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 워커 4권 – 8장 시간의 장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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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저는 갑작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파하스 씨!”
“왜?”
“당신 파하스입니까?”
・저능하다고 해줄까, 멍청하다고 해줄까? 자네가 조금 전에 나를 그 이름으로 불러놓고는 이런 황당한 질문이냐?”
루손은 킬킬거렸지만 레이저는 차분하게 말했다.
“둘 다 사양하겠습니다. 그럼 질문을 바꾸겠습니다. 당신 부모님은 대시인을 존경한 겁니까?”
“뭐야?”
“당신 부모님이 대시인을 존경했기에 당신에게 그런 이름을 붙인 겁니까?”
파하스는 그제서야 레이저의 질문을 이해했다. 파하스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나는 고아였다.”
“고아……”
“다섯 살 때 첫 번째 노래를 만들었고, 열 살 때 처음으로 검을 쥐었지. 열다섯 살 때 처음으로 사랑했고, 열일곱 살 때는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다. 후회하진 않아.”
레이저는 그대로 파하스의 말을 받았다.
“레이디를 위해 든 검이었으니까. 그리고 스무 살 때 강간마 오크빌을 죽이고 현상금이 붙게 되었습니다. 오크빌은, 어쨌든 귀족이었으니까. 스물일 곱에 헤게모니아를 종단하고 시간의 바늘에 입맞췄지요. 서른 살 때 당신은 열다섯의 당신이 처음으로 사랑했을 때 당신의 연적이었고 그 이후로 일 생동안 당신의 적수였던 부캐넌 백작을 쓰러뜨리고 그의 검을 가졌지요.”
파하스는 물기 어린 눈으로 레이저를 바라보았다.
“고마운 일이군. 100년이 지나도 내 보잘것없는 이야기를 이렇듯 소상하게 기억해 주는 이가 있다니.”
“진짜 파하스로군요.”
“그렇다네.”
“그럼 ・・・・・”
레이저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턴빌 시를 바라보았다.
“저건 진짜 거인이군요.”
“동의하겠어. 자네가 어디 가서 그렇게 말하겠다면, 맞장구도 쳐주지.”
파하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역시 턴빌 시를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턴빌 시청 지붕을 뒤꿈치로 자근자근 밟고 있는 거인을 보았다.
거인의 발길에 채인 지붕이 하늘을 가로지르고 거인의 주먹에 맞은 종탑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분수대가 무너진 것인지 물줄기가 하늘로 치솟고 있었고 그 옆에선 불길이 질 수 없다는 기세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거인은 그런 식으로 턴빌 시에 미증유의 대파괴를 선사하고 있었지만, 파하스가 보기엔 아무래도 가볍게 몸을 푸는 정도인 것으로 보였다.
팽개쳐진 듯한 모습으로 땅바닥에 드러누운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던 아프나이델이 힘없이 머리를 들어올렸다.
“설명을 할까요, 들을까요.”
세운 무릎에 팔꿈치를 얹고 그 주먹 위에 다시 이마를 얹은 모습으로 앉아 있던 운차이는 한쪽 눈만 떠서 아프나이델을 바라보고는 다시 눈을 감았 다.
“해.”
“에, 저건 거인입니다.”
“이…익…!”
운차이는 무시무시한 욕설을 퍼붓는 대신 아프나이델을 확 노려보았다. 아프나이델은 숨을 들이켰고 그 모습을 보던 아일페사스의 눈꼬리가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너! 왜 그런 눈으로 나이드를 쏘아보는 거야?”
운차이는 아일페사스를 한번 바라보기는 했지만 다른 말은 하지 않고 도로 눈을 감았다. 아프나이델은 심호흡을 하고(그보다 먼저 아일페사스를 말려야 했지만) 설명을 시작했다.
“저 거인은 루트에리노 대왕을 찾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저 거인을 붙잡아 두고 제레인트를 한 발 앞세워 턴빌로 보냈습니다. 하지만 저 거인을 오 랫동안 붙잡고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제레인트의 안위가 걱정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루트에리노 대왕에게 데려다주겠다고 말할 수밖 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턴빌에 도착했고, 이후의 상황은 아시는 바대로입니다.”
운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녀석들은 갑자기 나타났지………….. 이 말은 어폐가 있다. 정확하게는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나타났다고 해야 하니까. 어쨌든 거인의 모습을 본 경비 대원들과 턴빌 시민들은 대혼란에 빠져버렸고 그 혼란을 틈타 파는, 아니, 신스라이프라고 해야 되나? 어 쨌든 그자는 콜리의 프리스트들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신스라이프를 추적하려 했던 운차이는 거인의 횡포를 피해 일단 턴빌을 탈출하기로 결심했고, 턴빌 외곽에서 아프나이델 일행과 만나서 이곳까지 도망쳤던 것이다.
운차이는 눈을 감은 채 말했다.
“턴빌 시민들에게 소화제를 선물해야겠군.”
“예?”
“턴빌 시민들은 네 심장을 꺼내 씹어먹으려 들 테니까.”
아프나이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 옆에 앉아 있던 엑셀핸드는 노기가 충천한 얼굴로 말했다.
“이놈! 그러면 우리더러 어쩌란 말이냐! 우리도 저 거인이 단지 대왕을 찾는 줄 알았단 말이다. 거인이 저런 횡포를 부리는 것은 너희 인간들이 그를 공격했기 때문이 아니냐!”
운차이는 혀 차는 소리를 냈다. 그의 말이 맞기는 하다. 턴빌 경비대원들은 자포자기적인 공황 상태에서 거인을 향해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고 화살 이 날아와 박히자 거인은 미친 듯이 화를 내며(“우타크! 어디 있느냐!”) 턴빌 시에 쑥을 재배하기로 결심했다.
“지금 거인에 의해 쑥밭이 되고 있는 턴빌 시의 시민들은 이렇게 말할걸. 애초에 데려온 쪽이 잘못 아니냐고.”
“끄응!”
엑셀핸드는 이것이 부당한 질책이라고 생각했지만 더 이상 변명의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그것은 드워프의 성격이 아니다. 이루릴은 슬픔이 가득한 표정으로 턴빌을 바라보며 말했다.
“거인으로 하여금 턴빌을 떠나게 해야 합니다. 그에게 루트에리노 대왕의 소재를 알려주면 되지 않을까요.”
아프나이델은 한숨을 내쉬었다.
“문제는 그런 소재 같은 것은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그게 문제인가요?”
아프나이델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이루릴을 돌아보았지만 이루릴은 턴빌 쪽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그렇군. 그게 문제될 것은 없지. 이미 속였으니 또 한 번 속일 수도 있는 거지. 그러나 이번에는 에델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글쎄요. 거인은 이제 더 이상 인간을 신뢰하지 않을 듯합니다. 그의 죽음은 속임수에서 비롯된 것이었잖습니까? 그리고 조금 전 그는 다시 한번 인간에게 속았습니다. 어쩌면, 거인은 복병을 숨겨놓고 자신을 유인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푸후……. 상당히 가능성 있군요.”
제레인트는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이루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시도는 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나는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었어요. 생각들이 자꾸 끊어집니다. 거인을 유인한다라. 어떻게, 어디로 유인하면 좋을까요.”
이루릴은 잠시 대답을 미루고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이상하다. 저 성스럽고 활기찬 인간이 왜 이런 광경 앞에서 저렇게 무력하고 나른한 모습을 보이는 것일까. 그런 의심은 네리아도 하고 있었다. 제레인트, 이상해. 다른 때라면 가장 먼저 제대로 들지도 못할 무기 집어들고 턴빌로 달려갈 사람 인데.
그때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던 그란이 입을 열었다. 바이서스 어였다.
“거인의 폭력으로부터 턴빌을 구하는 것도 합당하지. 그러나 다레니안께서는 말씀하셨다.”
“다레니안……”
“과거로 향하는 흐름과 미래로 향하는 흐름의 교차점을 찾으라고. 그런데 그 교차점은 파다. 그러니 우리는 그녀를 추적해야 되지 않을까.”
“후작을 쫓고 싶다는 것 같군. 턴빌은 저렇게 내버려두고?”
그래. 후작과 그 똘마니들은 파를 뒤쫓아 갔다. 쳉과 미도……………. 그러니 우리도 그녀를 쫓아가야 되지 않을까.”
“빌어먹을, 도대체 어떻게들 된 거야, 모두!”
운차이는 결국 노성을 터뜨렸다.
“나는 지금 이 순간의 모든 것이 마음에 안 들어. 피크닉이라도 나와 있는 것처럼 이 경치 좋은 언덕에 앉아서 거인의 발 아래 박살나는 턴빌을 바라 보고 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고, 어쩔 수 없다는 식의 말만 종알거리는 너희 놈들도 마음에 들지 않아. 파하스! 레이저! 즐거운 구경인가? 그 꼴같잖 은 말만 쏟아내는 입에다가 너희들의 주먹이라도 처넣어! 아프나이델! 너 혼자서 저 사지에서 탈출했나? 다른 자들은 마차 타고 유람하듯이 나온 줄 알아? 왜 혼자서 죽어가는 시늉을 하는 거야! 제레인트! 머릿속이 엉망이라고? 네놈의 머릿속이 언제 엉망이 아닐 때가 있었냐! 네놈이 생각하고 움 직이는 녀석이었나? 네 앞길은 테페리가 주관하지 않느냐! 그란! 모두 다 파를 쫓아가니 너도 쫓아가겠다고? 네가 몰려다니는 들개 새끼냐!”
느닷없이 쏟아진 운차이의 폭언은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운차이는 억울함과 분노가 담긴 시선들 하나하나를 되받아 주고는 자신의 롱 소드 를 쥐며 일어났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던 덕분에 운차이의 폭언의 대상에서 빠진 네리아가 당황하며 말했다.
“어, 운차이?”
운차이는 아무 말 없이 말을 향해 걸어갔다. 네리아는 주춤주춤 따라 걸으며 말했다.
“어디…………… 가는 거야? 운차이?”
운차이는 앰뷸런트 제일의 고삐를 틀어쥐더니 등자에 발도 올리지 않고 안장에 뛰어올랐다. 그리고 검을 뽑아들고는 왼손에 고삐를 감아쥐며 말했 다.
“Crifentha unew gereh, fictyr-factey ash na thene ki zhapair! Rackdarph!”
운차이는 으르렁거리는 말만 남겨놓고 검을 돌려 앰뷸런트 제일의 볼기를 철썩 갈겼다.
“하아!”
그리고 운차이는 곧장 턴빌 쪽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네리아는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트라이던트를 감아 쥐며 에보니 나이트호크 위로 뛰어올랐다. 파하스는 당혹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 네리아 양?”
그대로 운차이를 뒤따라 갈 기세였던 네리아가 잠시 멈추며 파하스에게 외쳤다.
“파하스! 혹시 저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요?”
“어, 그러니까, ‘영원히 거기 주저앉아서 사이좋은 앵무새처럼 서로 지저귀고 있어라, 얼간이들아……………, 이런 뜻일 겁니…
“고마워요! 그럼!”
네리아는 에보니 나이트호크의 배를 콱 걷어찼다. 에보니 나이트호크의 거대한 검은 동체가 검은 질풍처럼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남겨진 사람들과 이종족들은 얼이 빠진 얼굴로 운차이와 네리아의 뒷모습을 보거나 서로를 바라보았다. 혼란에 빠진 일행 가운데서, 파하스는 가슴 속으로 무엇인가가 꾸물거리며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대시인의 자각이었다. 한 자루 검과 한 대의 하프를 지니고 헤게모니아를 종단하며 모든 미녀에게 사랑을 바쳤고 모든 남자들에게 시비를 걸 었던 자의 분노였다. 죽었다 깨도(실제로 그러하긴 하지만), 남자가 나를 모욕할 수는 없어. 단순하고 유치하다고 말할 수도 있는 감정이었지만 시인이라 는 것이 원래 그렇다. 그들은 감정의 종복이며 노래의 노예. 파하스는 부들부들 떨었다. 차넬의 후손 앞에서 감히 어느 놈이 거인을 대적하느니 마느 니 하는 것이냐!
“나도 간다!”
에델린은 조그마한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사내의 얼굴에 놀랐다. 파하스의 눈은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고 그 기 다란 검을 힘있게 들어올리며 말했다.
“우정은, 사귀어온 시간을 돌아보는 것이기에 앞서 함께 걸어갈 시간을 내다보는 것. 헌신은, 타인에게 자신을 바치기에 앞서 스스로에 충실해지는 것. 나는 운차이와 네리아와 함께 걷겠다. 그로써 나에게 헌신하겠다.”
제레인트는 머리칼을 쥐어뜯고 있었다. 운차이의 말이 그의 머릿속을 온통 헤집어놓고 있었다. 그래. 내가 생각하고 움직이는 녀석이었나? 언제 어 느 때라도 내 앞길의 갈림길은 테페리께서 알려주시는 것. 그것은 나의 기득권, 그래서 오히려 잊어버린 권리. 테페리라는 길잡이가 있거늘, 내가 감 히 앞길을 모르겠다는 둥 생각이 잘 안 된다는 둥 건방진 말을 꺼냈단 말인가?
‘지금 나는?’
제레인트는 와락 일어나서는 아무 말 없이 후치에 올라탔다. 다른 자들도 각자의 말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파하스는 긴 검을 뽑아들어 앞으로 내뻗 으며 고함질렀다.
“너 이 젠장맞을 남부 촌놈아! 거기 섰거라! 이랴!”
“하아! 이랴!”
기수들은 각자의 말에 구령을 보냈다. 날렵한 동작으로 센추리온에 오른 아일페사스는 신나게 고함지르려다가 아프나이델이 아직도 꾸물거리는 것 을 발견했다(덕분에 엑셀핸드도 출발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이드! 뭐해요? 어서 가자!”
“응? 아아, 응.”
아프나이델은 더듬거리며 엑셀핸드를 세레니얼에 태우고는 그 스스로도 말 위에 올랐다. 그러고는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수 심이 가득했다.
아일페사스는 센추리온을 세레니얼 옆으로 붙이며 아프나이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프나이델의 입술이 벌어지며 혼잣말 같은 말이 새어나왔다.
“영원히…”
“응?”
“영원히 거기 주저앉아서, 앵무새처럼 서로 지저귀고 있어라…
아일페사스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아프나이델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저것이 말에게 내리는 명령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잠시 후 아일페사스는 아프나이델이 운차이의 말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그러나 아프나이델은 아일페사스의 질문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그는 말을 달리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관심만 빼놓고는 자신 속으로 완전 히 함몰되어 있었다. 그런 몰입 속에서 아프나이델은 더듬거렸다.
“앉아서 중얼거린다…………, 앉아서 중얼거린다……”
아일페사스는 욕구 불만을 느꼈다. 비탈길을 내려가면서도 말 몰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아프나이델의 모습은 불안감을 주었다. 하지만 아프나 이델은 그런 위험 속에서도 이마에 땀이 맺힐 것만 같은 완전한 집중력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서서 걸어가지 않는다?”
일행의 마지막이 그런 식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뒤에 남은 자들이 있다는 사실은 잠깐 동안 드러나지 않았다. 레이저와 루손은 언덕 위에 선 채 달려 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루손은 콧날을 만지작거리다가 레이저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봐, 레이저.”
“응?”
“나는 절대로 거인에게는 가까이 안 가. 알았지?”
레이저는 싱긋 웃었다.
“걱정 마. 나도 그런 생각은 없으니까.”
“그래?”
“그래… 지금 내게는 더 급한 일이 있어. 그리고 그 급한 일에는 너도 관련되어 있고.”
루손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말했다.
“무슨 말이지?”
레이저는 조금 꺼림칙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남자가 살아나는 것, 너도 보았지? 그 밤색 머리 남자 말이야.”
“아! 그래. 그랬어.”
“죽었는데 되살아났어…………. 마치 그덴 산의 거인이 되살아나고, 저기 달려가는 파하스가 되살아난 것처럼. 그렇다면 말이야.”
“응?”
“우리들의 친구도 되살아나지 않았을까?”
레이저는 두 팔을 벌리며 극적인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루손의 퉁명스러운 대답이었다.
“우리 친구, 누구? 이름을 말해야지.”
레이저는 무릎이 꺾이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나크둠 말이야…………”
“뭐! 나크둠이 살아난다고? 진짜?”
루손은 레이저가 기대하던 모습을 보여주었다. 안타까운 것은 그 모습이 레이저가 기대를 버렸을 때 표현되었다는 점이지만. 그래서 레이저는 너털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아니, 그럴지도 모른다는 점이지. 나는 확인해야겠어. 거인도 살아났고, 파하스도 살아났고, 그 후작이라는 사내는 죽자마자 살아났어. 나크둠도 살아날 수 있는 것 아닐까? 가서 확인해야겠어.”
“그렇구나. 그래. 어서 가자!”
“간단해서 좋군………….. 나도 너처럼 생각할 수 있다면 좋겠다, 이 친구야.”
“응? 무슨 뜻이야?”
“혼잣말이야.”
루손은 꺼림칙한 표정으로 레이저를 쏘아보더니 말했다.
“늙은 오크들이 말하길, 혼자서 중얼거리는 오크는 때려죽이거나 추방해야 된다고 하던데…”
그건 정신 나간 오크를 처리하는 원로들의 지혜인가 보군. 다행스럽게도 난 미친 것이 아니니까 나를 때려죽이지는 않아도 돼.” “그래? 알았어.”
루손은 그렇게 말하더니 곧 글레이브에 끈을 묶어 어깨에 걸쳤다. 그러고는 기다리지도 않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잠시 얼떨떨한 표정으로 루손의 뒷 모습을 바라보던 레이저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젓고는 그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생각에 잠겼다.
현상들. 현상의 배후에는 의미가 있는 이유가 있겠지. 죽은 자들의 부활의 원인은 뭘까. 첫 번째 이유는 역시 콜리의 프리스트들의 의식. 그리고 파 L. 그라시엘. 파는 신스라이프가 된 것일까. 이 사태들은 도대체 어떻게 일어난 것인지. 하지만 중요한 것은…………….
“파가 필요조건인 것인가.”
말을 꺼내던 레이저는 흠칫했지만, 걸어가기 바빴던 루손은 레이저의 말을 듣지 못했다. 레이저는 소리 나지 않게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자신의 생 각 속으로 빠져들었다.
나크둠이 만일 부활하고, 그 부활의 원인이 파라면.
그렇다면 그 부활을 무효로 돌리지 않기 위해선…….
“파를 죽여야 해.”
할슈타일 후작은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궤헤른은 후작에게 건네기 위해 들고 왔던 찻잔을 집어던지고 말았다.
“그만 좀 하세요! 그렇잖으면 이유를 설명해 주시든가! 왜 그녀를 죽여야 된다는 겁니까? 나는 후작님에게 도덕적인 비판을 가할 사람은 아닙니다. 나는 지금 설명을 요구할 뿐이란 말입니다!”
후작은 모포를 목까지 끌어올리며 궤헤른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궤헤른은 인내심을 발휘하며 그 눈을 들여다보았다. 저 속에서 예지가 춤추고 열정 이 휘몰아쳤던 시절이 있었지. 그런데 지금의 저 눈은 뭐란 말인가.
후작의 몸은 모포 아래에서 벌벌 떨고 있었다. 후작의 입이 슬그머니 열렸다.
“파를 죽여야 해.”
궤헤른은 넌덜머리를 내며 후작을 내버려두고 모닥불 가로 돌아갔다. 자리에 앉으려던 궤헤른은 흠칫하며 쳉을 보았다. 쳉은 묵묵히 후작을 쏘아보 고 있었다.
궤헤른은 땅바닥에 앉으며 말했다.
“보다시피, 정신이 혼란스러우신 상태니 만큼..
“그렇게 보이는군요.”
쳉은 그렇게 말하며 궤헤른에게 찻잔을 건넸다. 궤헤른은 한 모금을 들이켰다. 하지만 차 맛도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 쳉의 바로 옆에 앉아 그의 어 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입장 곤란하군.’
쳉은 찻잔을 든 손을 무릎에 걸치고는 궤헤른을 돌아보았다.
“당신의 주인이 저 지경이니,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군요. 어쩌실 생각입니까.”
“어쩌다니요?”
“우리는 파와 콜리의 프리스트들을 쫓아갈 겁니다. 나는 마법과 신학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만, 내가 보기엔 파는 신스라이프의 유령에게 그 몸을 뺏긴 것처럼 보이더군요. 되찾을 겁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어쩔 생각입니까.”
사무엘은 무서운 표정으로 쳉을 쏘아보았다. 그는 아직 쳉에게 한 방 맞았던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숨쉬기조차 힘든 마당이었으니 까.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는 우리 마음대로다, 호위 무사.”
쳉은 고개를 조금 돌려 사무엘을 바라보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아무 표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사무엘은 윗입술을 씰룩거리며 말했다.
“어쩌다가 저 빌어먹을 도시에서 함께 탈출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네가 우리 동료나 손님이 된 것은 아냐. 조심스럽게 말하는 법을 배우지 그래?”
“그거 불공평하군.”
“뭐?”
“나는 지금 같이 탈출한 인연 때문에 미의 납치에 대한 앙갚음을 하지 않고 있는데. 불공평하지 않아?”
사무엘은 곧장 일어섰다.
“이놈이……!”
그러나 쳉은 사무엘의 입장을 우습게 만들어버렸다, 그것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음으로써, 쳉은 사무엘이 일어나든 말든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는 태도로 무릎에 얹어두었던 팔을 끌어당겼다. 쳉은 천천히 차를 마시기 시작했고, 사무엘은 기성을 지르며 그런 쳉을 걷어차려 했다. 그러나 사무엘은 곧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게 되었다.
“으아아악!”
사무엘은 정강이를 부여잡고 펄쩍펄쩍 뛰었다. 쳉은 다가오는 사무엘의 발을 찻잔으로 막아냈던 것이다. 철제 찻잔에 부딪힌 데다가 뜨거운 찻물이 끼얹어졌다. 사무엘을 그 지경에 빠뜨려 놓고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쳉은 재빨리 니크와 가이버를 바라보았다. 니크와 가이버 모두 험악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러자 쳉은 한 손으로는 미를 가리며 다른 손은 장작 쪽으로 가져갔다. 그때 궤헤른이 외쳤다.
“모두 앉아!”
“파를 죽여야 해!”
궤헤른의 고함 소리에 기겁한 후작이 다시 비명처럼 외쳤다. 가이버는 싸울 맘이 없어져 버렸고 니크는 처량한 표정으로 후작을 바라보았다. 궤헤른 역시 일그러진 얼굴로 할슈타일 후작을 바라보다가 사무엘에게 고개를 돌렸다.
“적당히 하고 앉아라.”
“헤른! 이 자식이……….”
“앉으라니까.”
사무엘은 참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궤헤른과 쳉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갑자기 저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궤헤른은 그런 사무엘의 등을 잠깐 바라보다 가쳉에게 말했다.
“당신과 함께 다니지는 못하겠군.”
“피차일반이군요. 그런데, 당신네들은 어쩔 생각이신지?”
“왜 그걸 묻지요?”
“후작이 계속 반복하는 말 때문에. 당신들은 후작의 부하잖습니까. 파를 쫓아가 그녀를 죽일 겁니까?”
“……………우리는 일단 좋은 의사나, 좋은 수도원 같은 곳을 찾아볼 생각이오. 후작님께서는 정양할 필요가 있으니까. 솔직히 나로선 많은 것이 혼란스럽 고, 파와 콜리의 프리스트들을 추적해서 그들을 붙잡고 이것이 모두 어떻게 된 일인지 묻고 싶은 생각도 많소.”
“그, 그건 절대 바, 받아들이지 않겠다. 궤헤른.”
궤헤른과 쳉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할슈타일 후작은 모포를 머리 위까지 끌어올린 채 궤헤른을 쏘아보고 있었다. 궤헤른은 의아쩍은 표정으로 일 어나려 했다. 그러나 후작은 잔뜩 억눌린 목소리로 외쳤다.
“거, 거기 앉아 있어! 다가오지 마!”
반쯤 일어나던 궤헤른은 다시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후작님…………, 아무 짓도 하지 않습니다. 안심하시고 말씀하십시오.”
후작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쳉과 궤헤른, 그리고 가이버와 니크를 흘끔흘끔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서 조금씩 말이 새어나왔다.
“우, 우리는 파를, 파를 따라가야 한다. 그리고, 그리고 그녀를 죽여야 한다. 아, 아니, 그녀가 아니다. 신스라이프를 죽여야 한다.”
쳉의 눈살이 조금 찌푸려졌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쳉의 눈치를 살피던 궤헤른은 되도록 부드럽게 말하려 애쓰면서 후작에게 말했다. “왜 그래야 되는지 설명해 주십시오.”
“며, 멸망은 완성의 귀결이기 때문이다. 끝나지, 끝나지 않은 것은, 와, 완성되지 않는다. 끝이 없는 노래는 미, 미완성이다. 끄, 끝맺음이 없는 이야 기는 미완성이다. 죽음이 없는, 없는 인생은 미완성이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얼간아! 그래야 내가 죽을 수 있단 말이다!”
궤헤른은 거의 움직일 뻔했다. 주먹을 꽉 쥐어 자신을 억누른 궤헤른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후작님이 돌아가신다고요?”
“그래, 그래!”
“후작님께서는………, 신스라이프 때문에 부활하신 것입니까? 그래서 신스라이프가 죽어야 후작님도 돌아가신다는 겁니까?”
“아냐.”
궤헤른은 어리둥절해져 버렸다.
“아니라니요?”
그러나 후작은 궤헤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후작은 모포 속으로 더욱 움츠러들 뿐이었다. 궤헤른은 답답했지만 후작을 재촉하지는 않았다. 잠 시 후 후작은 입을 열었다. 하지만 궤헤른을 향한 것은 아니었다.
“퓨, 퓨처 워커.”
남자들의 눈이 모두 미에게 쏠렸다. 아달탄의 목을 쓸어내리고 있던 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미를 부르셨나요.”
“너는, 너는 알고 있겠지.”
“무엇을……?”
“네가 해, 했던 말, 이젠 이해해. 너의 행동, 이젠 이해해. 네가 설명해 줘. 말해 줘.”
미는 고개를 조금 갸웃한 채 후작을 바라보았다. 헐떡거리던 후작은 입술을 핥고 나서 말했다.
“무, 무엇을 못 견디지. 사람은 무엇을 못 견디지.”
·심심한 것을 견딜 수 없죠.”
뭔가 대단한 답변을 기대하고 있던 사람들은 황당함을 느꼈다. 다만 쳉은 그런 기대를 가진 사람이 아니었고, 그래서 그저 물끄러미 미의 얼굴을 바 라보았다. 후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심심한 것, 지루한 것, 그, 그건 뭐지.”
“변화가 없는 것이죠.”
“너, 너는 어떻게 미래를 알 수 있지.”
미는 잠시 대답을 멈춘 채 후작을 바라보았다. 후작은 몇 번이나 다시 말을 하려 애쓰다가 그냥 입을 다물고는 간절한 눈으로 미를 바라보았다. 미는 조용히 대답했다.
“과거가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제길! 좋아……. 시간은, 시간은 누가 만들지.”
“유피넬과 헬카네스.”
“유, 유피넬과 헬카네스 양자의 관심을 받는 것은 누구지.”
“인간.”
“왜지. 왜 그렇지.”
“인간이 시간을 만들어내니까.”
궤헤른의 턱이 홱 돌았다. 궤헤른은 먼저 미를 보았다가, 다시 후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얼굴은 또다시 빠르게 미에게 되돌아왔다. 후작은 이 제 거의 더듬지 않았다. 반면 미는 점점 더 표정과 음색을 잃어갔다.
“너는 어떻게 미래를 알 수 있지.”
“내가 미래를 만드니까.”
쳉의 눈썹이 급격하게 꿈틀거렸다. ‘내가’라고? 미는 그런 말을 쓰지 않는다. 후작은 이제 거의 원래의 날카로움을 되찾은 음색으로 말했다.
“창조하는 자는 당연히 창조되기 전부터 그것이 무엇이 될지 알아야겠지. 너는 미래를 만드니까 미래를 안다. 미래를 알기에 미래를 만들 수 있다. 설계도가 있어야 만드는 것처럼.”
“예.”
“파가 네게서 뺏어간 것은 뭐지.”
“미래.”
“그래서 너는 미래를 볼 수 없지. 뺏겼으니까.”
“예.”
“미래를 모르므로, 너는 이제 미래를 만들 수 없지.”
“예.”
“너는 누구지.”
“나는 인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