운차이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잠깐만. 마법으로 잠긴 것이라면 역시 마법으로 풀 수 있을 텐데? 만일 어떤 마법사가 정답을 말하는 척하면서 사실 마법 해제의 주문을 외워버린 다면 어떻게 할 겁니까?”
시청 직원은 조금씩 귀찮은 표정을 지었지만 질문들이 모두 흥미로운 것이라 선선히 대답했다.
“아, 그런 시도도 몇 번인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마법사도 그런 시도에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아무도?”
“예. 아무도.”
운차이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모레 정오라고 했지요?”
“예, 그렇습니다.”
“혹시 그 사람, 그러니까 나보다 앞서 신청했다는 사람의 이름이나 그를 만나보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압니까? 그 친구에게 내가 먼저 시도해 보 고 싶다고 말하고 싶소만.”
“글쎄요. 여기 사람이 아니어서 모르겠군요. 어이, 그 사람 이름이 뭐였지?”
조금 떨어진 책상에 앉아 있던 직원 하나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궤헤른.”
“아, 그래. 궤헤른이라고 하더군요.”
궤헤른이라. 이 자식들이 설마 본명을 남길 줄은 몰랐는데. 운차이는 공증인들에 대해 물어볼까 하다가 관뒀다. 공증인들이라고 해서 후작의 위치를 알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가르쳐줬을 리가 없으니까. 운차이는 시청 직원의 친절에 대충 감사의 말을 중얼거린 다음 몸을 돌렸다.
질감을 가지고 대기 속으로 스며드는 듯한 어스름에 사위는 어두웠다. 그 어둠을 바라보며 운차이는 눈을 빛냈다. 모레 정오라. 어떻게 할까. 그것은 공식 행사니만큼 후작은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저격할까? 하지만 후작에게는 미라는 인질이 있다. 똑똑하군. 미는 후작이 공개된 장소에 몸을 드러 내기 위한 인질로서도 작용하는군. 일석 이조를 노린 것인가.
후작이 반드시 나온다고 보기도 어렵지는 않을까. 궤헤른의 이름으로 신청했다면 후작 대신 궤헤른이 나올지도 모른다. 이 경우 저격은 더욱 어렵 군.
운차이는 고개를 조금 가로저었다. 쳉이 눈에 들어왔다.
쳉에게는 그의 내면을 알고 싶어할 사람에게 도움이 될 표정이라는 것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운차이는 그의 주위를 흐르는 기류를 읽을 수 있었다. 어둡고 쓸쓸한 기류였다. 그때 시청 건물을 다시 빠져나오는 동안 내내 볼이 부어 있던 네리아가 입술을 잔뜩 내민 채 말했다.
“씨이. 때려 죽이느니 어쩌니 해도 후작은 그 문제를 맞출 수 있을 거야. 미가 있으니까………….”
미의 이름을 거론하던 네리아는 흠칫하며 쳉을 바라보았다. 무표정하던 쳉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어쩌면 후작은 미를 고문 하거나 할지도 모른다. 네리아가 어떻게 사과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파하스가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재빨리 한탄하듯 말했다.
“아아, 정말이지 괴악하군, 괴악해!”
“무슨 말씀이세요, 파하스?”
“네리아 양, 나는 몹시 슬픕니다. 내 아름다운 고향에 이따위 흉물스러운 관습이 생기다니! 재물을 미끼로 사람을 때려죽이는 관습이 어디 인간이 생각해 낼 수 있는 관습이오! 그 신스라이프라는 놈, 도대체 정신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는 녀석인지 궁금하외다.”
운차이도 차가운 화법이나마 합세했다.
“글쎄. 타인의 생명보다야 자신의 생명이 더 소중한 것은 당연하겠지.”
“모든 이가 그렇게 말할 수 있지. 그런데 모든 이가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다른 사람의 생명보다 특별히 더 소중한 생명 따위는 없다는 말이지. 하! 모르지. 나 같은 사람의 생명이라면 덜 소중할지도.”
“무슨 말이지?”
“나는 이미 내 생을 다 살았다. 지금 내가 영위하고 있는 삶은 내 의사와 상관없이 주어진 삶이지.”
운차이는 심드렁하게 질문했다.
“호된 일이라도 겪었던가.”
“응. 죽었지.”
운차이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파하스를 바라보았다.
“언제?”
“108년 전에.”
“또 그 헛소리를 할 생각인가, 당신이 144세라는?”
“헛소리라니! 무엄한 놈. 내가 왜 그런 헛소리를 한단 말이냐? 너 나를 미치광이로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말해 봐. 지금까지 짧은 기간이긴 하 지만 그 동안 보아온 내가 미친 녀석처럼 보이더냐?”
“아니.”
“그럼 내 말을 믿겠군?”
“그것도, 아니.”
파하스는 잠시 볼 근육을 실룩거리면서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운차이는 정면만 보며 말했다.
“모든 면에서 온전할 수야 없지. 한 군데쯤 돌아버린 곳이 있는 것도 개성일 수 있겠지. 당신도 자기 나이를 제외한 부분에선 정상이군.”
“도대체 어떻게 하면 믿겠냐? 내가 108년 전의 사람이라는 것을!”
운차이는 고개를 살짝 돌려 파하스를 바라보았다.
“당신을 144세라고 믿어주면 행복하겠나?”
“뭐? 아니. 말했잖아, 36세라고. 나는 108년 전에 죽었고 얼마 전에 부활.
“그럼 36세로 대접해도 불만은 없겠군. 됐나?”
“이놈아!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내가 이 시간에 익숙하지 못해서 벌일 수 있는 수많은 오류가 있을 게야. 그리고 또 내가 느끼는 괴리감………….”
“당신이 어떤 멍청한 짓을 하더라도, 가령 셔츠를 뒤집어 입는다거나 신발끈을 풀고 다니거나 하더라도 그건 모두 108년 동안 죽었다가 부활한 후 유증이라고 생각해 주면 되겠군. 됐나?”
파하스는 분노하기에 앞서 재미있다고 생각해 버렸다.
“이 녀석아, 그런 식이라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은 모두 한두 번씩은 자기가 부활했다고 주장할 수 있겠다!”
“그 사람들은 나름의 변명거리를 가지고 있겠지. 정신이 혼란스럽다거나 건망증이 심하다거나. 그리고 당신의 변명은 108년 동안의 죽음 때문이었 다고 해두지.”
파하스는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정신이 혼란스럽다거나 건망증이 심하다는 말은 심각한 변명거리로 최악이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런 변명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 버리니까. 그러니 운차이는 파하스의 부활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겠다고 말한 것이다. 이건 부캐넌 백작 만큼이나 재미있는 녀석이군.
“좋아, 벽창호 군. 내가 자네를 이해시키느니보다는 자네가 제시한 의견을 내가 수용하는 편이 낫겠다고 여겨지기 시작하는군. 좋을 대로 하게!”
그러지 않아도 나 좋을 대로 하려던 참이다, 인마. 운차이는 속으로 그렇게 튕겨준 다음 후라마의 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네리아는 트라이던트를 겨드랑이에 낀 채 어슬렁어슬렁 걸어왔고 파와 쳉, 그리고 아달탄은 맨 뒤에서 따라왔다.
하늘은 짙은 버밀리온으로 물들어, 파는 쳉의 얼굴에 윤곽이 더 짙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붉게 물든 이마 아래 눈두덩은 어둡다. 그리고 그 위로 늘어진 앞머리는 검붉은 폭포처럼 흔들리고 있다. 쳉은 그렇게 높은 곳에 얼굴을 둔 채 허공을 걷듯 걸어가고 있었다.
쳉의 옆에서 걸으며 그를 올려다보던 파는 조용히 말했다.
“걱정 마. 언니는 괜찮을 거야.”
쳉은 잠시 고개를 돌려 파를 내려다보았다. 파는 갑자기 그의 얼굴이 작아 보인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그만큼 멀다는 뜻일까. 파는 발돋움을 해 서라도 쳉의 얼굴을 가까이 보고 싶어졌다.
쳉이 말했다.
“그렇겠지. 네가 하는 말이니 믿어야지.”
“응?”
“봤지?”
“무슨 말이야?”
“그날 밤…………, 내가 파하스와 함께 돌아왔을 때 너는 한 마디를 실수했어. 언니는 복면 괴한이 따라다닐 사람이 아니라고 했지. 어떻게 알았지? 나는 물론이거니와 파하스 역시 미를 납치한 사람들을 보지는 못했어. 그런데 너는 그들이 복면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더군. 그냥 짐작인가?”
미워. 못됐어. 그냥 끝내도 될 말을 ‘그냥 짐작인가?”라는 한 마디를 덧붙여서는 변명을 못하게 만들어. 나쁜 놈. 파는 고개를 숙였다. 쳉은 그녀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다가 무심하게 한 마디 했다.
“숙소로 돌아가거든, 짐을 챙겨.”
파는 흠칫하면서 고개를 들었다.
“?”
“오늘 밤으로 스카니아 마을로 돌아가. 길은 잘 알고 있겠지? 아달탄은………….., 여기 남겨두면 도움이 되겠지만 어차피 내 말은 듣지도 않는 녀석이니 네가 데리고 가도록 해.”
파는 잠시 제자리에 멈춰 서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쳉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 걸어갔다. 파는 당황해 달려 쫓아가 쳉의 팔을 부여잡고 확 끌 어당겼다.
“무슨 말이야, 쳉!”
쳉이 휘청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그 껑충한 키가 조그마한 파에 의해 휘둘리는 것이었으니까. 쳉은 똑바로 서서는 파를 내려다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쳉은 주머니에 손을 꽂아넣었다. 키 큰 소나무가 휘적휘적 걷는 것 같던 모습이 조금은 사람이 서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쳉은 고개를 들어 파 의 머리 너머로 노을진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까지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서 그냥 내버려두었지. 나는 항상 그게 문제야. 내 감정 결핍 때문일까. 언젠가 킬로이가 설명해 준 적이 있어. 사 람들이 행동을 취할 때 이성도 물론 중요한 원동력이지만 그보다는 감정이 더 강력한 원동력이라고. 그래서 응원가를 부르고 군가를 부르고, 싸울 땐 욕을 하는 거라더군. 사실 나는 싸울 때 욕을 해봐도 힘이 더 나거나 하지는 않던데. 다른 사람은 그런가 보지.”
쳉은 무덤덤하게 말했다. 조금 전 자신이 파에게 준 충격 같은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파는 쳉이 실제로 그런 것에 전혀 관 심이 없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저 녀석은 다른 사람의 감정을 몰라. 자기 감정도 모르니까.
“그래서 킬로이는 감정 결핍인 나는 중요하고 귀중한 행동은 할 수 없는 사내라고 말해 주더군. 결정적인 순간에 판단을 맡기기에는 불안한 녀석이 라던가. 그 말이 맞을 거라고 생각해. 나를 방해하고 있는 너를 여기까지 데리고 다닌 것을 보면 아마도 판단이 빠르다는 평가는 절대 받을 수 없겠 지.”
“방해…………, 내가…………! 아냐, 쳉. 그건 오해야………….”
“무슨 말을 하더라도 듣지 않을 테니 말하지 마.”
파는 입을 다물었다. 쳉은 여전히 그녀의 머리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래서 파는 쳉의 눈을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나는 네 행동을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아. 내가 판단하거나 설명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의 행동, 그것도 감정에 의해 이루어지는 행 동들을. 하지만 요구할 수는 있겠지.”
“요구……, 뭘…….?
“내 주위에서 사라져줘.”
파는 쳉의 턱을 올려다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앞서 가던 사람들은 파와 쳉이 뒤처진 것을 깨닫고 잠시 멈춰 서서 돌아보고 있었다. 하지만 파는 그쪽에는 일별도 보내지 않은 채 쳉의 턱만을 올려다보았다.
파는 갑자기 어깨를 뒤로 힘껏 당겼다. 그녀를 보고 있진 않았지만 쳉은 파의 동작을 충분히 알아차렸고, 그래서 주머니 속에 넣은 손에 힘을 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퍼억! 쳉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복부의 고통을 견뎌냈다.
“네가 뭐라고 하더라도 나는 안 갈 테니 내게 명령하지 마!”
멀리서 보고 있던 운차이와 네리아, 그리고 파하스는 깜짝 놀랐다. 쳉의 상체가 휘청할 정도로 강렬한 일격을 날린 파는 고함을 지르고는 그대로 몸 을 돌려 달려오기 시작했다.
“어, 파양?”
파하스가 ‘저 골렘 같은 녀석의 복부를 치고도 파양의 손이 괜찮냐?’는 둥의, 쳉이 들으면 한숨밖에 내쉴 것이 없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파는 그대 로 사람들을 지나쳐 달려갔다. 아달탄은 무턱대고 그녀의 뒤를 따라 달려갔고, 잠시 턴빌의 행인들은 발광한 키타나 하운드가 한 처녀를 잡아먹으려 고 쫓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무서운 생각을 떠올렸다.
쳉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터덜터덜 걸어왔다. 네리아는 조금 전의 일격 때문에 어디가 부서지지 않았는지 궁금하다는 듯이 쳉을 위아래로 훑어보 며 말했다.
“물어도 되는 일이에요?”
“아니오.”
“그럼 묻지 않을게요. 그렇지만 좀 심하네요. 싸우면서 정든다는 이야기엔 나도 동감이지만, 그런 식으로 맞다가는 정이 들기에 앞서 멍이 들겠네 요. 괜찮아요?”
쳉은 별 대답 없이 시익 웃어버렸다. 네리아는 그런 쳉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쳐다보다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운차이를 돌아보았다.
“이봐, 운.”
“운차이!”
“쳇. 운차이. 미인이 정답게 불러주면 고마워할 줄 알아야지, 숙맥 같긴 잠깐! 너 여기 미인이 어디 있냐고 말하려고 했지?”
그렇게 말하려 했던 운차이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네리아는 눈꼬리를 치켜올렸다.
“흐응. 별명이 아깝다, 별명이. 눈앞의 미인도 못 알아보는 눈에 어떻게 그런 별명이.”
네리아는 별명이라는 단어를 무려 세 번이나 사용했다. 운차이는 흠칫하며 네리아를 쏘아보았지만 이미 늦었다. 파하스는 호기심으로 얼굴 전체를 채색하고 네리아에게 질문했다.
“이 친구 별명이 뭔데 그럽니까?”
“쓸데없는 말 하지……”
“아, 괴물 눈알이에요.”
파하스는 후라마의 펍으로 돌아온 후 운차이에게 상당히 많은 이야기를 건네었다. 물론 그가 갑자기 이 남부의 전사에게 깊은 우정을 느꼈기 때문은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이봐, 괴물 눈알. 그러니까 말이야………… 등으로 운차이의 별명을 불러대기 위한 이야기들이었다. 운차이는 자신이 그 별명을 싫어한다는 것을 분명히 말했고, 그래서 계속해서 그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낄낄거리던 파하스는 간신히 호흡을 가누며 말했다.
“그래, 어쩌다가 그런 별명을 얻게 되었지? 괴물 눈알?”
•부르지 마.”
“응? 뭐 말인가, 괴물 눈알?”
“그거 부르지 마.”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괴물 눈알?”
운차이는 거창한 한숨을 내쉬고 나서 자신이 왜 그런 별명을 얻게 되었는지를 가르쳐주었다(물론 그 나름의 방식대로.). 운차이의 살기 어린 눈빛을 마 주한 파하스는 그에게 그런 별명이 붙은 이유를 단숨에 알아차리게 되었다.
운차이는 그런 식으로 파하스의 입을 다물게 만들어놓은 다음 그란에게 경과를 이야기해 주었다. 모레 정오에 후작이 나타날 거라는 말에 그란은 고 개를 끄덕였고, 구석 자리에서 듣고 있던 돌맨은 불안한 표정이 되었다.
남자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네리아는 조용히 자리에서 빠져나와 방으로 돌아갔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미와 그녀가 쓰고 있던 방에 이제 파가 미 대신 들어와 있었다. 네리아는 문을 열었다.
파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 납치당한 미의 소지품인 물그릇을 만지작거리고 있었고, 그 옆에는 아달탄이 침대 위에 길게 엎드린 채 파의 무릎 위에 머 리를 올려놓고 있었다. 네리아는 잠시 문턱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지만 파는 고개를 들지 않고 물그릇만 쳐다볼 뿐이었다. 네리아는 어떻게 인기척 을 낼까 하다가 그냥 방안으로 들어섰다.
네리아는 먼저 들고 다니던 트라이던트를 침대 옆의 벽에 세워두었다. 그리고 침대에 걸터앉아 신발을 벗었다. 그 동안에도 파는 여전히 물그릇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리아는 참을성 있게 벗어든 신발 두 짝을 가지런히 침대 옆에 놓았다. 가지런히 놓은 신발을 내려다보고 있던 네리아는 손을 뻗어 오른쪽 신발을 조금 당겼다가, 잠시 후 다시 조금 밀었다. 한참 후, 네리아는 다시 그것을 조금 당겼다.
파는 결국 입을 열었다.
“돌아왔나요.”
“야! 그래요! 돌아왔어요. 파는 못 봤죠? 묘지에서는 좀비들이 무도회를 개최했고 낚시꾼들은 도랑에서 크라켄을 몇 마리 낚아올렸어요. 트롤 서른 여섯 마리가 물구나무 선 채로 시내를 활보했고 두 발로 선 암소들이 피리를 불며 행진했어요. 하지만 서쪽 하늘에서 날아온 드래곤이 ‘후욱!’ 해서는 다 태워버렸죠. 그리고 나는 돌아왔죠.”
“그런가요.”
아달탄의 송곳니에 동상이 걸리더라도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냉랭한 분위기라고 네리아는 생각했다. 네리아는 헛기침을 몇 번 한 다음 힘 들게 말했다.
“아, 음, 흠! 저녁 안 먹어요? 뭐라도 좀 가져다줄까요?”
파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말했다.
“생각이 없어요.”
“그래요? 음음. 술 잘해요? 내려가서 나랑 술이나 할래요?”
“싫어해요.”
“네에, 네에. 냐암………. 아까는 왜 쳉이랑 싸운 건지 물어봐도 돼요?”
“아니오.”
이런, 이런. 침대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네리아는 아랫입술을 만지작거리다가 결국 체념한 목소리로 말했다.
“친해 봐요.”
“예?”
“난 당신이랑 친하고 싶어요.”
바보 같은 말을 하고 말았어. 이건 뭐야, 동정심인가? 언제 죽을지 알고 있어서, 불쌍해서? 네리아는 속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을 후회했다. 하지만 파 는 이미 고개를 들고 있었다. 파는 멀거니 네리아를 바라보았고 네리아는 수줍게 미소지었다.
“나쁠 거 없잖아요? 나는 보통 사람들이 어떻게 우정을 만들어 가는지에 대해 잘 아는 척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러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거죠. 나는 반짝거리는 것을 좋아하지만 번개는 싫어해요. 나는 맛있는 것을 좋아하지만 음식 솜씨는 엉망이에요. 나는 삼사십 년쯤 후에 예쁘게 늙은 할머 니가 되어서 손자들에게 동전이나 욕설을 던져주는 일을 생각하지는 않아요. 대개의 사람들처럼 서너 시간 뒤의 일에 관심이 많지요. 특별히 값진 친 구가 되긴 어렵겠지만, 친하지 않을래요?”
파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물그릇의 모양을 손에 익히고 말겠다는 듯이 계속해서 만지작거렸다. 네리아가 무시당한 기분을 느낄 때쯤, 파는 나직하게 말했다.
“쳉은 나보고 가버리라고 했어요.”
“음. 아까 들었어요. ‘네가 뭐라고 하더라도 나는 안 갈 테니 내게 명령하지 마!’라고 했죠? 멋진 말이었어요.”
“나는 그런 사람이에요. 오랫동안 보아왔던 친구도 감당할 수 없는. 나는 제멋대로이고 끔찍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요. 아달탄이 말을 할 줄 안다면 내 욕을 하느라 하루 해를 그냥 넘길 수도 있을 거예요.”
파는 자신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무릎에 기댄 아달탄을 밀어버렸다. 아달탄은 침대 아래로 떨어져서 깽깽거리더니 다시 길게 엎드렸다. 네리아 는 그 모습을 보며 웃을까 했지만 웃을 기분이 들지 않았다. 무시무시한 키타나 하운드는, 그 주인이 사라진 것 때문에 낙심하고 절망한 모습으로 추 욱 늘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파는 아달탄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물그릇만을 계속 바라보았다.
“나를 친구로 생각하지 말아요. 언젠가 큰 낭패를 당하게 해줄 테니까.”
“당신이 뭔데요?”
“예?”
“당신이 뭔데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낭패를 주느니 마느니 할 수 있다는 거죠? 당신은 자유자재로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도 슬프게도 할 수 있나 보 죠? 나는 그렇게 못해요. 그리고 당신도 그럴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당신은 친구들에게 낭패를 끼치면서도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단 말이에요?”
파는 다시 고개를 들어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네리아의 얼굴에는 뜻밖에도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하, 하, 하! 웃겨요. 그렇게는 안 될걸요. 아마도 당신은 주위 사람들에게 여러 번 아픔을 줬던 과거가 있나 보지요. 하지만 그게 그걸로 끝나던가 요? 당신 자신에게는 아무런 아픔도 없었어요? 아닐걸요. 당신이 주위의 사람들을 아프게 할 때마다 당신 자신도 아팠을걸요.”
“어떻게 그렇게 생각하죠?”
“당신이 아니까!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낭패를 끼치고 슬픔을 줬다는 것을 당신 자신이 알고 있으니까요. 정말 다른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주는 사람은 자기가 그러고 있다는 것도 몰라요. 그런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사람들을 아프게 만들어요. 하지만 당신은 알고 있어요. 그건, 당신도 그때마다 아프고 슬펐다는 증거지요.”
파의 눈이 커졌다. 네리아는 따스한 표정으로 말했다.
“난 아무것도 아니지만, 당신 죄를 사할게요. 왜냐하면 당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 이미 죗값을 지불했으니까. 헬카네스의 눈길은 넓고, 유피넬의 저 울은 길지요. 당신은 당신이 한 행동들에 대해 충분한 슬픔을 지불했을 거예요. 하하, 나 프리스트 같지 않아요?”
계속 커지던 파의 눈에서 마침내 투명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와락 고개를 숙인 파의 손에서 물그릇이 떨어졌다. 땡그르르! 바닥에 떨어진 물그 릇은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네리아는 무의식중에 돌고 있는 물그릇을 바라보았다. 따르르르…………! 느리게 돌고 있던 물그릇이 점점 빠르게 요동치 다가 마침내 진정되는 짧은 시간 동안 네리아는 목이 옭죄이는 기분을 느꼈다. 고개를 든 네리아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은 채 크게 흐느끼고 있는 파 를 보았다.
파는 소리 높이 울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위에 신경을 쓰지도 않았다. 네리아는 파에게 다가가서 그녀의 어깨를 안아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녀가 자신의 행동을 파악할 만큼 현명하다면, 울음도 혼자 울 수 있게 놔두는 것이 좋겠지. 하지만 그건 생각일 뿐이었다. 네리아는 그 녀가 숨이 막히도록 안아주고, 그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원래 모두들 그렇게 사는 거라고, 다들 살아가는 것 자체만으로 주위에 아픔을 주는 것을 피 할 수 없기에 그런 것들에 무심해지려 노력한다고 고함질러 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그럴 수밖에는.”
흐느낌의 도중에 파는 밑도끝도없이 말했다. 네리아는 아무 말도 못한 채 그저 모두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도리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더라도 고개를 파묻고 있는 파가 볼 리야 없지만, 네리아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난 싫어요. 쳉도 싫고, 미도 싫고, 내가 가장 싫어요…… 싫어요!”
“그렇지 않아요. 쳉도 당신을 좋아하고, 미도 당신을 좋아하고, 당신도 당신을 좋아할 거예요.”
“네리아는 몰라요…………. 아무것도 모른다고요.”
네리아는 다시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몹시 원하던 행동을 실천에 옮겼다.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파에게 다가서서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파는 피하려는 듯이 움찔했지만 동시에 그녀에게 안겨들어 왔다. 네리아는 조용히 그녀의 어깨를 쓸어내렸다. 어느덧 네리아의 속눈썹에도 눈물이 아롱져 맺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