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 워커 4권 – 10장 잊혀진 바람을위한 변주곡 1

퓨처 워커 4권 – 10장 잊혀진 바람을위한 변주곡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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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죽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돌아가겠다고 말할 줄 알았다.”

도르네이는 씁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죽을 겁니다.”

신스라이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밭에 주저앉아 있던 도르네이는 빙긋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역시 눈밭 위에 앉거나 드러누워 있던 다른 일행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도르네이는 일행을 가로막고 있는 크레바스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길게 갈라진 틈바구니는 시야의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까지를 관통하고 있었다. 그들이 과연 땅 위에 서 있는지 바다 위에 서 있는지 알 수 없었기에 크레바스의 바닥이 바다일지 육지일지는 역시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도르네이는 태연히 걸어가 크레바스의 끄트머리에 섰다. 아래를 잠깐 내려 다보았지만 이미 지독한 설맹에 걸린 도르네이가 볼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도르네이는 다시 고개를 돌려 일행들을 주욱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머문 곳에 신스라이프의 굳은 얼굴이 있었다. 그의 흐린 눈에도 신스라이프의 얼굴은 잘 보였다. 당연하지. 도르네이는 희 미하게 웃었다.

“뜻하신 바를 이루기 바랍니다.”

신스라이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도르네이는 몸을 돌려 크레바스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의 모습은 눈 깜빡할 사이에 사라졌다. 아무도 크레바스로 다 가가지 않았고, 그래서 그의 마지막을 본 사람도 없었다.

신스라이프는 갑자기 몸을 돌리며 외쳤다.

“난 더 이상 이 꼴을 보고 싶지 않아!”

콜리의 프리스트들은 우울한 표정으로 신스라이프를 바라보았다. 수염과 눈썹에 붙은 흰 눈덩이가 그들의 표정을 상당히 제약하고 있긴 했지만, 신 스라이프가 그 속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은 더 이상 좌절할 수도 없는 자의 평온함이었다. 그의 격렬한 고함 소리도 그들에게서 어떤 극적인 반응은 이 끌어내지 못했다. 그 무관심한 모습은 신스라이프를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너희들 마음대로 해! 이곳에서 나를 기다리든지, 아니면 도르네이를 따라 저 속으로 뛰어들든지. 뛰어드는 녀석은 죽을 수 있을 거라고 보장한다. 그리고 나를 기다리는 놈에게는, 그래. 나는 반드시 돌아올 거라고 맹세하겠다. 하지만 그건 너희들 마음대로 정해. 내 앞에서 더 이상 자살하거나 하 “지는 마!”

그리고 신스라이프는 콜리의 프리스트들에게는 시선도 보내지 않은 채 크레바스의 반대쪽을 향해 휘적휘적 걸어갔다. 프리스트들은 우울한 표정으 로 신스라이프를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충분한 거리가 되자 신스라이프는 멈춰 섰다.

“나는 가겠다.”

그리고 신스라이프는 몸을 돌려 크레바스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크레바스의 끄트머리에 닿기 직전, 신스라이프는 땅을 강하게 찼다. 하얀 눈보라 가 폭발하듯 솟구치는 가운데 신스라이프의 몸이 위로 날아올랐다.

크레바스 상공을 그렇게 날아간 신스라이프는 건너편에 부드럽게 내려섰다. 신스라이프는 잠시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등 뒤에서는 아무 소리 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조금 후 주블킨의 다급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이, 이봐! 이보게들!”

신스라이프는 입술을 꼭 깨문 채 고개를 돌리지 않으려 애썼다. 주블킨도 곧 고함지르는 일을 그만뒀다. 등 뒤로부터 눈더미가 무너지는 것 같은 소 리가 둔하게 들려왔다. 한 번인가 짧은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신스라이프는 모진 결심을 한 끝에 간신히 발을 뗄 수 있었다.

등 뒤로부터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신스라이프는 돌아보아 누가 남아 있는지 확인하기를 거부했다. 일행의 앞길을 막았던 크레바스는 이제 그들과 신스라이프를 갈라놓고 있었고, 앞으로의 길은 그 혼자 걸어가야 할 것이다.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는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돌아왔을 때 누구를 만나게 될지 신스라이프는 장담할 수 없었다.

신스라이프는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은청색 하늘과 하얀 눈. 신스라이프는 갑자기 진저리를 쳤다. 홀로 걸어가야 할 그 거리가 무시무시한 압박감으 로 그에게 다가왔다. 아냐. 신스라이프는 부정했다. 혼자가 아니지.

파는 갑자기 말했다.

‘그들은 알아버린 것이죠.’

신스라이프는 앞으로 걸어가려 애쓰며 말했다.

“뭘………, 말이냐.”

‘그들이 자신의 시간을 다른 이에게 위탁하고 있었음을.’

단 한 번도 사람의 발자국이 찍히지 않았던, 아니, 다른 어떤 동물의 발자국도 찍힌 적이 없던 설원 위에 다시 발걸음을 내디디며 신스라이프는 파의 말을 생각해 보았다.

‘도르네이는 돌아가겠다고 말하지 않았어요. 죽겠다고 말했죠. 그 차이는 뭐죠.’

“말해야 할 이유가 없다. 닥치고 있어.”

‘도르네이는 돌아가지 않았어요. 다시 그의 삶을 살겠다고 하지 않았어요. 당신을 위해 살았던 삶이 아닌 그만의 꿈, 그만의 행복을 추구하지 않겠다 고 말했어요. 그 대신 그가 선택한 것이 뭐죠.’

“닥쳐.”

‘그의 죽음이죠.’

신스라이프는 이제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파 역시 침묵을 지켰다. 절대로 밤이 찾아오지 않는, 하지만 환한 낮도 찾아오지 않는 불투명한 하늘과 눈부신 설원 사이를 걸으며 신스라이프는 머릿속으로 아무 생각도 떠올리지 않으려 애썼다.


“저건 뭐지?”

아일페사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가 다시 크게 떴다. 그러고는 당황하며 다시 가늘게 떴다. 무시무시한 백색광이 동공을 찌르듯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후작아. 저거 뭐인 것 같아요?”

할슈타일 후작은 깊숙이 내려쓰고 있던 후드를 걷어올리며 아일페사스가 가리키는 것을 찾았다. 넓디넓은 설원 위에 하나밖에 없는 검은 점이었기 에 놓칠 리는 없었지만, 후작 역시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짐작할 수는 있었다.

“사람이겠지요.”

“사아아람?”

“우리가 쫒는…………. 그 외에 다른 무엇이 이곳에 있겠소.”

아일페사스는 눈을 깜빡이다가 앞으로 달려갔다. 눈 위를 달리는 아일페사스의 모습은 마치 단단한 땅을 달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후작과 미는 그 렇게 뛸 수 없었기에 아일페사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뒤따라갔다. 어차피 뛰려고 해도 뛸 힘조차 없기는 했지만.

아일페사스는 마지막 몇 발자국을 달리는 대신 왼발을 앞으로 내밀며 주욱 미끄러졌다. 아일페사스는 멋지게 눈을 튀기며 거대한 크레바스 옆에 웅 크리고 앉아 있는 사내 옆에 멈춰 섰다.

하지만 사내는 꼼짝도 하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아일페사스는 사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눈썹과 수염, 머리카락 등에 매달린 얼음덩이는 사내의 얼굴을 거의 다 가리고 있었다. 털옷 위에 떨어진 눈들도 딱딱하게 얼어서 사내의 모습은 조각처럼 보였다. 얼어 죽은 건가? 아일페사스는 사 내의 눈을 보았다. 그 눈은 크게 벌어진 채 크레바스 너머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눈꺼풀은 움직이지 않았다. 속눈썹에까지 자잘한 얼음 들이 매달려 있었다.

아일페사스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 가슴을 내밀며 말했다.

“죽었니? 대답하지 않으면 살아 있는 걸로 간주하겠다. 음하하.”

자신의 농담에 스스로 질려버린 아일페사스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미와 후작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아직 충분히 멀리 있었고 아일페사스는 작게 한 숨을 내쉬었다.

“호아……”

“만약 대답한다면 논리가 엉망이 될 것 같군 그래.”

와당탕 하는 소리가 나지는 않았다. 부드러운 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일페사스는 그런대로 고요하게 엉덩방아를 찧고는 커다랗게 뜬 눈으로 사 내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대, 대, 대답했어! 죽었나 봐.”

“……그만하지. 넌 이사의 처녀인가.”

“아닌데. 넌 누구세요?”

우드득! 얼굴과 목 주변에 붙어 있던 얇은 얼음 조각이 깨지고 얼어붙어 있던 옷들이 바스락거리며 아우성을 질렀다. 사내는 조그만 얼음조각을 무 수히 떨어뜨리며 고개를 돌렸다. 아일페사스는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이렇게나 거창해질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하며 입을 벌렸다.

고개를 돌린 사내는 먼저 눈 주위에 매달린 얼음들을 문질러 떼어냈다. 그러고는 보고 있던 아일페사스가 정서 불안에 걸릴 정도로 눈을 격심하게 깜빡거리고 난 후에야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잘 안 보이는군. 설맹인가.”

“전 설맹이 아니라 펫시야.”

“내가 설맹에 걸린 것 같다는 말이야. 너무 오랫동안 흰 지평선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펫시라. 이 땅에 사람이 살고 있을 리는 없을 테니 넌 사람이 아니겠군. 어떤 신인가? 글쎄. 그런 농담을 하는 것을 보니 신인 것 같기도 하군.”

“전 신이 아닌데. 그건 그렇고 넌 누구세요?”

“난 발레드 신스라이프라고 하는 사람이지. 아니, 사람이었지.”

아일페사스는 이마에 세로 주름을 만들어보이며 말했다.

“사람이었다는 말은 지금은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겠네? 그럼 뭔데요?”

“모르겠어………. 아직 그에 해당하는 말이 만들어지지 않았기에 말할 수 없는 그런 존재를 상상할 수 있겠나.”

“음. 있어. 손톱에서 살과 붙어 있는 빨간 부분과 살과 떨어져 있는 하얀 부분 사이의 경계선 같은 거. 그건 가리키는 단어가 없으니까 이렇게 길게 말해야 되죠. 이런 거 말이야?”

“쉬운 예를 잘 찾아내는군. 현명한 아이로구나.”

“그건 옳은 말이야. 그런데 네가 그런 것이라고요?”

“그런 것 같아. 나를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 단어를 가지지 못했다는 것은, 사실 많은 사람들의 문젯거리이긴 하지. 하지만 내 경우는 그게 더 극 “적이군.”

“어떻게 극적인데, 발?”

발? 발레드는 피식 웃고 싶었지만 그 동작에 필요한 근육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만큼 얼굴이 굳어 있었다. 그래서 발레드는 조용히 말했다. “이 앞의 크레바스가 보이나. 내겐 이제 잘 보이지 않지만.”

“응. 보여요. 저 길게 갈라진 것이 크레바스라면.”

이 아이는 도대체 뭘까. 어떻게 이런 장소에 있을 수 있는 거지. 발레드는 생각이 점점 힘들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 보면 이 아이의 정체를 스스 로 해명해야 할 필요는 뭔가. 아직까지도 추위를 느낀다는 것이 신기한 몸을 한 채 뭘 더 따질 것인가. 발레드는 무의식처럼 말했다.

“그곳에 수십 명의 프리스트들이 뛰어들었단다.”

“왜요?”

“왜라고 물었니? 나는 바로 그걸 확신할 수가 없단다.”

“확신할 수 없다면 추측할 수는 있는 거겠네?”

“그래.”

“말해 봐요.”

“그들은 한 사람에게 자신의 모든 시간을 위탁했던 거다.”

“자신의 생애’나 ‘자신의 충성’이라고 말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러면, 짠! 기사도가 되잖아.”

“아니, 시간이야. 생애라고 말했을 땐 살아가는 모습이지. 충성이라고 말했을 땐 살아가는 의미이고. 하지만 그들은 시간을 바쳤단다.”

“설명, 설명, 설명해라. 시간, 시간, 시간이 뭔데?”

“세상에 대한 자기만의 기만이지.”

아일페사스는 눈살을 조금 찌푸렸지만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제리고 그렇고 나이드도 그랬어. 기다리면 알아서 말할 거야. 사람은 그렇더라고. 과 연 발레드는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일페사스가 기대하던 말은 아니었다.

“왜 조용한 거니? 보이지 않는데 말도 없으니 불안하구나.”

아일페사스는 정직하게 대답했다.

“기다리면 말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사람들은 그러잖아.”

“그래? 그걸 알고 있는 걸 보니 너도 내 말을 이해하고 있구나.”

“속이 안 좋아요?”

“뭐?”

“아무리 그래도 말을 해요! 말처럼 들리는 트림은 그만하고! 브레스를 확 뿜어버릴까 보다.”

내 말에 대해 이토록이나 통렬한 비평을 받아본 건 평생 처음인걸. 발레드는 기어코 웃고 말았다. 그 얼굴을 보던 아일페사스가 겁에 질려 ‘아니에 요, 아니에요. 브레스 뿜는다는 거 농담이야. 히이잉!’하고 울먹거렸다는 사실에 대해서 고려하지 않기로 한다면, 어쨌든 웃을 수는 있었다.

“시간은 순서란다.”

“좋아요.”

“순서는 동시에 일어나는 일에서는 발생하지 않는 거란다.”

“키스할 때 누가 누구의 입술에 먼저 닿았는가 하는 순서가 없는 것처럼?”

발레드는 다시 아일페사스를 공포에 질리게 만들었다. 즉, 웃었다.

“그렇구나…………, 그래. 거기엔 순서가 없단다. 순간만 있지.”

“그런데?”

“잠깐 이야기를 접어두고 한 삶을 보자. 어떤 사람이 열심히 일해서, 많은 돈을 벌어서, 안락하게 산다면 그 사람은 노후에 이렇게 말할 수 있겠지. ‘내 시간에 후회는 없었다.’, ‘나는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 열심히 살았다.’, 이런 말들은 자서전 같은 걸 뒤져보면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단다. 네가 그 런 걸 읽었는지 모르겠지만.”

베고 자기는 했어. 아일페사스는 카르엔 드래고니안의 순결의 방에 있는 책더미를 떠올리고는 작게 진저리쳤다.

“그리고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은 그가 지나온 시간을 계획적으로 잘 살아왔다고 생각하게 되겠지. 하지만 그가 과연 시간을 순서대로 살아온 것일까, 펫시?”

아일페사스는 발레드가 퍽 마음에 들었다.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펫시라고 불러주었다. 그리고 아일페사스는 그 쉰 목소리로 불릴 때 자신의 이름이 근사하게 들린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일페사스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말이니, 발?”

“그는 열심히 일할 땐 안락하게 사는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고 있을 거야. 그리고 안락하게 살게 되었을 땐 고생스러웠던 지난날을 생각하고 있겠지. 그 사람은 사실 거꾸로 살아온 거야.”

“거꾸로?”

“그래. 열심히 일할 땐 안락해진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 상상을 즐기지. 이건 신용 대출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안락하게 되었을 땐 지긋지 긋하다고 말하면서도 과거를 생각하지. 이건 빚갚음이라고 할 수 있겠지. 즐거움은 미리 배당받았기에 더 이상 받을 수 없고, 과거에 빚갚음하며 살 다가 죽는 거야.”

“아아, 그렇네요. 맞아요. 그렇구나. 응응. 저 아는 척하고 있어. 똑똑해 보이죠? 비참해라……”

“순서라는 말을 다시 생각해 보자꾸나. 인과라는 말을 쓰고 싶은 유혹을 느끼지만……………. 좋아, 인과라고 해두자.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있겠지. 여기 엔 순서가 있다. 결과가 먼저 발생하진 않아. 원인이 먼저 발생하지. 그렇지?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일어날 테니. 아까 말했던 한 사람의 삶의 모습 같 은 것도 이와 같지. 열심히 일한 것이 원인이고 안락한 노후 생활이 그 결과일 거야. 알겠니?”

“좋네요. 이해해.”

“하지만 사람의 마음속의 흐름을 보면 그 순서가 이상하게 바뀌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단다.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행위를 하고 있을 때, 그 사람은 그 결과를 즐기고 있단다. 근엄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겠지. ‘예상되는 결과가 시원찮군. 관두는 것이 낫겠어.’ 잘 보렴, 이때 그 사람은 행위에는 관심이 없어. 결과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야. 아직은 존재하지도 않는 그 결과를 사람은 앞당겨서 즐길 수가 있어.”

“아아.”

“그리고 결과가 일어났을 때를 보자꾸나. 그는 이제 행위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거야. 그것이 뉘우침이든 즐거운 회상이든 상 관없어. 그는 결과가 아닌 행위를 생각하고 있지. ‘젠장, 그때 그렇게 하지 않았어야 되는데.’, 혹은 ‘만약 그때 이러했다면.’, ‘그렇게 했기에 가능했 지.’등의 말들이 그것인데, 이런 말 속에 담겨 있는 감정은 좀 다를지 몰라도 행위를 생각하고 있다는 점에는 차이점이 없단다. 이젠 존재하지 않는 그때의 그 행위를 즐기고 있는 거지.”

“아아. 그렇네.”

“순서가 바뀌어 있다는 것을 알겠니?”

“으으응. 하지만 행동하면서 동시에 즐거워하는 경우도 있잖아. 춤을 춘다거나 노래를 부르는 것도 그렇고,.”

“키스도 그렇고?”

“까르르륵!”

“그래. 하지만 그건 시간이 아니지.”

“응?”

“그럴 때 쓰는 말 하나를 들어볼까? ‘시간 가는 줄 모르고.’라는 말이 있겠구나.”

“음음. 좋아요. 실제의 시간과 사람 마음속의 시간이 서로 다르다고 쳐. 그런데?”

“사람은 언제나 시간과 떨어져 있다는 거지. 시간과 함께 있지 않아. 주어진 시간을 열심히 산다는 말은 사실 불가능하지. 그는 언제나 시간과 별개 의 존재였으니까. 그것이 인간에게 자존심을 주지. 부모와 떨어져 있는 꼬마가 느끼는 자존심과 비슷한.”

“별개의 존재라고?”

“그래야만 시간을 만들어낼 수 있으니까.”

“그래야만 만든다고?”

“그래. 서로 별개여야 하지. 한 여자가 이 세상의 어떤 남자와 결혼하든, 설령 그녀의 아버지와 결혼한다고 해도 그녀 자신을 낳을 수는 없는 것처 럼. 사람은 시간과 별개여야 한단다. 그래야만 시간을 만들어낼 수 있으니까.”

“흐응. 괴팍한 논리다. 용서해 줄게요. 그런데 왜 프리스트들은 구덩이 속으로 들어간 거야?”

“신스라이프라는 사람이 있었단다.”

“흐음. 그런데?”

“그는 시간과 하나가 되어버리려고 결심했단다. 영원히 살기로 한 거지.”


“그가 마지막 순간에 한 행동이 뭐였지?”

딤라이트는 무스타파를 흘끔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는 자신의 지팡이를 버렸지.”

“그래.”

“그게 대답이 될 거라고 생각하나, 무스타파.”

“잊지 말게. 난 자네에게 그걸 선물했네.”

딤라이트는 저 먼 성벽 아래에 서 있는 키티 데시의 가슴에 안긴 거대한 백파이프를 바라보았다. 키티는 휘청거리면서도 열심히 그것을 연주해 보려 고 애쓰며 켄턴의 시민들을 웃기고 있었다. 삐이엑, 뿌에엑.

무스타파는 단조롭게 말했다.

“그건 일종의 테스트였지. 나는 솔로처의 말을 시험해 보았네. 과연 그리움으로 과거를 불러낼 수 있는 것인지. 가능했네. 난 자네에게 그걸 주었지. 생성에 성공한 만큼, 이제 소멸도 가능할 거라고 봐. 그 소멸의 열쇠가 무엇인지를 찾아낸다면 말이지. 내 안타까움의 닻이 무엇일지…………. 그런데 말 일세, 아무래도 우린 하나였다는 사실이 문제인 것 같더군.”

딤라이트는 다시 무스타파를 쳐다보았지만 무스타파는 저 멀리 지평선을 뒤덮고 있는 검은 안개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솔로처는 차라리 쉬웠을 거야. 지팡이를 버린다는 것은 퍽이나 상징적인 행동이지. 어쨌든 그는 솔로처라는 한 명의 마법사만을 정리하면 그만이 었고, 그래서 그는 우리보다 먼저 떠났지. 하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묶여 있다네, 딤라이트. 천공의 기사들. 자네가 죽는다면 나와 그레이가 자네를 부 를 걸세. 내가 죽는다면 자네와 그레이가 그럴 테고, 그리고 그레이는………….”

무스타파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말했다.

“그가 죽는다면 우리 손에 의해서일 테고, 그리고 우리에 의해 되살아나게 될 테지. 짝을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기막힌 노릇이지 않은가. 우리는 하 나일세. 우리는 서로의 그리움이고 서로의 안타까움일세. 서로의 열쇠란 말일세. 인정하기는 어렵지만 납득할 수는 있는 말인데, 우리들은 이루지 못 한 약속이나 패배한 전투 때문에 되살아난 것은 아닐 걸세. 기사로서 낙제감이군. 우리는 서로를 부활시킨 것일 거야. 그런 우리들이 다시 사라져가 기 위해선 이 땅과 이 시간 위에서도 우리는 다시 하나여야 하네. 그런데 우리는 서로 적이 되어 갈라졌네.”

딤라이트는 고개를 숙였다. 무스타파는 흉벽 위로 눈물을 떨구며 말했다.

“우리는 끝장일세. 딤라이트. 아니, 말이 잘못되었군. 우리는 결코 끝장날 수 없게 되었네.”

“여기서는 그렇겠지요.”

딤라이트와 무스타파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적어도 켄턴에서는 그들만큼이나 이질적인 사람이 서 있었다. 무스타파는 눈을 훔치며 딱 딱하게 말했다.

“무슨 말인가, 에카드나.”

천공의 기사인 그들이었지만 에카드나의 모습 앞에선 일종의 위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투쟁의 증거인 이빨에서 비롯되고 투쟁을 통하여 태 어나는 용아병은 켄턴의 성벽 위에 누군가 가져다 놓은 석상 같은 모습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 감정이 엿보이지 않는 눈빛으로 그들을 바 라보던 에카드나를 향해, 딤라이트는 재촉하듯이 말했다.

“여기서는 그렇다는 말은…..”

“이 땅은 천공의 기사들이 죽을 수 있는 장소는 아닌 것 같다는 말입니다.”

“뭐라고?”

바람에 흩날리는 머릿결과 말을 꺼내는 입술을 제외하면, 에카드나의 모습에선 조그마한 움직임도 찾아볼 수 없었다.

“글쎄요. 제 생각으로 천공의 기사들이 쓰러져가야 할 장소는 이 땅 위는 아닌 것 같습니다. 천공의 기사들이 마지막으로 서 있어야 하는 장소

뿌와아악!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 딤라이트는 기겁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성벽 아래에서는 키티가 가슴에 맨 백파이프가 출렁거릴 정도로 팔짝팔 짝 뛰고 있었다.

“소리 났어! 소리 났어! 들었지요? 내가 소리를 냈어요!”

딤라이트는 그만 미소 짓고 말았다. 그는 환한 미소를 지은 채 무스타파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무스타파는 에카드나에게 배운 듯한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마주볼 뿐이었다. 딤라이트는 겸연쩍은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다시 말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네, 에카드나. 하지만 가능할까.”

에카드나가 대답하기도 전에 무스타파가 먼저 말했다.

“뭐라고? 딤라이트. 무슨 말인지 알겠다니……”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자네가?”

“이봐, 딤라이트. 무슨 말을 하는지 나는 모르겠네만…

“그가 원하는 것이 이 성 안에 있습니다.”

“그런가. 그것 말이군. 하지만 데스나이트는 어쩌지?”

“그라니? 자네들 도대체 무슨 말을 나누는 건가…………”

“제가 담당해야 하겠지요. 그것을 목적으로 삼기로 했습니다.”

“솔로처는 역시 대마법사였군. 그는 떠났지만 자네를 남겨둔 것이었군. 계획을 말해 보게.”

“딤라이트!”

무스타파는 벌컥 고함을 질렀다. 대화를 나누던 딤라이트와 에카드나는 입을 다물고 그를 돌아보았다. 무스타파는 씩씩거리며 말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들을 나누는 건가! 뭐야? 천공의 기사가 마지막으로 서 있어야 되는 곳이라니! 일스를 말하는 건가?”

딤라이트는 다시 웃음을 띠었고 에카드나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무스타파는 에카드나의 얼굴을 쳐다보며 더 화가 치밀었다. 입술 을 깨물고 있는 무스타파를 향해 딤라이트는 조용히 말했다.

“일스라고? 아닐세. 조금 전 자네가 말했듯이 우리는 기사로서는 낙제감이지. 우리는 우리의 충성이 가리키는 그 땅에서 부활하진 않았네. 일스가 아냐.”

“뭐? 그럼 켄턴인가? 하지만 조금 전 이곳이 아니라고…………, 설마 콜로넬 계곡인가?”

딤라이트는 다시 웃었고 에카드나는 여전히 진저리쳐지도록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무스타파는 이제 에카드나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래서 딤라이트는 무스타파의 옆얼굴을 향해 말해야 했다.

“하늘일세.”


킨 크라이는 사납게 날뛰었다. 쇠사슬이 춤을 추며 요란한 소음을 울렸고 매섭게 부딪는 부리 역시 끔찍한 음향을 만들어냈다. 머리와 목, 어깨에 돋 아 있는 깃털들이 모두 뻣뻣하게 곤두선 킨 크라이의 모습은 실제보다 두 배는 커 보였다.

켄턴의 억센 병사들이 완전 무장을 하고 도전했지만, 킨 크라이는 맹수와 맹금이 구사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횡포를 그들에게 저질러놓았다. 머리 를 쪼이고 땅바닥에 나동그라진 병사는 주위의 동료들이 재빨리 끌어낸 덕분에 간신히 복부가 난자당하는 꼴은 면하게 되었다. 병사는 박살난 투구 를 아연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그것을 옆으로 집어던졌다.

네 다리에 묶인 쇠사슬에 세 명씩의 병사가 매달린 모습으로 킨 크라이는 넓은 마당으로 끌려나왔다. 킨 크라이는 그야말로 입체적으로 날뛰었다. 전후좌우에 덧붙여 아예 하늘로 날아오르려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도합 열두 명의 병사들이 목숨을 걸고 매달려 겨우 그 비행을 저지했다.

딤라이트는 슬픈 눈으로 킨 크라이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에카드나는 묵묵히 킨 크라이를 지켜보다가 앞으로 걸어갔다. 킨 크라이는 부리를 딱딱 부딪치며 사납게 으르렁거렸고 쇠사슬에 매달린 병사들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킨 크라이는 충분한 거리에 들어오면 언제든지 앞으로 돌 진하겠다는 태도를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누구의 눈에도 그의 결심은 확고해 보였지만, 그러나 에카드나만은 아무런 표정 없이 킨 크라이를 향해 걸어갔다.

“내게 복종하라.” 그래서?

킨 크라이는 똑바로 섰다.

에카드나는 킨 크라이의 장구들을 들고 있는 경비 대원에게 다가가 그 안장과 고삐 등을 받아들었다. 그러고는 주저 없는 걸음걸이로 킨 크라이에게 다가섰다. 킨 크라이는 에카드나가 고삐를 채우고 안장을 얹는 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딤라이트는 그 모습을 보며 기사 서임식을 떠올렸다. 어깨 를 펴고 꼿꼿하게 서 있는 기사와 검을 하사하는 군주.

에카드나는 안장을 다 채운 다음 천천히 물러났다. 그가 킨 크라이의 목 갈기라도 쓰다듬지 않을까 걱정하던 무스타파는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 다. 에카드나는 친밀감을 나타내는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고 조용히 물러났다. 그것은 무관심이라고도, 또는 무스타파가 생각하는 것처럼 킨 크라이 의 자존심에 대한 경의라고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기사의 목을 쓰다듬는 것은 군주답지는 않은 행동이다.

에카드나는 부드럽다는 것 이외엔 어떤 호감도 찾을 수 없는 그 목소리로 말했다.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으로 무엇을 원하십니까.”

무스타파는 칼자루 끝의 폼멜을 잠깐 쓰다듬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 마지막 술잔과 내 마지막 노래는 이미 300년 전에 즐겼소. 미련은 없소.”


그러나 딤라이트에게는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랬기에 그는 성벽 아래에서 백파이프를 가슴에 안고 씩씩하게 행진하고 있는 키티를 찾아갔다.

키티 데시는 커다란 백파이프에 상체가 거의 가린 모습으로 행진하고 있었다. 있는 힘껏 취입구를 불어대고 있느라 두 볼이 발갛게 물든 채로, 키티 는 자신이 만들어내는 불협화음에 황홀해하고 있었다. 비록 주위의 경비 대원들과 시민들은 비극적인 처지에 떨어져 치를 떨고 있어야 했지만.

그렇게나 열중하고 있었기에, 키티는 딤라이트가 한참 동안 제자리에 서서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결국 헛기침을 몇 번 했을 때야 간신히 그가 온 것을 알아차렸다.

“딤라이트 경! 선물 너무너무 고마워요!”

딤라이트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백파이프를 선물했던 기억이 없었지만 그녀의 눈 속에서 ‘내가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라는 의미로 파악되는 도 발적인 눈빛이 번득이는 것을 보고는 나오려던 말을 도로 집어삼켰다.

“즐거워하시는 것을 보니 제 마음 또한 행복합니다.”

키티는 해죽 웃었고 딤라이트는 퍽이나 전격적으로 강탈당한 백파이프를 서글픈 눈으로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오른쪽 무릎을 꿇었다. 키티는 어리 둥절한 표정으로 딤라이트를 보다가 메고 있던 백파이프를 내려놓았다.

“딤라이트 경?”

“레이디 케이트 데솔로 인사를 드리고자 찾아왔습니다.”

“인사라니요, 무슨?”

“저는 떠나갈 것입니다.”

“떠나…………, 떠나요? 어디로?”

딤라이트는 ‘어머님이 계셨던 곳 말입니다.’라고 말하고픈 유혹을 억눌렀다.

“하늘입니다.”

키티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딤라이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를 이해시키고자 찾아온 것이 아니었기에 딤라이트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떠나기 전에 꼭 당부드릴 말이 있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키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전혀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에, 원래 상대방이 도와줄 때에만 대화를 잘할 수 있는 딤라이트는 퍽이나 힘들게 말을 이어나갔다.

“모친께서 돌아오신 것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예…

키티의 어눌한 대답을 들으며 딤라이트는 자신의 불길한 추측이 맞아떨어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딤라이트는 더욱 힘들게 말해야 했다. “모친께서 돌아와서 행복하시지요?”

“행복해요, 예.” 하고 말하는 키티의 목소리는 시큰둥했다.

딤라이트는 손바닥을 위로 한 채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키티는 잠시 그 손바닥을 바라보다가 그 손 위에 자신의 왼손을 얹었다. 하지만 딤라이 트는 키티가 기대하는 것처럼 그 손등 위에 키스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대신 딤라이트는 그 작은 손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키티는 입술을 비죽 내밀 었다.

“달라요.”

“다르다고 하셨습니까.”

“예, 응, 그러니까………, 달라요.”

“그렇습니다. 레이디 케이트 데솔로.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은 그것이 과거이기 때문입니다.”

키티는 고개를 갸웃했다. 딤라이트는 우울함을 떨치려 애쓰며 말했다.

“저에겐 하나의 추측이 있습니다. 어느 날, 레이디 케이트가 귀가하셨을 때 모친께서 부재 중이실지도 모릅니다.”

“우리 엄마가 어디 간다고 했어요?”

아니오. 당신이 보낼 것입니다.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가요……”

당신이 불렀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과거의 어머니를 부른 것입니다. 현재의 어머니가 아니라, 결국, 당신이 주문한 것이 잘못 배달된 것이지요. 당신 은 짜증을 내며 반환해야 할 것입니다. 솔로처가 그 자신을 반환한 것처럼.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스스로를 반환하려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특별히 말하고픈 이유는, 솔로처나 우리들의 경우와는 달리 이것은 당신의 모친이 아니라 당신이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슬퍼하지 마십시오.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딤라이트는 수십 마디의 말이 머릿속에서 회오리바람처럼 몰아치는 것을 느꼈지만 그의 입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 노릇을 어찌하면 좋을까. 그레 이, 자네가 있었다면.

“레이디 케이트 데솔로.”

“예.”

“레이디 케이트 데솔로.”

“말씀하세요, 딤라이트 경.”

“슬픈 추억은 발바닥에 꽂힌 가시 같은 것입니다.”

다행히도 키티는 폭소를 터뜨리지는 않았다. 그리고 불행히도, 키티가 폭소를 터뜨리지 않았기에 딤라이트는 끝까지 말할 자신을 얻었다. 딤라이트 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뽑기 힘든 가시 말입니다. 그것은 움직이지 않으면 아프지 않습니다. 괜스레 건드리면 아프지요. 조심스럽게 걸으면 아프지 않습니다. 끝까지 걸어 갈 수도 있습니다.”

“딤라이트 경…… 가시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가시를 빼서 어깨 너머로 집어던지고 끝까지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으시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그 가시마저도 사랑하기에 뽑지 못합니다. 그럴 바에는, 건드리지 않으려 조심하면서 끝까지 걸어가야 합니다. 발이 아파서 중간에 주저앉는 것은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키티의 눈망울이 아롱거렸다. 이 커다란 남자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딤라이트는 눈을 내리감으며 말했다.

“레이디 케이트 데솔로,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딤라이트는 손을 폈다. 그의 커다란 손에 쥐어져 있던 키티의 작은 손은 발갛게 물들었고, 그 손등 위로 땀방울이 몇 개 반짝이고 있었다. 딤 라이트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 손등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소금기와 옅은 먼지 냄새가 풍겨왔다. 딤라이트는 키티의 손등에 키스했다.

키티는 일어서는 딤라이트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다리가 긴 남자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딤라이트가 일어나는 동작은 빨랐다. 같은 속도로 움직여도 빠르게 느껴지는, 그래서 쉽게 떠나버리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으로 딤라이트는 일어섰다. 그리고 그가 몸을 돌리면서 살짝 일어난 커다란 망토가 키티의 시야를 가득 메워버렸다. 한 순간 그녀의 눈앞엔 물결치는 망토뿐이었다. 그래서 키티가 딤라이트의 모습을 제대로 보게 되었을 때, 그는 이미 한참이나 먼 곳을 걸어가고 있었다.

키티는 까닭 없이 울고 싶어졌다. 그리고 아직 자제력을 배우지 못한 소녀답게, 키티는 마음 놓고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