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 워커 3권 – 7장 멸망은 완성의 귀결 7 (3권 끝)

퓨처 워커 3권 – 7장 멸망은 완성의 귀결 7


7

“네가 누구냐고?”

아일페사스는 싱긋 웃었다. 그녀는 오른손을 가슴에 얹으며 상체를 앞으로 쑥 내밀었다.

“그래. 저는 누구냐고 물었어. 말해 보려무나, 귀여운 거인아.”

아프나이델은 아일페사스가 사용하는 어휘들에 대해 상당한 교정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물론 지금까지도 계속 느껴왔던 것이지만 지금 이 순간처럼 절실하지는 않았다. 여기서 살아난다면 기어코 아일페사스의 어학 능력부터 손봐주리라. 그리고 아프나이델의 그런 결심과 똑같은 결심이 엑셀핸드 의 마음속에서는 보다 폭력적인 형태로 수십 배 증폭되어 맴돌고 있었다.

거인은 못마땅한 얼굴로 아일페사스를 내려다보다가 팔짱을 꼈다. 거인을 올려다보던 엑셀핸드는 푸른 하늘을 흘러가는 구름이 그의 정수리에 걸릴 것 같다는 착각을 거둘 수 없었다. 그런 압도적인 높이에서 거인은 근엄하게 말했다.

“너는 인간 계집애잖아.”

바로 그 대답을 기대하고 있었기에 아일페사스는 거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펄쩍 뛰었다.

“까르르륵! 틀렸어요! 틀렸어!”

거인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뭐라고? 틀리다니. 그럼 네가 무엇이란 말이냐!”

“너 까무러치지 말아요? 제가 누구냐면 말이야.”

아일페사스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두 손을 허리에 얹었다. 그러고는 상체를 있는 대로 젖혀 거인에게 자신의 턱을 보여주려 애쓰면서 말했다. “저는 전능한 드래곤의 하나뿐인 지배자 드래곤 로드의 이름을 계승하는 자, 카르 엔 드래고니안의 두 번째 목소리이자 드래곤들의 첫 번째 목소리, 드래곤의 별의 보호자, 알겠니? 저는 드래곤 로드의 딸 아일페사스다!”

거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덴 산의 거인은 하나뿐인 눈을 커다랗게 뜬 채 아일페사스를 내려다보았다. 한참 후, 거인은 겨우 입을 열었다. “……그게 뭔데?”

일행들 중 정신적으로 엉덩방아를 찧지 않은 자는 이루릴뿐이었다. 에델린과 엑셀핸드, 그리고 아프나이델은 각 종족을 대표해서 트롤과 드워프, 인 간이 각각 어떤 방식으로 황당함을 표현하는지를 여실히 나타내 보였다. 아일페사스의 경우, 그녀는 코를 크게 벌름거리며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 다.

“야, 이 멍청한 거인이시여! 너는 너무 멍청해요! 제가 누군지 말했잖아! 얼간아! 바보야! 저는 전능한 드래곤의 하나뿐인 지배자 드래곤 로드의 이 름을 계승하는 자, 카르 엔 드래고니안의 두 번째 목소리이자 드래곤들의 첫 번째 목소리, 드래곤의 별의 보호자란 말이야! 말해 줬잖아요! 이해력이 떨어지면 노력이라도 있어야 할 거 아니야!”

거인 역시 짜증스러운 얼굴로 외쳤다.

“그러니까 그게 뭐냔 말이다!”

사방이 트인 황야였지만 거인의 목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울려퍼졌다. 머리를 홰홰 휘젓던 에델린은 그 메아리가 자기 귓속에서 울리는 것임을 깨달 았다. 하지만 그런 위압적인 고함 소리도 아일페사스를 주눅 들게 하지는 못했다. 아일페사스는 저렇게 우둔한 녀석은 처음 보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외쳤다.

“뭐? 이이이익! 저는 전능한 드래곤의 하나뿐인 지배자 드래곤 로드의 이름을………….”

그때 이루릴이 팔을 들어올렸다. 거인은 이루릴을 내려다보았지만 아일페사스는 이루릴이 물구나무를 선 채 발로 박수를 치며 돌고래 울음소리를 낸다 해도 자신이 할 말은 끝까지 하겠다는 결연한 태도로 계속 말했다. 하지만 그때 아프나이델이 그녀를 끌어안으며 입을 틀어막았다.

“웁!!”

“조용히 있어, 제발!”

아프나이델의 조력에 힘입어 간신히 고요를 얻은 이루릴은 그녀다운 태도로 말했다.

“거인이여, 그녀는 드래곤입니다.”

그덴 산의 거인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말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튀어나올 정도로 커진 눈으로 거인은 아일페사스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거인은 상체를 앞으로 굽혔다. 휘익. 거대한 거인의 몸이 움직이며 그림자가 머리 위를 덮치자 엑셀핸드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을 받 았다. 거인은 상체를 숙여 아프나이델의 품에 안겨 있는 아일페사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일행들로서는 미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거대한 거인의 얼굴이 땅까지 내려온 채 그들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에델린은 동굴 같은 거인의 콧구멍을 보고는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상체를 숙이는 것만으로도 일행들에게 폐소공포증 비슷한 것을 선사하던 거인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사람인데?”

이루릴은 생긋 웃었고 아프나이델은 다리에서 힘이 쫙 빠졌다. 이루릴은 그런 아프나이델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일페사스를 놓아주세요.”

아프나이델은 아일페사스의 입을 열었다. 막혔던 봇물이 터지는 것처럼 아일페사스의 입에서 고함 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러니까 저는 전능한 드래곤의 하나뿐인 지배자 드래곤 로드의 이름을 계승하는 자, 카르 엔 드래고니안의 두 번째 목소리이자 드래곤들의 첫 번 째 목소리, 드래곤의 별의 보호자인 아일페사스란 말이야!”

아일페사스를 놓아주었던 아프나이델은 재빨리 몸을 돌려 이번에는 엑셀핸드를 끌어안아야 했다. 엑셀핸드는 아프나이델에게 안긴 채 저 멍청한 드 래곤 로드의 여식의 머리를 두드려서라도 개선하겠다는 식의 폭언을 퍼부어 댔다. 차분한 태도로 아일페사스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이루릴은 그 녀의 말이 끝나자 조용히 말했다.

“아일페사스, 원래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하셔서 거인의 의혹을 풀어드리세요.”

“응? 아아. 그렇구나! 잘 봐요, 이 우둔한 거인아!”

거인은 크게 씨근거렸지만 남아 있는 의혹은 그의 손을 멈추게 만들었다. 혹시나 정말 드래곤 로드의 딸이라면? 그래서 거인은 아일페사스를 눌러 죽이지는 않았다. 자신이 어느 정도의 위험 속에 있는지를 도통 파악하지 못한 아일페사스는 똑바로 서서는 그덴 산의 거인을 올려다보았다.

“자! 이것이 저의 정체예요! 야하아아압!”

거인은 그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차츰, 그의 마음속에서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물결치기 시작했다. 거인의 조악한 어휘 수준으로는 자기감정을 정리할 단어를 찾아내 기 어려웠다. 그래서 거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광경은 그대로였다. 거인은 입술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그게 너의 정체냐?”

아일페사스는 씩 웃었다.

“그렇다! ……엥?”

자기 목소리에 놀란 아일페사스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았다. 작고 앙증스러운 두 개의 발이 사이좋게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위의 다리 와 아랫배, 가슴까지를 주욱 바라본 아일페사스는 손을 올렸다. 가느다란 손가락들이 펴졌다 오므려졌다 하고 있었다. 사람의 손가락은 이상해. 너무 약해 보여. 아일페사스는 갑자기 인간에 대한 동정심을 느꼈다.

문득, 그녀의 정수리를 쏘아보고 있는 시선이 느껴졌다. 아일페사스는 고개를 숙인 채로 눈을 치켜떠 훔쳐보았다. 그곳에는 볼을 크게 실룩거리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거인의 얼굴이 있었다.

“오, 오……, 오아앙…… 그러니까 말이야……, 이, 이건 실수예요! 야하아아압!”

“잠깐만, 잠깐만. 이상하다? 자, 다시. 야하아아압!”

“너무 놀라지 않도록 주의해요. 이이이야압! 하이오오옵! 후압! 얍얍얍!”

“너 지금 제가 거짓말 했다고 생각하는 거죠?”

거인의 입이 무겁게 열렸다.

“아니.”

“뭐? 그럼 믿는 거야! 좋아요! 그래! 믿는군요!”

아일페사스는 깡총깡총 뛰며 좋아했다. 하지만 거인의 고개는 좌우로 움직였다.

“내가 지금 생각하는 것은 내가 수수께끼 놀이에서 이겼다는 것이다.”

거인은 자신이 상당히 위트 있는 말을 했다고 믿으며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발끈한 아일페사스는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자신이 드래곤이라 고 주장했지만 거인은 정신이 이상한 인간 계집애에게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아프나이델은 얼굴을 퍼렇게 물들인 채로 아일페사스의 뒷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그때 그가 묻고 싶던 것을 에델린이 질문했다.

“아일페사스, 아일페사스. 어떻게 된 거예요. 폴리모프할 수 없는 건가요?”

“뭐? 그래. 저 폴리모프가 안 돼. 이상해요………….. 이이이! 왜 안 되는 거야!”

“긴장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 정신을 집중해서 다시 해보면 어떨까요?”

“이이익! 새가 긴장한다고 추락사하니? 물고기가 긴장한다고 익사하니? 린, 왜 그렇게 멍청한 말을 해요!”

“그, 그래요? 그럼…………, 그럼 왜 안 되는 건가요?”

“몰라!”

엑셀핸드 역시 불안한 눈으로 아일페사스를 바라보았지만 그가 질문한 대상은 아프나이델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이봐, 아프나이델. 이게 어떻게 된 건가?”

“모르겠습니다. 왜 변신이 안 되는 건지…………. 변신이…………, 변화가?”

아프나이델은 가슴이 철렁하고 말았다. 자연스럽게 고개가 켄턴 방향으로 돌아갔다.

변화가 안 된다고?

현실이 고정되었다고?

아프나이델은 목 뒤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설마 그건가? 그것 때문에 이렇게 된 건가? 무서운 상황을 추리하던 그의 귓가에 거인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너희들은 졌다! 이제 말하라!”

누구 저 멍청한 거인 녀석의 입 좀 막아줄 사람 없나! 아프나이델은 허옇게 뒤집어진 눈으로 거인을 흘겨보고는 다시 턴빌을 바라보았다. 섬뜩함을 느낀 거인은 목소리를 조금 낮춰서 말했다.

“어, 이봐, 너희들이 졌단 말이다. 그러니 약속한 대로 루트에리노의 소재를…………….”

“이 새대가리 같은 거인아! 입 좀 다물고 있어. 생각 좀 하자!”

엑셀핸드는 눈앞이 노랗게 변했다. 이 녀석이 공포 때문에 미쳐버렸구나. 내가 거인에게 대신 사과할까? 그때 아프나이델은 들고 있던 로드를 내동 댕이치며 머리를 움켜쥐었다.

“변화가 없어? 변화가 안 된다고? 고정되었다고? 제레인트! 제레인트! 갈림길을 잘못 선택한 거요?”

올바른 선택을 하라는 목적으로 제레인트를 먼저 턴빌로 보냈던 아프나이델은 가슴이 무너질 듯했다. 그가 잘못 선택한 것일까? 아니면 너무 늦었 던 것일까? 아니, 잠깐만. 아직은 모른다. 이것은 시간이 느려지는 현상 때문에 발생한 한 증상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직 기회가 남아 있을지도 모 른다. 생각을 하자. 생각을.

턴빌로 가야 한다. 아프나이델은 자신의 결심에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턴빌로 가야 한다. 어쩌면 제레인트 혼자서는 역부족일지도 몰라. 내가 잘못 판단한 것일지도 몰라. 어서 턴빌로 가야 해. 그런데 그러려면 문제가 되는 것이 있군. 그것도 자그마치 100큐빗짜리 문제로군. 그러면 어떻게 한다? 아프나이델은 재빨리 로드를 잡더니 세레니얼의 고삐를 움켜쥐었다. 거인은 당황한 표정으로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아프나이델이 먼저 외쳤다. “나를 따라와! 루트에리노의 소재를 알려주겠다!”

거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일행들 사이에서는 빠른 속도로 시선이 교환되었다. 하지만 엑셀핸드에서 아일페사스, 그리고 에델린으로 빠르게 전달 되던 시선은 이루릴에게 이르러 멈췄다. 에델린은 가슴속이 차갑게 식는 기분으로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이루릴 양……?”

이루릴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에델린을 보고 있었다. 에델린은 불경스럽게도 신의 이름을 빌려 욕설을 퍼붓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오오, 맙소사! 엘프에게 이것이 사기라는 것을 설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

이루릴은 의아한 표정으로 에델린을 보며 말했다.

“에델린, 뭐하시나요? 어서 말에 타시죠.”

꽝! 에델린은 뭔가에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을 맛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엑셀핸드와 아프나이델도 마찬가지였다. 에델린이 뭔가 할말을 찾기 위해 입 을 뻐끔거리고 있을 때 이루릴은 차분하게 엑셀핸드가 아프나이델의 등 뒤에 타는 것을 도와주며 말했다.

“대왕도 부활하신 줄은 몰랐군요. 뵙고 싶네요. 어서 가볼까요.”

에델린은 간신히 졸도하지 않고 코스모스에 올라탔다.


네리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가 알던 제레인트가 아니었다. 잠시 동안 네리아는 할슈타일 후작의 부활마저도 잊은 채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왜 저렇게 슬픈 어조로 말하는 거지? 포기하는 것 같은, 뭐라고 하더라……………

“왜 그렇게 무력감에 젖어 말하는가.”

아, 그래! 그거였어. 네리아는 운차이를 바라보았고 제레인트 역시 운차이를 돌아보았다.

“예?”

운차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더 급한 것은 할슈타일 후작과, 그리고 주블킨의 문제였다.

주블킨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할슈타일 후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이성적 사고를 뛰어넘은 순수한 공포가 그를 사로잡았다. 후작을 찔렀을 때 그는 이 세상의 모든 확실한 진리를 뛰어넘는 확실함으로 후작의 죽음을 느꼈다. 그것은 살해의 감각이다. 그런데 후작은 주블킨이 느꼈던 감각을 배신하며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답이 뭐야!”

천둥 같은 목소리. 주블킨은 얼빠진 얼굴을 돌려 계단 아래를 바라보았다. 콜리의 프리스트들 역시 얼굴 가득한 공포로 그를 마주보고 있었다. 그리 고 그 너머 후작의 전사들, 그리고 그 뒤. 아까부터 저런 식으로 고함을 질러대던 녀석.

운차이는 다시 외쳤다.

“말햇! 여덟 번째 희생자는 죽었다. 되살아났건 어쨌건 죽은 건 죽은 거야! 그럼 아홉 번째 정답이 드러나야 한다. 아홉 번째 정답은 뭐야!”

주블킨은 되살아난다는 말에 소스라치게 놀라버렸기에 그 뒤의 말에는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되살아났다고? 그렇군! 되살아난 것이군. 죽 지 않는 것이 아니야! 인식은 공포를 몰아내고 주블킨의 경직은 빠르게 사라졌다. 주블킨은 한결 편안한 표정으로 후작을 바라보았다. 주블킨의 미간 에 깊은 주름이 생겨났다.

‘억세게 재수 좋은 녀석. 네놈이 바로………….’

숨 막히는 표정으로 할슈타일 후작을 바라보고 있던 레이저 역시 운차이의 말을 듣는 순간 딱 소리 나게 이마를 쳤다. 맞았어! 그덴 산의 거인은 되 살아났지. 이 문제 때문에. 그렇다면 저 남자도 되살아난 것인가. 하지만 이 모든 사실이 말하는 바는 무엇이지? 순간 레이저는 심장이 떨어지는 충격 을 느꼈다.

‘나크둠도 되살아날 수 있는가?

죽은 녀석들이 살아난다면, 그렇다면 나크둠도 되살아날 수 있는 것인가? 제기랄, 말이 돼! 나크둠이 되살아나지 못할 까닭이 없다. 이 웃기는 사태 들을 보라고. 방금 복부를 관통 당했던 녀석이 멀쩡하게 살아났어.

하지만 나크둠은 깊은 동굴 안에 갇혀 있어. 오오, 이런 가져다 붙일 욕도 없는 지독한! 레이저는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주블킨을 바라보았다.

“이봐! 죽은 녀석들은 다 살아나는 거요? 말해!”

“뭐라고?”

루손은 어깨를 부르르 떨며 레이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레이저는 주블킨만을 바라보며 외쳤다.

“말하라고! 죽은 자들은 모두 부활하는 거요? 거인도 부활했어. 파하스도 부활했어. 신스라이프도 부활했다고! 그렇다면……………, 죽었던 모든 자들은 부활할 수 있는 거요?”

이 소란과 공포스러운 장면들을 보면서도 아직까지도 달아나지 않고 남아 있던 시민들 사이에서 뜨거운 바람 같은 전율이 스치고 지나갔다. 되살아 난다고? 죽은 자들이? 죽은 내 어머니가, 죽은 내 남편이, 죽은 내 딸이 되살아난다고?

군중들은 스스로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점점 계단 쪽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운차이는 흠칫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금껏 공포 때문에 멀찌감치 물러나려고 애쓰던 군중들이 갑자기 주위를 좁혀오기 시작한 것이다. 군중 들은 아직까지도 하늘에 떠 있는 신스라이프와 이상한 마법사, 그리고 목적을 알 수 없는 저 괴상한 일행들에 대해 겁을 집어먹은 상태였지만 지금까 지와는 다른 표정을 지은 채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 스스로도 걷는다는 행동을 자각하지 못하는 듯한 멍한 얼굴들이었지만 운차이의 감각은 위기를 알려오고 있었다.

“이봐, 그란 사람들이…………, 그란? 제기랄!”

손이 늦었다. 그란의 어깨는 앞으로 빠져나갔고 운차이의 손은 허공을 가로질렀다. 그란 하슬러는 맹렬한 속도로 돌진하고 있었다.

후작의 전사들 중 가이버가 가장 먼저 그란을 발견했다.

“핫 소드……!”

꽝! 가이버는 얼굴을 정통으로 가격당하고 니크와 궤헤른을 덮치는 방향으로 나가떨어졌다. 중력과 운동 에너지가 적절한 조화를 이루며 인간의 비 명과 욕설을 만들어냈다. 니크와 궤헤른은 가이버의 몸에 맞아 나가떨어졌고 그란은 그 위를 훌쩍 뛰어넘었다. 뒤늦게 사태를 발견한 네리아가 찢어 지는 고함을 질렀다.

“그라아안! 무슨 짓이야!”

그란 하슬러는 아무 말 없이 콜리의 프리스트들 한가운데로 돌진했다. 콜리의 프리스트들은 주춤거리며 로드를 들어올렸으나 그란은 사자처럼 외쳤 다.

“막으면 죽는다!”

훌륭한 헤게모니아 어. 운차이는 속으로 악담을 퍼부으며 그란의 뒤를 따라 달렸다. 하지만 월등히 스타트가 빨랐던 그란은 이미 콜리의 프리스트들 사이를 무인지경처럼 헤치고 있었다. 담대한 프리스트 하나가 로드를 앞으로 내밀며 그란을 막아섰다.

“멈춰! 뭐……!” 

남은 평생 동안 후회할 결정이 었다. 그란은 프리스트의 멱살을 붙잡아 들어올리며 다른 손으론 그의 가랑이를 잡아챘다. 

“크억!”

그란은 프리스트의 몸을 방패처럼 앞으로 내밀며 계단을 뛰어올랐다. 콜리의 프리스트들은 목숨을 걸고 몸을 날려 그란의 돌진을 피했지만, 몇몇 운 수 사나운 프리스트들은 그의 진로에 서 있었다는 이유로 사람에 충돌하여 하늘을 나는 진기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쿠앙, 쾅쾅! 몸과 몸이 부딪혀서 나는 소리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충돌음이 울려퍼지며 성스러운 프리스트들이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광경 앞에 네리아는 기막힌 얼굴로 말했다. 

“전에도 봤던 거야. 사람 폭풍이잖아?”

단숨에 콜리의 프리스트들 사이를 돌파한 그란은 그때까지 앞을 가리는 데 사용하던 프리스트를 옆으로 팽개치고 검을 뽑아들었다. 이제 그의 앞에 는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고 있는 주블킨과 흐리멍덩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할슈타일 후작만이 서 있었다. 그란은 칼자루를 부러져라 움켜쥐 며 바이서스 어로 외쳤다.

“할슈타일!”

그때까지도 감각의 혼란을 겪고 있던 할슈타일 후작은 그란의 외침을 귀로 보았다. 시뻘건 분노의 색깔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선홍색의 불꽃이 폭풍 쳤다.

“마가릿 하슬러를 기억하나!”

할슈타일 후작은 기를 쓰며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손은 더듬거렸고 발은 맥박치고 있었다. 심장은 쩔뚝거리고 있었고 허파는 주춤거리고 있었다. 할 슈타일 후작은 고함지르려 했으나 왼쪽 어깨로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만을 깨달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감각의 소용돌이 가운데로 그란 의 분노가 해일처럼 몰아닥쳤다.

“되살아난 것에 감사하겠다. 내 손으로 죽여주마!”

그란은 검을 높이 쳐들었다. 여전히 비틀거리고 있던 후작은 하늘로 높이 쳐들린 그란의 검을 눈으로 들으면서도 아무 짓도 할 수 없었다. 그란의 입 술이 크게 뒤틀렸다.

“아아아압!”

“막아, 루소온!”

콰가가각!

계단 아래에 서 있던 사람들은 얼떨결에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쇠와 쇠가 부딪히며 지독한 소음과 함께 눈을 부시게 하는 불꽃이 튀어오른 것이 다. 그러나 운차이는 눈을 감지 않았다. 실눈을 뜬 채 계단 위를 바라보던 운차이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맙소사…….”

루손의 글레이브가 후작의 목 바로 앞에서 그란의 롱 소드를 막고 있었다. 그것은 수많은 영웅들과 수많은 전설을 탄생시킨 대륙의 검의 역사에서도 처음으로 일어난 상황이었다.

그건 글레이브의 유난스럽게 넓은 날 때문이다. 그냥 검이었다면 그란의 힘 때문에 반동강이 나버렸을 것이다. 저 글레이브는 연성이 강한, 상당히 질긴 철로 만들어진 것이겠지. 운차이는 애써 상황을 설명하려 했다. 하지만 눈으로 보는 상황은 그의 현실 감각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았다.

그란의 롱 소드는 루손의 글레이브에 직각으로 꽂혀 있었다.

마치 빵에 꽂아둔 나이프 같은 꼴이었다. 그란의 매끈한 롱 소드는 루손의 글레이브를 절반쯤 절단한 위치에서 정지해 있었다. 그란도 루손도 그 자 세 그대로 꼼짝도 하지 못한 채 굳어 있었다.

그러나 그란이 운차이와 같은 상황에 빠져 있는 것에 비해 볼 때, 즉 순간적으로 이 기막힌 상황을 어떻게든 납득해 보고자 애쓰고 있는 것에 비해 볼 때 루손은 상황을 설명하고 납득하고 싶은 욕망이 별로 없었다. 그리고 그런 루손의 성향은 뒤로 당겨진 그녀의 오른쪽 다리를 통해 나타났다. “꺄아아압!”

루손은 걷어찬다기보다는 미는 식으로 그란의 복부를 찼다. 무의식중에 감행한 행동이었지만 가장 적절한 행동이었다. OPG를 착용한 그란을 걷어 차서 물러나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루손은 밀어버렸고, 그란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까드드득! 귀를 틀어막고 싶어지는 마찰음이 울려퍼지며 그란의 롱 소드는 루손의 글레이브에서 뽑혀 나왔다. 그란은 뒤로 물러났고 그제서야 루손은 조금 전부터 간절히 하고 싶었던 일을 시작 할 수 있었다. 루손은 글레이브를 두 다리 사이에 끼우고는 잠시 두 손을 양쪽 겨드랑이에 낀 채 팔짝팔짝 뛰었다.

“아악, 내 손! 손가락이, 손가락이 다 부러졌나 봐! 어후후후! 팔이 저려 죽겠네. 우웅, 우우웅! 왜 막으라고 그런 거야!”

취한 듯한 기분으로도 레이저는 어떻게 앞으로 걸어나올 수 있었다.

“멈춰…………요. 당신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멈춰요.”

그란은 루손을 바라보면서 레이저의 말에 대답했다.

“왜? 마법사.”

“난 대답을 듣지 못했으니까. 거기서! 주블킨!”

계단 아래로 내려가려던 주블킨은 레이저의 고함 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레이저는 재빨리 말했다.

“질문은 모두 세 가지요. 죽은 자는 모두 다 부활하는 거요? 아홉 번째 정답은 어디 있지요?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것은 도대체 뭐지?”

주블킨의 입술이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미안하지만 그중 하나만 가르쳐 주지. 첫 번째 것. 모두 다 부활하는 것은 아냐. 그리고 더 이상의 부활도 없을 것이다.”

“뭐?”

주블킨의 입술이 이젠 분명한 비웃음을 띠고 있었다.

“저자에게 정말 콜리의 축복이 있었던 모양이군. 어떤 행운의 이름이 저자를 설명할까. 나도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짐작하는 바는 있 지…………. 정정하겠어.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도 해줄 수 있을 것 같군.”

두 번째 질문? 그게 뭐더라? 아, 그렇지. 아홉 번째의 정답. 그게 어디 있는데? 주블킨은 갑자기 몸을 홱 돌렸다. 그는 손을 들어 가리키며 외쳤다. 

“형제들이여! 그자를 보호하라!”

레이저와 루손, 그리고 그란도 황급히 몸을 돌렸다.

땅에 뚫린 구멍 옆에는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 사람은 처연한 표정으로 신스라이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주블킨은 두 팔을 위로 쳐들며 목이 터져라 외쳤다.

“드디어 정답이 나왔다! 과거로 향하는 흐름과 미래로 향하는 흐름, 그 흐름의 교차점! 콜리를 대신하여 너희들의 노고에 감사하마. 형제들이여, 그 자를 보호하라! 그자야말로 아홉 번째의 정답, 과거를 거부하는 자, 미래를 거부하는 자! 신스라이프의 희망이다!”

레이저는 눈을 크게 껌뻑거렸다. 맙소사, 저 사람이 그 정답이라고?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그는 그자를 알고 있었다. 역시 그 사람을 알고 있던 그란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주블킨을 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때 그런 독보적인 위치에 있으면서도 지금껏 오랜 침묵을 지키고 있던 신스라이프가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했다.

신스라이프는 천천히 허공을 걸어 구덩이 옆에 서 있던 자에게 다가갔다. 구덩이 가장자리까지 다가갔을 때 그의 몸은 아까 그랬던 것처럼 다시 허 공에 걸렸다. 신스라이프는 제자리에 멈춰 서서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 표정은 길지 않았다. 신스라이프는 똑바로 선 채로 손을 내밀었다. 그 의 손이 허공을 만지듯이 움직였다.

신스라이프는 낮지만 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리 가까이 오라.”

구덩이 옆에 서 있던 사람은 넋을 잃은 표정으로 신스라이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자의 다리는 흐느적거리듯 움직이며 구덩이 쪽을 향해 걸어가 기 시작했다. 구덩이의 가장자리, 신스라이프 바로 앞에 멈춰 선 그 사람은 멍한 표정으로 신스라이프를 바라보았다.

“손을 들어라.”

다리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는 그 손이 떠오르듯 천천히 올라갔다. 신스라이프는 초조한 표정으로 그 손을 바라보았다. 둥둥 떠오르던 손은 마침내 신 스라이프의 손바닥 바로 앞에 멈췄다.

“내 손을 잡아라.”

그 사람은 초점이 잘 맞지 않는 눈으로 신스라이프를 바라보았다. 주블킨은 헐떡이면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른 콜리의 프리스트들 역시 숨소리마저 죽인 채 그 손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정적이 가득한 정원 위로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울려퍼졌다.

“파! 안 돼!”

미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신호가 된 것처럼 파의 눈에 갑자기 생기가 돌아왔다. 파는 바로 앞에 서 있는 신스라이프를 바라보았다. 그녀 의 눈에서는 가느다란 눈물이 흘러내렸다.

앞으로 뻗어나간 파의 손이 신스라이프의 손을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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쳉은 숨까지 멈춘 채 파를 바라보았다.

파의 손가락들이 굽혀지며 신스라이프의 손과 깍지를 끼는 그 짧은 시간이 쳉에게는 수십 년처럼 느껴졌다. 막아야 해. 왜?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일 까. 알 게 뭐람? 모든 것이 잘 될 거야. 잘 안 되면 또 어때. 수백만분의 1단위로 구분지어진 수백만 개의 시간들을 가로질러 가며 쳉은 상념에 빠졌 다. 하지만 그 상념들의 대부분은, 아니 그 모두는 다음 상념과도 그 앞의 상념과도 연결성을 가지지 못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부분의 시 간 동안 느끼고 행하는 망상처럼. 쳉은 그렇게 수백만 개의 시간들을 무의한 상념들에 낭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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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적이지 않은 상념의 흐름 속에서 하나의 흐름이 두드러졌다. 나뉘었던 시간들이 갑자기 연결되며 쳉은 그 생각을 포착하여 상념의 시간 속에 결 박했다.

쳉은 갑자기 자신이 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파는 누구지? 미의 여동생. 꺽달진 성격이라고 생각되지만 확신할 수 없다. 마음씨 착한 호인인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나를 따라오며 내가 미를 만나는 것을 방해해 왔다. 나는 화를 내지 않았어. 감정 결핍 때문에? 아냐. 나에겐 감정이 결핍되어 있기에 파를 처리하는 데 장애물이 되는 감정도 없다. 나는 아무런 죄책감이나 감정의 얼룩 같은 것을 느끼지 않은 채 파를 강제로 돌려보낼 수 있었을 거야. 하지만 그러지 않았어.’

다시 몇 천 개의 시간이 흘렀다. 쳉은 신스라이프의 손과 마주 쥔 파의 손에서 그 얼굴 쪽으로 시선을 옮기기 시작했다.

‘너는 누구지? 난 왜 너에 대해 아무것도 떠올릴 수가 없지? 미와 만났을 때부터니까 12년 동안 너를 알아왔어. 물론 1년에 며칠씩밖에 만나지 못했 지. 그것 때문인가? 그래서 나는 너에 대해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는 건가? 아냐. 그렇다면 미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나는 미에 대해서라면 많은 것을 알고 있어. 감정 결핍 때문에? 내 감정은 미에게만 돌아가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그래도 이상해. 너는 누구지?’

몇 백 개의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쳉의 시선이 파의 볼에 도달했다.

‘양털을 깎던 파. 안장을 들어올리던 파. 아달탄을 걷어차던 파. 취한 채 덤벼드는 주정꾼 네 명을 맨손으로 모두 거꾸러뜨리던 파. 시체를 보고 싶지 않아서 고개를 돌리던 파. 사이들랜드 대초원의 가장 어두운 밤, 내 볼을 쓰다듬던 파. 너는 누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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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스라이프의 손을 마주 쥔 채, 파는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신스라이프는 그녀의 표정에는 아무 관심도 두지 않고 다른 손 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다른 손도 들거라.”

파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축 늘어져 있던 손이 힘없이 올라가며 신스라이프의 손을 마주 쥐었다. 그렇게 두 남녀는 두 손을 깍지 낀 채 서로를 바라 보았다. 레이저는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되지? 왜 저 여자야? 파 L. 그라시엘, 당신이 어떤 여자였기에? 싸움 잘하고 도톰 한 입술이 달빛 아래에서는 놀랍도록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것 이외에 당신은 또 어떤 비밀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때 레이저의 어깨를 강하게 끌어당기는 사람이 있었다.

어깨가 거의 부서지는 느낌을 받으며, 레이저는 뒤를 돌아보기에 앞서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그러나 그 비명을 억누르는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법사…………, 공격해!”

레이저는 눈물을 찔끔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멍한 표정으로 신스라이프와 파를 바라보고 있던 그란 역시 창백해진 얼굴을 뒤로 돌려 할슈타일 후 작을 보았다. 할슈타일 후작은 얼굴 근육 전체를 푸들거리며 힘겹게 말했다.

“공격해. 공격…..해! 저놈을…………, 죽여. 저것을 마, 막!”

“할슈타일!”

그란은 짓씹듯이 외치며 다시 검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할슈타일 후작이 취한 것처럼 흔드는 손을 보고서는 잠시 멈추었다. 후작은 힘들게, 어마어 마하게 힘들게 손을 움직였다. 그의 감각에서 지금 할슈타일 후작은 왼쪽 허리를 경직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할슈타일 후작은 자신의 모든 감각에 대 해 저주를 퍼부으며 오른쪽 정강이를 앞뒤로 움직였다. 즉, 말을 했다.

“저, 저놈을 공………..격. 마법…………사. 제발! 이유는…………, 천천히…… 나를 믿고! 그란…………, 제발………….”

“네놈을 믿으라고?”

그란은 어이없다는 투로 말하고는 다시 검을 들어올렸다. 이 놈의 미친 소리를 더 이상 듣고 있을 수는 없다. 저 송장 녀석이 부활하든 말든, 저 여자 가 살아난 송장의 손을 쥐든 말든 나는 네 녀석의 목을 따야겠어. 그란은 검을 높이 들어올렸다.

“할슈타일. 이건 살인이 아니다, 박멸이다!”

찢어지는 목소리로 외치며 그란은 검을 내리쳤다. 그러나 롱 소드의 날이 후작의 목에 닿기 직전, 그의 어깨는 무서운 경련을 일으키며 팔을 정지시 켰다. 후작의 목에 칼날을 댄 채, 그란은 불가사의한 장면을 보며 입술을 떨었다.

후작의 눈에 죄책감이 떠올라 있었다.

절대로 잘못 본 것이 아니다. 잘못 보았다고 치부해 버리기에는, 그래서 그대로 검을 당겨 후작의 목을 쳐버리기에는 그 감정이 너무 역력했다. 그란 은 무의식중에 말했다.

“뭐지?”

턱을 움직이는 것조차 힘든 할슈타일 후작은 침을 질질 흘리면서 애타게 말했다.

“미……안. 미안해…………….”

그란은 번갯불에 뒤통수를 강타당한 듯했다.

“뭐라고?”

“미안하다……………. 마가릿의 일………….., 미안. 나를 용서……………. 그란. 나의 잘못이……………다.”

“그만…….”

후작의 입술에서는 침방울이 튀고 기괴하게 뒤틀린 턱은 말보다는 신음 같은 것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란은 그의 말을 똑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을 똑바로 알아듣는 자신의 귀를 저주했다. 후작은 힘겹게 말했다.

“믿기지 않겠지만, 나, 내가 죽어보니…………, 이제는………… 아, 알아……, 안다……. 우스운가? 나는 우습…………다. 내가 죽은 다, 다음에야…………. 미안 하다…………. 정말, 미안…………. 용서를………….”

“그만햇! 네놈에게 사과를 받고 싶은 게 아냐!”

그러나 후작은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할슈타일 후작이 온 힘을 다해 말했을 때 그란은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충격을 느꼈다.

“마가릿…………, 살아날까?”

그란의 손에서 힘이 주욱 빠져나갔다. 그란은 이제 후작의 목을 겨누고 있다기보다는 그 어깨에 검을 얹어둔 것 같은 꼴로 서 있었다. 그러나 그와 후작 모두 롱 소드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할슈타일 후작은 힘들게 그란의 눈동자를 ‘들으며 말했다.

“너의 아내…………, 되살아날까? 그렇게 생각하나? 응? 주, 죽은 자들…………, 죽은 자들이 되사, 사, 살아난다. 그란, 그란. 너의 아내, 마가릿. 네 딸의 이름…………, 에포닌? 에포닌은 어머니를…………, 만날 수 있을까? 그, 그래. 네 아들. 죽은…………, 네 아들은?”

“무슨 말을…….”

“새, 생각해! 그……란. 죽은 자, 모, 모두 살아나, 살아난다! 네 아, 아…………내, 네 아들! 살아날까? 응? 그렇, 그렇게 생각하나? 응?”

그란은 덜덜 떨면서 뭐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혀는 제멋대로 움직이고 목구멍에서는 바람 새는 소리만이 새어나왔다. 죽은 자들이 되살아난다. 죽은 자들이 되살아난다?

“나를, 나를 봐. 되살아……………났어. 부…………활했다고! 안, 안 돼. 그럴 수 없어!”

그란이 지독한 혼란으로 빠져들어 가는 것과 반대로, 할슈타일 후작은 말을 계속하며 감각이 정상으로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이제 그의 눈은 보고, 그의 귀는 듣고, 그의 입은 말하고 있었다. 할슈타일 후작은 이제 훨씬 능숙하게 말했다.

“그럴 순 없어, 그, 그란! 그래・・・・・・선 안 돼, 마법사, 마법사! 저, 신스라이…………, 공격해 공격하라고!”

하지만 레이저는 꾸물거렸다. 그것은 평소의 그의 모습에서 퍽이나 벗어난 모습이라는 것을 그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지만, 그러나 레이저는 공격하 지 못했다. 아무 스펠도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어떤 판단도 내릴 수 없었다. 그저 눈앞으로 보이는 공포스러운 광경에서 얼굴을 돌리지 않는 것 이 그의 최선이었다.

신스라이프는 부서지고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콜리의 프리스트들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느리고 지독하게 반복적인 노래였다. 그 노래들은 대기보다 무거운 기체처럼 바닥에 깔리는 듯했다. 둔탁하고 둔중한 음정이 불규칙적으로 반복되면서 오르락내리락했다. 파하스는 혼란스러운 머릿속 한 구석에서 그 노래를, 노래라기 보다는 차라리 신음이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그 노래에 맞춰서 신스라이프가 천천히 부서지고 있었다. 넓은 옷 아래쪽으로 푸석거리는 가루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머리에서는 머리카락 이 한 올 한 올 떨어져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구덩이 아래로 떨어지기도 전에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그의 피부가 모닥불에 던져진 종이처럼 바스러 지는 것을 보며 네리아는 구역질을 느꼈다.

툭. 끔찍스러운 소리가 짧게 울리며 로브 아래로 무엇이 떨어졌다. 운차이는 그것이 신스라이프의 오른쪽 정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윽고 와 스스 하는 소리가 울려퍼지며 무수한 가루와 함께 왼쪽 다리가 허벅지부터 떨어져내렸다. 그것들은 아득한 구덩이 속으로 떨어져 갔다.

풍화되고 있다……. 제레인트는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지나친 세월의 무게를 견뎌내던 조각상이 마침내 부스러지듯 신스라이프의 몸은 파 편과 먼지, 그리고 부서진 조각들이 되어 부스러져 나갔다. 다리가 없어지자 붕궤는 점점 빨라져 마침내 상체에까지 이르렀다. 배와 가슴은 동시에 부스러지며 조각조각이 되어 떨어졌다. 머리는 거의 눈 깜짝할 사이에 먼지가 되었다.

“마, 막아! 막으라고! 이 개 같은 마법사. 막아!”

할슈타일 후작은 울부짖고 있었지만 레이저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할슈타일 후작은 비틀거리며 걸어가서는 그란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란은 그 손의 뜨거움에 흠칫했다.

“그란, 그란! 막아! 멸망은……………, 멸망만이………!”

스르륵. 받치고 있던 몸이 먼지가 되면서 신스라이프의 흰 옷은 아래로 떨어졌다. 아직 부서지지 않은 팔에서 소매가 쑥 빠졌다. 먼지와 함께 떨어져 내린 신스라이프의 옷은 흰 나비처럼 나풀거리며 구덩이 속으로 떨어져 갔다.

이제 파는 신스라이프의 남아 있는 두 팔을 쥔 채 서 있었다. 돌연 파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파는 신스라이프의 손가락을 놓았고 그러자 남아 있던 팔들은 먼저 떨어졌던 몸의 조각들과 펄렁이는 옷을 뒤따르듯 아래로 떨어졌다. 이제 신스라이프의 몸은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파는 그러고도 한참 동안 팔을 앞으로 뻗은 채 조용히 서 있었다. 콜리의 프리스트들이 부르는 노래는 그때까지도 침울한 리듬으로 지겹게 이어지고 있었다. 잠시 후 파는 손을 치켜들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게 어떤 뜻인지를 알지 못했지만 콜리의 프리스트들은 노래를 멈췄다.

파는 손을 내리고는 몸을 돌려 주블킨을 응시했다.

“너에게 감사한다, 주블킨.”

신스라이프의 목소리였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아무도 숨 쉬지 않았다. 파는, 아니 신스라이프는 그 정적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란은 헐떡거렸다. 이건 뭐지? 그때 그란의 어깨를 움켜쥐고 있던 할슈타일 후작의 손이 아래로 떨어져내렸다. 그란의 귓가로 할슈타일 후작의 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멸망은…………, 완성의 당연한 귀결인 것을…………….”

<4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