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 워커 3권 – 5장 거짓된 사랑의 진실 (하) 7

퓨처 워커 3권 – 5장 거짓된 사랑의 진실 (하) 7


7

미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풀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에도 신경을 쓰는 극히 고요한 동작이었다.

모닥불은 이미 가느다란 연기만 피워올리고 있어 주위는 캄캄하기 짝이 없었다. 후작의 일행은 모두 잠들어 있었고, 불침번을 서고 있던 니크 역시 꾸벅꾸벅 조는 것으로서 다른 일행들과의 연대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잠든 척하며 30분 이상 니크를 훔쳐보고 있던 미는 확신을 가지고 일어났다. 니 크는 깨어나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미는 잠시 주위의 남자들을 바라보았다.

떠돌이, 도망자, 반역자, 현상 붙은 사내들. 낭만을 붙이려고 들면 이보다 더한 사내들이 없겠지만, 남자들은 안락함과는 거리가 먼 야외에서 피로에 절은 모습으로 잠들어 있었다. 미는 문득 이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러면서도 왜 불쌍한 건지 이유를 말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일을 하고 있는 자들이었으니까.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잘 있어요. 미는 갈 거예요.’

미는 드러누운 궤헤른과 가이버의 사이를 조심스럽게 걸어나왔다. 그 반대편, 즉 할슈타일 후작의 곁을 지나면 졸고 있는 니크의 시야에서 벗어나기 가 훨씬 쉽겠지만 미는 후작의 곁을 걸어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미는 숨소리마저 죽인 채 니크의 곁을 지나 걸어갔다.

‘심장아, 미의 심장아. 부탁이니 조용히 뛰렴. 이분들 주무시는 데 방해되잖니.’

미는 왼쪽 가슴을 꼭 내리누른 채 니크의 곁을 지나쳤다. 발끝으로 걷는 조심스러운 걸음걸이로 니크의 곁을 지나치면서 미는 호흡을 멈췄다. 마침 내 그들이 야영지로 삼고 있는 공터에서 벗어나온 미는 거대한 나무 뒤로 돌아가는 데 성공했다. 미는 나무에 등을 기대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자유에 관심이 없었기에, 마침내 자유를 찾았다는 해방감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어려운 일을 해낸 뒤의 안도감뿐이었다. 미는 딱딱 한 나무에 등을 기댄 채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곧 숲속을 걷기 시작했다.

어두운 밤의 숲속은 고요하면서, 동시에 온갖 것들이 잠꼬대를 하고 있었다. 미는 그 사이를 산책이라도 하는 걸음걸이로 느긋하게 걸어갔다. 셀레 나는 이미 잠들었지만 루미너스는 아직 중천에 도달하지 않은 시각, 밤은 스스로의 고요함에 취한 채 조용히 뒤척이고 있었다.

미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런데 여긴 어딜까. 그리고 어느 방향이 턴빌일까?’

미는 자기 생각에 피식 웃어버렸다. 이래가지고서야 똑똑한 도망자라고 할 수 있을까. 미는 나무 위로 올라가서 주위를 살펴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래서 미는 주위를 둘러보며 높은 나무를 골랐다. 곧 다른 나무들보다 월등히 높은 나무 하나가 미의 눈에 들어왔다. 저 위에 올라가서 주위를 보면 턴빌의 불빛이 보일 거야.

미는 그 나무를 목표로 삼아 걸어갔다.

조금 후 미는 나무 아래에 도착했다. 나무 표면을 만져본 미는 조금 힘들겠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손 닿는 곳에는 가지가 없었다. 나무를 타고 조금 올라간 다음에야 첫 번째 가지를 붙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다행히 우툴두툴한 나무껍질 덕에 미끄러지는 일은 모면할 수 있겠지만, 퍽이나 힘든 일 이 될 것은 분명했다.

미는 쭈그리고 앉아서 땅바닥에 손을 문질러 흙을 묻혔다.

밤의 숲속을 지나치는 어떤 여행자가 나무 아래 쭈그리고 앉아 흙바닥을 만지작거리는 그녀의 모습을 보았다면 별 무리 없이 엘프를 보았다고 생각 해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여행자는 없었고, 그래서 미는 두 손에 흙을 묻힌 다음 나무 표면에 손을 가져갔다.

“뭐 하려는 거지.”

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등 뒤 10큐빗 정도의 거리에 시커먼 남자의 그림자가 서 있었다. 미는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무에… 올라가려고요, 후작님.”

나무 그림자 속에 숨은 후작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다. 희미하게 떠오르기 시작하는 루미너스의 빛은 후작의 발끝을 비추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 고 후작과 미 사이의 땅에는 흩뿌려진 달빛이 푸르스름한 융단을 깔아놓은 것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넌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이군.”

“그러신가요.”

후작은 혁대에 손가락을 건 채 비스듬하게 서서 미를 바라보았다. 달빛을 받은 칼고리가 후작의 허리에서 예리한 빛을 내고 있었다.

“탈출까지는 납득할 수 있어. 납치당했으니 탈출한다. 이건 이해하기 쉬운 행동이고 납치자인 나도 승낙할 수는 없지만 비난할 수도 없는 합리적인 행동이야. 보통 하는 식으로는 ‘나라도 그러겠다’는 말이 적당하겠군. 그래서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네 뒤를 따라오기 시작했지.”

“그랬나요.”

“그래. 그런데 탈출에 성공하고 나서 네가 보여준 최초의 행동부터 내 부아를 돋우더군. 너는 나무에 기대어 가만히 서 있었어. 왜지.” 

“숨을 참고 걸어나와서…………….”

“그런 것 같더군.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라면 조금이라도 더 멀어지려고 하지, 호흡을 가누거나 하지는 않아. 두 번째. 왜 걸었지.”

“예? 왜 걷다니요?”

“다른 사람들이라면 그럴 때는 달릴 것이다. 나뭇가지가 팔을 할퀴든, 돌부리에 걸려 쓰러져 무릎이 깨지든 아랑곳하지 않고 말이지. 어쨌든 달빛 아래 산책하는 그 따위 걸음걸이를 선택하지는 않아. 하지만 너는 걷더군.”

“a…….”

“그리고, 왜 나무에 올라가지.”

“턴빌이 어디 있나 보려고요.”

“역시 마찬가지야. 보통의 도망자들은 고립되기 쉬운 나무 위 같은 곳으로 올라가지는 않아. 추적자가 나무 아래를 포위해 버리면 날지 못하는 바에 야 어떻게 도망갈 생각인가. 어쨌든 도망 직후부터 너는 나라면 절대 그러지 않을 행동만 했어.”

“그렇네요. 미는 참 수준 미달의 도망자였어요.”

미는 고개를 끄덕였고 후작은 그런 그녀를 조용히 노려보았다. 반성을 끝낸 미는 다른 의문 하나를 떠올렸다.

“그런데 후작님은 왜 미를 조용히 따라오신 거죠? 도망치게 해주시려고요?”

“아니.”

“미가 어떠어떠한 바보짓을 하는지 감상하고 싶으셨나요?”

“아니.”

“도망치게 해주실 것도 아니고 미가 무슨 짓을 하는지 두고 보자는 것도 아니셨다면 일찌감치 미를 잡으셔야지요. 후작님도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 을 하시네요.”

“내게는 이유가 있어. 너도 이해할 만한.”

“이유가 뭔데요?”

후작은 갑자기 나무 그늘에서 앞으로 걸어나왔다. 미는 달빛 아래 후작의 모습이 다리에서부터 천천히 나타나는 것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후작은 월광보다 푸른 눈으로 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다른 자의 눈이 없는 곳에서 너와 할 일이 있다.”

“미와……, 뭘?”

후작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미는 후작이 보통 이야기를 나누기 적당한 거리보다 더 가까운 곳까지 접근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손이 닿을 정도 의 거리까지, 아니, 그보다………….

후작은 미의 허리를 붙잡아 끌어당겼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느닷없이 후작의 가슴에 부딪힌 미는 작게 비명을 질렀다. “아앗!” 미는 두 손으로 후작의 가슴을 밀어내려고 애를 썼지만 그녀 의 허리를 감아쥔 후작의 팔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힘의 차이는 단숨에 판가름났고, 미는 무력한 얼굴로 후작을 올려다보았다.

“후작님? 왜 이러세요?”

후작은 미를 내려다보았다. 그 얼굴에는 후작이 기대하던 표정이 떠오르지 않았다. 작은 얼굴 가득한 의문만이 후작을 향해 있었다.

“야망이 있을 때 사람들이 선택하는 도구는 다양하지. 어떤 녀석은 돈을, 어떤 녀석은 지위를, 어떤 녀석은 무력을 원한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사람이다. 사람들을 가지면 그들이 돈을 벌거나 권위를 가져오거나 나를 위해 싸워줄 수 있으니까. 이건 합리적이야. 인간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인간에 맞춰서 만들어진 것이 인간 세계니까. 결국 인간 세계에서 가장 유용한 도구는 인간 자신이다. 그래 서 나는 사람을 원한다.”

미는 아무 대답 없이 후작을 올려다보았다. 후작의 얼굴이 미를 향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너를 원해.”

후작의 팔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미는 숨이 막혀오는 고통 속에서 후작의 체온을 그대로 감당해야 했다. 미는 답답함과 뜨거움에 헐떡이며 말했 다.

“미를요?”

“너는 미래를 볼 수 있는 자니까. 엉터리 점복술사와는 차원이 다르지.”

“후작님, 말씀드렸잖아요. 미가 보는 미래는………….”

“고정되어 있단 말이지. 하지만 나는 그것을 납득할 수 없어. 그것은 절대로 바꿀 수 없는 것인가.”

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슬픈 눈으로 후작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후작은 그 커다란 눈 속에 담긴 무엇인가를 찾아내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얼굴 을 바싹 들이댔다.

“말하지 않는군. 분명 무언가가 있어.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라도 나는 널 가져야겠어. 아니, 알 수 없어도 상관없어. 나는 내가 모르는 어디에 내 미래를 다 꿰뚫어보는 자가 있도록 내버려둘 수가 없어. 내가 이용할 수 없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그자를 이용해서 나를 공격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단 말이다. 그래서 그자를 내 곁에 두고 내 것으로 만들어야겠어. 알았나.”

미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나 후작의 다른 팔이 재빨리 미의 등 뒤로 돌아와 뒷머리를 움켜잡고 턱을 들게 만들었다. 강제로 고개를 들게 된 미는 코앞까지 다가온 후작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방랑 생활 때문에 수척해진 얼굴에는 꺼슬꺼슬한 수염이 돋아 있었다. 움푹 들어간 볼 위로 퀭한 두 눈 이 무서운 빛을 뿜어내며 미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리고 후작의 메마르고 갈라진 입술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미는 눈을 감으며 신음처럼 말했다.

“할슈타일 후…….”

미의 말의 끝부분은 후작의 입 안으로 사라져갔다. 꼭 감은 미의 눈꺼풀 안쪽으로 무수한 빛들이 떠다녔다. 미의 여린 입술을 유린하는 후작의 입술 과 혀에서는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후작은 천천히, 집요하게 미의 입술을 탐색했다. 마치 미의 입술 모양을 그의 혀와 입술에 새겨두 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집요하고 긴 키스를 끝낸 할슈타일 후작은 고개를 들어 미를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꼭 감은 미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입술을 꼭 다문 채 후작의 난폭한 키스에 저항한 그녀의 입 주위는 온통 뒤틀려 있었다.

후작은 미를 쓰러뜨렸다.

눈을 감고 있던 미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땅바닥에 쓰러졌다. 무력한 모습으로 쓰러진 미의 몸 위로 허리를 숙인 후작은 왼손으로 미의 두 팔을 움켜쥐어 위로 밀어붙이고 오른손으로는 그녀의 턱을 붙잡았다. 미는 눈을 감은 채 반대편으로 고개를 꺾었다. 하지만 후작은 손에 힘을 주어 미로 하여금 다시 자신을 쳐다보게 만들었다.

“눈을 떠.”

미는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후작을 올려다보았다.

“연인이 있나.”

“예.”

“사랑하나.”

“예.”

후작은 피식 웃었다.

“사랑한다고. 네가 웃기지도 않는군.”

“정말로 사랑해요. 미의 목숨보다도 더………….”

“그와 결혼하나.”

미는 당혹한 표정으로 후작을 바라보았다. 후작의 눈은 형형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보았을 테지. 말해라. 그와 결혼하나.”

“결혼해요. 그리고 4년 후 그를 잃게 되어요. 그를 잃은 다음 아기를 낳으며 미도 죽어요. 이제 만족하세요?”

“만족해. 그 녀석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이군.”

“아니에요. 미는 정말로 쳉을……..”

“그렇게 정해져 있단 말이지.”

“예?”

미의 턱을 부여잡고 있던 후작의 손이 옆으로 움직였다. 후작은 미의 볼과 귀에 이르는 선을 천천히 어루만지며 말했다.

“연극이군. 여주인공 미. 남주인공 쳉. 대본에는 그렇게 적혀 있지. ‘여주인공 미는 남주인공 쳉을 사랑한다.’ 그러니까 너는 정해진 대본대로 쳉을 사랑하는군. 그게 네 일생의 사랑인가.”

무한한 경악이 담긴 미의 두 눈이 할슈타일 후작을 바라보았다. 후작은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말해라. 너는 그를 사랑하기도 전에 그를 사랑하는 네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내 말이 맞는가.”

미는 아무 대답을 못했다. 하지만 후작의 말은 사실이었다. 후작의 입술이 더욱 뒤틀렸다.

“어쩌면 그 녀석을 만나기 전부터 이미 그 녀석을 사랑하게 되는 너를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그리고 정해진 대본에 충실하기 위해 그를 만났을지 도 모르고.”

미는 다시 한번 무언의 긍정을 보내야 했다. 쳉을 처음 만나기 며칠 전, 열세 살의 미는 양을 잃게 될 것을 알았고, 그리고 그 양을 찾으러 가는 도중 에 그녀의 일생의 사랑을 만나게 될 것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퓨처 워커였으니까.

“그게 네 사랑인가. 그게 네 인생인가.”

후작의 입매는 이제 더 일그러질 수도 없을 만큼 일그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오른손은 거침없이 미의 몸을 더듬어내리고 있었다. 자신의 몸을 더듬으며 일그러진 얼굴로 웃고 있는 후작을 보면서도 미는 아무 생각을 떠올리지 못했다. 그게 내 사랑이고, 그게 내 인생인가.

사랑을 느끼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둘이 하나되길 원하기 때문에 결혼하는 것이 아니고, 그를 닮은 생명을 가지고 싶어서 아기를 낳는 것 이 아니다. 그녀는 그것을 보았고,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거기에는 의심이나 회의가 끼어들 틈이 없다. 그녀가 보는 미래는 현실만큼이 나 뚜렷하다. 보통 사람들이 현실을 부정할 수 없는 것처럼 그녀는 미래를 부정할 수 없다.

그것은 그녀와 강하게 연결된 것, 아니, 그녀 자신이므로.

“저리 가요!”

미는 무섭게 몸부림치며 후작을 밀어냈다. 칼에 베인 가장 사나운 오크라도 이렇게 거칠게 움직이지는 못했을 것이다. 후작은 뒤로 조금 물러났다가 곧장 손을 들어올렸다.

“너!”

미는 눈을 감지 않았다. 그녀는 들어올려진 후작의 손바닥을 보지도 않았다. 대신 미는 후작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투명하며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운이 가득 서려 있었다.

후작은 갑자기 들어올린 손을 간수하기 어려워졌다.

미의 눈을 들여다보느라 겨우 한 호흡 멈추었을 뿐이지만 벌써 따귀를 올려붙이기는 거북해졌다. 후작은 어쩔 수 없이 옆으로 비켜났고 미는 재빨리 일어나 앉아서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런 미를 보며 후작은 노성을 터뜨렸다.

“너를 인간으로 만들어주겠다는 거다, 이 멍청아!”

미는 후작의 얼굴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후작은 갑자기 미의 두 어깨를 붙잡아 끌어당겼다. 미는 어깨가 부서지는 기분을 느끼며 후작에게 로 끌려갔다. 후작은 미의 두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말했다.

“바보처럼 살다가 바보처럼 죽겠다는 거냐! 나는 네 인생에 의미를 주고 가치를 주겠다는 것이다!”

미는 당황한 표정으로 후작을 바라보며 그의 말을 반복했다.

“의미? 가치요?”

“지금의 네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 정해진 대로 움직이는 것은 자이펀의 노예, 아니, 골렘이라도 그렇게 한다. 그건 사람의 삶이 아니야! 그러 나 만일 내가 널 가진다면, 너는 그 연인과의 결혼도, 그리고 4년 후의 죽음과도 관련이 없어진다. 나는 네게 불확정성을 주겠다는 말이다. 모호성을 주겠다는 말이다! 그것이야말로 살아가는 이유니까! 네 인생의 주사위를 네 손에 쥐어주겠다는 거다!”

후작은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선악의 구분을 제하고 말한다면, 후작은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사람이다. 반역자는 가장 열정적인 자 의 선택이다. 불만을 참아버리는 것이 대개의 경우임을 볼 때 후작은 자신의 의지를 신뢰하고 스스로 미래를 개척하는 사람이다.

그런 후작에게 미래를 볼 수 있는 가공할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운명이 정해 준 대로 살겠다는 미의 모습은 참을 수 없을 정도의 노여움을 일으 켰다. 그것은 그가 경멸하는 버러지들보다도 더 역겨운 모습이었다. 그런 버러지들은 거대한 운명에는 무턱대고 휩쓸리지만 작은 일에는 스스로의 결정권을 유지하고 있다. 자신의 일생을 결정짓는 사랑에 대한 것이라면, 가장 비참한 처지에 있는 자라도 스스로의 의지로 사랑한다. 그 사랑이 결 실을 맺을 수 있는가의 문제는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미는 그것마저도 포기해 버렸다.

“스스로 사랑을 찾지 않고, 스스로 사는 방식을, 그리고 죽음을 선택하지 않는 자에게 도대체 무슨 살아갈 가치가 있다는 거냐! 너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무언가가 정해 준 것을 그대로 따르겠다는 거냐!”

“그래요!”

미는 맞서 고함을 질렀다. 후작은 검게 타오르는 미의 두 눈을 바라보며 아연해했다. 미는 후작을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무언가라고요? 운명을 말씀하시는 거겠죠. 후작님은 운명에도 반역하시려는 건가요? 철저한 반역자시군요!”

이번에는 후작이 미의 흉내를 내게 되었다.

“그래!”

“자가당착에 빠지지 마세요. 미가 미래를 알 수 없게 되면 후작님에겐 미가 쓸모가 없어요.”

할슈타일 후작은 흠칫했다. 미는 자신을 가리켜가며 후작에게 대들듯이 말했다.

“후작님은 미래를 볼 수 있는 미의 능력 때문에 미를 가지고 싶다고 하셨어요. 하지만 그럴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미는 쳉의 것이 되는 미래를 보았 지 후작님의 것이 되는 미래를 보지 않았어요! 그러니 후작님은 미를 가질 수 없어요.”

“왜 안 된다는 거냐. 내가 이대로 널 겁탈하겠다면,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 거냐!”

미는 다시 맞고함을 지를 듯이 턱을 불쑥 쳐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입은 벌어지지 않았다. 후작은 잠시 미의 눈에 불안과 의혹이 감도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미가 입을 열었을 때, 후작은 조금 전까지와는 딴판으로 바뀐 미의 태도에 놀랐다.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미는 고개를 숙이며 체념하듯이 말했다. 후작은 어쩔 수 없이 언성을 낮춰야 했다.

“무슨 말이냐.”

미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였다. 후작은 그녀의 얼굴을 붙잡아 두 눈을 들여다보고 싶었지만 부글부글 끓는 속을 참으며 기다렸다. 마침내 미는 말 했다.

“미가 왜 여행을 나섰는지 아세요?”

“뭐.”

“미는 미래를 볼 수 없게 되었어요.”

미는 후작이 그 말을 이해할 시간을 주기 위해 잠시 기다렸다가 계속 말했다.

“미는 미래를 봐요. 하지만 이제는 볼 수 없게 되었어요. 왜 그럴까요? 미의 능력이 사라졌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에요. 과거의 경우라면 미는 아직도 마음대로 볼 수 있어요. 하지만 미래는 볼 수 없어요. 결국, 그것은 미래가 없어졌다는 의미지요.”

“미래가…………, 없어진다고.”

“예. 그래서 미는 이 사태를 바로잡기 위해서 여행을 나선 거예요. 미래가 없어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네가 말하는 미래라는 것은…………, 사랑하지도 않는 연인과 결혼하고, 고아가 될 아이를 낳는 미래 말이냐.”

후작의 말은 신랄했다. 하지만 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미의 불행이죠.”

“그래서, 너만의 불행이니 감수하겠다고! 그건 위선자들의 어법………”

미는 갑자기 고개를 쳐들었다.

“후작님 자신의 경우를 볼까요?”

“뭐.”

“후작님은 어쩌시겠어요. 미는 조금 전에 미래가 없어진다고 말했어요. 후작님의 미래도 없어지는 거예요. 후작님은 영원히 지금 상태, 즉 도망자의 상태로 있게 되실 거예요.”

‘이거예요.’ 미는 속으로 작게 말했다. ‘바로 이 말을 해드리고 싶었어요, 후작님. 미는 꽤 사악하거든요.’ 그리고 할슈타일 후작의 얼굴은 조각처럼 굳어버렸다. 반문하는 그의 목소리는 미풍보다도 가늘었다.

“뭐라고.”

어느덧 높은 궤도까지 떠오른 루미너스의 달빛으로 미는 후작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충분히 감상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의 높은 언성 때문에 조용 해졌던 숲속도 다시 워석거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미는 후작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후작님은 미래로 화살을 쏘시는 분이지요.”

“무슨 말을…….”

“후작님은 단순히 살기 위해 도망가시는 것은 아니죠? 그런 거라면 깊은 산속에 틀어박히거나 하지 이렇게 공개된 도시에서 불가사의에 도전하지는 않으실 거예요. 후작님에게는 꿈꾸는 미래가 있겠지요. 그것이 복수일지 야망일지 아니면 만인을 위한 새로운 세상일지는 미로서는 알 수 없어요. 하 지만 후작님에게는 소중한 희망이 있을 거라는 것은 짐작해요. 희망이 없이 사는 미에게 그렇게 화를 내시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어요.”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게 된 후작은 그 눈을 볼 때마다 자신이 불안해지는 이유를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 눈은 그가 보지 못하는 것까지도 일상처럼 보는 눈이었다.

“하지만 후작님이 쏠 과녁 자체가 없어진다면 후작님의 활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소용이 없어질 거예요. 미래가 없어지면 후작님이 살아갈 수 있 는 곳은 영원한 현재뿐이죠. 후작님은 영원히 도망자로 살아가실 거예요. 아마 붙잡히지는 않겠죠. 붙잡힌 도망자는 더 이상 도망자가 아니니까. 하 지만 그 외 다른 것이 되지도 못하실 거예요.”

“미래가 없어지다니………, 그게 가능한 일인가.”

후작의 말에 담겨 있는 거대한 의혹도 미에게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미는 나직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인간들은 이미 그런 현상을 표현하는 단어를 가지고 있어요. 지루하다, 심심하다, 단조롭다. 이것들은 국지적인 시간 정지를 나타내는 단어예요. 시간은 수많은 흐름이죠. 합창대들조차도 같은 시간 흐름 속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은 아니에요. 제각기 다른 각자의 시간 속에서 부르는 노래가 비슷 하게 들려올 뿐이죠. 그리고 그 시간 차이가 커지면 합창은 성립되지 않아요. 음악가라면 단순히 화음이 맞지 않는다고 말하겠지요. 하지만 퓨처 워 커인 미는 그들이 시간을 맞추지 못했다고 말하겠어요.”

“그건 말이 안 돼. 시간은 하나야! 그렇지 않다면 우리들은 어떻게 약속을 할 수 있단 말이냐.”

“약속이 깨진 경우가 한 번도 없으세요?”

“뭐라고.”

“후작님도 약속이 깨진 경우가 있으시겠지요. 그건 후작님과 상대방의 시간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죠.”

“무슨 궤변이냐! 약속이 깨지는 것은 피치 못할 사건들이 생기거나 하기 때문이다!”

“사건들이 곧 시간이에요…………. 후작님. 아무런 사건이 없는 공간은 시간도 없는 공간이에요. 사람들은 누구나 시간 정지에 대해 알고 있어요. 의식적 으로 알고 있지는 않지만 본능적으로는 알고 있어요. 그렇잖으면 왜 사람들이 심심함을 참지 못하는 걸까요.”

후작은 당황해 버렸다.

“심심함이라고.”

“사람들은 기쁜 일에 기뻐하고 슬픈 일에 슬퍼해요. 하지만 심심한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아무 일도 없는 거예요. 그것은 어찌할 수가 없기 때문이죠. 분노를 표현할 수도 없고 즐거워할 수도 없고 슬퍼할 수도 없어요. 왜 수많은 사람들이, 현명한 사 람이든 바보든 가리지 않고 그렇게도 지겹게 똑같은 인사를 할까요.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고, 당신의 시간은 제대로 흐르고 있느냐는 확인으로 인 사를 대신할까요.”

미는 일어섰다. 후작은 그녀가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도 제지하지 않았다. 미는 나무 등걸에 등을 기댄 채 후작을 내려다보았다.

“누구나 알고 있어요. 후작님, 아이들이 커서 어른이 되고, 어른이 늙어서 노인이 된다는 것을 믿으시나요? 대개들 그렇게 믿고 싶어하고 실제로 그 렇게 되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것이 공짜로 이루어지는, 즉 부채감을 가져야 되는 것이라는 것은 아무도 생각하지 않지요.”

후작의 심정을 형언할 수 있는 말은 기막히다는 말뿐이었다. 그래서 후작은 화를 낼 수도 없었다.

“늙어가는 것에 대해 감사하라는 말이냐. 친지가 죽고 친우가 죽고 마침내 자신도 사라져가는 것에 대해 고마워하란 말이냐.”

“네. 감사해야지요. 그것도 후작님이 말하는 살아가는 이유니까요. 늙을 수 있고, 죽을 수 있는 것이요. 후작님이 미래를 알 수 없는 모호성을 인생 의 축복이라고 말하겠다면, 미는 미래로 갈 수 있는 그것 자체를 축복이라고 말하겠어요.”

미는 갑자기 어깨를 움츠렸다. 마치 추워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미의 손이 갑자기 움직여 입을 틀어막았다. 후작은 그녀가 울음을 참고 있다는 것 을 깨닫고는 할 말을 잃었다. 입을 틀어막은 미의 어깨가 한참 동안 떨리고 나서, 미는 아직도 물기가 어려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미는 스스로 선택하지도 않은 연인을 사랑할 것이고, 고아가 될 아이를 낳고, 그리고 죽을 거예요. 명령대로 움직이는 골렘처럼 정해진 대 로 살아갈 거예요. 그리고 그것에 감사해요. 그것은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미의 인생이니까요. 그래서 미는 반드시 그렇게 되게 만들 거예요.” 말을 하면서 미의 목소리는 다시 젖어들기 시작했다. 후작은 미의 흐느끼는 말을 알아듣기 위해 커다란 집중력을 발휘해야 되었다.

“그것을 알고 있느냐 모르느냐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후작님은 사물을 볼 수 있는 시각에 대해 화를 내시나요? 눈이 있어서 이 슬픈 모습들을 보게 되었다고 화를 내시나요? 그렇지는 않으실 거예요. 그리고 미는 미래를 볼 수 있는 눈에 대해 화를 내지 않아요. 그것도 미의 것이니까요. 후작님은 자신이 선택하지도 않은 부모에 대해 화를 내시나요? 그렇지는 않을 거예요. 그리고 미는 스스로 선택하지도 않은 미래에 대해 화를 내지는 않아요. 그것도 미의 것…………, 으흑!”


“쳉? 무슨 생각 해요?”

쳉은 몸을 돌렸다.

“네리아입니까. 이 시간에 웬일이십니까?”

네리아는 길게 기지개를 켜는 동작을 하며 말했다.

“뭐, 침대에 누워 있는데 창문 밖에서 골렘만큼이나 커어어다란 남자가 걸어가는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발소리로 미루어보아 틀림없이 얼굴도 골렘 만큼이나 딱딱하게 굳어 있는 사람일 것 같았어요. 그러니 정답은 쳉이잖아요.”

쳉은 피식 웃어버렸다.

“뭐, 제가 항상 이런 것은 아닙니다. 요즘은 웃음이 좀 적어지긴 했습니다만.”

“맞아요, 맞아. 당신 눈을 보니 절대 그런 얼굴을 하고 있을 사람 같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왜 이 달밤에 뒤뜰을 걷고 있어요?”

“잠이 오지 않는군요.”

네리아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리고 네리아는 씩 웃으며 말했다.

“히……, 나, 창문으로 내려다보고는 깜짝 놀랐는데.”

“놀랐다고요? 왜지요?”

“당신이 이 자리를 서성거리고 있는 것 때문에.”

쳉은 의아쩍은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다시 둘러봐도 그냥 여관의 뒤뜰일 뿐이다. 쳉은 네리아를 바라보며 추궁하듯이 말했다.

“묻어둔 게 뭡니까?”

“예?”

“이 근처에 뭘 묻어두었지요?”

“깔깔깔! 아아아, 그런 것은 아니에요. 사실……, 며칠 전에 나, 이 자리에서 다른 사람을 봤지요. 그때도 이 정도로 캄캄한 밤이었고 말이에요.” 

쳉은 갑자기 가슴이 죄어오는 기분을 느꼈다.

“미가 여기서 뭘 하고 있었습니까, 퓨처 워킹?”

“대번에 짐작하는 건 대화를 빨리 진행하는 데는 좋지만 대화를 즐기는 데는 별로 좋지 않은뎅. 뭐, 맞아요. 여관 안에는 꿈꾸는 사람들이 많아서 여 기까지 나왔나 보더라고요. 나는 잘 모르지만.”

“그렇군요.”

쳉의 ‘그렇군요’는 더 이상 다른 말을 이어나가기 거북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그래도 네리아는 이 남자를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쳉이 미가 앉아 있던 자리를 서성이고 있기 때문에 놀라긴 했다. 하지만 네리아는 그것 때문에 여기까지 내려온 것은 아니었다. 네리아의 입속을 꼬 물거리며 맴도는 말은 끔찍한 것이었다. 당신은 4년 뒤에 죽어요. 당신이 그걸 모르는 편이 더 행복할 거라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내가 야박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난 그걸 내 가슴속에만 담아둘 수가 없어요. 가슴이 터질 것 같다고요!

“미와는 오래 사귀었어요?”

“12년입니다.”

“아, 예.”

밤바람이 불었다. 휘이잉.

“상단의 호위 무사는 재미있어요?”

“그럭저럭 할 만합니다.”

“아, 예.”

밤바람이 또 분다. 휘이잉.

“달이 참 곱죠?”

“그렇군요. 이 계절엔 상단의 밤 여행도 괜찮지요. 춥지도 않고 달빛도 좋아서.”

“아, 예.”

밤바람이 줄기차게 불어댄다. 휘이잉. 네리아는 생각했다. 바람이 미쳤나 봐.

꺼낼 수 없는 말을 꺼내지 못한다는 것 때문에 네리아는 팔짝팔짝 뛸 지경이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그런 심경을 짚어내는 재주가 없는 쳉은 무덤 덤하게 네리아를 상대할 뿐 대화를 편하게 하거나 하는 일은 전혀 하지 않았다.

“미를 사랑하고 그녀와 결혼할 거죠?”

“예. 아니오.”

네리아는 이 대답 방식이 뜻밖에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그 내용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네리아는 의아한 표정으로 쳉의 대답에 대한 부연 설명 을 요구했다. 쳉도 그 정도의 표정은 읽어낼 수 있었다.

“미를 좋아하고…………, 제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그 누군가에 들어갈 사람은 이 넓은 세상에 미 하나뿐일 겁니다. 그래요, 그녀를 사랑합니 다. 하지만 그녀의 것이 되지는 않을 겁니다.”

“왜예요?”

“미가 그렇게 물었을 때 나는 독신주의자라고 말해서 그녀를 웃겼습니다. 네리아는 그 대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웃겨요.”

“적어도 제가 기발한 녀석은 아니라는 것은 증명되었군요. 제 대답은 보편적인 반응만을 야기하고 있으니까요.”

네리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상하다. 이게 아닌데. 미가 말한 대로라면 미는 올해에 쳉과 결혼하는데 네리아는 ‘미가 쳉을 겁탈하나?’ 등의 생각 까지 떠올렸다가 스스로의 생각에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다행히도 월광은 그녀의 발그레해진 볼을 잘 가려주었다.

“이상하네요, 이상해요. 사랑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같이 있고 싶지 않아요? 서로 보듬고 입이 심심할 땐 서로의 입술을 맛보고 싶지 않아요?”

“표현이 야하군요.”

“원래 그러려니 생각해요. 사실 원래 그러니까.”

뭐, 머릿속으로는 더 야한 생각도 하는걸. 이히히. 네리아는 속으로 히죽거리며 쳉의 대답을 기다렸다. 쳉은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손을 들어올리더 니 머리를 긁적이기 시작했다. 이 키 크고 장대한 사나이가 난처해하는 모습은 네리아를 퍽 즐겁게 만들었다.

“글쎄요. 이게 대답이 될진 모르겠습니다만, 제게 미는 소중한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소중한 것은 당연하겠지요. 그리고 소중하니까 사 랑합니다. 이 두 가지 사이에서 어느 것이 사실에 가까운가 하는 질문은 부디 하지 말아주셨으면 좋겠군요.”

“그 두 가지 중에 어느 것이 거짓에서 멀어요?”

·모르겠습니다. 저도 어느 것이 먼저이고 어느 것이 나중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제게 소중한 사람이자 사랑하는 그녀의 곁에 저를 두고 싶 지는 않습니다. 저는 미를 미 자체로 사랑합니다. ‘쳉의 미’라는 식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네리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말했다.

“그러니까, 뭐예요. 경치를 사랑한다거나 예쁜 달빛을 사랑한다는 것처럼 말이에요? 경치는 누구 소유가 되는 건 아니고 달빛도 그러니까…….”

“그렇다고는 말하기 어렵겠군요. 경치나 달빛 같은 것은 저를 사랑해 주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일방적인 애호겠지요. 하지만 미는 저를 사랑해 주 니까 둘은 다르지요.”

네리아는 울상이 되었다.

“말이 되는 것 같은데 갈수록 말이 안 돼요. 뭐예요! 뭘 그렇게 따지고 재가며 사랑하는 거예요? 머리가 다 아프네! 내가 정리해 볼 테니까 듣고 나서 대답해요. 쳉은 미를 사랑한다. 미는 쳉을 사랑한다. 그리고 쳉은 미가 쳉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고, 미는 쳉이 미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맞아요?”

“맞습니다.”

“어렵게 말했지만 사실 세상의 어느 곳에서나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일이잖아요! 잉잉잉! 특별할 것이 하나도 없는 건전한 사랑이네. 그렇죠?” 

“뭐,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럼 뭐가 문제예요? 결혼해요. 뭐, ‘결혼해요’라고 말하면 꼭 공식적인 행사를 가져야 된다는 이야기 같으니까 더 간단하게 내포적 의미도 다분하 게 결합하라고 말할래요.”

“하세요.”

·결합해요. 쳉은 지금 나 바보 만들려는 거예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쳉은 빙긋 웃었다. 네리아는 그 웃음에 초조함을 느꼈다.

“자, 결합하라고 말했으니까 대답도 해주세요!’라고 말하면 갈수록 바보 되는 것 같네. 에이, 뭐. 바보 되죠. 대답해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왜? 뭣 때문에?”

“저는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자학하는 거예요?”

“자학은……, 부지런한 사람의 선택입니다. 저는 그렇게 부지런한 사람이 못됩니다.”

“무슨 말이에요? 자학은 부지런한 사람이 하는 거라니.”

“자학하려면 일단 자신 속으로 빠져들어야 됩니다. 자기 몰입이라고 하지요. 그리고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 해석이지요. 그런 것들은 부지런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겁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나는 무엇이고 어떤 자인가 하는 따위의 생각보다는 오늘 저녁은 뭘 먹나 등을 생각 합니다.”

“와! 역시 나를 바보로 만들려는 것이군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헤게모니아 호위 무사는 다 그래요?”

“제 특징일 겁니다.”

“그렇지만 나는 반대할래요. 아무리 보통 사람이라도 ‘나는 왜 이 지경인가?’ 하는 생각은 할 수 있어요. 그게 자학이잖아요.”

“그건 자학이 아닙니다. 자학은 스스로를 학대하는 거지요. 하지만 보통의 사람들이 나는 왜 지경이냐고 말할 때의 ‘나’는 자신이 아닌 경우가 많습 니다. 자신의 주변 상황을 말하는 것이 보통이지요. 도박 때문에 재산을 날린 상인이 ‘나는 왜 이럴까, 이런 내가 싫다.’라고 말할 수는 있겠지요. 하 지만 그것은 도박을 좋아하는 버릇을 말하는 것이지 자기 전체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전체요?”

“예. 그런 버릇은 버릴 수 있는 것이죠. 버릴 수 있는 것은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히잉. 도박에서 손을 못 떼는 사람이 더 많을 걸요.”

“그렇겠지요. 하지만 버리기 쉬운가 어려운가의 문제이지 아예 불가능한 문제는 아닙니다. 네리아는 자신의 여성성을 버릴 수 있습니까? 남자가 될 수 있나요? 안 되겠죠. 그건 버리기 쉽냐 어렵냐의 문제가 아니지요. 가능하냐 불가능하냐의 문제입니다. 그런 것에 비해 볼 때 도박 버릇은 버리기 어려운 것이지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네리아는 입을 동그랗게 벌린 채 쳉을 바라보았다.

“정말……, 당신 너무 생각이 많은 것 같군요. 호위 무사 생활이 무지 지루한가 보네. 쳉은 여자들이 다 도망가 버릴 타입인데요.”

“그런가요.”

“좋아요! 그럼 쳉이 자학하는 것은 아니라고 해요. 이해는 못하겠지만 어려운 말들이 줄줄 나오는 거 보니 믿도록 하지요. 그럼 왜 자신이 미에게 어 울리지 않는다는 거 상당히 자신감 없게 들리는 말을 하는 거예요?”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아아악! 지금 우리는 사이 좋은 두 마리 다람쥐처럼 열심히 쳇바퀴를 돌리고 있다는 거 알아요? 사랑하면 왜 미와 결합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쳉은 잠시 네리아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네리아는 굽히지 않는 표정으로 쳉을 마주보았다. 쳉은 막다른 곳까지 몰렸다는 기분을 느꼈고, 그래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나온 쳉의 목소리는 피로감에 절어 있었다.

“미는 퓨처 워커입니다.”

“우와아아! 그랬어요?”

“비웃지 마세요.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힘듭니다. 그러니 어떻게든 편하게 말하고 싶어요.”

네리아는 즉시 사과했다. 

“미안해요.”

쳉은 뭐라 말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땅바닥에 앉았다. 네리아는 그를 따라 바닥에 앉아서는 허리를 주욱 내민 채 쳉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몸 짓을 해 보였다. 쳉은 한 손으론 땅을 짚고 다른 손으론 다시 머리를 긁적이다가 힘들게 이야기를 꺼냈다.

“말했듯이 미는 퓨처 워커입니다. 미래를 알고 있지요. 그녀는 아버지가 죽는 것도, 어머니가 죽는 것도 미리 보았을 겁니다. 어머니는 그렇지 않지 만 아버지의 경우는 사고였지요. 하지만 그녀는……”

“들었어요. 막지 않았지요.”

“예. 그렇습니다. 미는 아버지의 사망을 막지 않았습니다. 그게 퓨처 워커식인가 봅니다. 우리는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건 미래를 볼 수 없는 자의 생각일 뿐입니다.”

쳉은 잠시 고민하다가 손가락을 딱 튕기며 말했다.

“만일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귀머거리라고 가정해 보지요. 그런데 그중 한 사람만이 유일하게 소리를 들을 줄 압니다. 만일 그 유일한 사람이 하프를 타고 있다면 귀머거리들은 생각하겠죠. 저 바보 녀석, 실을 끊으려면 가위로 끊을 것이지 저렇게 튕겨서 닳아 끊어지게 만들 생각인가?”

네리아는 활짝 웃었다. 쳉은 그 표정에 감사하며 말했다.

“이건 사실 조악한 예겠지요. 어쨌든 저는 미래를 볼 줄 모른다는 처지에서 그 귀머거리들과 마찬가지죠. 그래서 미의 상황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예 를 찾는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할 겁니다. 하지만 미가 자신이 보는 미래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할 수 있습니다.”

“예……, 그래요.”

맞아. 4년밖에 가질 수 없는 사랑도, 그 이름을 불러보지도 못할 아이의 출산도 거부하지 않았지. 네리아는 갑자기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느꼈다. 그 러나 쳉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네리아는 조심스럽게 눈을 돌렸다. 쳉은 계속 말했다.

“그렇다면 미는 저를 사랑하게 되는 그녀의 모습도 보았을 겁니다.”

네리아는 급하게 도로 고개를 돌리느라 하마터면 목이 부러질 뻔했다.

“예? 뭐라고요?”

“다시 말씀드릴까요. 미는 저를 사랑하기 훨씬 전부터 그녀가 저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을 알았을 겁니다. 당연하게 추측할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네리아는 말문이 막혔다. 그래서 그녀는 입을 뻐끔거리며 쳉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쳉은 그런 네리아의 얼굴에서 눈을 돌려 바닥의 풀잎에 시선 을 떨구었다.

“제 짐작은 합리적일 겁니다. 어떤 면에서 그녀가 제게 주는 사랑은 정해진 규칙을 따르는 것과 비슷할 겁니다. 아니, 식순에 따르는 행사 같은 것일 까요. 식순은 이렇지요. 미는 쳉을 알게 된다. 미는 오랜 세월 동안 쳉과 사귀다가 조금씩 사랑을 느낀다. 그래서 미는 쳉을 사랑한다. 사랑이 정해진 규칙이나 관습 비슷한 것이 되는 거죠. 아니, 이것도 비슷한 예라고 할 수는 없어요. 퓨처 워커의 일이니까 보통 사람들의 일에서 비슷한 예를 찾기는 어렵겠군요.”

“그, 그럼 미는 당신을 사랑하는 척한다는…………, 그렇게 되도록 되어 있으니까………….”

“척한다고 말하기는 좀 그럴 겁니다. 어쨌든 그것이 그녀가 본 미래의 진실이었으니까요.”

“그래도 그건 거짓이잖아요! 엉터리예요! 미인계 같은 거하고 뭐가 달라요? 계획상 사랑하도록 되어 있으니까 사랑한다는 거잖아요!”

“계획상……, 예, 그 말은 맞군요. 하지만 말했다시피 그건 그녀가 보았던 것이고 진실입니다.”

“그런 거 몰라요! 그건 거짓이에요, 사랑이 아니에요!”

쳉은 고개를 들어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눈에는 약간이지만 분노가 담겨 있어서 네리아를 놀라게 만들었다. 쳉은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퓨처 워커이기 때문에 이런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 거겠지요. 만일 그녀가 퓨처 워커가 아니었다면 미가 저를 사랑하더라도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겁 니다. 그렇지만 그녀가 퓨처 워커이기 때문에, 사랑을 느끼기도 전에 벌써 사랑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 사랑이 마치 거짓인 것처럼 느 껴지는 거겠지요. 당신도 그렇게 느꼈으니 그녀 자신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녀를 동정할 수 없습니까?”

“예?”

“동정할 수 없냐고요. 그녀가 미래를 볼 수 있어서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녀가 정말로 저를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은 그녀가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게 마치 계획적으로 수행되는 사랑, 거짓된 사랑인 것처럼 느끼게 될 겁니다. 지금 당신이 그렇듯이 말입니다. 불 쌍하지 않습니까?”

심한 당황과 흥분에 빠져, 네리아는 쳉의 말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계획표를 수행하듯이 사랑하게 된다는 말이 그녀에게는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 왔던 것이다. 게다가 네리아는 그 사랑이 어떤 결말로 끝날 것인지도 알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네리아가 4년 후의 미래를 모조리 말해 버리지 않 은 것은 자제심이 대단해서는 아니다. 말문이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이 황당한 남녀는 뭐란 말이야!

“사람들은 저를 감정 결핍이라고 합니다.”

쳉은 나직하게 말했다. 네리아는 아무 말도 못한 채 쳉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그건 적절한 평가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실제로 격렬한 사랑이나 끔찍한 증오와는 별 관련을 두지 않으며 살아왔습니다. 상단의 호위 무사이긴 하 지만 돈을 좋아하지도, 모험을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특별히 싫어하는 것도 없지요. 저는 무색무취라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저는 미를 사랑 합니다. 저 자신도 신기한 일입니다만.”

“그게 거짓인데도요!”

네리아는 발작적으로 외쳤다. 쳉은 그런 네리아를 우울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말했다.

“거짓이라도……………, 그것이 계획적으로 이루어지는 사랑이라도 저는 만족합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운명이라는 감독의 지시 하에 계획적으로 베 푸는 사랑이라도, 제게 주는 것이 저에게는 너무 고맙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만으로 만족할 겁니다. 그 이상의 무엇을 바라지는 않을 겁니다.”

“왜…… 왜지요?”

“저는 미래를 모릅니다. 따라서 추측할 수밖에 없습니다. 미는 저와 결혼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결혼해요!’라는 말이 입천장까지 올라온 상태에서 네리아는 쳉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미는 그것을 알고 있을 겁니다. 가끔은 그녀에게 물어보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대답이 나오더라도 만족할 수 없을 테니까요. 만일 결혼한다는 대답이 나온다면, 저는 강제로 결혼해야 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겠죠. 그렇지 않다는 대답이 나온다면 거꾸로, 사랑하 는데도 부득이하게 결혼할 수 없게 되는 것 같은 기분일 겁니다. 그렇겠죠?”

“그, 그, 그렇군요…….”

“그래서 저는 두 가지 경우를 놓고 따져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일 그녀와 결혼한다면 저는 평생 동안 그녀를 의혹의 눈초리로 보게 될 겁니다. ‘미 는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겠지.’ 하면서 말입니다. 그 결혼 생활은 전체가 누군가의 지시에 의해 강제로 이루어진 가식적인 것처럼 느껴질 것이고, 행복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반면 결혼하지 않는다면, 미가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더라도 저와는 상관이 없어집니다. 제게 가장 소중한 그녀에게 의혹의 눈초리를 보낼 필요는 없게 되겠지요.

쳉은 갑자기 복받치는 기분을 느끼며 그런 스스로 놀랐다. 내게 이런 기분을 느낄 정도의 감정이 있었나? 쳉은 하늘을 바라보며 목멘 소리로 말했 다.

“그것이…………, 퓨처 워커를 사랑하게 된 제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네리아는 망연한 표정으로 쳉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