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 워커 4권 – 8장 시간의 장인 1

퓨처 워커 4권 – 8장 시간의 장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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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의 하늘은 어두웠지만 평야는 오히려 밝게 빛나고 있었다. 검붉은 색으로 물든 켄턴 성벽 위에는 검은 그림자가 된 사나이들이 평야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리오 시장은 딤라이트를 바라보았다.

딤라이트는 흉벽을 짚고는 어깨로 숨을 쉬고 있었다. 차마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볼 엄두가 나지 않았기에, 딤라이트는 땅을 보고 있었다. 무스타파가 말했다.

“딤라이트. 그레이 휠드런의 지휘권을 박탈하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지 않겠나.”

“무스타파!”

검을 뽑아들 필요도 없었다. 딤라이트의 눈 자체가 예리한 나이프처럼 무스타파를 향해 쏘아졌다. 하지만 무스타파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의 거무 튀튀한 얼굴이 움직였을 때, 그것은 표정을 짓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말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보는 바와 같이, 그는 충성을 맹세한 주군을 배신하고, 헌신을 서원한 오렘을 배신하고, 우정을 약속한 친구를 배신했다. 더 이상 우리의 지휘자로 서, 기사로서 대우할 수 없다고 본다.”

딤라이트는 목이 메어 힘들게 말했다.

“어떻게, 어떻게 지금 그런 말을 하는가……………, 어떻게 이토록 슬플 때, 무스타파. 제발…………, 그 이야기는 잊어주게. 아니, 잊을 수 없다면 잠시 보류해 두세. 부탁이네.”

무스타파는 씁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딤라이트는 힘들게 고개를 돌려 데이든 평원을 바라보았다.

하늘을 뒤덮은 검은 안개는 꿈틀거리고 흐물거리며, 말할 수 없이 역겨운 모습으로 떠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도열한 기치창검은 음습한 적 의로 빛나고 있었다.

데스나이트들. 언제부터 저 모습이 익숙하게 느껴진 것일까. 딤라이트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러나 데스나이트들은 당연히 거기 있어야 된다는 듯 이 평원을 가득 메우고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앞, 최선두에 한 명의 기사가 나서 있었다.

완벽한 괴물에 올라탄 채 켄턴의 성벽을 쏘아보고 있는 그 기사는 다른 기사들에 비해 훨씬 작은 체구였다. 원래 하늘을 나는 기사였던 만큼 덩치가 작은 것은 당연하다. 갑주도 월등히 가벼운 것을 걸치고 있었지만 투구만은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레이 휠드런의 눈이 그 투구 아래에서 빛나고 있었다.

천공의 기사들과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는 솔로처가 주먹 거리에 들어오는 것이라면 뭐든지 후려칠 듯한 모습으로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불합리해, 부조리해, 불가능해! 핸드레이크의 이름에 걸고, 젠장! 마법사의 이름에 걸고 맹세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웃기는군. 어쨌든 백번 양보해 서 죽은 놈들이 살아난 것이 당연한 일인 것처럼 여기더라도, 그렇다면 왜 드래곤 솔저들은 부활하지 않는 거야!”

광분한 솔로처를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 하던 시몬슬은 드래곤 솔저라는 말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온몸에 ‘위험 물품, 취급 주의’라고 적어둔 것 같은 전사가 이마에 ‘전투 준비 완료’라고 써 붙인 것 같은 표정을 지은 채 묵묵히 황야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그래서 소환자인 솔로처를 찾아왔던 전사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파괴하더라도 다시 부활한다면…”

솔로처는 고개를 돌려 솔깃한 표정을 지었다. 용아병(龍兵)은 근엄하게 말했다.

“다시 파괴하면 됩니다. 솔로처.”

용아병의 기지(?)는 솔로처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기가 막혀서 할 말을 잃어버린 솔로처는 입술을 꾹 깨문 채 평원에 도열한 데스나이트와 그레이 의 모습을 쏘아보았다.

그때 서녘 하늘에서 붉게 타오르던 태양이 마침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데스나이트들의 진열에서 작은 움직임이 일어났다. 주리오 시장은 눈을 가 늘게 뜨며 평원을 바라보았다.

선두에 서 있던 그레이가 손을 가볍게 들어올렸다. 그러자 데스나이트들의 대열에서 한 기사가 앞으로 달려 나왔다. 기사는 들고 있던 거대한 핼버 드를 한 손만으로 빙글 돌려 거꾸로 쥐었다. 히든보리 사집관은 그 무거운 핼버드를 부지깽이 다루듯 하는 모습에 신음을 토했다. 데스나이트는 햄버 드를 거꾸로 쥔 채 켄턴 성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데스나이트가 타고 있는 ‘것’의 다리는 모두 네 개였지만, ‘그것’은 실팍한 앞다리 두 개만 사용하여 달리고 있었다. 가느다란 뒷다리는 어깨 위로 넘 겨 마치 팔처럼 앞으로 뻗어 나와 건들거리고 있었다. 그 기이한 움직임을 바라보던 성벽 위의 사람들은 역겨움과 어지러움을 동시에 느꼈다. 히든보 리사집관은 주먹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말했다.

“무기를 거꾸로 쥐었으니, 아무래도 사절인 듯합니다만.”

주리오 시장은 찌푸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데스나이트를 태운 괴물은 그런 괴상한 모습으로 달리는 것 치곤 상당한 준족이어서 데스나이트는 곧 성문 앞에 다다라 멈춰 섰다. 데스나이트는 들고 있던 핼버드를 땅에 꽂아 세우고는 빈손을 위로 들어올렸다. 사절의 전통적인 모습. 주리오 시장 은 못마땅한 얼굴로 성벽으로 다가가려 했지만, 저격의 위험을 생각한 히든보리 사집관이 재빨리 시장을 만류하고 직접 흉벽 너머로 몸을 내밀었다. “사절인가?”

“그그렇렇다다! 그그레레이이 휠휠드드런런의의 전전갈갈을을 가가져져왔왔노노라라!”

딤라이트와 솔로처가 동시에 이를 갈았다. 딤라이트의 경우 그것은 동료의 배신에 대한 순수한 분노와 슬픔 때문이었지만 솔로처의 경우에는 일부 러 그레이 휠드런의 이름을 거론하는 데스나이트의 속셈에 대한 분노였다. 과연 그 이름을 들은 성벽 위의 사람들 사이에서는 지금까지보다 훨씬 증 폭된 불안이 감돌았다.

히든보리 사집관 역시 잠시 입을 다문 채 데스나이트를 쏘아보다가 조금 늦게 대답했다.

“….말해라.”

“그그레레이이 휠휠드드런런은은 켄켄턴턴이이 보보호호하하고고 있있는는 그그리리폰폰 킨킨 크크라라이이의의 정정당당한한 소소유유자자다 다. 지지금금 즉즉시시 킨킨 크크라라이이라라 불불리리는는 그그리리폰폰을을 그그에에게게 보보내내도도록록.”

모든 사람들은 불안스러운 눈으로 히든보리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히든보리가 대답하기에 앞서 솔로처가 재빨리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얼떨떨한 눈으로 돌아보는 히든보리를 향해 솔로처는 낮고 빠르게 속삭였다.

“이상하오. 항복 권고가 아니군. 사절은 킨 크라이를 먼저 거론하고 있소.”

“아…………, 그렇군요.”

“조건이 나올 것 같소. 유념해서 회담을 진행하시오.”

히든보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데스나이트를 향해 외쳤다.

“그 짐승을 내놓는 대신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뭐지?”

데스나이트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켄켄턴턴의의 자자유유와 안안녕녕을을 보보장장한한다다.”

히든보리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조건을 예상하고 있었던 솔로처 역시 이런 파격적인 조건에는 어안이 벙벙해져 버렸다. 그러나 딤라이트는 여전히 슬픈 표정이었고 무스타파는 무뚝뚝한 얼굴로 검붉은 하늘을 쏘아보고 있을 뿐이었다. 천공의 기사들의 무반응을 예의 주시한 솔로처는 다시 히든보 리에게 속삭였다.

“시간을 끄시오.”

“어, 그, 그 제안을 검토할 시간을 달라!”

“즉즉시시 대대답답하하라라!”

히든보리는 거칠게, 하지만 간곡함이 배어 있는 목소리로 외쳤다.

“우리는 모두가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당신들과는 다르다. 켄턴 전체에 관련된 일인 만큼 서로 의논을 해봐야 한다.”

데스나이트는 못마땅한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원래가 무시무시해 보이는 몰골인 만큼 그가 못마땅해 한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하지 만 잠깐의 침묵 후, 데스나이트는 꽂아두었던 핼버드를 다시 뽑아들며 외쳤다.

“내내일일 저저녁녁에에 다다시시 오오겠겠다다!”

그리고 데스나이트는 몸을 돌려 떠날 채비를 갖추었다. 그때 딤라이트가 외쳤다.

“이봐! 너! 나는 딤라이트 이스트필드다. 그레이 휠드런에게 내가 만나고 싶어 한다고 전해라!”

데스나이트는 몸을 반쯤 돌린 채 성벽 위의 딤라이트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러나 대답은 하지 않았다. 데스나이트는 다시 몸을 돌려 자기 쪽 대열로 돌아갔다.

사절은 대열에 도착하자 그레이를 향해 다가갔다. 먼 거리였지만 딤라이트는 사절이 그레이에게 뭔가 말하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레이는 고개를 조금 움직였다. 무거운 투구와 검은 안개, 머나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딤라이트는 그레이와 눈빛이 마주쳤다는 것을 맹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그레이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구령도 없고 지시도 없었지만 데스나이트들 전부는 그레이의 움직임과 동시에 일제히 몸을 돌 려 멀리 떨어진 숲에 설영된 본영으로 돌아갔다. 그러리라고 짐작된다는 말이다. 검은 안개가 그들의 뒷모습을 감추었기에 그들의 행동을 끝까지 바 라보기는 어려웠다.

솔로처는 재빨리 말했다.

“저 목청 좋은 친구의 말은 모든 켄턴 시민들에게 들렸을 거요. 시장님께서는 시청으로 돌아가시자마자 시민들에게 시달리겠군. 나는 좀 천천히 돌 아갈 테니 수고스럽겠지만 시민들을 상대하고 시민 대표들과 논의를 진행해 주시오. 뭐, 논의라고 해봤자 결론은 빤하지만.”

주리오 시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폰 한 마리와 켄턴 시. 누가 보더라도 데스나이트의 관대함을 칭송할 제안이다. 주리오 시장과 히든보리 사집 관이 성벽을 내려가자 솔로처는 딤라이트에게 몸을 돌리며 말했다.

“이야기 좀 합시다. 딤라이트, 무스타파.”

딤라이트는 아직까지도 억장이 무너진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에 솔로처는 무스타파의 이름까지 거론해야 했다. 무스타파가 천천히 고개를 돌 리자 솔로처는 말했다.

“저 제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오?”

“받아들이기 쉬운 제안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아니, 젠장. 그게 아니고 말이오. 그레이는 킨 크라이를 몹시 원하고 있는 모양이오. 그렇잖소?”

“……당연하잖습니까?”

“뭐요?”

“이제는 인정할 수 없지만 어쨌든 그는 한때 천공의 기사였습니다.” 딤라이트가 눈을 허옇게 뒤집었지만 무스타파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 어킨 크라이와 켄턴 시는 동등한, 아니 킨 크라이 쪽이 더 높은 가치를 가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흐음……”

솔로처는 팔짱을 끼었고 그러자 그의 뒤에 서 있던 시몬슬과 용아병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팔짱을 끼었다.

“무스타파 당신의 경우라면 어떻겠소. 아이라와……”

무스타파는 솔로처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대답했다.

“기사의 서약을 침해하지 않는 한에서라면, 나라 하나와도 바꿀 수 있습니다.”

솔로처는 다시 입을 다물고 말았다. 마음속으로는 놀라움의 감정을 억누르며 솔로처는 재빨리 생각했다. 이건 아이덴티티의 문제인가 보군. 천공의 기사는 어쨌든 하늘을 날아야 한다는 것인가.

그런 솔로처를 향해 이번에는 무스타파가 질문했다.

“저도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조금 전에 마법사님께서 말씀하신 것 말씀인데, 어찌해서 저들 간악한 자들은 부활했는데 드래곤 솔저들은 부활하 지 않는 것입니까?”

“아아, 핵심을 찔러주셨소.”

솔로처는 그렇게만 말했다. 잠시 기다리던 무스타파는 달갑잖게 말했다.

・대개의 사람들이 그런 대답을 할 때는……………”

“그렇소. 나도 모르겠다는 말이지.”

솔로처는 다시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시몬슬은 불안한 얼굴로 뒤로 조금 물러났다. 솔로처는 누구에게 화를 내는 건지도 분명하지 않게 분노하며 말했다.

“보통의 경우 나는 문제를 해결할 수많은 이론들을 가지고 있으며 그중 가능성이 없는 것을 솎아내는 소거법을 사용하여 가장 합리적인 해답을 선 택하오. 하지만 이번의 경우에는 수많은 이론은커녕 하나의 해답도 떠오르지 않소. 죽은 자는 모두 되살아나는가? 틀렸소. 켄턴의 시민들이 늘어나는 경향은 보이지 않소. 지금까지 켄턴의 시민으로서 되살아난 자는 저 웃기는 별명을 가진 프리스트뿐이오. 되살아난 자들은 다시 죽지 않는가? 틀렸 소. 어제 데스나이트들은 분명히 죽었소. 그럼 다시는 부활하지 않는가? 틀렸소! 저기 데스나이트들은 모두 두 번째로 부활했소! 그런데 드래곤 솔저 의 경우에는 첫 번째의 부활도 이루어지지 않았어. 어떤 자는 몇 번씩 부활하는데, 어떤 자는 한 번도 부활하지 않아. 도대체가 일관된 규칙성을 찾아 볼 수가 없어! 제기랄, 시몬슬! 나를 죽여라! 나도 두 번째로 부활하는지 어디 보자! 나를 죽여라아앗!”

계속 화를 내던 솔로처는 결국 자신의 말에 극도로 흥분해서는 시몬슬의 멱살을 붙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나를 죽이란 말이다! 명령이다!”

실험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우습게 여기는 마법사의 정신이 잘 살아 있는 요구라 하겠지만, 당황한 시몬슬은 거의 울음을 터뜨릴 지경이 되어 ‘솔로 처님, 솔로처 님.’ 하는 말만 반복했다. 그리고 무스타파는 근엄한 얼굴로 검을 세워들며 ‘소환자의 명령이시라면….. 어쩌고 하는 용아병을 말리느 라 애를 먹었다. 딤라이트는 그들 모두를 내버려둔 채 성벽을 내려와 버렸다.

검붉은 석양빛을 받아 구릿빛으로 타오르는 성벽 계단은 몽환적이었다. 계단을 밟아 내려오며 딤라이트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절망이 발걸음을 더 욱 흔들리게 만들었다. 손으로 성벽을 짚어가며 힘들게 내려서던 딤라이트는 결국 마지막 몇 단을 남겨두고 계단에 주저앉고 말았다.

몰염치한 추억들은 마구잡이로 딤라이트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일스, 해 뜨는 바다. 금빛으로 빛나는 아침의 모래사장. 하얀 절벽을 따라 달리며 바라보던 실키안 레이크의 석양. 일스의 정원은 바다다. 그들은 해풍을 따라 피어나는 장미꽃을 경배하고 수평선으로부터 정의를 배운다. 하늘 높이 날아오르면 바다의 잔파도들은 사라지고 한없는 해원만이 그들을 둘러싼다.

‘그레이. 너는 그것을 모두 잊었나. 이런 지독한 꼴을 당하기 위해 우리는 이 터무니없는 시간 속에 떨어졌단 말인가.’

누군가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딤라이트는 고개를 들었다. 어두워가는 하늘 아래 작은 소녀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딤라이트는 메마른 목소리로 소녀의 이름을 불렀다.

“레이디 케이트.”

케이트는 혼자였다. 뭔가 구색이 맞지 않는 옷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원래 여성의 옷차림에 대한 안목이 별로 없는 데다가 슬픔 때문에 넋이 나가다 시피 한 딤라이트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케이트는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말했다.

“저, 딤라이트 경…………, 슬퍼보여요.”

“괜찮습니다. 무슨 일로? 다이앤 양은 어디 있습니까.”

“다이앤은 집에 있어요. 저는, 저는 경을 만나려고 왔는데요.”

딤라이트는 잠시 멍한 얼굴로 케이트를 바라보았다. 그제서야 딤라이트는 케이트의 신발이 몹시 더러워져 있는 데다가 얼굴에는 땀이 가득 말라붙 어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끈이 풀린 모자는 위태위태하게 머리에 얹혀 있었고 치마끈의 매듭도 시원찮았다.

딤라이트의 혼란스러운 머릿속에서 간신히 정답이 도출되었다. 혼자서 나온 거야. 그러고 보니 옷차림도 이상하군. 혼자서 옷을 입고 몰래 나온 것 인가.

딤라이트는 일어설까 하다가 그러면 케이트가 올려다봐야 된다는 것을 깨닫고 그대로 자리에 앉은 채 말했다.

“제게 용건이…………, 볼일이 있다고 하셨습니까?”

“예. 저……, 그런데 정말 괜찮으세요?”

“괜찮습니다. 무슨 일이지요?”

케이트는 잠시 주저주저하며 딤라이트의 눈치를 살폈다. 딤라이트는 힘들게 미소를 지어 보였고 그러자 케이트는 안심하며 말했다.

“저, 이야기를 들었어요.”

“이야기라고 하셨습니까?”

“예. 저…………, 오후에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요. 마구간에서 비명 소리 같은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그래서 다이앤에게 물어봤어요.”

킨 크라이로군. 딤라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리폰이 마구간에 있다고 하던데요. 저, 그러니까 주인이 없어져서…………, 왜 저렇게 울고 있는 건지 물어봤거든요. 주인이 없어져서 그렇다고 하 던데요.”

딤라이트는 다시 목이 메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 말이 정말인가요?”

“예. 그래서 킨 크라이는 슬퍼하고 있을 겁니다.”

케이트는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딤라이트는 조그마한 소녀의 턱이 위아래로 움직이는 것을 슬픈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딤라이트는 케이트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이 소녀는 나를 위로하기 위해 무단 외출을 감행한 것인가. 저 나이에는 참으로 대단한 모험일 텐데.

그러나 다음 순간 들려온 케이트의 말은 의외의 것이었다.

“그럼, 지금은 킨 크라이에게는 주인이 없는 거죠?”

“예? 어…………,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

“그리폰을 타는 것은 많이 어려운가요?”

“글쎄요. 저는 잘 알지 못합니다. 페가수스와 그리폰은 서로 다른 생물이니까요.”

“그래도, 배우면 가능하겠지요?”

딤라이트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멈칫했다. 그는 잠시 케이트를 바라보았고 머릿속으로는 비명을 질렀다. 딤라이트는 이 소녀가 지금 무슨 말을 하 고 있는 것인지 짐작했다.

케이트는 손을 들어올리며 열성적으로 말했다.

“주인이 없다면, 어, 그러니까 주인이 없으니까……………, 임자가 없는 거예요. 그렇죠?”

딤라이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케이트는 자신의 손놀림에 홀려서는 더듬더듬 말했다.

“그럼 새 주인을 얻을 수도 있겠지요? 그렇죠?”

“레이디 케이트……………”

“그레이 경은 말했어요. 그리폰은 하늘 끝까지라도 날아오를 수 있다고요. 그렇죠? 그리고 지금 킨 크라이는 주인이 없으니까, 에…..”

케이트는 마지막 말을 얼버무리려 했다. 하지만 딤라이트는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고 그래서 케이트는 끝까지 말해야 했다.

“그럼 그 그리폰을 제게 주실 수도 있겠죠?”

딤라이트는 자신의 감정에 스스로 놀랐다. 그 순간 딤라이트는 이 작고 연약한 소녀의 뺨을 후려갈긴다는 생각을 떠올렸던 것이다. 게다가 그 욕구 는 상당히 강렬했다. 지금 이 소녀는 그레이의 그리폰을 탐내고 있단 말인가? 그레이가 어떤 처지에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도 가지지 않은 채, 아니, 그를 이미 죽은 사람으로 취급하며……………

딤라이트는 재빨리 무릎 위로 두 손을 깍지 끼고 고개를 숙여 케이트의 눈을 피했다. 기대감에 젖어 반짝이는 케이트의 눈빛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그에게는 너무 힘든 일이었다. 딤라이트는 힘이 들어가 하얗게 변한 손마디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왜…………, 왜 그리폰을 가지려고 하는 겁니까.”

케이트는 반색하며 대답했다.

“하늘에 올라가려고요.”

어머니였나. 죽은 어머니 말인가. 하늘에 있는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제기랄, 지겨워! 우습지도 않군. 킨 크라이를 타고 하늘 끝까지 올라간다 하 더라도 케이트가 어머니를 만날 수는 없을 것이다. 케이트 주위의 어른들은 간특하게도 어린애를 속일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지금 그 어린애는 내 속을 뒤집어놓고 있는 것이다. 딤라이트는 이를 악문 채 말했다.

“미안합니다만 그레이는 살아 있습니다. 킨 크라이는 그의 것입니다.”

케이트는 고개를 한껏 쳐들고는 부당하다는 듯이 말했다.

“예? 어, 아닌데요? 다이앤은 그랬어요. 그레이 경은 귀신이 씌어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고……

그 빌어먹을 하녀년이! 딤라이트의 두뇌의 이성적인 부분은 켄턴 시 전체에 그런 소문이 퍼지고 있으므로 다이앤을 탓할 바가 못 된다고 판단하고 있었지만 그의 감정은 다이앤에 대한, 그리고 케이트에 대한 증오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딤라이트는 다시 한번 간신히 자신을 억제하며 말했다.

“그런 소문은 믿지 마십시오.”

“그럼, 그레이 경이 살아 있다면 킨 크라이는 왜 그렇게 우는 거예요? 거짓말하지 마세요. 주인이 죽었으니까 그렇게 울고 있는 거……….”

그 순간 딤라이트의 증오가 그의 인내심을 넘어섰다.

“데스나이트가 되었든 어쨌든 그레이는 살아 있어! 죽은 것은 네 어머니지! 하늘 끝까지 올라가 봐야 네 어머니는…………!”

딤라이트의 말끝이 사그라들었다. 케이트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딤라이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황한 딤라이트는 숨을 몰아쉬며 케이트를 바라보았다. 겉으로 보기엔 조금 전의 그녀와 똑같았다. 하지만 뭔가가 빠져 있었다. 지금까지 그녀를 이루고 있던 무엇인가가 사라져버리고 딤라이트의 눈앞에는 그녀의 껍데기만이 남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딤라이트의 마음속으로 천천히, 멈출 수 없는 회한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케이트의 입술이 작게 움직였다.

“거짓말……”

“레, 레이디 케이트.”

“거짓말이야…..”

“레이디 케이트. 미안합니다. 실수였어요.”

“거짓말이었어………….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었어…………”

딤라이트는 당황했다. 케이트는 그의 말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제까지 믿고 있던 사실을 부정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죽은 거예요…………. 죽었어…….

죽음? 순간 딤라이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 소녀는 죽음이라는 단어를 그가 사용하는 의미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었다. 케이트는 죽음을 알 고 있었다. 왜? 어떻게? 순간 딤라이트는 이 도시에 찾아들었던 재난과 재앙을 떠올렸다. 제길, 이 도시의 꼬마가 죽음을 모르는 것이 더 이상한 것이 다.

“엄마는 무덤에 있어……………”

“레이디 케이트. 아니, 잠깐. 그러니까 그건 말입니다.”

“엄마는……………, 죽었어요. 그래요. 죽었어요. 레티의 프리스트처럼, 경비 대원들처럼. 죽은 거예요. 그래요.”

케이트는 자신의 말을 음미하듯 천천히, 그러나 확고하게 말했다. 딤라이트는 입을 벌렸으나 그의 입술과 혀는 말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케이트는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죽었어……, 죽었어…………, 죽었어…..”

“레이디 케이트?”

딤라이트의 당혹스러운 목소리에 대한 대답은 찢어질 듯한 비명 소리였다.

“아아아악!”

반쯤 일어나던 딤라이트는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케이트는 머리를 감싸 쥐며 비명을 질렀다. 그것도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연이어 계속해서 비명을 질러댔다.

“아아아악! 아아아악! 아아아악!”

성벽 주위를 오가던 경비 대원들과 시민들이 깜짝 놀란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딤라이트는 다시 일어나려 애썼다. 그러나 케이트는 비명을 지르 며 그대로 몸을 돌려 달려가기 시작했다.

“레이디 케이트!”

딤라이트는 고함을 지르며 그녀의 뒤를 따라 달렸다. 하지만 케이트는 죽을힘을 다해 달리고 있었고, 월등히 다리가 길긴 하지만 무장을 한 딤라이 트의 걸음은 그렇게 빨라질 수가 없었다. 딤라이트는 갑옷을 팽개치고 싶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동시에 멀거니 구경하고 있는 켄턴 시민들에 대해 욕설을 퍼붓고 싶다는 생각도 떠올렸다. 하지만 둘 중 어느 것도 기사에게 어울리는 행동은 아니었다. 딤라이트는 입을 다문 채 다리가 빠져라 힘껏 달 렸다.

황혼의 대로는 붉은 비단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위로 길게 늘어진 케이트의 그림자는 환상적이었다. 그의 발 바로 앞에서 노닐고 있는 그림자였지 만, 딤라이트는 케이트를 붙잡을 수 없었다. 소녀는 소리높이 비명을 지르며, 그리고 기사는 말도 없이 달리며 두 사람은 켄턴의 대로를 거의 일주했 다.

무작정 케이트를 따라 달리던 딤라이트는 주위의 모습이 바뀌어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해가 지기 전에 케이트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딤라 이트는 주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완전한 밤이 찾아오면 조그마한 케이트의 모습을 찾는 것은 매우 어려워지리라. 그래서 딤라이트는 풀숲을 헤 치고 비탈길을 따라 오르면서도 그곳이 어디인지 깨닫지 못했다.

순간, 앞을 달리던 케이트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딤라이트는 재빨리 멈춰 섰다. 암청색 어둠은 이미 사위를 물들이고 있었고 주위는 워석거리는 소리로 가득했다. 저녁은 이미 숲의 자장가를 연주하 고 있었다. 이런, 여기가 어디지? 딤라이트는 자신의 숨소리까지도 억제했다. 보이지 않는다면 소리, 소리를 찾아야 한다. 가벼운 발소리일 것이다. 엉뚱한 소리가 들려왔다.

흐느끼는 소리. 딤라이트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숨이 막혀 꺽꺽거리는 울음소리. 작은 소녀가 사무치는 슬픔 때문에 낼 것 같은 울음소리. 딤라이 트는 소리의 방향을 가늠했다. 랜턴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주위는 이미 숲이었고 딤라이트는 발에 채는 돌멩이와 종아리에 휘감기는 풀 잎에 방해받으며 힘들게 울음소리를 추적했다.

‘이건 길이 아닌 것 같은데. 짐승의 길인가?’

딤라이트는 발에 닿는 땅의 감각과 주위의 나무를 보며 그렇게 판단했다. 아무래도 사람들이 오가는 길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 아가씨가 이 용하는 지름길인가? 그런데, 그렇다면 이 길은 어디로 통하는 거지?

딤라이트의 의문에 대한 해답은 매우 고통스럽게 돌아왔다. 딤라이트는 커다란 돌덩어리를 걷어찬 오른쪽 정강이를 움켜쥔 채 소리 없이 신음을 흘 렸다. 아이고, 내 다리! 뭐야, 이건. 순간 딤라이트는 섬뜩함을 느끼며 다리의 고통까지도 잊어버렸다. 그가 걷어찬 것은 단순하지만 분명히 사람의 손길이 닿았던 돌이었다. 직육면체이며, 땅에 세워져 있고, 작은 글자들이 새겨져 있는…………….

묘비였다.

여기는 묘지인가? 어둡고 캄캄한 묘지였다. 어둠 속으로 솟아 있는 묘비들의 그림자가 마치 숲처럼 보였다. 정신없이 달리던 딤라이트는 이곳의 위 치를 정확하게 가늠할 수 없었다. 어느 쪽이 성벽 방향이지? 주위에는 불빛도 건물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어떤 지름길로 온 건지는 모르 지만, 그렇게 많이 달린 것 같지도 않은데 시내에서 이렇게 떨어져버린 건가.

그때 다시 흐느껴 우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딤라이트는 담대한 기사였지만 어두운 밤 묘지 한가운데 서서 묘비들 사이에서 들리는 울음소리를 들으면서도 완전히 침착할 수는 없었다. 목 뒤와 어깨가 긴장되어 아플 정도였다. 완전히 굳어버린 등허리 쪽의 당김은 가실 줄을 몰랐다. 딤라이트는 심호흡을 하며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시 울음소리가 들려왔을 때는 대강 방향을 가늠할 수 있었다. 그래서 딤라이트는 천천히, 묘를 밟지 않으려 애쓰면서 울음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걸어갔다. 걸어가면서 딤라이트는 자신을 비웃었다.

‘멍청한 놈. 죽은 자가 묘지를 무서워하나.’

하지만 그것은 그냥 호기였을 뿐이다. 묘지 전체에 배어 있으면서 시시각각 그의 몸을 파고드는 감각은 그를 더욱 긴장시켰다. 묘지는 다른 땅과 다 르다. 뻔뻔스러울 만큼 명명백백하게 죽음을 증거하는 이 장소는 궁궐이나 항구나 들판이나 논과는 전혀 다른, 완전히 이질적인 어떤 장소였다. 울음소리가 바로 코앞에서 들려왔다.

딤라이트는 멈춰 섰다. 검푸른 하늘에선 벌써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케이트는 무덤에 쓰러진 채 흙과 풀을 움켜쥐고 흐느끼고 있었다. “레이디 케이트.”

“엄마, 엄마…………, 엄마.”

딤라이트는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손바닥보다 그렇게 넓지도 않은 케이트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케이트는 목이 막혀 꺽꺽거리는 소 리를 내고 있었다. 딤라이트는 천천히 케이트를 일으켜 앉혔다. 케이트는 몸부림치려 했지만 딤라이트는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고 강하게 잡아선 똑 바로 앉혔다.

일어난 케이트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어둠 속이지만 옷에 덕지덕지 붙은 흙덩어리와 풀물이 든 손, 그리고 눈물과 흙먼지로 범벅이 된 얼굴은 대충 알아볼 수 있었다. 게다가 케이트는 딤라이트의 얼굴을 똑바로 보게 되자 다시 목을 놓아 울음을 터뜨렸다.

“흐어어어엉!”

딤라이트는 뭐라 말하려 하다가 입을 다물고, 손수건을 꺼내 케이트의 얼굴을 대충 닦아주었다. 그러고는 케이트의 코에 손수건을 가져가 조용히 코 를 풀 것을 제안했다.

“흥.”

“흐으응! 우아아아…………앙.”

딤라이트는 다섯 배쯤 무거워진 것 같은 손수건을 주머니에 대충 쑤셔넣고는 케이트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레이디 케이트. 울지 말아요.”

“어마, 엄마, 어마, 주어, 죽어, 엄마 죽어 주었어, 으허어어엉!”

“그렇습니다. 레이디 케이트. 하지만 그렇게 슬퍼하는 것은 도리가 아닙니다.”

케이트는 딤라이트의 얼굴을 흘끔 보았다. 하지만 보이는 것은 시커먼 그림자뿐이었다. 케이트는 그 그림자를 향해 앙칼지게 외쳤다.

“살려내요!”

“예?”

“살려내요! 우리 엄마 살려내요! 살려내라고요!”

이런 난감한 요구라니. 딤라이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고는 말없이 케이트를 안아올렸다. 느닷없이 허공으로 올라오게 된 케이트는 경황 중에 도 질겁하며 딤라이트의 목에 매달렸다. 딤라이트는 퍽 어색한 자세로 케이트를 안아든 채 말했다.

“일단 관사로 돌아갑시다. 그리고 씻고 나서 이야기를 하도록 하지요.”

“우리 엄마 살려……”

“레이디 케이트. 여기는 춥고 어둡습니다. 가서 씻고 저녁이라도 먹고 나서 이야기를 하죠.”

“저녁 먹고?”

“예.”

“저녁 먹고 나서 우리 엄마 살려내는 거?”

말이 되냐. 딤라이트는 이젠 힘없는 미소라도 짓고 싶었다. 그러나 케이트의 요구에 대답한 것은 그가 아니었다.

“어, 케이트니?”

딤라이트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숨을 급하게 들이켰다. 하마터면 검을 뽑아들 뻔했지만 케이트를 안고 있었기에 그런 무서운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 다. 그것은 다행이었다. 딤라이트는 상대가 사람이라는 것을 간신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곳에는 한 여자가 서 있었다. 그 그림자를 얼핏 본 순간 딤라이트가 트롤이나 오거일 거라고 착각했을 만큼 굴강한 몸집과 위압적인 팔뚝을 자랑 하는 여자였다. 그 여자는 두툼한 허릿살 위에 그 우람한 손바닥을 얹어놓고는 딤라이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딤라이트는 강렬한 압박감 속에서 간 신히 질문했다.

“저, 누구신지……”

“엄마!”

딤라이트는 빠져나간 자신의 턱이 땅 위를 굴러가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케이트는 와락 몸부림을 쳤고 딤라이트는 간신히 케이트가 땅에 곤두박 질치기 전에 그녀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땅에 내려지자마자 케이트는 그 장대한 체구의 여인네를 향해 줄달음질쳤다. 그러고는 여인의 큼직한 앞치 마(딤라이트는 그것이 군용 천막이 아닌가 의심했다.)를 움켜쥐고는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혀 여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엄마……? 엄마!”

여인네는 곧 그 웅장한 체구에 어울리는 장엄한 목소리로 의아함을 표현했다.

“에구머니! 케이트? 너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냐? 이 지저분한 몰골 하고! 너 제정신이야? 이 흙 좀 봐. 이게 사람 새끼 몰골이야, 동네 강아지 몰골 “이야!”

케이트는 거의 휘둘리다시피 조사를 당하며 간신히 말했다.

“어, 어? 엄마 안 죽었어?”

딤라이트는 여인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고 생각했다. 여인은 케이트의 작은 몸을 통째로 흔들며 고래고래 고함질렀다.

“이녀언! 이년! 그게 어미한테 하는 말버릇이야? 이제는 어미를 죽은 것 취급해? 어디서 배워먹은 버릇이야! 죽었다고? 죽어? 이년! 네가 죽어봐라, 이년!”

여인은 우레 같은 목소리로 케이트와 딤라이트의 혼을 쏙 빼놓고는 그대로 묘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케이트의 몸을 가볍게 들어올려 무릎 에 얹고는 그 공성추 같은 팔을 뒤로 당겼다. 여인은 곧 못이라도 때려박을 듯한 기세로 손을 휘둘렀고, 그 손바닥과 케이트의 조그마한 엉덩이가 서 로 마주치며 굉음이 울려퍼지자 딤라이트는 그만 헛바람을 삼키며 눈을 감고 말았다.

케이트는 목이 찢어져라 비명을 질러댔지만 여인은 한 점 흔들림 없는 달인의 손놀림으로 케이트의 엉덩이를 무참하게 유린했다. 딤라이트는 케이 트의 목을 따는 비명 소리에 왠지 즐거움 같은 것이 섞여 있다고 생각했지만 주위를 가득 메운 공포스러운 기운 때문에 그런 느낌을 곧 잊어버렸다. 한참 후, 여인은 씨근거리며 팔놀림을 멈추고는 이마를 쓱 훔쳤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딤라이트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을 받은 딤라이트는 직립 부동자세가 되었다.

바싹 굳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딤라이트를 향해, 여인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누구? 칼잡이요?”

하마터면 관등 성명을 댈 뻔했지만, 딤라이트는 간신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일스의 딤라이트라고 합니다. ・레이디.”

여인이 당혹하고 놀랄 거라고 생각했던 딤라이트의 기대는 무참하게 뭉개져 버렸다. 여인은 일스의 딤라이트가 뉘집 강아지 이름인가 하는 표정으 로 딤라이트를 바라보았던 것이다. 딤라이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 갑자기 의심의 기운이 서렸다.

“여기서 우리 귀염둥이랑 뭐하고 있으셨수, 딤라이트 씨?”

입 속에서 수많은 말들이 동시에 튀어나오려고 아우성을 지르고 있는 동안에도 딤라이트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단어만이 끈질기게 맴돌고 있었다. ‘귀염둥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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