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 워커 3권 – 7장 멸망은 완성의 귀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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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트는 조용히 고개를 떨구었다. 고요한 예배당을 감도는 공기 속에는 은은한 초 내음과 나무 내음, 그리고 뭐라 말할 수 없는 건조한 향기가 감돌 고 있었다. 창문을 통해 비스듬히 떨어지는 햇살은 케이트의 앞머리에 부딪혀 눈을 부시게 만들었다. 조용한 오후였고, 케이트는 충만한 신앙심 속에 서 경건하게 기도하기 시작했다.
“독수리와 영광의 아샤스여.”
다이앤은 하마터면 신음 소리를 낼 뻔했다. 이곳은 레티의 수도원인 것이다. 그러나 케이트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독수리 한 마리만 보내주세요. 저도 천공의 기사가 되고 싶어요.”
다이앤은 황급히 케이트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예배당에서 기도 중인 소녀의 입을 틀어막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케이트는 그 와중에도 계속 중얼거렸다.
“이왕이면 냄새가 덜 고약한 독수리였으면 좋겠어요. 저는 썩는 냄새가 싫어요. 아, 기사들은 고행을 한다지요? 음………….., 좋아요. 그 냄새를 참고 견 디겠어요. 그 독수리에게 부끄러움을 가르치겠어요. 파란 비누로 그 독수리를 씻겨주겠어요.”
오로지 다이앤만이 이것이 얼마나 파격적인 제안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케이트가 거론하는 파란 비누는 다이앤이 선물한 것이었다.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며 그것으로 몸을 씻던 케이트는 그것이 닳는다는 것을 알고는 기절할 듯이 놀라버렸고, 그 이후로는 다이앤이 아무리 성화를 부려도 절대로 사용하지 않은 채 보관하고 있었다.
아샤스여. 다이앤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중얼거렸다. 그래도 저 애는 거래에 임하는 자세가 되어 있어요. 그렇잖아요?
케이트의 기도는 켄턴 시에 불고 있는 흥미롭고도 낭만적인 기류를 웅변적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천공의 기사들은 켄턴의 유소년들의 폭발적인 열 광을 불러일으키고 있었으며(“얘야. 장래에 뭐가 되고 싶으니.” “천공의 기사요!”), 이 도시의 전도유망한 청년들로 하여금 은밀한 경외감 속에 괴로워하게 하 고 있음과 동시에(“이보게, 기사가 되고 싶은 겐가?” “천공의 기사들 때문은 아닙니다. 저는 원래 거기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켄턴이 자랑할 만한 숙녀들로 하여금 시력 저하의 오해를 받게 만들고 있었다(“저것 봐! 무스타파 경이 날 봤어!” “아닌 것 같은데? 음. 왜 나를 보고 계실까.” “너 눈이 어떻게 되었니?”).
다이앤은 한숨을 내쉬었다.
“케이트 아가씨. 그래서는 안 돼요.”
거룩한 자세로 기도 중이던 케이트는 살짝 고개를 돌려 다이앤에게 새침한 표정을 보냈다. 다이앤은 낮게 속삭였다.
“이곳은 레티의 수도원이에요. 이곳에서 아샤스께 드리는 기도를 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레티와 아샤스는 서로 사이가 나빠요?”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세탁장에서 빵을 굽고 목욕탕에서 바느질을 해서야 되겠어요? 안 되겠죠? 레티의 수도원에는 레티를 만나기 위해서 찾아오는 거예요. 알겠어요?”
케이트는 미간을 찌푸린 채 다이앤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잠시 후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 모습을 보며 다이앤은 미소를 지었다. 케이트 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는 엄숙하게 말했다.
“라고, 아샤스께 전해 주세요. 레티 님.”
아아, 레티 님! 다이앤은 다시 눈을 감고 말았다. 저 애는 합리적이에요, 그렇죠?
기도를 마친 케이트와 다이앤이 예배당을 나서자 신학에 커다란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연병장이라고 불러줄 만한 마당이 나타났다. 일 개 수도원에 필요한 마당으로서는 지나치게 넓으며 동시에 지나치게 반반하게 손질되어 있는 이 마당에서 레티의 수련사들은 그들의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어깨에 힘 빼! 허리로 쳐라, 허리로!”
“네가 휘두르는 것이 아니다, 레티께서 휘두르는 것이다! 너를 잊어!”
저 말에서 레티를 ‘네 애인’으로 바꾼다면 여느 군대의 고참 하사관이 외치는 말과 특별히 다를 바도 없을 것이다(“애인 손목을 쓰다듬듯 부드럽게 검을 쥐 어라!”). 가벼운 차림을 한 채 줄을 맞춰 검을 휘두르고 있는 수련사들의 모습은 이 도시에서 자라난 케이트나 다이앤이 보기엔 별로 독특한 장면이 아 니었다. 그런데 다이앤은 수련사들의 앞쪽에 서 있는 몇몇 프리스트들(다이앤은 하사관, 혹은 조교라고 생각했다.)이 외치는 고함 소리에 이전에는 듣지 못 했던 말들이 섞여 있는 것을 깨달았다.
“레티께 맹세코, 이 멍청한 놈아! 넌 수련사다. 천공의 기사가 아니야! 적을 경배하지 말고 검을 경배해라!”
저게 무슨 뜻일까? 다이앤은 멍청히 선 채 프리스트를 바라보았고 그러자 어린애가 그렇듯이 금방 집중력을 잃어버린 케이트는 수련사들을 구경하 기 시작했다. 프리스트에게 꾸지람을 들은 수련사 역시 당황한 표정으로 프리스트를 바라보았다.
“저, 그게 무슨 뜻입니까?”
프리스트는 붉으락푸르락하는 얼굴로 수련사를 바라보았지만 다행히도 군대였다면 일어날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즉, 수련사의 무릎을 걷어차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대신 프리스트는 노한 기색이 완연한 얼굴로 낮게 말했다.
“네 상대는 적이 아니라 검이다. 적을 상대로 삼으면 네가 보통 칼잡이와 다를 바가 뭐냐? 칼잡이는 적을 가장 증오하며, 결국 칼잡이는 적을 사랑한 다. 하지만 너는 프리스트다. 네가 가장 두려워하고 동시에 가장 큰 사랑을 바쳐야 되는 것은 네 칼이다. 알겠냐?”
“아….. 저, 그런데?”
“이놈!”
군대야. 다이앤은 고개를 살짝 돌리며 인정했다. 걷어차인 무릎을 감싸 쥔 채 깡총깡총 뛰고 있는 수련사를 향해 프리스트는 격노한 목소리로 외쳤 다.
“그렇게 적을 쪼갤 듯이 검을 휘두르지 말란 말이다! 검이 힘들다. 엉! 검이 힘들어한단 말이다!”
케이트는 다이앤의 치맛자락을 잡아당겼다.
“다이앤, 저게 무슨 말이에요? 칼이 힘들어한다고요?”
다이앤은 고개를 돌려 케이트를 바라보다가 걸음을 재촉하며 말했다.
“마차에 올라가서 이야기하시죠, 케이트 아가씨. 기다리시지 않습니까.”
다이앤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던 케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당 한켠에 서 있는 마차 위의 마부석에는 도대체 잘못 배치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마부가 근엄한 얼굴로 케이트와 다이앤을 기다리고 있었다. 케이트는 마차를 향해 종종걸음으로 달려가며 말했다.
“딤라이트 겨어엉! 많이 기다리셨어요?”
케이트는 마차로 달려가며 외쳤다. 딤라이트는 가볍게 고개를 돌렸다.
“아닙니다, 레이디 케이트. 오르시지요.”
케이트는 딤라이트의 말을 따랐지만, 딤라이트와 다이앤 모두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마차에 올랐다. 마부석에 뛰어올라 딤라이트의 옆에 앉은 케이 트는 헤헤 웃으며 딤라이트를 바라보았다. 당황한 딤라이트는 잠시 케이트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레이디 케이트, 마차 안에 타십시오.”
“싫어요. 나도 여기 타고 싶어요. 안쪽은 갑갑해요. 다이앤! 다이앤도 여기 앉아요. 저기, 반대쪽에 앉으면 되겠네요.”
상당한 잔소리를 늘어놓으려고 마음먹고 있던 다이앤은 케이트의 이 제안에 재빨리 말을 삼켰다. 그러고는 ‘철없는 주인 때문에 몹시 속이 상하지만 아랫사람의 입장으로 주인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도 없으니 양해해 달라’는 상당히 긴 내용이 담긴 짧은 표정을 지어보이고는 재빨리 마부석에 올 랐다. 딤라이트는 순식간에 케이트와 다이앤에게 포위되어 버렸다. 난처한 표정으로 좌우를 둘러보던 딤라이트는 빙긋 웃고 있는 다이앤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만약 이 자리에 앉은 것이 딤라이트가 아닌 무스타파였다면 다이앤의 표정은 단숨에 해석되었을 것이다.
‘2대 1이에요. 물론 기사님께서는 200대 1이라도 물러서지 않으시겠지만, 어때요. 항복하시죠?’
물론 딤라이트는 무스타파가 아니었지만 더 이상의 항변이나 권고는 그다지 소용이 없을 것 같다는 점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딤라이트는 애꿎 은 말에게 화풀이를 했다.
“이랴!”
말들이 발을 떼고, 마차 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케이트는 환호를 지르고 싶었지만 수도원 안에서 떠들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래 서 케이트는 마차가 수도원의 정문을 통과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환호를 지르는 재치를 발휘했다.
“야아아!”
딤라이트는 미소 띤 얼굴로 케이트를 돌아보았다. 케이트는 팔을 휘두르며 환한 얼굴로 말했다.
“더 빨리 달려요, 더 빨리!”
“절대로 안 됩니다, 레이디 케이트.”
“히이잉! 조금만 더 빨리. 예? 조금만!”
딤라이트는 근엄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것은 전차가 아닙니다. 지금도 충분히 빠릅니다. 말들을 괴롭힐 필요는 없습니다.”
케이트는 딤라이트를 향해 입술을 비죽거려 보이고는 다시 옆을 바라보았다. 간신히 말할 기회를 잡은 다이앤은 다소곳하게 말했다.
“딤라이트 님. 수도원에 들르신 일은 어떻게 되셨는지요?”
“예. 원장님께 좋은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중요한 업무가 있으실 텐데도 케이트 아가씨와 저를 동반해 주신 것,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저희들 때문에 기사님께서 이렇게 마부처럼….”
“아니오. 괜찮습니다. 이것은 제 의무입니다.”
“예?”
“기사의 의무 말입니다.”
“아아, 예.”
딤라이트는 기사다. 그렇기에 모종의 상담을 위해 레티의 수도원장을 찾아오는 길이라 하더라도 그 길에 두 명의 레이디가 동행하고 싶어 한다면 말 대신 마차를 몰 수도 있는 것이다. 다이앤은 딤라이트가 말에 타지 못해서 불쾌해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실상과는 전혀 달랐다.
“검이 힘들다는 것은 무슨 말이지요?”
케이트는 고개를 돌려 딤라이트에게 질문했다. 딤라이트는 앞을 본 채로 대답했다.
“검이 힘들어할 까닭이 있습니까. 쇠붙이인데요.”
“아까 프리스트님이 그러던데…….”
“그것은 마치 그럴 거라고 생각하라는 말씀일 겁니다.”
“예?”
마차 바퀴는 잘 정리된 흙길 위에 뽀얀 먼지를 피워올리며 굴러갔다. 길 앙편으로 흐드러진 풀잎 속에는 늦은 봄꽃들이 나그네의 코를 자극하는 향 기를 피워올리고 있었다. 딤라이트는 내키지 않는 듯, 그러나 막힘 없는 말투로 설명했다.
“검을 경배하라는 말도 들으셨을 겁니다. 이런 예를 생각해 보시면 이해에 도움이 되시지 않을까 여겨집니다. 가느다란 갈대 줄기와 철봉, 양자 중 에서 어느 것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겠습니까. 물론 갈대 줄기가 가벼운 만큼 훨씬 쉽게 휘두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것은 철봉입니다. 갈대 줄기의 경우 어딘가에 부딪히기라도 하면 당장 부러질 테니까요. 검이 힘들어할 거라고 생각하라는 말은, 검이 어딘가에 부딪히면 부러질 거라고 믿는 것처럼 소중하게 다루라는 말입니다.”
“왜요? 칼이 잘 부서지나요?”
“서툰 대장장이가 아무렇게나 만든 검이 아닌 바에야 검이 부러지는 경우는 잘 없습니다. 하지만 검이 부러질 거라고 생각하게 되면 검을 쥔 손이 조심스러워지고 그 행동이 조심스러워질 겁니다. 쓸데없는 동작이나 자신의 균형까지도 해치는 큰 동작이 없어지겠죠. 레티의 프리스트께서는 대략 그런 뜻으로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저희들과는 조금 다르군요. 기사들이 견습 기사들을 가르칠 때는 검을 마음대로 뿌리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낼 수 있는 가장 큰 파괴력은 아무런 잡념도 없는 마음에서 오로지 간절한 염원만으로 무의식중에 내는 힘입니다. 수레에 깔린 아이를 구출하기 위해 수 레를 번쩍 들어올리는 어머니의 경우가 좋은 예가 되겠지요. 잡념이 섞이면, 그러니까 내가 상대를 이길 수 있을까, 이자를 벨 수 있을까, 피하고 나 를 때리면 어쩌나 등의 생각을 하며 검을 휘두르는 기사는 그 검끝이 흔들리고 동작이 흩어집니다. 검은 마음을 표현하며 흔들리는 검끝은 흔들리는 마음과 같은…………, 레이디 케이트?”
딤라이트는 잠시 고삐를 내려놓고는 망토를 풀어 케이트를 덮어주었다. 케이트는 조금 뒤척거리다가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 모습을 보던 다이앤은 살짝 웃었다.
“기사님, 대단하세요! 그 재주를 배웠으면 좋겠어요. 케이트 아가씨를 재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세요?”
딤라이트는 별 대답 없이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왠지 어울리지 않는 농담을 해버린 기분을 느낀 다이앤은 다시 앞을 돌아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묵 직한 고요가 내려앉았고 말발굽 소리와 바퀴 소리는 그런 두 사람을 비웃듯이 짜랑짜랑하게 울려퍼졌다.
“저, 무례한 질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무슨 말씀을 나누셨나요?”
이 하녀는 왜 기사의 일에 신경을 쓰는 걸까. 딤라이트는 조금 불쾌감을 느꼈지만 몸에 밴 예절은 다이앤의 질문에 대답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 것도 당장.
“제 거취에 대한 조언을 얻고자 했습니다.”
“거취요?”
“아시겠지만, 저는 죽은 자입니다.”
다이앤은 조금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딤라이트는 여상스럽게 말했다.
“이 시대에 잘못 던져진 자로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여쭤보았습니다.”
“그래서…………, 원장님께서는 뭐라고 하시던가요?”
“특별한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제 경우라는 것이 워낙 희귀한,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사상 처음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비교하여 이해할 만한 다른 경우가 없습니다. 하지만 원장님께서 해주신 말씀 중에 한 마디는 기억에 남는군요.”
“어떤 말씀인데요?”
“그건 모든 이의 고민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이앤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는 표정이 분명했지만 딤라이트는 더 설명하지는 않았다. 대신 딤라이트는 레티의 수도원의 약간 건조하기까지 한 원장실에서 그에게 조용히 이야기하던 수도원장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것은 모든 자들의 고민이오.’
딤라이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원장은 딤라이트가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아니, 무슨 말씀을 하실 것인지는 짐작하겠소. 당신과 당신 동료들의 경우가 유별나다는 것은 알아요. 그리고 내게는 당신이 겪은 것과 비슷하기라 도 한 경험조차 해본 일이 없는 것도 사실이고. 하지만, 고귀한 기사여, 이 모자란 자가 보기에 모든 이가 한 번쯤은 당신과 같은 고민을 하오. 자신이 잘못된 시대에 던져졌다는 것.’
딤라이트는 처연한 눈으로 원장을 바라보았다. 원장은 눈을 내리감았다.
‘딤라이트 경, 내가 해답을 줄 수 있을 거라고는 여기지 않겠지요. 핸드레이크라도 이런 질문에는 대답할 수 있을지 모르겠소. 이 시대는 당신을 부 른 적이 없고, 당신은 이 시대를 찾아오고자 한 적이 없소.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것은 모든 시대의 모든 이에게 마찬가지요.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다 는 말이 얼마나 허황된 말인지는, 당신 같은 성숙한 남자에겐 충분히 이해될 만한 말이리라 여겨집니다.’
‘어떻게 해야 됩니까.’
딤라이트는 피로감이 느껴지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원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든 자들이 선택하는 방식을 따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걸어가시오.’
‘저는 사라져야 할 자입니다. 이 땅 위를 걸을 수 없습니다.’
원장은 빙긋 웃었다.
‘반갑구려. 사실은 나도 그렇소.’
딤라이트는 잠시 침묵한 다음 작별 인사를 해야 한다는 것을 떠올렸다.
딤라이트는 상념 속에서 빠져나오려 했지만 더 많은 상념이 그를 찾아올 뿐이었다. 수도원을 찾기는 했지만 별 기대는 없었다. 다만 차마 그의 동료 들처럼 술과 전투에서 해답을 구할 수는 없었기에 수도원을 찾았을 뿐이다. 그런데 아무 기대 없이 찾은 수도원의 원장이 건넨 짧은 말이 그를 계속 된 상념에 잠겨들게 했다.
‘사실은 나도 그렇소.’
고민에 빠져버린 딤라이트의 얼굴은 다이앤으로 하여금 아무 말도 못 붙이게 만들었다. 그래서 다이앤은 레티의 수도원에서 성벽으로 돌아오는 긴 여정 동안 욕구 불만과 후회에 휩싸여 있었다. 차라리 케이트 아가씨를 데리고 마차 안으로 들어갈걸. 너무 불편해. 다이앤은 딤라이트의 건너편에서 곯아떨어진 케이트를 향해 눈을 흘기기까지 했다. 못된 아가씨, 괜한 고집을 피워 사람을 난처하게…………….
“눈이 불편하십니까.”
“아니오! 천만에요! 아가씨가 잘 주무시는지 걱정이 되어서요. 예, 그래서요.”
“아아, 네.”
딤라이트는 다시 입을 다물고 마차를 모는 일에만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가 다시 입을 연 것은 마차가 켄턴 성벽 가까운 곳의 갈림길에 접어들었을 무렵이었다.
“그레이!”
아무 말도 못하고 있던 다이앤은 숨통이 탁 트일 지경이었고 졸고 있던 케이트는 화들짝 놀라 일어나서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잠이 덜 깬 케이트 는 왜 이곳이 침대가 아닌지 이상하게 여기는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하지만 딤라이트는 상공을 바라보고 있느라 두 레이디에게 사과할 겨를이 없었 다. 딤라이트는 노기가 충천한 얼굴로 외쳤다.
“그레이! 이봐, 그레이! 지금 뭐하고 있나!”
하늘에서 약간 당황한 듯한 목소리가 딤라이트의 질문에 대답해 왔다.
“어, 딤라이트?”
“어, 딤라이트? 자네 지금 ‘어, 딤라이트?”라고 말했나? 지금 뭐하는 거냐고 물었잖아!”
“보고 있는 대로의 일을 하고 있다네, 친구. 아, 소개하겠네. 이쪽은…………, 그런데 아가씨 이름이 뭐더라? 아아, 클로디아! 클로디아 양을 소개하겠 네.”
딤라이트는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페가수스 헐스루인에 올라탄 처녀를 바라보았다. 클로디아라는 그 처녀는 약간 낭패 스러워하는 표정으로, 그러나 웃으면서 딤라이트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딤라이트는 분기탱천하여 말했다.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 이게 아니고!”
어쨌든, 딤라이트는 기사다. 그래서 딤라이트는 ‘이것아, 왜 내 페가수스 위에 네 엉덩이를 걸치고 있는 거냐?’라고 말할 수는 없다.
“클로디아 양. 어떻게 해서 미거한 본인의 승용물에 귀하신 몸을 맡기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만?”
클로디아는 뭐라고 대답하려 했지만 그때 그레이가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꽉 잡아요, 클로디아.”
그레이는 킨 크라이에 탄 채 헐스루인의 고삐를 이끌고 있었다. 그래서 헐스루인은 그레이의 인도에 따라 부드럽게 땅에 내려섰다. 딤라이트는 미숙 한 기수를 떨어뜨리지 않고 착륙한 헐스루인에게 애정 어린 시선을 보냄과 동시에 자신이 아닌 다른 자를 태운 데 대해서는 잡아먹을 듯한 시선을 보 냈다. 그레이는 그런 딤라이트를 보다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어떻게 그렇게 복잡한 시선을 보내나?”
딤라이트는 마차에서 뛰어내리며 말했다.
“눈이 두 개니까. 길어도 좋고 짧아도 좋지만………….”
·앞뒤는 맞아야 하고 태도는 착실해야 된다, 이 말이지? 알았어. 착실하게 앞뒤가 맞는 변명을 하겠네.”
하지만 그레이는 당장 변명할 수는 없었다. 딤라이트는 그레이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헐스루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서는 공손한 태도로 클 로디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클로디아는 잠시 당황한 눈으로 딤라이트가 내민 손을 바라보다가 퍼뜩 사태를 이해하고는 그 손을 붙잡고 아래로 내려 섰다.
“고맙습니다.”
“불편하시지나 않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비행은 익숙해지기 어려운 것이니까요.”
딤라이트는 클로디아를 향해서는 절대로 무례한 시선을 보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그레이를 바라보는 딤라이트의 눈은 무례한 정도가 아니라 살기를 담고 있었다. 그레이는 머쓱한 표정으로 주절거리기 시작했다.
“아아, 글쎄. 참 신기하더라고. 만난 지 그렇게 오래된 것도 아닌데, 놀랍도록 서로 의사가 통하던걸? 클로디아 양은 재치 있고 상냥한 아가씨였어. 금상첨화로 미인이시고. 그래서 말이야. 음, 난 자네가 저기 어린 숙녀를 태우는 것을 보고는 클로디아 양을 헐스루인에 태워도 될 거라고 생각했지. 보라고, 항상 말한 거지만, 킨 크라이의 등은 너무 좁잖아. 그런 점에서 무스타파 녀석은 정말 좋을 거란 말이야. 아이라의 그 넓은 등이라면 일개 소 대의 레이디를 태워도 될 걸.”
딤라이트는 꼿꼿이 선 채 그레이를 쏘아보았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레이의 말은 앞뒤가 맞지도 않았고 말하는 태도도 그다지 착실하지는 않았 다는 것이다. 그래서 딤라이트는 그레이에게 더 이상 다른 변명의 말을 기대하지 않은 채 몸을 돌려 클로디아를 바라보았다.
“레이디 클로디아. 저런 위험한 승용물에 오르시도록 방치한 점, 동료를 대신하여 사과드립니다. 마차에 오르십시오. 댁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예? 아, 아니에요. 기사님. 제 집은 가까워요. 저, 그리고 허락도 없이 타서 죄송합니다.”
“천만에요. 대충은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레이 휠드런 경은 쾌활한 사내니까요.”
딤라이트가 말한 ‘쾌활한 사내’라는 말에 담겨 있는 속뜻은 케이트를 제외한 그 자리에 있는 누구에게라도 바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었다. 앞뒤 없고 경우 없고 무례하다는 뜻을 쾌활하다’는 한 마디로 표현해 버리는 딤라이트를 보며 다이앤과 클로디아는 동시에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그리고 그 레이는 입매를 조금 뒤틀었다.
그러나 어쨌든 천공의 기사들의 우두머리였으니만큼 그레이는 클로디아가 사라지면 딤라이트가 어떻게 변할지 미리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레 이는 딤라이트와 클로디아가 작별 인사를 나누는 동안 재빨리 킨 크라이 위에 올라타면서 말했다.
“자, 딤라이트, 숙녀분들에 대한 용무가 끝나거든 어서 성벽으로 오게.”
“성벽? 왜지?”
“빛의 탑에서 샌슨 경이 보낸 사람이 도착했네. 우리의 늙은 친구는 그자가 가져온 것을 보고는 지팡이 없이도 하늘을 날겠다는 듯이 펄쩍 뛰더군. 자네도 보고 싶겠지?”
“곧 가겠네.”
그러나 잠시 후 딤라이트가 켄턴 성벽 위에 몸을 나타냈을 때는 두 명의 레이디를 동반한 모습이었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 간다고 주장하는 듯한 얼굴의 케이트와, 케이트 아가씨가 가는 곳은 어디든 간다고 주장하는 듯한 얼굴의 다이앤이 딤라이트의 좌우에 붙은 모습으로 함께 나타났던 것이다. 그레이는 그런 딤라이트를 몰상식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전선까지 여자를 끌고 다니냐는 둥의 악의 없는 농담을 퍼부어 댔지만 딤라이트 는 고지식하게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는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며 항변했다.
“유일하고도 가장 순수한 기쁨을 내게 주는 기사도에 비춰볼 때 내 행동 그 어느 곳에라도 부끄러움의 소지가 있다고는…………….”
“딤라이트, 시끄럽소. 조금만 더 기다렸다가는 난 미쳐버리고 말 것 같은데.”
솔로처는 옆을 가리켜 보이며 그렇게 말했다. 거기에는 길게 땋은 머리 위로 묘한 모양의 서클릿을 끼고 조끼와 망토를 제멋대로 착용한 사나이가 서 있었다. 그는 엄격한 얼굴을 한 채 공손히 내민 두 손에 작은 상자 하나를 받쳐들고 있었다. 그 사내는 다른 사람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재 능의 소유자였는데, 놀랍게도 세 가지 방식으로 윙크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왼쪽 눈을 감거나, 오른쪽 눈을 감거나, 아니면 미간 조금 위에 달린 가운데 눈을 감거나.
딤라이트는 그 세 개의 눈을 바라보고는 놀라버렸지만 그런 와중에도 자신의 떳떳함을 만천하에 공표하려 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그의 원군이 되 어줘야 했을 케이트가 그를 배신했다. 케이트는 뽀르르 달려가서는 감탄한 표정으로 사나이를 올려다보았던 것이다. 반면 다이앤은 기겁한 표정으로 딤라이트의 등 뒤로 숨어버렸다. 솔로처는 빙긋 웃으며 사내를 소개했다.
“빛의 탑에서 날아오신 시몬슬 군이오. 내 물건을 가지고 왔지.”
시몬슬이라 불린 마법사는 싱긋 웃었다. 케이트는 입을 쩍 벌린 채 말했다.
“눈이…. 세 개네?”
시몬슬은 히죽 웃으면서 세 개의 눈동자를 한곳으로 모아 보였다. 케이트는 까르르 웃었지만, 그 모습을 보며 침착할 수 있는 것은 솔로처와 케이트 뿐이었다. 무스타파와 그레이조차도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분위기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시몬슬에게서 거리를 두고 있었다. 주리오 시장 이나 히든보리 사집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딤라이트는 척척 걸어가서는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일스의 딤라이트라고 합니다.”
시몬슬은 딤라이트의 손을 마주 쥐었는데 그 동작에는 딤라이트도 조금 놀랐다. 시몬슬이 상자를 내버려둔 채 딤라이트와 악수했음에도 상자는 아 래로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솔로처는 후학의 이런 잔재주를 웃음으로 무시해 주었고 시몬슬은 유쾌하게 말했다.
“남보다 많은 눈이지만 이런 광경을 직접 보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천공의 기사님.”
“그 눈은?”
“아아, 양초 값이 아까워서 불 켜지 않고도 책을 볼 수 있도록 인프러비전의 눈을 하나 이식했지요.”
솔로처는 그쯤에서 끼어들기로 마음먹었다.
“자, 시몬슬 군. 그 물건을 이리 주겠나?”
시몬슬은 경의가 어린 동작으로 까마득한 사조에게 상자를 건네었다. 물론 마법으로 건네는 무례한 짓을 하지는 않았다. 시몬슬은 두 손으로 정중하 게 상자를 내밀었다. 솔로처가 그 상자를 받아들자 시몬슬은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상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300년 만에 주인에게 돌아가게 되었군요. 솔직히 저희들은 이런 것이 있다는 것까지 잊고 있었습니다. 루조차도 이것이 있다는 것은 기억하고 있 었지만 어디에 있는지는 떠올리지 못했습니다. 빛의 탑의 모든 마법사와 견습생이 총동원되어 간신히 찾아냈지요.”
“당연하지. 내가 있던 시절과 마찬가지라면 지금쯤 빛의 탑은 더 이상 층수나 벽으로 구분할 수 없는 지경으로 뒤죽박죽이 되어 있을걸.”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열어보고 싶은 생각은 없던가?”
시몬슬은 계면쩍게 웃었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지 않은 마법사가 있다면 그 친구는 빛의 탑에서 쫓겨날 녀석이지요. 하지만 루가 조언해 주었습니다. 무지개의 솔로처가 맡긴 상자를 감히 열어보고 싶어 하는 자가 있다면, 그자는 트롤보다도 저조한 지성의 소유자일 거라고 하더군요.”
“그 조언을 받아들인 것은 잘했네. 하지만 조금 있으면 후회할 걸세.”
시몬슬은 세 개의 눈을 모두 커다랗게 떴다. 하지만 그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케이트가 먼저 솔로처의 손에 들린 상자를 보며 물었다.
“이게 뭐예요, 대마법사님?”
솔로처는 늙은 얼굴을 온통 찡그리며 함뿍 미소를 지었다.
“하하하, 키티 데시. 이것은 말이다, 내 스승님께서 내게 남겨주신 선물이지.”
그레이는 눈을 껌뻑거렸다.
“핸드레이크 님께서 남긴 물건이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그레이. 이 시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당신네들은 핸드레이크와 열두 드래곤의 노래를 들어보았겠지?”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고 주리오 시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솔로처 님. 그 노래는 아직까지도 불리고 있습니다.”
“그런가. 이 물건은 그때의 증거품이오. 전리품이라고도 할 수 있고.”
사람들은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시몬슬과 히든보리가 얼굴에 떠올린 표정은 그중에서도 압권이었다. 히든보리 사집관의 얼굴을 본 솔로처 는 그가 상자 안의 물건이 뭔지 곧장 짐작해 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솔로처는 짓궂어 보이는 미소로 말했다.
“히든보리, 짐작하겠소?”
히든보리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떨고 있었다.
“맙소사. 그 물건이 제가 짐작하는 것이라면, 데스나이트들은 이제 가장 어울리는 짝을 만나버린 것 같군요! 아니, 정정하겠습니다. 데스나이트들은 이제 그들 자신도 공포, 절망, 어둠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시몬슬의 경악도 히든보리에 못지않았다. 그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소, 소, 솔로처 님. 진짜 그겁니까? 예? 정말로 그것이…………….”
“그렇네.”
“오, 맙소사. 열어볼걸!”
“후회할 거라고 했지? 자, 천공의 3기사 여러분. 데스나이트들에게 이 친구들을 소개해 줍시다.”
솔로처는 그렇게 말하며 상자를 열었다.
딤라이트는 멀리 평원 위로 꿈틀거리고 있는 검은 안개를 바라보았다. 검은 안개에는 초점을 맞출 수 있는 부분이 전혀 없었다. 너무 짙고 너무 두터 운 안개였다. 남달리 좋은 시력을 가지고 있는 천공의 기사였지만, 딤라이트는 그것을 바라보며 일그러진 환상을 보는 것 같은 기분밖에는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조금 후 딤라이트는 뭔가 다른 것을 느꼈다.
“왠지 더 커진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무스타파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동감을 표시했다.
“그런 것 같군. 다가오고 있는 것 같다.”
“우리들을 발견한 것일까.”
“당연히 발견했겠지. 그레이와 병사들이 저렇게 소란을 부리고 있는걸.”
무스타파가 가리킨 방향을 보던 딤라이트는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는 켄턴에서부터 끌고 나온 병사들을 정렬시키기 위해 분주히 노력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벌판 위, 게다가 데스나이트들의 검은 안개가 지척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곳에서 병사들이 절도를 지켜 조용 히 있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들은 계속 불안스럽게 몸을 움직였고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레이는 마침내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병사들을 정렬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마의 땀을 닦아낸 그레이는 우쭐한 표정으로 손을 들었다.
“자아, 친구들, 내가 손을 내리면 시작하는 겁니다. 준비 됐죠?”
“됐습니다!”
병사들은 일단 씩씩하게 대답했고 그 대답을 들으며 그레이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팔짱을 낀 무스타파와 시선을 내리깐 채 곤혹스러워하는 딤라이 트가 바라보는 가운데 그레이는 힘차게 손을 내렸다.
병사들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약속된 파멸을 내재한 창조여! 하나된 허무로 회귀할 만물이여! 레티의 검 아래 스러진 것들에 남겨질 이름은 없다! 파멸의 레티여!”
그레이는 신들린 듯이 지휘해 댔고 이미 그 악랄한 박자 무시와 처절한 음정 무시로 높은 위명을 획득하고 있던 켄턴 경비대원 합창단은 바락바락 노래를 불러대었다. 그러자 꿈틀거리고 있던 검은 안개 안에서도 거친 노랫소리가 터져나왔다.
“얼얼어어붙붙은은 마마음음! 핏핏빛빛 깃깃발발! 데데스스나나이이트트의의 율율법법!”
“막상 막하야.”
솔로처는 그렇게, 상당히 생략되었지만 주위 사람들 대부분이 이해할 수 있는 말을 툭 던지듯이 말하고 나서 시몬슬에게 몸을 돌렸다. 시몬슬의 손 에 맡겨두었던 상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솔로처는 낮게 말했다.
“빼돌린 거 다 내놓게.”
시몬슬은 그만 울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이 되어 솔로처를 보았다. 하지만 솔로처는 겨울 들판의 소나무보다 더 냉엄한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시몬슬은 안간힘을 다 써서 말했다.
“소, 소, 솔로처 님. 다시는 회수하지 못합니다…………..
“알고 있어.”
“이런, 이런 귀한 재료는 두 번 다시는 못 구할 거, 겁니다. 제발, 후학들을 위해서 하나나 두 개만 남겨주십시오. 이렇게 많잖습니까?”
시몬슬은 세 개의 눈 모두에 간절한 염원을 담은 채 솔로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솔로처는 피식 웃었다.
“내놔.”
시몬슬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바지 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로터스 경비 대장이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시몬슬은 상자에서 슬 쩍 빼냈던 것들을 꺼내놓았다.
그것은 날카롭고 단단하게 생긴 세 개의 이빨이었다. 보통 성인의 손가락보다도 더 큰 크기임에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예리하여 마치 나이프처럼 보였다. 솔로처는 시몬슬의 손에서 그것들을 주워들며 말했다.
“이런 걸 바지 주머니에 넣다니, 다리 안 아프던가?”
시몬슬은 마치 잔뜩 골이 난 어린애처럼 말했다.
“다리에 박혔더라도 하나도 안 아팠을 겁니다.”
“그 상자는 일단 들고 있게. 이 세 개로 먼저 시험해 보지.”
시몬슬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 변화무쌍한 표정을 보며 솔로처는 핏 웃어버렸다.
“그런 못된 손버릇을 구사하기 전에, 먼저 정중하게 요청했어야지. 마법사 아니랄까 봐 잔재주를 부릴 생각밖에 안 하나.”
시몬슬의 얼굴이 다시 바뀌었다. 이번에 그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회한’이라는 제목을 붙이기에 적당했다. 솔로처는 다시 웃으며 몸을 돌렸다. 검은 안개는 이제 노랫소리를 향해 똑바로 접근해 오고 있었다. 마치 산이 움직이는 듯한 그 모습을 보게 되자 경비 대원들의 노랫소리도 조금씩 약 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데스나이트들의 노랫소리는 더욱 거칠게 울려퍼졌다. 딤라이트는 이제 검은 안개 속에서 번쩍이는 병장기의 빛을 볼 수 있 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울려퍼지는 거친 발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자, 싸움이 시작됐군. 로터스 경비 대장! 경비 대원들을 맡으시오!”
그레이는 그렇게 외치며 킨 크라이에 올라탔다. 딤라이트와 무스타파 역시 헐스루인과 아이라에 올라타고 나자 솔로처는 앞으로 조금 걸어갔다.
그리고 솔로처는 정원사의 기쁨을 만끽하기 시작했다.
솔로처는 먼저 가만히 서서 땅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러자 ‘팍!’ 하는 소리와 함께 땅에 조그만 구덩이가 생겨났다. 솔로처는 허리를 구부려서는 손에 들고 있던 이빨들을 구덩이 속에 떨어뜨렸다. 그러고는 발로 흙을 밀어넣어 구덩이를 다시 메우고는 몇 번 밟았다. 누가 보더라도 씨를 묻는 정 원사의 모습이었다.
솔로처는 지팡이를 세워 들고는 두 눈을 내리감고 나직하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시몬슬은 귀도 세 개를 달아두었으면 좋았을걸 하는 안타까운 생 각을 하며 솔로처의 목소리에 집중했지만, 병사들의 발소리와 다가오는 데스나이트들의 소란 때문에 솔로처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솔로처가 심어둔 ‘작물’이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땅이 스멀거리며 움직였다. 그것은 솔로처 앞의 넓은 땅 여러 군데에서 동시에 일어났다. 솔로처 앞의 수백 평방큐빗의 땅 전체가 마치 파도치는 것 처럼 꿈틀거렸다. 경비 대원들은 탄성을 질렀고 천공의 기사들은 침묵 속에 주시했다. 솔로처는 짜랑짜랑하게 외쳤다.
“자, 일어나라, 드래곤 솔저!”
이불을 걷어치우고 일어나는 것처럼, 드래곤 솔저들은 땅을 헤치며 솟아올랐다.
전사들이었다. 그들에게는 검집도 없었다. 피도 묻지 않을 만큼 매끈한 칼날을 가진 거대한 검을 오른손에 들고 있을 뿐이었다. 왼팔에는 거대한 타 워 실드를 들고 있었고, 갑옷은 입지도 않았다. 벌거벗은 상체에는 쇠막대기 같은 근육들이 어지럽게 엉겨 있었고, 이목구비는 조금씩 달랐지만 모두 한결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장 잘 단련된 전사의 무관심한 표정이었다. 그런 전사들이 수백 평방큐빗의 땅에서 솟구쳐 오른 것이었다.
드래곤 솔저들은 솔로처도 바라보지 않았고 다가오는 검은 안개도 바라보지 않았다. 그들은 질린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켄턴 경비 대원들이나,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놀라버릴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는 천공의 기사들과 그들의 승용물에게도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의 대 상은 자신의 형제들이었다.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드래곤 솔저들은 천천히 어깨를 긴장시키기 시작했다. 그때 솔로처가 맹렬하게 외쳤다.
“자네들끼리 싸우는 것은 금지한다!”
드래곤 솔저들은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그들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중요한 일이오. 당신에게 그것을 금지시킬 권한이 있소?”
듣고 있던 사람들 모두가 귀를 의심할 만큼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미성이라고까지 부를 수는 없겠지만 흉맹하고 야만스러워 보이는 모습에는 어울 리지 않는 부드러운 목소리이긴 했다. 그레이는 몸을 부르르 떨고는 무스타파에게 고개를 돌렸다.
“너무 안 어울리는 목소리라고 생각되지 않아?”
“그렇군.”
솔로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권한은 없어. 보다 많은 것을 아는 자가 건넬 수 있는 조언의 권한 이외엔 지금 자네들끼리 마지막에 남을 자들을 위해서 싸운다면, 그 남은 자들 은 데스나이트에 의해 죽게 될 것이다.”
드래곤 솔저들은 분명히 동요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다가오고 있는 검은 안개를 바라보았다. 그런 드래곤 솔저들을 향 해 솔로처는 빠르게 말했다.
“지금은 서로를 아껴라! 자네들이 서로를 죽이는 이유는 가장 강한 몇 명만을 남기기 위해서잖은가! 하지만 지금 자네들이 서로를 죽여댄다면 아무 도 남지 못하게 될 것이다. 데스나이트들은 몇 명밖에 남지 않은 드래곤 솔저는 손쉽게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원하나!”
드래곤 솔저들은 의혹을 담은 눈으로 솔로처를 바라보았지만 아무런 말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때 그들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형제들이여, 의식은 싸움 후로 미룰 것을 제안한다. 저분의 말이 옳을 것 같다.”
말을 마친 자는 그대로 몸을 돌려 데스나이트들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른 드래곤 솔저들 역시 조금도 주저하는 기색 없이 그대로 그 의 뒤를 따라 달려갔다. 거대한 검과 타워 실드를 든 채로도 드래곤 솔저들은 민첩하게 땅을 달리며 함성을 질렀다.
“와아아아!”
달려오는 드래곤 솔저들을 보게 되자 검은 안개 속에서 들려오는 삼엄한 노랫소리들 사이로 분노의 외침이 터져나왔다.
“용용아아병병(兵)! 저저 마마법법사사에에게게 드드래래곤곤의의 이이빨빨이이 있있었었나나!”
드래곤 솔저들은 씩 웃으며 검은 안개를 향해 무섭게 돌진했다. 그 모습을 보던 그레이는 씩씩하게 외쳤다.
“가자, 친구들! 일스 기사 단원이 용아병들의 뒤에 숨어 있을 필요는 없다. 데스나이트로 하여금 누가 더 무서운 적인지 판단하게 하자!”
킨 크라이는 포효하며 솟구쳐 올랐고 그 뒤를 따라 헐스루인이, 그리고 거대한 몸 때문에 아이라가 마지막으로 솟아올랐다. 로터스 경비 대장 역시 검을 뽑아들며 외쳤다.
“켄턴, 루트에리노! 이 땅이 누구의 땅인가? 이 땅 위를 달려 적을 분쇄하는 것은 누구의 사명인가? 가라, 루트에리노의 아들들이여!”
“으아아! 켄턴, 루트에리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