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 워커 3권 – 5장 거짓된 사랑의 진실 (하)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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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는 꿈을 꾸었다. 하지만 도대체 무슨 꿈이었는지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았다. 다만 누군가가 쳉의 이름을 계속해서 부르고 있는 것을 들었다. 잠시 후 미는 그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면서 잠에서 깨어났다.
“이 엉터리 약사 같으니라고. 하루 만에 깨어나는군.”
갑자기 들려온 무시무시한 목소리에 미는 깜짝 놀랐다. 미는 깨어날 때 허락을 받아야 되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조심스럽게 눈꺼풀을 열었다.
탁. 타다닥. 마른 나뭇가지들이 타는 소리와 함께 구수한 모닥불의 향기가 미의 코를 간지럽혔다. 미는 머리를 감싸쥐며 일어났다. 그때 다시 그 무 시무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나는 것은 좋지만, 그 다음부턴 아무 짓도 하지 마.”
“숨은 쉬게 해주시겠어요? 숨을 못 쉬면 미는 죽거든요.”
미는 그렇게 대답하며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그쪽에는 조금 이상한 표정을 한 중년 남자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둠을 배경으로 모닥불 빛을 받아 번득이는 나무를 보고 미는 이곳이 어딘가의 숲속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왜 자고 일어났는데 이상한 남자와 함께 숲속에 있는 걸 까. 남자는 고개를 조금 갸웃하며 말했다.
“당돌하군……. 놀라지도 않고.”
“아, 미안해요. 다시 할까요? 어머나! 여긴 어디고 당신은 누구시죠? 미는 왜 여기에 있는 거예요? 미한테 무슨 나쁜 짓 하시려는 건 아니죠? 안 돼 요! 살려주세요! 이제 만족하세요?”
남자의 고개가 더욱 옆으로 기울었다. 남자는 그런 식으로 비스듬히 그녀를 노려보다가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상한 느낌이군.”
“뭐가요?”
“다른 사람이 내 앞에서 그따위 짓거리를 했다가는 이마에서부터 턱까지 쪼개놓았을 거야. 그리고 나는 여자라고 특별 취급하지도 않고. 그런데 너 는 분명히 장난치고 있는 건데, 장난친다는 느낌이 없군. 퍽 이상해.”
“이름을 모르는 분도 마찬가지세요.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군요. 미가 잘못 봤나요?”
“화가 나긴 했어. 네게는 아니지만.”
“아아, 그 약사라는 분에게 화가 나신 모양이군요, 이름을 모르는 분.”
할슈타일 후작이지만, 그냥 후작이라고 부르도록.”
“할슈타일 후작?”
미는 깜짝 놀랐다. 후작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들었나.”
“들었어요. 바이서스의 반역자시죠?”
“그래.”
“미는 납치된 건가요? 다른 분들은 어떻게 되었어요?”
“네가 자고 있을 때 훔쳐왔지. 다른 녀석들은 떨쳐버렸고.”
“왜 미를…..? 미는 아무 관련이 없잖아요. 후작님을 쫓는 것은 그 사람들인데?”
“앞으로 몇 개 남았지.”
“예?”
“질문할 것이 앞으로 몇 개 남았지.”
“아기는 어떻게 해서 생기는 건지까지만 여쭤볼게요.”
후작은 다시 고개를 들어 미를 보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분노는 느낄 수 없었다. 왜일까. 이 무녀의 화법은 신경 건드리기 딱 좋은 형태인데 왜 신경 질이 나지 않는 거지. 그보다는………….
후작은 웃어본지가 너무 오래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비웃는 웃음이나 쓴웃음이 아닌, 마음 편하게 즐겁게 웃는 것.
“하하하…….”
모닥불가로 돌아오고 있던 궤헤른은 깜짝 놀랐다. 어깨에 커다란 사슴을 둘러메고 걸어오던 니크는 궤헤른이 갑자기 멈춰 서는 바람에 하마터면 그 와 부딪힐 뻔했다. 손에 장작으로 쓸 잔가지들을 모아들고 돌아오고 있던 사무엘과 가이버 역시 제자리에 멈춰 서서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멀리 나 무들 사이로 비치는 불빛을 바라보았다.
니크는 사슴을 다시 추슬러 올리면서 말했다.
“웃으시는군요?”
궤헤른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군. 사람이 좀 모자라는 편인 니크는 주인이 웃자 자신도 즐겁다는 듯이 해죽 웃으며 그대로 모 닥불가로 걸어갔고 가이버와 사무엘, 그리고 궤헤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 뒤를 따랐다.
부하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자 후작의 얼굴은 다시 차가워졌다. 하지만 니크는 벌쭉벌쭉 웃으면서 사슴을 내려놓고는 세상이 참 즐겁지 않으냐고 말 하는 듯이 웃어 보였다. 후작은 그를 향해 싸늘한 표정을 보냈다.
“이빨에 열 나냐.”
“예?”
“왜 그렇게 이를 드러내냐.”
“아아, 후작님. 사슴입니다요. 멋진 저녁이잖습니까? 모닥불도 좋고, 봄의 밤도 좋군요. 거의 숲속의 파티로군요. 하하하!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곧 고소한 냄새가 날 겁니다.”
후작은 넌더리가 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나같이 얼간이들만 남았군. 쫓기는 범죄자의 신세로 타국의 숲에서 밤을 보내야 하는 처지에 사 슴고기를 맛볼 수 있다는 따위로 눈이 뒤집히는 바보라니! 하긴 그런 멍청이니까 아직껏 그의 옆에 남아 있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분노에 의해 촉발 된 맹렬한 사고 과정을 거치고 있던 후작은 그 마지막 결론에 배치되는 인물을 떠올렸다.
그는 고개를 돌려 궤헤른을 바라보았다. 다친 팔이 불편한 것인지 표정이 창백한 궤헤른은 힘들게 자리에 앉았다. 니크와 가이버는 시시덕거리며 사 슴을 해체하고 있었고 사무엘은 고기를 굽기 위해 불을 맹렬하게 일으키고 있었지만, 궤헤른은 우울한 표정으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후작에게는 마음에 들었다. 궤헤른은 최소한 현재 맛볼 사슴고기 때문에 자신의 절망적인 상황이나 내일의 고통을 까먹지는 않을 것이다. 궤헤른은 그런 고상한 절망 속에서 고개를 들어 미를 바라보았다. 그는 눈살을 조금 찌푸리면서 말했다.
“벌써 일어날 줄은 몰랐는데.”
“그 약사라는 분이 잘못했다나 봐요. 뭘 잘못했는지는 미는 모르겠지만.”
궤헤른은 약 10분 전 후작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그대로 되풀이했다. 그가 뭐라고 자신의 감정을 정리하기에 앞서 미는 고개를 까닥이며 말했다. “미 V. 그라시엘이에요. 당신도 반역자인가요?”
“반역자 궤헤른이라고 하면 조금 낭만적으로 들리겠소?”
“예. 궤헤른 씨. 미를 놓아달라고 부탁하려면 어느 분에게 말해야 하지요?”
“아마 들어주진 않겠지만, 당신이 부탁하겠다면 후작님이라고 알려주겠소.”
미는 고개를 뱅그르르 돌려서 후작을 바라보았고 후작은 씁쓸한 표정으로 안 된다고 말할 준비를 갖추었다.
“미도 식사는 시켜줄 거죠?”
“안……, 뭐?”
“어머, 밥도 안 줘요? 잔인하네요.”
미가 동그랗게 뜬 두 눈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후작은 황당한 심정으로 여러 가지 생각을 동시에 떠올리느라 머리가 아파왔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궤 헤른이 저런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지 말아줬으면 하는 생각이 지배적으로 떠올랐다. 결국 후작은 화를 내고 말았다.
“넌 도대체 지독하게 용감한 거냐, 자기 보호 본능이 없는 거냐!”
안타깝게도 후작의 분노는 무시무시한 반역자의 분노라기보다는 처녀의 잔인함에 대한 청년의 분노처럼 표현되었다. 같은 어조로 ‘나의 태양이여, 왜 내게 눈길을 주지 않는 겁니까!’라고 외쳤어도 퍽 어울렸을 것이다. 궤헤른은 실소하지 않기 위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어야 했다.
미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말했다.
“글쎄요. 미는 별로 용감하지는 않아요. 다리가 여섯 개 이상인 것이 미의 목덜미에 앉기라도 하면 기절할 정도니까요. 우훗! 말하다 보니 소름 끼치 네. 후작님이 그 둘 중의 하나를 원하신다면, 보호 본능이 없다고 생각하세요. 그런데 후작님도 지네나 거미 같은 것이 무서워요?”
후작은 끔찍한 기분을 느끼며 앞머리를 맹렬히 움켜쥐었다. 그 모습을 보며 궤헤른은 어찌해야 좋을지 모를 난감함과 기이한 유쾌함을 동시에 느꼈 다. 자기 코를 구워버릴 정도로 요란하게 불길을 일으키고 있던 사무엘이나 사슴 고기를 부위별로 잘라내는 일에 과도한 열의를 보이고 있던 니크와 가이버는 북부의 무녀가 무슨 말을 하든 신경 쓰지 않고 있었기에 후작을 안쓰러워할 사람은 궤헤른뿐이었다.
후작의 격조가 더 떨어져 봐야 보기에 즐거울 뿐 도움될 것은 없다고 판단한 궤헤른은 자신이 대화의 주도권을 쥐기로 결정했다.
“미 V. 그라시엘 양.”
“미라고 부르세요.”
“미. 우리가 납치자의 저열한 즐거움을 만끽하고픈 생각은 없으니 당신이 포로나 인질이 보여줄 여러 가지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겠지요.”
“심술궂게 굴지 않을 거니 겁먹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이죠?”
미는 그란의 말을 번역하던 그 실력을 십분 발휘하여 궤헤른의 말을 대폭 축약했다. 궤헤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요. 뭐 시키지 않아도 그럴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낙천적으로 있고 싶다면 그렇게 있어도 좋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요구하는 일은 해주는 편 이 당신의 낙천성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청소와 빨래는 잘해요. 요리도 괜찮은 정도고.”
궤헤른은 잠시 당황하다가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피식 웃어버렸다. 농담을 하며 동시에 꼬집는군. 머리가 좋은가 본데.
·남자끼리, 그것도 쫓겨다니는 사람들끼리 긴 시간 황야와 언덕, 숲속을 전전하게 된다면 옷차림이나 청결에는 신경 쓰지 않게 됩니다. 불쾌합 니까?”
“불쾌하지는 않아요. 미도 물 구하기 힘든 겨울철에 양떼들 몰고 다닐 때는 지금의 궤헤른 씨보다 훨씬 지저분해져요.”
갑자기 어디선가 킁킁거리는 소리가 들려와 궤헤른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사무엘이 소맷자락에 코를 묻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사무엘은 궤헤 른의 시선을 느끼자 재빨리 팔을 내리고 모닥불을 쏘아보기 시작했다. 궤헤른은 다시 미를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가사에 전념해 줄 노예는 아닙니다. 그 정도 일에 목숨을 걸고 납치 같은 것을 시도하지는 않아요. 내 팔이 보입니까? 당신 개 가 내게 남겨준 선물입니다.”
“설마.”
“정말입니다.”
“그럴 리가 없어요. 아달탄이 깨물었으면 팔이 잘렸을 거예요. 미는 믿지 않아요.”
“……·보호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 진작 말씀하시지 그러셨어요.”
궤헤른은 진작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해 사과할까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깨닫고 어이가 없었다. 이런, 이상하게 휘말리고 있는 건가? 후작은 조금 전 궤헤른의 표정을 조금 더 과장해서 돌려줄 수 있다는 데서 소박한 즐거움을 느꼈다.
궤헤른은 고개를 조금 가로젓고는 단숨에 말했다.
“어쨌든 우리가 그 어려움을 감수하면서 당신을 원한 것은 당신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중요하지요?”
“신스라이프의 문제 때문이지요.”
미는 커다랗게 뜬 눈으로 궤헤른을 바라보았다. 궤헤른은 그 표정을 읽기가 어려웠다.
“그 문제를 알고 있습니까?”
“들었어요. 그런데 그게 왜…………?”
“당신이 바로 그 문제의 정답입니다.”
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궤헤른을 바라보기만 했다. 궤헤른은 왠지 설명해야 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는 후작을 흘긋 보고는 입을 열 었다.
“그 문제는 이와 같습니다. 과거로 향하는 흐름과 미래로 향하는 흐름, 두 흐름의 교차점을 찾아오라.”
“예…………, 미도 알아요.”
“후작님께서는 그 문제에 대해 다각도로 고려해 보셨습니다. 그 결과, 과거로 향하는 흐름이라는 것은 미래로부터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시간이며, 미래로 향하는 흐름이라는 것은 이 세계라는 결론을 얻으셨습니다. 미래의 시간과 현재의 세계를 잇는 교차점은 당신, 퓨처 워커입니다.”
“현재에 살면서 미래를 보니까……?”
“그렇습니다.”
“그럼 미가 그 문제의 정답이라는 말씀이세요?”
“후작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십니다. 그래서 신스라이프의 문제를 푸는 자리에 당신을 데려갈 생각이시지요. 물론 당신은 암살자들로부터의 안전 을 도모하는 인질의 의미도 됩니다. 그 자리는 공개된 자리이니만큼.”
“암살자….., 그 바이서스의?”
“예l.”
“그럼 그 문제를 풀고 나면 미는 자유인가요?”
궤헤른은 잠깐 주춤했다. 하지만 거짓을 말한다고 하더라도 소용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당신은 꽤 오랫동안 인질의 위치에 있어주어야 할 겁니다. 하지만 되도록 빠른 기간 내에 당신을 자유롭게 해주기 위해 노력할 거라는 것은 약속할 수 있습니다.”
“만일 미가 정답이 아니라면?”
“예?”
미는 고개를 돌려 후작을 바라보았다. 후작은 눈썹을 일그러뜨린 채 그녀를 마주보다가 낮게 말했다.
“그건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후작님의 생각이 틀릴 가능성은 있는 거잖아요. 미와 상관이 없다면 모를까, 바로 미가 그 정답이라고 생각하신다면 미는 후작님의 생각이 맞을지 틀릴지, 그리고 틀렸을 경우에 미는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꼭 알고 싶어 하는 게 당연하잖을까요?”
후작은 잠깐 주춤했다. 하지만 거짓을 말할 필요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럼 다른 정답을 찾아봐야겠지.”
“미는요?”
“청소, 빨래, 요리를 잘한다고 했던가.”
“예? 예.”
“데리고 다니면 편하겠군.”
그 자신의 표현대로 머저리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미래를 볼 줄 아는 인재라면 후작에게는 상당한 매력이다. 궤헤른이 말한 것은 결국 거짓말이 되고 말 것이다. 후작은 미를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었으므로, 후작은 필요하다면 그녀와 결혼이라도 할 생각까지 해두고 있었다. 미는 물끄러미 후 작을 바라보다가 그의 심정을 상당히 정확하게 짚어냄으로써 그를 놀라게 했다.
“장차 재기하기 위해 미래를 볼 줄 아는 미의 능력을 사용할 생각인가요?”
·매력적인 능력이니까.”
“당신도 잘못 생각하고 있군요.”
“무슨 말이지.”
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미가 내일 죽는 당신을 보게 된다면 어쩌겠어요?”
“뭐.”
“미가 미래를 봐요. 그런데 그 속에서 죽어가는 후작님이 떠올랐어요. 미는 그 장소와 시간을 말씀드릴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후작님은 어쩌시겠 “어요?”
“그 장소와 그 시간을 피하겠지.”
“그럴 수는 없어요. 후작님은 그 장소와 그 시간에 미가 본 대로 죽게 돼요.”
후작의 눈살이 꿈틀거렸다. 갑자기 빨라지는 자신의 호흡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후작은 날카롭게 질문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미래가 고정되어 있다는 말이냐.”
“네.”
궤헤른은 호흡을 거의 잊은 채 미를 바라보았고 후작 역시 부릅뜬 눈으로 이 북부의 무녀를 쏘아보았다. 후작은 갑자기 손을 허리 쪽으로 가져갔다. 미는 흠칫하며 뒤로 조금 물러났지만 후작은 이미 검을 뽑아들었다. 놀란 궤헤른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후작은 검으로 미를 겨냥하며 말했다.
“미래를 보려면 뭐가 필요하지.”
“후작님. 이거 치우세요.”
궤헤른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미는 검 끝을 보긴 했지만 거기에 대해선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것은 마치 노련한 전사와 비슷한 모습이 었지만, 궤헤른은 미를 노련한 전사로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후작은 사납게 외쳤다.
“미래를 보려면 뭐가 필요한지 말해!”
“물그릇과 미의 가면이 필요해요.”
“물그릇과 가면. 그런 게 필요했나. 그건 가져오지 못했군. 좋아, 대답해라. 만일 네가 한 시간 후의 미래를 보고, 그때까지 살아 있는 네 모습을 봤 다고 하자. 그런데 네가 미래를 보는 것을 끝내자마자 내가 널 찌른다면, 그러면 어떻게 되지.”
“미는 살아요.”
·좋아. 그렇다면 가령 네가 내 검에 맞아 죽는 네 모습을 봤다고 하자. 그런데 내가 이대로 검을 집어넣어 너를 살려둔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미는 죽어요.”
“어째서! 내가 갑자기 미치기라도 한단 말이냐. 아니면 나도 모르게 내 손이 멋대로 움직여 너를 살리거나 죽이게 된단 말이냐! 내 자유 의지는 어떻 게 되는 거냐!”
미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후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미가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미가 보는 미래를 모두 부정하시겠다면, 그렇다면 왜 미를 납치하신 거죠?”
“뭐라고.”
“후작님은 지금 오른손으로 오른손을 쥐려고 하고 계세요.”
“그게 무슨 말이냐.”
“음. 자기 오른손으로 자신의 오른손을 쥐려고 하면 불가능하겠죠? 이건 헤게모니아에서 이율배반을 말하는 속담이에요. 후작님은 미가 미래와 현 재를 잇는다는 이유로 미를 납치하셨어요. 그런데 지금은 미가 보는 미래를 모두 부정하겠다고 말씀하시는군요.”
후작의 검끝이 자신도 모르게 아래로 처졌다. 후작은 경악에 휩싸인 표정으로 미를 바라보았고 그 표정을 마주보며 미는 쓸쓸한 웃음을 지었다.
“다들 그렇죠.”
황폐한 어조였다. 궤헤른은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며 미를 바라보았다. 뚫어지게 바라보았기에 궤헤른은 미의 기다란 속눈썹이 가볍게 떨리 는 것까지 볼 수 있었다.
“미래를 알고 싶어 하면서도, 자유는 포기하기 싫어하죠. 넓고 편한 길을 걷고 싶어 하지만, 제멋대로 달려갈 수 있기를 바라죠. 지식과 자유 둘 모 두를 바라지요. 미 도망치면 안 되죠? 저기 가서 사슴 다루는 거나 구경할래요. 미는 가죽 벗기는 일도 곧잘 했으니까 도움이 될지도 몰라요.”
미는 후작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곧장 니크와 가이버 쪽을 향해 걸어갔다. 후작은 멍한 시선으로 그 뒤를 바라보다가 문득 자신이 그때까지도 롱 소드를 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후작은 검을 집어넣고는 망토로 상체를 휘감고는 상념에 빠진 표정이 되었다.
후작은 잠든 미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옆에서 입에 문 작은 나뭇가지를 위아래로 까닥거리고 있던 궤헤른이 말했다.
“기묘한 저녁이었습니다.”
“팔은 괜찮나.”
“저는 가이버가 그렇게 자기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은 오늘 처음 들었습니다.”
“별로 안 아픈가 보군.”
“가이버가 그렇게 자기 가족을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까, 후작님? 저는 짐작도 못했습니다. 저 친구는 가족에 대해 말할 때는 항상 넌 덜머리난다는 투로 말하지 않았습니까.”
“차라리 담배를 피워. 그 나뭇가지가 방정을 떨고 있는 것은 못 봐주겠군.”
궤헤른은 빙긋 웃으며 목에 걸어 옷 속으로 갈무리하고 있던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그 안에는 약간의 담뱃잎과 파이프가 들어 있었다. 궤헤른은 주 머니를 눈앞에 들고 들여다보았다.
“이건 마지막으로 남은 이파실 담배입니다. 바이서스를 탈출할 때도 이건 놔두고 올 수가 없었지요. 말씀드렸듯이 이건 그날이 왔을 때 피울 겁니 다.”
후작은 쓰게 웃었다. 궤헤른이 말하는 ‘그날’은 명확하게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대략의 행동 노선은 있었지만 그 행동 노선의 어느 부분이 궤헤 른이 말하는 ‘그날’인지는 후작도 짐작할 수 없었다.
신스라이프의 재산은 첫 번째 도약점이 될 것이다.
후작은 망명자로서 헤게모니아의 핵심부에 접근하고 싶었지만 그에게는 금권이나 무력, 인맥, 그 어느 것도 없었다. 바이서스에 있을 때조차도 그에 게는 별다른 권력이 없었다. 그는 드래곤 라자 가문의 수장이었고, 그토록 강력한 권력을 가졌기에 다른 형태의 권력 기반을 확보하는 일에 별 관심 이 없었다. 그가 다루는 것은 드래곤의 힘이었고, 따라서 자신의 뜻을 펴는 데 있어 부동산이나 동산, 무력 같은 것은 별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권력 기반을 소홀히한 행동의 결과는 지긋지긋한 도피 생활 끝에 결국 옆에 남은 부하가 네 명으로 줄어드는 수모를 감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나타났 다.
헤게모니아와 바이서스가 적대 국가가 아닌 이상 정치적 망명 같은 것은 성립하기 어렵다. 그에게 남은 것은 후작의 지위뿐이지만 그것만으로 헤게 모니아가 바이서스에 대해 반항하면서까지 그를 받아줄 리가 없다. 따라서 도피처로서는 헤게모니아보다 바이서스의 적대국인 자이펀이 훨씬 안성 맞춤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전쟁 때문에 바이서스의 정예 부대가 좌악 깔려 있다시피한 자이펀 국경을 돌파할 자신이 후작에게는 없었다. 그래서 그 는 헤게모니아로 올 수밖에 없었다.
결국 헤게모니아에 들어왔으면서도 그 핵심부로 접근하기는커녕 자신의 이름조차 함부로 밝힐 수 없는 입장에서, 신스라이프의 재산은 후작에게 매 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획득하게 된다면 헤게모니아 핵심부로 진입하는 데 절대적인 도움까지는 안 되더라도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 고 암살자들을 포섭하는 데에라면 절대적인 도움이 될 것이다.
10년쯤이면 될까.
후작은 막연하게 생각해 보았다. 건강에는 아직 자신이 있었고, 10년 뒤에도 군사를 다룰 정도의 체력을 유지하는 것은 가능하게 여겨졌다. 그의 목 적은 헤게모니아 군대를 이끌고 바이서스를 침략하는 것이다. 바이서스가 자이펀과 길고 지루한 전쟁을 치르는 동안에도 헤게모니아가 움직이지 않 은 사실은 후작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만약 헤게모니아마저 움직였다면 바이서스는 위아래로 협공당하는 꼴을 당하고 말았을 터였다.
하지만 헤게모니아는 지나칠 만큼 엄격한 중립을 지키고 있다. 그것은 바이서스의 외교전의 승리이기도 하지만 헤게모니아 인의 기질과도 상관이 있는 일이다. 지금은 많이 퇴색했지만 점잖고 명예를 아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 헤게모니아의 명성은 아직 건재하다. 양치기 차넬의 후예들은 아직껏 그의 기풍을 유지하고 있었고, 전쟁 중인 나라를 배후에서 치는 것을 결코 달가워하지 않았다. 게다가 헤게모니아는 바이서스를 자이펀의 공격에 대 한 방벽으로 여기기를 더 좋아했다. 기원도 불확실한 나라보다는 300년 전부터 관계를 맺어온 우방이 발 아래에 있는 편이 그들로서도 덜 신경 거슬 리는 일이 아니었을까. 헤게모니아 인들은 그들 중 가장 우수한 전사가 바이서스의 건국왕과 맺었던 우정을 아직도 잊지 않았다.
따라서 헤게모니아가 바이서스와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 된다.
하지만 후작은 그것이 더 좋다고 여겼다. 헤게모니아 내에 주전론자가 득시글거린다면 후작은 그런 주전론자들 중 하나가 될 뿐이다. 이 경우 헤게 모니아가 바이서스와 전쟁을 하기로 결심한다 하더라도 외국인이자 망명자인 후작에게 많은 기회가 주어질 가능성은 적다. 하지만 지금처럼 헤게모 니아에 주전론자가 별로 없다면 후작은 독보적인 존재가 된다. 후작은 유일한 주전론자로서의 처신의 어려움보다는 자신에게 모든 기회가 돌아올 수 있다는 점을 더 중시했다.
그리고 궤헤른 역시 그 점을 좋아했다. 위험 부담이 많을수록 성취도 크다는 간단한 논리의 추종자라는 점에서, 둘은 어쩐지 소년과 닮은 면이 있었 다. 세월의 무게를 실감하는 장년이 위험 부담과 성취 사이에 타협을 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 소년의 야망과는 전혀 비슷하 지 않았다. 그것은 나락으로 떨어진 자의 발돋움이었고, 가장 큰 절망을 맛보았기에 더 이상 절망을 무서워하지 않는 남자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후작은 다시 미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절망이 무섭지 않다. 하지만 저 무녀처럼 태평할 수 있을까. 후작은 과거 많은 칼잡이들과 검을 나눠보았지만 눈앞을 오가는 검에 그녀만큼이 나 무심할 수 있는 자를 본 것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그중 하나는 지금 그를 뒤쫓고 있는 운차이. 하지만 그 사내는 자이펀의 토양만이 낳을 수 있는 완벽한 괴물이고, 그에 덧붙여 간첩이 되기 위한 혹독한 훈련을 거친 자다. 미와 그를 단순 비교한다면 그 사내에게 너무 미안한 일이 된다. 그런 사람은 없어. 후작은 속으로 긍정했다. 이상한 화법과 어수룩해 보이는 태도에 속기 쉽지만 저 여자는 예사 여자가 아니야.
“무녀라서 그럴 겁니다.”
후작은 최소한 세 호흡 정도를 잊고 말았다. 후작은 고개는 궤헤른 쪽으로 돌리며 눈으로는 독심술사를 바라보는 시선을 던졌다. 궤헤른은 빙긋 웃 었다.
“미를 흘끔흘끔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무의식중에 그랬으리라고 생각됩니다만, 칼자루를 쥐시더군요. 저도 아까는 상당히 놀랐습니다. 검을 든 후작님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게다가 여자 중에 그런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마음을 읽는 척하지 마라. 나는 그런 것을 싫어한다.”
“미래도 마찬가지겠지요.”
“뭐.”
“마음은 자신의 마음. 미래도 자신의 미래. 누군가가 정해 버린 미래는 모두가 싫어하는 것이겠지요. 미가 한 말이었습니다.”
“…………무녀라서 그렇다는 것은 무슨 뜻이지.”
“그녀가 미래를 두려워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녀는 자신이 언제 죽는지 알고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후작님의 검에 의해 겨누어진 그 순간 그녀는 그때가 자신이 죽는 때인지 아닌지도 알고 있을 겁니다. 뭐가 무섭겠습니까.”
후작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는 이를 악문 채 말했다.
“그렇다면 그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다.”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왜지.”
“사람들은 누구나 연극에 익숙하니까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후작님 같으신 분은…………, 이해하시기가 더 어려울 겁니다. 하지만 저는 이해합니다. 300년 동안 연극을 계속해 와야 했던 자들의 마지막 후계자인 저는.”
후작은 고양이와 꿈의 콜리의 프리스트,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고 믿어지는 그 종단의 마지막 후계자를 바라보았다.
후작이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렇게 오래된 일은 아니다. 그들이 넘치는 절망감 이외엔 아무것도 지니지 못한 빈손으로 헤게모니아로 건너왔을 때, 궤헤른은 비로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후작에게 신스라이프의 문제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후작도 고양이와 꿈의 콜리에 대해서 알고는 있었다. 그는 그들이 사멸한 고대 종교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300년이 아니라 66년 전까지도 콜리의 프리스트들이 암암리에 활동하고 있었다는 것이 분명한 이상, 후작은 궤헤른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 었다. 궤헤른은 솔직한 태도로 말했다.
“아직 남아 있습니다. 이제는 종교 단체라기보다는 비밀 결사 비슷한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만, 신께서는 자신의 지팡이들을 그렇게 쉽사리 멸절되 게 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후계자인 저는 솔로처를 증오합니다. 솔로처의 스승인 핸드레이크도, 그리고 바이서스도 증오합니다. 제가 후작님의 심복으로 들어간 까닭은 그것입니다. 제게는 다른 선택이 없었습니다.”
“다른 선택이 없었다니.”
“후작님의 할슈타일 가문 역시 북방 정벌 때 바이서스에 편입된 가문입니다. 바이서스 내에서는 유일한 이방인의 가문이지요. 그래서 저는 후작님께 찾아왔던 것입니다.”
“갑자기 너를 죽이고 싶어지는군.”
궤헤른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저 역시 종종 저 자신에 놀랄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이토록 철저히 자신을 숨겨올 수 있는지에 대해 말입니다.” 후작은 잠시 궤헤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좋아. 네가 말하는 그 문제는 호기심을 자극하는군. 왜 너희들은 정체를 드러내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 미치광이 노인의 부탁을 들어준 거냐.”
“우선 이 헤게모니아에서는 콜리의 종단에 대한 증오가 별로 심하지 않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콜리의 종단을 반역자로 몰아서 멸망시킨 것은 바이서스입니다. 물론 태연히 이름을 내걸고 포교를 하거나 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닙니다만 헤게모니아에서 콜리의 프리스트들의 활동은 견딜 수 있을 정도의 제약밖에 없습니다. 만약 바이서스에서였다면 그것은 절대로 불가능했겠지요.”
“너희들이 그 노인에게 받은 사례는 뭐냐.”
“모릅니다.”
“뭐.”
“저는 바이서스 내부의 조직에 속한 사람입니다. 바이서스 내부의 우리들은 활동에 엄청난 제약을 받습니다. 바이서스는 에리네드 대왕의 업적을 사랑하고 그의 적인 우리를 미워합니다. 지금까지도! 그래서 헤게모니아의 조직이 왜 그런 일을 했는지 그 상세한 내막은 알지 못합니다.”
후작은 ‘너 역시 지금까지도 바이서스를 증오하고 있는 콜리의 잔존자 아니더냐?”라고 말하는 대신 더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너는 그 문제의……….”
궤헤른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 정답은 알지 못합니다.”
“그럼 쓸모가 없군. 아무리 막대한 재산이라고 하더라도 소지할 수 없다면 돌멩이나 다를 것이 없잖은가.”
“도전해 볼 가치는 있습니다.”
“어느 정도의 가치인가.”
“자세하게는 알지 못합니다. 저는 바이서스의 우리들에게 전해진 이야기는 틀림없이 과장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에서 신스 라이프의 재산은 바이서스 화폐로 450만 셀에 해당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후작은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산지마다 차이는 많이 나지만, 좋은 군마 한 필이 100셀 남짓한 금액으로 거래되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450만 셀의 재산이라면 4만 5000마리의 군마를 살 수 있는 돈이라는 말이 된다. 사람은 훨씬 싸다. 따라서 단순 계산으로도 그 금액이면 2만의 완전 무장한 기병대를 구성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2만의 기병대라면, 야심가에게는 나라를 노릴 정도의 숫자이다. 게다가 보병대로 계산한다면 이 숫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될 것이다. 물론 부대를 양성하고 유지하는 비용, 그리고 그 시간을 모조리 계산한다면 이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숫자가 나올 테지만 그래도 무시할 수 없는 숫자다. 더군다나 나락에 떨어진 도망자라면 절대로!
후작은 차가운 열정에 번득이는 눈으로 궤헤른을 바라보았다.
“헤게모니아 내부의 너희 패거리들과 접촉할 수 있나.”
궤헤른은 패거리라는 말에 눈을 조금 찌푸렸지만 선선히 대답했다.
“모릅니다. 저희들은 어떤 형태로든 지속적인 연결 고리는 갖지 않으려 애써 왔습니다.”
“그렇다면 그 문제의 출제자에게서 정답을 알아낼 방법은 없다는 건가.”
“예. 하지만 제게는 마지막 순간에 조언을 요청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후작님도 마찬가지겠지만.”
“어깨 위에 머리는 남아 있단 말이지.”
“예.”
그리고 그들은 그 문제에 겁없이 도전했다. 목숨의 위협이 걸려 있다는 것은 그들에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로 생각되지는 않았다. 이 점에서도 그들 은 죽음의 무게를 실감하지 못하는 소년과 비슷했다. 속사정은 전혀 다르지만.
그리고 후작은 그를 뒤쫓는 암살자들과 함께 나타난 무녀라는 존재를 알았을 때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의 충격을 느꼈다. 미래를 보는 무녀? 그녀가 곧 신스라이프의 문제의 정답이라고 판단했을 때, 후작이 만일 종교인이었다면 그는 이것이 어떤 신이 그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후작은 종교인이 아니었고, 그래서 이것을 유피넬의 저울대에 걸린 그의 반대편 추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반드시 이용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그 무녀는 후작의 정신을 통째로 뒤흔들어 놓고는 이제 태평하게 잠들어 있는 것이다. 험상궂은 다섯 명의 납치범들 사이에서, 저토록이나 천연덕스럽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