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 워커 3권 – 5장 거짓된 사랑의 진실 (하) 6
6
“춥지 않습니까?”
“안 추워요. 시원해요. 하앙…….”
실제로 케이트는 전혀 추워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불안해하지도 않았다. 딤라이트는 한 손으로 고삐를 쥐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작은 몸을 단단히 안아들고 있었다. 케이트는 딤라이트의 굵은 팔뚝에 양팔을 얹고는 그 위로 턱을 길게 뽑은 채 사방을 둘러보았다.
“땅이 어디 있어요? 땅이 안 보여요.”
“달빛 때문에 밤하늘이 더 밝습니다. 그러므로 갑자기 어두워지는 곳을 찾으면 그곳이 지평선입니다. 그럼 땅의 윤곽을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딤라이트는 그 외에도 밤의 비행에 대한 많은 것을 말해 주고 싶었다. 땅도 검고 하늘도 검은 밤에는 지평선을 분간하기 어렵기에 고도가 낮아져도 알 수가 없다. 이 경우 아래쪽에 적대적 세력이 존재할 경우 위험은 배가된다. 데스나이트들의 화살이 밤이라고 둔해질 까닭은 없다. 아니, 오히려 저 어둠의 세력은 이 밤의 장막이 펼쳐질 때……………
“찾았어요!”
케이트는 탄성을 터뜨렸다. 딤라이트는 잠시 당황해하다가 지평선을 찾아냈다는 말이라는 것을 이해했다. 그리고 꺼내려고 했던 모든 말을 잊어버 리고 말았다.
케이트의 말 속에는 딤라이트가 한 번에 간파해 내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세월이 그에게서 가져가 버린 것들이 아직 이 소녀에 게는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딤라이트는 이 순수한 찬탄에 매료되어 버렸다. 아무런 목적도 계산도 없는 단순한 탄성.
페가수스의 긴 날개는 좌우에서 물결치듯 움직였다. 그리고 뒤로는 딤라이트의 흰 망토가 바람을 잡는 그물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케이트는 딤라이 트의 예상과는 달리 전혀 무서워하지 않았다. 밤이라서 그럴 것이다. 까마득한 높이로 날고 있었지만, 케이트가 볼 수 있었던 것은 거대한 어둠과 그 사이에 흩뿌려진 별빛이 전부였다. 그리고 루미너스의 빛은 하늘 위에서 더욱 가깝고 더욱 멀게 반짝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보통의 암흑이 아니다. 몸 주위를 완전히 둘러싸는, 시야 닿는 극한까지 뻗어 있는 암흑인 것이다.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대평원에서 밤을 맞이할 때 겨우 이 비슷한 것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지금 케이트의 주위를 둘러싼 암흑과는 격이 다르다. 대평원에서도 발 아래는 대충 볼 수 있다. 그러나 케이트의 발 아래는 한없는 암흑뿐이었다. 주위와 거의 완벽하게 단절된 느낌, 그 절대적인 고립감은 여덟 살 소녀에게 공포로 다 가오지는 않았다. 그녀를 붙잡고 있는 강인한 팔, 그녀가 기댄 넓은 가슴, 좌우로 춤추는 페가수스의 하얀 날개가 계속해서 속삭이고 있었다. 안심해. 내가 여기 있단다.
“엄마는 어디 있어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딤라이트는 당황했다. 케이트는 고개를 뒤로 디밀어 딤라이트의 가슴에 기댔다.
“하늘에 올라왔는데, 아무리 봐도 엄마가 안 보여요. 어디 있어요?”
“아, 저, 제 페가수스를 타고자 한 이유가 그것입니까?”
“예?”
“그러니까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하늘에 올라오고 싶어 한 겁니까?”
딤라이트의 어조에 섞인 당황은 케이트를 불안하게 했다. 어린애는 어른의 말에서 그 단어보다는 어조를 민감하게 느낀다. 단어들을 잘 모른다는 점 도 있겠지만 어린애 특유의 민감함 때문이다. 케이트는 조금 불안한 어조로 말했다.
“예. 다이앤은 그랬는데…………, 엄마는 하늘에 있다고……”
딤라이트는 동시 다발적으로 무수한 생각을 떠올렸다. 그중에서도 지금 자신의 처지를 간파한 그레이가 킨 크라이를 타고 날아올라 와주지 않을까 하는 황당한 소망이 지배적으로 그의 뇌리를 점령했다. 하지만 그의 황당한 소망의 주인공은 지금 무스타파의 거체에 깔린 채 ‘내가 죽으면 킨 크라 이를 바베큐로 만들 생각이지?’ 등의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으므로, 설령 딤라이트의 딱한 처지를 알았다 하더라도 이 고도에 당도하기는 힘든 처지였 다.
“어머님께서는 훨씬 더 높은 곳에 계십니다.”
딤라이트는 거의 무의식중에 내놓은 자신의 대답에 감탄했다. 내가 이렇게 재치 있을 줄이야! 그러나 케이트의 대답은 그를 절망하게 만들었다.
“그럼 올라가요.”
“괴, 굉장히 높은 곳입니다. 헐스루인도 거기까지는 올라갈 수 없습니다.”
“……거짓말!”
케이트는 앙칼지게 말하며 머리를 뒤로 확 밀어서 딤라이트의 가슴에 부딪쳤다. 딤라이트의 입장에서는 메이스로 맞는 기분이었다.
“거짓말하지 말아요. 거짓말 하는 거 다 알아요. 올라가요! 더 올라가요!”
케이트는 그렇게 말하며 계속 딤라이트의 가슴에 뒤통수를 쾅쾅 부딪쳤다. 딤라이트가 흉갑이라도 입고 있었다면 당장 상처를 입었을 테지만 다행 히도 딤라이트는 하드 레더를 입고 있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머리를 다치겠습니다. 그만하세요, 레이디 케이트.”
“싫어요! 안 올라가면 계속할 거예요, 올라가요! 어서 올라가요!”
케이트는 그렇게 말하며 계속해서 머리를 뒤로 부딪쳤다. 딤라이트는 할 수 없이 고삐를 놓고는 케이트를 붙잡았다.
“레이디 케이트! 내 말을 들어…..”
그러나 그것은 실수였다. 딤라이트가 고삐를 놓자마자 케이트는 기다렸다는 듯이 딤라이트의 팔을 빠져나가 재빨리 헐스루인의 고삐를 잡았다. 그 녀가 아는 승마 지식이란 것은 주리오 시장이나 다른 경비 대원들이 말 타는 모습을 멀리서 본 것이 다였지만, 케이트는 주저 없이 고삐를 잡아당겼 다.
“날아올라아!”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헐스루인은 고개를 뒤로 조금 젖히기는 했지만 고도를 높이지는 않았다. 말을 모는 것도 고삐만으로는 불가능하다. 하물며 3 차원적으로 움직이는 페가수스가 고삐만 잡아당긴다고 올라갈 리 없었다. 케이트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헐스루인을 바라보다가 다시 외쳤다.
“날아올라! 올라가자고! 바보야, 올라가!”
케이트는 고삐를 놓고 그 작은 손에 한껏 헐스루인의 갈기를 부여잡았다. 그러고는 마구 잡아당겼다. 그러나 귀찮게 여긴 헐스루인이 고개를 내젓는 바람에 오히려 중심을 잃고 휘둘렸다. 딤라이트가 붙잡지 않았더라면 케이트는 그대로 저 아래의 땅으로 떨어질 뻔했다.
그러나 케이트는 위험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속절없이 헐스루인의 갈기를 잡아당기는 일을 계속했다. 심지어 발을 구르기까지 했기 때문에 딤라이 트는 케이트의 허리를 단단히 움켜쥐어야 했다.
“레이디 케이트, 케이트! 가만 있어요.”
“올라가, 올라가! 위로 올라가! 엄마한테 가! 나쁜 페가수스야, 바보야!”
케이트는 찢어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고삐를 붙잡아야 했기 때문에 한 손밖에 쓸 수 없었던 딤라이트는 그 한 손으로 케이트를 안아들고 턱으로 케 이트의 머리를 눌렀다.
“케이트!”
“우아아아……!”
케이트는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소녀의 찢어지는 고성으로 터뜨린 울음소리에 딤라이트는 입을 다물었다. 딤라이트의 가슴 깊이 안긴 채, 케이트는 헛구역질을 할 때까지 울었다.
“케이트…………, 레이디 케이트. 제발. 울지 말아요, 케이트.”
“으어, 어, 히꾹! 으허어엉……. 나쁜 페, 페, 페가수스, 히꾹! 나빠, 나빳! 올라가, 올라가야, 올라가야 엄마를 만나는데, 만나는데, 어흐어어엉! 엄마 가, 엄마가……………, 나는 엄마를…………, 으아아아!”
“쉬이이……. 울지 말아요, 레이디 케이트. 울면 안 됩니다. 그럼 어머니가 슬퍼할 겁니다.”
턱으로 케이트의 머리를 누른 채 말했기 때문에 딤라이트의 말은 억눌린 것처럼 나왔다. 하지만 케이트에게 직접 전달되었다. 케이트는 울음을 멈추 지는 않았지만 눈물이 줄줄 흐르는 눈을 돌려 딤라이트를 돌아보았다.
“울면 안 됩니다. 여기는 높은 하늘입니다. 레이디 케이트가 땅에 있을 때도 어머니는 다 듣고 계셨을 겁니다. 하물며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케이트 가 울면 어머니는 곧 들으실 겁니다. 어머니가 얼마나 슬퍼하시겠습니까.”
“올라가요, 엄마를 만나면 나는 안 울어요. 올라가요오.”
“그건 안 됩니다. 레이디 케이트. ·혹시 까마귀가 왜 검어졌는지 아십니까?”
우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케이트의 명민한 정신은 곧 호기심을 보였다. 케이트는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했다.
“까마귀?”
딤라이트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까마귀는 옛날에는 지금처럼 새카맣지는 않았습니다. 새카맣기는커녕, 새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깃털을 가지고 있었지요.”
“거짓말.”
“정말입니다. 까마귀는 한번 보기만 해도 평생 동안 못 잊을 정도로 예쁜 깃털을 가지고 있었지요.”
딤라이트는 말을 하면서 손을 뒤로 돌려 망토를 움켜쥐어다가 케이트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딤라이트의 커다란 손은 케이트의 얼굴을 다 덮어버렸 고, 케이트는 그 밑에서 잠시 숨을 헐떡였다. 딤라이트는 조용조용한 말투로 케이트의 집중력을 자극했다.
“그런데 어느 날 까마귀가 생각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깃털을 가진 새는 자신인데도 독수리가 새들의 왕이라는 것은 불합리…………, 잘못되 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직접 싸움을 벌여서는 까마귀는 도저히 독수리의 상대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까마귀는 무리를 짓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때까지는 까마귀들도 독수리처럼 홀로 사는 새였지 무리를 짓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독수리를 상대하기로 결심했을 때부터 까마귀들은 무리를 지어 날아다니게 되었습니다.”
케이트의 훌쩍거림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딤라이트는 미소 띤 얼굴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마침내 까마귀들이 몰려서 날아다니면 모든 새들이 겁을 집어먹고 도망치게 되었습니다. 새들 중 가장 빠르며 독수리 왕의 오른팔이라고 할 수 있 는 매는 더 이상 까마귀들의 행패를 내버려둘 수 없다고 생각하고는 구름보다 더 높은 까마득한 절벽 위에 홀로 고고하게 살아가는 독수리 왕에게 날 아갔습니다. 아무리 매라고 해도 독수리 왕의 거처로 날아가는 것은 힘들었습니다. 마침내 기진맥진해 날개를 움직일 힘도 없어진 매는 바위 벽을 기 어올라서 간신히 독수리 왕의 어전에 도달했습니다. 바위 벽을 기어오르느라 매의 발톱은 날카롭게 갈렸고 부리는 구부러졌지요. 매는 그때부터 날 카롭게 휘어진 발톱과 구부러진 부리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독수리 왕은 매의 고발을 들었지만, 즉각 까마귀를 처벌하기 위해 날아오르지는 않았습니다. 그 대신 독수리 왕은 몹시 지친 매를 쉬게 하고 신하들 중 후투티를 불러들였습니다. 독수리 왕은 후투티에게 ‘까마귀들이 무리를 짓는 것은 상관없지만 다른 새들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을 전달하게 했지요. 후투티는 독수리 왕의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높은 절벽을 날아 내려와 까마귀들을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후투티는 그 작은 몸집만큼이나 겁이 많았지요. 무리를 지어 날아다니는 수많은 까마귀들을 보자 후투티는 머리끝이 곤두설 만큼 겁을 먹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후투티는 지금까지도, 평소에는 누워 있지만 조금만 놀라면 곤두서는 머리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후투티는 독수리 왕의 명령을 전달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머리 끝이 곤두선 채 도망쳐 버렸지요.
독수리 왕의 전령이 명령을 전달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도망치는 것을 보고서 까마귀들은 큰소리로 비웃었습니다. 그리고 더욱 많은 무리를 모아 세상을 휩쓸고 다녔지요. 까마귀들은 학을 붙잡아 목과 다리를 잡아 늘여 버렸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겁을 집어먹은 부엉이는 나무 구멍 속에 숨어 버렸고, 그 뒤로 밤에만 나돌아다니게 되었습니다. 용맹한 비둘기는 까마귀들에 맞서 싸우다가 온몸에 멍이 들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닭은 하늘을 나 는 일을 무서워하게 되어 그 이후로 계속 땅에서만 살았지요.
높은 절벽 위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독수리 왕은 더 이상 참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독수리 왕은 마법사인 선더버드를 내려보내어 까마귀들 을 모조리 폭풍으로 휩쓸어 버리려 했습니다. 그때 영광의 아샤스가 독수리 왕에게 까마귀들을 죽이지 않고도 얌전하게 만들 계책을 말해 주었습니 다. 그래도 자신의 백성인 까마귀들을 멸망시키고 싶지 않았던 독수리 왕은 아샤스의 계책을 받아들였습니다.”
“어떤 계책이오?”
“그건 천천히 말하겠습니다. 어쨌든 독수리 왕은 까마귀들에게 다시 사신을 보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새들은 모두 후투티가 그랬던 것처럼 겁을 집어먹고 사신으로 나서지 않았습니다. 용맹한 매를 보내고 싶었지만, 바위 벽을 오르느라 병에 걸린 매는 그때까지도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습 니다.
그때 피닉스가 앞으로 나섰습니다. 피닉스는 독수리 왕의 명령을 받들어 까마귀들을 찾아갔습니다. 피닉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들 아름다운 깃털의 까마귀여. 독수리 왕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왕좌는 왕다운 이에게 허락된 자리인 만큼, 그대들이 왕이 되고 싶다면 스스로 자격을 보여라. 나와 시합을 하자. 나와 너희들 까마귀가 동시에 출발하여 하늘의 끝, 영광의 아샤스에게 먼저 도착하는 새가 새들의 왕으로 정해질 것이다.’
까마귀들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새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독수리 왕과 까마귀들의 시합이 시작되었지요. 독수리 왕은 높은 절벽 위에서 천천히 날아올랐지만 까마귀들은 드디어 새들의 왕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에 급하게 날아올랐습니다. 게다가 독수리 왕은 높은 절벽 위에서 날아오르기 때문에 까마귀들은 더욱 서두를 필요가 있었지요. 까마귀들은 마침내 독수리 왕을 앞질러 높은 하늘로 돌진했습니다.
하지만 잠시 후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독수리 왕은 빨리 날아오르는 대신 하늘 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일부러 천천히 날았습니다. 앞질러 가던 까마귀들은 그것을 보지 못했지요. 그들은 조금이라도 빨리 아샤스께 도착할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까마귀들은 태양 근처까지 날아오르고 말 았지요. 태양의 무시무시한 빛은 까마귀들의 날개를 그리고 그 몸을 태워버렸습니다. 너무 뜨거운 태양빛 때문에 까마귀들은 비명을 지르다가 목 이 쉬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결국 까마귀들은 더 이상 날아오르기를 포기하고 도로 지상으로 내려와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아름다운 깃털은 새카맣게 그을렸기에 다른 새들 은 모두 까마귀들을 비웃었지요. 까마귀들은 더 이상 새들의 왕이라고 주장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새들의 법학자인 올빼미가 독수리 왕 역시 아샤스께로 날아오르지는 못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실제로 독수리 왕은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았을 뿐이니까요. 따라서 그 시합에는 승자가 없는 셈이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독수리 왕은 골칫거리이던 까마귀들이 더 이상 아름다운 깃털을 자랑할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에 만족했습니다. 그러나 시합의 승패가 불분명해졌기 때문에 몇몇 새들은 더 이상 독수리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게 되 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피닉스의 좌절이 컸지요. 그가 전달한 시합이 사실은 사기였다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기 행위의 앞잡이가 된 거 죠.
그래서 피닉스는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불꽃 속에 몸을 던졌습니다. 그러자 유피넬과 헬카네스는 피닉스의 정의로운 행동에 감동해서는 그의 저 울대를 부러뜨리고 그의 추를 치워버렸습니다. 그래서 피닉스는 불꽃 속에서 되살아날 수 있었지요. 그 이후로 피닉스는 자신을 불태움으로써 영원 히 되살아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새이면서도 새들의 왕인 독수리 왕의 지배를 받지 않고 유피넬과 헬카네스에게 직접 지배받는 새가 되었습 니다.”
“아아…….”
케이트의 눈물은 어느새 멈춰 있었다. 그녀의 감탄을 들으며 딤라이트는 뿌듯함을 느꼈다.
“아시겠습니까, 레이디 케이트? 하늘로 높이 날아오르면 까마귀처럼 됩니다. 영혼은 상관없지만 우리들처럼 살아 있는 자들은………… 태양빛에 새카맣 게 타버릴 겁니다.”
우리들처럼 살아 있는’이라. 딤라이트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케이트는 확실히 살아 있지만, 과연 나는 살아 있는 건가? 순간 딤라이트는 참을 수 없는 모멸감과 고독감을 느꼈다. 그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딤라이트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에 골몰해 있던 케이트는 급격히 변하는 딤라이트의 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케이트는 굴복하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밤이잖아요.”
케이트의 말을 듣는 순간 딤라이트는 간신히 이성을 되찾았다. 현실감. 딤라이트는 자신이 애타게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고, 그때서야 그것이 무엇 인지를 깨달았다. 현실과의 연결점.
그가 연결되어 있던 시대는 300년 전에 사라졌다. 그는 시간의 고아였다. 하지만 지금 그의 가슴에 깊이 안긴 채 그를 향해 투정 섞인 질문을 해오 고 있는 어린 소녀가 그를 이 현실과 연결해 주었다. 그레이와 무스타파의 경우, 그들은 데스나이트들과 싸우면서 이 시대와 자신을 연결시키는 데 성공했을 것이다. 하지만 엄격한 기사 딤라이트는 증오와 폭력으로써 이 시대에 귀속되는 것을 무의식중에 거부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이제서야 이 시대에 자신의 한 부분을 연결지을 수 있었다. 작고 가냘픈 소녀의 투정에 의해.
딤라이트는 웃으며 말했다.
“날아오르는 동안에 해가 뜰 겁니다. 그렇게 높은 곳이랍니다.”
케이트는 더 이상 항변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긴 이야기를 정신없이 듣고 난 직후라서 다시 울려고 해도 멋적은 기분이 들었다. 어른과 달리 어린 애들에게는 집념이 없다. 열심히 놀고 있다가도 밥 먹으러 달려가면서 노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이 어린애다. 조금만 머리가 굵어지면 식사를 늦게 한 다든지 하는 꾀를 부리게 되고, 그래서 어머니에게 귀를 붙잡혀서 식탁으로 끌려가는 일이 벌어지지만, 어린애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케이트는 고개를 돌려 헐스루인의 갈기를 바라보며 포기하는 음색으로 슬프게 말했다.
“그럼 엄마는 못 보는 거예요?”
“예. 안타깝지만 어머님께서는…..”
무서운 생각이 딤라이트의 뇌리를 타고 흘렀다. 그래서 딤라이트는 말을 맺지 못한 채 케이트의 머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답이 없자 케이트는 이상한 생각에 고개를 돌려 딤라이트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세요, 딤라이트 경?”
“아, 저………….., 어쩌면…………! 아닙니다, 아무것도.”
딤라이트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만일, 만일이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그 만일은 상당히 높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300년 전의 사람인 그도 부활했다. 그렇다면, 케이트의 어머니가 부활하지 못할 까닭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래서, 말해 줬소?”
“아니오.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잘하셨소.”
딤라이트가 공터에서 벌어진 술자리로 돌아왔을 때 주리오 시장과 무스타파는 서로 끌어안은 채 바닥에 나동그라져 있었고 그레이는 그때까지도 땅 바닥에 드러누워 일스 기사단가를 불러대고 있었으며 경비 대장 로터스는 그 노래에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솔로처는 술통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 고, 유일하게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기도 했다.
딤라이트는 반 병쯤 남아 있는 술병을 들고 잔을 찾다가 포기하고는 술병째 한 모금 들이켰다.
“잘한 거라니, 왜 그렇습니까?”
“응? 왜 그러냐니, 모르신단 말이오?”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녀의 어머니가 언제 부활할지 모르기 때문에 일찍부터 희망을 주고 싶지는 않아서 입을 다물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마법사 님이나 저, 그리고 저 친구들의 경우를 보더라도 그녀의 어머니가 부활할 확률은 높지 않습니까?”
솔로처는 찌푸린 눈으로 딤라이트를 바라보다가 술통에 기대었던 등을 일으켜 자세를 바로했다. 그러고는 딤라이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확률이야 내 알 바 아니오. 내가 하고픈 말은, 그것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거요.”
“예? 아……!”
“수도에서 온 그 샌슨이라는 청년이 말했소. 이 사태를 종결시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그리고 나 또한 찬성이오. 저 데스나이트들을 원 래의 시간으로 돌려보내는 것뿐만 아니라 나와 당신네들도 돌아가야 된단 말이오. 그리고, 그 케이트라는 소녀의 어머니 역시.”
“그렇군요. 잠시 잊었습니다.”
딤라이트는 분통한 어조로 말했다. 솔로처는 그 분통함에 잠시 놀라다가 말했다.
“흐음. 당신도 그레이나 무스타파처럼 이 시대에 점점 정을 붙여가는 모양이군. 아무래도 한 마디 따끔하게 해둬야 할 필요가 있겠는데.”
“괜찮습니다. 이미 이해했으니 말씀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래요? 좋소. 잊지 마시오. 우리는 사라져야 할 사람들이오.”
연륜이라는 것은 무시할 수가 없군. 딤라이트는 솔로처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레이와 비슷할 정도로 유쾌함을 유지하고 있는 솔로처였지만, 그는 달랐다. 그레이가 아무 생각 없이 부활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솔로처 역시 부활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즐기고 있기는 하지만, 그레이와는 달리 다 시 소멸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는 않고 있었던 것이다.
‘억울한 일이군.’
딤라이트는 쓰게 미소지었다.
‘조금 전에야 비로소 이 시대에 내 마음을 허락했는데, 그러자마자 그것을 다시 끊어내야 한다는 것 을 알게 되는군.’
딤라이트는 다시 술병을 들어올리다가 뿌옇게 밝아오는 동녘 하늘을 보았다. 그는 간단한 한 마디로 자신을 정리했다.
‘허허로운 밤이 지나가는구나.’
“키티 데시.”
“주리 시장님이라고 부를 거예요.”
“그건 곤란하지. 좋아, 케이트 데솔로. 왜 밤에 침실을 빠져나온 거지? 다이앤이 걱정하다 못해 까무러치게 만들었잖니.”
그 점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었다. 실제로 딤라이트와 케이트가 땅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시장 관사는 혼절한 다이앤 때문에 벌집을 쑤셔놓은 듯한 분위기였다. 다이앤은 틀림없이 그녀가 데스나이트에게 홀려서 스스로 침실 창문으로 나간 거라고 주장하며 쓰러졌고 시장 관사의 당황한 사람들에 게 그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을 발휘했다.
“딤라이트 경은 페가수스를 가지고 있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하늘에 올라가서 엄마를 만나고 싶었어요.’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딤라이트에게 이미 자초지종을 들었던 주리오 시장은 가볍게 고개를 끄 덕였다. 케이트는 무리하게 끊어낸 말을 힘들게 이었다.
“시장님, 딤라이트 경한테서 페가수스를 사면 안 돼요?”
“사라고? 내가?”
켄턴에 있는 물건들 중 현금화할 수 있는 것을 모두 현금으로 바꾼다면 혹 살 수 있을지도 모르지. 주리오 시장은 기막힌 표정으로 케이트를 바라보 았다. 하지만 케이트는 그런 신통한 생각을 해낸 자신을 기특하게 여기는 듯한 표정으로 시장을 올려다보았다.
“예. 시장님이 페가수스를 타시면 멋있으실 거예요. 사냥 나가실 때도 페가수스를 타고 사냥하시면 훨씬 안전할 테고, 출장나가실 때도 페가수스를 타면 훨씬 빨리 오가실 수 있을 테고. 너무 좋잖아요.”
“……그리고, 가끔 너도 태워주고?”
“헤헤헤.”
“키티 데시. 페가수스는 몹시 비싸.”
“얼마나 비싼데요?”
주리오 시장은 잠깐 고민하다가 빠르게 말했다. “1000셀.”
웃기는 소리다. 괜찮은 군마가 100셀인데 페가수스가 겨우 1000셀일 리가 없다(말 열 마리 값으로 페가수스를 살 수 있다면 누가 안 사겠는가?). 하지만 주 리오 시장은 50퍼셀에 거뜬히 양심을 팔 수도 있을 여덟 살짜리 소녀에게 이해시킬 수 있는 가장 큰 숫자로서 1000셀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케이트는 말문이 막힌다는 표정으로 주리오 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 얼굴을 보고 주리오 시장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오전 공부를 마치고 나거든 적당한 시간에 다이앤과 함께 성벽으로 나오너라.”
“예?”
“천공의 3기사들 중 무스타파 경과 그레이 경이 너를 보고 싶어 하시더구나. 마땅히 집으로 초청해야 되겠지만, 그분들께서는 잠시도 성벽 주위를 떠나지 않으시겠다고 하시니 부득이한 일이다. 실례되지 않도록 깨끗하고 얌전하게 차려입고…………….”
“다이앤! 다이애애앤! 나 성벽으로 간대요오오! 다이애앤!”
케이트는 주리오 시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방을 뛰쳐나가며 고함을 질렀다. 쾅! 케이트가 달려나가며 걷어찬 문에서 울려퍼진 충격음에 주리오 시 장은 눈을 질끈 감았다.
케이트가 그날 오전 동안 보여준 산만함은 가공할 수준이었다. 케이트는 두 팔을 휘두르며 복도를 달렸고 빨래 바구니를 뒤집어엎었으며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주저앉았다. 문이 부서져라 요란하게 열어젖히고는 닫는 것을 잊었으며 공부 시간엔 책장을 찢어먹고 나서는 책 위로 상체를 던져 책을 가리고 ‘어디서 이상한 소리 나지 않았어?’ 등의 가소로운 연막 전술을 펼쳐 다이앤을 미치게 만들었다.
결국 파김치가 된 다이앤은 신발 위에 양말을 신으려 드는 케이트를 말려가며 간신히 외출복을 입히는 데 성공했다.
“아가씨, 아가씨. 부디 얌전히 처신하셔야 합니다. 위대하신 대마법사님과 고귀하신 기사님들 앞에서 시장님께 누가 되는 행동을 하셔서는 안 돼 요.”
“알았어요, 알았어. 가요!”
다이앤은 포기하는 심정으로 케이트의 나들이 시중을 들 채비를 갖췄다. 하지만 케이트가 보기에, 아니 다른 누가 보더라도 다이앤의 외출 준비는 너무 오래 걸렸다. 마음속에 머나먼 일출의 나라의 기사들이 오락가락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이앤은 케이트와 마찬가지였다. 결국 흥분한 케이트와 그녀만큼이나 흥분했지만 속으로 흥분을 감추고 있는 다이앤의 외출은 티 타임이 되기 조금 전에 가까스로 시작되었다.
봄의 켄턴은 메마른 편이다. 이 일대 전반이 그렇지만, 갈색 산맥을 넘어서는 북풍이 사우스그레이드의 황토 위로 건조한 호흡을 뿜어대기 때문이 다. 햇살을 가리기 위해 커다란 모자를 눌러 쓴 다이앤은 바람에 모자가 날려가지 않도록 기를 쓰고 눌러대면서, 동시에 팔짝팔짝 뛰어다니는 케이트 를 붙잡아 얌전히 걸리느라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반면 케이트는 따가운 봄 햇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씩씩하게 켄턴의 대로를 걸어갔다. 그녀들의 모습을 본 시민들은 모두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성벽에 도착하자, 다이앤은 공기마저도 달라지는 기분을 느끼고 숨을 삼켰다.
‘맙소사!’
급하게 설치된 노천 용광로에서는 칼날을 벼리느라 요란한 망치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리고 목책을 만들기 위해 시청 창고에서 목재와 밧줄, 철사, 못 등을 바리바리 실어오는 수레들, 밀과 부식 등의 병참을 실어나르는 수레들이 삐걱거렸고 수레를 끄는 말과 소들이 요란하게 울어댔다. 한쪽 옆에 선 경비 대원들이 대오를 맞춰 앉은 채 소대장급 지휘관들에게 전술 지시를 받으며 요란하게 떠들어대고 있었고, 다른 편에는 레티의 프리스트들이 공터에 부상자들을 눕혀놓고 보살피고 있었다. 파괴신의 프리스트들이 부상자를 돌보는 것은 언뜻 보기에도 퍽이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지만 다 이앤은 그 모습이 우습다는 생각을 할 정신이 없었다.
이 소란스러운 곳을 품위 있게 걸어간다는 것은 다이앤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몹시 혼란스러워진 다이앤은 케이트의 손을 필사적으로 움켜쥔 채 그 사이를 강행 돌파하기 시작했다. 케이트는 아무 항의도 못하고 질질 끌려갔다.
정신 사납게 주위를 둘러보며 걸어가던 다이앤은 간신히 눈에 익은 사람 하나를 발견했다. 수건으로 팔을 동여맨 채 그 혼란스러운 광장을 유유하게 걸어가는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사, 사집관니이임! 사집관님!”
“어라? 다이앤 아닌가. 그리고 케이트 양도?”
히든보리 사집관은 걸음을 멈추고 두 사람을 기다렸다. 다이앤은 루스 휴레인 전투에서 레베카 휴레인 장군이 가이너 카쉬냅을 보았을 때 저랬으랴 싶을 정도로 기쁜 얼굴로 히든보리 사집관에게 다가갔다.
“그러다 넘어지겠군. 진정하게. 그런데 여긴 웬일인가?”
히든보리 사집관은 ‘전쟁 준비 때문에 정신 없는 야전 사령부에 어린애를 데리고 오다니 네가 제정신이냐?’ 하는 얼굴로 다이앤을 바라보았다. 하지 만 히든보리 사집관을 만나서 너무너무 기쁜 다이앤은 그 눈길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헐떡거리며 말했다.
“아, 시, 시장님께서 부르셨습니다. 처, 천공의 기사님들께 케이트 아가씨를 소개하신다고…………….”
“뭐라고? 아니, 그 말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전선으로 오라고 하시더란 말이냐?”
“예, 예! 물론 시장님께서는 집으로 초대하고 싶으셨지만 천공의 기사들이 성벽 옆을 떠나지 않으시겠다고 하셔서요.”
“흐음. 그래? 아아, 케이트 양. 아는 척 안 했다고 입술이 세 배는 되게 부풀었군. 오크처럼 보이니 입술 집어넣게나.”
“히든보리 사집관님!”
히든보리 사집관은 껄껄 웃으며 두 사람을 에스코트했다. 사집관의 뒤를 따라 걸어가며 다이앤은 한결 안정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볼 여유를 되찾 았고, 그래서 눈살을 찌푸렸다.
평상시에도 경비 대원들의 손에 들린 무기들은 섬뜩한 빛을 뿜는다. 살육을 목적으로 하는 도구의 숙명 때문에 무기들의 주위에는 가까이하기 힘든, 싫고도 끔찍하며 그래서 오히려 매혹적이기도 한 기운이 떠다닌다. 하물며 데스나이트들에 대항하는 전투 때문에 모든 무기들이 거리낌 없이 봄볕 아래 드러난 지금에야. 켄턴 성벽 아래에는 무서울 정도의 살기가 감돌고 있었다. 무기들의 반사광은 눈이 부셨고, 동시에 형체 없는 피비린내가 섬 뜩하게 느껴졌다. 다이앤은 호흡을 낮췄다.
다이앤은 그럴 수 있다면 케이트의 두 눈을 가린 다음 시장님에게 찾아가고 싶었다. 케이트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신음하는 부상병이나 용광로 에서 튀어나는 불티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글이글 달아오른 아궁이에서 솟아오르는 아지랑이가 시야를 흐렸고 어디서 나오는 건지 알 수 없는 후 텁지근한 열기는 다이앤을 움츠러들게 만들었지만, 케이트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씻거나 옷을 갈아입는 사치는 생각도 할 수 없었기에 흙바닥에 그냥 주저앉은 채 지저분한 모습으로 쉬고 있던 경비 대원들은 다이앤과 케이트를 향 하여 미소를 보냈다. 다이앤은 그 미소에서도 치가 떨리는 공포를 느낄 지경이었으나 케이트는 상냥하게 마주 인사를 보냈다. 예의바른 그 행동을 뭐 라 말릴 수는 없었기에 다이앤은 자주 멈춰 서서는 참을성 어린 표정으로 케이트가 인사를 끝내기를 기다리곤 해야 했다.
“겁이 없어. 어린애 같지 않은걸.”
“그렇군. 딤라이트가 순순히 헐스루인에 태운 것은 저 꼬마의 과감성 때문일 것 같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마법사님?”
“글쎄올시다. 나는 애를 키워본 경험이 없어서 어린애의 과감성이 어떤 건지 모르겠는데. 어린애의 과감성이라는 것이 천공의 기사도 억누를 정도 인거요?”
성벽 위에서 저 아래쪽의 다이앤과 케이트를 내려다보면서 그레이와 무스타파, 그리고 솔로처는 이런 농담을 주고받았다.
세 사람은 딤라이트에게 들리도록 일부러 조금 높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지만 딤라이트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척하며 성 바깥의 들판을 노려보 고 있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딤라이트는 지금 데스나이트가 쳐들어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조금 후 그런 생각을 떠올린 자신을 깊이 반성하긴 했지만.
“어이구, 사집관님. 이제 거동하시는군요. 반갑습니다. 게다가 미녀 두 분까지 동반하셔서 올라오시니 반가움이 두 배올시다.”
그레이는 성벽 위로 올라오는 히든보리에게 넉살좋게 인사했다. 히든보리는 점잖게 목례했다.
“네 분의 활약상에 온 켄턴이 떠들썩하니 이 몸도 침대에 누워 있을 수가 없더군요. 여기 이 소녀는 시장님의 막역한 친구셨던 토머스 데솔로 군의 따님이신 케이트 데솔로 양입니다. 그리고 여기 이 아가씨는 시장님의 고용인인 다이앤이라고 합니다.”
케이트는 감탄한 표정으로 천공의 기사들을 올려다보았다. 아직은 덜 성숙한 그녀의 남자 감식안으로도 천공의 기사 그레이와 무스타파의, 상당한 위압감을 동반한 매력을 느낄 수는 있었다. 훨씬 뛰어난 감식안을 가지고 있는 다이앤의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다. 천공의 기사들에게는 원숙함과 활 력이 동시에 존재하며, 유쾌함과 엄격함이 한데 어우러져 있었다.
그레이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안녕, 아가씨? 나는 그레이 휠드런이라고 하지요. 착한 사람을 좋아하고 나쁜 사람은 더 좋아하는 성격입니다. 괴롭혀줄 수 있으니까.”
케이트는 무릎을 살짝 구부리며 인사했다.
“반가워요. 그리폰을 타시는 기사님이시죠? 저, 그리폰은 어디까지 날아오를 수 있나요?”
그레이는 딤라이트에게 별다른 이야기를 듣지 못했던 터라 사실대로 말했다.
“어디까지? 하늘나라까지라도 오를 수 있지요.”
그레이의 ‘사실’은 농담뿐이다. 하지만 케이트로서는 눈이 번쩍 뜨이는 이야기였다.
“어머, 태양 때문에 까맣게 타지 않아요?”
“아! 잘 아는군요. 그게 항상 문제지요. 간혹 너무 신나게 날아오르다가 머리카락을 태워먹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레이는 이렇게 말하고는 자기 농담에 스스로 웃어버렸다. 무스타파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되지도 않는 농담 하고 웃기는. 케이트 데솔로 양, 나는 무스타파 하빈스요.”
“예. 와이번의 기사님이시죠? 그런데 그 와이번은 어디 있나요?”
“아이라 말이오? 식사하러 보냈소. 근처 숲에서 사냥을 하고 돌아올 거요.”
“네…………. 와이번은 어디까지 날아오르나요?”
“그렇게 높이 날지는 못합니다. 아이라는 고소 공포증이 있어 높은 곳을 싫어합니다.”
다이앤과 히든보리는 터지는 웃음을 억누르기 위해 애썼지만 케이트는 ‘그런가?’ 하는 표정을 지었다. 낄낄거리고 있던 그레이는 허리를 숙여 케이 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런데 케이트 아가씨는 왜 높이 나는 것에 관심을 가지는 겁니까? 하늘에 올라가면, 거기엔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결국 땅만 보게 됩니다. 그래서 높이 난다는 것은 별로 흥미 있는 일이 못 되지요.’
“어머니를 보고 싶어서요.”
그레이의 입가에서 웃음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웃음은 조금 경박하기까지 하던 조금 전의 웃음과는 달랐다. 그레이는 무릎을 짚은 채 상 냥하게 말했다.
“어머니께서 하늘에 계십니까?”
“예. 그래요. 저는 무덤에 있는 줄 알았는데 다이앤이 말해줬어요. 하늘로 올라가셨대요. 그래서 무덤에는 이제 찾아가지 않아요.”
그레이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다이앤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느닷없이 사라지곤 했던 어린 소녀 케이트는 그때마다 어머니의 무덤 옆에서 울다 잠 든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실성한 모습으로 그녀를 찾아다니던 다이앤은 무덤가에서 케이트를 부둥켜안은 채 어머니는 하늘에 계시니 더 이상 무덤으 로 찾아가지는 말라고 외쳤고, 그러고 나서부터 케이트가 홀연히 사라지는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어머니는 하늘에 계실 겁니다. 음…………, 케이트 양. 케이트 양은 시장님의 저택에 살고 있지요? 그럼 시장님의 서재나 집무실에 마음대로 출입합니까?”
“예? 그럼 혼나는데요.”
“맞습니다. 그리고 케이트 양이나 나 같은 사람들은 저 위에 마음대로 출입하면 안 되는 겁니다. 저 위에는(그레이는 손가락을 뻗어 익살스럽게 하늘을 가 리켰다.) 케이트 양의 어머니뿐만 아니라 신들이 거주하고 계십니다. 신들의 땅에 사람이 함부로 드나들면 신들께서 가만히 계시지 않습니다. 알겠습니까?”
케이트는 이 설명이 마음에 들었다. 어떤 프리스트가 인간의 집무실들과 신들의 공간을 같은 것으로 취급하는 그레이의 설명을 들었다면 고개를 가 로저을지도 모르지만, 케이트에게는 단숨에 이해되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그 설명을 이해했기 때문에 케이트는 그레이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몰래 올라가면 되잖아요.”
·시장님의 서재에 몰래 드나드시는군요?”
“어떻게 그런 말을! 당치 않은 말씀이세요. 저를 어떤 여자로 보시는 거예요?”
케이트는 정말 명예를 침범당한 레이디처럼 턱을 들어올린 채 뾰족한 음성으로 말했고 그래서 그레이는 껄껄거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아, 오해를 사과드립니다. 어쨌든 말입니다. 신들의 눈을 피해 몰래 올라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신이죠. 아시겠습니까?”
케이트는 풀죽은 표정이 되었다. 딤라이트도 그레이도 설명 방식은 달랐지만 모두 같은 대답을 했다. 그것은 불가능해요. 하면 안 돼요. 저기 구석에 가 서 있어요! 케이트는 체념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끄러움을 알아요.”
그레이는 이 대답에 얼이 빠져버렸고 멀리서 안 듣는 척하고 있던 딤라이트는 킥 소리를 내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솔로처는 케이트에 대한 감 상을 간단하게 말했다.
“귀여운 아가씨군.”
케이트는 솔로처를 향해 화사한 웃음을 돌려주었다. 그러자 그레이는 빙긋 웃으며 멀리 서 있던 딤라이트의 등을 향해 고함질렀다.
“어이, 딤라이트! 한 10년만 기다리면 되겠군. 그러면 이 아가씨도 18세가 될 거란 말이야?”
“들을 가치도 없는 잡담을 들려주려고 애쓰지 말게.”
딤라이트는 말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그레이의 말을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몸을 돌리지도 않은 채 말했던 것이다. 그레이는 껄껄거리 며 몸을 돌려서는 흉벽 위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딤라이트는 행복하겠어. 부활한 보람이 있으니까. 저렇게 귀여운 아가씨와 말 위에 같이 타보기도 하고 말이야. 하하하!”
“그만하라고 했어.”
딤라이트는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레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솔로처에게 말했다.
“흐으음. 그러고 보니 300년 만에 부활했는데 하는 짓이 싸움뿐이라는 것도 문제군요, 솔로처.”
솔로처는 눈썹을 조금 찌푸리며 말했다.
“그래서?”
“그래서라니요. 아무런 보람이 없지 않습니까.”
“보람을 찾기 위해 뭘 하겠다는 거요, 그레이? 잊지 말아줬으면 하는데, 우리는 원래부터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오. 저기 데스나이트들 을 대상으로는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지만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도움이든 피해든 절대로 주어서는 안 되오. 왜냐하면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자들 이니까.”
그레이는 고개를 돌려 잠시 아무 말 없이 솔로처를 바라보았다. 솔로처는 그 눈빛에서 불안함을 느꼈다. 그 눈빛은 그가 알고 있던 그레이의 눈이 아 니었다. 비록 여전히 미소 띤 얼굴이긴 했지만 솔로처는 그 미소 너머의 무언가를 포착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꽤나 끔찍한 것 01…….
“아아, 맞아요, 솔로처 님. 하지만 이 시대의 술을 좀 소모시키는 것은 봐주시겠습니까? 이런! 그러고 보니 벌써 어젯저녁에 많이 소모했군요. 하하 하.”
그레이의 웃음을 보며 솔로처는 자신이 느낀 기분에 대한 확신을 조금 잃었다. 내가 본 게 뭐지? 잘못 본 건가. 그레이는 그대로 몸을 돌려 케이트를 상대로 노닥거리면서 동시에 무스타파를 괴롭혀대기 시작했다.
“레이디 케이트. 용맹한 무스타파 경의 첫 번째 승리에 대해 이야기해 드릴까요? 그의 나이 15세 때의 일이었습니다. 아마도 가을이 허락한 낙엽이 그의 마음속에서도 떨어지고 있었으리라 여겨지는 어느 날, 무스타파는 대공비의 시녀 한 명에게 완전히 넋이 나가버렸답니다………….”
“그레이 월드런!”
그레이는 천공의 기사의 우두머리의 권한을 십분 발휘하여 무스타파의 항의를 개짖는 소리로 만들어버리고는 야음을 틈타 마치 자객처럼, 그러나 대거 대신 장미 한 송이를 입에 물고 대공비의 궁궐에 침투한 무스타파의 모험담을 끝까지 이야기했다. 그런 뒤에도 그레이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줄 기차게 해대어 결국 다이앤으로 하여금 웃다가 히든보리 사집관의 팔을 두드리게 만들었다. “으아아, 내 팔!” 히든보리 사집관은 간신히 기절하지는 않았지만 시체 같은 얼굴이 되어버렸다.
솔로처는 그 모든 상황을 바라보면서까지 더 의심을 할 수는 없었다.
‘좋아, 좀더 지켜보자. 뭔가 있긴 하지만 확실치는 않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