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 워커 4권 – 8장 시간의 장인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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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닥불 속에서 반쯤 타오르던 나뭇가지가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궤헤른은 그 소리에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할슈타일 후작은 모포 속에서 덜덜 떨고 있었다. 그리고 미는 쳉의 어깨에 기댄 채 졸린 표정으로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는 쳉의 팔을 끌어안으며 젖은 음성으로 말했다. “으음……, 쳉. 미는 졸려. 그런데 미 이상한 기분이 들어.”
쳉의 눈에 당혹이 떠올랐다. 쳉은 고개를 돌려 궤헤른을 바라보았고, 두 사람의 눈길이 잠시 허공에서 마주쳤다.
‘당신도 본 거요?”
‘그렇소.’
‘그럼, 그건 꿈이 아닙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쳉은 궤헤른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러고는 평상시와 다를 바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피곤해서 그래. 턴빌에서 빠져나올 때 너무 힘들었으니까.”
“음. 그게 아니고 미 꼭 뭔가………….., 꿈 같은 걸 꾼 것 같아. 이상해. 술에 취하면 이런 기분일까? 흐음.”
“그만 쉬어.”
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쳉의 무릎 위에 머리를 척 얹었다. 가이버와 니크, 사무엘 등이 바라보고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거기다가 미는 아달탄을 끌어당기며 중얼거렸다.
“아달탄, 미 이불.”
아달탄은 왈왈거리는 대신 미 옆에 길게 드러누웠다. 미는 눈을 감은 채 방긋 웃고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쳉은 그런 미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가 미의 숨소리가 한층 가지런해지자 겨우 고개를 들어 궤헤른을 바라보았다.
궤헤른은 후작을 쳐다보고 있었다. 후작 역시 어느새 온몸에 모포를 둘둘 감은 채 쓰러져 있었다. 몸을 있는 대로 웅크린, 참 보기 안쓰러운 모습이 었다. 하지만 궤헤른은 후작을 방해하지 않기로 마음먹고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그는 쳉을 바라보았다.
목소리가 자연히 낮아졌다.
“이봐요, 쳉. 분명히 봤소. 그렇죠?”
“그렇습니다. 그 대화, 전부 기억합니다.”
“그럼 무슨 뜻인지도 알겠소?”
“아니오.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나도 그렇소. 이거야 원. 이봐, 가이버, 니크, 자네들도 다 보고 들었나?”
긍정을 뜻하는 대답이 두 사람에게서 돌아왔다. 궤헤른은 이맛살을 심하게 찌푸린 채 모닥불을 응시했다. 잠시 후 궤헤른은 힘들게 말했다.
“나는 뭔가 불가지(不可知)에 속하는 것을 본 것 같소. 잘못 본 것은 아니군. 다른 사람들도 모두 보았으니. 여기에는 짐작할 수 없는 어떤 힘의 개입 이 있는 것 같고, 그런 것에 대해 설명이나 해석을 붙이기는 꺼려지는데.”
“그래요. 그런데……………
“뭐요, 쳉?”
쳉은 잠시 자신의 무릎 위에 누워 있는 미를 내려다보았다.
“미가 인간이라면, 후작은 인간이 아닌 것일까요.”
“무슨 말이오?”
“죽었다가 살아났습니다, 당신의 후작은.”
“그, 그렇소.”
“인간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그럼, 인간이 아니면 뭐란 말이오!”
“한 가지는 짐작이 됩니다.”
“그게 뭐요?”
“당신의 후작님은 죽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요.”
“그리고 나는 조금 전 당신의 후작이 인간이 아니라고 말했죠. 그렇다면, 혹시 후작이 죽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이 되고 싶어 하는 것 아닐까요?”
궤헤른은 한방 맞은 표정으로 쳉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쳉의 얼굴에는 언제나와 똑같은 무표정함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멸망은 완성의 귀결. 완성되려면 끝이 나야 한다는 말인 것 같은데, 그럼 당신의 후작은 인간으로 완성되기 위해 부활을 거부하고 끝장나기를 바라 는 것 아닌가 생각됩니다만.”
치터리는 물끄러미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옆에 서 있던 육전 대원이 헛기침을 했다.
“그럼, 우리는 쫓겨난 셈이군요, 프리스트님.”
“그렇군요.”
“그가 어디로 갈 생각인지 아십니까?”
“짐작합니다만.”
육전 대원은 잠시 기다렸다. 파도는 부두에 부딪혀 물방울을 튀겨 올리고 해원을 가로지르는 갈매기들은 기이한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북부의 항구 에 선 남국의 프리스트는 고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신을 찾아가고 있을 겁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운차이 발탄………., 그를 찾아가고 있겠지요.”
육전 대원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다른 두 명의 육전 대원들은 호기심으로 그들 일행을 바라보고 있는 일스 사람들의 무례한 시선들을 일일이 되쏘아 주고 있었다. 일스 사람들은 조 금 놀랐고 심지어 불쾌감마저 느꼈지만, 수많은 이방인들과 먼 곳의 물품들이 오가는 이곳 항구에서 조금 낯선 모습의 방랑자 네 명에 대해 오랫동안 신경을 쓸 사람은 별로 없었다.
치터리는 말했다.
“슬픈 그림자는 햇빛 아래 설 수 없겠지요.”
항구 특유의 소란스러움이 아스라하게 멀어지고 있었다. 입항하는 배는 별로 없었다. 썰물이 빠져나가는 시간인지라 출항하는 배들만 있었다. 남부 인들에게는 좀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치터리는 몸을 조금 움츠리며 말했다.
“슬픈 그림자는 가문의 이름을 계승할 수 없겠지요.”
“예. 그는 외로운 사내입니다. 육지에는 그의 자리가 없습니다.”
“용력은 이제리스 해협의 군주를 무릎 꿇리고 담력은 블루 드래곤을 맞상대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주지 않은 것은 가질 수 없는…………. 우리는 그 를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요.”
육전 대원은 잠시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수평선 위로 붉게 솟아오른 배를 바라보았다. 일스의 뱃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지게 만들었던 붉은 서펀트의 문양이 멀리 수평선을 넘어가고 있었다.
육전 대원은 낮게 말했다.
“어쩌면, 그래서 그는 행복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슨 뜻인지?”
“거리낌 없이 바다로 떠나갈 수 있으니까요.”
치터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육전 대원은 허리에 두 손을 얹은 채 멀어져가는 레드 서펀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가질 수 없는 이름은 버리고, 가질 수 있는 이름조차 버리고……………. 자유롭지 않습니까. 어쩌면 그는 발탄 가문이 살해된 것에 대해 분노한 것이 아닐 지도 모릅니다.”
“그럼 무엇 때문에?”
“그를 얽어매는 사슬이 생겨났다는 데 분노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슬이라……”
“운차이가 없어지면, 발탄은 그가 이어야 합니다. 육지에 그의 자리가 생겨나는 것이지요. 그의 아버지와도 만나야 하며 그를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 보는 사람들과도 만나야 합니다. 그 모든 것들에 앞서, 그는 자신의 집과 부모를 떠나와야 되겠지요. 바다라 불리는 자신의 집에서, 그림 오세니아라 불리는 그의 아버지로부터.”
치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육전 대원은 싱긋 웃었다.
“투정일까요?”
치터리 역시 웃어버렸다.
“정확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그는 어린 아이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바다의 아이. 그러나 부럽군요.”
“어떤 이는 저렇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안 것으로 나는 만족합니다.”
“예. 저도 저렇게 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이니까요.”
일스의 아름다운 항구 도시 델하파를 떠나오며 신차이는 마지막으로 항구를 돌아보았다. 일스는 자이펀과 바이서스의 전쟁에서 중립을 지키고 있는 만큼, 육전 대원들과 치터리는 저곳에서 머물다가 적당한 자이펀 행 배를 잡아타거나 자이펀 상단과 함께하여 남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시도는 투덜거리고 있었다. 이 항해의 목적이 점점 이상해지고 있다거나, 보상이 없는 항해로 끝나고 말 것 같다는 우려 때문은 아니었다. 일스의 주점에서 난동을 부릴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는 것이 이시도의 짜증의 주된 원인이었다.
“일스의 검객과 겨뤄봤다면, 사이록의 수평선의 완성에 많은 도움이 되었을 텐데.”
“우우우우!”
레드 서펀트의 선원들은 폭풍 같은 야유를 퍼부으며 이시도를 돛대에 매달고 싶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고, 그래서 열흘쯤 투덜거리려고 작정하고 있 던 이시도는 반나절 정도만 투덜거렸다. 한 손으로 돛줄을 쥔 채 델하파를 바라보던 신차이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내 아우와 만나거든 그와 겨뤄보게. 발탄에 전수되는 모든 검법을 대강 익힌 자일세.”
“음? 잠깐만요, 선장님. 그거 소개의 말로는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발탄에 전수되는 모든 검법을 극한까지 수련한 무사일세.’라고 말씀하셔야 되 는 거 아닙니까?”
“사실이 그러니 어쩔 수 없는데. 발탄 가문은 호구지책을 생각할 정도로 몰락했는걸. 운차이도 어린 시절부터 유목민과 대상들을 따라다니느라 대 강 익히는 정도로 만족해야 했어.”
“흐음. 풋내기를 상대로 목검을 휘두르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그렇지. 적어도 이시도 군 자네라면 육전 대원을 상대로 한다든가….”
주위의 선원들 사이에서 발랄한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이시도의 팍 구겨진 얼굴을 보며 신차이 역시 싱긋 웃었다.
“하하하. 그래도 만족할 걸세. 이보게, 이시도, 그래도 발탄이란 말이야. 운차이와의 만남은 자네에게 몇 번의 주점 난동보다 더 도움이 될 거라고 약속할 수 있네.”
“선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한시라도 빨리 만나보고 싶군요. 하지만 항해 목적은 뭐로 합니까?”
“항해 목적? 이런, 이시도 군. 자유 무역선이 좋은 이유가 뭔가. 아무거나 사면 되지. 헤게모니아에서는 양모나 모피가 괜찮지. 신용장 받아둔 게 몇 장 있기는 하지만 헤게모니아에서 통과될지 모르겠군. 뭐, 필요하면 수단은 언제든지 있는 법. 그래, 일단은 헤게모니아 상로 개척 정도로 해두세 나…………. 외해로 나왔군. 조타수! 진로 북서북. 돛을 펼쳐라! 탄느완까지 신나게 달려보자.”
평소보다 훨씬 쾌활한 선장을 보며 이시도 역시 쾌활해졌다. 그리고 주위의 다른 선원들도 신나게 제 위치로 달려갔다. 레드 서펀트는 자유 무역선 이고, 정박한 항구에 상품이 없다면 신상품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일스의 앞바다로 나온 레드 서펀트는 북대양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차이와 이시도는 장기판을 펼쳤다.
“저번의 그 수를 여러 번 연구했네. 이제는 안 당해.”
“같은 수를 두 번 쓰지는 않습니다. 선장님. 뭐, 두 번 써도 무방할 거라고 생각되긴 합니다만.”
“큰코다칠 거야. 자네의 패배를 위한 승부를 시작하세.”
두 사람은 짐짓 무시무시한 얼굴로 전투 의욕에 넘치는 대화를 주고받으며 장기에 임했다.
하지만 5분도 있지 않아, 두 사람은 의자에 늘어진 채 느긋하게 하늘을 보고 구름을 보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생각날 때마다 한 번씩 장기말을 움 직이기는 했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술잔을 들여다보거나 빈 파이프를 채우는 일에 사용했다. 가끔 한 사람이 두 수를 두는 일도 발생했지만, 그것을 알아보게 되면 말없이 한 수를 물리곤 했다.
두 사람 모두 상대를 재촉하지 않았고 자신도 재촉하지 않았다. 더듬더듬 주고받던 대화의 말미에서 이시도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저는 배를 탄 지 한 12년 되어갑니다.”
“그런가. 나는 20여 년 되는군.”
“신기합니다. 배 위에서는 정말 시간이 잘 가는 것 같지 않습니까? 벌써 황혼입니다.”
“뭔가를 하고 싶어 할 필요가 없으니까.”
“예?”
신차이는 다시 파이프를 채우고는 바닷바람으로부터 파이프를 보호하며 주의 깊게 불을 붙였다. 바다 사나이의 투박하고 거친 손이 이때만은 한없 이 섬세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주위에는 그런 섬세함을 감상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신차이는 파이프를 피워 물며 말했다.
“어떤 야심만만한 육상의 모험가가 세상의 끝까지 걷겠다는 서원을 세운다면, 그는 평생을 바쳐도 그 맹세를 완수할 수 있을지 알 수조차 없을 걸 세. 하지만 자네가 이물에서 고물까지 걷겠다는 서원을 세우면, 자네는 1분 안에 그 맹세를 지킬 수 있을 걸세. 달린다면 그보다 훨씬 적은 시간으로 도 가능하겠지.”
이시도는 빙긋 웃었다.
“우습잖은가? 바다는 육지보다 더 넓어. 하지만 우리는 그런 맹세를 하고 지킬 수도 있지.”
“배잖습니까? 바다가 아니라.”
“바로 그렇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자유로운 이유고. 우리는 배에 갇혀 있지만 자유롭네.”
“잘 모르겠습니다.”
“다시 육지의 모험가를 보세. 그는 땅에 갇혀 있네. 동의해 주게. 우리가 배에 갇혀 있는 것처럼, 그는 세상에 갇혀 있네. 하지만 그는 그를 가두고 있는 세상만 보네. 우리는 우리를 가두고 있는 세상 너머도 볼 수 있지 않은가.”
신차이는 장기판을 흘끔 쳐다봤지만, 자신이 둘 차례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파이프를 들어올려 먼 수평선을 가리켜 보였다.
“보게. 눈만 돌리면 볼 수 있네. 이 배를 작은 육지라고 생각하게. 실제로 배는 하나의 우주니까. 우리는 이 우주를 벗어나면 죽게 되지. 바다에 빠져 죽는 거야. 그런 점에서 육지의 모험가와 마찬가지지. 육지의 모험가 역시 자신의 우주를 벗어날 도리가 없지.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세계 를 눈으로 볼 수 있네. 육지의 모험가는 꿈에도 볼 수 없는 것, 자신이 속한 세계를 뛰어넘는 무엇을 자연스럽게 볼 수 있다네.”
신차이는 다시 파이프를 입으로 가져왔다. 담배 연기가 바람에 흩어졌다.
“이것은 육지의 모험가가 꿈꾸는 또 다른 세계들, 즉 하늘나라, 천국, 지옥도 괜찮군. 또는 초차원, 이계, 이상향………., 이렇게 그들은 보지도 못하면 서 상상만 하는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르지. 우리는 볼 수 있네. 만질 수도 있고, 빠질 수도 있지.”
“하하하. 알 듯 모를 듯합니다. 그러니까, 땅개들도 우리들도 갇혀 있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땅개들의 감옥에는 창문이 없고, 우리들의 감옥에는 사 방이 모두 창문이라는 말씀입니까? 그래서 땅개들은 창문 밖의 세상을 상상할 수밖에 없지만, 우리들은 눈만 뜨면 볼 수 있다?”
“그렇네.”
“그런데 말씀하신 것들이 시간이 잘 가는 것과 무슨 상관입니까?”
신차이는 팔짱을 꼈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드래곤’을 움직여야 될 것 같은데. 하지만 저 ‘구름’이 날아들어와 ‘달’을 가리면 드래곤의 움직임이 상당 히 제한될 테니…………, ‘바람’을 먼저 보내는 편이 나을까.
하지만 그건 너무 빤한 수. 어떻게 한다.
“우리는 우리 세계의 시간을 나눌 필요를 적게 느끼지.”
“예?”
“예로써 설명하지. 모하메드는 조각을 좋아하지. 직접 손을 놀리는 것도 좋아하고 감상하는 것도 좋아하지. 하지만 모하메드가 카레한 탑 3층, ‘인 간의 층’에 있다면…………? 그는 조각을 할까, 감상을 할까.”
이시도는 잠시 인간의 층에 있는 그 무수한 조각상들을 떠올렸다.
“감상하겠지요?”
“그렇겠지.”
“그런데요?”
“우리는, 육지의 형제들처럼 그들이 속한 세계에는 존재하지도 않은 의미를 만들어내기 위해 무수한 사고(事故)와 사고(思考)를 벌이는 짓을 답습할 필요가 없단 말일세. 장군일세.”
이시도는 신음을 토하지도, 한숨을 내쉬지도,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다. 다만 손으론 그의 ‘별’을 움직이며 눈으론 돛대 꼭대기를 올려다보았다. “예. 그들은 의미가 있다고, 게다가 주의 깊게 찾으면 찾을 수도 있다고 믿고 있긴 하지요. 천치 같아 보이기는 하지만. 하지만 그것과 시간이 잘 가 는 것과의 관계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장군입니다.”
신차이는 신음을 토하고, 한숨을 내쉬고, 억눌린 비명을 질렀다.
“우으윽!”
이시도의 ‘태양’을 겨냥하여 장기판을 멋지게 가로지른 신차이의 드래곤은 어디선가 날아온 이시도의 별에 맞아 죽었다. 더군다나 이시도의 별은 드 래곤이 막고 있던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신차이의 태양을 압박하게 되었다. 신차이는 굴욕적인 퇴각을 시도했으나 옆으로 물러난 태양은 이시도의 바 람과 마주치게 되었다.
“낭패로군. 우리는 있지도 않은 의미를 위해 시간의 길을 계속 찾아 헤맬 필요가 없다는 말일세. 달을 내줘야 하나.”
“시간의 길을 헤맨다라…………”
“길은, 그 위를 걷는 자에게만 길게 느껴지네. 길 위를 걷지 않는 사람에게 그것은 아무 데도 가지 않는, 항상 그곳에 있는 땅의 한 모습일 뿐이지.”
“그런가요. 장군입니다. 저녁 식사가 준비된 모양인데요.”
신차이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을 느끼며 장기판을 쏘아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나타난 것인지 모르지만, 장기판 한구석에서 느닷없이 중앙으 로 진출한 이시도의 ‘마법사’가 잔인하게 웃으며 신차이의 태양을 향해 지팡이를 내밀고 있었다.
“이건 믿을 수 없어! 어떻게 마법사가 이렇게 빠르게…”
“마법사가 믿을 수 있는 일을 한다고 생각하셨습니까? 하하하.”
“마법사란 믿을 수가 없어.”
거인은 점잖게 말했고 운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믿을 수 없지.”
그러나 거인이 말하는 마법사와 운차이가 말하는 마법사는 서로 다른 사람이었다. 거인은 아프나이델을 향해 말하고 있었지만 험악한 소갈머리의 소유자 운차이는 거인의 말에 동조하는 척하며 어느 샌가 사라져버린 레이저에 대해 빈정거리고 있었다. 네리아만이 까르륵 웃었을 뿐 다른 사람들 은 모두 운차이를 향해 혀를 차 보였다. 아프나이델 역시 등 뒤에서 중얼거리는 운차이를 무시하며 다시 한번 거인을 향해 외쳤다.
“믿어야 됩니다! 당신은 정말 죽은 거란 말입니다. 부활한 거라고요. 생각해 보세요. 당신의 눈, 그리고 오른쪽 다리. 누가 그랬습니까?”
거인은 앉은 자리에서 주먹을 들어 성벽을 후려쳤다. 꽈과광! 성벽이 박살나며 거대한 돌과 흙더미가 아래로 무너져내렸지만 다행히도 인명 피해는 없었다. 턴빌 경비 대원들은 일행들이 거인을 붙잡아 놓는 동안 시민들을 모두 안전하게 대피시킨 후였다. 거인은 우레 같은 목소리로 고함질렀다. “몰라서 묻느냐!”
아프나이델은 호흡을 여러 번 들이킨 다음에 말했다.
“그, 그럼 기억하시죠? 당신이…………, 예? 기억하시지 않습니까?”
거인은 멍한 얼굴이 되었다. 하나밖에 없는 거인의 눈은 일행을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실제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초점은 전혀 맞지 않았다.
턴빌 경비 대원들과 데커드 시장은 일행들의 등 뒤 멀찌감치에서 각자의 무기를 쥔 채 침을 꿀꺽꿀꺽 삼키며 아프나이델과 거인의 대화를 듣고 있었 다. 하지만 그들 중 그 누구도 표면상의 대책, 즉 일행들의 교섭이 원만하게 진행되지 못할 경우 거인을 매우 아프게 만들어준다는 대책을 심도 있게 고려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리고 일행들도 그들이 유사시엔 무조건 달아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범람하는 기억의 파도 속에서 표류하던 거인이 불확실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뭐…………, 나는 쓰러졌고…………, 음. 하지만 다시 일어났을 때 놈들이 없었다. 기절했던 것일까?”
“기절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죽었던 거란 말입니다.”
거인은 자신의 가슴을 꽝꽝 때렸다.
“이놈! 아무리 거인이라도 죽은 자가 이렇게 움직일 수 있단 말이냐! 그럼 나는 뭐냐!”
“당신은 어떤 인간의 이상한 마법의 부작용으로 깨어난 것입니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게 생각됩니다.”
“마법? 마법이라고?”
거인은 다시 멍한 표정으로 아프나이델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거인의 혼란은 길지 않았다.
“어쨌건 나는 지금 살아 있다. 그리고 살아 있는 나는 루트에리노를 응징하리라!”
아프나이델은 욕설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말했다.
“뭐, 이해는 합니다만 불가능한 소망이십니다. 대왕은 벌써 300년 전에 돌아가셨으니까요.”
“뭐야?”
“믿어주십시오. 당신은 죽었습니다. 그리고 3세기 만에 다시 부활하신 거란 말입니다.”
“그런 어처구니없는 말을 어떻게 믿으란 말이냐?”
그때 제레인트가 앞으로 나섰다. 제레인트는 거인이 자신을 잘 볼 수 있도록 두 팔을 활짝 펼치고 말했다.
“거인이시여. 저는 테페리의 프리스트입니다. 마법사는 거짓을 말하며 환상을 보여줄 수 있을지도 모르나 테페리의 지팡이인 저는 그럴 수 없습니 다. 제가 맹세하면 안 될까요?”
거인은 팔짱을 꼈다. 잠시 후 돌아온 거인의 대답은 제레인트를 놀래게 만들었다.
“믿을 수 없다. 신이 나를 속이려 든다면 너는 그 속임수의 도구가 될 것이다.”
제레인트는 말문이 막힌다는 표정으로 거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입에서 부지불식간에 말들이 흘러나왔다.
“저거…………, 거인 맞나?”
“엘프는 어떻습니까.”
이루릴의 음악적인 목소리가 들려오자 모든 사람들은 상쾌한 기분을 느꼈다. 거인도 조금 누그러진 얼굴로 이루릴을 내려다보았다.
“유피넬의 어린 자식이 맹세하겠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거인이시여.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이신 거인께서 그리도 의심하시는 것이 믿어지지 않습니다만.”
엑셀핸드는 잠시 고개를 돌려 무너진 성벽과 폐허가 되다시피 한 건물들, 거인의 발자국으로 엉망이 된 대로 등을 훑어보았다.
“온화하다고?”
그러나 이루릴은 조용히 웃었다.
“거인께서는 이미 여러 번에 걸쳐 많은 이들에게 속임을 당하셨습니다. 하지만 저희들이 말을 걸자 또다시 신뢰를 가지고 귀를 열어주시는군요. 거 인께서 열린 마음을 가지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거인은 이제 얼굴 전체로 웃었고 그 얼굴을 바라보던 모든 이들 역시 웃을 수 있게 되었다.
한 사람만 빼고. 운차이는 싸늘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건 열린 마음이 아니라 멍청하다고 하는 거지.”
발끈한 네리아는 창대로 운차이의 엉덩이를 후려쳤고 운차이는 네리아를 향해 눈을 부라렸지만 네리아는 딴청을 피웠다.
“당신의 머리가 아니라 당신의 가슴에 질문하겠습니다. 제 말을 믿어주실 수 있습니까?”
“…………저 마법사의 말이 진실이라고 말할 건가?”
“그렇습니다.”
“믿을 수밖에 없군. 그렇다면 루트에리노는 존재하지 않는 거냐?”
이루릴은 아프나이델을 돌아보았고 아프나이델은 황급히 말했다.
“예. 그렇습니다.”
“복수를 포기해야 된다는 말이군・・・・・・ 그놈의 자손은 어디 있느냐!”
안심하고 있던 에델린은 기겁한 나머지 입술을 깨물었고, 그녀의 우람한 송곳니는 입술을 거의 관통할 뻔했다. 루트에리노 대왕의 자손이면 바이서 스의 왕가다. 만일 거인이 그 사실을 안다면 바이서스는 고대 왕국 어쩌고 하는 이름으로 불리게 될지도 모른다.
아프나이델은 이루릴이 대답하기에 앞서 먼저 말해야 된다는 강박 관념 때문에 이상한 어투로 외치고 말았다.
“그놈의 자손 말입니까?”
거인마저도 황당한 표정으로 아프나이델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실수를 깨닫지 못하고 눈을 희번덕거리는 아프나이델을 향해 거인은 얼떨떨하게 질문했다.
“그・・・・・・렇다.”
“저, 대왕의 자손을 어쩌시려는 겁니까?”
“복수다.”
“왜, 왜입니까? 그들은 루트에리노가 아닙니다. 루트에리노 대왕에 대해서 복수하겠다면, 저는 찬성하지는 않겠지만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 죄도 없는 자손들에게 왜……………”
“이노옴! 닥쳐라!”
거인은 고함을 내지르며 땅을 꽝 내리쳤다. 아프나이델은 귀를 틀어막으며 무릎을 꿇었고 조금 떨어져 있던 다른 이들도 충격음과 땅의 울림 때문에 비틀거렸다.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올려다보는 아프나이델을 향해, 거인은 추상같은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어떻게 너희놈들이 그렇게 말한단 말이더냐! 너희 인간들이!”
“예?”
“어떻게 인간이 자손에게 죄 없다 말할 수 있느냐! 거인도 아니고, 드래곤도 아니고, 엘프도 아니고, 드워프도 아닌 너희 인간들이!”
제레인트는 황당한 표정으로 거인을 올려다보았다.
“저, 무슨 말씀입니까? 저희 인간들은 선조의 죄가 자손에게도 이어진다는 말씀입니까?”
“당연하지! 간악한 놈들. 이로운 것만 이어받고 해로운 것은 나 몰라라 하겠다는 거냐? 너희들은 선조의 모든 것을 이어받으면서 죄만은 이어받지 않겠다는 거냐? 멍청한 주제에 욕심만 사나운 종족 같으니. 뭐라고? 죄 없는 자손? 너희들이 선조의 죄를 상속받기를 거부한다면, 선조가 남긴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그와 같아야 하지 않느냐!”
“다른…………… 것들……”
“네놈들의 선조가 찾아낸 알량한 지식! 지혜! 깎아낸 산과 개간된 들판! 너희들의 배를 불려줄 그런 것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받으면서, 선조의 죄는 책임지지 않겠다는 거냐!”
거인이 땅을 내리치자마자 운차이의 등 뒤로 숨었던 네리아는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상당히 말이 되는 것 같다………….”
그녀의 속삭임은 운차이의 귀에만 들어왔다. 운차이는 입매를 일그러뜨리며 거인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머릿속에서는 어머니의 허물을 이어받은 그의 사촌 형을 떠올리고 있었다. 우리는 이미 저 거인의 말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그래서 신차이는 죄가 함께하는 라이브스의 이름을 상속받기를 거부함과 동시에 그를 보호할 발탄의 이름에 대한 상속까지도 포기하고 바다로 떠났던 것일까?
제레인트는 중얼거렸다.
“그렇지 않아.”
거인은 제레인트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제레인트는 거인이 아닌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일행들은 제레인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았다. 무너진 벽들과 아직껏 군데군데 피어오르는 연기 사이로 두 개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운차이는 눈을 가늘게 떴다가 다시 크게 떴다. 크고 작은 두 사 람의 그림자. 네리아는 거인의 눈치를 살피며 그란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란. 어서 와요.”
일행과 잠시 헤어져 숨겨두었던 사람을 데리러 갔던 그란은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솔직함에 의지하여 말하자면, 그곳으로의 이동은 고려하기 싫군. 넌 어때?”
“마, 마찬가지예요.”
그란 하슬러의 왼쪽 조금 뒤에서 걷고 있던 돌맨 할슈타일은 질린 표정으로 거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거인은 의아쩍은 표정으로 그란과 돌맨을 내 려다보았다. 역시 두 사람을 보고 있던 제레인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선조의 죄와 상관없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프리스트?”
“거인이여, 당신이 저 광경에서 무엇을 느낄 수 있기를. 저 남자는 저 소년의 양부와 피로 피를 씻기를 바라는 원수지간이지요. 저 소년의 아버지는 저 남자에게 못할 짓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저 남자는 저 소년을 데리고 왔습니다. 왜 그런지 물어볼까요? 그란. 왜 돌맨을 데려왔죠?”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말해 보세요.”
“……후작의 부재로 인하여 미아가 되었으니까.”
“예. 보호자가 없는 소년을 이렇게 낯선 도시에, 게다가 커다란 재난을 당한 도시에 내버려둘 수 없으니까 데려오신 거죠?”
그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돌맨은 잠시 그란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제레인트는 눈을 감은 채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거인이여. 당신 말대로 선조의 죄는 우리에게 이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우리는 선조의 유산을 취사선택해서 받을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그 때문에 우리는 이미 사라진 선조를 용서하는 대신 그 후손을 용서할 수도 있을 겁니다. 거인이여. 당신은 루트에리노를 용서할 수는 없습 니다. 그는 이미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그러니, 대신 그 후손을 용서하시면 어떻겠습니까?”
“내가 왜 그래야 되나?”
“용서는 가장 큰 복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