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 워커 4권 – 8장 시간의 장인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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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깃털들이 바이서스 임펠의 하늘로부터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바이서스의 수도 바이서스 임펠의 외성을 따라 불빛이 아른거렸다. 외성 경비 대원들이 성벽 위에 피워둔 불빛 덕택에 밤하늘에서 내려다보이는 불 빛만으로도 외성의 거대한 규모를 짐작할 수 있었다. 점점이 이어진 불빛들이 검은 평원 위에 거대한 원을 그리고 있는 모습, 그리고 그 안쪽에서 반 짝이는 불야성의 모습은 대륙의 모든 마법사들의 마음의 고향이자 모든 전사들의 꿈의 도시인 수도의 풍모를 한껏 자랑하고 있었다.
차가운 밤바람 속을 날며, 시오네는 웃을 수는 없었다. 박쥐로 변신했을 때는 표정을 구사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시오네는 웃고 싶었다.
거기 오만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자랑거리인 도시여, 성벽이여, 첨탑이여, 궁성이여. 게으른 옹알거림으로 꿈틀거리는 어린 인간의 도시 여. 화염이 너를 뒤덮고 사막을 가로질러 달려온 병사들이 너의 어린 살점을 떼어내는 그날이 올 것을 추호도 생각지 못하는 작고 작은 도시야. 시오네는 몇 개의 바람을 지난 다음 그녀를 이끌어줄 바람과 만났다. 궁성 임펠리아로 부는 바람에 몸을 싣고 시오네는 한가롭게 활강했다.
반짝이는 가로등들이 마치 빛의 강인 것처럼 그녀의 몸 아래로 흘러갔다. 오가는 사람이 없는 야심한 밤, 검은 대로는 퍽이나 넓고 외로워 보였다. 하지만 박쥐의 시각 체계에서 시오네는 전혀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듣고’ 있었다. 비상하게 발달한 코의 주름을 통해 집중된 초음파는 목표물에 부딪혀 아스라한 반향을 일으킨다. 바이서스 임펠의 많은 지역은 대부분 돌로 된 건물들과 포장된 대로인지라 반사음은 모두 깨끗하고 선 명하다. 가로등의 쇠붙이에 부딪혀 돌아오는 반사음은 날카롭게까지 느껴질 정도다. 시오네는 완전히 소리로만 이루어진 세계를 보며 날았다.
멀리서부터 둔탁하게 다가오던 반향음이 마침내 바로 앞으로 가까워졌다. 임펠리아의 거대한 돌벽에서부터 우렁찰 정도의 반사음이 다가온 것이다. 시오네는 지금까지 그녀를 실어 나르던 바람에서 살짝 비켜났다. 날개를 몇 번 파닥인 후, 시오네는 임펠리아의 성벽 군데군데 서 있는 성탑 중 최북 단 성탑 위로 날아들었다. 바이서스 왕가를 수호하는 독수리와 영광의 아샤스에게 바쳐진 독수리 상의 부리에 매달린 시오네는 그대로 잠시 기다렸 다. 뜰에는 두어 명의 궁성 수비 대원들이 오가고 있었지만 밤의 어둠 속으로 날아온 조그마한 흡혈 박쥐를 발견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호흡을 가다듬은 시오네는 궁성 건물을 향해 가볍게 날아들었다. 임펠리아의 구조는 이미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시오네는 건물 2층의 동쪽 끝에 위 치한 발코니로 가볍게 날아들었다.
방안의 불은 꺼져 있었다. 발코니에 내려앉자마자 폴리모프한 시오네는 이제 검은 로브로 몸을 감싼 여인의 모습이 되어 조용히 발코니 문 옆에 기 대섰다.
시오네는 문을 가볍게 밀어보았다. 하지만 역시 발코니 문은 잠겨 있었다. 예상하고 있었던 시오네는 별로 실망하지 않았다. 시오네는 문 손잡이 주 위의 허공에서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거의 들리지도 않는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일런스.”
잠시 기다린 시오네는 조금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손을 휘저으며 캐스트했다.
“노크.”
‘딸깍’ 하는 빗장 벗겨지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하지만 시오네가 문을 밀자 문은 소리도 없이 부드럽게 열렸다. 시오네는 방 안으로 걸어들어 갔다. 열린 창문을 통해 쏟아지는 달빛이 방바닥에 푸르스름한 사각형을 만들어놓았다. 인간이라면 한참을 기다려야 했을 테지만 시오네는 곧 침대가 있 는 위치를 찾아냈다. 시오네는 발소리도 없이 차분하게 걸어가서는 침대 옆에 멈춰 섰다.
데밀레노스 공주는 편안한 모습으로 잠들어 있었다. 잠자리인지라 모두 풀어놓은 머릿결은 자연스럽게 흩어져 있었고 그 속에서 공주의 얼굴은 하 얗게 떠올라 보였다. 시오네는 그 얼굴을 보며 오른손을 품속으로 가져갔다. 다시 밖으로 나온 그녀의 손에는 커다란 나이프가 들려 있었다.
시오네는 칼집에서 나이프를 뽑은 다음 칼집을 방바닥에 던졌다. 달빛 속에 드러난 칼집은 정교한 문양이 새겨진 고급품이었다. 칼을 보는 안목이 조금이라도 있는 자라면 이 칼집이 자이펀 제품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볼 것이다.
갑자기 웃음이 터져나올 것 같았지만, 숙련된 암살자인 시오네는 그저 입술을 조금 올렸을 뿐이었다. 시오네는 칼날을 조심스럽게 만지며 함의 부탁 을 떠올렸다.
‘자연사인 것처럼 처리해 달라고 했나, 함?’
시오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안하지만 데밀레노스 공주의 심장에 꽂힌 나이프는 누가 보더라도 자이펀 군대에서 사용하는 군용 나이프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을 거야. 시오네는 왼손을 뻗어 시트를 끌어내려 공주의 가슴을 노출시켰다. 잠옷 속에서 천천히 오르락내리락하는 공주의 가슴이 잘 보 였다. 시오네는 이를 크게 드러내며 소리 없이 웃었다.
남자의 손길도, 조물거리는 아기의 손길도 닿지 않은 가슴이지. 사랑의 화살이 날아와 박히길 바라는 하얗고 순수한 가슴이여. 안타깝지만 네 품을 찾아드는 것은 자이펀과 바이서스 두 나라를 한꺼번에 집어삼킬 불꽃의 씨앗이란다.
시오네는 두 손으로 나이프를 쥔 다음 팔을 크게 들어올렸다가 힘껏 내리 찔렀다. 나이프가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방 안으로 퍼져나가고, 살이 꿰뚫리는 끔찍한 파열음이 들려왔다.
데밀레노스 공주의 몸이 크게 경련했다. 그녀의 부릅뜬 두 눈이 허공을 응시했고 그녀의 입술이 벌어지며 들리지 않는 비명 소리를 토해 놓았다. 시 오네는 나이프를 더욱 깊숙이 박아 넣기 위해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두 손에 체중을 실었다. 앞으로 숙인 그녀의 눈이 데밀레노스 공주의 눈과 마주 쳤다.
데밀레노스 공주의 입술이 부들부들 떨리며 뭐라고 말을 꺼내려 했다. 시오네는 차갑게 웃었다.
“떠들면 안 되지…….
시오네는 그대로 머리를 숙였다. 그녀의 메마른 입술이 데밀레노스 공주의 입술을 천천히 내리눌렀다.
그 순간 시오네는 황급히 머리를 들어올렸다.
“이게 뭐지?”
마법? 잔뜩 긴장한 시오네는 마나의 움직임을 느껴보았다. 하지만 방 안의 마나는 완전한 평형 상태였다. 시오네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데밀레노스 공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때 그녀의 등 뒤로부터 엄청난 소리가 울려퍼졌다. 쿵! 시오네는 펄쩍 뛸 듯이 놀라며 몸을 돌렸다.
발코니 문이 닫혀 있었다. 하지만 시오네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닫힌 문 앞에 서 있는 검은 그림자였다. 시오네는 엉겁결에 몸을 돌리며 외쳤다. “누구냐!”
그림자는 대답 대신 엉뚱한 말을 중얼거렸다.
“태초의 반역자, 비밀의 원수. 지순한 진리의 광휘여.”
마법인 줄 알고 대비하려던 시오네는 룬 어가 아닌 것을 깨닫고는 주춤하고 말았다. 그래서 사내의 손으로부터 엄청난 빛이 터져나와 방 안을 가득 메웠을 때 시오네는 아무런 대처도 할 수 없었다.
“아아아악!”
동공을 파고드는 무지막지한 빛에 시오네는 비명을 토했다. 눈을 가린 그녀의 귀에 늙은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70년, 70년이라고, 허, 허. 말했잖아? 엘, 엘프도 내 솜씨를 치, 칭찬해 줬다고. 뱀파이어, 뱀파이어쯤은 간단히 소, 속을 거라고 했잖아?”
“정말 놀랍습니다, 구다이 씨.”
시오네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다른 목소리가 대답했다. 그리고 시오네는 그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시오네는 억지로 눈을 떠 대답이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방 문이었다. 그리고 방 문 앞에는 네 명의 사내들이 문을 가린 채 서 있었다. 시오네는 그들 가운데서 갈색 머리의 중년 사내를 발견하고는 앙칼지게 외쳤다.
“칼! 네놈이!”
칼은 약간 피로해 보이는 표정에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
“반갑군요, 시오네. 갈색 산맥에서 헤어진 후로는 처음이지요?”
시오네는 입술을 부르르 떨며 칼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홱 돌려 침대를 보았다. 그곳에는 데밀레노스 공주가 가슴에 나이프가 박힌 채 쓰러져 있었 다. 시오네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데밀레노스 공주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의 그 입술 감각은? 갑자기 시오네는 으르렁거리며 데밀레노스 공주의 얼굴을 움켜쥐었다.
시오네는 믿을 수 없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공주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손에 만져지는 것은 사람의 살결이 아니었다. 시오네는 이를 갈며 발코니 문 쪽을 돌아보았다.
발코니 문 앞에는 덩치가 작은 늙은이가 한 손으로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앞으로 나온 손은 가슴 높이에 들고 있었는데, 그 손바닥 위에는 똑바로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밝은 광채가 떠 있어 사내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시오네는 눈을 잔뜩 찡그린 채 말했다.
“월…… 오 위스프? 정령사구나!”
“그, 그렇소.”
윌로위스프의 빛 뒤에서 늙은이의 목소리가 대답해 왔다. 시오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밝은……? 넌 인간이잖아!”
늙은이는 껄껄 웃으며 손을 위로 톡 쳐올렸다. 늙은이의 손바닥 위에서 맴돌던 광채는 마치 공처럼 튀어올라 천장 아래에서 맴돌았다. 늙은이는 애 정이 가득 깃든 눈으로 광채를 바라보며 말했다.
“들었니? 저, 정말 이렇게 기쁠, 기쁠 수가 없구나. 무, 물론 너희들의 애정도 고맙지만, 역시 정령이 아닌 거, 것으로부터 칭찬을 들으니 조, 좋구나. 하하하. 자, 자, 이제 너도 나오너라.”
늙은 정령사는 침대를 향해 가볍게 손짓했다. 늙은이의 쪼글쪼글한 손이 마치 무용수의 그것처럼 부드럽게 움직이자, 데밀레노스 공주의 모습이 갑 자기 변하기 시작했다. 시오네는 이를 물었다.
데밀레노스 공주의 몸으로부터 작은 빛살들이 무수히 솟아올랐다. 솟아오른 빛 덩어리들은 천장으로 뛰어올라 맴돌았고 그래서 방 안은 빛으로 가 득 차 그림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밝아졌다. 그 밝은 빛 속에서 시오네는 침대 위에 인형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람만큼이나 커다란 인형의 가슴에는 나이프가 꽂혀 있었다.
칼은 피로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개하지요. 여기 이분은 그랜드스톰에서 오신 도스펠 씨.”
턱을 만지작거리며 천장 아래를 맴돌고 있는 윌로위스프를 바라보던 프리스트가 칼의 소개에 황급히 손을 내리며 인사했다. 칼은 빙긋 웃으며 손을 돌려 반대편에 서 있던 거구의 젊은이를 가리켰다.
“퍼시발 군이야 구면일 테지요.”
샌슨은 빙긋 웃으며 검을 뽑아들었다. 프림 블레이드의 기다란 검신이 윌로위스프의 빛을 받아 눈부시게 번뜩였다.
“반갑군, 시오네. 당신을 위해 와인과 장미를 준비……………, 젠장! 다, 당신을 위해 많이 준비했지!”
잔뜩 긴장하고 있던 시오네는 놀라지도 못했고 정령사와 도스펠은 샌슨을 싹 무시해 버렸다. 샌슨 옆에 서 있던 네 번째 사내는 후드를 깊이 내려쓰 고 있어서 표정을 볼 수 없었지만, 그의 어깨가 조금 떨리는 것은 잘 보였다.
칼은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으하아암. 그래요. 준비 많이 했지. 들킬까 봐 마법사 대신 우리 시대 최고의 정령사를 데리고 왔을 정도니 우리의 준비성을 칭찬해도 좋을 거요. 구다이 씨를 소개하겠소. 70년 동안이나 정령과만 대화를 나눠온 정령사요. 그 고명한 솜씨는 보는 바와 같소.”
늙은 정령사 구다이는 입이 헤벌어진 채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시오네는 활활 타오르는 눈으로 칼을 바라보았다.
“준비를 했다는 것은, 내가 올 줄 알았다는 말이군……”
“그래요.”
“어떻게!”
“두 분의 조력이었소. 우선 여기 알리 씨를 소개하겠소.”
네 번째 사내가 후드를 들어올렸다. 시오네는 후드 아래에서 드러난 전 자이펀 국방 대신의 얼굴을 보며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알리는 엄격 한 얼굴로 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Tou daphmerq ge une ina ferhichii”
샌슨은 궁금한 표정으로 칼을 돌아보았고 그러자 칼은 선선히 웃으며 말했다.
“암살자 치곤 살기를 너무 많이 노출시킨다고 하셨네.”
시오네는 두 팔을 확 벌리며 외쳤다.
“저놈이 나의 접근을 간파했다 하더라도, 어떻게 그새 이렇게 준비할 수 있었단 말이냐!”
“올 줄 알고 있었으니까. 언제 올 줄은 몰랐기에 우리는 매일 공주의 침실에서 밤을 새워야 했소. 피곤하고 낯부끄러운 일이 이제야 끝나니…………”
“어떻게 내가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음? 아아, 이런 피곤해서 자꾸 말이 새는군. 물론 두 분의 조력 때문이오. 하지만 두 번째 조력자께서는 이곳에 계시지 않으니 소개해 드릴 수가 없 군요.”
“여기 없다고?”
“그렇소. 금방 데려올 수도 없지.”
“그게 누구냐!”
칼은 대답 대신 싱긋 웃었다. 그때 구다이가 찢어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조, 조심해!”
구다이가 외치는 순간, 계속 질문을 던지며 준비하고 있던 시오네가 두 팔을 확 들어올렸다. 도스펠은 황급히 디바인 마크를 꺼냈고 샌슨은 고함을 내지르며 곧장 앞으로 돌격했다. 그러나 시오네는 눈 깜빡할 사이에 캐스트를 마쳤다.
“미러 이미지!”
순식간에 방 안에 네 명의 시오네가 나타났다. 돌격하던 샌슨은 협공당할 것을 염려하여 주춤하며 발을 멈췄다. 네 명의 시오네는 빠른 손놀림으로 레이피어를 뽑아들고는 네 명의 사내를 향해 육박했다. 그러나 그때 구다이가 재빨리 외쳤다.
“태초의 반역자, 비밀의 원수. 지순한 진리의 광휘여! 진실을 드러내는 너의 날갯짓을!”
정령을 부를 때 구다이는 절대로 더듬지 않았다. 시오네는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저것을 잊었어! 순식간에 내려진 구다이의 명 령에 천장을 가득 메우고 있던 윌로위스프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광채가 한 곳으로 모여들자 샌슨은 팔을 크게 들어올렸다.
“찾았다!”
프림 블레이드가 허공에 빛의 장막을 그리며 시오네를 향해 쏘아져갔다. 시오네는 얼떨결에 레이피어를 들어올렸지만 샌슨은 무지막지하게 내려치 던 검날을 살짝 뒤틀었다.
“크아아악!”
시오네는 잘려나간 자신의 오른손을 보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샌슨은 조금의 헛동작도 없이 어깨로 시오네의 몸을 들이박았다. 시오네는 숨이 턱 막히는 고함을 내지르며 침대 위에 쓰러졌다. 침대 위에 쓰러진 시오네를 향해 도스펠은 주저 없이 디바인 마크를 내밀었다.
“대지가 거부하는 시체여, 사라져라!”
“캬아아악!”
시오네는 비명을 내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앉은 채로 물러나던 시오네는 침대 머리에 부딪혔고 그러자 시오네는 몸을 돌려 벽을 긁어댔다. 시오네는 벽에 머리를 찧어대며 한사코 디바인 마크로부터 멀어지려 했고 도스펠은 그런 시오네를 향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디바인 마크를 내밀었다. “캬아아악! 저리 가! 비켜! 살려줘!”
시오네를 향해 뻗어가던 도스펠의 손이 멈췄다. 하지만 도스펠은 팔을 내리지 않았다. 디바인 마크는 그대로 시오네를 향해 겨냥한 채 도스펠은 침 대 발치에 멈춰 섰다.
침대 옆으로 다가온 칼은 벽을 뚫고서라도 도망갈 기세인 시오네를 측은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좋은 대접까지야 해줄 순 없었지만…………, 이렇게까지 소란을 피울 건 또 뭐요, 시오네.”
“캬아악, 캬아아악! 저리가, 저리 가!”
시오네는 눈물을 펑펑 흘리며 도리질을 했다. 칼은 고개를 가로젓고는 샌슨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샌슨은 시오네를 경계하며 침대 밑으로 손을 집 어넣었고, 잠시 후 끙끙거리며 큼직한 물건을 끌어냈다.
하지만 정신없이 도리질을 하며 비명을 지르던 시오네는 샌슨이 꺼낸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자 칼은 차분하게 말했다.
“당신 관이 어디 있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이곳에라도 들어가시오.”
시오네의 눈이 번쩍 빛났다. 관이라고? 시오네는 고개를 돌렸고 침대 옆에 놓여 있는 관을 보자마자 그곳으로 몸을 날렸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시 오네가 관 속에 들어가자 관 뚜껑이 저절로 날아올랐다. 텅!
날아오른 관 뚜껑은 정확하게 관을 덮었다. 샌슨은 다시 침대 밑에 손을 집어넣어 망치와 못을 꺼냈다. 샌슨은 손에 망치를 들고 못 몇 개는 입에 물 며 말했다.
“이거오 추우하까오?”
입에 못을 문 채 말해서 발음이 부정확했지만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충분해.”
그러자 샌슨은 탕탕 소리를 내며 관 뚜껑에 못질을 하기 시작했다. 도스펠은 디바인 마크를 꼬나든 채 관을 경계했고 구다이와 알리, 그리고 칼은 관 주위에 둘러서서 샌슨이 못질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 샌슨이 못질을 끝내고 물러나자 도스펠은 관 위에 디바인 마크를 내려놓았다. 샌슨은 디바인 마 크를 못질해서 관 뚜껑 위에 고정시키고 난 다음 손바닥으로 몇 번 내리치고는 싱긋 웃었다.
“자, 튼튼합니다.”
“휴우……. 겨, 겨우 끝났군.”
구다이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칼은 미소를 지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인사했다.
“수고들 하셨습니다.”
“저 뱀파이어가 자기편으로부터 배신당한 것을 알면 뭐라고 할까요, 칼?”
샌슨은 관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퍼시발 군. 저 여자 역시 자기편을 배신하고 데밀레노스 공주를 살해하려 했어. 피장파장이지.”
“하지만, 그것 자체가 함에게 농락당한 것이잖습니까.”
칼은 대답하기에 앞서 샌슨의 손을 살폈다. 샌슨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손에 든 망치를 내려다보다가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며 말했다.
“제가 질문하는 겁니다, 예!”
칼은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아아, 그래. 뭐……, 그렇긴 하지. 자신의 복수심을 가누지 못한 대가라고 할 수밖에. 자, 이제 관을 옮기도록 하지. 관을 옮기는 것은 나와 도스펠 씨가 담당할 테니 퍼시발 군 자네는 자크에게 가보게.”
“지금이오?”
“그래. 자크에게 가서는 함에게 연락을 보내라고 해. 잠깐……, 전갈을 바꾸지.”
방문을 나서려던 샌슨은 몸을 돌려 칼을 바라보았다. 칼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감사하다는 말과, 직접 대면을 요구한다는 말을 덧붙이게.”
“예? 직접 대면이오?”
“그래. 휴전 협상에 나도 나갈 테니 함도 나오라고 전하는 거야. 알겠지? 대충 그런 의미로 정중하게 써서 보내라고 해. 이런 식으로까지 협상하겠다 는 의미를 분명히 했으니, 아마도 반드시 나올 걸세. 그 친구의 얼굴을 보고 싶군.”
“알겠습니다.”
빛의 탑은 사상 최대의 혼란으로 돌입했다. 마법사들은 자신들이 그저 조금 흥분했다고 생각했지만, 시민들로서는 심장이 오그라붙을 것 같은 공포 를 느꼈다.
바이서스 임펠 내에서 마법사 길드 ‘빛의 탑’은 그 앞을 오가는 시민들에게 항상 묘한 쓴웃음을 짓게 만드는 건물이었다. 시내의 적당히 지저분한 거 리에서도 다시 주위의 지저분한 건물들로부터 ‘저렇게 지저분한 건물과 함께 서 있어야 하다니!’ 하는 힐난을 듣기에 적당한 2층짜리 목조 건물의 2 층이 그 이름 위대하사 빛의 탑인 것이다.
바이서스 임펠의 나이 많은 시민들만은 경외감 때문에 대화에 빛의 탑을 거론하는 일을 퍽 삼갔지만, 발랄한 청년이나 소년들은 빛의 탑이 거기 있 다는 것은 알고 있을지언정 거기 대해 가장 미약한 경외감도 느끼지 못했다. 1년에 한번, 아니 10년에 한번이라도 빛의 탑의 2층 창문을 통해 반인 반수가 뛰쳐나온다거나(나이가 몹시 어린 축들의 기대다.), 지붕이 날아갈 정도의 대폭발이 일어난다거나(우주적 공포를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는 연령층의 기대 다.), 금발을 치렁치렁 늘어뜨린 벌거벗은 엘프가 백마를 타고 나온다거나(외로운 밤 때문에 처절하게 방황하는 청소년들의, 간절하지만 말도 안 되는 기대다.) 한 다면 바이서스 임펠의 시민들도 만족감을 느끼며 그것이 마법사의 길드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빛의 탑은 항상 고요하고 조금 지저분한 건물일 뿐이었다. 그래서 바이서스 임펠의 시민들은 그 이름을 입에 올릴 때마다 조금 우스꽝스러운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어느 여행자가 바이서스 임펠의 시민들에게 길을 물어보았다고 하자. 친절한 시민은 상냥하게 설명해 줄 것이다.
“그러니까 죽 전진한 다음 오른쪽 두 번째 골목을 돌면 왼편에 빛의 탑이 보일 텐데…
바로 이 부분에서 바이서스 임펠 시민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을 테고, 물정 모르는 여행자는 어리둥절해 버리고 말 것이다. 그것은 늙어빠져 무서울 것이 하나도 없는 과수원 주인이 죽이겠다는 식으로 고함을 지를 때 어린 서리꾼들이 짓는 미소와 비슷한 것이다.
그래서 빛의 탑 바로 근처에 사는 수도 시민들은 항상 은근한 경멸과 무시로 빛의 탑을 대해 왔다. 적어도 어제까지는 그랬다는 말이다.
하지만 오늘 아침이 되자 모든 것은 처절할 만큼 달라졌다. 시민들은 숨까지 헐떡거리며 모든 것이 평온했던 어제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그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른들의 공포와는 별도로, 적어도 골목을 주름잡는 악동들만은 미쳐버릴 정도로 신나하고 있었다.
인파 한가운데서 스터벅은 잠시도 쉬지 않고 입을 나불거리고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의 수다에 노이로제를 일으키거나 머리를 내저으며 도망 치던 주위의 이웃들은 넋을 잃은 얼굴이 되어 스터벅의 수다를 경청하고 있었다.
스터벅은 에델브로이의 충실한 신자였고, 두 딸의 아버지이며, 건실하면서도 자상한 인격을 갖추었다고 스스로 믿고 있으며, 끈기 있지만 승률은 높 지 못한 도박꾼이었지만, 이웃들이 그의 그런 면들 때문에 스터벅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아니었다. 스터벅은 빛의 탑 바로 맞은편에서 작은 잡 화점을 운영하는 사나이였던 것이다. 게다가 그는 사건을 맨 처음부터 목격한 사람이기도 했다.
향후 수년간 우려먹을 것이 분명한 이야기를 스터벅은 다시 신나게 펼쳐보였다.
“뭐? 처음부터 다시? 아, 그래. 지금 막 온 사람도 있으니까. 그럼 모두들 조용히 하고 잘 들어봐. 그러니까 오늘 아침 해뜨기 직전이었지. 어제 진탕 퍼마셔서 머리가 아팠지만 나는 한 번도 가게 문 여는 시간을 놓쳐본 적이 없다고. 그래서 오늘 아침에도 에델브로이의 가호 속에 벌떡 일어났다네. 가게 문을 열려고 밖으로 나왔지. 기지개를 켜려고 몸을 주욱 펴는데 말이야, 남쪽 하늘에서 뭔가가 날아오는 것이 보이더라고. 난 그냥 새일 거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잠시 후, 들어봐. 난 아무래도 뭔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단 말이야.”
주위의 인파들은 아버지의 원수가 콧잔등을 후려치고 지나간다 하더라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의 집중력을 보였다. 스터벅은 그런 청중을 주욱 둘 러보고 나서 말을 이었다.
“아무리 봐도 그건 새일 수가 없었어. 우리 큰아버지가 트리키 가문의 숲지기였다는 거 알고 있나? 나도 어릴 때 큰아버지를 따라 숲을 많이 싸돌아 다녔지. 그래서 새란 새는 대부분 구분한단 말이야. 바로 그랬기에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도 있었겠지. 그건 말이야, 잘 들어. 그건 날개가 없 었단 말이야!”
주위의 시민들 중 숲지기 큰아버지가 없다 하더라도 날개가 없는 새라면 누구에게든 이상하게 보였을 거라고 말하는 시민은 없었다. 그들은 심지어 스터벅을 향해 엄숙한 경의를 보내기까지 했다. 스터벅 역시 이런 경천동지할 사건의 목격자로서 가져 마땅한 위엄을 맘껏 뽐내면서 말했다.
“나는 달아나지 않았어. 제자리에 꼿꼿이 서서 그것을 관찰했지. 에델브로이의 가호 속에 있는 나에게 무엇인들 무섭겠나.”
무서워서 다리가 굳어버렸던 것이 아니냐고 묻는 시민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똑똑히 알 수 있었지. 그것은 사람이었어. 유피넬과 헬카네스에 맹세코, 그것은 사람이었지. 나는 술이 덜 깬 것이 아닌가 싶어 두 눈을 비벼보았지만 아무리 봐도 그건 사람이었단 말이야.”
사람이었다는 말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지만 짜증을 내는 시민도 없었다. 스터벅은 열정적으로 팔을 휘둘렀다.
“나는 입을 쩍 벌린 채 그 사람을 바라보았지. 화살처럼 곧게 날아온 그 사람은 바로 내 머리 위에서 몇 번 맴돌았지. 바로 이 위를!”
스터벅은 자신의 머리를 가리켜 보이기까지 했고, 시민들은 스터벅의 벗겨진 머리가 거룩한 징표나 되는 것처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그 사람이 밑으로 내려오는 거야. 난 용기를 쥐어짜서 말했지. ‘안녕하시오! 좋은 아침이죠?’ 그러자 그제서야 그 사람은 나를 알아본 거 야. 그 사람은 이 정도 높이에 뜬 채 나를 돌아보는데, 후하! 나는 하마터면 심장이 멎어버릴 뻔했지. 눈이 세 개더라고! 바로 여기, 그래, 여기에 눈이 하나 더 있더란 말이야!”
스터벅은 자신의 미간을 찌를 듯이 가리켜보였고 시민들은 바로 그 장소에서 스터벅의 세 번째 눈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눈을 커다랗게 떴다.
“나는 질린 표정으로 그 사람을 바라보았어. 그러자 그 사내는 싱긋 웃더니 이렇게 말하는 거야. ‘안녕하시오, 스터벅. 아, 내가 당신의 이름을 안다고 해서 너무 놀라지는 마시오. 나는 바로 이 앞의 건물에 사는 사람이며, 당신과 이 주위의 이웃들에 대해서라면 그들의 버릇이나 취미까지도 소상 하게 알고 있소.’ 생각해 보게. 바로 이 앞의 건물이라니, 그건 빛의 탑이잖나! 그래서 나는 단숨에 짐작할 수 있었지. ‘마법사이십니까?” 그러자 그 사 내는 고개를 끄덕였지. ‘하하! 시몬슬이라고 하는 풋내기 마법사요.’ 이렇게 정중하게 말하는 거였어.”
시민들은 시몬슬이라는 이름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발음해 보며 신비로워했다. 그때 시민들 중 하나가 자신의 외가 쪽으로 그 비슷한 이름을 가진 친척이 있다고 말하여 시민들을 더욱 놀라게 만들었다. 스터벅은 주의가 다른 곳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자 재빨리 목소리를 높였다.
“자! 그래서 나는 말했지. ‘퍽 즐거워 보이는군요? 실제로 그 시몬슬은 무지무지하게 흥분한 얼굴이더라고. 그러니 나 같은 사람에게 인사를 다 건 넬 정도였겠지. 시몬슬은 고개를 이렇게 끄덕이며 말했어. ‘그래요. 기뻐하셔도 좋소, 스터벅. 당신은 내가 가져온 소식을 처음으로 듣는 사람이 될 거요.’ 그자는 그렇게 말하는 거야. 바로 나에게.”
시민들의 주의는 순식간에 스터벅에 옮겨갔다. 아니, 스터벅이 그토록이나 고귀한 위치에 서게 되다니! 그런데 그게 무슨 소식일까? 시민들의 고조 된 시선을 충분히 즐기며 스터벅은 시몬슬의 목소리를 흉내내어 위엄 있게 말했다.
“오늘은 이 수도에서 잊혀지지 않을 날이 될 거요. 300년을 거슬러, 일곱 빛깔의 지팡이의 주인은 다시 바이서스 임펠로 돌아오실 거요. 앞으로 두 어 시간쯤 후, 나는 그 전령으로 온 사람이오. 자, 이제 빛의 탑을 깨울 때가 되었소. 서둘러야겠소.”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시민들은 스터벅의 기대를 배신했다. 시민들은 얼떨떨한 얼굴로 서로를 돌아보았던 것이다. 일곱 빛깔의 지팡이의 주인이 누구 야? 스터벅은 절대로 시몬슬에게 되물었던 적이 없다는 듯한 태도로 이웃들을 한심스럽게 쳐다보며 외쳤다.
“이 멍청한 작자들아, 무지개의 솔로처잖아!”
스터벅은 자신이 외친 이름에 대해 이웃들이 보내온 반응 앞에 생애 최고의 기쁨을 느꼈다. 그의 아내와 딸들은 남편이자 아버지인 그의 말에 말 울 음소리 정도의 가치도 부여하지 않았다. 따라서 지금 이 이웃들이 보여주는 반응이 그에게 터질 듯한 희열을 주었다는 것은 당연하다.
“솔로처! 솔로처라니, 대마법사 솔로처 말인가!”
“북방을 휩쓸고 데스나이트를 물리치고 헐스루인 공주를 가르쳤던 그 솔로처?”
“무슨 말이야? 솔로처는 까마득한 옛날에 죽었잖아?”
“부, 부활?”
이웃들은 그제서야 빛의 탑을 바라보며 모든 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였기 때문이다. 세월마저 숨가빠할 시간이 지나고 나서 그들의 까마득 한 사조가 귀환하는 것이다. 그래서 저들 마법사가 저토록이나 흥분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해한다는 것과 공포는 별개의 문제였다. 마법사들의 광란을 돌아본 시민들은 다시 다리를 덜덜 떨었다.
빛의 탑 꼭대기에 올라선 한 노마법사는 생애 동안 쌓아온 모든 기술을 펼쳐 보이겠다는 식으로 푸른 하늘을 배경 삼아 갖가지 영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먼저 그는 허공에 커다란 장미 봉오리를 만들어냈다. 그 장미 봉오리의 꽃잎 사이에서는 엘프의 손이 아닌가 싶은 하얀 손이 나와 있었는데, 그 손에는 빨간 장미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 장미에서는 다시 하얀 손이 나와 있었다. 이런 식으로 끝없이 장미와 손이 반복되었다.
그 옆의 여마법사는 으르렁거리는 팬텀 스티드를, 게다가 꼬리가 있어야 할 위치에 머리가 달려 있어 양쪽이 다 앞쪽인 팬텀 스티드를 수십 마리 소 환하여 바이서스 임펠의 하늘을 달음박질치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양쪽이 다 앞쪽이기 때문에 어느 쪽으로도 달려가지 못했고, 결과적으 로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간신히 참아 넘길 수 있었지만, 한 젊은 마법사가 불러낸 영상은 급히 출동한 경비 대원들을 발작하게 만들었다. 수도 경비 대장 콜라이 드는 옆으로 보면 그 공포가 덜할 것이라고 믿는 것처럼 곁눈질로 하늘을 바라보며 외쳤다.
“저거, 저 드래곤 정말 안전한 겁니까?”
빛의 탑에서도 가장 온화한 마법사 키뤼시나는 온화하게 웃었다.
“물론 안전하답니다, 콜라이드.”
덜 미쳤다는 이유로 동료 마법사들로부터는 은근히 따돌림을 당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경비 대원들을 상대하는 일을 자임해야 했던 슬픈 여마 법사 키뤼시나는 사랑스럽지 않느냐는 표정으로 하늘의 절반을 꽉 채우다시피 한 채 꿈틀거리는 드래곤을 가리켜 보였다. 하지만 콜라이드는 절대로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없었다.
“글쎄요. 내가 특별히 까탈스러운 성격은 아닙니다만, 일곱 개의 머리가 달려 있고 그것들이 상대방의 몸통을 뜯어먹으려 드는 드래곤이 안전하다 고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만? 게다가 저 몸통들은 자신의 몸통이기도 하잖습니까? 맙소사, 난 머리가 어떻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건 메타포일 뿐이에요.”
“예?”
키뤼시나는 다시 빙긋 웃었다.
“저들을 용서하세요, 콜라이드. 저들은 그저 저녁에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에게 그날 배운 것을 보여주려고 애쓰는 아이들과 같답니다. 아버지 앞에 서 노래 부르고 춤추는 어린아이. 당신에게도 아이들이 있겠죠?”
“내 자식들은 사람들의 머리 위로 뛰어다니며 노래를 불러대는 날개 달린 원숭이를 만들어내지는 않습니다만. 어이쿠, 저리가!”
날개 달린 원숭이는 낄낄거리며 콜라이드의 정수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원숭이는 그대로 하늘로 솟아오르며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넋을 잃게 만 드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한 감정 풍부한 처녀는 원숭이의 노래에 눈물을 글썽였고 늙수그레한 거한들도 눈을 찔끔거리며 거칠게 눈 가를 비볐다. 비록 그 원숭이의 노래 가사가 스터벅의 가게에서 팔리는 잡동사니들의 가격 명세표를 줄줄 불러대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감동을 잃는 시민은 아무도 없었다.
키뤼시나는 미안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원숭이를 대신하여 콜라이드에게 사과한 다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 지경이니…………, 사람들이 뭐라고 하던 빛의 탑은 개방되지 않는 편이 좋은 거죠. 완전히 돌아버린 마스터들이 빛의 탑 내부만을 좋아한다는 것은 콜라이드 당신에게도 퍽 다행스러운 일 아닐까요.”
“충심으로 동감하고 싶습니다. 내 대원들이 아무리 날쌔다 한들, 저렇게 빠른 티테이블을 무슨 수로 검거하겠습니까.”
그 작은 티테이블은, 황홀감에 젖어 사람들의 다리 사이로 8자를 그리며 달리는 개들에게 합세해서 경비 대원들의 다리 사이를 미친 듯이 달리고 있 었다. 그 티테이블에 입이 달려 있었다면 주위의 개들과 마찬가지로 목이 쉬도록 짖어댔을 것은 거론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때 까마득한 하늘에 떠 있던 마법사(독특하게도 물구나무선 채로 하늘을 날고 있었지만 이 상황에서는 별로 신기해 보이지 않았다)가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까 지 들릴 정도로 우렁차게 외쳤다.
“솔로처 님께서 오신다아!”
마법사들의 광란은 극에 달했다. 장미 봉오리를 만들어내던 마법사는 이제 사방으로 장미 꽃잎을 날려대는 장미 폭풍을 일으켜 시민들의 숨통을 막 았다. 빙글빙글 돌고 있던 팬텀 스티드들은 너무 많이 돌아서 어지러움을 느끼며 추락했다. 다행히도 팬텀 스티드들은 사람들의 머리에 부딪히기 직 전 보다 작고 부드러운 것으로 바뀌었지만, 그것은 사람들을 더욱 당혹하게 만들었다. 시민들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스컹크들을 피해 무슨 말인지 알 아들을 수도 없는 괴성을 지르며 아무 방향으로나 미친 듯이 달려갔다. 사람들의 혼란에 더욱 놀란 스컹크들은 엉덩이를 곧추세운 유명한 자세를 취 한 다음 거침없이 발사를 개시했지만, 스컹크들이 발사한 액체에서는 갓 구운 바닐라 케이크 향이 퍼져나와 시민들을 포복절도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혼란 속에서 솔로처가 나타났다.
남쪽 하늘로부터 기다란 지팡이에 올라탄 솔로처가 시민들의 머리 위로 날아왔다. 그가 탄 지팡이는 시민들의 머리 위를 가볍게 한 바퀴 돌고는 천 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황금빛 비둘기들이 날아오르고 그 사이사이로 날개 달린 원숭이들과 빛발들이 한없이 하늘로 솟구쳤다. 장미 꽃잎은 이제 모 든 사람들의 머리와 어깨에 더 이상 쌓일 수 없을 정도로 쌓여 있었고 대로에는 포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꽃잎이 깔려 장밋빛 강이 만들어질 지경 이었다.
바로 그런 대로 가운데로 솔로처는 그의 백발 위에 장미 꽃잎을 한껏 얹은 채 당황하며, 심지어 놀라기까지 하며 내려서고 있었다.
“이게 웬 난리람. 어쨌든 확실히 빛의 탑이 맞긴 맞나 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