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 워커 3권 – 6장 잊혀진 것을 부르는 목소리 1

퓨처 워커 3권 – 6장 잊혀진 것을 부르는 목소리 1


1

“헤게모니아 인들은 모두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몰랐소이까?”

파하스는 술잔을 내려놓으며 빙긋 웃었다. 네리아는 헤게모니아 인을 비난하는 헤게모니아 인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네리아를 보며 파하스 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 옆에선 입에 파이프를 문 운차이가 나이프로 손톱을 다듬으며 파하스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파하스는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하하……, 헤게모니아 인이 하는 말이니 믿으시는 것이 좋을 것이오. 음. 어디 보자. 그래, 우리의 젊은 호위 무사는 상당히 머리가 아픈 상황에 빠 져들었구려. 뭐, 퓨처 워커에 관한 한 단정지어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지만.”

“도대체 퓨처 워커가 뭐예요?”

“미래를 걷는 사람.”

파하스는 이보다 더 명쾌할 수는 없다는 듯이 말했지만 네리아의 눈꼬리는 하늘로 치켜올라갔다.

“사랑해요, 파하스. 내가 아무리 바보짓을 하더라도 이젠 더 이상 자책할 필요가 없겠군요.”

“예?”

“세상에 나보다 심한 바보가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까요.”

“어이쿠, 신랄하군요, 마이 페어 레이디! 흐음, 흐음. 네리아 양은 먼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헤게모니아 인은 무섭도록 복잡한 개념을 짧은 단어 로 표현하는 일에 능숙하지요. 사기꾼이 되기에 적당한 인종이오. 하하하!”

“무슨 의미죠?”

“좋습니다. 다시 우리의 씩씩한 호위 무사 나리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해부해 봅시다. 그 친구, 감정 결핍이라 불린다고 했습니까?”

“예. 웃기게도.”

파하스는 다시 씨익 웃고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배 위에 두 손을 올린 느슨한 자세를 취했다.

“그거, 별로 웃기는 것은 아니지요. 이 감정 결핍이라는 단어를 보면 헤게모니아 인들이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말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바이서스 인이라면 그 말을 들었을 때 목석 같은 사람이라는 의미로 생각하기 쉽겠지요. 하지만! 헤게모니아 인이 말하는 감정 결핍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감 정이 결핍되었다는 의미지요. 감정 결핍과 무감정은 전혀, 완전히, 절대적으로 다릅니다.”

네리아는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발음은 확실히 다르네요.”

“의미도 다르지요.”

“설명해 줄 거죠?”

“레이디의 명령이신데 당연하오이다. 자…………, 무감정은 보통 일에는 감정이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것을 말하지요. 하지만 감정 결핍의 경우는 결핍된 감정이 몇몇 제한적인 부분에서만 폭발한다는 뜻입니다. 흐음. 바이서스 어로는 이런 상황에 적합한 말이 없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마니아 정도? 거 왜, 다른 사람은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부분에서 집요함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잖습니까.”

“아! 이해했어요!”

네리아는 밝게 웃으며 말했지만 파하스는 씁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레이디 네리아. 이 광대의 작은 가슴이 찢어질 것 같습니다만, 전혀 이해하지 못하셨을 거라고 말할 도리밖에 없군요. 이건 헤게모니아의 하늘 아래 헤게모니아의 평원을 걸으며 헤게모니아의 물을 떠 마시며 자란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관념이거든요.”

“헤에…………, 그래요?”

“예,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피상적으로나마 바이서스의 기사도를 이해하는 것처럼 레이디 네리아도 피상적으로는 헤게모니아 인의 감 정 결핍에 대해 이해하실 수 있겠지요. 그리고 이 무지한 광대가 기대를 걸어볼 곳도 그곳뿐이군요. 설명해 보겠습니다만 잘 이해되지 않더라도 이 가련한 광대를 너무 허물치는 말아 주시길.”

파하스는 팔짱을 끼고는 술잔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조금 후 그는 노래하듯이 흐느적거리는 어투로 말하기 시작했다.

“마니아와 감정 결핍의 차이부터 말하는 것이 쉽겠군요. 마니아는 그가 집요함을 보이는 부분 외에는 다른 사람들과 별 차이가 없답니다. 보통 사람 에게 모종의 집요함을 붙이면 마니아가 되겠죠. 나이프 마니아라면 보통 때는 다른 사람과 똑같지만 잘 빠지고 사납게 생긴 나이프만 보면 침을 질질 흘릴 것이요, 고서 마니아라면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양식인이지만 곰팡내 나는 고서만 보면 대소변을 못 가리고 좋아할 테지요.”

“깔깔깔! 예. 그런데요?”

“하지만 말입니다, 감정 결핍은 그가 흥미를 가지는 부분에서만 보통 같고 그것을 제외하면 보통 사람과는 다릅니다. 쳉이 흥미를 가진 유일한 부분 은 미라는 아름다운 레이디의 존재겠지요. 하지만 그 부분을 제외하면 우리의 용감한 젊은이는 젊은이로서 낙제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친구일 겁니 다. 정열도 없고 모험심도 없고 아마 배짱도 시원찮을 터! 하지만 동시에 위기감이나 인생에 대한 공포도 별로 없기 때문에 이런 타입의 사내들은 생 각 모자란 사람들이 보기엔 엄청나게 용감해 보이는 경우가 많지요.”

“아……, 좀비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것처럼?”

“레이디 네리아, 대단하십니다!”

파하스는 경의가 담긴 박수를 쳐보냈고 네리아는 고개를 까닥여 감사를 표했다. 파하스는 싱긋 웃으며 게속 말했다.

“그렇습니다. 흐으음. 이런 타입의 사내들은 자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사이들랜드 대평원이나 디도스 대수해(大樹海) 근처를 유심 히 살피면 의외로 적지 않지요. 키가 크고 고독해 보이는 눈을 가지고 있으며 테이블에 앉기보다는 긴 의자에 앉는 것을 좋아하는 사내라면, 그 친구 는 열에 아홉 감정 결핍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 친구들은 다른 사람을 정면으로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긴 의자에 나란히 앉아서는 옆사람 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한두 마디씩 조용히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감정 결핍인 사람을 오랫동안 사귀었던 자가 그의 오랜 친구에 대해 회상해 보면 정면 모습이 떠오르지 않아서 당황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오, 레이디 네리아, 쳉의 정면 모습을 떠올리려고 고생하지 마세 요. 이맛살이 많이 찌푸려지는군요.”

네리아는 수줍다는 듯이 혀를 낼름했다. 파하스는 그것을 못 본 척하며 말을 이었다.

“그게 헤게모니아에서 말하는 감정 결핍이라는 것이지요. 특수한 몇몇 부분에서만 제대로 된 감정 표현을 보일 뿐,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감정을 표 시하지 않아요. 그리고 우리 친구 쳉의 경우에는 그 특정한 몇몇 부분이란 미 V. 그라시엘 양인 것입니다.”

“으앙……………, 미안해요. 열심히 설명하셨는데 이해가 될락말락해요. 그럼 제가 정리해 볼게요. 첫 번째, 무감정. 이것은 감정이 아예 없다. 무관심하고 무감동하고 무심하다. 두 번째, 감정 결핍. 이건 감정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그 쪼오금밖에 없는 감정을 몇몇 절실한 부분에만 쓸 뿐 다른 부분에는 돌아갈 감정이 없다. 세 번째, 마니아. 이것은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는 감정을 가지고 있고, 그에 덧붙여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에는 더 많은 감정 을 발휘한다. 맞아요?”

파하스는 극적으로 손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아아, 레이디 네리아. 누구나 자신에게 너무 큰 의미를 가진 것에 대해서는 깊이 파고들지 않는 법입니다. 어머니가 왜 나를 사랑하는지에 대해 고 찰해 보는 병신은 없습니다. 감정 결핍은 헤게모니아의 단어이고, 그래서 레이디 네리아가 너무도 날카롭게 분석해 버리시니 낭만이 다 떨어져나가 는 것 같군요. 어쨌거나, 대충 비슷하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냠냠. 그럼 저를 골치 아프게 만드는 남녀 중에서 남자 쪽은 그런 불쌍한 병에 걸려 있다고 치고, 여자 쪽은 어때요? 퓨처 워커가 뭐지요?”

“역시 헤게모니아 식으로 생각해야 되오이다. 그 말도 짧은 단어지만 복잡한 의미가 담겨 있지요. 제가 조금 전에 미래를 걷는 자라고 했지요? 그 말 그대로입니다. 퓨처 워커는 미래를 보는 자가 아닙니다, 미래를 아는 자도 아니고. 퓨처 워커는 미래를 걷는 자입니다.”

“두 발로 걸어요, 네 발로 걸어요?”

파하스는 잠시 입을 쩍 벌린 채 네리아를 바라보았고 그런 파하스의 얼굴을 보며 운차이는 쓴웃음을 지었다. 파하스는 고개를 조금 내두르고는 말했 다.

“음……, 그러고 보니 이건 이 무지한 광대가 이해하지 못하는 바이서스 스타일인 모양이군요. 핵심이나 진실, 요점 같은 것은 대개 진지해서 접근하 기 어려운 법. 바이서스 사람들은 그것을 슬쩍 비꼬아서 친근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재주가 있나 봅니다. 헤게모니아 인과는 또 다른 접근 방식이군요.”

“퓨처 워커는?”

“예…………. 레이디 네리아. 자, 레이디께서는 길을 걸을 때 길을 위해서 걸으십니까?”

“응? 그게 무슨 말씀?”

“그러니까 레이디 네리아는 길을 밟기 위해 걸으십니까?”

“아니죠. 어딘가에 도달하려고 걷는 거죠.”

“그렇소! 어딘가를 걷는다는 것은 사실 그 어딘가를 위하는 행동이 아니외다. 그곳을 지나서 목적지에 도달하겠다는 의미인 거지요! 그럼 이 점을 이해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미래를 걷는다는 것은, 미래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미래를 본다거나 미래를 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미래 그 자체가 목적이겠지요. 하지만 미래를 걷는다는 것은 전혀 다른 말입니다.”

네리아는 눈을 한참 동안 깜빡였다. 그 얼굴에는 이해 못하겠다는 낭패감도, 충분히 이해했다는 득의양양함도 없었기에 파하스는 조금 불안해졌다. 그래서 파하스는 보다 명확한 설명을 해보고자 했다. 그러나 그때 네리아가 다시 말했다.

“그럼 퓨처 워커는 미래를 걸어서 어디에 도달하는데요?”

“예? 그건 모릅니다.”

“네?”

“용서하소서, 마이 페어 레이디. 이 미천한 자는 퓨처 워커가 아닙니다. 시가지를 걷고 있는 사람을 본다고 하더라도, 그가 시가지를 걷는다는 것은 알 수 있지만 어디로 걸어가는지야 그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퓨처 워커가 아닌 저로서는 퓨처 워커가 미래를 걷는다는 것은 압니다만 어디로 걸어가는지는 알 도리가 없소이다.”

“아……, 그런강.”

그때 그란이 문을 들어섰다. 그란은 홀에 앉아 있던 세 사람을 주욱 둘러보고는 간단하게 말했다.

“가자.”

네리아는 그대로 일어서서 쳉과 파를 데리러 2층으로 올라갔고 운차이는 테이블 위에 도려놓았던 손톱들을 쓸어서 버렸다. 파하스는 씩씩하게 일어 나서는 테이블 옆에 내려두었던 검과 하프를 들며 외쳤다.

“좋아, 가세나!”


턴빌의 시민들은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말에 탄 사람이 자그마치 여섯 명이나 대로 한가운데를 걸어가고 있는데도 무관심하게 지나칠 만큼 턴 빌 시민들이 무뚝뚝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그들이 타고 있는 말들은 아무리 보아도 사역마는 아니었고, 기수들 역시 절대로 겉치레가 아닌 무장을 갖 추고 있었다.

선두에서는 어밴저에 탄 그란 하슬러와 앰뷸런트 제일에 오른 운차이가 도사린 두 마리 야수 같은 얼굴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 뒤로는 훤칠한 키에 침착한 얼굴을 한 쳉과 자그마한 키에 활기에 넘치는 얼굴을 한 파하스가 캐시헌터와 레이븐에 탄 채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는 에보니 나이트호크라는 긴 이름을 가진 흑마에 올라탄 네리아와 화이트풋에 오른 파가 갔다. 그리고 일행의 뒤를 따르는 키타나 하운드의 박력 넘치는 자태 는 이 위압감 넘치는 일행에 공포감과 혼란스러움이 복합된 특색을 더하고 있었다.

이런 광경이 연출되고 있는데도 겁먹은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거나 사람들이 경계심에 불타는 시선을 보내거나 경비 대원들이 달려오거나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은 까닭은 단순했다. 거리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고 그 인파 가운데엔 말이며 마차들도 즐비했다. 그랬기에 이 일행의 조금 유난스러운 모습도 다른 사람들의 모습에 그럭저럭 묻힐 수 있었던 것이다. 운차이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턴빌 시민들이 다 몰려든 것 같군.”

파하스 역시 주위를 둘러보며 운차이의 말에 대답했다.

“아니, 턴빌 시민뿐만이 아니라 그 인근 교외의 농가들과 조금 떨어진 도시에서까지 다 몰려든 것 같군. 아니, 어쩌면 헤게모니아 사람들이 다 몰려 든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건 완전한 축젯날인걸?”

거리는 말들의 푸르릉거림과 사람들의 행렬로 부산스럽기 그지없었다. 음료수와 과자, 샌드위치 등이 담긴 바구니를 든 채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사람을 불러대는 자들과 아예 건물 옆벽에 자리를 펼친 채 무엇에 쓰이는 물건인지도 짐작하기 어려운 물건들을 늘어놓고 파는 사람, 계단을 점거한 채 목을 길게 뽑고 찢어지는 목소리로 누군가의 이름을 외치고 있는 여인네(틀림없이 손을 잡고 걸어오던 철부지 아들네미를 놓친 것이리라) 등 다양한 사람들 이 다양한 소음을 내고 있었다.

그란은 찌푸린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예상의 상한선이 돌파되었군. 체포될 후작은 혼란으로부터 조력을 얻고 난항 속에서 모색될 타개책이 우리에게 요구되는군.”

운차이는 험악한 표정으로 그란 하슬러를 쏘아보며 콧김을 뿜어댔다. 등 뒤에 따라오던 파하스가 그란의 말을 해석해 준 다음에야 운차이는 간신히 표정을 풀었다.

“우하하하! 그러니까 뭐냐, ‘예삿일이 아니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후작을 잡는 것은 힘들겠는데, 뭔가 수를 내어야겠다.’ 이런 말인가? 하하하!” 

“그런 말이다.”

운차이는 가슴 깊이 숨을 들이쉬고는 그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이 많은 사람들이 도대체 무엇 때문에 몰려드는 거지?” 파하스는 씨익 웃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농장의 농부이거나 공방의 공인이거나 가게의 상인일 터, 모험가가 아니라는 말씀이지. 이 선량한 이들에게는 이런 사건은 호기 심을 크게 자극하겠지. 만일 66년의 불가사의가 풀리는 현장에 있기라도 한다면, 그들은 평생 동안의 이야깃거리를 건지게 될걸.”

운차이는 그런가 하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고는 파하스의 말이 옳다고 느꼈다. 이들 평범한 이들의 소박한 즐거움을 이해하지 못한 까닭은 우리 가 너무 격동적으로 살기 때문일까. 네리아는 주위를 휙 둘러보고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모두 다 선량한 사람들은 아니네요. 전 지금 당장 두 명의 소매치기와 다섯 명의 바람잡이를 지적해 보일 수 있어요.”

“놀랍습니다, 레이디 네리아! 대단히 날카로운 눈이군요. 어느어느 녀석입니까? 제 하프는 제 사랑의 연장이요, 제 검은 제 심장의 연장이올시다. 단 칼에!”

“냅둬요. 내 눈에 보이는 걸 보니 풋내기들이네.” 

네리아는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파하스의 고귀한 검에 풋내기의 피가 묻는 것은 보고 싶지 않 은걸요.”

파하스는 눈물이 글썽할 정도로 감동해 버린 탓에 쳉과 파, 그리고 아달탄마저도 지나친 다음에야 간신히 일행의 뒤를 따라갈 생각을 떠올릴 수 있 었다. 운차이는 주위를 스윽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인파에도 좋은 점은 있겠지. 숲속에 숨은 나무가 되어 후작을 감시하도록 하자.”

“그 감시 수단에 대한 찬성과 별개로 체포의 길이 역경으로 포장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이해했어. 감시는 쉬워도 잡기는 어렵다, 이 말이냐?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 말이다.”

“칼을 뽑아들고 고함치면 다 흩어져.”

“흐음.”

일행들은 사람들의 물결에 휩쓸려 신스라이프 저택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선두의 사람들의 이런 느긋한 자세와는 달리 일행의 뒤쪽에서는 조용하지 만 신경 거슬리는 분위기가 감돌았다.

네리아는 속상한 심정으로 옆을 돌아보았다. 분위기를 밝게 만들어보려고 애를 써봤지만 쳉과 파는 여전히 냉랭한 분위기에 잠겨 있었다. 파는 여전 히 고개를 숙이고 가는 척을 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흘끔흘끔 눈을 들어 쳉의 등을 쳐다보고 있는 것은 나이트호크의 날카로운 눈이 아니더라도 얼마 든지 간파할 수 있었다. 그리고 쳉은 등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었지만 그 넓은 어깨는 수십 마디의 말보다 더 확실하게 쳉의 의사를 전달하는 듯했다.

쳉은 파에게 떠나라고 했던 말을 취소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파는 쳉의 말을 무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파는 쳉의 눈치를 보며 슬금 슬금 따라다니는 꼴이 되고 있었다. 파는 그런 태도를 취하지 않았고 쳉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쳉은 파에게 아무런 말도 걸지 않고 파 역시 쳉에게 말 을 건네기 힘들어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황은 분명했다. 그리고 네리아는 이 둘의 모습을 보면서 재미있어하는 것만큼이나 우울해하기도 했다. 네리 아는 애써 이야깃거리를 생각해 냈다.

“이봐요, 쳉! 호위 무사는 당연히 칼 잘 쓰죠?”

칼잡이가 칼 이야기에 흥분하지 않으면 어디에 흥분할까. 네리아는 자신이 꽤 똑똑한 행동을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쳉은 무뚝뚝하게 대답했을 뿐 이었다.

“칼을 쓰지 않을수록 우수한 호위 무사입니다. 지켜야 할 상단을 싸움에 휘말리게 하는 자는 호위 무사로서 실격입니다.”

“와, 멋진 말. 하지만 겸손한 거죠? 이봐요, 파, 쳉 칼솜씨는 어때요?”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어요.”

“이그, 멋진 말 좀 해봐요. 나는 지금 다국적 검사단에 의해 호위되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고 싶단 말이에요. 이를 테면, 누군가 내 미모에 혹해서 무 례를 범할 수도 있잖겠어요? (파하스마저도 고개를 조금 돌리며 곤혹스러워했다.) 왜들 그런 이상한 표정이람, 아침에 먹은 게 잘못되었어요들? 흠흠! 뭐 꼭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쨌든 우리들은 후작과 차 마시러 가는 것은 아니잖아요. 위험, 위험. 이 상황에서 자이펀 검법, 바이서스 검 법, 그리고 헤게모니아 검법이 동원 가능하다는 것은 멋지잖아요. 하아, 나는 궁금해요. 어느 검법이 최강일까?”

파하스가 재빨리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당연히 헤게모니아 검이오. 차넬의 후손이 다루는 검을 다른 검과 비교할 수는 없지.”

그란은 조용히 있자고 마음먹었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입이 벌어지고 말았다.

“도외시된 대왕의 검에서 거론된 차넬의 검은 무의미할 것으로 사료된다.”

파하스는 그란의 말을 못 들은 척했지만 네리아는 새실새실 웃으며 말했다.

“차넬의 검을 거론하고 싶다면 루트에리노 대왕의 검을 먼저 말하라는 말이지? 멋진 대답이라고 생각하는데. 자, 이제 네 차례야, 운차이.” 운차이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퉁명스럽게 말했다.

“뭐?”

“자이펀 검 자랑할 차례라고.”

“왜?”

“이이잇! 자이펀 검법이 3국 중 최약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말이야?”

운차이는 혀를 차고는 냉랭하게 대답했다.

“살기가 적을 꿰뚫으면 손에 쥔 것이 검이든 활이든 똑같다.”

“가격은 다른데?”

“……머저리 칼잡이가 자신의 검으로 상대를 이기려 하는 법. 이럴 경우, 상대가 진다하더라도 그 상대는 칼에 졌을 뿐 내게 진 것은 아니다. 진짜 검 사는 검이 아니라 자신으로써 상대에게 이기는 법이다. 칼을 다루는 기술로서의 검법을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해.”

“뭐어가 그렇게 어어려워어어!”

네리아는 투덜거렸고 머저리 칼잡이로 치부된 그란과 파하스 역시 볼이 부은 채로 씨근거렸다. 하지만 운차이는 그 모든 사람들에게서 고개를 돌려 앞만 보면서 걸어갔다. 오로지 쳉만이 운차이의 말에 미소를 지어 보였고, 네리아는 그 미소를 놓치지 않았다.

“어? 쳉. 웃네요? 운차이의 말에 동감해요?”

“살기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검법의 우수성을 비교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데는 동감합니다. 검법이 아무리 우수해도 멀리서 화살 한 대 쏘아붙이면 꼼짝할 수가 없습니다. 검법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마법사도 수십 명의 검사를 생매장할 수 있지요. 검뿐만 아니라 마법조차 모르는 상인이라도 펜과 주판만 있으면 일개 군단을 파산 상태에 빠트릴 수도 있습니다.”

“씨이! 인적 없는 오솔길에서 검사와 맞닥뜨린 상인이 펜과 주판 꺼내서 상대를 할까요? 모르죠, 상대방 눈에 잉크라도 던져 넣고 발 아래에 주판이 라도 던져서 미끄러지게 만들면…….”

네리아는 앙탈부리듯이 말했고 다른 일행들 역시 네리아의 말을 앙탈로 받아들여서 피식거리며 웃었다. 하지만 파는 웃지 않았고 쳉 역시 미소만 지 을 뿐 부드러워지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네리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아, 숨 막히는 기분이야. 헤게모니아 사람들은 다 제정신이 아니라는 말이 사 실인가 봐.

그때였다. 이 일행을 통틀어 가장 극적인 이빨을 가지고 있는 일행이 불쾌한 심사를 토로하기 시작했다.

“크르르…………….”

네리아는 기겁했고(‘헤게모니아 개도 제정신이 아닌가?) 파 역시 당황한 표정으로 아달탄을 내려다보았다.

“아달탄? 왜 그래?”

“으아앙……, 저기!”

네리아가 먼저 원인을 간파했다. 그녀가 손짓하고 있는 곳을 바라본 파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아달탄의 적의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은, 여전히 혼잡스러운 인파 사이에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호객하고 있는 노점상 중 하나였다. 이 노점상 의 불행은 그가 온갖 잡동사니들과 함께 고양이 울음소리가 나는 피리를 팔고 있다는 점에 있었다. 소란스러운 대로에서 전투적으로 상인 정신을 불 태우고 있던 노점상은 다시 한번 길게 피리를 불어 보이며 외쳤다.

“고양이와 꿈의 콜리의 기적을 찬양하러 가시면서 이 피리가 없어선 안 되오! 냐아옹!”

이 울음소리가 결정적이었다. 아달탄은 별 무리 없이 상대방이 사람과 상당히 유사하게 생긴 고양이라고 판단했다. 정정당당한 대결을 즐기는 아달 탄은 짧고 거친 울음소리로 공격 개시를 알린 다음 상인을 향해 돌격했다.

“컹!”

아무리 낙관적인 자가 보더라도 아달탄이 그 피리에 관심이 있다고는 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일행들뿐만 아니라 상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노점상은 자신을 향해 벌어진 아달탄의 거대한 입 크기에 질려버리고 말았다.

“으, 으아악! 괴물이다!”

“아달탄! 안 돼!”

파는 자지러지는 비명을 지르며 말을 몰아가려 했지만 군중들로 가득 찬 대로에서 갑작스럽게 말을 달리게 할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아달탄의 울음 소리를 듣자마자 옆으로 좌악 갈라졌고 아달탄은 그 사이를 거침없이 달렸다.

“크아아악!”

급박한 순간, 쳉의 손이 옆으로 뻗었다. 쳉은 오른손으로 안장에 걸어둔 물통을 집어듦과 동시에 엄지손가락으로 물통 주둥이를 강하게 튕겼다. 핑 그르르! 물통 뚜껑이 요란하게 돌기 시작하자 쳉은 왼손으론 캐시헌터의 고삐를 잡아올리며 두말없이 물통을 집어던졌다.

아달탄이 사내를 덮치기 직전, 비수처럼 날아간 물통은 아달탄의 몸통에 작렬했다. 퍽!

“컹?”

아달탄은 충격보다는 물을 뒤집어쓰고는 기겁했다. 제자리에서 거의 3큐빗은 솟아오른 아달탄을 보면서도 쳉은 침착함을 전혀 잃지 않았다. 

“잡아요.”

네리아는 갑자기 눈앞으로 다가오는 고삐에 당황했지만, 동시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아무 생각 없이 고삐를 부여잡았다. 왼손에 쥔 캐시헌터의 고삐 를 네리아에게 넘긴 쳉은 벌써 말에서 내려 아달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오해하진 말아줘. 너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야.”

쳉은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아달탄을 힘껏 포옹했다(다르게 표현하자면 아달탄의 목을 붙잡고 늘어졌다.). 상당히 많은 생각과 많은 동작을 순식간에 끝낸 쳉이었기에 주위의 사람들 중에서 쳉의 모든 동작을 다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파악할 수 없는 시간 동안 아무도 예상할 수 없는 일을 처리 해 버리는 것. 마나를 쓰지 않는 마법사라는 별명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하!”

파하스는 짧은 탄성으로 쳉의 동작에 대한 감탄을 표현했다. 운차이 역시 쳉이 보여준 일련의 동작들에 감탄하긴 했지만 탄성을 지르는 것보다는 더 건설적인 행동을 취했다.

“그 피리를 버리고 달려!”

노점상은 아무런 반항 없이 운차이의 말에 따랐다. 노점상이 집어던진 피리는 아달탄의 머리를 향해 날아갔고 아달탄은 쳉에게 억류되어 있는 채로 도 몸을 솟구치며 피리를 깨물었다. 와작! 피리는 간단히 박살났다. 노점상은 그 피리 꼴이 될 뻔한 자신의 몸을 부둥켜안은 채 죽어라고 달려갔다. 

“크르릉, 캬아악! 컹! 컹!”

“그란 씨가 하는 말 비슷하군. 알아듣기는 어렵지만 이해할 수는 있어. ‘이거 놔라, 저 녀석을 붙잡겠다.’ 이런 뜻이지?”

여전히 아달탄의 목을 완강하게 끌어안은 채, 쳉은 시답잖은 소리를 하며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아달탄의 몸부림에 따라 두 다리가 미끄러 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지지직! 기어코 쳉이 균형을 잃고 바닥에 주저앉은 순간, 그제서야 말에서 내려 아달탄에게까지 달려온 파가 오른발을 뒤로 크게 잡아당겼다. 쳉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오, 맙소사.

매끈한 호선을 그린 파의 오른발이 아달탄의 허벅지에 명중했다. 덕분에 쳉은 아달탄과 몹시 심하게 부딪히며 바닥에 구겨 박히고 말았다. 아달탄은 실제로 그러하리라 추측되는 것보다 더 아픈 표정을 지으며(한 마디로 엄살을 부리며) 비명을 질렀다.

“깨갱! 낑……!”

“이 못된 녀석! 백주 대낮에 미친 거야? 대로에서 이게 무슨 행패야!”

파는 흩어진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고함질렀다. 운차이와 그란, 파하스, 그리고 네리아는 각자 성격에 어울리는 감탄을 표시했고 맹렬히 기세를 올 리고 있던 아달탄은 풀이 죽어서 끙끙거렸다. 쳉은 그때까지도 아달탄의 굵은 목을 놓지 않았기 때문에 퍽 불편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파는 나직 하게 말했다.

“이제 놔도 돼. •쳉.”

“아, 고마워.”

파는 어쩔까 하는 표정으로 쳉을 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녀가 고민하는 사이에 쳉은 벌써 자리에서 일어서 바지를 툭툭 털고 있었다. 네리 아는 파가 내민 손을 자연스럽게 회수하는 일에 퍽 힘겨워하는 것을 잘 알아보았지만 바지를 털고 있던 쳉은 보지 못했다. 파는 창백해진 얼굴로 몸 을 돌려 다시 화이트풋을 향해 걸어갔다. 그때 파의 등을 향해 쳉이 말했다.

“아달탄은 너를 정말 무서워하는군. ………나처럼.”

파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앞의 말은 거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처럼? 파는 주저하면서 고개를 돌렸고 잔잔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쳉을 보았다. 파는 몹시 힘들게 말을 꺼냈다.

“나한테・・・・・・ 잘못한 게 많나…………, 보지?”

“말하진 않겠어. 부채감을 갖게 될 테니까.”

“나는…………, 모르겠는데?”

파는 간절한 표정으로 쳉을 바라보았지만 쳉은 대답하지 않았다. 쳉은 그저 씩 웃고는 네리아에게 맡겨둔 캐시헌터를 향해 걸어갔고 아달탄은 풀죽 은 표정으로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커다란 남자와 커다란 개가 비슷한 걸음걸이로 걸어가는 뒷모습은 파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주위를 가득 메운 인파는 파에겐 전혀 보이지 않았다. 파의 입이 느닷없이 열렸다.

“….쳉!”

걸음을 멈춘 쳉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엉겁결에 쳉을 불러 세우기는 했지만 아무 말도 떠올리지 못한 파는 낭패한 얼굴로 쳉을 마주보았다. 꽉 쥔 주먹 때문에 손톱이 손바닥으로 파고들 지경이었지만 파는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간단한 몇 마디 말이면 될 것이다. 잘못한 건 나야. 미안해. 쳉을 방해하고, 미를 못 만나게 하고. 그런데도 쳉은 화를 내지 않았어. 그러고는 내게 사과하다니, 그게 말이 돼?

그러나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파의 입술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한없이 커진 눈 속에 비친 쳉은 그 큰 모습도 작게 보였다. 파의 입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파는 말 하려 했다. 가라고 했지? 다시 한번 말해 봐. 그럼 난 아달탄을 데리고 스카니아 마을로 돌아가겠어. 전에 말했을 때는 거절했지만, 이젠 아냐. 한번만 더 말해 봐.

“쳉…….”

“가자, 파, 늦겠어.”

쳉은 미소 지으며 말했고 파는 다른 대답은 전혀 떠올리지 못했다.

“응.”

바이서스 출신의 나이트호크는 하늘을 바라보며 목이 터져라 웃고 싶은 자신을 억누르느라 고생했다. 파하스는 그럴듯한 말로 표현했지만, 나는 그 런 그럴듯한 말로는 표현 못하겠어. 그러니까 용서해요. 쳉, 파, 이 철부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