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 워커 4권 – 10장 잊혀진 바람을위한 변주곡 2

퓨처 워커 4권 – 10장 잊혀진 바람을위한 변주곡 2


2

“내가 누구냐!”

“대장입니다!”

“너희들 목숨은 누구 것이냐!”

“대장님 것입니다!”

“너희들 목숨은 내가 맡았다. 따라서 너희들은 내 허락 없이는 죽지 않는다! 나를 믿어라, 아무 걱정 말고 달려라! 대왕이여, 우리를 굽어 살피소서. 켄턴, 루트에리노!”

“켄턴, 루트에리노!”

로터스 경비 대장의 호령 하에 켄턴 경비대원들은 함성을 내지르며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대열의 오른쪽에 서 있던 아이라의 거대한 몸 위에서 무스타파 하빈스는 작게 중얼거렸다.

“정의가 닿는 그 어느 곳에서라도 피어오르는 장미를. 장미를………”

무스타파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 땅의 가장 외지고 쓸쓸한 어디라도 좋으니…………, 내 정의로 붉은 장미 한 송이를 피울 수 있을까, 아이라?”

아이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스타파는 혁대에 꽂아두었던 장갑을 뽑아들며 말했다.

“나는 그것이 피의 상징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라.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 어느 곳에서라도 내 피를 흘릴 수 있다는 말로. 하지만 이젠 좀 다르 구나.”

무스타파는 고개를 돌렸다. 켄턴의 성벽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아이라의 등 위에 올라타고 있었기에 그는 퍽이나 높은 위치에서 내려다볼 수 있었 고, 성벽 위에 서 있는 주리오 시장과 히든보리 사집관의 얼굴도 잘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무스타파의 시선을 알아차리고 열띤 동작으로 손을 흔들어 댔다. 무스타파는 목례해 보인 다음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내가 정의를 가졌을 때, 내가 바라보는 세상은 가장 아름답다는 의미였다. 내가 정의를 가지지 못했다면, 그 어느 곳에 있더라도 기괴한 세상을 바 라보게 될 거라는 의미이기도 하고. 그런데, 아이라. 이상하구나. 나는 이 시간에서 정의롭지 못한 존재일 테지. 이 시간과는 상관없는 존재란 말이 야.”

무스타파는 장갑을 힘 있게 당겼다.

“그런데 왜 이 세상이 이렇게도 아름다운 거지?”

딤라이트 이스트필드는 대열의 반대편에서 헐스루인의 갈기를 쓰다듬고 있었다. 헐스루인은 눈 위로 흘러내린 갈기 때문에 거칠게 목을 흔들며 푸 르릉거렸다.

“긴 시간 동안 내게 봉사해 왔고, 그러고도 다시 시간을 뛰어넘어서 내게 봉사해 온 것에 대해 뭐라고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다, 헐스루인. 이젠 내가 네게 봉사해야 할 차례겠지.”

딤라이트는 머리에 쓴 투구를 벗었다. 투구는 곧 그의 손에서 떨어져 땅바닥에 뒹굴었다. 딤라이트는 고개를 숙여 헐스루인의 목에 얼굴을 가져가며 말했다.

“가자, 헐스루인. 우리의 시간으로, 우리의 하늘로 이 시간과 이 땅은 우리의 쉼터가 아니다. 우리의 과거 속에서 우리의 하늘을 마음껏 날아보자.” 딤라이트는 헐스루인의 목에 뺨을 댄 채 웃었다. 밝은 웃음이었다.

“내가 너를 위해 그 하늘과 그 시간을 만들겠다.”

그 모든 대열 앞에 에카드나가 땅바닥에 앉아 있었다.

한 손엔 거대한 검을 짚고 다른 손엔 킨 크라이의 고삐를 쥔 채, 에카드나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지평선을 응시하고 있었다. 검은 안개가 이제는 익 숙해진 모습으로 검은 산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에카드나는 말없이 기다렸다.

두두두두두.

에카드나의 밝은 귀에는 말발굽 소리와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검은 안개는 천천히 켄턴 방향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윽 고 검은 안개 아래 어둠 속에서부터 노랫소리가 울려퍼졌다.

“얼얼어어붙붙은은 마마음음! 핏핏빛빛 깃깃발발! 데데스스나나이이트트의의 율율법법!”

전의를 북돋우고 있던 켄턴 경비 대원들의 목소리가 낮아지기 시작함과 동시에 로터스 대장의 미간도 찌푸려졌다. 로터스는 씁쓸한 입 안을 핥으며 생각했다. 내 인생 최대의 이야깃거리이긴 한데 말이야, 이왕이면 그 이야깃거리를 누군가에게 들려줄 수도 있었으면 더 좋겠군. 에카드나는 천천히 일어났다.

소를 끌고 집으로 돌아가는 촌부의 모습이 되어, 에카드나는 킨 크라이를 끌며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비교적 맑은 하늘과 비교적 적당한 기온 속에 에카드나는 비교적 평온한 걸음걸이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비교를 거부하는 데스나이트들 속에서 그레이는 에카드나의 모습을 보았다. 정확하게는 그의 손에 이끌려 걸어오고 있는 킨 크라이의 모습 을 본 그레이는 곧 돌진을 멈췄다. 그러자 데스나이트들 전체가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들의 하나의 목소리처럼 하나의 동작으로 멈춘 데스나이트들 은 지평선 위에 늘어선 공포의 숲이 되었다.

에카드나는 걸어가면서 고함질렀다.

“요구대로 그리폰을 데려왔다! 그레이 휠드런은 앞으로 나와라!”

데이든 평원은 마치 그 위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고요해졌다. 비록 100여 기의 데스나이트와 그 몇 배에 달하는 켄턴 경비 대원들이 삼엄하게 대치 하고 있었지만, 들려오는 소리라곤 말들의 콧김 소리와 거친 바람소리뿐이었다. 그래서 에카드나는 자신이 홀로 이 평원에 서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고고삐삐를를 놓놓고고 돌돌아아가가라라, 용용아아병병.”

에카드나는 씩 웃었다.

“싫다. 땅에 떨어진 물건을 줍는 식인가? 기사답게 걸어와 내게서 직접 받아가라. 이곳엔 네가 두려워할 것이 없다.”

다시 고요만이 흘렀지만 그 고요는 데스나이트들과 켄턴 경비 대원들만을 괴롭히고 있었다. 에카드나는 데이든 평원 위에 지나치게 많이 떠다니는 고요로부터 자유로운 모습이었다.

안개가 확장되기 시작했다.

켄턴 경비 대원들은 주춤하며 무기를 꼬나들었다. 데스나이트들의 머리 위를 감돌던 안개가 서서히 하늘을 가리며 번져 나오기 시작했다. 위압적인 모습이었지만, 경비 대원들은 신음을 내지르기 직전에 간신히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안개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데스나이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검은 안개만이 데이든 평원을 검게 물들이며 다가왔다. 에카드나는 햇빛이 가려지자 미간을 조금 찌푸렸지만 아무 동작 없이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터걱, 터거걱.

거대하고 불규칙적인 발자국 소리와 함께 데스나이트들의 무리 가운데서 그레이가 걸어 나왔다. 그레이가 타고 있는 괴수는 정상적인 동물에게 허 락된 숫자보다 더 많은, 게다가 정상적인 동물보다 훨씬 불규칙하게 배열된 다리 때문에 걷는 모습이 비척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 괴수의 등에 올라탄 그레이의 몸 역시 좌우로 불규칙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그레이의 얼굴은 전혀 흔들리지 않은 채 에카드나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에카드나의 머리 위까지 확장된 검은 안개 때문에 데이든 평원은 검게 물들어 있었다. 에카드나는 문득 덥다는 느낌을 받았다. 왜 그럴까. 감각들을 하나씩 확인해 본 에카드나는 잠시도 쉬지 않고 불어대던 바람이 어느새 멎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검은 평원 위로는 한 점의 바람도 불지 않았다. 하 지만 풀들은 흐느적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레이는 그 무풍의 검은 평원 위를 기억하기 싫은 악몽처럼 걸어오고 있었다. 킨 크라이는 다가오 는 괴수의 모습에 목의 깃털을 모두 곤두세운 채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터걱, 터거걱.

그레이는 에카드나 앞에서 멈췄다.

그레이를 태운 괴수는 목뼈를 신경질적으로 흔들어댔다. 그래서 그 목뼈에 너덜너덜하게 매달려 있던 힘줄과 신경줄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폐가의 거미줄처럼 정신 사납게 너풀거렸다. 왼쪽 세 번째 다리는 허공에 뜬 채 경련을 계속하고 있었고 가슴에 달린 두 번째 입에선 기이한 휘파람 소리 같 은 것이 흘러나왔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 모습을 보던 에카드나는 이 괴수가 어떤 상태인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역시 괴수의 상태를 짐작한 그레이 는 무거운 투구 저편으로부터 낮게 말했다.

“드드래래곤곤 피피어어 같같은은 것것이이냐냐.”

“그 이름이 좋다면 그렇게 불러라. 네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항상 그러하듯이.”

“무무지지에에서서 공공포포를를 느느끼끼는는 인인간간으으로로 취취급급할할 생생각각인인가? 나나는는 공공포포, 절절망망, 어어둠둠의의 데데스스나나이이트트. 내내가가 바바로로 공공포포다다.”

“네 공포가 너를 절망시켜 모든 것을 어둡게 만들겠지. 그 어둠 속에서 네가 찾는 유일한 빛을 가져가라, 멍청아.”

에카드나는 고삐를 놓고 뒤로 물러났다. 킨 크라이의 고삐가 땅에 부딪혀 작은 소음을 냈고, 에카드나는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킨 크라이는 고개 를 조금 돌려 에카드나를 보았다가 다시 괴수를 경계했다. 그레이는 그런 에카드나를 말없이 노려보았다.

“켄턴의 자유와 안녕에 대한 약속을 지킬 거라고 믿는다, 그레이.”

그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레이는 한쪽 다리를 들어 괴수의 등으로부터 내려섰다. 그레이의 발이 땅에 닿는 순간, 괴수는 비명을 지르며 앞 다리 세 개를 쳐들었다.

“캬아아악!”

에카드나는 상체를 낮추었고 킨 크라이는 당장이라도 날아오를 듯이 날개를 폈다. 하지만 괴수가 처절한 비명 소리로 토해내고 있는 감각은 다름 아 닌 고통이었다.

그때 괴수의 몸이 아래쪽부터 점차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에카드나는 어두운 조명 때문에 잘못 본 것인가 싶어 눈을 가늘게 뜬 채 바라보았지만 괴 수는 분명 사라지고 있었다.

“캬아아가각!”

괴수의 몸은 공기 속에 흩어지는 연기처럼 서서히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머리가 사라지기 적전, 괴수는 그 입을 열어 굉장한 포효를 토해 놓았다. 그 비명의 여운은 잠시 괴수가 있던 자리를 떠돌다가 이윽고 조용히 사라졌다. 그 동안 그레이는 한 번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킨 크라이는 가득 펼쳤 던 날개를 접고 머리를 꼿꼿이 세워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그레이를 바라보았다.

“킨킨 크크라라이이.”

‘저런 목소리로 불렀다간 아무리 킨 크라이라고 해도 상대가 그레이라는 것을 못 알아들을 거야.’라고 생각했던 에카드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을 수 밖에 없었다. 킨 크라이는 펄쩍 뛸 듯이 기뻐하면서 뒷다리로 번쩍 일어났다. 커다란 앞발 두 개를 그레이의 어깨에 얹은 킨 크라이는 그레이의 뺨에 얼굴을 비비며 부리를 부딪어댔고 에카드나는 그레이가 뒤로 쓰러지지 않은 것에 놀랐다. 그레이는 킨 크라이의 거대한 목을 끌어안으며 껄껄거렸 다. 그래서 에카드나는 이 광경에 대해서 딱 한 마디의 논평만 하기로 마음먹었다. ‘공포, 절망, 어둠의 데스나이트라고?”

“재회의 기쁨은 천천히 나누지, 그레이. 이제 데스나이트들과 함께 이곳을 떠나주면 좋겠는데.”

“약약속속은은 지지킨킨다다, 용용아아병병. 이이 세세계계가가 모모두두 파파괴괴된된다다 하하더더라라도도 켄켄턴턴만만은은 안안전전할할 것 것을을 보보장장하하겠겠다다.”

에카드나는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이 세계는 네 생각보다는 더 넓은 곳이다.”

“그그러러나나 날날개개 얻얻은은 기기사사에에겐겐 그그리리 넓넓지지 않않다다.”

에카드나는 입을 다물었고 그레이는 킨 크라이의 안장 위에 올라탔다. 그레이는 익숙한 동작으로 고삐를 당기며 말했다.

“조조언언하하지. 네네 인인생생이이 아아직직 끝끝장장나나기기엔엔 너너무무 짧짧았았다다고고 생생각각된된다다면면, 켄켄턴턴에에 머머물 물러러라라.”

에카드나는 묵묵히 그레이를 쏘아보았다. 그레이는 몸을 돌려 에카드나에게 등을 보이고는 킨 크라이에게 익숙한 명령을 보냈다.

킨 크라이는 거대한 날개를 펼치며 달려가기 시작했다. 강인한 네 개의 다리에 의해 인도되던 그 몸이 곧 희고 거대한 두 날개에 의해 인도되었다. 그레이와 킨 크라이는 땅을 박차며 하늘로 솟아올랐다. 곧 그 둘은 지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한없이 자유로운 모습이 되어 하늘을 비행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데스나이트와 켄턴 경비 대원들은 똑같은 심정으로 탄성을 질렀다.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던 에카드나의 손이 배웅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천천히 위로 올라왔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벽력처럼 튀어나온 말은 배웅이 아니었다.

“일자왕의 명령이다, 킨 크라이! 네 주인을 그 마음의 고향으로 인도하라!”

그레이는 빠르게 고개를 돌려 에카드나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킨 크라이의 몸이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솟아오르기 시작했고 저 멀리서 탄성을 보내 던 데스나이트들 가운데서 신음과 비명이 동시에 터져나왔다.

그레이는 뒤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고삐를 당기며 뜻 없는 말을 외쳤다.

“이이게게 무무슨슨…………? 킨킨 크크라라이이!”

그레이는 노성을 지르며 킨 크라이에게 명령을 보냈지만 킨 크라이는 그 날렵한 상승 동작을 멈추지 않았다. 분노하던 그레이는 문득 불안을 느꼈 다. 그의 머리가 위로 쳐들렸다. 투구 속에서 그레이의 두 눈은 시퍼런 불길을 뿜어냈다.

“안안개개…………!”

그는 어느새 검은 안개 속을 날고 있었다. 그레이는 이 안개가 얼마만큼의 높이까지 솟아 있는지를 생각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이 안개 위쪽으로 빛나고 있을 태양이 그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킨킨 크크라라이이! 멈멈춰춰!”

고삐를 잡아당기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게 된 그레이는 검을 뽑으며 외쳤다. 하지만 킨 크라이는 멈추지 않았다. 그레이는 검을 쳐들었다. 날 개에 상처를 입힌다면 내려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레이는 옆에서 퍼덕거리고 있는 킨 크라이의 날개를 보았다. 그 아름다운 날개는 검은 안개 속에 희끗희끗하게 보였다. 검을 쥔 그레이의 손에 힘 이 들어갔다.

그 순간 그의 손을 멈추게 한 것은 킨 크라이와 보냈던 지난날의 추억도 아니고 그에 대한 동정심도 아니었다. 그를 멈추게 한 것은 그 용아병의 말 이었다. 그레이는 당장이라도 검을 내려칠 듯이 팔을 긴장시키고 있었지만, 자신이 검을 쥐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잊어버린 채 생각에 빠졌다.

‘네 주인을 그 마음의 고향으로 인도하라.’

하늘로 올라가라고 하지 않았다. 그 용아병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찬란한 햇빛 아래로 치솟아 올라 네 주인을 파멸시키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리 고 그 명령에 따라 킨 크라이는 이렇게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킨 크라이가 생각하는 나의 마음의 고향은…….

“어어리리석석은은 녀녀석석. 넌넌 내내가가 생생각각했했던던 것것보보다다 더더 멍멍청청했했군군.”

그레이의 목소리에는 씁쓸함이 섞여 있었다.

“킨킨 크크라라이이. 너너는는 네네 주주인인을을 죽죽이이고고 있있단단 말말이이다다. 아아무무리리 네네 주주인인이이 그그걸걸 원원한한다다 고고 해해도도, 주주인인에에게게 이이런런 짓짓을을 하하는는 그그리리폰폰이이 세세상상에에 어어디디 있있단단 말말이이야야?”

그레이는 킨 크라이의 비행에 몸을 내맡겼다. 시야를 가리고 있던 검은 안개가 조금씩 회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어느새 안개의 윗부분에 도달한 모양이다. 그레이는 안개 저편으로 흰 동그라미가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그그래래. 나나를를 데데려려가가다다오오, 킨킨 크크라라이이. 내내 마마음음의의 고고향향, 죽죽음음. 으로로.”

그레이는 눈을 감았다. 귓가를 스치는 바람소리와 킨 크라이의 날갯짓 소리가 삽시간에 사방을 메웠다. 그 요란한 소음 속에서 그레이는 터무니없는 고요함을 느꼈다. 고삐를 놓은 그레이의 두 팔이 좌우로 펼쳐졌다. 그레이의 입술에는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좋아, 찾았다!”

날카로운 고함 소리에 그레이는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경악으로 팽창된 그의 동공 가득히 검은 날개가 들어왔다. 강맹한 힘이 꿈틀거리는 날개와 거대한 몸, 기다란 꼬리. 안개 위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분명한 와이번의 모습을 보며 그레이는 신음처럼 외쳤다.

“이이건건….., 무무스스타타파파!”

무스타파는 그레이를 선도하듯이 날고 있었다.

아이라의 넓고 거대한 날개가 옆으로 죽 펼쳐진 채 그레이에게 도달하는 햇빛을 가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이라의 목 위에서 무스타파는 아예 일 어나 있었다. 두 발로 아이라의 등을 밟고 일어선 무스타파는 왼손에 쥔 고삐로 몸을 지지한 채 등 뒤를 보며 날고 있었다. 데이든 평원에 늘어선 데 스나이트들과 켄턴 경비 대원들이 티끌처럼 보이는 수만 큐빗 상공에서, 천공의 기사 무스타파는 300년 동안 잊혀져 있었고 그간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묘기를 부리며 그레이를 햇살로부터 보호하고 있었다.

말문이 막힌 그레이는 눈만 커다랗게 뜬 채 역광으로 시커멓게 보이는 무스타파의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그때 그의 등 뒤, 저 아래쪽으로부터 역시 커다란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그레이 횔드런!”

그레이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헐스루인에 올라탄 채 날아올라 오고 있는 딤라이트를 발견했다. 딤라이트는 다급하게 외쳤다.

“그레이 휠드런! 아무 소리 하지 말고 내 말을 들어! 우리는 천공의 기사다. 우리는 이 시대로 돌아와서는 안 되는 것이었어. 싸움과 증오로 돌아와 서는 안 되는 것이었어. 우리는 전투 인형이 아니야. 우리는 바람이다!”

그레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딤라이트를 바라보았다. 딤라이트는 얼굴이 붉어지도록 목청껏 고함질렀다.

“자네도 알고 있을 거야! 그레이, 그렇잖은가? 우리는 때 이른 죽음 때문에 부활한 것이 아니었어! 졌던 대상을 상대로 다시 한번 싸워보기 위해 돌 아온 것이 아니었어! 우리의 그리움은 그것이 아니었어! 우리는, 우리는 다시 한번 더 날아보고 싶었던 것이었어!”

“한한번번 더더……, 날날아아본본다다고고.”

“우리는 그걸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왜냐고? 그건 우리들만이 가질 수 있는 소망이기 때문이야! 그래서 저 지혜로운 솔로처조차 우리의 소망을, 우 리의 애달픔을, 우리의 그리움을 알려줄 수는 없었어! 그리고 우리 스스로도 알 수 없었어! 우리와 같은 일로 고민하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기 때문 에! 우리는 하나였기 때문에!”

그런가. 그레이는 펄럭거리는 자신의 소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바람이 옷을 스치며 일으키는 휘파람 소리를 들었다. 온몸에 와 부딪히는 바람을 느꼈다.

이것이었다고?

“그그렇렇다다면면 자자네네들들은…… 어어떻떻게게……”

딤라이트는 대답하지 않았고 그레이 역시 그 대답을 알 수 있었기에 질문을 멈췄다. 하나였던 우리가 둘로 갈라졌기 때문이다. 킨 크라이를 요구하 는 내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딤딤라라이이트트……………”

“우리는 이 하늘로 돌아왔어야 했다, 그레이!”

이 하늘.

그레이는 고개를 돌렸다. 그레이는 그의 발 아래로 깔리는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이 높은 하늘에서만 볼 수 있는 환상적인 선, 푸른 하늘과 붉은 땅 이 맞닿는 곳에 생긴 보라색의 선을 바라보았다. 여인의 허리 같은 산맥과 반짝이는 강, 형형색색의 무늬로 가득 메워진 들판을 보았다. 그의 발 아래 로 희게 꿈틀거리며 포근히 춤추는 구름을 보았다.

그레이는 두 손을 들어 투구를 붙잡았다.

그의 두 손이 투구를 잡는 순간, 그 저주받은 투구 속인지 그의 마음 깊숙한 곳인지 알 수 없는 어떤 곳에서부터 떨리는 듯한 작은 느낌이 전해져 왔 다. 그레이는 잠시 투구를 붙잡은 채 눈을 감고 그 느낌에 다가섰다. 그러자 그 느낌은 보다 명확해진 형태로 그레이에게 다가왔다.

그것은 모습이었다.

“형형제제여여.”

그때도 이해할 수 없었고 지금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사위로 보이는 것이라고는 켄턴의 불빛뿐인 완전한 암흑 속에서 칠흑의 갑옷을 걸친 데스나이 트는 또렷하게 보였다. 그레이는 휘몰아치는 바람과 투구 속을 울리는 자신의 호흡 소리마저 잊은 채 고요 속에 데스나이트를 응시했다.

데스나이트의 손이 허리 쪽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칠흑의 검이 뽑혀 나왔다. 그레이는 그 검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에 대해 이유를 원하지 도 않았다. 데스나이트는 검을 쥔 손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검 끝이 데스나이트의 허리 옆으로 완전한 반원을 그리며 올라갔다.

“검검을 뽑뽑아아라라, 형형제제여여.”

그레이는 검을 뽑아들었다.

그는 손에 쥔 검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하지만 그는 몸 앞으로 팔을 들어올렸고, 정점에 선 검 끝은 데스나이트의 가슴을 겨냥하고 있었다. 데스나이 트는 싱긋 웃었다.

“오오라라. 드드래래곤곤 솔솔저저의의 의의식식처처럼럼.”

데스나이트는 검을 어깨 위로 높이 들어올린 자세로 그레이를 기다렸다. 그레이는 아무 말 없이 땅을 박찼다.

그리고 그레이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데스나이트의 모습이 발 아래로 쑥 내려갔다. 여전한 암흑과 한결같은 어둠 속에서도 그레이는 데스나이트의 표정을 볼 수 있었고, 그래서 히죽 웃 었다. 데스나이트는 멍한 표정으로 그레이를 보고 있었다. 그레이는 미칠 것 같은 유쾌함을 느꼈다.

“하하하하하!”

그리고 그 순간 그레이는 투구를 벗어던졌다. 암흑과 데스나이트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늘에서만 느낄 수 있는 바람이 다시 그에게로 불어 오기 시작했다. 너무나 두꺼운, 거칠 것 없이 휘몰아치는 바람.

그레이는 투구를 놓았다.

바람은 그레이의 손으로부터 데스나이트의 투구를 앗아갔다. 그레이의 손을 떠난 순간 데스나이트의 투구는 확 불타올랐다. 투구 주위로 솟아오른 검은 불길은 바람에 흩날리며 불티를 휘날렸다. 그것은 마치 낮의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검은 유성처럼 그에게서 멀어져갔다. 그레이는 보지 않 았다.

“그레이!”

딤라이트의 목소리가 울림을 담은 채 등 뒤로부터 들려왔다. 그레이는 고개를 돌려 딤라이트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익살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봐, 이젠 그 칼자루 좀 놓지 그래? 손등이 하얗게 변했군.”

딤라이트는 무슨 말인지 몰라 의아해하다가 얼굴을 붉히며 힘껏 움켜쥐고 있던 칼자루를 놓았다. 그러고는 헐스루인을 몰아 그레이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확신을 가지지 못했던 것에 대해 사과하겠다.”

“으윽. 그런 사과는 안 하는 편이 훨씬 사과다운 거야. 내가 사과하지 않는 것처럼. 도대체 죽었다가 살아나도 바뀌지가 않나, 이 친구야!”

딤라이트는 멍한 얼굴로 그레이를 바라보았고 그래서 그레이는 더 이상 설명하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때마침 무스타파의 목소리 가 들려왔다.

“잡담 끝났나?”

잡담이라고? 그레이는 위쪽을 향해 힘차게 외쳤다.

“그래! 불필요했던 내 이야기는 이제 끝났어. 완전히!”

“알았어. 그럼 우리 이야기로 돌아가지…………..”

무스타파는 조금 기다렸다가 말했다.

“인도하게, 대장.”

그레이는 씩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그러곤 킨 크라이의 머리 옆으로 입을 가져갔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귓속말이라기엔 너무 컸다.

“킨 크라이. 너도 나처럼 무스타파를 존경하지? 저렇게나 묵직하게 ‘대장’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내는 흔치 않단 말이야.”

무스타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딤라이트는 환하게 웃었다. 다시 똑바로 안장에 앉은 그레이는 오른손을 들어올리며 힘차게 말했다.

“자! 우리 이야기로 돌아가자! 우리가 썼던 이야기, 우리의 그리움, 가자!”

“캬아아아악!”

킨 크라이는 포효하며 단숨에 솟아올랐다. 그렇게 세 기사는 하늘의 끝의 끝까지 날아오를 기세로 솟아올랐다.


에카드나는 싱긋 웃었다.

“난 약속을 모두 지켰다. 그에게 킨 크라이를 돌려줬지. 그러니 이젠 그쪽에서 약속을 지킬 차례이지 않은가? 어둠에서부터 달려온 기사들이여, 그 대들이 수호해야 하는 어둠의 명예를 거론해야 하나.”

데스나이트들은 끔찍한 기세였지만 불평만은 하지 않았다. 그들은 한결같은 눈길로 에카드나를 쏘아보았지만 달려나오지는 않았다. 데스나이트는 말없이 뒤로 물러날 차비를 갖췄다.

“아, 잠깐. 내 말은 끝나지 않았다.”

“뭔뭔가가, 용용아아병병!”

“비록 악연이라지만 인연은 인연이고, 따라서 나로선 그대들이 봉착한 문제점을 상기시켜 줘야 할 의무감 비슷한 것을 느낀단 말이야.”

“우우리리가가 어어떤떤 문문제제점점에에 봉봉착착했했는는가가.”

“그건 말이야….., 응?”

에카드나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 켄턴 경비 대원들과 데스나이트들은 모두 의아한 표정으로 에카드나를 보았고, 곧 이어 하늘을 보았다. 에카드나가 그곳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쉬이이이이웅.

꼬리를 길게 끄는 소리가 하늘 저편으로부터 들려왔다. 그러나 충격음은 좀 늦었다. 아무도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고, 그 래서 충격음이 좀 늦게 다가온 것처럼 느낀 것이다. 하지만 에카드나는 그것을 똑똑히 보았다.

하늘로부터 굉장한 속도로 내리꽂히는 그것은 불타는 데스나이트의 투구였다. 검은 불길을 뒤로 길게 끌며 쏘아져내린 투구는 그 높이에서 야기된 무서운 속도로 대지에 충돌했다. 그와 함께 울려퍼진 끔찍한 소리는 데스나이트와 켄턴 경비 대원들 모두를 기겁하게 만들었다.

콰아앙!

경비 대원들과 데스나이트들 모두 흠칫하며 뒤로 물러났다. 검은 불티와 흙먼지가 위로 솟아오르며 작은 구름을 이루었다. 타오르고 있던 투구는 땅 에 부딪혔을 때와 거의 같은 속도로 튀어 올라서는 몇 번이나 더 되튕긴 다음에야 엉망진창으로 우그러진 꼴이 되어 땅에 굴렀다.

데스나이트들은 아연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보았고,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게 된 경비 대원들의 얼굴엔 기쁨이 솟아올랐다. 그때 에카드나가 말했 다.

“흐음. 좋은 본보기로군.”

“본본보보기기라라고고?”

“자네들의 앞날에 대한.”

데스나이트들은 분노했지만 뭐라고 말할 틈이 없었다. 에카드나는 거대한 검을 들어올려 그들을 겨냥하며 외쳤다.

“자네들은 켄턴을 공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지만, 나는 그에 상대될 만한 약속을 한 기억이 없다!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싸움이 될 것 같지 않나? 때리면 맞기만 해야 되는 상대와의 싸움 말이야.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