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 워커 4권 – 8장 시간의 장인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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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놀랐네, 젊은이들. 아주 인상적이었네.”
솔로처는 기쁜 얼굴로 말했다. 빛의 탑의 마법사들은 그것이 그들의 기량에 대한 칭찬이라고 생각하고는 희희낙락했지만 나름대로 건전한 상식을 가진 키뤼시나는 솔로처의 말을 똑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당신은 저희들의 꿈이자 소망이십니다.”
“많은 세월이 흘렀군…………, 많은 세월이.”
솔로처의 독백은 키뤼시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솔로처는 숨길 수 없는 감동으로 목소리를 조금 떨며 말했다.
“살아생전, 나는 항상 핸드레이크의 작은 제자 솔로처였지. 늘그막까지 그랬단 말이야. 내가 대륙의 북방을 정벌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뭐였 는지 아나? ‘걱정 마십시오. 당신 옆에는 내가 있습니다. 언뜻 듣기 좋은 말 같지? 하지만 그렇지 않아. 핸드레이크였다면 그런 말을 꺼낼 필요가 없 었겠지. 그들은, 그들은 무의식중에 나를 조력이 필요한 인간, 그들과 같은 별 볼일 없는 인간으로… 관두지. 그들도 물론 훌륭한 무사들이었고 장 군들이었지……”
솔로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빛의 탑의 마법사들은 그들에게 익숙지 않은 인간관계의 복잡한 문제에 잠시 얼떨떨한 표정이었지만 키뤼시나는 다시 한번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솔로처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래도, 나는 한 번만이라도 내 사부님처럼 동료 장군들에게 미움 받고 경원당하기를 바랐네. 친절하게 건네는 도움의 손길이 아니고. 건방져 보이 나? 하하하.”
“자존심과 고독의 문제군요. 이해합니다, 솔로처.”
솔로처는 환하게 웃으며 키뤼시나를 바라보았다.
“고맙네, 아름다운 후학이여.”
나이 마흔을 넘겨 원숙함이 가득한 키뤼시나는 이런 호칭에 쑥스러워하는 척함으로써 솔로처를 웃음 짓게 만들었다. 솔로처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 았다.
시민들의 눈에 서린 경외감과 황홀감은 솔로처의 주름살 가득한 눈가를 촉촉하게 만들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많은 시간이 흐른 것이다. 시간은 그 의 이름에 전설의 마력을 더하여 핸드레이크의 이름과 같은 정도의 위엄과 신비를 부여했다. 이것은 켄턴의 시민들이 그를 기억하는 것과는 전혀 다 른 문제다. 켄턴의 시민들은 그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다. 솔로처는 수도의 시민들마저 그를 되살아난 전설로서 대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솔로처는 기세 좋게 말했다.
“일단은 수도 방문의 목적부터 해결해야겠지. 수도 경비 대장 콜라이드라고 하셨나? 오래간만에 와서 길을 도통 모르겠군. 세류델헨 성으로 안내해 주겠나?”
콜라이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솔로처를 마주보았다.
“예? 아아, 궁성 임펠리아 말씀이십니까.”
“아아, 거기. 그래. 미안하군. 우리는 세류델헨 성이라고 부르곤 했네. 어감이 좋잖나.”
콜라이드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즉시 솔로처를 안내하지는 않았다. 그 전에, 콜라이드는 자신의 대단한 배짱을 증명해 보였다.
“안내하기에 앞서…………, 뭔가 신원을 확인할 것이 필요합니다만.”
“응? 무슨 말인가. 내가 솔로처라는 것을 증명하라고?”
“아니오. 저는 당신이 솔로처이기에 더욱 증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언데드가 아닌지.”
콜라이드는 이렇게 빛의 탑의 마스터들이 모두 뛰쳐나온 거리에서 감히 그들의 사조를 의심할 정도로 배짱 센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의 부하들은 그 렇지가 못해서 모두들 눈이 튀어나올 듯한 얼굴로 대장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진노한 마스터들이 이 거리 일대를 초토화시켜 버리거나 눈에 들어오는 모든 시민들에게 3년이 세 번씩 세 번 반복될 동안 악운만이 가득하 라고 저주를 거는 일 등은 일어나지 않았다. 빛의 탑의 마법사들은 일제히 웃음을 터뜨린 것이다. 그들은 그야말로 재미있어 죽겠다는 식으로 웃어대 었고 어떤 마법사는 웃다가 못 견뎌 제자리에서 공중제비를 돌기도 했다. 그 가운데서 솔로처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콜라이드를 바라보았다. 솔로 처는 뭐라고 말하려 하다가, 문득 손을 들어 태양을 가리켰다.
“햇살이 참 곱지 않나, 콜라이드?”
콜라이드는 헛기침을 했다. 태양빛 아래를 태연하게 걸을 수 있는 언데드는 극히 드물다는 사실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안내하겠습니다.”
“여보게. 내가 만일 언데드였다면 내 후배들은 겉모습 따위에 신경 쓰지 않고 벌써 오래 전에 나를 박살내 놨을 걸세. 난 그들이 한번 주저해 보지도 않을 거라는 데 이 지팡이를 걸어도 좋아. 여차저차한 사정으로 부활하긴 했네. 그리고 난 지금 그 사실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전하를 찾아뵙고자 하 는 것이네.”
“잘 알겠습니다. 일동차렷!”
콜라이드는 재빨리 몸을 돌려 경비 대원들에게 구령을 붙였다. 경비대원들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국빈 호위의 분위기를 자아냈다. 어깨에서 꺅꺅거리는 원숭이나 다리 사이로 질주하는 티테이블이 없었다면 그들은 루트에리노 대왕의 여덟별만큼이나 엄숙해 보였을지도 모른다.
먼저 달려간 경비 대원에 의해 임펠리아에 솔로처의 방문 소식이 전해졌다. 궁성의 안살림꾼이자 영접꾼 노릇도 하는 궁내 부장 리핏 트왈리전은 절 망적으로 머리를 굴려봤지만 죽었다가 되살아난 궁정마법사’를 맞이하는 예법이 어떻게 되는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리핏 트왈리전은 침착하게 생각하려 애썼고 마침내 솔로처가 죽는 그날까지 궁정 마법사였음을 떠올렸다(혹은 그런 내용의 기록을 보았음을 떠올렸다.). 그 이후로 핸드레이크나 솔로처가 있었던 지위에 도전하려 드는 마법사는 없었고, 그래서 궁정 마법사는 궁성 수비대 대장으로 직위가 변경되어 대 대로 마법사가 궁성 수비 대장을 맡아왔다………….라는 것까지 떠올리고는 리핏 트왈리전은 흡족한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그런 기억들이 코앞에 닥친 당혹스러운 사태에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리핏 트왈리전은 흡족해졌던 것만큼이나 빠르게 침울해졌다.
그래서 솔로처는 리핏 트왈리전이 아무런 대비도 못한 상태에서 궁성 임펠리아의 도개교를 당당하게 걸어들어 왔다. 뒤로는 환호하는 시민들과 그 들을 반쯤 돌아버리게 만들 정도의 환상을 계속 만들어내는 빛의 탑의 길드원들을 대동한 채. 그래서 궁성의 안뜰에 서서 들어오는 솔로처를 보던 리 핏은 절망적인 심정 속에서 왼손을 입 안에 쑤셔 넣었다.
하지만 의외의 인물이 리핏을 구원했다.
솔로처가 마침내 성문을 통과하여 차라리 기절해 버리고 싶어 하는 리핏에게로 걸어들어 올 때, 궁성 안뜰에서 밀짚모자를 눌러 쓴 정원사가 어슬렁 거리며 걸어왔다. 솔로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이 인물을 바라보았다. 정원사는 모자 챙을 위로 올리고 솔로처를 보았고, 그 아래에서 여자의 얼굴 이 나타나자 솔로처는 조금 놀랐다.
정원사 역시 놀란 표정으로 솔로처와 성문 밖에서 열광하는 군중들을 번갈아 보다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정원사는 손을 바지에 쓱쓱 문질러 닦고는 솔로처에게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데미라고 부르세요.”
솔로처는 그 손을 마주잡고 잠깐 흔들었다.
“아, 궁성의 정원사이신가 보군요. 데미 양.”
데밀레노스 공주는 미소를 지었다.
“예. 그런데 성함이?”
“솔로처라고 하오.”
데미 공주는 눈을 커다랗게 뜬 채 솔로처를 바라보았다.
“혹시 아름다운 별명을 가지신 그 솔로처 말씀인가요?”
“무지개의 솔로처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지요.”
데미 공주는 솔로처를 위로부터 아래로 주욱 훑어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아래에서부터 위로 훑어보았다. 데미 공주는 잠시 고민에 잠긴 표정으로 솔 로처를 보다가 힘들게 말했다.
“음…………, 요즘 그쪽 세계 날씨는 어떤가요.”
“뭐요?”
“천국 말이에요. 뭐, 날씨 이야기는 3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무난한 인사고 저 같은 정원사에겐 특히 관심 있는 인사말이랍니다.”
솔로처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막 천국의 날씨에 대한 해괴망측한 이야기를 지어내려고 결심했을 때 궁성 본관의 정문에서 또 다른 사내가 걸 어왔다. 사내는 솔로처를 향해 약간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무지개의 솔로처. 환영합니다. 저는 칼 헬턴트라고 합니다.”
퍼걸러의 지붕에 있는 덩굴들 사이로 봄 햇살이 떨어졌다. 데미 공주는 뜰의 퍼걸러에 300년 만에 부활한 대마법사가 앉아 있은들 꽃에야 무슨 상 관이 있느냐고 생각하는 듯, 꽃밭 앞에 쭈그려 앉은 채 퍼걸러를 싹 잊었다.
엄숙한 걸음걸이로 다가온 궁내 부원은 다기가 든 쟁반을 칼과 솔로처가 앉아 있는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차를 따르려 했다. 하지만 칼은 손을 들어 궁내부원을 제지하고 손수 찻주전자를 기울여 솔로처의 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솔직히, 좀더 조용한 방법으로 찾아주시기를 기대했습니다.”
솔로처는 입술을 조금 뒤튼 채 칼의 얼굴을 마주보았지만 눈앞의 사내의 정체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칼 헬턴트라고 합니다.’ 이것이 칼이 솔로처에게 준 정보의 전부였다. 그래서 솔로처는 어쩔 수 없이 익숙지 않은 추리에 도전해야 했다. 정체를 밝 히지 않는 사람을 상대로 정체를 추측하는 것. 헬턴트라는 성을 보니 국왕은 분명히 아니고, 직함을 밝히지 않았으니 궁성의 관료도 아닐 것이다. 그 렇다면 전통적인, ‘허수아비 국왕을 등에 업은 베일 뒤의 국왕이라는 것일까? 하지만 칼의 손을 본 솔로처는 그런 낭만적인 생각도 포기해 버렸다. 칼의 거친 손마디는 분명 대귀족의 손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솔로처는 자신의 방식대로 나가기로 결심했다.
“당신 국왕이오?”
“예?”
“나는 전하를 만나러 왔소만.”
자. 이제 말해 보거라, 어린 아가야. 솔로처는 진지한 태도로 칼의 대답을 기다렸다. 솔로처는 솔직한 심정으로 ‘제게 말하시는 것이 곧 국왕 전하께 말씀하시는 겁니다.’ 또는 ‘국왕 전하께서는 아무나 만나주지 않으십니다.’ 어쩌고 하는 대답이 나오면 칼의 머리를 지팡이로 후려칠 생각을 하며 즐 겁게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칼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당신의 국왕이 아닐 텐데요, 솔로처.”
“뭐요?”
“당신은 죽었잖습니까. 기사라도 그 충성의 서약은 죽음이 그를 평안하게 할 때까지로 제한합니다. 더군다나 당신은 기사도 아닌 마법사이시잖습니 까.”
솔로처는 잠시 당황하여 칼을 바라보았다. 은근한 유혹, 교묘한 은유 등에 대해서는 준비하고 있었지만 이런 원론적인 질문을 던져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칼은 정말 궁금하다는 식으로 질문해 왔다. 솔로처는 기침을 몇 번 하고 말했다.
“그야 이 시대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국왕 전하께 설명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이 시대에 일어나는 일들이오?”
“부활 말이오. 나나 천공의 기사, 그리고 데스나이트들에게 일어난 일 말이오.”
칼은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시겠지만, 사실 그 외에도 많은 이들이 부활하셨습니다.”
“그야 당연하지!”
“예?”
“당연하다고 했소. 시간을 비끄러맬 수 있는 자가 우리들뿐만은 아닐 테지. 당연히 많은 자들이 부활했을 거요. 아아, 정정, 그렇다고 모든 죽은 사 람들이 부활한 것은 아닐 테지. 예를 들면…………, 루트에리노 대왕 같은 이는 부활하시지 않았을 거요.”
칼은 눈이 번쩍 뜨이는 것을 느꼈다.
“과연 말씀하신 바대로입니다. 대왕님의 부활 소식은 없습니다.”
솔로처는 신이 나서 말했다.
“그럴 줄 알았지! 그래, 또 예를 들어볼까? 흐음. 아마도 여덟 별 중 부활한 이는 아무도 없을 거요. 세류델헨 전하나 에리네드 전하께서도 부활하시 지 않았을 거요.”
“무지개의 대마법사님의 추측에 틀린 바 없습니다. 놀랍군요.”
무지개의 대마법사라는 호칭에 솔로처의 미소가 커졌다.
“놀랄 것 없소. 원인을 아는 자는 당연히 결과도 짐작할 수 있는 거지.”
“원인을 아시는 겁니까? 조금 전 시간을 비끄러맨다고 하셨는데.
“아아, 알고 있지. 그래서 수도로 날아온 거 아니오. 나는 켄턴에서 많은 것을 보았고 많은 것을 배웠소.”
솔로처는 잠시 말을 멈춘 채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레이의 일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와, 그리고 그의 그리폰에 일어났던 일. 그러나 그에게 결 정적으로 확신을 준 것은 딤라이트의 어린 애인인 케이트였다. 솔로처는 케이트에 대해 생각하느라 다시 빙그레 웃었다. 칼은 자꾸 바뀌는 솔로처의 표정을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았지만 아무 말 없이 기다렸다. 상념은 빠르게 지나갔고 솔로처는 다시 침착하게 말했다.
“그래서 결국 이 사태의 원인을 알게 되었지. 아, 다시 정정, 원인은 아직 모르오. 하지만 그 규칙에 대해서는 알게 되었다고 할 수 있소.”
칼은 상체를 앞으로 바싹 내밀며 말했다.
“규칙을 아신다고요?”
“그렇소.”
“어떤 규칙이지요?”
“국왕 전하께 알려드릴 참이오.”
솔로처는 그렇게 말한 다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찻잔을 들어올렸다. 그러고는 짓궂은 눈으로 찻잔 너머 칼을 바라보았다. 솔로처를 살살 구슬려 대답을 들으려고 마음먹었던 칼은 세 가지 사실을 깨닫고 아찔했다. 첫째, 솔로처는 칼의 속셈을 모조리 짐작했다는 것. 둘째, 그래서 솔로처는 거꾸로 칼을 안달복달하게 만들었다는 것. 그리고 셋째, 자신이 거기에 감쪽같이 넘어갔다는 것.
칼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찻잔을 들어올렸다.
“좋습니다. 샌슨 퍼시발 군을 기억하십니까?”
“알고 있소.”
“제 친구입니다. 제가 그곳으로 보냈지요.”
“전하가 보낸 것이 아니란 말이군.”
“예.”
“네놈은 국왕을 등에 업은 이 시대의 실권자 같은 거냐?”
칼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빙그레 웃었을 뿐이었다.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보이는데. 국왕 전하의 손님을 가로챌 수 있는 녀석은 흔치 않아.”
“저는 전하의 손님을 가로챈 적이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이곳에 계시니까요.”
솔로처는 눈을 커다랗게 뜬 채 칼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서 부지불식간에 말이 흘러나왔다.
“저, 전하?”
칼은 기절초풍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예? 어이쿠! 말씀 조심하십시오. 진노한 전하께서 제목을 쳐버리시면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솔로처는 그만 어리둥절해 버렸다. 그러나 잠시 후 솔로처는 펄쩍 뛰며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쟁반을 든 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미소 짓고 있는 궁 내 부원을 바라보았다.
궁내 부원은 웃으며 말했다.
“미안합니다, 궁정마법사님. 나는 닐시언 바이서스라고 합니다. 모자란 머리를 나약한 몸에 얹은 채 감히 바이서스의 왕좌를 차지하고 있는 자입니다.”
“…………이 무슨 해괴망측한 장난이시냐고 고함질러야겠지만, 재미있군요.”
솔로처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드래곤 슬레이어 길시언 바이서스의 아우이자 현 바이서스 국왕, 닐시언 바이서스는 왕홀 대신이라고 말하던 그 쟁 반을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의자에 앉았다.
“예절 차리지 않아도 돼서 더욱 좋긴 합니다만, 이유는 뭡니까?”
솔로처의 질문에 닐시언 국왕은 쓴웃음을 지었다.
“암살자 때문이지요.”
“예?”
“이 시대의 풍문을 들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바이서스는 자이펀과 전쟁 중입니다. 사실 어제만 해도 이 아름다운 궁성에 초청받지 않은 밤 손님이 찾아들었습니다. 그자는 저기 있는 제 누이 데밀레노스를 암살하려 했지요.”
“맙소사, 저런!”
“예. 참으로 무서운 일……”
“정원사가 아니고 공주님이셨군요?”
“……예.”
닐시언 국왕과 칼은 머쓱한 얼굴이 되어 솔로처를 바라보았다. 솔로처는 데미 공주를 돌아보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다가 감개무량한 얼굴로 말했다.
“이건 위대한 왕가의 독특한 전통인 것인지. 왕가의 여성분들은 항상 이러셨습니까?”
닐시언 국왕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런 것 같습니다. 헐스루인 공주님의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그분 또한 공주처럼 행세하시는 일에 서툴렀다고 들었습니다.”
“어디 서투른 정도겠소. 아예 신경도 쓰지 않으셨지요. 참으로 대범하신 분이셨지요. 그분이 임펠 리버 홍수 때 보여주신 일들에 대해서는 들으셨 소? 세류델헨 전하께서 절대 기록을 남기지 말도록 명하셨는데 그 이야기가 전해졌을지 모르겠군요.”
닐시언은 그만 웃어버렸다.
“왕명으로도 언로를 막을 수는 없다는 것에 대한 증거가 될 것입니다. 헐스루인 공주께서 페티코트 차림으로 수재민들을 구하러 뛰어다니신 일 말 씀이지요? 당시 궁정 마법사의 활약상 또한 잘 들어 알고 있습니다.”
솔로처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저 유명한 임펠 리버 홍수, 즉 바이서스 임펠의 6할 이상이 침수되었던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 했다.
그 당시 핸드레이크의 부재중 궁정 마법사 대행 정도로 취급되던 솔로처는 이 전무후무한 자연 재해에서 자신의 솜씨를 마음껏 뽐냈다. 솔로처는 바 이서스 임펠을 완전 침수의 위기에서 구해 냈을 뿐 아니라 추후로 다시는 홍수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임펠 리버의 모양 자체를 뜯어고쳐 버림으로써 사람들의 경탄을 한 몸에 샀다. 하지만 이 사건에서 무엇보다 유명한 것은 ‘페티코트 차림으로 수재민들을 구출한 공주님에 대한 일화였다. 닐시언 국왕은, 사실 헐스루인 공주는 바쁘게 뛰어다니느라 치맛자락을 약간 걷어 올린 것에 불과했지만 공주의 속치마를 본 시민들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 고 그 때문에 그런 소문이 만들어졌다는 사정을 알고는 크게 웃었다.
그 동안 칼은 300년에 걸친 가족사 확인의 현장에서 소외된 위치를 겸허하게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노마법사의 이야기가 끝을 모르고 전개되자, 칼은 점잖게 입을 열었다.
“저, 솔로처 님. 아까 부활의 규칙성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만……”
솔로처는 눈을 껌벅거리며 칼을 보다가 이마를 딱 쳤다.
“아아, 규칙! 그렇지. 그것에 대해 말하러 이곳까지 온 것이었지. 용서하십시오, 전하.”
“아닙니다. 죽음마저도 뛰어넘어 왕가를 위해 달려와 주신 궁정마법사의 충정에 오로지 감사할 뿐입니다. 그래, 궁정 마법사께서 발견하신 그 규칙 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매우 간단한 겁니다.”
솔로처는 그렇게 말을 시작했으나 그 말과는 상당히 다른 표정을 지었다. 잠시 칼과 닐시언 국왕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던 솔로처는 힘들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죽었다 살아난 궁정마법사가 설명하기에는 조금 복잡합니다……”
“그런가요……”
솔로처는 자신의 머리를 벅벅 긁으며 난처해했다. 칼은 솔로처가 머릿속에 명확한 해답을 준비해 두고 있을 것을 의심치 않았다. 다만 이 노마법사 는 그것을 타인에게 들려줄 준비는 별로 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주춤거리던 솔로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따라오시겠습니까?”
물론 닐시언 국왕이나 칼 모두 단순히 괴벽을 부리기 위해 ‘아니오’라고 말하는 취미는 없었으므로, 그들은 노마법사를 따라 의자에서 일어났다. 솔 로처는 휘적휘적 걸어가서는 데미 공주에게 다가섰다.
데미 공주는 꽃들에 그림자가 지자 누가 다가섰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고개를 돌려 솔로처를 바라보았다. 솔로처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실례, 공주님이시라고요?”
“예.”
“동시에 정원사이시기도 하고요.”
“예.”
“이 꽃은 무엇입니까?”
솔로처는 지팡이 끝을 살짝 들어 낮은 키의 화초를 가리켰다. 칼은 솔로처가 가리키는 식물을 알아볼 수 있었다. 데미 공주가 요 근래 계속 근심스러 워하고 있는 팬지였다.
하지만 국왕과 자신을 이끌고 온 솔로처가 갑자기 공주와 노닥거리는 이유는 짐작할 수 없었다. 데미 공주는 걱정하는 얼굴로 말했다.
“팬지예요. 개화가 되면 쉽게 알아보실 텐데.”
“수심이 깃든 얼굴입니다만?”
“아아, 잘 피어나지 않아서 걱정하고 있어요.”
“아아, 그런가요. 그런데 제가 해결책을 제시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데미 공주의 얼굴이 환해졌다.
“어떻게요? 화훼에도 관심이 있으신가요?”
“아니오. 걱정거리에 대처하는 보편적인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예?”
솔로처는 빙긋 웃으며 몸의 중심을 조금 뒤로 옮겼다.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를 걱정거리가 있을 때 가장 좋은 해결책은, 그것을 없애버리는 거지요. 이렇게.”
솔로처는 그렇게 말하며 발을 내려 팬지를 꽉 내리밟았다. 솔로처가 무슨 행동을 하는 건지 알아보기는 했지만 설마 정말로 그렇게 할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던 데미 공주는, 솔로처가 팬지를 다 뭉개버릴 때까지 입만 조금 벌린 채 아무 말도 못하고 멀거니 바라보기만 했다.
솔로처는 꼼꼼하게 팬지를 밟아서는 그 피지 못한 봉오리와 줄기들이 으깨지고 녹색 진물과 초록빛 조각들만 남을 때까지 비벼댔다.
“무, 무슨 짓이오!”
분명히 늦었다고밖에 할 수 없는 시점에서 닐시언 국왕이 거친 음색으로 외쳤다. 칼은 이를 악문 채 행동으로 들어가 솔로처의 등을 밀어버렸다. 노 마법사가 행여나 넘어져 허리라도 어떻게 될 것인가 걱정하는 태도는 전혀 아니었다. 칼은 솔로처를 내동댕이치듯이 밀어냈다. 두 남자 모두 이 꽃들 이 데미 공주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데미 공주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얼굴은 소리 높이 비명을 지르는 자의 얼굴이었다.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며 팬지에게로 다가 갔다. 데미 공주는 박살난 꽃대궁을 힘들게 어루만지다가 고개를 들어 솔로처를 바라보았다. 미리 각오하고 있었지만 솔로처는 데미 공주의 눈에 담 긴 비탄과 억울함에 헛바람을 들이켰다.
“왜…………, 왜…………?”
데미 공주는 말을 제대로 맺지도 못하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눈에서 투명한 눈물이 아롱지다가 마침내 아래로 떨어졌다. 데미 공주는 눈물 을 철철 흘리며 부서진 잎사귀와 줄기들을 어루만졌다.
“왜……?”
솔로처는 입을 꽉 다물었고 팔짱까지 끼었다. 닐시언 국왕과 칼은 험악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솔로처를 바라보다가 마침내 고함을 내지르려고 마음 먹었다. 하지만 그들은 동시에 외쳤고 그래서 그들 자신도 자신의 목소리를 구별할 수 없어 잠깐 멈춰야 했다. 그 순간, 솔로처는 나직하게 말했다. “데미 공주님은 정말 정원사요.”
“뭐야!”
닐시언 국왕은 거의 막말로 외쳐댔다. 그가 궁정 마법사의 멱살을 잡아 패대기치기라도 할 듯한 태세로 앞으로 걸어갔을 때였다. 칼이 황급히 국왕 의 어깨를 붙잡았다. 닐시언 국왕은 고개를 홱 돌렸고 칼은 재빨리 국왕의 어깨를 놓았다.
“무례를 용서하소서, 전하.”
“당신도 저 꽃들이 데미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는 잘 알잖소!”
“예. 알고 있습니다………….. 정정하겠습니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닐시언 국왕은 칼의 횡설수설을 들으며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칼은 입술을 조금 적신 다음 힘들게 말했다.
“하지만 이제서야 공주 전하께서 얼마나 저 꽃을 사랑하시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거요!”
칼은 손을 조금 내밀며 말했다.
“보소서, 전하.”
닐시언 국왕은 칼의 손을 따라 땅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숨을 멈추었다.
팬지는 다시 자라나고 있었다.
아니, 자라난다는 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모여들고 있었다. 부서지고 찢긴 조각들이 한데 모이며 팬지들은 제 모습을 갖춰갔다. 데미 공주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눈을 커다랗게 뜬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닐시언 국왕이 의미 없는 신음을 흘리는 가운데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팬지는 미풍이 불자 가볍게 흔들렸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조심스럽게 꽃을 만지던 데미 공주는 고개를 들어 솔로처를 바라보았다.
“마법사님께서 하신 일인가요?”
솔로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공주님께서 하셨습니다.”
“제가요?”
솔로처는 자상한 미소를 지었다.
“공주님이 진짜 정원사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이런 과한 실험은 하지 못했겠지요. 하지만 저는 조금 전 전하의 설명으 로 확신을 가졌습니다. 공주님은 제가 모시던 헐스루인 공주님을 많이 닮으셨습니다.”
데미 공주는 혼란으로 가득 찬 얼굴로 말했다.
“진짜 정원사……, 무슨 말씀이신지……”
솔로처는 데미 공주의 얼굴에서 헐스루인 공주가 아닌 또 다른 여인의 얼굴을 보았다. 어린 키티 데시. 어머니를 부활시킨 것은 바로 너였다고 솔로 처가 말해 주었을 때 케이트는 꼭 저런 표정을 지었다.
“꽃들을 정말 사랑하고, 피어보지도 못한 꽃들의 죽음에 눈물 흘리고, 마침내 그들을 부활시킬 정도로 사랑하는 정원사 말입니다.”
솔로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키티 데시는 벌써 오래 전에 어머니를 부활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케이트는 어머니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 지 못했다. 아니, 내면 깊숙한 곳에서는 알고 있었을지 몰라도 겉으로는 알지 못했다. 자신이 성숙했다고 믿는 멍청한 어른들 때문이다. 그들은 케이 트의 어머니가 하늘에 있다고 말했고, 어린 키티 데시는 그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딤라이트의 도움으로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 이게 된 케이트는 당장 그 어머니를 부활시켰다.
솔로처는 쓴웃음을 지었다. 레이디를 보호하는 것이 기사의 숙명이라지만, 엄숙한 딤라이트가 어린 레이디 키티 데시를 도운 사실에는 쓴웃음 이외 에 다른 표정을 짓기 힘든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래. 이것이 규칙이야.
“잠시라도 공주님께 심려를 끼쳐드린 것에 대해 사과드리겠나이다. 닐시언 전하께서는 지금 궁정 마법사를 참수한 첫 번째 바이서스 국왕이 되고 싶으신 표정이군요. 하하하. 용서하십시오, 전하.”
닐시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이게 도대체…………, 당신이 한 일이 아니라고요? 당신 마법이 아닙니까?”
“아닙니다.”
“그럼 ・・・・・
닐시언 국왕의 말은 칼에 의해 완성되었다.
“그럼 이것이 요즘 들어 일어나는 사건들의 규칙입니까?”
국왕은 칼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다시 솔로처를 바라보았다.
솔로처는 씩 웃었다.
“그렇습니다. 전하. 바로 이것이 규칙입니다.”
칼은 물어뜯기라도 할 듯한 태도로(표정은 그렇지 않았지만 급하게 달려드는 태도는 꼭 그러했다.) 질문했다.
“이해가 안 됩니다. 우리들이 죽은 이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그들에 대한 사랑으로 그들을 부활시켰단 말입니까? 하지만 그렇다면 설명되지 않는 점 이 너무 많습니다. 설령……… 그래요, 대왕님은 어떻습니까? 루트에리노 대왕 말씀입니다. 그분은 바이서스 국민 전체의 사랑과 존경을 받습니다. 그 런데 왜 그분은 부활하시지 않는 겁니까?”
닐시언 국왕은 깜짝 놀란 표정이 되더니 곧 솔로처가 대왕을 죽이기라도 했다는 듯한 표정으로 솔로처를 바라보았다. 솔로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잘못 이해하셨소, 칼.”
“예?”
“사랑이 아닙니다……………. 물론 사랑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것과는 다릅니다. 나를 볼까요. 나는 대마법사의 제자입니다. 사람들이 그들의 애정으 로 부활할 상대를 고른다면 나보다는 내 사부님이 부활할 가능성이 높지요. 하지만 부활한 것은 납니다.”
“그럼?”
솔로처는 씁쓸한 얼굴이 되었다.
“내가 부활한 이유는 나 자신 때문입니다. 실제로 근래 일어나고 있는 많은 부활은 대개 그런 이유 때문일 겁니다.”
“예?”
다시 의자에 앉은 솔로처는 차분한 태도로 설명을 시작했다. 그 설명은 그렇게 조리 있는 설명은 아니었다. 솔로처는 실험가나 학자의 성향은 넘치 도록 가지고 있을진 몰라도 저술가나 연설가의 성격은 별로 가지지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그의 주요한 관심은 인간을 다루는 기술이 아니라 마나를 다루는 기술에 있었다. 하지만 솔로처는 자신이 웅변의 대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가 먼저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담담하게 사실만을 말했기에 닐시언 국왕과 데미 공주, 그리고 칼이 그의 설명을 듣는 데는 큰 불편이 없었다.
“부활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지지만 그 본질은 같소. 조금 전 말했던 키티 데시의 어머니나 공주님의 꽃 같은 경우와, 나나 천공의 기사들, 그리 고 데스나이트들의 경우가 있소. 그 두 가지는 타자에 의한 부활이냐 자신에 의한 부활이냐로 나뉠 수 있소. 그러나 그 본질은 간절한 바람이라는 점 에서 같소.”
칼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글쎄요…………. 솔로처 님의 경우는 켄턴 시민들의 간절한 바람으로 부활하신 것일 수도…………”
“아니오!”
솔로처는 단호하게 말했다. 워낙 격한 감정의 분출에 테이블은 잠시 고요해졌다. 솔로처는 사나운 표정으로 테이블을 노려보다가 목소리를 조금 누 그러뜨리며 말했다.
“아니오, 칼. 그렇지 않소. 이제는 잘 알게 되었소. 그것은 나 자신에 의한 부활이었소. 켄턴 시민들은 유피넬의 저울에 걸린 데스나이트의 추로서 내가 부활했다는 식으로 말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소. 내 부활에는 전능한 신의 섭리 같은 것은 개입되지 않았소. 다만 한 인간, 그것도 자괴감에 빠져 있던 한 인간의 나약한 의지가 있을 뿐이오.”
테이블은 좀더 깊은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칼은 힘들게 말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부끄러운 일이오……”
“예?”
솔로처는 슬쩍 얼굴을 쓰다듬었다.
“내 후학들은 말할 것도 없고 켄턴 시민들이나, 이곳 바이서스 임펠의 시민들이나 모두들 나를 대마법사로 기억하고 있었소. 하지만 한 사람은 그렇 지 못했지. 그건 바로 나요. 대마법사의 제자, 차석 궁정 마법사, 핸드레이크라는 저명한 책에 따라다니는 부록…………… 나 스스로가 나에게 붙인 이름들 이오. 다른 사람들에게 비하 받는 것이 두려워 스스로가 먼저 자신을 비하하며 사는 삶, 이해할 수 있겠소?”
“이해됩니다.”
칼은 정말 이해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한다. 비웃음을 당하는 것이 두려워 스스로가 먼저 자신을 비웃어버리는 사람은 의외로 많 다. 아니, 거의 모든 사람들이 어느 한 시점에서 그런 행동을 취하곤 한다.
“그래서 나는 부활했던 거요. 나 스스로가 나를 안타깝게 여긴 거지. 자기 연민이라고 불러도 좋고 자기 집착이라고 불러도 좋소. 데스나이트의 예 는 퍽이나 확실한 예일 거요. 그들을 안타깝게 여길 자들이 그들 자신 이외에 그 누가 있겠소? 그들이 스스로를 안타깝게 여긴 것인지 자신의 죽음에 대해 분노한 것인지는 칼 당신이 판단해 보구려. 어쨌든 여기에는 안타깝게 죽어간 자들이 스스로에게 가지는 연민과 죽음에 대해 가지는 분노, 뭐 그런 것들이 관련되어 있소. 자이펀 어에 이런 것을 나타내는 짧은 말이 있는데……
칼은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Hjan이지요.”
솔로처는 고개를 끄덕였다.
“Hjan? 그래요. 그것인 것 같소. 어쨌든 천공의 기사들, 먼 나라까지 원정해 와서 젊고 활기찬 나이에 죽어야 했던 그들은 자신들의 죽음을 받아들 이지 못하고 부활했소. 이것은 자신에 의한 부활이오. 키티 데시의 어머니나 데미 공주의 팬지 같은 경우는 아까도 말했듯이 타자에 의한 부활이고. 두 번이나 부활한 킨 크라이의 경우도 있지. 아까 말했던 그레이 휠드런의 그리폰 킨 크라이는 먼저 그레이와 함께 부활했고, 그의 죽음에 대해 절절 하게 안타까워한 그레이에 의해 다시 한번 부활했소.”
“그럼 대왕이나 여덟별이 부활하지 않았다고 단언하신 것은……?”
“대왕의 유명한 말씀이 해답이 될 거요. 죽음은 약속된 휴식이라는.”
“아아……”
300년 후의 세대들은 다만 피상적인 느낌 속에서 고개를 끄덕였지만 실제로 그의 모습을 보고 그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았던 솔로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런 분은 없으셨소. 스스로 일어서서, 스스로 걸어가지요. 오만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의존적이고 비겁한 자들의 눈에 보이는 모습일 뿐이었소. 그분은 끝까지 자신으로 살았고 자신으로 죽었소. 남겨둔 안타까움이 설마 조금은 있을지 몰라도, 대왕께서는 그것에 슬퍼하고 연연해하 시지는 않을 거요. 따라서 이 시대의 어떤 알 수 없는 이유가 죽은 자들의 안타까움을 자극한다 하더라도 그분만은 그런 자극에서 자유로우실 거요. 내가 자신 있게 대왕을 거론한 것은 그런 확신 때문이오.”
칼은 잠시 깊은 생각에 빠진 얼굴로 퍼걸러의 지붕을 장식하고 있는 덩굴들을 바라보았다. 데밀레노스 공주는 몸을 조금 앞으로 내밀며 솔로처에게 말했다.
“제가 정리해 봐도 될까요.”
“듣겠습니다.”
“작금의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이 부활이라는 사태들은, 어떤 죽은 자들에 대해 그 스스로가, 또는 그를 기억하는 다른 사람이 가지는 안타까움에 기 반하고 있다는 것인가요. 그 스스로이든 아니면 다른 사람이든 그에 대한 안타까움이 깊으면 그자는 부활한다는 것인가요.”
“그렇소.”
“하지만, 그런 안타까움은 어느 시대의 누구에게나 있었을 텐데요.”
“공주님. 그래서 나는 규칙이라고 했지 원인이라고 하지 않았던 겁니다.”
“시간 정지……”
칼이 갑자기 말했다. 솔로처와 데밀레노스 공주의 대화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던 닐시언 국왕은 칼을 바라보며 반문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칼?”
“시간이 정지했기 때문이군요. 그렇잖습니까, 솔로처?”
솔로처는 고개를 몇 번 주억거렸지만 그것은 긍정의 뜻을 나타낸다기보다는 그저 칼의 생각하는 방식에 대한 동조였다. 솔로처는 확실성이 없는 어 투로 말했다.
“그것이 가장 두드러지며, 근사하게 맞아떨어질 것 같은 원인이기는 하오. 시간이 정지하기 전에는 그 어떤 그리움과 안타까움으로도 과거를 붙잡 아 매둘 수는 없었을 거요. 그리고 그 때문에 그리움과 안타까움은 더욱 깊어질 수 있었겠지. 하지만 이 시대에서 시간은 정지했고, 그래서 현재는 스 스로를 사랑하여 자신을 붙들어 맸고, 과거를 향한 그리움은 그들을 불러들였소. 미래…………, 미래를 그리워하고 안타까워하는 사람은 없을 거요. 그러 니 미래는 오지 않는 것이고. 따라서 시간은 정지되었소.”
닐시언 국왕과 데미 공주는 동시에 눈을 찌푸렸다. 솔로처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모르겠군요.”
“어떤 것이 원인이고 어떤 것이 결과인지는 판단하는 것은, 때론 가장 간단해 보이는 일에서도 뜻밖에 지난한 법이지요. 더군다나 요즘과 같은 이 복잡한 사태에서는 더욱 그러할 게고.”
솔로처는 말을 마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궁성의 돌벽을 타고 기어오르는 담쟁이덩굴을 바라보았다.
“여러분들의 현재는 정지했소.”
칼은 깊은 오한을 느꼈다.
“언제나 여러분들을 이끌어주던 희망 대신, 그리움이 여러분들을 이끌고 있소. 희망은 미래를 끌어오는 힘이지만 그리움은 과거를 끌어오는 힘이 오. 나는 다른 현재에서는 부활할 수 없었을 거요. 나 자신의 안타까움이 아무리 깊었다 한들 그 안타까움만으로 현재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을 거요. 하지만 여러분들의 정지된 현재는 따라잡을 수 있었고, 그래서 나는 이 현재에 몸을 실었소. 그래서 나는 이 현재에서 부활한 거요. 거꾸로, 이 현재 에 살고 있는 이들은 그들의 안타까움만으로 과거를 끌어올 수도 있게 되었고, 이해하시겠소?”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솔로처는 천천히 걸음을 떼어 퍼걸러 밖으로 나섰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도 이해하실 테고?”
“예.”
“원인을 찾아내시오. 이 현재가 정지해 버린 원인을. 이 현재가 영원히 게으른 낮잠 속에 과거의 꿈에 취해 있게 만드는 이유를. 그래서 이 현재로 하여금 잠에서 깨어나 다시 달려가게 만드시오. 더 많은 과거의 것들이 이 현재를 따라잡기 전에, 미래가 더욱 멀어지기 전에.”
“솔로처, 당신께서 도와주시면…….”
“안 돼.”
솔로처는 단호하게 말했다. 칼은 입을 깨물었다.
“미학적인 이유에서도, 실제적인 이유에서도 그것은 불가능한 말이오. 나는 이 현재에 속한 이가 아니오. 여러분들의 문제는 여러분들이 풀어야 합 당하지 않겠소?”
“그렇군요.”
“실제적인 이유에서, 나는 그 원인이라는 것을 찾아내기도 어려울 거요. 그것은 이 현재에 속한 것이며 이 현재를 다른 현재들과 구분 짓는 독특한 것이니. 게다가 나는 켄턴에서 할 일이 많소.”
“데스나이트의 일 말씀이군요.”
“그리고, 깨어진 우정의 뒷감당도 있지.”
퍼걸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되묻지도 않았다. 솔로처의 말에는 되묻는 것을 거절하는 어조가 담겨 있었다. 솔로처는 이 제 대화는 마쳤다는 태도로 한숨을 내쉬고는 궁성을 바라보았다.
“이제, 미련은 없소. 다시 한번 빛의 탑을 보았고, 궁성을 봤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