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 워커 3권 – 7장 멸망은 완성의 귀결 5

퓨처 워커 3권 – 7장 멸망은 완성의 귀결 5


5

켄턴 시 전체가 미칠 것 같은 환희 속으로 곧장 돌입했다.

거침없는 손길들은 창고 가장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던 술통들마저도 밖으로 끄집어냈다. 푸줏간 주인들은 근엄한 표정으로 1년 동안의 매상을 하 루에 올렸음을 선포한 다음 땅을 치고 통곡하기 시작했다. 고기만 더 있었다면 10년 치 매상도 올리는 건데!

허황된 소리가 아니다. 켄턴 시민들이 먹고 마셔대는 모습은 그 정도로 대단했다. 집집마다 바구니로 실어날라 온 음식들과 그릇들이 광장에 수북하 게 쌓여, 경비 대원들은 음식과 술 속에서 헤엄칠 정도였다.

입이 달린 사람들은 모두 노래를 불렀고 시내 곳곳에서 끌려나온 악기들은 광란에 가까운 연주에 박살이 나버렸다. 하프 줄이 끊어질 때마다 경비 대원들의 웃음소리는 높아만 갔고 비어버린 술통은 무자비하게 박살나서 모닥불 속에 던져졌다. 치솟아오른 모닥불은 수십 큐빗 높이에 이르러, 먼 곳에서 이 도시를 바라본 자가 있다면 드래곤이 사는 도시라는 판단을 내리고 말았을 것이다.

때려붓듯이 술을 마시고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부르던 천공의 기사 그레이 휠드런은 완전히 늘어져버렸다. 조금 더 마시기 위해서는 일단 좀 깰 필요 가 있겠다고 생각한 그레이는 손에 술병을 든 채 성벽 계단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바람 좀 쐬어야겠어.’

그레이는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갤러리 위에 올라섰다. 자칫하면 아래로 추락하기 알맞은 걸음걸이였지만, 취한 그레이에게 위기 감각 같은 것은 남아 있지 않았다. 갤러리 위에는 경계를 위한 최소한의 인원만 남겨져 있었고 그들은 그레이의 모습을 보며 빙긋 웃었다. 그레이는 혀 꼬부라진 소 리로 그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보낸 다음 갤러리 위를 걸었다. 한적한 곳을 찾아야겠어.

문득 그의 눈에 경비 대원의 복장이 아닌 다른 옷을 입은 사람이 보였다. 그레이는 눈을 몇 번 문지른 다음 쾌활하게 인사를 건넸다.

“히야아, 소로챠!”

흉벽에 두 손을 짚고 먼 곳을 바라보고 있던 솔로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나를 북부 목동처럼 부르지 마시오. 많이 취하신 것 같군, 그레이. 여기까지 어떻게 올라온 거요?”

“우음? 여기가 어딘데요?”

“……관둡시다. 이쪽으로 좀 당겨서 앉든가 하시오. 떨어지겠소.”

그레이는 고개를 크게 끄덕거리며 순순히 솔로처의 말을 따랐다. 구겨지듯 주저앉은 그레이는 흉벽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아아, 멋진, 멋진 밤입니다.”

“저 친구들에게는 별로 그런 것 같지도 않소.”

솔로처의 말은 별 무리 없이 그레이의 귓속으로 흘러들어 갔지만 그레이가 그 말을 대충이나마 이해한 것은 시간이 제법 지난 후였다. 그레이는 비 틀거리며 일어나서는 흉벽을 짚으며 말했다.

“아직도 싸우고 있습니까? 잘, 음냐, 잘 안 보이는데요.”

“저쪽……, 검광이 보이시오?”

“아, 번쩍번쩍하는군요. 번쩍, 번쩍.”

그레이는 번쩍번쩍이라는 말에 따라 고개를 좌우로 까딱거리며 흉벽 위에 상체를 얹었다. 어두운 데이든 평원 저편에서 검들이 부딪히며 튀어 오르 는 날카로운 불꽃이 아물거렸다.

드래곤 솔저들이었다. 함께 태어난 형제들을 죽이는 그들의 의식은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었다. 취기와 밤의 어둠 때문에 그레이는 몇 명의 드래곤 솔저가 남았는지는 알아볼 수 없었다. 언뜻언뜻 보이는 불꽃은 그곳에서 이해할 수 없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 고 있었다. 그레이는 흉벽의 커다란 돌 위에 상체를 길게 뻗으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지독한 놈들입니다. 독해요.”

솔로처는 별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는 트림을 길게 하고는 말했다.

“거으윽. 흐음, 흠. 몇 놈이 남아야 끝, 끝나는 겁니까?”

“고문에 의하면 그것은 특별히 정해진 바가 없다고 하오. 드래곤의 이빨을 얻은 자 얼마나 되겠소? 예가 될 만한 것이 너무 적소.”

“자기들 마음대로라는 말입니까? 흐음. 남은 놈들은 어떻게 됩니까?”

“소환자의 충복이 된다는 것이 보편적인 이론이오.”

“으하하! 엄선된 전사들 중에서, 예, 다시 엄선된 전사만 거느리게 되시겠군요, 솔로처.”

“그러면 뭣하겠소.”

“예?”

솔로처의 얼굴에 깊숙하게 새겨져 있는 주름살들도 밤의 어둠 속에서는 모두 지워지는 듯했다. 마법사는 밤이다. 보이지 않는 손길, 숨겨진 지식, 주 체 없는 행동. 밤의 시간 속에서 솔로처는 신비로웠다.

“내가 그들을 데리고 무엇을 할 수 있겠소, 그레이.”

그레이는 잠시 흉벽 위에 엎드린 자세로 말없이 데이든 평원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이 무의식중에 요철 돌을 똑똑 두드렸다. 잠시 후 그레이는 말했 다.

“떠나셔야 된다고요?”

“그렇소. 그레이.”

“서두르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강박 관념처럼 보인다고요.”

“당신에게는 그런 느낌이 없는 거요?

“그런 느…………낌?”

“한시라도 빨리 이 세계에서 사라지고픈 느낌. 이 세계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고 관련되지도 않고 싶은 느낌 말이오.”

그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솔로처는 짚고 있던 지팡이를 등 뒤로 돌려 잡으며 어깨를 폈다.

“아까 오후, 나는 정말 가슴 섬뜩한 느낌을 받았소.”

“압니다, 알아요. 데스나이트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아니,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오.”

“그럼?”

“전투가 끝난 후, 켄턴 경비 대원들이 고함을 질렀을 때였소. 켄턴, 솔로처. 당신도 들으셨지? 그들은 그때까지 그렇게 고함지르지 않았소.” 그레이는 낮게 중얼거렸다.

“켄턴, 루트에리노………….”

“그래요. 그들은 항상 그렇게 외쳤지. 300년이 지났어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여전히 대왕의 이름을 정신적 지주로 삼아온 모양이오. 하지만 내가 쓸 데없는, 아니, 쓸데없는 짓은 아니었군. 어쨌든 그들 앞에서 싸워 데스나이트들을 물리치자 그들은 대왕의 이름 대신 내 이름을 연호했소.”

“껄껄껄.. 기쁘시지 않습니까?”

“기쁘지 않아요. 나는 이 시대에 속한 자가 아니오. 수치스럽소.”

그레이는 고개를 조금 꺾어 얼굴을 비스듬히 하고 솔로처를 바라보았다. 밤하늘을 배경으로 하얗게 떠오르는 솔로처의 얼굴에는 깊은 회한이 담겨 있었다.

“책임질 수 없는 일을 해버렸소. 이 시대에서 곧 사라져야 될 자가 말이오. 이 시대에는 아무 일도 해서는 안 될 자가 영웅의 이름으로 불렸소.” “하! 처녀를 임신시켜 놓고 달아나는 방랑자처럼?”

그레이는 익살스러운 어조로 말했고 솔로처는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의 미소는 길지 않았다.

“조야함으로도 진실을 꿰뚫는 당신의 언변에 찬사를 보내오. 그래, 그런 것 같소. 보시오. 취해 버린 당신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저기 왼쪽 성탑의 그늘에서 세 개의 눈을 빛내며 나를 바라보고 있는 시몬슬을 볼까? 딴에는 내가 별을 읽고 마법을 수련하는 것을 훔쳐보겠다는 속셈인 것 같소. 멍청 한 녀석. 인프러비전이 가능하니 내 얼굴을 낮처럼 볼 수 있을 텐데도 내가 자신을 눈치 챘다는 것은 모르는군. 그리고 저 멍청한 후배놈은 켄턴 시의 시민들의 모습을 대표하고 있는 것 같소. 나에게 무엇을 바라고 내게 기대고 있소. 당신들 천공의 기사 역시 마찬가지요. 검의 수련만을 지상 과제로 삼아오는 레티의 프리스트들이 당신들을 보며 자격지심을 느끼는 것은 딤라이트 당신도 짐작하겠지?”

그레이는 솔로처가 자신의 이름을 잘못 불렀나 생각했다. 하지만 곧 그의 등 뒤에서 딤라이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그런 것 같더군요. 사소한 일에도 저희들의 이름을 거론하더군요.”

그레이는 고개를 홱 돌렸다. 완전 무장을 갖춘 채 성벽을 올라오는 딤라이트의 모습을 보자 그레이는 그의 목적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틀림없이 저 근엄한 기사는 켄턴 시민들의 즐거운 술자리를 위해 솔선해서 경비 업무를 맡기 위해 올라온 것이리라.

솔로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래. 딤라이트의 어린 연인은 어떨까.”

딤라이트는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솔로처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키티 데시는 민감하고 가냘픈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을 거요. 그녀의 머릿속에 각인된 당신의 모습이 어떤 것일지는 상상되지 않소. 하지만 이 싸움 전체가 성장기의 그녀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마법사의 지팡이에 걸 필요도 없이 맹세할 수 있소. 그녀뿐만이 아니오. 켄턴의 많은 어린이 들, 청년들. 모두 마찬가지요. 머리가 굳지 않은 모든 켄턴 시민들에게 우리들은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을 거요. 그리고 우리의 이 불가사의한 체류 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 악영향 또한 증대하겠지요.”

딤라이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레이는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그레이는 손을 들어올려 턱을 문지르다가 불평스럽게 말했다. 

“한시 바삐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얌전히 떠나야 된다, 이 말씀이시군요?”

“그렇소.”

“마치 허락받지 않고 쳐들어 온 불청객처럼?”

“불청객처럼이 아니라 우리는 불청객이오.”

“제기랄, 왜요! 그럼 세상에 불청객 아닌 녀석이 어디 있습니까?”

그레이는 패악스럽게 외쳤다. 딤라이트는 눈을 크게 뜨며 걸어오기 시작했지만 그레이는 이제 똑바로 일어서서 솔로처를 쏘아보며 말했다.

“지긋지긋합니다. 당신의 그 말은! 여기선 아무 짓도 해선 안 된다, 여기에는 아무 영향도 줘선 안 된다! 왜죠? 왜 안 된다는 겁니까? 이 세상에 허락 받고 태어나는 놈도 있답니까? 우리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 아닙니까!”

“뭐가 마찬가지란 말이오! 그들은 아직 죽지 않았지만 우리는 이미 죽었던 사람……”

“저는 존재한단 말입니다!”

“뭐요?”

그레이는 이마 앞으로 늘어진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며 말했다.

“제기랄. 마법사님의 말 뜻이야 잘 압니다. 하지만 다른 누구보다도 저 자신이 저에 대한 존재감을 절실히 느낀단 말입니다! 대개의 사람들이 그러 는 것처럼요. 다른 사람들이 끊임없이 ‘너는 존재하는 자다.’라고 가르쳐줘야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는 얼뜨기도 있답니까? 제 잘난 맛에 산다는 말이 있지요. 그 말은 자신이, 그리고 자신만이 자신의 존재의 증인이자 증거 노릇을 할 수 있다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오로지 자신만 이 자신을 증명할 수 있단 말입니다.”

높이 치솟았던 그레이의 어조는 말을 하면서 점점 낮아졌다. 술기운은 그의 다리를 비틀거리게 만들었고 그레이는 눈을 심하게 껌벅였다. 그런 그레 이를 보며 솔로처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레이는 흉벽의 요철 돌에 등을 기댄 채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사부님의 말을 반복하실 생각이십니까? 나는 단수가 아니라고? 우리는 혼자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 말에는 나도 찬성합니다만 나는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예. 마법사님의 사부님은 나는 단수가 아니라고 하셨지요. 그 말씀, 재미있지 않습니까? ‘단수가 아닌 나’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나’ 자체는 전제하셨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래서라…………. 뭐, 부대끼고, 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즐기고 싶어진단 말이지요. 사랑도 좋아요, 증오도 좋고, 나는 이 시대와 동떨어진 고고한 존 재로 있어야 된다는 것이 신경질 난단 말입니다. 며칠 전 저녁, 코가 비뚤어지게 술 마시던 도중 번쩍하고 제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생각이 그거였습 니다. 나는 신경질이 납니다! 이 시대를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존재하는 세계에 참여하고 싶단 말입니다. 그건 당연한 욕 구잖습니까! 핸드레이크 님이 말씀하셨듯이 나는 단수가 아니니까, 시대와 동떨어진 단수로 살 수는 없다고요. 마음에 안 드는 녀석은 괴롭혀주고, 마음에 드는 사람과는 밤새워서라도 이야기 나누고 싶단 말입니다.”

솔로처는 본격적으로 그레이를 쏘아보기 시작했지만 그레이는 여전히 그 시선을 하늘로 보내고 있었다. 딤라이트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고 먼 곳에서 훔쳐보고 있던 시몬슬도 심상치 않은 사태라고 여긴 듯 그들을 향해 걸어왔다. 솔로처는 딱딱한 음성으로 말했다.

“무슨 궤변을 늘어놓든지 간에 당신의 말에는 찬성할 수 없소, 그레이. 당신이나 당신의 동료, 그리고 나 역시도 마찬가지지만 우리들이 할 수 있는 행동은 저 데스나이트와의 전투 행위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소!”

그레이는 고개를 돌려 솔로처를 마주보며 고함질렀다.

“어째서 말입니까! 나는 살아 있는데!”

“웃지도 못하겠군. 당신이 살아 있다고? 그레이 당신이? 웃기지 마시오. 당신은 300년 전에 콜로넬 계곡에서 죽었소. 지금이라도 그 땅을 파보면 당 신의 유골이 나올 거요!”

그레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옆에서 듣고 있던 딤라이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비록 아무 말이나 약속은 없었지만 그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거론하지 않기로 결정되었던 역린을 무참하게 건드린 솔로처는 계속해서 냉혹하게 말했다.

“원한다면 거기로 날아가서 파내어 가져다줄 수도 있소. 당신을 가르치기 위한 교육 재료로는 그만이겠군. 눈으로 보여주는 것만큼 확실한 것은 없 을 테니까. 망상도 이런 망상은 없소. 스스로를 아시오! 자신을 안 다음에 ‘나’라고 말하고, 그러고 나서 나는 단수가 아니라고 말하시오. 도대체 당신 이나 나나 ‘나’라는 말을 함부로 쓸 자격이나 있소? 존재하지도 않는 자들이?”

그레이는 행동으로 솔로처의 말에 대답했다.

번쩍! 딤라이트는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깜짝 놀란 솔로처가 바라보았을 때는 그레이의 롱 소드는 이미 시몬슬의 목을 겨냥하고 있었다. 그의 검은 술에 취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단단하게 허공에 고정되어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걸어왔다가 졸지에 목숨의 위협을 받게 된 시몬슬은 기절할 정도로 놀라서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굳어버렸다. 우선적으로 그를 구해야 할 그의 입은 무의미한 말만 쏟아내고 있었다.

“기, 기, 기사님? 왜, 왜, 왜………….”

솔로처와 딤라이트가 이 느닷없는 사태에 당황하여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하고 있던 사이에 그레이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내가 이 마법사를 죽이면 어떻게 됩니까.”

“그레이!”

솔로처의 노호성에도 불구하고 그레이의 검끝은 전혀 움직이지도, 떨리지도 않았다.

“나도 데스나이트인데, 뭐 데스나이트다운 일 한 번 하는 셈치고 이 검으로 이 마법사를 찌르면, 그럼 그건 무슨 사태입니까. 존재하지도 않는 자에 의해 죽은 것은 살해입니까, 사고입니까?”

“당신은 명예로운 일스 기사 단원이오. 그런 당신이 무고한 자를 죽이겠다고?”

“아, 그 명예로운 일스 기사 단원 그레이 휠드런? 그 친구는 죽었어요. 지금은 그 유골이 콜로넬 계곡에 뒹굴고 있을 겁니다. 왜, 겁나십니까? 당신 은 당신만 납득하는 논리를 통해서 내 존재를 박탈시켰는데 도대체 뭘 겁내십니까. 존재하지도 않는 내가 이 시대의 사내를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생 각하는 겁니까?”

솔로처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할말이 없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말이 서로 뒤엉켜 버렸기 때문이다. 그레이는 그런 솔로처를 묵묵히 바라 보았다. 시몬슬은 조금이라도 칼끝을 피해 보려고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레이는 그를 보고 있지 않으면서도 시몬슬의 목에서 검끝을 떨어뜨리지 않 았다. 시몬슬은 잘 넘어가지도 않는 침을 삼키며 헐떡거렸다. 그때였다.

“그 칼 치우세요!”

그레이는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기 위해 고개를 숙여야 했다. 그의 허리에 올까 말까한 케이트가 고개를 한껏 쳐든 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리고 그녀의 등 뒤에는 주리오 시장이 당황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칼자루를 움켜쥐고 여차하면 그레이를 공격하려고 마음먹고 있던 딤라이트는 당 황하며 그 둘을 돌아보았다. 언제 올라온 거지?

다른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과는 전혀 상반되게, 케이트의 얼굴에는 뜨거운 분노가 어려 있었다. 여덟 살 소녀의 얼굴에 떠오른 분노는 그레이를 주춤하게 만들었다. 케이트는 짜랑짜랑하게 외쳤다.

“당신이 진짜 기사예요? 약자를 찌르기 위해 검술을 익혔어요?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파괴를 위해 검을 익히지만 기사들은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검 을 익히잖아요!”

“꼬마야, 시끄럽구나.”

“뭐라고요?”

“네게 이런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 웃긴다만 그래도 말해 주지. 너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들으라고 하는 말이 될 거야.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나는 부활해 버렸어. 실실 웃으며 지내니까 아무도 모르지만 내 속에 있는 갈등과 고민은 너무 힘겹다. 부활을 확인한 그 순간부터 나는 계속 자신에게 물 어야 했어. 내가 누구지? 나는 그레이 휠드런인가?”

그레이는 검끝을 내렸다. 시몬슬은 튕겨지듯 물러나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눈은 끔찍한 살의를 담은 채 그레이를 쏘아보았지만 그레이는 발 아래 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내 의지로 여기 나타나 있는 것이 아냐. 그렇다면 사람들이 태어나는 것과 뭐가 달라? 의지와 아무런 상관없이 태어나 버리는 사람하 고 뭐가 다르냔 말이야. 그럼 내가 왜 이 시대를 살아갈 수 없지? 왜 도로 사라져야 하느냐고!”

솔로처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레이에게 사라지라고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항상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솔로처도 직접 말하지는 않았다. 그리 고 데스나이트들의 공격을 받고 있는 켄턴에서 천공의 기사를 경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직 한 사람, 그 자신이 이미 그걸 요구했을 뿐이다. ‘내가 말하기도 전에, 그는 이미 알고 있었어. 나의 말은 짜증나는 재촉이었겠군.’

솔로처는 이를 악물었다. 그레이는 이미 깨닫고 있었다. 존재할 수 없는 시간 속에 던져진 자신을. 그리고 그레이는 그에 대해 분노하고 있었다. 그레이는 검을 꽂아넣으며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휘이익!

어둠 속에서 날갯짓 소리가 다가왔다. 그레이는 그대로 흉벽의 요철 돌 위로 뛰어올랐다. 솔로처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레이는 아래로 떨어지려 는 듯이 허공으로 뛰었다. 그러고는 밤을 가르며 날아온 킨 크라이의 안장에 매달렸다.

날렵한 동작으로 킨 크라이의 안장에 올라탄 그레이는 고삐를 확 낚아챘다.

“올라가자!”

파바박!킨 크라이는 급격하게 날개를 퍼덕이며 솟아올랐고 그 날개에서 떨어져나온 하얀 깃털들이 눈송이처럼 흩날렸다. 솔로처는 날리는 깃털 사 이로 사라지는 그레이의 모습을 올려다보았다. 케이트는 밤하늘에서 하얗게 떨어지는 깃털의 비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손을 내밀어 그중 하나를 받았다. 그녀는 그 거대한 깃털을 두 손으로 꼭 쥔 채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딤라이트는 먼저 몸을 돌려 시몬슬에게 사과했다.

“동료를 대신하여 사과드립니다. 그건 무례라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폭행이었습니다만, 부디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취중의 언동이 었을 것입니다.”

“아, 네. 딤라이트 님. 하지만……”

시몬슬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의 표정은 전혀 밝지 못했다. 시몬슬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목숨을 위협받은 일을 쉽게 잊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시몬슬은 자신이 상당히 기억에 남는 말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딤라이트에게는 부지불식간에 웃음을 짓게 만드는 말이었을 뿐이다. 이 300살은 어린 친구야. 우리는 전장에서 매순간 죽음을 보네. 그걸 다 잊지 못한다면 난 오래 전에 미쳤을 거야.

고개를 돌린 딤라이트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케이트의 시선을 만났다. 작은 손에는 킨 크라이의 거대한 깃털을 꼭 쥐고 있었고 커다란 모자 속에 파묻힌 듯한 작은 얼굴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레이디 케이트….”

“딤라이트 님, 왜? 그레이님은 왜 저러시는 거예요?”

딤라이트는 뭐라고 말해야 될지 몰랐다. 그래서 입을 다물고는 먼저 행동에 들어갔다. 딤라이트는 케이트 앞으로 걸어가서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케 이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말들이 떠올랐다.

“그레이는 힘든 일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힘든 일? 데스나이트랑 싸우시는 거요?”

딤라이트는 거의 무의식중에 대답했다.

“아니오. 그것보다는 외롭기 때문입니다.” 

“외로워요?”


그레이는 킨 크라이의 목에 얼굴을 묻은 채 축 늘어져 있었다. 놓아버린 고삐는 아래로 늘어져 킨 크라이의 발 아래쪽에서 뒤로 흔들리고 있었고, 킨 크라이의 날개는 옆으로 펼쳐진 채 규칙적으로 조용히 바람을 갈랐다. 하지만 그레이는 말 위에서 죽은 기수라도 되는 것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푸…………, 푸……………, 그레이가 숨을 내쉴 때마다 킨 크라이의 목덜미 깃털이 가볍게 들썩였다. 킨 크라이는 기수의 안위를 걱정하기 시작했지만, 기수는 여전히 술 냄새가 가득 묻어나는 숨만 내쉴 뿐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킨 크라이도 방향을 바꾸거나 고도를 바꾸지도 못한 채 그저 조용히 날아 갔다.

그레이는 갑자기 상체를 일으켰다.

그레이는 똑바로 앉고 나서도 한참 동안 어리둥절해했다.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아, 잠깐. 내가 왜 일어났지?

한참 생각한 후에야 그레이는 조금 전 뭔가가 눈가에서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는 것을 떠올렸다. 이 깊은 밤의 하늘 위에서 무엇이 그의 눈을 자극했 던 것일까? 그레이는 밧줄처럼 엉겨 얼굴을 덮은 머리카락을 옆으로 치우고는 무거운 머리를 이리저리 움직여 주위를 살펴보았다.

아래…………. 그래, 아래였다.

그레이는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땅은 캄캄했다. 이상하군, 이 황야 위에 무엇이…………. 그때 조금 전 그의 시야를 자극했던 것이 다시 나타났 다.

번뜩임.

검의 번뜩임이었다. 그레이는 가물거리는 눈을 비비고는 부릅뜬 눈으로 아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섬광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레이는 잠시 멀거니 아래를 바라보기만 했다.

조금 후 그레이는 아래에서 끄덕거리고 있던 고삐를 끌어올려 느릿하게 손에 감아쥐었다. 그러고는 조금 전 섬광을 보았다고 생각되는 지점을 향해 킨 크라이를 몰아가기 시작했다. 방향이나 거리를 짐작할 만한 대상물이 전혀 없는 깜깜한 밤하늘과 들판이었지만, 오랜 비행 경험을 통하여 3차원 적인 공간 지각 능력이 매섭도록 단련되어 있던 그레이는 별 주저 없이 방향을 정하고는 조금 위험해 보일 정도의 강하에 들어갔다.

땅에 충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같은 것은 없었다. 그는 취했지만 그가 타고 있는 그리폰은 취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레이는 무턱대고 아래로 내려 갔고 땅에 닿기 직전 킨 크라이가 날개를 휘저으며 상체를 들어올렸을 때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러고는 당연하다는 듯이 안장 옆으로 내려섰다. 그레이는 손에 고삐를 쥔 채 잠시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하늘로 치솟아 올라 밤하늘을 보랏빛으로 물들이고 있는 불꽃이 보였다. 켄턴인가. 꽤 멀군. 그레이는 머리를 긁적이고는 보다 침착하게 주위를 둘 러보았다. 그때 갑자기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시오.”

그레이는 몸을 돌렸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나마 윤곽 같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레이는 칼자루 쪽으로 손을 가져가며 말했다.

“그레이 휠드런. 슬픈 자.”

아마도 맨 정신의 그레이 앞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면 그레이는 포복절도를 하고 말았을 것이다. 취해 버린 그레이도 자신의 인사말 이 조금 이상하다는 것 정도는 느꼈지만 상대방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한 가지 반응은 보였다.

“무명(無). 남은 자.”

“남은 자……? 드래곤 솔저인가.”

“그렇소.”

그레이의 눈에 보이는 드래곤 솔저는 캄캄한 그림자뿐이었다. 거대한 어깨가 아래로 조금 처져 있었고 오른쪽 팔은 유달리 길어보였다. 검을 쥐고 있군. 그런데 왼손의 저건 뭐지? 그레이는 자꾸만 감기려는 눈을 다시 한번 비비고는 힘겹게 눈을 뜨며 말했다.

“왼손의 그건 뭐요? 방패로는 보이지 않는데.”

그림자는 잠시 고개를 돌려 자신의 왼손을 바라보다가 그것을 슬쩍 던졌다. 꽤나 무거운 것이었던 듯, 상당히 둔탁한 소리가 났다. “신경 쓸 필요 없는 물건이오.”

그러나 그레이는 이미 알아차렸다. 저 정도 크기에 저 정도 무게라면 뻔하다. 그레이는 자신도 모르게 진저리를 치고는 말했다.

“그게 마지막 형제의 머리였소?”

·그런 것 같소. 더 남은 자는 없는 것 같군.”

마지막 남은 드래곤 솔저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레이는 찌푸린 얼굴로 상대방을 바라보았지만 보이는 것은 여전히 캄캄한 그림자뿐이었 다. 드래곤 솔저는 입을 열었다.

“낮의 전투에서 보았소. 하늘을 나는 기사였지요?”

“잠깐, 내가 보입니까?”

“보입니다.”

“밤눈이 참 좋군. 그래요……………. 내가 그 기사요.”

“부탁 하나 드리리다. 괜찮다면 제 소환자에게 안내해 주시겠소?”

“저기 불꽃 보이지요? 그곳으로 곧장 걸어가면 되오. 켄턴 시요.”

그림자의 머리가 작아졌다 커졌다 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인가? 거대한 그림자는 그대로 몸을 돌려 켄턴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레이는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문득 여기 황량한 밤의 들판에 홀로 서 있을 필요는 전혀 없다는 사실이 그레이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잠깐! 안내해 주겠소. 같이 갑시다.”

그레이는 킨 크라이의 고삐를 끌며 그림자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그림자는 잠시 기다려주었고 그레이는 하늘을 날 때와는 전혀 다른 고민거리 때문 에 화를 내가며 그에게로 걸어갔다. 하늘에서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까 봐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

비틀거리며 걸어간 그레이는 그림자를 잠시 바라보다가 그대로 앞으로 나아갔다. 드래곤 솔저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따라 걸었다. 그레이는 뒷짐 진 손에 킨 크라이의 고삐를 길게 잡고는 유유자적하게 걸으려 애쓰며 말했다.

“무명이라. 당신은 어떻게 이름을 가지게 됩니까?”

“이름을 획득할 권리는 가졌으니 소환자가 내게 이름을 주겠죠.”

“권리?”

“남은 자니까.”

“아아.”

이 녀석들은 서로 죽이고 죽여서 결국 최후에 남는 녀석들만 살아갈 권리와 이름을 가질 권리를 가지게 되나 보군. 삭막한 의식이야. 그레이는 드래 곤 솔저의 의식에 대해 뭐라고 한 마디 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만 앞설 뿐 무슨 말을 해야 될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그레이에게 갑 작스럽게 질문거리가 떠올랐다.

“당신은 앞으로 뭘 하실 생각이오?”

“예?”

“그 끔찍한, 실례, 내게는 그렇게 보이오. 그 끔찍한 의식도 끝났으니 당신은 이제 살아갈 권리를 가진 거죠? 그리고 이름도 가진다며? 자아를 가질 준비가 다 되었다는 말이로군. 그럼 당신은 이제 최대한 선별된 당신의 그 최강의 육체와 험한 대가를 치르고 가지게 된 값비싼 자아를 가지고 뭘 할 생각이오?”

취해 버린 그레이에게는 퍽이나 힘든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가 간신히 질문을 마치자 드래곤 솔저는 별 어려울 것도 없다는 듯이 간단하게 대답했 다.

“소환자의 명령을 수행할 겁니다.”

“다른 건? 이봐요. 당신은 새로 태어난 거잖소. 다른 건 없소? 젠장, 이 세상에 대해 뭘 알아야 하고 싶은 것도 생기긴 하겠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말 나눠본 걸 가지고 추측해 보면 당신은 꽤나 많은 식견의 소유자인 것 같은데. 최소한 당신과 내가 말 나누는 데는 아무 불편도 없으니까.”

“어느 정도는………….., 그래요, 보통의 인간과 같은 정도의 식견은 가지고 있소.”

“위대한 드래곤 만세요. 그럼 당신은 이 세상에 대해 제법 많이 알고 있을 거요. 그럼 하고 싶은 것도 뚜렷하게 생각할 수 있잖소?”

“하고 싶은 것은 분명히 있소.”

그레이는 반색을 하며 말했다.

“뭐요?”

“소환자로부터 명령을 받고 싶군요.”

그레이는 잔뜩 실망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아, 저 녀석은 내 얼굴이 보인다고 했지? 그레이는 더 험한 인상을 만들어 보이며 말했다.

“젠장, 넌 사람이 아니었지. 그래.”

“그렇소. 그레이 횔드런.”

“내가 주정을 늘어놓았던 모양이군. 도대체 누굴 상대로 이런 이야기를………….”

“발 앞을 조심하시오.”

그레이는 급하게 멈춰 섰다. 그는 그림자를 돌아보며 물었다.

“뭐?”

“발 앞에 갑주가 있소. 발을 조심스럽게 내밀어 보시겠소?”

그레이는 오른발을 앞으로 내밀어 보았다. 그러자 곧 발에 닿는 단단한 쇠붙이가 느껴졌다. 으음. 하긴 데스나이트들의 갑옷 같은 것은 수거하지도 않았지. 틀림없이 고가에 팔릴 전리품이지만, 데스나이트의 갑주에 손을 댈 만큼 용감한 경비 대원은 없었다. 그래서 데이든 평원은 다른 전장과는 달리 수많은 전리품들이 방치된 형국이었다.

그레이는 발 앞을 가로막는 갑주를 거칠게 걷어찰까 아니면 옆으로 돌아갈까 고민했다. 갑옷을 차면 발이 아플 거라는 생각 같은 것은 취해 버린 그 에게는 들지 않았다.

그때 갑주가 말을 했다.

“검검을 뽑뽑아아라라………….”

그레이는 잠시 동안 얼어붙어 버렸다. 술 때문이야. 꼼짝도 하지 못하는 자신을 느끼면서, 그레이는 동시에 결론까지도 내렸다. 술이 아니라면 벌써 움직였을 텐데. 그래서 마지막 드래곤 솔저는 갑주를 후려치는 대신 그레이의 어깨를 강하게 끌어당겨야 했다. 그레이는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고 드 래곤 솔저는 다시 갑주를 공격할 기회를 놓쳤다. 그레이는 드래곤 솔저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말을 하던 갑주는 천천히 일어났다.

일어나다? 그레이는 그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겼다. 사람이나 동물이 일어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마치 무게가 없는 물체가 둥둥 떠 오르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윽고 갑주는 꼿꼿한 자세로 그레이와 마지막 드래곤 솔저 앞에 섰다.

왼팔은 팔꿈치부터 떨어져나가고 없었다. 그리고 갑주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그 구멍으로 켄턴 시의 불빛이 보일 지경이었다. 조금 이상한 각도로 흔들거리는 오른팔에는 거대한 투 핸드 소드를 들고 있었다. 사람이 든다면 틀림없는 투 핸드 소드였지만 데스나이트는 그 검을 마치 롱 소드처럼 쥐 고 있었다.

투구의 뿔은 부러지고 찢어진 망토가 기이한 춤을 추고 있었다. 그레이는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공포? 아냐, 냄새다. 그레이는 눈앞의 데스나이 트에게서 지독한 냄새가 풍겨오는 것을 알아차렸다. 유황밭에 던져진 시체가 이런 냄새를 풍길 것인가.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 냄새라는 것을 깨 달은 순간 그레이는 다시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나고 말았다.

데스나이트는 말했다.

“누누가가 먼먼저저 덤덤빌빌 것것인인가가 동동시시에에 덤덤벼벼도도 상상관관없없다다.”

드래곤 솔저의 그림자가 검을 옆으로 한 번 뿌린 다음 그대로 앞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레이는 취한 자신은 가만히 있어도 용서받을 거라는 조금 비겁한 생각을 하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드래곤 솔저의 강인한 어깨가 꿈틀거렸다. 그는 옆으로 서서는 수평으로 들어올린 왼손 바닥을 데스나이트에게 내밀고는 느슨하게 검을 쥔 오른손 은 허벅지쯤에 적당히 떨어뜨렸다.

“오라.”

“무무엄엄한한 놈놈! 데데스스나나이이트트에에게게 선선수수를를 허허락락한한다다고고? 건건방방진진 자자세세 집집어어치치우우고고 네네놈 놈의의 공공포포와와 함함께께 덤덤벼벼라라! 데데스스나나이이트트가가 너너에에게게 지지옥옥을을 보보여여주주리리라라!”

드래곤 솔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허벅지쯤을 오가던 그의 오른손이 천천히 위로 올라왔다. 그 모습을 보며 데스나이트는 흡족한 듯 이 웃었다.

“핫핫하하하하! 지지옥옥에에 온온 것것을을 환환영영한한다다.”

드래곤 솔저의 발이 앞으로 튕겨져 나갔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났다.

드래곤 솔저는 앞으로 크게 발을 내디딘 자세 그대로 정지했다. 그레이는 가슴이 서늘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검을 부여잡았다. 마법! 제기랄.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 싸워야 되나, 킨 크라이에 올라타야 되나? 그때 데스나이트가 말했다.

“왜왜 멈멈췄췄는는가가?”

그레이는 어이가 없었다. 왜 멈추냐니? 그때 무시무시한 도약 자세 그대로 굳어 있던 드래곤 솔저가 앞으로 내디딘 발을 천천히 회수하며 똑바로 섰 다. 어깨 위에서 굳어 있던 그의 팔도 천천히 내려와 허리쯤에서 고요히 정지했다. 어라? 마법에 걸린 것이 아닌가?

드래곤 솔저는 말했다.

“뭐지?”

데스나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허공에 둥둥 뜬 것처럼 보이는 그의 갑주가 조용히 흐느적거릴 뿐 데스나이트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드래곤 솔저와 그레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드래곤 솔저는 지치고 성난 음색으로 말했다.

“왜 맞서 싸우려 하지 않는가. 싸울 의사가 없는 상대에게 검을 휘두를 수는 없다.”

데스나이트의 어깨 부분이 조금 움직였다. 그 움직임을 보며 그레이는 칼자루를 쥐어짤 듯이 움켜쥐었다.

“넌넌 인인간간이이 아아니니었었지지. 물물러러나나라라. 기기사사여여, 네네가가 오오라라.”

그레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드래곤 솔저는 말없이 뒤로 물러났다. 마치 데스나이트의 말대로 그레이가 데스나이트와 싸워야 된다는 듯이. 그레이는 그 두 개의 그림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흐느적거리는 데스나이트의 파괴된 그림자, 그리고 드래곤 솔저의 완벽한 그림자를 번갈아 보는 그레이의 시각 한쪽으로 켄턴에서 솟아오르는 불꽃이 음험한 욕망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전투가 벌어졌던 황야 위의 공기는 자욱한 핏방울을 머금고 있는 듯했다. 비린 냄새. 그리고 데스나이트의 냄새. 그레이는 입술을 핥고 나서 말했다.

“잠깐, 이봐, 데스나이트 경. 말이 이상하군.”

“무무슨슨 말말인인가가.”

“인간이 아니었지’라고 했나? 그럼 인간은 싸울 의사가 없는 상대에게도 검을 휘두른단 말인가?”

데스나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의 목소리는 점점 노성으로 바뀌었다.

“그것은 네놈들의 이야기잖아! 단지 피해자의 공포를 즐기기 위해 맹목적으로 공격하는…………….

“그그렇렇다다. 형형제제여여.”

“뭐라고? 잠깐, 지금 뭐라고 불렀지?”

데스나이트의 갑주가 앞으로 조금 움직였다. 하지만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움직임이었기에 그레이는 그것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습이라는 것을 조 금 늦게 깨달았다. 데스나이트는 죽어가는 사자처럼 으르렁거렸다.

“드드래래곤곤 솔솔저저들들의의 의의식식을을 따따라라볼볼까까. 검검을을 뽑뽑아아라라. 형형제제여여.”

“닥쳐! 아, 아니, 열어! 입을 열어 설명해! 내가 왜 너의 형제냐. 왜!”

데스나이트는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데스나이트는 천천히 자신의 검을 쳐들었다. 억제될 대로 억제되어 있던 그레이에게 있어 데스나이트의 그 동 작은 마지막 빗장을 열어젖히는 효과로 작용했다. 그레이는 거친 고함을 지르며 잔뜩 당겨진 화살처럼 달려들었다.

뜻없는 고함 소리, 그리고 그 고함 소리보다 빠른 발. 그레이는 데스나이트의 왼쪽 허리 옆을 순간적으로 돌파했다. 사고는 필요없다. 누적된 경험과 숙련은 사고보다 빠르게 그레이를 인도했고 그래서 그레이는 데스나이트의 검에서 가장 먼 곳에 있는 직선을 가장 빠르게 지나쳤다. 그레이가 자신 의 행동에 망연해하며 어깨와 팔에 남아 있는 타격의 여운을 느끼고 있을 때 그의 등 뒤에서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데스나이트의 갑주가 무너져내렸 다.

땡그르……………, 꽝깡깡!

그레이는 몸을 돌렸다. 급격한 회전에 휘말린 앞머리카락들이 요동치며 그레이의 시야를 가렸다. 그 사이로 그레이는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데스 나이트의 갑옷을 보았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솟아올라 어두운 밤하늘로 솟아오르는 불길한 색깔의 연기도.

얼마간 솟아오른 연기는 상승을 멈추고 제자리에서 엉겼다. 그레이가 부릅뜬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연기는 점점 엉기며 형체를 이루기 시작 했다. 그레이는 헐떡이며 연기를 바라보았다.

연기는 이제 사람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 어깨 위에는 비난하는 듯한, 동시에 조롱하는 듯한 미소를 띤 채 그레이를 바라보는 얼굴이 있었 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자기 자신의 얼굴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그레이는 목이 졸리는 비명과 함께 무릎 꿇었다.

“으와아아아!”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느낌 속에서 그레이는 머리를 감싸쥐었다. 번갯불이 머리를 때리는 듯한 느낌. 그리고 그레이는 가슴 속에서 미친 듯이 요동치 는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구역질 날 듯이 헐떡이는 자신의 호흡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그레이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무언가가 그레이의 어깨를 건드렸다. 그레이는 반사적으로 검을 휘두르며 튕기듯 일어났다.

“손대지 마!”

하마터면 오른팔이 통째로 날아가 버릴 뻔했지만, 드래곤 솔저는 침착했다.

“슬픈 자. 무엇을 보았소?”

“뭐?”

“무엇을 보았느냐고 물었소.”

그레이는 고개를 돌려 연기가 스멀거리던 그 공간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곳에는 깊이 없는 암흑뿐이었다. 지독한 어둠 때문에 데스나이트의 갑주 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그레이는 마구 경련을 일으키는 얼굴을 돌려 핏발 선 눈으로 드래곤 솔저의 어두운 윤곽을 바라보았다. 곧은 자세로 선 드래 곤 솔저에게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동정심. 그래, 내가 필요한 것은 동정 어린 관심이야. 하지만 드래곤 솔저는 어둡고 위압적인 자세 로 선 그림자일 뿐이었다.

그레이는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을 힘겹게 움직였다.

“내 얼굴을…………, 내 얼굴을 봤어. 저기서.”

드래곤 솔저의 머리가 조금 움직였다가 다시 원래의 위치로 돌아왔다. 순간 그레이는 지금 드래곤 솔저의 얼굴이 어떤 표정인지 알고 싶다는 지독한 욕구를 느꼈다. 드래곤 솔저는 그 부드러운 목소리 그대로 말했다.

“데스나이트의 사술을 본 것이오. 신경 쓸 필요 없는 것이오.”

“제길, 내 얼굴이란 말이야!”

“당신 스스로도 알 것이오. 당신은 이런 어둠 속에서 사물을 그렇게 뚜렷하게 볼 수 없소. 내 얼굴이 보이시오?”

“뭐라고?”

“내 얼굴이 보이냐고 물었소.”

그레이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래. 바로 눈앞에 있는 드래곤 솔저의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이 지독한 어둠 속에서 뭔가를 볼 수 있을 리가 없 어. 연기? 얼굴? 보일 까닭이 없어.

하지만 그레이의 망막에는 아직도 그 모습의 잔영이 남아 있는 듯했다. 당장이라도 웃음을, 또는 눈물을 터뜨릴 듯한 얼굴을 한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레이 휠드런의 모습은 뚜렷했다. 그 얼굴을 다시 떠올리며 그레이는 무릎에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봤어.

드래곤 솔저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괘념치 마시오. 데스나이트는 소멸하는 그 순간까지 공포와 절망, 그리고 어둠을 선물하기 위해 못된 잔재주를 부린 것이었을 거요.”

그레이는 그 순간 온몸을 치닫는 한기를 느꼈다.

“잠깐, 너는 봤나?”

“아니, 못 봤소.”

“못 봤다고? 그 얼굴은? 제기랄, 그 연기는?”

“연기?”

그레이는 드래곤 솔저의 검은 윤곽을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하지만 드래곤 솔저는 묵묵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못 봤군. 나만 봤어. “먼저 가라.”

“예?”

“저 불꽃이 켄턴이다. 밤눈이 좋으니 얼마든지 찾아갈 수 있겠지. 그곳에 도착하거든 솔로처를 찾아라. 너의 소환자다.”

드래곤 솔저는 잠시 기다렸다가 말했다.

“당신은 여기 있을 거요?”

“가.”

대답하는 그레이의 목소리는 낮지도 높지도 않았지만 드래곤 솔저는 검을 추스르고는 그대로 켄턴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불꽃을 배경으로 떠 오르는 드래곤 솔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레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키가 큰 드래곤 솔저는 성큼성큼 걸어가 순식간에 멀어졌다. 드래곤 솔저의 모 습이 손톱만해지자 그레이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여기엔 아무것도 없다.”

그레이는 자신의 속삭임에 흠칫했다. 왜 그런 말을 한 거지? 그레이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보이는 것은 암흑뿐, 구름이 가득 끼었는지 밤하늘엔 달도 별도 보이지 않았다. 그레이는 애타는 심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무엇을 찾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때 무엇인가가 그의 허벅지 쪽을 가볍게 스치고 지나갔다.

기절할 듯이 놀란 그레이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며 검을 휘둘러 내렸다. 검날이 살을 파고드는 무시무시한 감각이 그의 팔을 지나 어깨를 때렸다. “키에에엑!”

고막을 찢을 듯한 비명 소리가 울렸다. 그레이는 검을 휘두른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밤을 관통하며 울려퍼진 소리는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그레 이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외쳤다.

“킨 크라이!”

털썩. 거대한 덩치를 가진 생물이 땅에 쓰러지는 소리. 그레이는 손을 내뻗었으나 손아귀에 쥐어지는 것은 암흑과 그의 절망뿐이었다. 그레이는 무 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땅을 더듬으며 킨 크라이를 찾았다. 손바닥이 쏠리고 돌부리에 부딪힌 손가락에서는 지독한 통증이 느껴졌다. 철퍽. 손가락 끝에 따스하고 질척한 느낌이 드는 순간 그레이의 목덜미에 소름이 하얗게 돋았다. 마침내 그레이는 킨 크라이의 몸을 찾아냈다.

부드러운 깃털은 피에 젖어 서로 달라붙어 있었다. 그레이는 킨 크라이의 몸을 만지면서도 계속 가중되는 불안감에 몸을 떨었다. 왜지? 왜 움직이지 않지? 킨 크라이, 왜! 날개는, 날개는 괜찮아. 다시 날 수 있어. 이건, 다리인가? 다리도 괜찮아. 그런데 왜 움직이지 않지? 킨 크라이, 왜?

다급하게 더듬던 그레이의 손가락은 마침내 자신이 저질러놓은 비극의 상처를 찾아냈다.

미간 한가운데였다. 공포로 휘두른 그레이의 검은 킨 크라이의 정수리에서 옆으로 비스듬하게 예리한 상처를 만들어놓았다. 갈라진 두개골 사이로 흘러나온 뇌수와 피가 그레이의 손가락을 적셨다. 기다란 끈……………, 이건? 둥글다. 물컹거리는 느낌. 잠시 후 그레이는 자신이 파열된 오른쪽 안와로부 터 흘러나와 대롱거리는 킨 크라이의 오른쪽 시신경을 만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레이는 화다닥 뒤로 물러났다.

“으아아아아!”

땅바닥에 주저앉은 채 그레이는 어둠을 향해 비명 질렀다. 눈을 부릅떴으나 보이는 것은 명멸하는 빛깔들뿐이었다. 눈을 뜨고 있는데도 마치 눈을 감은 것처럼 희고 붉고 푸른 빛살들이 그레이의 눈앞을 어지럽혔다. 그레이는 땅바닥을 움켜쥐며 목이 터져라 비명 질렀다.

“으아아, 으아아, 으아아아아!”

땅에 앉은 채 그레이는 미친 듯이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어둠은 계속해서 그를 따라왔다. 그레이는 일어서지도, 몸을 돌리지도 못한 채 계속해서 뒤 로 물러났다. 그때 그의 몸이 무엇인가에 호되게 부딪혔다. 그레이는 황급히 몸을 돌렸다. 바위인가?

그의 손에 닿는 것은 바위가 아니었다. 매끄럽고 진저리쳐지도록 차가운 것. 그레이는 그것을 밀어버리려고 있는 힘껏 부여잡았다. 그 순간 그의 손 이 굳어버렸다.

투구다.

그레이가 움켜쥐고 있는 것은 데스나이트의 투구였다. 조금 전 자신이 쓰러뜨린 데스나이트의 투구였다. 그레이는 어느새 그것을 들어올리고 있었 다. 자신의 손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의 암흑 속이었지만 그레이는 투구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보였다.

조금 전과 같아.

그레이는 암흑 속에서도 데스나이트의 투구를 볼 수 있었다. 그래서 그레이는 투구를 버릴 수 없었다. 이 암흑, 어딘가에 킨 크라이의 시체가 쓰러져 있을 이 지독한 암흑 속에서 그 투구는 그레이가 볼 수 있는 유일한 물체였다. 그레이는 어느 새 킨 크라이의 죽음도 잊어버린 채 그것을 뚫어지게 바 라보았다.

사악하기 짝이 없는 문양들과 거친 장식들. 거대한 투구의 양쪽 관자놀이에서는 조각된 뱀들이 뻗어나와 마치 눈썹처럼 눈 위를 흘러 미간에서 모였 다. 그러고는 서로 똬리를 틀며 콧등으로 흘러내렸다. 추켜올려진 바이저에는 가로로 슬릿들이 나 있었다. 그레이는 그것이 사람의 갈빗대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음을 깨달았다. 바이저를 아래로 내리자 인간의 갈빗대를 파고드는 뱀의 모습이 떠올랐다. 심장을 관통하는 두 마리의 뱀…………. 바이저 아 랫부분은 노출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있어야 할 볼 가리개는 없었다. 대신 귀 부분에서 솟아나온 거대한 뿔들이 얼굴 앞으로 휘어지며 볼 가 리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상한 디자인, 이상하다.

매력적이다.

그레이는 친우의 얼굴인 것처럼 투구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뭔가가 모자라다. 이 투구에는 있어야 할 것이 없다.

그 안에 있어야 할 머리.

그렇다. 머리가 없다. 그레이는 그것을 채워넣기로 결심했다. 천공의 기사 그레이는 입이 온통 뒤틀리도록 사납게 미소 지으며 중얼거렸다.

“머리라면 마침 내게도 하나 있거든.”

그레이는 천천히 투구를 들어올렸다. 머리에 뒤집어쓰기 직전, 그레이는 투구 속에 뭔가가 일렁이는 것을 본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손은 멈춰지지 않았다.

그레이는 데스나이트의 투구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