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 워커 3권 – 7장 멸망은 완성의 귀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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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무수스 소장은 팔짱을 낀 채 물끄러미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국방 대신의 텐트라고 해서 대단할 것은 전혀 없었다.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보다 많은 결단과 보다 높은 수준의 판단에 비해 볼 때는 황량하게까지 보일 지경이었다. 바닥에 깔린 낡은 카펫은 국방 대신의 품위를 지키기보다는 오히려 깎아내리고 있었고, 흔들리고 있는 등불은(초가 아니라 등이었다.) 이곳이 유목민의 텐트가 아닌지 착각하게 만들었다. 무성의하게 던져놓은 듯한 쿠션들은 아무래도 안락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쿠션이라는 것이 원래 그냥 놓아두기만 해도 안락해 보인다는 점을 볼 때 이 삭막한 배치는 놀라울 지경이었다. 여기엔 냉수도 없군. 히무수스 소장은 갑작스럽게 불평거리 를 떠올렸다. 국방 대신의 텐트에 불려 가면 시원한 냉수 한잔은 얻어 마실 줄 알았는데.
소장은 수염 끄트머리를 살짝 꼬다가 말했다.
“태양입니까, 모래입니까?”
함은 피식 웃고 말았다.
“태양.”
“모래가 아닙니까?”
“아냐, 태양이야. 따라서 이건 절대 비밀일세. 자네와 나만 알고 있어야 해.”
“그 말씀 몇 번째 하시는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다섯 번째.”
히무수스 소장은 웃어버렸다. 먼저 불려왔던 다른 네 명의 지휘관들도 모두 피식 웃어버렸으리라.
태양과 모래. 사막에서 더 치명적인 것은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태양이 아니다. 희게 백열하는 태양은 언뜻 공포를 야기하지만, 사막 위를 거니는 사 람을 죽이는 것은 실은 모래밭에서 뿜어져 올라오는 복사열이다. 자이펀 육군에서 언급되는 태양과 모래는 기만전술과 기습 전술의 은유이다. 무섭 게 타오르지만 저녁만 되면 감쪽같이 사라지는 태양은 기만전술, 그리고 조용히 깔려 있지만 그 위로 걷는 사람을 죽이고야 마는 모래는 기습 전술이 다.
따라서 함이 말한 내용은 이렇다. ‘태양처럼 불타올라라, 하지만 적을 이길 필요는 없다.’
“명심하게. 자네는 지휘관이야. 병사들은 이기기 위해 싸운다고 생각하게끔 놔두게. 자네 자신조차도 그렇게 믿어야 하고. 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 에서는 내 말을 명심하고 있어야 하네.”
히무수스 소장은 조금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말씀하셨듯이, 저는 지휘관입니다.”
그렇게 세세하게 말씀해 주시지 않아도 잘 압니다. ‘태양’이라는 단어 하나로 충분합니다. 히무수스가 말하지 않은 것들을 모두 들은 함은 고개를 조 금 끄덕였다.
“노파심일세. 이해하게. 이제 상세 계획을 말해 주겠네.”
히무수스는 긴장된 표정으로 국방 대신을 바라보았다. 이것은 기밀인 이상 필기는 절대로 안 된다. 모두 암기해야 될 것이다. 히무수스는 숨소리마 저 낮춘 채 국방 대신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자네 마음대로 하게.”
히무수스는 잠시 국방 대신이 더 말할 것이라 생각하며 기다렸다. 그리고 국방 대신은 히무수스가 대답하기를 기다렸다. 그래서 둘 사이에는 묵직한 고요가 내려앉았고 그 공백 속에서 등불만이 낄낄거리듯이 흔들렸다. 히무수스는 어깨를 누르는 고요의 무게에 힘겨워하며 입을 열었다.
“……그게 전부입니까?”
“그렇다네. 자네는 이미 이게 태양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 완전한 전격전이 될 걸세. 보급은 없고, 지령도 없네. 식량은 모두 개인 휴대할 수 있을 만 큼 휴대한 다음 모자라면 현지 조달하게. 현지 조달이 안 되면 즉각 달아나게. 속도를 늦추는 모든 행위는 생략하네. 속된 말로, 뻑적지근하게 분탕질 을 치고 돌아다니라는 말일세. 지령이 없는 만큼 각개격파의 위험은 더욱 높아지네. 그렇기 때문에라도 더 더욱 속력이 필요한 거네. 알겠나?”
“외람되지만 제 의견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마음을 열겠네.”
“너무 위험한 전략입니다. 이곳에 모인 전력은 자이펀 최정예입니다. 이 소중한 전력들을 무질서하게 바이서스 국내에 풀어놓고는 나 몰라라 해버 리시겠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바로 그렇네. 그렇기 때문에 더욱이 최정예가 필요했던 것이고.”
“아무리 최정예라 하더라도, 그런 지리멸렬한 상태에서는 힘을 쓸 수가 없습니다!”
함으로서는 다섯 번째로 듣는 똑같은 내용의 항변이었다. 그랬기에 함은 이제 약간의 즐거움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 함은 히무수스 소장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공포. 우리들을 소모품으로 사용하실 생각이오? 기대. 어떤 상상도 할 수 없는 놀라운 전략이 있는 거요? 자기기만. 나라면 그런 어 려운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리고……….
함은 똑같은 대답을 다섯 번째 반복했다.
“걱정하지 말게. 2개월도 못 버틴다고는 말하지 않겠지?”
“2개월이라고 하셨습니까?”
“이 전쟁은 50일 내에 끝나네. 그러니 2개월이지. 그리고, 그 전쟁이 끝나는 시점에서 자네의 부대가 주둔하게 되는 바이서스의 영토는 자네 것일 세.”
히무수스 소장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물론 자이펀 인에게는 토지 소유욕이 별로 없다. 사막은 토지라고 부를 수도 없는 곳이며, 바다는 오로지 그림 오세니아의 것이다. 하지만 바이서스의 땅이라면 이야기가 전혀 달라진다. 그래서 히무수스 소장은 함의 말에 내포된 엄청난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 “그 말씀 진담이십니까?”
“진중엔 농이 없는 법일세. 어떤가, 히무수스 소장. 자넨 2개월도 버티지 못할 지휘관은 아니겠지. 하탄을 위해 힘써 주게.”
“잘 알겠습니다.”
히무수스는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몸을 일으켰다. 따라 일어선 함은 히무수스를 가볍게 포옹한 후 텐트 바깥까지 안내했다. 히무수스는 씩씩한 걸음 으로 자신의 진지를 향해 걸어갔다. 진지 군데군데서 흔들리는 횃불 빛이 소장의 뒷모습을 잠시 비춰주었다.
그대로 몸을 돌리려던 함은 발걸음을 멈췄다.
별빛을 받아 반짝이는 칼피아 호의 수면이 그의 시야를 가볍게 자극해 왔다. 지휘관들과의 독대는 모두 끝났고, 그래서 함은 가벼운 걸음걸이로 호 수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텐트 앞에 서 있던 호위병들이 함을 뒤따르기 시작했지만 함은 가볍게 손을 들어 제지했다.
“혼자 걷고 싶네.”
호위병들은 조금 당황했지만 함이 진영 안이라고도 볼 수 있는 호숫가로 걸어가는 것을 보고는 다시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갔다.
밤의 호숫가는 의외로 소란스러웠다. 많은 부대들이 모여 있었기에 취사 정리를 하기 위해 나온 병사들만 해도 호숫가가 시끄러울 정도였다. 병사들 은 어둠 속에서 나타난 국방 대신의 모습을 보고는 당황해서 들고 있던 물동이를 집어던지거나 설거지 거리를 팽개쳐둔 채 경례를 해왔고, 국방 대신 은 조금 미안한 듯한 미소를 보이며 발걸음을 돌렸다.
조금 더 걸어간 후에야 함은 비교적 조용한 공간을 찾을 수 있었다. 수면 바로 가까이까지 다가서 있는 숲속으로 접어들자 진지의 횃불도, 텐트들의 모습도, 그리고 소란스러움도 멀어졌다. 밤의 숲속이었지만 두 개의 달이 모두 떠올라 있는지라 함은 어렵잖게 앉을 만한 곳을 찾을 수 있었다. 나무 등걸에 기대앉은 함은 호수의 수면 위로 떨어져 내리는 별빛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서 빛나고 있는 것은 별빛이 아니었다. 다섯 명의 지휘관들을 모두 속여 넘긴 후 찾아온 약간의 통쾌감과 씁쓸함, 자괴감이 뒤 섞인 묘한 감정이었다.
함은 자신의 내부를 향해 변명해 보았다.
‘그들에게 건전한 동기를 부여한 것이다.’
하지만 함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은 부하들에게 동기를 부여하여 보다 높은 전투 능력을 끌어내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었다. 함이 스스로까 지 속여가면서 저질러버린 일은……………
‘군벌.’
함은 자이펀의 군대에 군벌을 조장한 것이었다. 함의 명령에 따라 칼피아 호에 몰려든 최정예 부대는 하탄을 위해 싸우는 군대가 아니라 지휘관의 영토와 재물을 위해 싸우는 부대로 변신했다. 이것이 어떤 효과가 되어 돌아올지에 대해서는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다섯 마리의 맹수를 바이서스라는 초원에 풀어버린 것이다. 그들로 하여금 보다 빠르고 보다 강하게 날뛰도록 하기 위해서 굴레도 고삐도 채찍도 치 워버렸다. 대초원을 차지한 다섯 맹수는 그곳을 영토로 삼아 자신을 살찌울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고국을 향해 이빨을 들이댈지도 모른다.
‘먼 훗날, 자이펀의 역사가는 나의 이름을 악명으로 기술할 것인가.’
왜 그런 것일까.
합리적인 이유를 댈 수는 있다. 가장 짧은 시간에 최대한의 효과를 올리기 위해서 지휘도 생략하고 보급도 없애버렸다. 거기에서 오는 불리한 점을 스스로 타파해 낼 수 있도록 최정예 부대만을 골라냈다. 최정예 부대이기에 가장 큰 타격을 줄 수 있으며, 동시에 최정예 부대이기 때문에 살아날 확 률도 높은 것이다.
게다가 함은 군벌 조성의 위험을 최대한으로 줄이기 위해 50일이라는 한계 시점도 못 박아 두었다. 50일 동안 점령할 수 있는 땅이 그렇게 많을 리 가 없다. 50일은 강화 제안과 회의, 그리고 그 체결에 걸리는 시간을 모조리 계산하여 도출해 낸 가장 짧은 시간이다.
하지만 함이 군벌을 조성할 가능성을 만들어버린 것은 분명하다. 그들 다섯 중 얼마나 살아남을지는 모르지만 살아남은 자는 하탄의 궁전으로부터 턱없이 멀리 떨어진 거리에, 자이펀의 땅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비옥한 토지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몇 번을 생각해 봐도 이것은 군벌 조성이라는 결 론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함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무도 없는 밤의 숲속인 만큼, 그 표정은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어쩔 수 없어.’
상대를 강화 회담의 자리로 끌어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다. 위험은 멀고 효과는 가깝다. 옛말에도 있듯이, 오늘의 문제에 대해서라면 엘프보다 차라리 오크에게 조언을 청하는 법이다. 문제에 대해 고민하다가 시간을 놓치는 것보다는 되는 대로 처리하는 방식으로라도 문제에 달려드는 법이 낫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뱀파이어에게도 조력을 구하는 법이지.”
“무슨 말이지?”
“혼잣말이었어. 앞으로 나오겠나.”
함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그러나 어느새 뒤에 나타난 시오네는 함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대신 시오네는 천천히 걸어와 함의 등 바로 뒤 에 섰다. 시오네의 손이 천천히 들어올려졌다. 그녀의 메마른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시오네는 함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시오네는 웃음을 터뜨렸다.
“어깨가 부서지겠군. 나를 벨 거야? 그렇더라도 어깨가 그렇게 굳어 있어서야 어디 검이라도 제대로 뽑겠어?”
“내 어깨에서 그 손을 치워라.”
“싫은데?”
“그 손을 베어내겠다.”
“무섭군.”
시오네는 순순히 손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시오네의 말에서도 그 행동에서도 무서워하는 기색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함은 시오네가 그의 앞으로 돌 아올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때까지도 그의 오른손은 계속 칼자루를 쥐고 있었다.
시오네는 검은 망토로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망토 위와 덥수룩한 머릿결 사이에서 하얗게 도드라지는 얼굴뿐이었지만, 함은 그 얼굴을 바라보고 싶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함은 시선을 보낼 곳이 없어졌다. 그래서 함은 시선을 낮추어 땅을 바라보며 말했다.
“보고해.”
“언제 정령사가 되었지? 놈에게 무슨 명령을 내리는 거야?”
“네게 말한 거다. 보고해, 시오네.”
“아무 문제없어. 데밀레노스 공주에게는 호위가 거의 없더군. 원하는 어떤 시점에라도 데밀레노스를 아샤스에게로 돌려보낼 수 있어.”
“암살자는 구했나.”
“암살자? 내가 암살자인걸.”
함은 고개를 들어 시오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샤스의 재가) 프리스티스인데. 네가 그녀에게 접근할 수 있나?”
“아아, 나는 태어나기도 전에 아샤스에게 바쳐진 처녀의 피는 어떤 맛일지 궁금해.”
“문제가 없는 모양이군. 결행일은 일주일 뒤로 한다.”
“일주일? 왜 그렇지?”
함은 고개를 조금 돌려 턱으로 진지 쪽을 가리켜 보인 다음 말했다.
“그들은 그 시점에 푸른 산맥을 넘어 달리고 있을 테니까.”
“아아, 그래 알았어.”
함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시오네가 떠나지 않는 것을 깨닫고는 다시 고개를 들어올려 시오네를 바라보았다. 시오네는 무표 정한 얼굴로 함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 옆으로 별들이 반짝여 시오네의 하얀 얼굴은 마치 밤의 하늘에 매달린 것처럼 보였다.
“뭐지?”
“호기심.”
“어떤?”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지. 이런 장대한 작전을 구사중인 국방 대신이 떠올릴 만한 표정이 아니야.”
“표정?”
“흥분도 없고, 즐거워하는 기색도 없군. 아무도 없는 이런 숲속이니만큼 표정에 신경 쓸 필요도 별로 없을 텐데, 네 표정은 너무 굳어 있군.”
“네 앞에서 누가 즐거워할 수 있겠나.”
“그런 문제인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않는데.’라고 말하면서 시오네는 앞으로 한 발자국 내디뎠다. 함은 시오네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고 시오네는 이제 천천히 망토를 옆으로 감아쥐며 한쪽 무릎을 꿇어 함과 눈높이를 맞췄다. 함은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경고하겠는데, 내게 이상한 눈빛을………….”
“시끄러워.”
함은 입을 다물었다. 시오네는 팔짱을 끼고는 오른손을 들어 턱을 감싼 자세로 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함으로서는 곤혹스러운, 심지어 불쾌하기까 지한 상황이었다. 시오네의 얼굴이 그의 얼굴 바로 앞에 있었고 그녀의 낮은 호흡 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무엇보다도 참기 어려운 것은 시오네의 몸 에서 풍겨나는 설명하기 어려운 냄새였다. 함은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왜 그렇게 바라보지?”
“숨기고 있는 것이 뭐지?”
“그런 게 있다 하더라도 네게 말해 줘야 할 필요는 못 느끼는데.”
시오네는 함의 말에 대해 아무런 대답도, 어떤 표정도 짓지 않았다. 대신 시오네는 턱을 쓰다듬던 오른손을 천천히 돌렸다. 시오네의 턱을 떠난 오른 손이 천천히 앞으로 뻗어가며 그녀와 함 사이의 공간을 느리게 움직여갔다. 시오네의 손가락이 얼굴에 닿기 직전, 함은 칼로 자르듯 말했다. “멈춰.”
시오네의 손가락은 함의 말을 따르듯이 공중에서 멈췄다. 그러나 시오네는 그 손가락을 거두어들이지 않고, 이제 위쪽으로 천천히 움직여갔다.
시오네의 검지는 함의 얼굴에서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간격을 둔 채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마치 그의 얼굴 윤곽을 만지듯. 함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으며 시오네를 쏘아보고 있는 가운데, 이마까지 올라갔던 손가락은 다시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시오네는 함의 얼굴을 양쪽으로 쪼개듯이 얼굴 가운데를 따라 손가락을 움직였다.
턱을 지난 손가락은 이제 목까지 내려왔다. 함의 목울대 바로 앞에서 시오네의 손가락은 멈춰 섰다. 함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키고는 그런 자신에 대해 화를 냈다. 하지만 함의 목 바로 앞에 위치한 시오네의 검지는 그로 하여금 검으로 겨냥당한 듯한 기분을 느끼게 만들었다.
“뭐하는 짓이지?”
시오네의 깡마른 손가락에서 길쭉이 뻗어나온 손톱은 그대로 함의 목울대를 꿰뚫어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함은 시오네가 그 손가락이 아니라 자신 의 두 눈을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함은 그 두 개의 퀭하고 어두운 눈을 마주보며 말했다.
“무슨 의미지.”
시오네는 여전히 함의 목을 겨냥한 채 메마르게 말했다.
“너를 만지고 싶군, 장군.”
“용납하지 않아.”
“내가 조금 전에 너의 얼굴을 만진 것 같은가? 천만에. 나는 네가 죽은 뒤, 너의 얼굴이 썩고 그 아래 근육까지도 사라진 다음에 나타날 말끔하게 육 탈된 너의 해골을 짐작해 본 거야. 단단하고, 텅 비고, 무표정한 네가 멋대로 사용하여 세상을 왜곡했던 두 눈이 있던 자리에는 텅 빈 두 개의 구멍. 그리고 그 구멍 너머로는 네 추억을 지녀 너를 구성하던 뇌가 담겨 있던 빈 공간이 보이겠지. 자신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단어들을 말하고 맛있는 음 식과 뒤섞여 즐겁게 움직이던 혀는 사라져 절대로 거짓을 말하지 못하게 된 턱뼈만이 남겠지.”
함은 말없이 시오네의 눈을 쏘아보았다. 내 눈에는 네가 해골로 보이는데.
“그때도 나는 지금과 같은 모습일 거야. 어쩌면 난 너의 해골을 쓰다듬어 볼 기회를 가질지도 모르지. 지금은 용납하지 않느니 뭐니 하던 그 고약한 혀도 없어지고 나서, 나는 네 해골의 바깥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에는 네 아내뿐만 아니라 너 자신조차도 만질 수 없던 네 해골의 안쪽도 만질 수 있을 거야. 네 커다란 눈 구멍 안쪽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뇌가 붙어 있던 자리를 더듬어볼 수 있겠지. 재미있다고 생각되지 않나? 네 해골의 안 쪽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지 않아?”
함은 갑자기 스멀거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뼈마디가 툭툭 불거진 시오네의 손가락이 자신의 눈을 뚫고 들어와 얼굴 안쪽, 그 자신의 해골 안쪽을 천천히 더듬는…………. 함은 욕지기를 참기 위해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말릴 순 없겠군. 죽고 나서는 어쩔 수 없으니.”
“죽고 싶니?”
“뭐라고?”
“정말 죽고 싶으냐고. 정말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으냐고. 정말 아무도 너를 기억 못하게 될 때까지, 그래서 네가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될 때까지 시간이 내처 흐르도록 내버려두고 싶으냐고.”
“그건 누구에게나………….”
“네게 묻는 거야! 대답해!”
함은 시오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이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는지라 달리 다른 곳을 볼 수도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 함은 대답했다.
“죽고 싶다.”
뱀파이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기다렸다. 함은 목 앞을 감돌고 있는 시오네의 손가락을 잊어가며 말했다.
“태어났기에 어쩔 수 없이 죽는 것이 아니다. 죽어야 하기에 죽는 것이다. 나는 죽고 싶다.”
“죽여줄까.”
“싫다.”
“문지방에 서 있는 고양이만큼의 지능도 없는 인간 같으니. 들어서지도 않고, 나가지도 않고.”
함은 고양이를 길러보았기 때문에 시오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시오네는 언제 고양이를 길러본 것일까? 문지방에 서서 방 안을 물끄 러미 바라보는 고양이의 모습은 개는 보여주지 않는 독특한 모습이다.
“그런 건 아냐.”
“그럼 뭐지.”
“죽음은 약속되어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 가장 마지막에 받을 가장 큰 선물이지. 그리고 그 선물을 받고 나면 더 이상 다른 선물은 받지 못한다. 그 렇기에 보다 많은 선물을 받은 다음 죽음을 받으려는 거야.”
함은 자신의 말이 어딘지 모르게 루트에리노 대왕의 유명한 말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죽음은 약속된 휴식.’시오네는 가멸찬 미소를 지으며 말했 다.
“죽음이 선물이라고? 장군이여. 전쟁터에 널브러진 시체들에게 그렇게 말해 보겠나?”
“나는 그들에 대해 슬퍼하고 눈물 흘릴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죽음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끝내 가지지 못한 삶의 다른 부분들에 대해 슬퍼 하는 것이다. 죽음은 슬플 것이 하나도 없다.”
시오네는 고개를 갸웃했다.
“죽음이 슬프지 않다고?”
“상실된 삶에 슬퍼할 뿐이다.”
“같은 거야.”
“다르다.”
시오네는 몸을 일으켰다. 함은 무성의하게 끝나 버리는 대화에 아쉬움을 느꼈지만, 시오네가 떠나는 것에 대해서는 환영의 의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시오네가 일어서기만 했을 뿐 발걸음을 돌릴 낌새를 보여주지 않자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뭐지?”
“네가 들으면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 없는 뉴스가 하나 있어.”
“말해 봐.”
“데스나이트에 대해서 아나?”
“알고 있다만.”
“그들이 부활했다.”
함은 하마터면 벌떡 일어날 뻔했다. 조금 들어올렸던 몸을 다시 어색하게 아래로 내리며 함은 시오네의 얼굴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지?”
시오네는 함의 표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말 그대로야. 데스나이트들이 부활, 현재 켄턴 시를 공략중이야.”
“그들이 어떻게? 솔로처가 그들을 영원히 잠재운 것이 아닌가?”
“아, 그 이름이 나왔으니 말인데, 현재 켄턴은 솔로처의 지휘 아래 데스나이트들을 상대로 농성하고 있어.”
이번에는 되물을 기분도 들지 않았다. 함은 시오네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저 뱀파이어의 얼굴은…………, 사람과 똑같은 얼굴이지만 그 표정은 사람의 표정이 아니다. 함은 그 얼굴에서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농담으로는 어울리지 않는데, 은유로는 더 이상하고.”
“내 말은 모두 사실이야. 하탄에게 먼저 보고해야겠지만 닐림의 날개로 가는 길에 네게 먼저 말해 주는 것이지.”
“믿어야 되는 건가?”
“응.”
함은 다시 입을 다물었고 시오네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함을 바라보았다. 이해할 수 없는 말에 꽤나 당황한 함은 한참 후에야 평범한 말 한 마디를 겨우 할 수 있었다.
“다크사이드인 데스나이트들이라면 부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솔로처가 어떻게? 누군가가 그를 부활시켰단 말이냐?”
“아니. 그냥 일어났어. 켄턴의 시민들은 데스나이트가 부활하자 그를 저지하기 위해 솔로처도 부활했다는 식으로 여기고 있는 것 같던데. 유피넬의 저울은 길고, 헬카네스의 추는 무겁다고들 하지.”
“신의…… 역사란 말인가?”
“지금 뱀파이어에게 신학에 대해 묻고 있는 거라면 나는 너를 머저리로 판정해 주겠어.”
“알았어.”
“더 있어.”
“또 뭐?”
“솔로처를 돕고 있는 세 명의 기사가 있어.”
“세・・・・・ 명의 기사?”
“장미의 기사단의 영원한 전설. 모든 기사들로 하여금 최고의 명마 위에 앉아서도 꿈꾸는 듯한 시선으로 하늘을 바라보게 만든 자들. 흐음. 이런 이 름들이 따라다니지.”
함은 자신의 입을 믿을 수 없었다. 그의 입은 그 스스로도 억제할 수 없이 말을 꺼내고 있었던 것이다.
“천공의 3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