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 워커 4권 – 10장 잊혀진 바람을위한 변주곡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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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책없는 태양은 지금도 저 하늘 어딘가를 비틀거리고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일몰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오랜 시간 태양과 함께 걸었으므로, 신스라이프는 해가 졌을 거라는 생각은 떠올리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햇빛이 존재하지 않았다. 사위를 가득 메운 것은 숨 막힐 정도로 많은 월광과 월광을 가장 아름답게 만드는 암흑뿐이었다. 그러나 이 곳에서는 암흑도 당당한 빛의 한 가족이었다. 공간 속을 춤추는 무수한 빛들은 암흑을 조금 별스러운 자신들의 형제로 취급하고 있는 듯했다.
이 전후 관계는 어쩌면 사실과 반대일지도 모른다. 이곳에서는 빛이 암흑의 조금 독특한 한 형태일지도.
신스라이프는 속눈썹에 맺히는 무수한 월광의 편린들을 떨쳐내려는 것처럼 가볍게 머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빛살은 끈질기게 달라붙어 아롱거렸다. 신스라이프는 포기하며 고개를 들었다.
회오리치며, 터져나갈 듯이 몸부림치지만, 그 터져나가려는 힘으로 오히려 자신을 단속하며, 빛은 기둥을 이루고 있었다.
신스라이프는 시간의 바늘을 떠올렸다.
이것은 눈앞에 있는 사물을 어떻게든 자신이 알고 있는 무엇인가와 연관 짓고 싶어 하는 사람의 가소로운 노력이 가장 희극적으로 발휘된 모습이다. 지금 신스라이프의 눈앞 암흑 속에서 춤추고 있는 시축은 시간의 바늘과 비슷한 점이 하나도 없었다. 지도 제작자들이 좋아하는 기호를 사용한다 해 도시축과 시간의 바늘이 비슷한 상징으로 표현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
‘시축을 표현할 상징이 있을 수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어.’
신스라이프는 자신의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시축은 그 자체로 상징이고 기호였으며 의미였다. 동그라미와 화살표만 가지고도 남성을 표현할 수 있건만, 시축을 표시할 기호만은 만들어질 수 없을 것 같았다.
신스라이프는 두 팔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그의 가슴이 부풀어오르며 빛이 그의 몸 속으로 들어왔다가 내뿜어져 주위를 어지럽혔다. 그는 빛을 호흡 하고 있었다.
“시축이여, 내가 될 너여.”
신스라이프는 파의 언어로 말했다. 휘몰아치던 빛은 신스라이프의 입으로부터 나온 빛에 놀라 주춤하며 물러나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다가섰다. 빛 은 신스라이프의 얼굴을 만지고 그 목을 만지고 몸의 가장 민감한 부분들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차라리 기절해 버렸으면 좋겠다는 헛된 소망을 뿌리치며, 신스라이프는 격정적으로 말했다.
“나는 이곳에 왔다. 나는 결과가 될 것이다. 나는 운명의 마지막에 서는 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나무 아래 드러누워서 익은 과일이 떨어지기만 기다리시겠다는 거지.”
갑자기 들려온 비아냥거림에 신스라이프는 흠칫하며 몸을 돌렸다. 빛과 암흑 이외에 다른 것이 그곳에 서 있었다. 낮으면서도 정확한 발음의 목소리 가 다시 들려왔다.
“어딜 가도 사다리가 뭐에 쓰는 물건인지 모르는 작자들이 있더라고.”
“네가…………, 왔느냐. 어떻게? 너는 이곳에 올 수 없다.”
신스라이프는 정말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상대방은 신스라이프처럼 빛 속에서 빛이 되어 있었고 빛을 호흡하며 빛으로 말하고 있었다.
“난 마법사거든. 저울눈 속이는 것이 취미야.”
“이상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죠.”
고개를 조금 갸웃거리던 상대방은 손가락을 딱 튕겼다.
“아아, 이번엔 그 꼬마 아가씨인가? 그래요, 파. 이 아저씨 이름 기억하지?”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죠, 레이저 씨?”
“꼬마 아가씨가 보고 싶어져서 마나라는 이름의 바람에 올라탔지.”
레이저는 말을 맺으며 윙크했다. 신스라이프는 멋진 윙크라고 생각했고, 파는 못 말리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곳에 온 이유가 뭐지?”
“어라? 다시 바뀌었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상대방이 과연 누군지 명확하게 모른다는 것은 매일 이야기를 해야 하는 이 인간이라는 우주적 희극 배우의 슬픈 숙명이긴 하지만, 지금 나의 경우에는 그 숙명의 무게가 보다 해괴한 형태로 어깨를 짓누르는군.”
“용건이 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다급한 용건은 아닌 모양이군.”
“그럴 수도, 아닐 수도. 그러고 보니 당신은 다급하다라는 말의 의미도 재해석하려고 들지 않나?”
신스라이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레이저는 두 손바닥을 가볍게 들어올리는 매우 전통적인 몸짓을 하며 말했다.
“그래그래. 이곳까지 날아온 이유 중 한 가지는 이미 말했어. 꼬마 아가씨가 보고 싶어서. 나머지를 말할 차례지. 난 어떤 입장에 서고 싶어 하고, 그 것이 어떤 입장인지는 아직 모르고, 그래서 정보를 좀 알고 싶은 거야.”
“……정보에 따라 내 편이 될 수도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군.”
“그래.”
“안됐군. 내겐 협조자가 필요 없는데.”
“생각해 봐. 힌트 한 가지, 난 협박을 사양하는 타입이 아냐.”
신스라이프는 레이저를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하지만 레이저는 빛으로 휘파람을 불며 자신이 우위에 있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신스라이프는 그에 동의할 생각은 없었지만 약간의 호기심을 느꼈다. 그리고 레이저는 바로 그 순간을 정확하게 포착해 냈다.
“일단 내 사정을 설명하지. 내겐 친구가 하나 있어. 나크둠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고 그 이름을 상대방에게 각인시켜 주는 데 별로 어려움을 느끼 지 않는 멋진 친구야. 최근 그 친구에게 인상적인 사건이 있었고 나는 그 사건들이 그 친구의 가녀린 정신에 어떤 상처라도 주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 지.”
“무슨 사건인가.”
“죽었다 살아났지.”
“그래……?”
“응. 당신이 선도했고 요즘의 대륙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유행이 그 친구에게도 찾아든 거지.”
“그런데?”
“그래서, 난 당신이 지금부터 하려는 일에 관심이 생겼단 말이야.”
“내가 하려는 것?”
“지금부터 당신이 시간과 하나가 되려는 것은 알고 있어. 조금 전에 들었으니까. 정확하게 말해 주면 좋겠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시간과 하나가 되 려는 거지?”
시축은 차라리 으르렁거리고 있는 듯했다. 혼돈스러운 빛과 암흑의 소용돌이 속에서 신스라이프와 레이저는 그림자가 없는 상대방을 물끄러미 바라 보고 있었다. 신스라이프가 말했다.
“질문의 이유는? 네 친구라는 그자가 도로 죽게 되는 거냐고 묻는 거라면 아니라고 대답해 주겠다. 그는 죽지 않을 것이다. 죽음은 한 인간이 만들어 내는 시간의 끝이자 최종 결과지. 그러나 이제 끝은 인간에게 찾아들지 않는다.”
“아, 말을 안 했군. 그게 문제인데, 사실 그 친구 인간이 아냐.”
“뭐라고?”
“나크둠은 오크지. 그 친구의 문제이자 내 문제의 시작이 바로 거기인데, 인간은 죽지 않겠지만 오크는 어떻게 되는 거지?”
영원에 필적하는 순간이 흘렀다. 이 가공할 아름다움 속에 서 있으면서도 레이저는 맥주 한 잔과 다리를 던질 수 있는 테이블 하나가 있으면, 그리고 손에 카드들을 모아 쥐고 그 너머로 상대방의 눈을 비웃듯이 바라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물론 소매 속에 숨겨둔 한 장은 그를 황홀하 게 만들 것이다. 레이저는 마른 입술을 조심스럽게 움직여 말했다.
“나는 쓰레기였어. 지금까지도 나는 많은 시간들을 당신이나 당신 선임자들에게 보내왔어. 따라서 또 그런 상황에 빠진다고 해서 그렇게 괴로워할 것 같지는 않군. 내 사부는 나를 가르치면서 올로레인의 부활을 꿈꾸어 왔고 난 사부의 비위를 맞춰주는 데서 약간은 흥미를 느꼈지. 하지만 사부님 이 돌아가신 다음부터는 누군가의 비위를 맞춰줄 필요가 없었지. 그래, 나 자신의 비위도 맞추고 싶지 않았어. 쓰레기로 살았지. 아마 당신이 가장 좋 아할 타입의 인간이 아닌가 생각되는데.”
신스라이프는 미소 지었다. 레이저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따라서 당신이 내 시간을 가져가겠다고 해서 신경질 날 것 같지는 않아. 하지만 친구의 경우는 달라. 우습지만, 난 그들을 만났을 때 내가 인간이라 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그런 감정들은 누가 뭐래도 소중한 거야. 그 작은 감정에 목숨도 집어던지는 수많은 사람들의 예를 들 필요까지는 없겠지.” 레이저는 자줏빛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잖아. 인간들 따위, 어떻게 되든 내 알 바 아냐. 하지만 오크의 문제로 넘어가면 내 입장에도 극적인 변화가 생길 수 있어.”
“웃기는 녀석이군.”
“고마워. 내 입장에 동조해 줘서. 시간과 여건이 괜찮다면 당신과 함께 레이저를 비웃어주고 싶지만 여건이 좋지 못하군. 자, 말해 줘.”
“뭘 말이냐.”
“인간들은 그들이 만들어내는 시간을 모조리 당신에게 보내게 될 거야. 그렇지? 그들 어리석은 종족에게 묵념을. 이 멍청한 종족은 괴물을 낳아버렸 어. 당신을 낳았다는 것만으로 인간은 깡그리 멸망해도 좋아. 그리고 그 멸망 방식이 영생이니 가장 어울리는 형벌이기도 하고. 하지만 오크는 어떻 게 되지?”
“네 예상이 맞을 것이다.”
“더불어 영생이란 말이군.”
“그래. 시간은 유피넬과 헬카네스의 존재 원인이다.”
“삼라만상의 원인이란 말이지. 당신은 삼라만상의 끝을 모조리 챙겨가고. 흐음.”
“오크는 죽지 않는다. 네 친구라는 그 오크 역시 죽음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 그의 죽음도 내가 가져갈 테니. 이제 안심인가.”
레이저는 고개를 두 번 끄덕인 다음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늘어진 앞머리카락들이 빛 속에 흔들리며 반짝거렸다. 레이저는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싫어.”
신스라이프는 무표정한 얼굴로 레이저를 바라보았다. 레이저는 아래를 내려다본 채 말했다.
“내 친구 이야기만 자꾸 해서 미안한데, 내겐 최근에 생긴 친구가 하나 있어. 그 친구 역시 누군가에게 자신을 드러낼 필요가 있을 때 어려움을 전혀 느끼지 않는 매우 인상적인 친구지.”
“이젠 네 친구가 인간인지부터 묻고 싶군.”
“거인이지.”
“……그덴 산의 거인?”
“그래.”
“올로레인, 정말 해괴하군.”
“그래. 그래서 좋은 점도 있어. 사람들에게선 절대로 구할 수 없는 답을 구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거든. 계속 말하지. 거인은 휴식을 원하고 있 더군. 대왕의 말을 빌리자면 약속된 휴식 말이야.” 레이저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의 얼굴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결정했어.”
“뭘 결정했나.”
“인간은, 이 빌어먹을 종자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내는 시간의 소중함을 모르고 제멋대로 낭비하며 살아오다가 결국 당신 같은 괴물을 낳은 인간은, 그래, 홀라당 망해 버려도 아무 할 말이 없는 이 인간들은, 그래도 한 가지 받아 마땅할 선물을 가지고 있어. 유피넬과 헬카네스가 시간 대신에 인간 에게 주었던 바로 그 선물. 절대로 양도될 수 없고 양도할 수도 없는 선물.”
레이저는 팔짱을 꼈던 두 팔을 천천히 벌렸다.
“인간은, 시간을 만들어내는 일을 중지하고 쉬고 싶을 때, 쉬게 해줘야 해.”
아일페사스는 고개를 휙 쳐들었다. 그녀의 굳은 얼굴을 보며 미와 할슈타일 후작은 당혹했다. 그녀의 얼굴에 떠오를 수 있을지조차 의심스러운 표정이었다.
엄격한 얼굴로 북쪽을 바라보던 아일페사스의 입매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마법사……”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일페사스?”
할슈타일 후작이 조용히 물었지만 아일페사스는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는 시선을 북쪽에 고정시킨 채 황홀해하는 얼굴로 말했다.
“그래. 마법사였나. 그런 것이었나. 이것은 모든 신들도 나도 알 수 없었다. 당연하지. 이것이 바로 인간의 수법이니까 우리로서야 알 수가 없는 것 이 당연하다. 행해지고 난 지금에서야 모든 것이 이해되는군.”
아일페사스는 갑자기 하늘을 올려다보며 외쳤다.
“마법은 드래곤의 것이었으나, 드래곤은 마법을 창조한 것에 대해 자랑스러워할 수 없다! 드래곤이 자랑스러워해야 하는 것은 그가 올바른 제자를 찾아낸 사실이다! 그가 만들어냈으나 그의 것일 수 없는 것을 올바로 배워 익히고 자신의 것으로 오롯이할 유일하고 정정당당한 제자를!”
“아일…………페사스?”
할슈타일 후작은 주춤거리며 미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미의 얼굴에도 똑같은 당혹감만이 떠오르고 있었다. 후작은 다시 아일페사스를 돌아보았지만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일페사스는 눈물을 흘리며 웃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미와 후작을 돌아보았다.
“인간들아.”
“예?”
“아름답고, 착하고, 추악하고, 사악한 인간들아. 선량한 마음으로 사악을 행하고, 지독하게 못된 손길로 한 떨기 꽃을 쓰다듬는 이 배은망덕하고 사 랑스러운 종족들아. 제기랄 것들. 도대체 너희들은 뭐냐. 무엇 때문에 이다지도 지독한 증오와 사랑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종족이 세상에 발 디디고 걷게 된 거냔 말이다.”
미와 할슈타일 후작은 얼어붙은 모습으로 아일페사스를 바라보았다. 아일페사스는 흐느끼며 말했다.
“너희들을 좋아해.” “아일페사스?”
“가자!”
할슈타일 후작은 멀미가 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눈앞의 아일페사스는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의 모습 그대로 어린 소녀였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 는 그녀를 한눈에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거대했다. 빌어먹을, 이것이 드래곤인가? 아일페사스는 어깨로 숨을 쉬며 격정적으로 외쳤다.
“가겠어! 드래곤이 간다. 드래곤의 제자의 모습을, 드래곤의 후계자의 모습을, 드래곤의 자식의 모습을 똑똑히 봐주겠다! 너희들은 드래곤의 말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고 드래곤은 인정받는 데 관심 없지만, 그래도 드래곤은 간다. 미! 할슈타일! 가자! 모든 드래곤과 드래곤의 친구 드래곤 라자여! 가자!”
현재 대륙에서 드래곤을 가진 유일한 드래곤 라자 레니는 당황한 표정으로 조금 전까지 옆에 앉아 있던 사내를 바라보았다. 덕분에 쓰고 있던 모자 가 날아올라 방파제 위를 데굴데굴 굴러갔지만 레니는 그에 신경 쓰지 않았다. 델하파의 항구. 아름다운 항구 도시의 어느 곳에도 심상치 않은 모습 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사내는 무엇에 찔린 것처럼 벌떡 일어나서는 북쪽을 쏘아보고 있었다. 레니는 조심스럽게 사내를 불렀다.
“지골레이드?”
지골레이드의 낚싯대는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레니와 함께 델하파의 방파제에 앉아 낚시를 하고 있는 평범한 낚시꾼이 아 니었다. 언어와 표정이 전달할 수 없는 감정들도 주고받는 드래곤과 드래곤 라자였기에 레니는 지골레이드의 격렬한 감정 변화에 놀랐다. 하지만 겁 내지는 않았다. 지골레이드의 감정 중에 분노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블루 드래곤 지골레이드의 악물린 입술 사이로 신음 소리 같은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왕이여…………! 나는 함께 갑니다!”
“드래곤!”
돌맨 할슈타일은 자리에서 튕겨 일어났다. 그란은 기겁했고 운차이는 벌떡 일어섰다. 돌맨은 방 한가운데 똑바로 선 채 눈을 홉뜨고 있었다. 주위에 있던 모든 자들이 저마다 무슨 말들을 외쳤지만 돌맨의 귀에는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평생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고,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 조차 해보지 못한 감각의 엄습에 돌맨은 기절할 것만 같았다.
“으아아아!”
돌맨은 문 쪽을 향해 돌진했다. 앞을 가로막는 의자를 걷어차고 문을 향해 몸을 날리는 그의 모습에 엑셀핸드는 어이가 없는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운차이는 어느새 그 뒤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미끄러지듯 움직인 운차이는 돌맨의 오른쪽 어깨를 잡아챘다.
“이봐, 왜 이래!”
다음 순간 운차이는 하늘과 땅의 극적인 위치 이동을 목격하게 되었다. 돌맨은 왼손으로 운차이의 손을 붙잡으며 몸을 뒤틀었고 운차이는 그대로 허 공을 날아 벽에 부딪혔다. 운차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은 공중에서 몸을 웅크려 충격을 줄이는 것뿐이었다. 운차이를 그런 식으로 집어던진 돌맨은 문짝을 허공으로 날리며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러나 돌맨은 더 이상 달려가지 않았다. 부서진 문을 통해 달려 나온 사람들은 눈밭에 무릎을 꿇은 채 북쪽을 쳐다보고 있는 돌맨의 뒷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곳에는 버려진 아이, 슬픈 방랑자 돌맨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돌맨은 두 팔을 들어올리며 드래곤 라자로서 외쳤다.
“드래곤이여, 드래곤이여!”
카르 엔 드래고니안. 대미궁의 가장 깊은 호수 속에서, 드래곤 로드의 거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자유롭고 광대한 사유는 거세게 맥박 치고 있었다. 가장 어둡고 가장 깊은 그 물 속에서 드래곤 로드는 말했다.
“거침없이 가라. 너는 나다.”
폭포수처럼, 그러나 폭포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방향으로 물은 치솟아 올랐다. 대미궁 전체가 전율하는 가운데 대미궁의 호수는 폭발하는 기세로 갈 라졌고 그 속으로부터 황금의 거체가 솟아올랐다. 비산하는 물방울들이 대미궁의 벽을 때려 엄청난 공명음을 만들어냈다. 그 물보라의 한가운데서 당당하게 일어선 드래곤 로드는 힘 있게 외쳤다.
“아일페사스! 드래곤! 드래곤 로드여! 가라!”
허공으로 솟아오른 레이저는 공간을 부유하는 빛을 박차며 다시 몸을 뒤집었다. 눈 바로 옆을 지나쳐 가는 무수한 빛의 탁류에 눈이 멀어버릴 것 같 았지만, 레이저는 정신을 집중하며 신스라이프의 궤적을 추적했다. 레이저는 떠다니는 무수한 빛 사이에서 신스라이프의 검광을 가까스로 발견했고 그 방향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레이저의 손이 아래로 조금 내려갔다.
“파이어볼!”
레이저의 손으로부터 튀어나온 불덩어리는 신스라이프의 몸을 비켜갔다. 그러나 그것은 그대로 눈 덮인 땅바닥을 후려쳤다. 콰과과과광! 얼음이 박 살나며 집채만 한 얼음 덩어리들이, 수증기와 얼음의 화살들과 함께 치솟아 올랐다. 밑은 바다였던 것이다.
시축을 휘감고 돌며 그 자체로 시간이었던 빛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을 휘저어 댔다. 그 사이로 날아오른 얼음 조각들은 하나하나가 최고로 연마된 보석인 양 빛을 뿜어대며 모든 공간을 유린했다. 신스라이프는 빙긋 웃었다.
“얼간이! 넌 네가 원하는 것을 이웃의 이름으로 걷어차는 보편적인 비겁자야!”
얼음 바닥이 갈라지며 곳곳에서 바닷물이 치솟아 올랐다. 신스라이프는 갈라지는 얼음과 빙산을 밟으며 허공을 날았다. 하늘에 떠 있던 레이저는 눈 을 의심했다. 얼음 조각들은 미친 듯이 허공을 질주하고 있었고 신스라이프의 몸 주위로도 사정없이 날아다니고 있었지만, 그 몸에 접촉하는 것은 하 나도 없었다. 신스라이프는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 거대한 얼음덩어리의 첨단부를 밟으며 치솟아 올랐다. 레이저는 눈앞으로 다가오는 신스라이프의 손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커어억!”
파리를 잡아채듯이 레이저의 목을 잡아챈 신스라이프는 그대로 그를 아래로 내리밀기 시작했다. 레이저는 신스라이프의 손을 부여잡고 다리를 힘없 이 버둥거렸지만 그의 목을 움켜쥔 신스라이프의 손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신스라이프는 그대로 레이저를 얼음 바닥에 메어칠 기세였다.
“으아아아아!”
얼음 바닥에 부딪히기 직전, 레이저는 신스라이프의 손 안에서 사라졌다. 신스라이프는 맨주먹으로 얼음 바닥을 치게 되었고 얼음은 그대로 파괴되 었다. 신스라이프는 이를 갈며 몸을 날렸다. 그녀가 서 있던 자리에서 바닷물이 치솟아 올랐지만 신스라이프는 조금 떨어진 곳의 얼음을 밟으며 섰 다. 사방을 둘러보던 그녀의 눈에 저 멀리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레이저의 모습이 들어왔다. 다리를 힘없이 떨면서도 레이저는 웃고 있었다.
“지금의 네…………, 모습을 봐, 신스라이프.”
신스라이프는 씩 웃으며 레이저를 향해 걸어갔다. 다가오는 신스라이프를 쳐다보며 레이저는 다급하게 말했다.
“생각해! 네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넌 지금 무의미한……”
“행동을 하고 있지!”
대답과 함께 신스라이프의 다리가 날아왔다. 레이저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날아가 눈더미 속에 파묻혔다. 하얀 눈 위로 선혈이 길게 직선을 그었 다. 레이저는 온몸을 불타게 만드는 고통과 차가운 얼음의 감각 속에 짓눌려 헐떡거렸다.
“당연하잖아! 난 바로 시간이 될 것이다. 결과가 될 것이다! 허무함, 아쉬움, 애달픔이 될 것이다! 그런 내 행동에 의미가 있을 턱이 있나! 하하하!” 레이저는 몸을 일으키려는 노력을 포기했다. 일어설 수야 있겠지만, 일어서자마자 기절해 버릴 것이 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레이저는 돌아누운 자 세가 되려 애썼다. 고통은 초당 수십 회씩 레이저의 몸을 난타해 댔고 레이저는 비명과 욕설을 내지르며 간신히 돌아누웠다. 신스라이프는 그런 레이 저를 보며 차갑게 웃었다. 하지만 레이저의 입에서 미약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신스라이프는 더 이상 웃을 수 없었다.
“꼬마 아가씨.”
“뭐라고? 너!” “날 불렀나요. 수줍음 많은 늙다리 아저씨?”
신스라이프는 급격히 정지하는 자신의 몸에 대해 욕설을 퍼부어 댈 수도 없었다. 입술의 움직임까지도 제어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는 표면으로 떠올랐고 신스라이프는 저주와 함께 뒤로 물러났다. 파는 레이저의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레이저는 폐가 박살나지 않은 것에 감사하며 말했다.
“그렇게 쉽게…………, 나설 수 있는 것을 보니……, 꼬마 아가씨는 저 천치에게 찬성하고 있는 듯하군.”
“반대하지 않는 것이라고 해야겠지요.”
“지금의 무엇을 증오…………하는 건가……………? 무엇에 대한 증오가…………, 너의 개체성을 포기하게까지 만들었나.”
“증오? 없어요.”
“그……럼?”
“난 잃어버린 시간들 속에 준비되어 있었고 허무함으로서 태어났어요. 내 개체성이 원래 그렇죠.”
“왜……”
“왜라고 물었어요? 그 질문을 당신에게 돌려주겠어요. 당신은 왜 그랬죠?”
레이저는 힘없는 눈으로 파를 올려다보았다. 파는 흥분하는 기색 없이, 하지만 또박또박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은 조금 전 자기 입으로 말했어요. 당신이 쓰레기였다고. 그리고 당신은 도박사예요. 그럼 당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어요. 빤하죠. 숙취에 찌든 머리를 흔들며 느지막하게 일어나요. 눈을 뜨고 가장 먼저 찾아오는 감정은 가야 할 곳이 없다는 당혹스러움과 낭패감이죠. 해 야 할 일이 없다는 사실에 대한 슬픔도 함께 찾아올 테고. 당신은 마법사더군요. 그러니 습관적으로 마법을 기주하겠지요. 어디에 쓰일지도 모르면 서. 그러고는 스스로 비참해하면서도, 마치 그것이 가장 고귀한 일이라고 믿는 것처럼, 혹은 누구나 다 그렇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처럼 음식을 찾아 요. 구할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어요. 구할 수 있다면 그것을 먹는 일에 모든 관심을 쏟아요. 구하지 못했을 경우 공복이 설령 머리를 맑게 해줄 수 있다 해도, 그 맑아진 머리로 할 일은 없어요. 그때부터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저녁의 도박판이 벌어질 때까지의 시간들을 어떻게든 치워버리는 것이 겠죠.”
고통과 부상 때문에 그럴 수는 없었지만 레이저는 박수를 치고 싶었다. ‘정말 정확해!’ 그리고 레이저는 그런 자기기만을 생각하는 자신에 놀라며 입 을 다물었다.
“그러고 싶을 거예요. 그 지루한 시간들을 누가 치워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거죠. 하루 종일 도박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죠? 그리고 다 른 도박사들도 모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을 거예요. 가끔은, 아주 가끔은 비슷비슷한 작자들을 모아놓고 시간에 구애되지 않 고 노름만 할 때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자주 있는 일은 아니죠. 대부분의 나날에 당신은 지루함과 심심함에 몸부림치며 저녁 시간을 애달프게 기다 리고 있었을 거예요. 그리고 마침내 지쳐빠진 정신으로 도박판에 끼어들게 되는 거죠. 술에 좀 취했을 수도 있고. 그러고는 그 지긋지긋한 도박을 자 신이 가장 좋아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도박을 하는 거죠. 카드 한 장을 잡을 때마다 자신을 기만하면서.”
“이봐, 꼬마 아가씨……”
“무슨 변명거리를 생각해 냈는지 모르겠지만 조용히 있어요. 말해 봤자 난 듣지 않을 테고, 당신에겐 말하는 것이 너무 힘든 일이겠군요. 도박판의 그 초조감, 숨 막히는 느낌, 긴장감, 담배연기, 뒤섞여 춤추는 카드들이 정말 재미있고 자극적인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러나 도박판이 끝나고 어 질어질한 머리를 붙잡고 일어나야 할 때, 가끔은 생각하겠죠. 나는 여기서 뭘 하는 걸까. 왜 이 짓을 하고 있는 걸까. 그러면서 쓰러져 잠드는 거죠. 다시 처음부터 시작될 것을 알면서.”
파는 슬픈 눈초리를 하고 있었다.
“당신은 이미 오래 전부터 당신의 시간들을 누군가에게 보내고 있었죠?”
“그래.”
레이저는 이상할 정도로 명확한 자신의 발음에 놀랐다. 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나날들이 결국은 시시하게 끝날 것도 알고 있었죠? 도박판에서 사는 만큼, 언젠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하거나 아니면 당신 스스로 자신을 죽이게 될 것을 알고 있었죠? 어쩌면 늙어 죽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살해당하는 것과 아무 차이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겠죠?” “그래.”
“나도 그래요.”
“꼬마야…………, 넌 아냐. 넌 그렇지 않아. 나는 인생의 쓰레기고 네가 말한 것과 똑같은 버러지이지만 넌, 그처럼 빛나는 미소를 지을 수 있는 넌 아 냐.”
파는 잠시 아무 말 없이 레이저를 내려다보았다. 레이저가 그녀의 눈이 반짝인다고 생각했을 때, 파는 뒤로 물러나며 조용히 속삭였다.
“당신이 본 것은 당신의 눈 안에 있는 것이겠죠.”
“아, 아냐. 파! 기다려……………!”
“미안하게 됐군, 올로레인. 네가 부르는 사람이 아니라서.”
레이저는 이를 악물었다.
“신스라이프.”
“그래. 나다.”
대답하며 신스라이프는 무릎을 굽혔다. 레이저의 옆에 무릎을 꿇은 신스라이프는 오른손을 위로 쳐들었다.
“네 괴상한 친구들은 죽지 않겠지만, 넌 죽여주겠다. 네게 약속되었던 휴식으로 가라.”
레이저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공포가 다가와야 당연하겠지만 레이저는 공포를 느끼지 않았다. 그의 가슴속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안타까움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레이저는 신스라이프의 미소를 보면서도 아무 생각을 떠올리지 못했다.
그때 천지를 진동시키는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심판하겠다!”
아일페사스의 호령 소리에 신스라이프는 몸을 돌렸다. 그러곤 암흑 속에 떠오른 골드 드래곤의 모습에 주춤했다. 어둠을 배회하던 무수한 빛들은 골 드 드래곤의 황금의 몸 위에 현란한 무늬들을 그렸고 그래서 아일페사스의 몸은 초현실적인 빛으로 번득이고 있었다. 아일페사스는 신스라이프를 향 해 다시 외쳤다.
“심판하겠다!”
“네가 무엇을!”
“너와 모든 인간을!”
신스라이프는 몸을 뒤로 날려 다가오는 아일페사스에 대한 대응 자세를 갖추었다. 암흑 속에 떠오른 황금의 산 같은 모습으로 아일페사스는 신스라 이프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거대한 몸 아래에서 신스라이프는 두 인간의 모습을 발견했다.
“미!”
미는 슬픈 표정으로 신스라이프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안녕, 파.”
파는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그곳엔 냉엄한 얼굴을 한 신스라이프만이 있었다. 미의 두 눈이 투명하게 변했다.
미의 옆에 서 있던 할슈타일 후작은 불타는 눈동자로 신스라이프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검을 뽑아들었다. 그러나 앞으로 달려 나가는 대신, 후작은 검을 땅에 세우고 그 폼멜 위에 두 손을 얹은 채 기다렸다.
드래곤 로드. 말하시오.
아일페사스는 그런 후작을 내려다보며 그가 드래곤 라자임을 확실히 깨달았다. 당신이 내 라자가 되어주면 재미있을 것 같은데, 할슈타일 후작. 짧 은 상념은 찾아왔던 것처럼 빠르게 사라져갔고 아일페사스는 저 아래의 신스라이프를 향해 말했다.
“심판에 앞서 변론을 듣겠다. 네게 말할 기회를 주겠으나, 먼저 드래곤의 말을 들어라, 신스라이프.”
“말해 보시지.”
아일페사스는 몸을 꼿꼿이 세우고 있었고 그래서 그 거대한 머리는 까마득한 저 하늘 위쪽에서 신스라이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잘 생각하고 대답하라. 나는 이곳에 내 의지로써 서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모든 드래곤으로서 이곳에 서 있다. 개체로서의 나였다면 이곳에 오지 도 못했을 터. 따라서 내가 내리는 심판에 하나의 개체인 드래곤 아일페사스, 어떤 증오와 어떤 열망을 가진 자의 의지는 개입하지 않는다. 또한 이곳 엔 모든 신의 의지도 개입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너 스스로도 잘 알고 있겠지.”
“물론. 필멸자들의 부활이라는 상황의 역이지.”
“그래. 저 불멸자들께서는 사망하셨다. 사망이라는 단어는 사실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단어이지만 이 경우엔 그 이외에 다른 말을 사용할 수 없다. 그렇지만 드래곤은 그것만을 말한 것은 아니다.”
“아아, 그래. 드래곤이기 때문이지. 만일 이곳에 엘프가 있었다면 그랑엘베르의 뜻이 개입될 테지. 하플링이 있었다면 테페리의 뜻이 개입되겠지. 하지만 이곳에 있는 건 당신 드래곤뿐이지.”
“그렇다. 그러므로 너는 다른 어떤 의지의 개입도 없는 상태에서 공정하게 네 행동을 심판받을 수 있을 것이다. 저 무정한 시축과 드래곤에 의해.”
“잘 이해했어. 하지만 한 가지 이해가 안 되는 사소한 문제가 있는데, 심판받아야 할 내 행동이라는 것이 뭐지?”
“너의 존재.”
신스라이프는 왼손을 옆으로 홱 뿌리며 외쳤다.
“그것은 시간이 심판할 일이다. 멍청한 드래곤 녀석아! 나는 너희들 빌어먹을 시간 바퀴 속의 다람쥐에게 심판받고 자시고 할 자가 아니다! 어떻게 네가 나를 심판하겠다는 건가! 너는 시간 속의 존재고 나는 시간 밖의 존재다! 모든 신들조차도 결국 시간 속의 존재이기에 나에게 개입할 수 없음은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나! 감히 어떻게…………”
“시간은 누가 만드는가.”
아일페사스는 화내지 않았다. 다만 엄격한 어조로 말했을 뿐이다. 그리고 신스라이프는 입을 다물었다. 무서운 눈으로 바라보는 신스라이프를 향해 아일페사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인간이 시간을 만든다. 그처럼 건방진 네 녀석이라 해도 이것은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인간이야말로 시간의 장인이다. 그리고 시간의 부모다. 너 는 그 시간 자체가 되기 위해 이곳까지 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너는 모든 인간들의 자녀가 되려는 것이다.”
잠깐 멈추었던 아일페사스의 목소리가 다시 흔들림 없는 울림으로 다가왔다.
“이 점에서 다른 모든 종족들과 드래곤, 그리고 신들마저도 개입할 수 없는 이유,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다. 시간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그들의 것이 며, 따라서 그들이 그 시간들을 그들 모두의 후계자인 너에게 주고 싶어 한다면 그것은 그들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신스라이프는 도발적인 눈으로 아일페사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렇다면 더 더욱 너의 심판이라는 것이 모호해지는군. 내 부모로부터 그들의 창조물을 상속받겠다는데 네가 무엇을 심판하겠다는 거지?”
“네가 과연 인간의 올바른 후계자인가 하는 것을. 그 심판의 권리는 인간도 아닌, 너도 아닌 다른 자, 모든 신들과도 관련 없는 자, 바로 드래곤의 몫 이다.”
신스라이프는 잠시 침묵하며 아일페사스를 올려다보았다. 아일페사스의 거대한 모습은 바라보고만 있어도 외경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지만 신 스라이프의 마음속에서 그런 감정은 나타나지 않았다. 잠시 후 신스라이프는 웃으며 말했다.
“흥미롭군.”
신스라이프는 고개를 돌려 뒤쪽을 흘끗 바라보았다. 시축은 암흑 속에서 휘황한 빛의 형태로 도도한 회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뒤틀려 흐르고 산산이 비산하는 빛들은 공간 속에서 끊임없는 윤무를 그치지 않았다. 신스라이프는 다시 아일페사스를 보았다.
“흥미로워…………. 그래, 심판이 끝나고 내 존재를 인정하면 너희들은 정해진 운명 속으로 순순히 사라지겠다는 건가?”
“그렇다.”
아일페사스는 드래곤으로서 대답했다. 신스라이프는 흥미가 가득한 눈으로 아일페사스를 보았다.
“그렇다. 드래곤은 객관적으로 심판할 것이고 드래곤의 심판이 네 존재를 지지한다면 드래곤은 멸망을 받아들이겠다.”
할슈타일 후작의 악문 턱이 떨렸다. 시간을 만들어내는 인간이 그 시간을 신스라이프에게 준다면, 이제 다른 존재들과 신에게는 시간이 주어지지 않 을 것이다. 그들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영생할 것이며 영생은 다른 의미에서 멸망이다. 그러나 드래곤은 그런 운명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한 것이다. 시 간을 창조해 내는 것은 인간이기에.
그러나 아일페사스는 조금 전과 똑같은 엄격함으로 한 마디를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다만, 드래곤의 심판이 너를 지지하지 않을 경우 넌 300년 만에 처음으로 골드 드래곤의 공격을 받는 자가 될 것이다. 아니, 이 말조차 옳지 않다. 너는 신들이 이 세계를 떠난 이후 드래곤 전체의 공격을 한몸에 받게 되는 최초의 존재가 될 터이다.”
“그거 영광스럽겠군, 껄껄껄.”
신스라이프는 저 가공할 위협이 전혀 근심거리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호방하게 웃었다. 아일페사스는 자신을 억제하며 질문했다.
“드래곤은 묻겠다. 너는 인간의 적자인가?”
신스라이프는 폭발하듯 외쳤다.
“멍청한 도마뱀 녀석, 그렇다! 인간들이 내 존재에 동의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예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당연한 질문을 왜 한단 말이냐! 인간들 이 원했기에 내가 태어나게 된 것이란 말이다!”
아일페사스는 찌푸린 눈으로 신스라이프를 내려다보았다. 신스라이프는 갑자기 몸을 돌려서는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레이저를 향해 걸어갔다. 그의 손이 눈더미 속에 쑤셔 박혀 있던 레이저의 뒷덜미를 붙잡아 올렸다. 레이저는 마치 가벼운 손가방이나 되는 것처럼 들어올려져 허공에 대롱거 리게 되었다.
“이놈에게 물어봐라! 이놈에게 자신의 시간을 어떻게 팽개쳤는지 물어보란 말이다! 이 덜 떨어진 도박사 놈이 그가 만들어낼 수 있었던 시간들을 어 떻게 다루었는지를 물어봐!”
설령 아일페사스가 그런 질문을 했다 하더라도 레이저는 대답할 상태가 아니었다. 레이저를 쥐고 흔들던 신스라이프는 그를 앞으로 내던졌고 레이 저는 흰 눈밭 위에 혈흔을 남기며 다시 쑤셔박혔다. 이건 어쨌든 타인에게도 권장하고픈 체험은 아니군. 하지만 이런 체험을 나 대신 경험하게 하고 픈 녀석들이 몇몇 있기는 하지. 차라리 졸도하고픈 고통 속에서도 레이저는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신스라이프는 레이저에게는 더 이상 관심도 두지 않은 채 피에 젖은 손을 들어 할슈타일 후작을 가리켰다.
“그리고 저놈에게 물어봐라!”
할슈타일 후작은 눈을 번득였다. 그러나 아무 말 없이 기다렸다.
“저놈은 죽었지만 되살아났다! 저놈뿐만이 아니야. 무수한 죽었던 인간들이 되살아났다! 그것이 뭘 의미하는가?”
아일페사스는 천천히 대답했다.
“네가 시간을 멈췄다는 것을 의미하지.”
“질문을 똑똑히 이해하고 대답하기 전에 생각을 해라, 멍청아. 그들이 무엇 때문에 부활했는가?”
“아쉬움과 그리움과 슬픔. 남겨진 Hjan 때문이지.”
“그래. 그들은 시간 대신에 주어진 선물에 만족하지 않았어! 그들이 원했던 것은 시간을 만들어내는 거야. 너 드래곤이나 다른 무수한 신들을 위해 서가 아니라 그 스스로를 위해! 그들은 시간을 만들길 원하고 있었고 그것이 바로 영생이야! 왜 죽기를 원하는 자가 없지? 왜 자살을 죄악으로 보지? 그들은 끝없이 시간을 만들어내길 원하고 있어! 그리고 그것을 만족시켜 주는 존재는 지금까지는 없었어. 왜 허무함을 느끼지? 왜 태어날 때부터 슬 픈 거지? 왜 죽을 때까지 결여감을 느끼며 무엇인지도 모를 것을 찾아 끝없이 헤매는 거지? 그들을 만족시켜 줄 것이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왜 끝없이 이 황량한 세상을, 그들이 찾는 것이 빠져 있기에 황량하기만 한 세상을 방황하는 것이지? 그들을 만족시켜 줄 것이라고는 아예 존재하지 도 않았어!”
신스라이프는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나 이젠 내가 있다. 그리고 나뿐이다. 유피넬과 헬카네스가 멍청하게 주었던 죽음 따위는 그들이 원하는 선물이 아니야! 나다. 나야말로 인간 이 가장 깊은 마음속에서부터 원하는 그들의 소망이란 말이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시간을 영원히 가져가 주는 자. 그것이 나다! 그리고 내가 있으므 로 그들은 영원히 자신이 바라는 일, 시간을 만들어내는 일을 계속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일페사스는 침울한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신스라이프는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인간이 원하지 않았으면 태어날 수 없었고 인간이 원했기에 태어났으며, 그러므로 나는 인간의 적자다. 그것도 단 하나뿐인 적자다. 자, 오만 한 드래곤 녀석아. 심판인지 뭔지를 해보시지? 내가 인간의 적자임을 선언하라!”
입을 다문 아일페사스 대신, 신스라이프의 질문에 대답한 것은 할슈타일 후작이었다.
“넌 내 적자가 아니다.”
할슈타일 후작은 땅에 세워두었던 검의 손잡이를 오른손으로 단단히 쥐며 말했다. 신스라이프는 고개를 내려 할슈타일 후작에게 말했다.
“적자가 아니라고? 다른 자도 아닌 네가 그렇게 말한다는 거냐? 내 부활의 마지막 제물이었고 내 재탄생의 유일무이한 원인이었던 네가?”
할슈타일 후작은 신스라이프의 말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오른손에 든 검을 옆으로 비스듬히 들어올렸다.
“네가 부활했기에 나는 이 몸과 결합할 수 있었다! 너는 죽음으로써 나를 살려냈고 살아남으로써 나를 탄생시켰다! 그런 네가 나를 부정하겠다는 건가?”
“내가 네 탄생의 원인이었다는 점은 부정하지 않겠다. 그러나 나는 너를 내 적자로서 인지하지 않는다.”
후작이 말한 ‘인지’라는 단어에 신스라이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태어나 인지하지 않는 자식이란……
할슈타일 후작은 웃음기도 없는 냉랭한 얼굴로 말했다.
“미안하군, 내 자식이여. 그러나 너는 내 비뚤어진 욕망과 시간 사이의 사생아일 뿐이다.”
“아버지, 웃겨주시는군요. 당신이 원한 구원을 이렇게 부정하시나이까? 아버지도 이웃의 이름으로 자신을 부정하는 보편적인 얼간이셨습니까?” 신스라이프는 빈정거리듯 말했다. 그리고 뜻밖에도, 할슈타일 후작은 그 차가운 입술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웃기는군. 나는 자녀를 가지고 싶었지만 한 번도 가질 수 없었다. 그런 내가 만들어낸 유일한 자식이 이런 괴물이라는 건, 게다가 나 스스로 그를 인지할 수 없다는 것은 상당한 아이러니로군. 그들, 내가 냉대와 악의만을 보냈던 내 양자들이 내 유일한 피붙이라는 사실을 이제서야 깨닫게 되는군.”
잠시 말을 멈추었던 할슈타일 후작은 낮게 속삭였다.
“돌맨. 용서해 다오.”
차가운 맨땅에 무릎 꿇은 돌맨은 어깨를 감싸쥔 채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그란이 그에게 다가서려 했지만 이루릴의 손에 가로막혔다. 그란은 이루릴 에게 묻는 눈길을 보냈지만 이루릴은 그저 고개만 가로저을 뿐 설명하지 않았다.
돌맨 할슈타일의 볼 위로 어느새 차가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돌맨은 부를 수 없었고, 부르려 하지도 않았던 이름을 불러보았다.
“아버님……”
할슈타일 후작은 다시 고개를 들었고 그 움직임과 함께 검을 들어올렸다. 곧게 겨누어진 검 끝은 신스라이프를 겨냥하고 있었다. 할슈타일 후작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신스라이프를 쏘아보며 말했다.
“네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신스라이프. 그뿐만 아니라, 나는 너를 제거하고 내 멸망을 받아들여 나를 완성하겠다.”
“완성하겠다? 네가?”
“그렇다! 골드 드래곤 아일페사스, 말하시오! 당신은 길짐승과 날짐승의 왕. 부활했던 자들은 어떻게 되었소?”
아일페사스는 의아했지만 아무 말 없이 머리를 들어올렸다. 하늘을 찌를 듯한 모습으로 머리를 곧추세운 아일페사스는 곧 자신 속으로, 그리고 모든 세계로 들어섰다.
눈을 어지럽히는 검광 속에서 칼날 하나 들어갈 빈틈을 찾아낸 에카드나는 주저 없이 그곳에 검을 꽂아넣었다. 데스나이트는 비명을 지르며 도끼를 휘둘러 내렸지만 이미 그 팔에는 힘이 없었다. 에카드나는 몸을 앞으로 숙여 도끼 자루를 어깨로 받아낸 다음 그대로 데스나이트의 턱을 들이받았다. 데스나이트는 폭발하는 검은 연기와 함께 무너져내렸고 에카드나는 검을 회수하며 조금 전부터 들려오던 목소리에 대답했다.
“예, 아버지! 그들은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지금 바쁘니 그만 부르십시오! 목 떨어지겠습니다!”
드래곤 솔저 에카드나는 그렇게 속삭인 다음 다시 눈앞으로 다가드는 데스나이트를 향해 괴성을 지르며 돌격했다.
까마득한 높이에서 대륙의 동안을 가로지르던 지골레이드는 저 아래 희고 작은 점으로 반짝이고 있는 론리 시걸의 갑판을 흘긋 내려다보았다. 그의 경이적인 시각에, 굳어버린 채 자신을 올려다보는 갑판 위의 해적들의 모습들이 뚜렷이 들어왔다. 지골레이드는 잠시 론리 시걸의 주위를 맴돌며 망 자에게 참배한 다음 자신 속을 향해 속삭였다.
“그는 그의 복수심과 함께 돌아갔습니다. 드래곤 로드.”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아일페사스는 전 대륙의 곳곳을 향해 질문들을 보냈고 일자왕의 질문에 ‘대륙은 대답했다. 그덴 산은 말도 의미도 아닌 굳건 하고 진중한 산의 언어로 자신이 진정한 주인의 죽음에 복상하고 있음을 알려왔다. 졸란을 내려다보던 카레한 탑은 그 탑신을 휘감아 도는 거친 바람 을 빌려 베이론 코다슈의 죽음을 알려왔다. 그 외에 무수한 대답들이 돌아왔다. 대륙은 모든 언어와 의미와 느낌을 통해 아일페사스의 질문에 대답했 다.
꼿꼿이 세운 머리를 내린 아일페사스는 할슈타일 후작을 바라보았다.
아일페사스는 부활과 영생을 포기하고 표표히 죽음으로 돌아간 그 많은 자들의 모습에 목이 메어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말은 필요 없었다. 아일 페사스가 받아들인 모든 대답들은 그대로 할슈타일 후작과 신스라이프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할슈타일 후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가 남겨두었던 콜리의 프리스트들도 모두 돌아갔다, 신스라이프! 그들은 너를 기다리는 대신 크레바스 속으로 몸을 던졌지. 그들은 영생을 원하 지 않았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너도 잘 알겠지.”
신스라이프는 창백해진 얼굴로 할슈타일 후작을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그들은 시간의 장인으로 살기보다 그들 자신으로 살기를 원했다. 멸망은 참으로 완성의 귀결, 죽음은 시간의 장인인 그들의 최후의 작품. 그들은 그들 자신을 완성하고자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들의 죽음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너를 인정하지 않았다!”
신스라이프는 길게 심호흡했다. 나부끼는 빛살들이 그의 모습을 잠시 어지럽혔다.
“그런 것 같군…………… 그래서?”
“뭐라고?”
“그래서? 과거의 망령들이 과거로 돌아간 것이 뭐 어쨌다는 거냐. 그들은 현재가 아니며 처음부터 이 시간과는 관련 없는 자들. 그리고 이 시간의 모 든 자들은 나를 지지한다. 나는 이 현재와 하나가 될 뿐이지, 망령의 과거와 하나가 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네가 원하는 시간이었나. 시체처럼 눈더미 속에 틀어박혀 있으면서도 오가는 대화를 모두 듣고 있던 레이저는 생각했다. 네가 하나가 되려는 시간은 바로 이 현재였나. 하긴, 그것이 당연하지.
“그리고 이 시간의 모든 자들은 나를 지지한다. 그들에게 물어보라. 죽고 싶은 자 누구냐고. 이미 죽었던 자가 아니라, 지금 시간을 만들어내고 있는 자들 말이다. 지금 저기서 벌레 같은 모습으로 꿈틀거리고 있는 저 도박사 놈이 가장 가까이 있는 본보기인 것 같군. 저놈이 살기 위해 꿈틀거리는 모 습을 보란 말이다!”
치밀어 오르는 모욕감 속에서도 레이저는 이것이 오기로 대답할 성질의 질문은 아니라고 느꼈다. 그는 자신을 향해 질문했다. 너는 정말 죽고 싶은 가.
그리고 레이저는 다시 생각했다. 이런. 바보 다 된 모양이군.
할슈타일 후작은 이마를 찌푸리며 입을 다물었다. 신스라이프는 앞으로 걸어오며 말했다.
“그렇잖은가?”
“그럴 테지. 되살아난 자가 아닌,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 중에서 죽고 싶어 하는 녀석은 없겠지. 그 버러지들은 영웅으로 죽는 것보다는 거지로 라도 사는 것이 낫다고 말할 테지. 특별히 비난받을 말도 아니고.”
그 순간 할슈타일 후작은 검을 옆으로 뿌렸다.
“하지만, 난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