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 워커 4권 – 8장 시간의 장인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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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일 산맥 중턱에 있는 아름다운 호수 큐리담에 저녁이 찾아들고 있었다. 마시랜드에 소재한 일흔일곱 개 호수들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기로 유명 한 호수다.
저녁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새들을 노려 그날의 마지막 사냥을 시도하려는지 매 한 마리가 붉은 하늘을 빙빙 돌고 있었다. 매끄럽게 하늘을 활공 하던 매는 이윽고 박새 한 마리를 발견했다. 매는 소리 없이 허공을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아직 자신의 위험을 깨닫지 못한 박새는 여유 있게 날고 있었다. 하지만 많은 새들이 그렇듯이 머리 뒤까지 볼 수 있는 넓은 시계를 가진 박새는 곧 뒤쪽 높은 곳에서 날아드는 매를 발견했다. 급속한 반전 비행. 박새는 본능적으로 아래로 날기 시작했다. 나무 사이로 파고들면 매는 쫓지 못한다. 하 지만 그 치명적인 속도로 매는 이미 지척까지 이르렀다. 박새는 마지막 수단으로 미친 듯이 빙글빙글 날았다. 그때, 매는 발톱을 내밀었다.
순식간에 큐리담 호수 표면에 박새의 깃털이 흩뿌려졌다.
박새는 더 이상 빠르게 날 수 없게 되었고, 매의 두 번째 공격은 공격이라기보다는 사냥감을 집어드는 정도의 움직임이었다. 추락하는 듯한 비행을 하는 박새를 간단히 잡아올린 매는 드라일 산맥 어딘가의 절벽 틈에 있을 보금자리를 향해 일몰의 미명을 가로질러 날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바라보던 눈동자가 있었다. 매가 붉은 석양 속으로 사라져 버리자, 그 눈동자의 주인은 눈을 아래로 내려 땅을 보았다. 호수 주변의 넓은 초원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지만 기이하게도 기침 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간혹 풀을 밟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그때 갑자기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났다. 호수 주변에 앉아 있거나 서 있던 사람들 모두가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돌아보았다.
숲을 헤치며 달려온 기수는 빠른 동작으로 말에서 내렸다. 그는 아무런 소리 없이 곧장 매를 바라보고 있던 사람에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잘 훈련된 말은 제 자리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기수를 한번 본 다음, 지금까지의 고요함을 깨기 싫다는 듯이 조용히 일어나 그를 따라 걸 어왔다.
매를 바라보던 사람은 나무 아래에 털가죽 하나를 깔고서 정좌해 있었다. 재빨리 달려온 기수는 무릎을 꿇으면서 말했다.
“다녀왔습니다, 신스라이프.”
신스라이프, 현재는 작은 처녀의 모습을 하고 있는 남자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수를 따라 걸어온 사람들은 별다른 말없이 기수와 신스라이프 를 중심으로 둥글게 모여 앉았다. 사나이들이 모두 앉자 신스라이프는 여성의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됐지?”
기수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에게는 아직도 상대의 모습을 똑바로 바라볼 배짱이 없었다. 작은 여자의 모습을 하고 부드러운 여성의 목소리로 말하지 만, 그 정체는 66년의 죽음을 뛰어넘은 시체인 것이다. 그래서 기수는 땅을 바라보며 말했다.
“고스빌과 인근 산촌을 다 조사해 보았습니다만 시원찮은 대답뿐입니다. 드라일 산맥은 1년 중 요즘이 가장 불안한 때라고 합니다. 날씨가 언제 어 떻게 바뀔지 모르고 녹기 시작한 눈들이 눈사태를 일으킬 가능성도 크다고 합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드라일 산맥을 넘겠다는 산사나이는 아무도 없 었습니다.”
신스라이프·파는 언짢은 표정으로 기수를 바라보았다.
“물렁한 놈들. 그래, 헤게모니아 최고의 산사나이들을 배출해 왔다는 고스빌에서 저까짓 산봉우리 하나를 넘을 자가 없단 말이더냐.”
몰려 앉아 있던 남자들 중에서 주블킨이 상체를 앞으로 조금 내밀며 말했다.
“신스라이프.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만……”
신스라이프는 고개를 돌려 주블킨을 바라보았다. 주블킨은 여인의 눈 속에서 빛나는 남자의 눈빛에 괴리감을 느끼며 웅얼거렸다.
“꼭 저 산을 넘어야 될 필요가 뭔지요? 북해로 가시겠다면 탄느완으로 가서 배를 타고 가시는 것이 훨씬 안전합니다. 왜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르는 저 산을 넘어야 되는 겁니까. 그렇게도 급한 이유가 뭔지요?”
“내게 설명을 요구하는 거냐?”
“……신스라이프. 저희들은 모두 당신만 믿고 가족도, 고향도, 평생 동안 일궈온 모든 것들도 다 버리고 달려온 자들입니다. 이런 저희들이 최소한의 설명을 요구하는 것이 부당합니까?”
“부당한가 물었나? 대답해 주겠다. 당연히 부당하다. 어처구니없는 요구다.”
주블킨의 얼굴이 굳었다. 다른 사내들의 얼굴도 모두 딱딱하게 바뀌었고 주위의 고요함은 이제 묘한 질량감을 띠게 되었다. 그 묵직한 고요 속에서 신스라이프는 말했다.
“너희들이 평생 동안 일궈온 것이라고 했느냐? 무엄한 놈들. 그 전에 너희들이 무엇 때문에 태어난 건지 생각해 보아라. 너희들은 너희들의 아비들 이 자기 스스로는 바칠 수 없는 봉사를 위탁하기 위해 준비해 둔 자들 아니더냐? 너희 아비들이 나에게 봉사하라고 만들어낸 자들이 너희 아니냐?”
사내들의 얼굴에 이제 증오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전직 의사, 전직 푸줏간 주인, 전직 농부, 전직 대장장이들은 평생의 노 고가 깡그리 무시되는 수모를 가만히 견디고 있었다. 그들의 첫사랑, 그들의 작업의 즐거움, 그들의 결혼식 날의 떠들썩함, 태어나 자라나며, 그들 혼 자서라면 결코 느낄 수 없었을 기쁨과 슬픔을 주던 그들의 자식들……
사내들의 어깨가 힘없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한 사람만은 어깨를 힘껏 들어올리며 외쳤다.
“크, 큰아버님은 여기 이 사람들 덕분에 부활했습니다! 감사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신스라이프는 고개를 홱 돌렸다. 그곳에는 그의 조카 발레드 신스라이프가 얼굴을 떨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턴빌 탈주의 날, 발레드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들을 따라왔다. 어쩌면 그는 신스라이프 유가족의 책임자로 서 의무를 다하기 위해 이들을 따라온 것일 수도 있고, 죽은 아들의 추억에 정신병자가 되다시피 한 늙은 아내로부터 도망친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재산이 줄어드는 것과 비례하여 점점 그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정부의 모습으로부터 도망친 것일 수도 있고.
어쨌든 발레드는 신스라이프와 콜리의 프리스트들을 따라 이곳까지 달려왔고, 지금 분노하고 있었다. 신스라이프는 눈매를 찡그렸다.
“뭐라고?”
“이, 이 사람들은 평생 동안 자신을 희생하며 당신만을 위해 살아왔어요. 나는 모, 몰랐지만 짐작할 수는 있습니다. 이 사람들을 압니다. 같은 도시 에서 태어나고 자라온 사람들이니까요. 이 사람들 중 몇 명과는 오랫동안, 수십 년 동안 친교를 가져왔습니다. 그랬는데도 난 이 사람들이 콜리의 프 리스트일 거라고는 죽어도 짐작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자신을 희생했는지 알 수 있잖습니까! 이들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그래서는 안 됩니 다.”
“걸을 수 있게 해준다는 이유로 신발을 공경하란 말이냐?”
“이 사람들은 다, 당신의 도구가 아닙니다!”
“천만에. 내 도구야. 그것도 시원찮은 도구지. 이 멍청한 놈들 때문에 나는 하마터면 부활하지 못할 뻔했다. 이놈들의 아비들이 살아 있었다면 멍청 한 자식들의 모습에 피를 토할 것이다.”
“우리는 아버지의 소유물이 아니오!”
신스라이프는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 다른 프리스트들도 놀란 눈으로 고함을 지른 프리스트를 바라보았다. 턴빌에서 작은 잡화점을 하고 있던 도 르네이였다. 도르네이는 벌겋게 된 얼굴로 신스라이프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아버지들과 우리는 별개요! 우리는 아버지들의 뜻을 존중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들의 뜻이기 때문에 당신을 부활시킨 것은 아니오. 우 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그 일을 한 거요. 당신은 모릅니다. 제길, 죽었다가 느닷없이 일어난 당신은 우리들의 일생을 모른단 말이오!”
신스라이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도르네이를 쏘아보았다. 도르네이는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당신은 척살당하는 희생자들을 보지 못했소. 우리는 봤소! 몇 년에 한 번씩, 마치 즐거운 잔치나 되는 것처럼 그것을 보러 갔소. 아파서 비명을 지 르는 희생자들의 몸 위로 떨어지는 몽둥이를 보러 갔소. 피가 튀고 살이 뭉그러지고 뼈가 부서지는 모습을 보러 갔단 말이오! 그런 날 저녁이면 우리 들은 방에 틀어박힌 채 울었소. 모여서 서로를 위로해 줄 수도 없었지. 이 빌어먹을 정체가 탄로 날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우리들은 각자의 골방에 틀 어박혀서 혼자 슬퍼해야 했소. 도대체, 도대체 왜 저 사람들이 죽어야 했는지 알 수 없었소! 우리는 오로지 당신만 기다릴 수밖에 없었소. 당신이, 당 신이 설명해 주기를 바랐소. 그래요, 어리석은 책임 회피일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단 말이오!”
도르네이는 숨을 가누기 위해 잠시 말을 멈췄다. 콜리의 프리스트들은 도르네이의 외침을 들으며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의 차가운 슬픔을 느꼈다. 신스라이프는 끝까지 말해 보라는 듯 묵묵히 도르네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당신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설명해 주지 않았소. 아니, 설명까지도 바라지 않소. 한 마디만 해줬어도 되었을 거요. 그것은 의미 있는 일이었다고, 옳은 일이 아닐지 몰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너희들의 슬픔을 이해한다고! 그렇게 한 마디만 해주셨어도 됐을 거요. 어떻게 말하 더라도 그것이 옳은 일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당신은, 아니, 당신이 여덟 명의 목숨을 앗은 것을 인정하고, 여덟 명의 생명만큼이나 고귀하 고 의미 있는 일에 매진할 거라고 맹세해 준다면, 가식에 불과할 뿐이라도 그렇게 말해 준다면!”
매일 의자에 앉아서 돈만 세었기 때문이야. 도르네이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내버려둔 채 어깨로 숨을 쉬며 신스라이프를 바라보았다.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의자에 앉아서 장사만 하던 늙은이에게 이런 강행군이나 이런 연설은 너무 어려운 일이야. 도르네이는 왜소해 보이지 않기 위해 어깨를 펴 려 했지만 그의 어깨는 자꾸 무력하게 움츠러들 뿐이었다.
신스라이프는 헐떡거리는 도르네이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하고 싶은 말은 다 했나?”
도르네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스라이프는 마주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말했다.
“그럼 앉게.”
“대답을 주시오! 그렇잖으면 앉을 수 없소.”
“대답? 아니, 그 전에, 앉지 않겠다면 어쩌겠다는 말이지?”
“떠날 거요.”
“떠난다고?”
도르네이는 로드를 힘주어 짚으며 말했다.
“이미 평생을 탕진했지만, 그래도 새 출발할 시간은 남아 있을지 모릅니다. 자비로운 콜리에게 죄를 빌며 보낼 시간은 오히려 충분할지도 모르지요. 하나뿐인 인생을 이렇게 무의미하게 보낸 것이 참을 수 없이 허무하지만, 자초한 일이니만큼 당신을 원망하지는 않겠소. 이 모든 것이 콜리의 뜻이리 라 믿고 고향의 가족들에게 돌아가겠소.”
신스라이프는 은은한 눈빛으로 도르네이를 바라보았다. 문득, 도르네이는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저런 젊은 처녀가 자신을 이렇게 바라 보는 것이 얼마 만인지 떠올려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적이 있기는 있었나? 도르네이는 확신할 수 없었다. 신스라이프는 조용히 말했다.
“누구 맘대로?”
도르네이는 눈을 커다랗게 뜬 채 신스라이프를 바라보았다. 신스라이프는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는 도르네이를 똑바로 쳐다보며 일어나서는 그대로 걸어왔다. 문득 불안감을 느낀 도르네이는 로드를 두 손으로 쥐며 다가오는 신스라이프를 마주보았다.
신스라이프는 걸으며 말했다.
“돌아가겠다고? 네가? 누가 보내준다고 했나.”
“당신은 나를 강제할 수……”
그 순간 신스라이프의 손이 갑자기 앞으로 뻗어나왔다. 도르네이는 엉겁결에 로드를 들어올려 막으려 했지만, 신스라이프는 바로 그 로드를 노리고 있었기에 도르네이는 자기 손으로 로드를 건네준 꼴이 되었다.
신스라이프의 오른손이 로드를 움켜쥐자 깜짝 놀란 도르네이는 재빨리 로드를 끌어당겼다. 하지만 신스라이프의 오른손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도 르네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뚱뚱한 편인 도르네이가 조그만 처녀에게서 로드를 빼앗으려고 낑낑거리는 모습은 코믹하게까지 보였지만 주위의 아 무도 웃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신스라이프는 도르네이의 얼굴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말했다.
“내가 너를 강제할 수 없다고?”
“이, 이거 놔! 물론, 당신은, 나를 강제할 수 없소! 뭐란 말이오? 당신이 뭔데 나를 강제한단 말이오? 오히려 내, 내가 당신을 강제해야 합당하오!”
“어째서?”
도르네이는 로드를 놓았다. 화급하게 뒤로 물러난 도르네이는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당신은 나에게 아무것도 지불하지 않았으니까! 나는, 내 모든 것을 지불했어. 당신을 부활시키기 위해 내 평생을 지불했어! 당신은 그냥 누워 있다 가 일어났을 뿐이야. 당신은……”
“네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해줬지.”
“뭐요?”
“네가 너의 평생을 무엇인가에 쾌척할 수 있게 해줬지. 내가 너를 만든 셈이야. 네 몸뚱아리는 네 부모가 만들었지만, 너 자신은 내가 만들었다.”
“……난 그것을 원망하오! 당신이 준 것을 저주하오. 당신을 저주하오!”
“뭘 원하나.”
도르네이는 씩씩거리며 신스라이프를 바라보았다. 신스라이프는 들고 있던 로드를 빙글 돌려 땅에 세우며 다시 말했다.
“뭘 원하나.”
“콜리 앞에 떳떳하기를 원하오. 모든 이 앞에 떳떳하기를 원하오. 제길, 나 자신에게 떳떳하길 원하오!”
“언제까지?”
“예?”
“언제까지 떳떳할 수 있으면 좋겠나. 10년이면 되겠나? 아니면 한 달? 사흘쯤 떳떳하면 되겠나? 오늘 저녁까지만 떳떳하면 되겠나?” “무슨 말이오? 떳떳하다는 것은 언제까지나 그렇다는……………”
“웃기지 마.”
도르네이는 울컥하는 표정으로 신스라이프를 쏘아보았다. 신스라이프는 세워들고 있던 로드를 만지작거리며 조용히 말했다.
“내가 죽었을 때, 만일 하루 만에 부활했다면 나는 떳떳했을 것이다. 마음씨 착한 자들은 내 행운을 기뻐해 줬을지도 모르지. 내가 1년 만에 부활했 다면 사람들은 조금 이상한 눈으로 나를 봤을 것이다. 66년 만에 부활한 나는 이제 모든 이들에게서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불경한 늙은이라는 말을 들을 것이다.”
신스라이프의 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는 한 손으로 로드를 들고는 그 무게를 가늠하듯 위아래로 까딱거렸다.
“어떤 원한이 한 사나이로 하여금 원수를 죽이게 만들었을 때, 그 사나이는 그 순간 떳떳하며 스스로에게 자랑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1년쯤 지나면 사나이는 그것이 최선의 길이었는지 의심할 것이다. 수십 년이 지나 원수의 자손이 찾아와서 사나이의 자식을 죽이기라도 한다면, 사나이는 회한을 느낄 것이다. 젊은 날의 혈기 때문에 자식을 잃은 사내는 눈물도 흘리지 못할 것이다.”
도르네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항변하려 했다. 그러나 그때 도르네이는 신스라이프가 쥔 로드의 끝이 어느새 자신의 가슴을 똑바로 겨냥한 채 고정 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갑자기 공포가 다가왔다.
도르네이는 입을 벌린 채 꺽꺽거리며 로드의 끝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신스라이프는 자신이 들고 있는 로드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 처럼 한가롭게 말했다.
“너도 마찬가지다.”
도르네이의 눈은 이제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진 채 충혈되어 있었다. 신스라이프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턴빌 탈주의 그날, 너는 자랑스럽고 떳떳했을 것이다. 하지만 머나먼 이곳까지 고생스럽게 걸어오고 나자 너의 마음속에 들끓던 떳떳함은 차갑게 식었지. 불평하고, 짜증을 내며, 다른 의미를 찾게 되지. 이제 그날의 떳떳함과 그날의 의미는 더 이상 너에게 의미 있게 다가오지 못하니까. 그러나 새로 찾아낸 의미가 있고 그것이 너를 만족시키더라도, 그것은 시간의 흐름 끝에 사그라들 것이라는 점에서 똑같은 것이다.”
신스라이프는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의미는 스스로 붕궤되지 않아. 시간이 의미를 바뀌게 할 뿐이다. 첫사랑의 희열이 결혼 후 권태기의 짜증으로 바뀌는 것은 뭐지? 상대에 대해 더 잘 알았기 때문에? 천만에. 옛날의 의미는 그때의 의미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은 얼마 가지 않아 사라질 운명의 새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 신스라이프의 말 끝에서, 그의 손이 갑자기 움직였다.
사내들 틈에서 비명이 솟아올랐다.
“으아악! 도르네이!”
신스라이프는 도르네이의 가슴을 찔렀고, 갈비뼈가 나뉘어지는 지점을 정확하게 찌른 로드는 놀랍게도 도르네이의 복부를 꿰뚫고 선혈과 함께 등 뒤로 튀어나왔다.
갑작스럽게 당한 재난에 도르네이는 꼬치에 꿰인 고깃덩이처럼 된 채 부르르 떨었다. 그의 손이 로드를 빼내려는 듯이 힘없이 움직였지만 그것은 안 타까운 꿈틀거림으로 끝났다. 도르네이는 손을 들어올려 쳐다보았다. 그의 손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피……”
신스라이프는 로드를 놓았다. 잠시 비틀거리던 도르네이는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웅덩이 속으로 쓰러졌다. 털썩. 핏방울이 튀어올라 신스라이프 의 가슴에 묻었다. 신스라이프는 물끄러미 도르네이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이, 이 무슨 악독한!”
발레드는 비명처럼 외쳤다. 콜리의 프리스트들도 흥분해 일어섰다. 주블킨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주위를 둘러봤지만, 다른 콜리의 프리스트들은 어 느새 각자 무기를 꼬나든 채 신스라이프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선두에서는 발레드가 기성을 지르고 있었다.
“무슨 짓입니까!”
신스라이프는 발레드의 외침에 대답하는 대신 발을 들었다. 그의 발이 도르네이의 등에 올라갔다. 신스라이프는 도르네이를 밟은 채 로드를 움켜쥐 었다.
“우음!”
신스라이프의 입술 사이로 짧은 신음 소리가 나오고, 로드는 위로 쑥 뽑혀 나왔다. 콜리의 프리스트들 중 많은 이가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신스라이 프는 피에 물든 로드를 옆으로 팽개치고 나서야 몸을 돌려 발레드를 마주보았다.
“나를 불렀나?”
“그렇습니다! 이, 이게 무슨 짓이란 말입니까?”
“황혼의 막간극이라고나 할까.”
“뭐요?”
발레드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신스라이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신스라이프는 피식 웃었을 따름이었다. 갑자기 팔짱을 낀 신스라이프는 등 뒤를 향해 말했다.
“일어나게, 도르네이.”
다음 순간, 콜리의 프리스트들은 온몸을 떨며 눈앞에 보이는 광경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도르네이의 몸이 들썩거렸다. 먼저 그의 손이 꿈틀거리고, 갑작스럽게 도르네이는 머리를 들었다. 얼떨떨한 눈으로 주위를 바라보던 도르네이는 갑 자기 얼굴을 찌푸렸다. 지독한 피 냄새가 그를 당황하게 만든 것이다. 잠시 후 자신이 피 웅덩이 속에 코를 박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도르네이는 기 겁해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으아아아! 뭐, 뭐야?”
도르네이는 앉은 채로 뒤로 화다닥 물러났다. 파랗게 질린 얼굴로 자신의 손에 묻은 피와 붉게 물든 몸을 내려다보던 도르네이는 갑자기 전율했다.
“나, 나? 죽었…………..는데?”
도르네이의 질문은 대상이 없었지만, 설령 도르네이가 그의 동료 중 누군가를 지적해서 질문했다 하더라도 대답해 줄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 이다. 사내들은 모두 도르네이와 신스라이프를 번갈아 쳐다보며 절대로 설명될 수 없는 현상에 대한 설명을 찾아내 보려는 안타까운 시도를 쉬지 않 고 있었다. 그런 사내들을 향해, 신스라이프는 나직하게 말했다.
“짐을 챙겨라.”
주블킨이 간신히 대답했다.
“예?”
“고스빌로 가서 쉰다. 내일 탄느완으로 출발하기 위해선 푹 쉬어야 될 테니 서두르도록.”
“탄느완……입니까?”
‘그렇다’라는 대답 없이, 신스라이프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도로 앉았다. 그러고는 가슴 앞에 무릎을 모아 끌어안은 채 어둠이 짙어가는 저녁 하늘 을 바라보았다.
고스빌 초입에 위치하고 있다는 지리적 이점 덕에 손님 확보에 상당히 유리한 파타로 주점이었지만, 그래도 때로는 다른 주점이나 여관처럼 한산할 때가 있었다. 그리고 파타로 주점의 데브는 그런 시간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용하곤 했다.
그가 한가한 시간을 이용하는 방법은 몹시 위험한 방법이었다. 그것은 원칙적으로 수학적 확률론에 대한 심오한 도전이자 심리학적인 파탄 상태에 이르는 치명적인 수단이었다(때론 주머니도 파탄난다). 그래서 파타로 주점의 홀로 들어서던 파타로는 시니컬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놈아. 그렇게 신바람 내며 테이블을 닦는 이유가 뭔지 짐작이 간다.”
“예?”
“후다닥 청소하고 나서 도박장으로 달려갈 생각이지?”
데브는 싱긋 웃으며 파타로의 말을 못 들은 척했다. 하지만 파타로는 그런 데브를 향해 여전히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예?”
“손님들이 닥쳤거든. 그것도 수십 명이다.”
데브의 걸레가 갑자기 멈췄다. 신나게 테이블을 닦아대던 동작 그대로 굳은 채, 데브는 고개만 돌려 파타로를 바라보았다.
“농담이죠?”
“밖을 봐.”
그제서야 데브는 주점 밖에서 뭔가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데브는 화다닥 걸레를 팽개치고는 문으로 달려갔다.
‘아이고 맙소사!’
좌절한 데브의 눈에는 수백 명으로 보이는, 하지만 실제로는 수십 명 정도인 손님들이 좁은 마구간에 말을 들여 매느라 소란을 떨고 있었다. 이건 비 겁해! 왜 저녁 시간도 한참 지난 이런 시간에 저렇게 많은 손님들이 들이닥치는 거야! 데브는 마음속으로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그런 데브의 얼굴 을 보며 파타로는 즐겁게 웃었다.
“자, 서둘러야겠다. 저 많은 손님들 식사 준비하는 것도 예삿일이 아니겠는데. 너도 어서 서둘러라. 손님들 방 정돈하고 시트 모조리 꺼내거라.”
파타로는 즐거운 밤이라는 듯이 휘파람까지 불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데브는 소리 없이 욕설을 퍼부으며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몸을 돌렸다. 죽었 다. 저 많은 손님들 시중이라니! 저건 도대체 뭐하는 사람들이지?
침실을 향해 달려가려던 데브는 갑자기 정지했다. 데브는 몸을 돌려 창문을 통해 손님들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군. 상단은 아닌데. 군대도 아니고, 순례자들이나 모험가도 아닌 것 같고. 오랜 주점 생활로 손님들의 발자국만 봐도 그 손님의 직업을 때려맞 출 수 있다고 장담하는 데브였지만, 이 야심한 시각에 느닷없이 닥친 손님들에 대해서는 도통 짐작할 수가 없었다. 많은 숫자. 하지만 제멋대로인 복 장. 얼레? 저건 뭐야. 모두들 로드를 들고 있어? 흐음. 순례자들인가. 하지만 그렇다면 왜 복장이 저 지경들이지?
갑자기 데브의 눈이 커졌다.
홀로 들어서던 손님들 중에 그의 시선을 확 잡아끄는 여자가 있었다. 모두들 남자로만 이루어져 있는 무리 가운데 유일한 여자라는 점도 시선을 끄 는 요인일 수 있지만, 데브가 놀란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다. 데브는 그 여자를 알고 있었다.
데브는 반갑게 웃으며 그 여자에게 다가갔다.
“어이!”
데브는 당황하며 걸음을 멈췄다. 손을 내미는 것은 아예 시도하지도 못했다. 파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마주보았던 것이다. 파는 주위를 둘러보다 가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를 부른 건가?”
데브는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파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곧 그의 눈빛이 바뀌었다.
“아, 실례했군요. 죄송합니다. 제가 아는 사람인 줄 알았어요. 어서 앉으십시오.”
그리고 데브는 재빨리 몸을 돌려 홀을 빠져나왔다. 침실을 향해 올라가며 데브는 낮게 투덜거렸다.
“흥, 비밀이 많은 계집애. 이번에는 뭣 때문에 정체를 숨기고 있는 거야. 아는 척하면 죽이려고 들겠지. 그래봐야 양치기 주제에 도대체 무슨 비밀이 저렇게 많은 거지.”
계단을 올라가던 데브의 걸음이 다시 멈췄다. 데브는 멍한 표정으로 계단을 내려다보다가 몸을 돌려 홀 쪽을 보았다. 파는 사내들과 함께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데브는 계단참의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기며 파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도대체 저 계집애는 뭐지? 저희 언니보다 더 알 수 없는 년일세. 싸움은 어떻게 그렇게 잘하고…………, 어라? 그러고 보니 왜 이상하 다는 생각을 못했지? 남자라도 그렇게 싸울 수는 없을 텐데?’
데브는 갑작스러운 생경함을 느끼며 파를 바라보았다. 파를 자세히 바라보던 데브는 한층 더한 의혹을 느꼈다. 저런 얼굴이었나? 이상하다. 표정이 좀 바뀐 것 같은데. 정체를 숨기고 있어서 그렇겠지? 그럼, 파는 왜 자기 정체를 숨기고 저 무리 속에 있는 거지?
데브는 자신이 고스빌의 주점 종업원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정도의 비밀에 접근하고 있다는 식의 망상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손끝이 짜릿했다. 자아, 이건 도대체 뭘까. 데브, 데브!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입은 굳게 다물고, 관찰하는 거야. 데브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침실로 올라갔다.
신스라이프는 그런 데브의 뒷모습을 끝까지 바라보다가 차분히 고개를 돌렸다.
‘멍청한 놈. 안 보이는 줄 아는군. 이 여자를 아는 놈일까. 그건 그렇고 이 여자의 몸은 굉장하군. 이렇게까지 밝은 눈이라니, 대단한걸.’
자신의 생각에 침잠한 채 파의 몸에 만족하고 있던 신스라이프는 갑자기 이상한 느낌을 받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와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발레 드와 주블킨 등이 주춤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뭔가?”
“예? 아아, 저, 큰아버님.”
발레드는 당황하며 입을 열었지만 하려던 말은 나오지 않았다. 발레드는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신스라이프를 바라보았다. 신스라이프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왜?”
발레드는 몇 번이나 침을 삼킨 다음에 힘들게 말을 꺼냈다.
“저, 아까 도르네이 일 말인데요. 어떻게 된 것이지요?”
“어떻게 되다니.”
“왜…………, 죽지 않는 겁니까?”
신스라이프의 입매가 조금 올라갔다. 신스라이프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고, 그러자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던 도르네이가 황급히 고개를 숙 이는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신스라이프는 도르네이의 정수리를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흥. 죽지 않다니. 분명히 죽었다.”
“예? 예. 예. 죽었지요. 그런데…………, 살아났잖습니까? 어떻게 된 거지요?”
발레드의 말이 끝나자마자 주블킨이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격하게 질문했다.
“예. 신스라이프. 어떻게 된 겁니까? 여덟 번째 희생자로 부활은 끝나야 합니다. 그런데 왜 부활이 또 일어난 겁니까?”
신스라이프는 주블킨을 바라보며 짧게 혀를 찼다.
“너는 도대체 자신이 무엇을 하는 건지도 모르면서 네 평생을 그것에 바쳤군.”
주블킨은 입술을 깨물었다. 신스라이프는 테이블 아래로 다리를 뻗으며 편한 자세로 말했다.
“네가 아는 바대로 지껄여보아라.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해서 부활한 건지.”
“예? 아니………, 그럼 혹시 제가 아는 바와 다른 것이?”
“그 네가 ‘아는 바’라는 것을 말해 보란 말이다. 그래야 네가 어떻게 잘못 알고 있는지를 말해 줄 수 있으니.”
주블킨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와 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내들 모두와, 그리고 다른 테이블에 앉은 사내들까지도 주블킨의 대답을 기다리며 침 묵했기에 홀 안은 어색한 침묵으로 가득했다. 싹싹하게 웃으며 홀로 들어서려던 파타로는 홀 안을 점령하고 있는 정적에 놀랐다. 그는 주춤했고, 그 런 그를 향해 가까이 있던 사내 하나가 손짓했다. ‘잠시 있다가 나오시오.’
겁을 집어먹은 파타로는 도로 부엌으로 들어갔다. 파타로가 들어가고 나자 아무런 지시 없이도 두 명의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내들은 부엌으 로 통하는 문의 좌우에 기대섰고, 그러자 주블킨은 내키지 않는 태도로 입을 열었다.
“66년 전, 당신은 우리들의 아버지, 혹은 형이나, 어쨌든 우리들의 선조들과 약속했습니다. 당신을 부활시키고 영생을 준다면 당신의 모든 재력을 사용하여 우리들의 복권을 도와주겠다고 말입니다.”
신스라이프는 킥킥 웃었다. 주블킨은 말을 멈추고는 의아한 표정으로 신스라이프를 바라보았다.
“흐음……, 옛날 이야기처럼 말하는 것은 이해하겠는데, 나로선 위화감 느껴지는 일이군. 나에겐 엊그제 같은 일이거든?”
“그러시겠군요. 하지만 우리들에게는 까마득한 옛날 일입니다.”
“좋아. 말해 봐.”
주블킨은 잠시 신스라이프를 바라보았다. 기분이 좋은 건가? 그 동안 보아오던 모습과 다르군. 주블킨은 테이블 위에 두 손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우리들의 선조는 그 약속을 받아들였고 종단의 종규에서 그 사용이 가장 엄격하게 제약되던 권능을 사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당신이 부탁한 영생 의 권능이지요. 하지만 거기서 당신은 복잡한 조건을 달았습니다. 죽어가는 당신의 그 늙은 몸으로 영원히 사는 것은 거절했지요. 그래서 문제가 복 잡해졌습니다. 그냥 영생이라면 아홉 명의 인명을 희생시키면 될 겁니다. 그 정도의 희생자라면…………, 흐음. 당신의 재력으로는 가능한 일이었겠지 만.”
“물론 그래.”
신스라이프는 고개를 끄덕였고 발레드는 숨소리마저 낮춘 채 주블킨의 말에 집중했다. 주블킨은 두어 번 헛기침을 하고 나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우리들의 선조는 복잡한 계획을 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아홉이라는 숫자에 현혹되어 있지만, 사실 콜리는 여덟 명 의 희생으로 부활을, 그리고 아홉 명의 희생으로 영생을 부여합니다. 그래서 선조들께서는 당신의 부활과 당신의 영생을 분리시키기로 결정했지요.”
“분리라……”
주블킨은 갑자기 사나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은 당신이 스스로를 부정했기에 일어난 일입니다. 늙은 당신이 바로 신스라이프입니다. 당신에게 영생을 준다는 것은 늙은 신스라이프에게 영 생을 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그걸 거부했지요! 결국 당신은 자신이 아닌 다른 것으로서 영생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신스라이프는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래. 좋아. 계속해 봐.”
“그러니, 도대체 권능을 사용할 대상이 모호해지는 형국이었을 겁니다. 분리시킬 수밖에 없었지요. 당신의 부활, 그리고 영생을 받을 대상.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이루어져야 되는 일입니다. 그렇게 분리된 다음 다시 합쳐져야 되니까요.”
발레드는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주블킨은 잠시 호흡을 가누었다가 말했다.
“그래서…………, 선조들께서는 여덟 명의 희생으로 당신을 부활시키고, 아홉 명의 희생으로 그 여자에게 영생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둘을 합친 거지 요.”
발레드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자, 잠깐만. 주블킨 씨. 여덟 명이라니? 일곱 명이었소. 일곱 명의 죽음에서 큰아버님은 부활하셨고, 그리고 그 여덟 번째 남자가 죽었을 때 그 여자 가 나타났소. 어떻게 된 거요? 한 명이 모자라잖습니까?”
주블킨은 갑자기 싱긋 웃었다.
“당신의 큰아버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아십니까?”
발레드는 의아한 표정으로 주블킨을 바라보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신스라이프를 바라보았고, 그가 쓰게 웃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무슨 말이지? 발레드는 갑자기 등골이 싸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설마?
“무슨…… 말이오?”
주블킨은 신스라이프를 똑바로 바라보며 발레드에게 대답했다.
“당신의 큰아버님은 자연사한 것이 아니오. 우리들의 선조들에 의해 죽임 당했지. 신스라이프 그 자신이 바로 첫 번째 희생자였소.”
발레드는 무의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블킨의 말의 의미를 이해했음을 나타내는 끄덕임, 동시에 그 의미를 자신에게 인식시키기 위한 끄덕임이 었다. 그러나 조금 후 발레드는 멍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가로저었다. 신스라이프는 그 모습을 보며 미소 지었다.
“혼란스러워 보이는군, 발레드.”
“큰아버님…………, 어떻게 믿을 수 있었습니까. 어떻게 목숨을 내놓을 수 있었습니까?”
“나로선 손해가 없는 일이었으니까.”
“모르겠습니다. 이해는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르겠습니다.”
“죽음을 재난이라고 생각하는 놈은 이해할 수 없지.”
“예?”
신스라이프는 발레드를 똑바로 보며 웃었다. 그리고 그 순간, 발레드는 여인의 눈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무엇인가에 손끝이 싸늘해지는 기분 을 느꼈다. 저 눈꺼풀 너머에서 그를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발레드는 판단할 수 없었다.
신스라이프는 고개를 조금 가로젓고는 주블킨을 쳐다보았다.
“계속해.”
주블킨은 침착하게 말하려 애썼다.
“당신 자신의 죽음을 통해 첫 번째 희생자는…………, 예, 바쳐졌습니다. 당신으로부터 시작하여 여덟 번째 희생자까지를 통해 당신을 부활시키는 것은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아홉 번째의 희생자를 통해 영생을 받아야 할 대상은 또 다른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 그때는 없었지.”
“예. 그렇지요.”
질린 표정으로 신스라이프를 바라보던 발레드는 주블킨에게 묻는 눈짓을 보냈다. 주블킨은 턱으로 신스라이프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여자 말입니다. 저 여자는 66년 전 그때,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군요.”
“부활을 부여할 자는 신스라이프, 그러나 영생을 부여할 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자는 신스라이프와 합쳐져야 될 사람입니다. 그건 보 통 사람은 안 되는 것이지요.”
“무슨 말인지?”
“당신을 예로 들어봅시다, 발레드. 여덟 명의 희생자로 신스라이프를 부활시키고, 아홉 명의 희생자로 당신에게 영생을 줬습니다. 그리고 당신과 신 스라이프를 합친다? 불가능합니다. 당신은 이미 영생자이니까요. 발레드 자신이 영생을 구가할 뿐이지요. 당신과 신스라이프를 합치려면 당신은 사 라져야 합니다. 하지만 그러면 영생자인 발레드는 없어지므로 신스라이프는 합쳐져야 할 상대를 잃게 되는 거지요.”
“그렇습니까.”
주블킨은 고개를 끄덕이며 신스라이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발레드는 주블킨이 신스라이프가 아니라 그 몸, 즉 파를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 다. 주블킨은 파의 얼굴, 파의 몸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예. 그래서 특별한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과거로 향하는 흐름과 미래로 향하는 흐름의 교차점, 원하는 곳에서 그 교차점을 만들 수 있는, 원하는 시 점에서 현재를 고정시킬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원하는 시점에서…………, 현재를 고정시켜요?”
신스라이프는 모처럼 찾아왔던 안온한 소속감이 점차 사라져가는 것을 느꼈다.
그를 위해 준비된 사람들, 그의 목적을 위해 움직일 사람들, 그에 대해 궁금해 하고 그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자들이 나누는 그에 대한 대화. 그럼에 도 신스라이프는 점차 이 공간에서 멀어져가는 자신을 느꼈다.
익숙하지 않은 몸 때문일까, 아니면 익숙하지 않은 시간 때문일까.
신스라이프는 테이블 위의 촛불을 바라보았다.
초는 길고 가느다랗다. 늦은 시간에 찾아든 손님들을 위해 주인장이 새로 내온 초일 것이다. 그 표면을 타고 흐르는 촛농의 줄기는 아직 가늘고 이질 적이다. 방금 태어났을 터인 불꽃은 홀 안에 어둠과 빛의 경계선을 만들지는 않았다. 그저 그곳에서 혼자 타오르고 있을 뿐. 불꽃 같지 않은 불꽃이 다.
촛불을 응시하고 있던 신스라이프는 그 불꽃의 끄트머리에서 피어오르는 가느다란 검은 연기를 볼 수 있었다. 노려보고 있으면 눈물이 날 정도로 가 느다란 연기였지만, 신스라이프는 눈의 아픔을 무시하며 그것을 계속 응시했다.
신스라이프는 가늘어지는 불꽃이 검은 연기로 승화되는 한 점을 찾아보려 했다. 빨간 불꽃. 가운데는 월등히 밝다. 그 밝은 안쪽 불꽃이 위로 찌르듯 이 솟아오르다가 검붉은 테두리를 뚫으며 순간 검은 연기로 바뀌는 한 점.
“뭐 하시는 겁니까?”
질문 자체보다 그 속에 담긴 당혹감이 몽환 상태에 빠져 있던 신스라이프를 일깨웠다. 신스라이프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주블킨과 발레드의 얼굴을 보았다. 그 얼굴에는 커다란 당혹감이 담겨 있었다. 신스라이프는 시선을 조금 떨구었고, 불꽃을 만지고 있는 자신의 손가 락을 보았다. 불꽃의 테두리를 따라 섬세하게 움직이며 검은 연기의 시작점을 어루만지는 손가락. 그의 손가락이 아니다. 이 처녀의 손가락.
순간, 신스라이프는 끔찍한 복통을 느끼며 급하게 상체를 숙였다.
이마로 땀이 배어나오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눈을 뜨고 있는데도 눈앞에 무수한 불꽃들이 떠다녔다.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은 신스라이프는 입을 크게 벌렸다. 구토감. 입술과 눈 주위로 피가 확 몰렸다. 신스라이프는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고는 입술이 뭉개지도록 입을 움켜쥐었다.
“신스라이프?”
“큰아버님!”
의자가 움직이는 소리, 사내들이 급하게 일어나는 소리. 그 순간 신스라이프는 상체를 폈다.
“아무 일도 아니다.”
반쯤 일어났거나 완전히 일어선 사내 모두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신스라이프를 바라보았다. 신스라이프는 평온했다. 조금 전까지의 모습 그대로 신 스라이프는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오만한 눈으로 사내들을 보고 있었다. 주블킨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신스라이프를 쳐다보았다.
“괜찮으신 겁니까?”
“그래.”
“불편하시다면……, 말씀을 하십시오. 익숙하지 않은 몸이실 텐데.”
“아무렇지도 않아.”
발레드는 주춤주춤 다시 앉았다. 뭐지? 설마 생리통이라도 느끼는 것일까? 어라? 그러고 보니 여자의 몸…………. 발레드는 머리를 휘저었다. 혼돈스럽 고 망측스러운 기분만이 느껴져 발레드는 불쾌해졌다.
신스라이프는 발레드와 주블킨의 중간쯤 되는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야기 다 끝났나?”
주블킨은 신스라이프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예. 그렇습니다. 제가 아는 바에 대해서는 대강 다 말했습니다만……………. 저, 그런데 제 말을 들으셨습니까?”
“들을 필요가 있나? 어차피 잘못 알고 있을 텐데.”
“저희들의 아버님께서 저희들을 속였다는 말씀입니까?”
“말하지 않음으로써 속인 것도 속인 것이라면, 그렇다.”
“그분들께서 말씀하시지 않은 것이 무엇입니까?”
“너희들이 모두 머저리라는 사실.”
“네?”
굳은 얼굴로 되묻는 주븜킨을 무시하며, 신스라이프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먼저 자러 가겠다.”
주블킨은 엉거주춤하게 일어나며 말했다.
“어, 잠시만…… 제가 무엇을 잘못 알고 있는지 말씀해 주셔야지요?”
“때가 되면 말해 주겠다.”
신스라이프는 계속 걸어가며 말했다.
“그래도, 어, 식사도 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종일 드신 것이 별로 없는데…
신스라이프는 몸을 홱 돌려 주블킨을 쏘아보며 외쳤다.
“넌 내가 굶어 죽기라도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니!”
고함 소리의 여운은 한참 동안 고요한 홀 안을 떠돌았다. 콜리의 프리스트들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신스라이프를 바라보았다. 신스라이프 역시 자신 의 고함 소리에 놀라서는 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후 신스라이프는 2층을 향해 달려올라 가버렸고, 프리스트들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모두 고개를 돌려 주블킨을 바라보았다.
발레드가 주블킨에게 질문했다.
“어, 어떻게 된 거지요?”
“모르……겠습니다. 그냥 실수하신 걸까요?”
“저런 것을 실수할 수도 있습니까? 단어를 잘못 고른다거나 할 수야 있지만 어떻게 말투가….?”
주블킨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발레드는 그런 주블킨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것은 실수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신스라이프를 따라가고 있는 것이 확실한 겁니까?”
“예? 어, 하지만 조금 전까지는 누가 봐도 신스라이프였잖습니까.”
발레드는 입을 다물었다. 묻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그 스스로가 질문을 정확하게 할 수 없을 정도로 혼란되어 있는 상태였다. 주블킨 역시 아무 말도 꺼내지 않은 채 깊은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