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 워커 3권 – 6장 잊혀진 것을 부르는 목소리 7

퓨처 워커 3권 – 6장 잊혀진 것을 부르는 목소리 7


7

아프나이델은 온몸의 힘을 배에 끌어 모아 힘차게 외쳤다.

“아! 시작하겠습니다!”

거인은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아일페사스는 거인을 바라보며 얼굴이 크다 보니 긴장도 상당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아프나이델은 두 팔을 위로 들어 올리며 온 힘을 모아 장엄하게 외쳤다.

“1보다 큰 자연수로서, 1과 그 자신으로밖에 나누어지지 않는 수를 소수라고 하오! 그렇다면 1부터 50 사이에는 몇 개의 소수가 있는지 말하시오!” 거인의 안색이 파랗게 변했다. 거인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신음을 내뱉었다.

“수학인가!”

거인은 깊은 신음을 내쉬며 두 팔을 들어올렸다. 엑셀핸드는 그것이 그대로 내리쳐질 것이라 믿고는 기절할 준비를 갖추었지만 거인은 자신의 머리 를 감싸쥐고 고뇌에 빠진 표정이 되었다. 아프나이델은 너무 크게 고함을 지른 후유증으로 조금 현기증을 느꼈다.

아프나이델은 헉헉거리며 거인을 쏘아보았다. 아일페사스는 새초롬한 표정으로 아프나이델과 거인을 번갈아 쳐다보느라 목이 꽤 아팠다. 거인은 땅 바닥에 앉아 있는 지금도 바라보는 아일페사스의 목이 꺾어질 만큼 까마득한 높이를 자랑하고 있었다. 아일페사스는 아프나이델의 허리를 쿡 찔렀 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아프나이델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르며 펄쩍 뛰어오를 뻔했다.

아프나이델이 입을 틀어막으며 성난 얼굴을 돌리자 그곳에는 커다란 눈을 깜빡거리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아일페사스가 있었다. 아일페사스는 손 을 들어올려 입을 가리며 낮게 속삭였다.

“나이드, 몇 개?”

“뭐!”

“아아, 나이드는 모르죠?”

아프나이델은 잠시 드래곤 로드에게 무슨 짓을 당하든지 간에 아일페사스를 무릎에 올려놓고 멍이 들 만큼 그 볼기짝을 갈겨주고 싶다는 폭력적인 충동을 가누느라 애써야 했다. 아프나이델은 깊은 심호흡을 한 다음에야 간신히 아일페사스를 향해 속삭여줄 수 있었다.

“열다섯 개야.”

아일페사스는 잠시 미심쩍은 표정으로 아프나이델을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아, 나이드도 알고 있었구나? 제가 가르쳐주려고 했는데.”

“끄흐으음!”

아프나이델은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아프나이델의 시야를 가로막고 있는 거인의 무릎은 그에게 어떤 종류의 행동도 허락하지 않았고, 그래 서 아프나이델은 침을 꿀꺽꿀꺽 삼키며 거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아일페사스 역시 거인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의 경우에는 거인이 모른다고 대답할 경우……………

•모르겠다!”

“까하하하! 오아, 바보. 그것도 몰라? 그런 숫자는 모두 15개이지롱? 오아! 바보네요?”

라고 말하기 위함이었다.

에델린은 거인의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거인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자신의 손가락보다 작은 소녀를 내려다보았 고, 엑셀핸드는 아일페사스의 입을 막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의 수염을 깎아주어도 아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아, 드래곤 로드여. 당신의 여식이 죽게 된 것은 안타깝지만, 왜 당신의 저 멍청한 딸네미 때문에 나까지 덩달아 죽어야 되는 겁니까!

하지만 거인은 아일페사스를 눌러 죽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콧김을 뿜어내며 시선을 조금 돌렸을 뿐이다.

“좋아, 한 번은 졌다. 다음은 너!”

거인이 그 통나무 같은 손가락으로 지적한 것은 에델린이었다. 에델린은 그 손가락이 눈앞에서 점점 커지는 모습을 보며 숨을 들이마셨지만 다행히 도 그 손가락은 에델린의 공포가 극에 달하기 전에 멈췄다.

에델린은 크게 심호흡을 한 다음 빠르게 말했다.

“자이에서 가장 빠른 낙타는 사흘 동안 39펜큐빗을 걸어간 후 하루 쉽니다. 바이서스에서 가장 빠른 말은 이틀 동안 33펜큐빗을 달려가며 하루 반을 쉬어야 됩니다. 그렇다면 졸란에서 동시에 바이서스 임펠을 향해 출발했을 경우 엿새째에는 누가 앞서 있을까요?”

거인은 다시 파랗게 질려버렸다.

엑셀핸드는 씨익 웃었다. “불이오.”

거인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뜯기 시작했다.

“크아아악! 불이라고? 불? 불이라고 했느냐!”

“못 맞춘 것을 인정하시겠소?”

엑셀핸드는 여전히 차분하게 말했다. 거인은 그런 엑셀핸드를 내려다보다가 눈을 질끈 감으며 외쳤다.

“그래! 이놈아, 못 맞췄다! 못 맞췄어!”

아프나이델은 벅찬 기쁨에 사로잡혀 엑셀핸드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안도감에 빠진 얼굴로 기절해 버리는 엑셀핸드를 부축하기 위해 황급히 달려 가야 했다.

잠시 엑셀핸드를 간호하고 그를 깨우기 위한 소란이 일어났다. 엑셀핸드는 아프나이델의 열성적인 간호에 힘입어 볼을 문지르며 정신을 차렸다. “이 자식아. 그렇게 볼을 때려대면 정신 차리려다가도 도로 기절하겠다!”

아프나이델은 엑셀핸드에게 쥐어박힌 정수리를 문지르면서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때까지 성질을 꾹 참으며 일행을 내려다보고 있던 거인은 말도 하지 않은 채 성난 동작으로 손가락을 내밀었다.

거인의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곳에는 이루릴이 서 있었다.

이루릴은 고요히 거인이 내민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프나이델은 순간적으로 엑셀핸드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그런 아 프나이델의 불안감과는 아무 상관없이 거인은 잔뜩 노한 목소리로 짧게 말했다.

“네 차례다! 엘프!”

아프나이델은 심장이 뱃속을 굴러다니는 기분을 느꼈다. 이루릴이, 과연 거인이 못 알아맞힐 수수께끼를 말할 수 있을까?

아프나이델 일행이 내는 수수께끼 중에서 거인이 하나라도 맞추게 된다면 아프나이델은 그에게 루트에리노 대왕의 소재를 말해 주어야 한다. 그런 약속이 아니고서는 거인의 발걸음을 잡아둘 수가 없었다. 물론 아프나이델은 거인의 지식 수준을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저토록이나 간단한 산수 문제를 낸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거인은 날카로운 예지의 빛 같은 것은 보여주지 않았다.

하지만 유피넬의 어린 자식인 엘프 이루릴이 과연 거인을 속여 넘길 만한 문제를 낼 수 있을까? 저 조화의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엘프가?

아프나이델보다는 조금 늦었지만 에델린과 엑셀핸드 역시 거의 비슷한 고민에 빠졌다. 그들은 이제 피가 마르는 심정으로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이 루릴은 조용히 머리를 들어 거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단아한 입술이 벌어졌다.

“거인이시여.”

아프나이델과 에델린, 그리고 엑셀핸드는 동시에 침을 삼켰다. 이루릴은 평온한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의 눈동자는 무슨 색입니까?”

“뭐야?”

되묻는 거인의 목소리에는 경악조차도 담겨 있지 않았다. 거인은 그야말로 얼빠진 표정으로 이루릴을 바라보았고 이루릴은 상냥하게 다시 반복했 다.

“당신의 눈동자는 무슨 색인지 여쭤보았습니다만.”

거인은 손을 들어 자신의 왼쪽 관자놀이와 남아 있는 왼쪽 눈 주위를 만졌다. 하지만 거인이라고 해서 손으로 만져서 색깔을 감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지는 않다. 거인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 눈・・・・・・, 눈동자 말이냐?”

“예. 거인이시여.”

“내 눈이 무슨 색이더라…………. 모르겠는데, 모르겠어. 내 눈동자가 무슨 색깔이지?”

거인은 그야말로 궁금하다는 목소리로 물어왔다. 이루릴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예쁜 파란색이군요. 아름답습니다.”

“?”

거인은 웃고 있는 이루릴을 따라서 얼빠진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그 얼굴을 보던 아프나이델은 격한 딸꾹질을 시작했다. 터져나오는 웃음을 초인적인 자제력으로 참았기에 나오는 딸꾹질이었고 그래서 아프나이델은 꽤나 고통스러웠다. 반면 에델린은 맹렬하게 몸을 돌리고는 후드를 깊이 내려썼다. 그러고는 후드 속에서 소리는 내지 않으며 미친 듯이 웃었다.

거인은 쑥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아프나이델은 그 웃음을 보며 저 거인이 눈동자가 예쁘다는 말을 처음 들어본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거인은 뒤통수를 긁적이다가 말했다.

“허헛, 참. 내 눈 색깔도 모르고 있었군. 흐음. 그래. 좋아. 못 맞췄어. 내 자신에 대한 질문이니 화도 못 내겠군. 흐음.”

“오오, 맙소사! 자, 잠깐만! 다시 말하라!”

에델린은 문제를 다시 말해 주었고 거인은 손가락을 들어 땅바닥을 파헤쳤다. 마치 지진과도 같은 소리가 울려퍼졌기에 아일페사스는 감탄하는 표 정으로 바라보았다. 아일페사스는 거인이 땅을 파헤쳐 적어놓은 숫자를 보며 고민하려 했지만 그 숫자는 너무 컸기 때문에 그녀의 눈에는 잘 들어오 지 않았다. 아일페사스가 스스로 땅바닥에 숫자를 써서 계산해 볼까 하는 망상에 빠질 때쯤, 거인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낙타는 65펜큐빗째를 걷고 있지만, 말은 66펜큐빗을 달린 다음 쉬고 있다! 말이 앞서 있다!”

에델린은 말 그대로 펄쩍 뛰어올랐다.

“틀렸어요!”

“뭐, 뭐라고?”

“낙타가 앞서요! 말은 사막을 못 달려요! 졸란과 바이서스 임펠 사이에는 사막이 있어요! 우핫하하!”

에델린은 박수를 치며 로브 자락이 뒤집어지도록 겅중겅중 뛰었다. 한참 동안 날뛰며 좋아하던 에델린은 잠시 이상한 느낌을 받으며 주위를 둘러보 았다. 그곳에서는 아프나이델이 고개를 돌리고 있었고 엑셀핸드가 혀를 차고 있었으며 멀뚱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이루릴과 동정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아일페사스가 있었다. 에델린은 확 붉어진 얼굴을 아래로 숙이고는 로브 자락을 거세게 잡아당겨 옷주름을 폈다. 에델린의 거 친 손길에 휘말린 로브가 아우성을 질렀다.

거인은 입을 쩍 벌린 채 자신이 적어놓았던 숫자와 에델린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차츰, 거인의 얼굴에서 경악보다 분노의 기색이 두드러지기 시작했 다. 거인은 무서운 기세로 입을 열었다.

“아아아……, 이런 간특한!”

“하, 하지만 당신은 못 맞췄어요. 그렇죠? 인정하세요!”

아프나이델은 온몸의 용기를 짜내어 외쳤다. 거인은 그런 아프나이델을 무섭게 노려보다가 ‘끙!’ 하는 신음을 토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하지만 더 이상 수학 문제는 받아들이지 않겠다!”

“예? 아, 아니,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시끄럽다! 네놈들은 수학 문제 말고는 아무것도 모른단 말이냐? 나는 더 이상 그런 숫자 놀음을 하고 싶진 않다. 다음은 너! 조그만 녀석!”

아프나이델은 뭔가 항의를 하려다가 거인이 엑셀핸드를 가리키는 것을 보고는 말을 도로 삼켰다. 엑셀핸드는 수염을 조금 떨긴 했지만 그런 대로 당 당한 자세로 말했다.

“흐음. 뭐, 나도 숫자 놀음에는 관심 없소. 조, 좋소, 해봅시다.”

“빨리 말해라, 빨리!”

“좋아요……. 음음.”

엑셀핸드는 턱수염을 쓸어 만지는 척했지만 그건 누가 보더라도 시간을 끄는 행동임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아프나이델은 불안감을 느끼며 엑 셀핸드를 바라보다가 그 대신 자신이 한 번 더 수수께끼를 내겠다고 제안하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때 엑셀핸드가 말했다.

“모든 자가 이것을 볼 수 있지만

이것의 모양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소.

이것은 한없이 가볍지만

아무리 힘센 자라도 이것을 들어올릴 수는 없소.

이것은 결코 단단하지 않지만

강철이라도 거뜬히 부술 수 있소.

이것은 무엇이오?”

아프나이델은 혀를 깨물 뻔했다. 맙소사, 저렇게 쉬운 문제를 내다니! 아프나이델은 절망감에 사로잡혀 거인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아프나이델은 자신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표정이 거인의 얼굴에도 떠올라 있는 것을 보고는 당황해 버렸다.

거인은 입술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갑자기 거인은 오른손을 들어올렸다가 땅바닥을 쾅! 내리쳤다.

“그런 것이 어디 있냐! 이 조그만 꼬마놈이………….”

“모르시겠소?”

아프나이델은 엑셀핸드를 존경해 버리기로 결심했다. 거인이 땅바닥을 내려쳤을 때 나는 소리에 일행의 말들은 아우성을 지르며 날뛰었으며 그 기 수들도 잔뜩 겁을 집어먹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엑셀핸드는 침착하게 되물었던 것이다. 거인은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그래, 모르겠다! 그게 뭐냐?”

이루릴은 별말 없이 조용한 미소만 지어보였다. 거인은 헛기침을 몇 번 한 다음 손을 들어올렸다.

“자, 이제 네 차례다. 문제를 내어보거라.”

거인은 이제까지와는 달리 평온하게 말했다. 하지만 아프나이델은 이루릴만이 그의 불안은 아니었음을 깨달아야 했다. 어느새 딸꾹질까지 멈춘 채, 아프나이델은 처절한 시선으로 거인의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인물을 바라보며 소리 없이 오열했다.

아아, 아일페사스!


“따라서 정답이 무엇인지 말해 주지 않는 사태는 있을 수가 없으므로 정답을 말해야 하오!”

제레인트의 말을 듣고 있던 그란은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나보다는 나은 헤게모니아 어로군. 루손은 그덴 산의 거인이 오고 있다는 말 에 미친 듯이 도망치려 들었고 레이저는 그런 루손의 허리를 감싸 안은 채 난동을 부리지 못하도록 억누르고 있는지라 제레인트의 말에 대답해 줄 겨 를이 없었다.

“루손! 루손! 가만있어. 가만있지 못하겠냐! 잡아두고 있다잖아. 엉!”

“꺄아아아! 거인, 거인이 온다고! 우리를 쫓아오고 있는 거야. 우리를 쫓는 거라고! 꺄아아!”

“너 이젠 비명도 참 능숙한데. 어억! 어딜 차는 거야!”

제레인트는 그런 두 사람을 보다가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도대체 이 사태를 주도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며 내게 정답을 말해 줄 사 람은 누구지? 제레인트는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어 운차이를 돌아보았다.

“그런 표정 짓지 말아줬으면 하는데.”

“말해 주십시오. 여기에는 그 정답을 알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까?”

운차이는 골치 아픈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저 떠벌거리기 좋아하는 마법사 녀석의 말에 의하면, 후작이 죽어야 그 정답이 드러나는 모양인데.”

“그럼 주………….., 이런, 테페리여!”

제레인트가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을, 그러나 운차이는 정확하게 파악했다. 그란은 베일 것 같은 시선으로 운차이를 바라보았지만 운차이는 꼼짝도 하 지 않았다. 그란은 무거운 음색으로 말했다.

“죽이자.”

“안 돼.”

그란은 다시 운차이를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하지만 운차이는 그 찢어진 눈으로 그란의 시선을 모두 받아내며 제레인트에게 말했다.

“그 정답을 찾으면 모든 사태가 해결된다고 했지. 그런데 누가 그랬나?”

“페어리퀸 다레니안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덴 산의 거인만이 부활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바이서스에서는 데스나이트들과 솔로처, 그리고 천 공의 3기사들이 부활해서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

운차이마저도 숨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네리아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뭐라고요? 데, 데스나이트…………, 솔로처요? 농담하세요?”

제레인트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빠르게 말했다.

“아아! 그랬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농담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기괴한 사태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 페어리퀸께 조언을 구했습니다. 그러 자 그녀께서는 과거로 향하는 흐름과 미래로 향하는 흐름, 그 교차점을 찾아야 이 사태가 해결될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신스라이프 의 문제라는 것을 알고 이곳으로 달려오던 도중에 그덴 산의 거인을 만난 것입니다!”

쳉의 팔에 안긴 채 제레인트의 말을 듣고 있던 미는 창백한 표정이 되었다. 운차이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파하스를 바라보았다. 파하스는 꺼멓게 죽 은 얼굴로 제레인트의 말을 듣고 있다가 운차이의 시선을 알아차렸다. 운차이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시선으로 파하스를 바라보았다.

“그럼…………, 당신 지, 진짜 100년 전에 죽었던 자인가?”

“누차 말하지 않았느냐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구나. 갑자기 외롭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데. 데스나이트? 무지개의 솔로처라고? 내 부활 같은 것은 거론할 가치도 없는 것으로 치부될 듯하군. 하하하………….”

제레인트는 당혹한 표정으로 파하스를 바라보았다.

“당신도 부활한 분입니까?”

파하스는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이야 이켈리나의 파하스라고 불러주시오. 갈림길에 선 외로운 나그네의 벗이 될 분이여.”

“파하스? 파하스라면, 구두장이 믹 더 빅을 부르신 그 파하스이십니까?”

“그렇소이다. 그런데 페어리퀸 다레니안께서는 그 교차점을 찾아야 이 사태가 해결될 거라는 조언을 주시었다고 하셨소? 흐음. 이보게, 운차이. 자 네도 들었나?”

운차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파하스는 망토를 거머쥐어서는 화려한 동작으로 뒤로 넘겼다. 그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멋 부리기를 포기하지는 않을 자였다. 운차이는 파하스가 천천히 검을 뽑아드는 것을 보며 눈살을 조금 찌푸렸다.

“아는 것을 다 말해 버리는 저 순진한 마법사 덕분에 얻은 지식이 있지. 그는 저 위에 외로이 굳어 있는 자가 죽어야만 그 교차점이라는 것이 드러날 거라고 추측했다. 그 추측은 비약이 심하고 못 알아들을 논리 구조를 통해 도출된 것이지만, 그럴듯하긴 하더군. 그렇잖은가? 운차이?”

“그럴듯해.”

검이 길기 때문에 파하스의 발검은 화려했다. 파하스는 그 기다란 검을 옆으로 비스듬하게 내리고는 고개를 약간 숙인 채 말했다.

“척살해야 할까? 지금까지 턴빌 시청이 그래왔던 것처럼? 모르겠네. 어쨌든 그 정답이라는 것은 밝혀져야 되겠어. 하세나. 주저할 필요는 없을 듯하 이.”

운차이는 복잡한 심경으로 후작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파하스를 보았다. 그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머문 곳은 그란이었다. 그란은 바위 같은 얼굴로 운 차이를 마주보다가 짧게 말했다.

“죽이자.”

운차이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후작을 죽이는 것은 지금까지의 그의 목적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후작의 죄 때문이었다. 지금 후작을 죽인다면 그것 은 후작이 짓지도 않은 죄 때문에 죽이는 꼴이다. 이런 식으로는…………, 쳇. 할슈타일 후작을 순교자로 만들어주는 기분이잖아.

그러나 제레인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안 됩니다!”

운차이는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제레인트는 주먹을 흔들고 상체 전체를 흔들며 말했다.

“그럴 수는 없어요. 안 됩니다. 확실하지도 않은 일로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은 집단 공포에 지나지 않아요! 집단 공포는 맹목적이에요. 페스트가 창 궐하면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몸에 검은 점만 있어도 그를 죽이죠!”

네리아는 페스트라는 말에 흠칫했지만 제레인트는 그런 네리아를 눈치 채지 못한 채 계속 말했다.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될 수는 없어요. 그건, 그건 정말 확실한 겁니까? 저 마법사가 말했다고요? 그런데 그게 그럴 듯하다는 것 말고 뭔가 결정적인 증거가 있는 것입니까?”

“그런 건 없군.”

운차이는 대답하면서 뭔지 모를 안도감을 느꼈다. 제레인트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그건 안 돼요. 절대로 안 됩니다.”

파하스는 그런 제레인트에게 경의 어린 고갯짓을 해보이며 말했다.

“테페리께서는 그의 신실된 지팡이에게 합당한 애정과 가호를 베푸실 것이오. 하지만 제레인트. 그렇다면 어찌 하자는 말씀이시오?”

“어떻게 하냐고요? 당연한 것을 물어보시는군요. 문제의 답을 모르면 그 출제자에게 물어봐야 됩니다. 그 문제를 만든 사람은 누굽니까?” 운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른 누구보다도 먼저 그란에게, 재빨리 말했다.

“알았어. 그란! 저 프리스트다. 주블킨 일레드마!”

그란은 잔뜩 찡그린 표정으로 운차이를 바라보았지만 아무 말 하지 않고 검을 뽑아들며 콜리의 프리스트들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운차이와 파 하스, 그리고 제레인트 역시 재빨리 그 뒤를 따랐다. 네리아는 트라이던트를 뒤로 돌려 쥐며 달리려다가 문득 멈춰 서며 쳉을, 그리고 그의 팔에 안겨 있는 미를 바라보았다. 네리아는 순간적으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미, 너 정말 행복하니? 4년 후에 죽을 네 남편의 팔에 안겨 있는 넌, 행복한 거니?

“미, 돌아와서 기뻐요.”

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리아는 쳉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미 단단히 지키고 있어요. 설마 또 놓치고 싶지는 않겠죠?”

“도와드리겠습니다.”

“아니, 괜찮아요. 우리 일인 걸요.”

그러나 쳉은 어느 새 미를 놓아주고는 검을 뽑아들었다. 그는 아달탄을 내려다보며 짧게 말했다.

“믿어도 되겠지?”

아달탄은 피식 웃어버리고 싶었을 테지만 그의 얼굴 구조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아달탄은 미의 발치에 도사리고 선 채 앞을 쏘아보았다. 쳉은 미에게 짧은 시선을 던지고는 몸을 돌렸다. 네리아는 당혹스럽게 쳉의 등을 바라보다가 그를 따라 달리며 말했다.

“이봐요, 쳉! 여기 있어도 된다고………….”

“저도 들었습니다. 데스나이트, 솔로처, 천공의 3기사, 그덴 산의 거인, 그리고 파하스와 저 앞의 신스라이프. 그들에게 억하심정은 없지만 잘못된 일이라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당신들의 일이 아닙니다.”

저 남자는 어떻게 달리면서도 저렇게 물 흐르듯 말할 수 있는 거지. 네리아는 혀를 내두르며 그 뒤를 따라 달렸다. 미는 아달탄의 목을 쓸어 만지며 눈으로는 쳉의 등을 쫓았다.

운차이는 달려가며 곧장 숨을 들이마셨다. 제레인트와 네리아는 그런 운차이의 모습을 보더니 기겁하며 귀를 틀어막았고 파하스와 쳉은 그런 두 사 람의 모습을 보며 의아해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파하스와 쳉은 인간의 목소리라고 생각할 수 없는 고함 소리에 비틀거렸다.

“주블키인 일레드마아!”

콜리의 프리스트들은 등 뒤에서 들려온 이 끔찍한 소리에 뒤를 돌아보기에 앞서 반사적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궤헤른은 띵한 머리를 붙잡으며 운차 이를 쏘아보았고 레이저의 품에 안긴 채 발광하고 있던 루손은 펄쩍 뛰어올랐다.

운차이와 그란, 쳉, 파하스, 네리아, 그리고 제레인트는 콜리의 프리스트들의 등 뒤에 일렬로 주욱 늘어서서는 각자의 무기를 앞으로 뻗어냈다. 쳉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지만 파하스는 눈이 튀어나올 듯한 표정으로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이봐, 운차이. 자네 조금 전에 어떻게………….”

“말하라아! 그 정답은 뭐냐아!”

운차이는 다시 벽력 같은 고함을 내질렀고 파하스는 그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님을 확인받을 수 있었다. 불시에 고함을 질러 상대를 압박하고, 정신을 차리기 전에 배후를 포위하고, 그리고 원하는 것을 얻어낸다. 얼어붙은 얼굴로 돌아보는 주블킨을 향해 운차이는 살벌한 시선을 보냈다.

“어서 말햇! 그 정답이 뭔지!”

운차이의 눈에서 쏘아져 나오는 눈빛은 주블킨의 눈동자를 꿰뚫어 그 두뇌에 직접 파고드는 듯했다. 주블킨은 질린 얼굴로 말했다.

“나, 나도 모르오. 모르오!”

“그럼 어떻게 해야 알 수 있나, 엉!”

벌벌 떨며 운차이를 바라보고 있는 주블킨의 눈에 문득 날카로운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주블킨은 팔을 들어올려 계단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마법사가 말한 대로요! 저자! 저자를 죽여야만이 그것을 알 수 있소. 그래야만 정답이 드러나게 되어 있소!”

궤헤른과 가이버, 그리고 니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허공에 묶여 있던 신스라이프는 무서운 얼굴로 발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바라보고 있었지 만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았다. 운차이는 이를 악물며 제레인트를 돌아보았고 제레인트는 간절하게 외쳤다.

“그 외에는 없습니까? 다른 방법이라는 것은 전혀 없어요?”

“없소! 콜리에 맹세코 말하겠소만, 이 문제는 원래부터 그렇게 만들어져 있소! 여덟 명의 희생자는 아홉 번째의 정답을 부르게 되어 있소!”

제레인트는 숨 가쁜 얼굴로 주블킨을 바라보다가 궤헤른을, 그리고 그 너머 레이저와 그 뒤쪽에 굳어 있는 할슈타일 후작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페 어리퀸은 그 교차점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주블킨은 후작을 죽여야만 그 교차점이 드러난다고 말하고 있다. 이 명제들이 도출해 내는 결론 은 제레인트의 입으로는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란 하슬러는 섬뜩하게 느껴질 만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후작을 죽이지.”

운차이는 일그러진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궤헤른을 보았다. 정말 그런 방법밖에 없나? 그때 궤헤른의 등 뒤에 있던 레이저가 그제서야 루손 을 놓아주며 외쳤다.

“잠깐!”

운차이는 희망찬 표정으로 레이저를 바라보았다. 저 떠버리 마법사가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저 녀석이 입을 열면 쓸 만한 말만 나왔는데, 이번 엔 뭐지? 레이저는 운차이의 기대를 알아차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명쾌한 어투 그대로 말했다.

“이봐요, 주블킨. 당신이 진실을 말할 때는 그것의 일부만 말하는 버릇이 있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어요. 그리고 나는 그 감춰진 부분을 지적해 내는 것에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어. 당신 말대로, 저 뒤의 저 남자가 죽어야 그 정답이 드러난다는 것은 내가 이미 추리한 바지요. 그런데, 조금 전 나 는 그 정답이 드러나면 신스라이프는 완전한 부활을 맞이하게 될 거라고도 추리했는데?”

주블킨은 죽일 듯한 눈으로 레이저를 바라보았다. 그는 저 마법사가 싫었다.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을 말하게끔 만드는 사람을 좋아할 사람은 없겠지 만.

“그래. 뭐든 말해라. 뭐든!”

레이저는 주블킨의 고함 소리를 무시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흐음. 앞뒤가 모두 맞아떨어지는군. 하지만 한 가지 이상한 것이 있는데.”

운차이는 조바심을 참을 수 없었다.

“이봐, 당신. 레이저라고 했던가. 그렇게 혼자서 중얼거리지 말고 간단하게 말해 주지 않겠소?”

“음? 그러지요. 간단하게 말이지요? 신스라이프의 수수께끼는 여덟 명의 희생자를 죽인다. 그 대가로 세상에 나타나게 된 것은 과거로 향하는 흐름 과 미래로 향하는 흐름의 교차점. 그리고 그 교차점이 등장했기에 잊혀진 것들은 부활하게 된다. 그리고 그 교차점은 여덟 번째 희생자의 죽음에 의 해 신스라이프 선생의 앞에 나타난다.”

“그런데 뭐가 이상하다는 거요?”

“아아. 조금 전 나는 주블킨 씨에게 그덴 산의 거인이 왜 부활했느냐고 물었고, 주블킨 씨는 과거로 향하는 흐름과 미래로 향하는 흐름의 교차점이 현재에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지요. 그리고 신스라이프 선생은 그 교차점을 만나야만 완전히 부활하신단 말이야. 지금처럼 저렇게 땅에 발도 못 디디는 신세에서 벗어나시는 거지. 그런데…”

주블킨은 싸늘한 표정으로 레이저를 바라보았다. 레이저는 씩 웃으며 주블킨에게 질문했다.

“왜 거인은 마음대로 땅을 디디는데, 신스라이프 선생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 거지?”

파하스는 부지불식간에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보고 말았다. 그렇군. 나는 마음대로 이 땅 위를 걸어 다니고 있어. 그리고 네리아 역시 놀란 표정으로 파하스를 돌아보았다. 레이저는 집요한 말투로 주블킨을 향해 질문했다.

“거인과 신스라이프 씨의 차이는 뭐지? 과거로 향하는 흐름과 미래로 향하는 흐름의 교차점이 현재에 존재하기 때문에 잊혀진 것들이 부활했다고 하셨소. 그렇다면 그덴 산의 거인이든 신스라이프 선생이든 똑같이 부활할 수 있겠지. 거인은 벌써 완전히 부활해서 마음대로 이 땅 위를 걷고 있지 요. 그렇다면 왜 신스라이프 선생만은 그 교차점을 만나야만이 완전히 부활할 수 있단 말이지요? 거인과 신스라이프의 차이는 뭐요!”

주블킨은 우울한 표정으로 레이저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그의 늙은 얼굴 위에 웃음이 떠올랐다. 주블킨은 팔짱을 끼며 담담하게 말했다.

“말하지 않겠다.”

레이저는 하마터면 ‘콜리의 이름으로 묻겠소!’라고 외칠 뻔했다. 하지만 지금의 질문은 그렇게 물을 수 없다. 지금까지는 레이저가 모든 상황을 추론 해 낸 다음 콜리의 이름으로 그것을 부정하겠느냐고 질문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무 추론도 해내지 못한 상황이므로, 주블킨은 그냥 입만 닫아버리 면 자신의 신을 부정할 필요가 없다.

주블킨은 그렇게 레이저로 하여금 입을 닫게 만들어놓고는 천천히 몸을 돌려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나는 말하고 싶은 것을 다 말했다. 당신들은 과거로 향하는 흐름과 미래로 향하는 흐름의 교차점을 찾고 싶은 게지? 그것을 알아내고 싶다면 계단 위의 저자를 죽여라.”

운차이는 사나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우리가 저자를 죽이면 그 교차점이 나타나며 신스라이프는 완전히 부활하는 것이군?”

주블킨은 자신 만만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다.”

운차이는 호흡을 가다듬느라 한참 동안 말을 못했다. 제기랄, 이건 후작을 순교자로 만들어주는 것보다 더 지저분하군. 한 정신 나간 노인의 부활을 위해서 후작을 죽이는 꼴이 되는 건가. 하지만 페어리퀸은 그 교차점을 찾아야만 이 사태가 해결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저자의 손에 놀아 나는 꼴이 되더라도 결국 할슈타일 후작을 죽여야 되는가.

도대체 잊혀진 것을 불러대고 있는 그것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