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 워커 4권 – 9장 기다림의 해변 4

퓨처 워커 4권 – 9장 기다림의 해변 4


4

탄느완의 수면은 마치 수은처럼 무겁고 잔잔하게 보였다. 실제로 선원들이 ‘무거운 물’이라고 부르는 바다인 것이다. 이곳의 물고기들은 결빙되기 직전의 바스락거리는 물을 들이마신다. 얼음장 같은 수면을 바라보던 할슈타일 후작은 고개를 돌려 신차이 선장을 마주보았다.

“왜 나를 그렇게 보는 건지 물어봐도 될까.”

“……당신은 산 자가 아니오.”

할슈타일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웃은 사람은 그뿐이었다. 이시도는 눈을 크게 떴고 궤헤른은 반대로 눈을 가늘게 떴다. 쳉은 미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뒤쪽에서 고요한 눈으로 신차이 선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차이는 갑판 위의 덱체어에 앉아서는 긴 외투를 어깨에 걸친 채 팔짱을 끼고 할슈타일 후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떨어진 눈송이들이 녹았다가 다시 얼어붙어 옷은 금속성의 광택을 띠고 있었고, 신차이 선장의 얼굴 역시 밀랍 빛깔을 띠고 있었다. 궤헤른은 그 얼굴이 이 새하얀 하늘 아래 퍽 아름다 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할슈타일은 커다란 망토를 신경질적으로 여미며 말했다.

“콜・・・・・・, 콜록! 그럼 난 뭐지.”

“당신을 설명할 언어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거나 내가 들어보지 못한 것 같소.”

“자네는 누구의 지혜를 잇는 거지.”

“바다.”

“바다. 감히 그림 오세니아의 지혜를 잇는다고 말하는 건가. 그럼 최후의 헬카네스에게 묻겠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모르겠소.”

대답하며 신차이는 부스스 일어났다. 그가 일어서자 쳉은 이 사내가 얼마나 위압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렇게 키가 큰 것 도 아니고 우람한 체격도 아니었지만 쳉은 신차이 선장을 올려다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장신의 쳉에게는 희귀한 일이었다.

똑바로 일어난 신차이는 할슈타일 후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시도 군에게 듣기로 당신들은 누군가를 추적하고 싶어 한다고 들었습니다. 누구를 쫓고 있는 겁니까?”

“내 죽음의 열쇠 보관자.”

할슈타일 후작은 나직하게 말했고 신차이 선장은 그 대답이 버겁다는 듯이 얼굴을 조금 돌렸다.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아야 간신히 알아차릴 수 있는 싸락눈이 춤추듯 흩날리고 있었다. 빙하의 기슭에 힘들게 자라난 가문비나무 가지들은 흰 견장 을 달고 있었지만, 바다는 빨아들이듯 눈을 흡수하고 있을 뿐 잔물결조차 없이 고요했다. 신차이는 다시 고개를 돌려 후작을 보았다.

“진정한 죽음을 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 번 죽어봤기에,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아니까.”

신차이는 후작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다른 사람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쳉의 겨드랑이 아래 가냘픈 모습으로 서 있는 미의 얼굴이었다. 신차이는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가 쳉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당신들은 전부 이분의 수하들입니까?”

“나와 미는 아닙니다.”

“당신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여기…………, 미를 돕는 것입니다.”

“그래요?”

신차이는 다시 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의 질문은 쳉을 향하고 있었다.

“그 아가씨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쳉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자이펀 인의 관습 하나를 떠올릴 수 있었다. 쳉은 고개를 돌려 미를 바라보았다. 그러곤 더욱 의아해져 버렸다. 미는 멍한 눈으로 신차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홀린 것 같은 미의 눈빛은 신차이의 온몸을 훑어 내리고 있었다.

미는 조금 더듬거리며 말했다.

“미는………… 몰라요.”

모른다고? 쳉과 궤헤른은 다시 놀란 표정으로 미를 바라보았다. 신차이는 눈썹을 찌푸리다가 다시 쳉에게 말했다.

“저 아가씨는 모르는 것인지 말할 수 없는 것인지 물어봐주겠습니까?”

“몰라요.” 미는 대답했다. “나는 정말 모르겠어요.”

이번엔 후작과 미 자신을 제외한 일행 전부가 당황했다. 미가 저런 대명사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는 일행 전부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차이와 레드 서펀트의 선원들은 눈앞의 사람들이 왜 놀라는지 알 수 없었다. 신차이는 어깨를 조금 움츠렸다가 폈다.

탄느완에는 큰 볼일이 없다. 대충 알아본 바로 상관 설립은 가능할 것 같았다. 일스를 경유하는 중계 무역 항로의 설정, 그리고 탄느완 주재 상관 설 립과 그 부대비용, 유지비 등에 대한 대충의 계획서도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았기에 신차이는 그것으로 선주나 선주 연합에 제출할 항해 성과로는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자이펀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그것이 신차이의 고민거리였다. 그로선 운차이의 소식을 좀더 알아보고 싶었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일이었기에 이곳에 체류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물론 선원들은 그의 결정을 존중하겠지만……………

3주라. 신차이는 생각했다. 3주 동안 북해를 조금 돌며 해도를 작성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그 후 다시 탄느완으로 돌아와 운차이의 소식을 좀 알아본 다음, 그 결과에 따라 차후 행동을 결정하자. 어쨌든 시간은 벌 수 있을 것이다. 신차이는 후작을 바라보았다. 그 기간이라면 이 불가사의 한 인물에 대한 탐구도 가능하겠지.

“승선을 허가하겠습니다. 출항일은 언제로 하면 좋겠습니까? 추적이니 만큼 빠르면 빠를수록 좋을 듯합니다만.”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은 어떤가.”

“오늘 저녁 썰물 때 가능할 겁니다. 저녁 식사 시간 후가 되겠군요.”

“알았어. 준비는 크게 필요하지 않겠군.”

후작은 몸을 돌려 궤헤른과 니크, 가이버, 사무엘 등을 바라보았다. 이 험악한 곳까지 스스로 납득할 수도 없는 이유에 의지하며 그를 따라와 준 사 내들. 후작은 조금 쿨럭거린 다음 바이서스 어로 말했다.

“너희들의 봉사에 감사하게 생각한다.”

니크는 충격받은 얼굴이 되었다. 표현은 덜할지 몰라도 다른 사내들 역시 당황한 얼굴로 후작을 바라보았다.

“너희들은 이대로 하선하도록. 내 말은 너희들 마음대로 처분해라, 내겐 이제 필요없으니. 함께 자구책을 찾든지 그냥 헤어지든지는 너희들이 결정 해라. 헤어지기로 결심했다면 궤헤른이 남아 있는 돈을 알아서 나눠주도록. 하지만 되도록이면 함께 턴빌로 돌아가라. 그리고 신스라이프의 재산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해라. 어렵긴 하겠지만, 궤헤른 자네를 믿겠다.”

“후, 후작님!”

“따라갈 겁니다. 그리고 후작님과 함께 돌아올 겁니다!”

니크와 사무엘이 동시에 외쳤고 가이버 역시 완강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궤헤른은 조금 슬픈 표정으로 후작을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후작은 일그러진 얼굴로 수하들을 쏘아보다가 갑자기 외쳤다.

“이 머저리들!”

조금 전까지 쿨럭거리던 사람의 외침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목소리였다. 이시도는 기겁한 표정으로 후작을 보았다.

“나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런데 뭘 따라오겠다는 거냐!”

“후, 후작님…………”

스르렁! 후작에게 다가가려던 니크는 갑자기 튀어나온 칼날에 멈칫했다. 후작은 검을 똑바로 들어 니크를 겨냥하고 있었다. 이시도는 잇소리를 내며 재빨리 목검을 꼬나들었지만 신차이 선장은 손을 들어 이시도를 제지했다. 후작은 타오르는 눈으로 니크와 가이버, 사무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대로 보트를 타고 돌아가지 않는다면 너희들 전부를 베겠다.”

니크는 침을 꿀꺽 삼켰다. 후작은 농담을 과히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후작의 말이 진심인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니크는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가이버와 사무엘 역시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그때 궤헤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즐거웠다고 말하긴 어렵습니다만……”

니크와 가이버, 사무엘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돌아보았지만 후작은 차분한 얼굴로 궤헤른을 보았다. 궤헤른은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을 알고 당신과 함께했다는 것에 대해 후회는 하지 않을 겁니다.”

궤헤른은 고개를 조금 숙여 보였다.

“안녕히, 나의 주인님.”

매서운 해풍 속에, 씁쓸함과 처연함이 가득한 궤헤른의 바이서스 어는 이시도의 귀에도 잘 들려왔다. 이시도는 알 수 없는 슬픈 감정에 눈을 끔뻑거 렸다.

궤헤른은 그대로 몸을 돌려 보트를 향해 걸어갔다. 니크는 울음을 터뜨릴 듯한 얼굴이 되어 다시 한번 후작을 바라보았지만 후작은 엄한 얼굴을 할 뿐 무언으로 그를 쫓아내고 있었다. 니크는 기어코 눈을 거칠게 비벼대며 보트에 올랐다. 가이버와 사무엘 역시 힘없는 걸음걸이로 보트에 오르자 궤 헤른은 보트의 노잡이들에게 짧게 명령을 보냈다.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한 보트는 탄느완의 부두를 향해 멀어져갔다. 후작은 그제서야 검을 검집에 넣었다.

신차이는 후작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배 위에서는 선장의 명령 없이 무기를 사용하는 것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습니다. 앞으로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후작은 희미하게 웃었다.

“걱정 말게, 선장. 내 검을 지금 당장 바다 속에 던져 넣지 않는 까닭은 이것이 단 한 번 더 사용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야. 그리고 그 대상은 이 배의 그 누구도 아닐세. 부탁인데, 나를 선실로 좀 안내해 주겠나.”

“먼저 항로를 가르쳐주십시오.”

“그것은 저기 미가 가르쳐줄 거야. 나는 쉬고 싶네. 춥고, 피곤하군.”

후작은 강제로 떠나보낸 부하들 때문에 외롭고 슬프기도 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신차이는 후작이 말하지 않은 것을 읽을 수 있었다. 신차 이는 고개를 돌려 이시도에게 말했다.

“그분을 선실로 안내하라. 프리스트 치터리가 묵던 선실이면 되겠군.”

“알겠습니다.”

후작은 옷자락을 여미며 힘없이 배낭을 들어올렸다. 이시도는 후작의 초라한 모습을 보며 놀랐다. 조금 전 검을 뽑아들고 호령하던 사내는 어디로 간 거지? 후작은 외로운 병자처럼 보였다. 이시도는 후작을 승강구로 안내하며, 부축해 드리겠다는 말이 목구멍에서 빙빙 도는 것을 느꼈다.

신차이는 쳉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영문을 몰라 하던 쳉은 불현듯 정신을 차리고 미를 내려다보았다. 미는 낮고도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목적지는 정북. 나침반의 바늘을 그대로 따라가 주시면 돼요.”


“얼음, 눈, 바람, 전 싫어, 제발 싫어요, 부디 싫어요, 한결 싫어요, 추위가 싫어!”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아일페사스를 바라보던 운차이는 음울하게 말했다.

“그렇게 떠들 수 있는 건 너뿐이야. 다른 사람들을 보시지.”

“루리, 추워?”

“아니오……………, 별로.”

“린, 추워?”

“글쎄요.”

“센추리온, 추워?”

“이힝힝힝.”

“저만 추워, 저만 추워. 불공평해. 저는 불공평한 것이 싫어. 엥엥엥!”

운차이는 아일페사스에게 왜 추위에 크게 개의치 않는 자들에게만 질문하면서 아프나이델이나 제레인트, 네리아 등에겐 물어보지 않는 거냐고 윽박 지르고 싶은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그래봤자 듣지 못한 척하거나 무시해 버릴 것이 빤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운차이는 드래곤 로드의 딸에게 재갈을 물릴 경우 드래곤 로드로부터 몇 년 정도 도망다니면 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그것 은 그의 취향에 퍽 잘 들어맞는 공상이었지만, 그런 행동으로 인해 야기될 결과는 별로 취향에 맞지 않았다.

이루릴은 걱정스러운 눈길로 아일페사스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아일페사스. 당신은 날씨에 대한 강력한 면역이 있을 텐데요. 극지의 블리자드나 화산의 열기도 당신을 침범하지는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만.”

아일페사스가 대답하기에 앞서 제레인트가 먼저 대답했다.

“다만……………, 칭얼거리고 싶은 유혹에 대한 면역은 없는 거겠지요.”

제레인트의 목소리에마저 짜증스러움이 섞여 있었다. 아일페사스는 눈을 홉뜬 채 제레인트를 쏘아보았지만, 갑자기 그녀의 머리 위에서 커다란 천 이 내려와 눈앞을 가로막았다. 아일페사스는 천을 치우며 옆을 보았고 초췌한 모습의 아프나이델이 두르고 있던 망토를 풀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 로 자신에게 덮어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일페사스는 어이없는 얼굴로 아프나이델을 바라보았다.

“나이드, 미쳤어요?”

아프나이델은 셔츠 바람으로 덜덜 떨면서도 히죽 웃었다.

“어, 언젠가는 그렇게 되었다는 이유로 존경, 존경받을 수 있는 직업에 종사하고 있긴 하, 하지.”

“너 돌으셨구나? 빨리 가져가서 입어! 인간 주제에 말이야, 얼어죽으려고!”

아프나이델은 이를 딱딱 부딪히면서도 애써 아일페사스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일페사스의 눈꼬리가 아래로 처졌다. 그녀는 기분 나쁘다는 듯이 망토를 거머쥐어 아프나이델에게 내밀었다.

“알았어요, 알았어! 안 떠들면 되시는 거잖아. 너 말이에요, 건방져. 드래곤 로드의 계승자인 아일페사스를 훈계하려는 거야?”

아프나이델은 싱긋 웃으며 망토를 받아들었다. 아프나이델의 등 뒤에 앉아서 그 모든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엑셀핸드는 미소를 지었지만, 풍성한 수 염 때문에 그의 입술 움직임은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다. 얼어붙은 손을 힘들게 놀려 망토의 조임끈을 묶은 아프나이델은 아일페사스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일페사스의 눈꼬리는 여전히 꿈틀거리며 춤을 추고 있는 상태였다. 아프나이델의 눈빛을 알아차렸으면서도 아일페사스는 찌푸린 눈으로 센추리 온의 갈기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프나이델은 속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주의 깊게 지켜본 바에 따르면 아일페사스는 이 북쪽의 바람이 어깨에 닿는 순간부터 모든 것에 대해 불만스러워하고 있었다. 사람으로 따지자면 별 무리 없이 정서 불안이라고 말해 버리겠지만, 드래곤에 대해서도 그런 진단이 가능한 것인지 아프나 이델은 확신할 수 없었다.

아일페사스를 보고 있던 아프나이델은 갑자기 이상한 느낌을 받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선 이루릴이 표정 없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프나이델은 왠지 모르게 어깨를 조금 움츠렸다. 다음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말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프나이델.’

메시지? 아프나이델은 눈을 조금 크게 뜨며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이루릴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을 보았다.

‘아일페사스에 대해 우려하고 있으세요?”

1. ·렇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신 거죠? 캐스팅하신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는데 어떻게…………….’

‘그건 천천히 말해도 되지 않을까요.’

‘아, 예. 미안합니다.’

아프나이델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주제에 마법사라고 관심은 그런 곳으로밖에 가지 않는군. 이루릴은 여전히 앞을 바라보며 메시지를 보내왔다.

‘저도 걱정하고 있어요. 그녀에게서 불안함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인간 여러분에게는 지독한 날씨임에 분명하지만 사실 이 추위는 그녀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을 거예요.’

‘물론 그렇겠지요. 왜 저러는지 궁금합니다.’

‘그녀는 보호받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보호요?’

아프나이델은 의아한 얼굴로 이루릴을 바라보았지만 이루릴은 여전히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프나이델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상록수의 잎들 사이로 부는 칼날 같은 바람은 어둑어둑해 가는 고갯길을 더욱 스산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남색 하늘에 떠다니는 어두운 구름들은 제 멋대로 춤추고 있었다. 보다 온화한 날씨에서는 보기 힘든, 거의 발광이라고 불러주는 것이 마땅할 구름의 움직임은 바라보는 사람의 정신까지도 어 지럽게 만들었다.

그런 고갯길을 일행은 힘들게, 그러나 변함없는 끈기로 걸어올라 가고 있었다. 선두에 운차이, 그리고 후미에 그란이라는 배치는 일행에게 강력한 추진력을 선사했다. 맹수의 으르렁거림 같은 바람 소리는 일행의 어깨를 움츠러들게 했지만, 제레인트나 아프나이델마저도 딱딱한 얼굴을 한 채 이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고갯길을 끈기 있게 걸어올라 가고 있었다.

갑자기 이루릴의 메시지가 들려왔다.

‘아프나이델. 드래곤 로드는 왜 당신들에게 아일페사스의 후견인의 역할을 부여했을까요?”

‘어떤 의미인지………….?

‘글쎄요. 지금의 이 여정을 보고 있으니 왠지 의아한 생각이 듭니다.’

‘의아하시다고요?”

‘아일페사스가 이 북구까지 오게 된 이유가 뭐죠? 그녀에게 이유가 있을 것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녀는 당신들을 따라오고 있는 것이겠죠?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요.’

이루릴은 잠시 말을 멈췄다. 어둠 속에서 거의 보이지도 않는 그녀의 검은 머릿결을 보려 애쓰던 아프나이델은 이 침묵이 이루릴의 배려임을 깨달았 다. 아프나이델, 생각해 보세요. 아프나이델은 다시 아일페사스를 돌아보았다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아프나이델은 이루릴을 쳐다보았다.

‘드래곤 로드는 신스라이프를 추적시키기 위해 그녀로 하여금 우리를 따라다니게 한 거란 말씀입니까? 우리는 그녀의 안내자라고요?”

‘지금의 현상은 그렇게도 말할 수 있지 않나 생각되네요.’

‘하지만……………, 그건 원인과 결과가 잘 연결되지 않는…………….’

‘원인과 결과라고 하셨나요.’

아프나이델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의 머릿속에 섬광 같은 것이 지나쳤다.

시간이 멈춘다면, 원인과 결과의 전후 관계 따위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아프나이델은 곱아드는 손가락을 힘껏 구부려 주먹을 쥐었다. 손 끝에서 감각이 되돌아오는 것을 느끼며 아프나이델은 거세지는 심장의 박동을 가라앉혔다.

그때, 일행의 앞쪽에서 가벼운 술렁거림 같은 것이 들려왔다.

아프나이델은 앞쪽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밤하늘을 배경으로 운차이의 뒷모습을 알아보기는 어려웠지만, 그가 고갯마루의 정상에 우뚝 서 있다는 것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고개를 다 올라온 것인가? 아프나이델은 힘겹게 언덕 위로 올라섰다. 그의 등 뒤에서 엑셀핸드의 지 긋지긋해하는 탄성이 들려왔다.

“오오, 카리스 누멘이여. 이 고개를 끝나게 해주신 것에 감사드리나이다.”

마지막으로 그란과 돌맨 할슈타일이 올라선 다음, 일행들은 잠시 언덕 정상에 모여 선 채 발 아래를 바라보았다. 내리닫는 길의 모습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검은 숲과 구불텅거리는 산자락 사이로 멀리 평평한 어둠이 보였다.

제레인트는 눈을 찌푸린 채 발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나직하게 말했다.

“아, 바다군요. 그런데 저기 하얀 것은 뭐지요?”

이루릴이 태연스러운 어투로 대답했다.

“빙하군요.”

“빙하”

“얼음의 강……. 산 정상에서 쌓인 눈이 얼음이 되어 계곡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에요. 마치 강처럼. 물론 강처럼 빠르지는 않습니다. 자신의 무게 로 천천히 미끄러지는 거니까요.”

“Afhick, Dotimasir ba ami…………

어둠 속에서 운차이의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네리아는 킥 웃고 말았다. 운차이의 목소리는 정나미가 뚝뚝 떨어진다는 투였다. 물론 그 의미는 알 수 없었지만 운차이가 세상에 빙하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 어처구니없어하며 모종의 욕설을 퍼붓고 있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확실했다. 이루 릴은 조용히 설명을 계속했다.

“그런 빙하들이 바다에 닿았을 때 부서져 빙산이 되는 것입니다. 저기 밤바다에 흰 덩어리들이 보이시나요.”

“테페리여, 저는 저것이 범선의 돛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좀 이상하게 보이긴 했지만. 저게 얼음 덩어리입니까?”

“그렇습니다.”

“불빛이…………, 저기가 탄느완인가 보군요. 어두워서 길이 잘 보이지 않는데, 거리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루릴은 잠시 산자락과 검은 숲을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빙하가 문제군요. 내려가는 계곡 중간에서 빙하를 잠시 타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어두운 밤이라면 여러분들껜 너무 어려운 일일 것 같은데 요. 서두르다가 빙하 가운데서 오도 가도 못하게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니 내일 오전 중에 닿을 생각을 하고 느긋하게 내려가는 것이 좋겠습니 다.”

암흑의 산속에서 엘프의 조언을 무시할 만큼 무모한 자는 아무도 없었기에, 일행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루릴이 가벼운 목소리로 “자, 출발할까요.”라고 말했을 때도 일행들은 한숨만 내쉬었을 뿐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 일을 주저하지는 않았다.

아래로 향하는 길을 따라 내려가며 이루릴은 다시 먼 탄느완의 도시와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때 엘프의 경이적인 시각에 빙산들 사이로 사라져가는 돛이 보였다. 저것은 범선인가.

이루릴은 잠시 그 범선에 주목했다. 다크 실버의 바다와 화이트 블루의 빙산 사이로 그 배의 돛은 꽤나 두드러졌다. 붉은색. 이루릴은 그 범선이 다 시 빙산의 그늘 뒤로 사라지기 직전 돛의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거대한 돛 가득히 그려진 것은 붉은 서펀트의 문양이었다.

이 백은의 세계에서 그 범선의 모습은 충분히 이질적이었지만 이루릴은 가벼운 미소만 지었다.

‘아름다운 배로구나.’


“나는 이제 죽으면 다시는 부활하지 않을 거요. 수도에서 나는 내 속의 가장 저열한 부분,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가장 끈질기게 남아 있던 욕망을 충 족 받았소.”

그레이가 있었다면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유곽에라도 다녀오셨습니까?” 등의 말을 꺼냈겠지만 딤라이트와 무스타파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솔 로처는 특별히 자랑스러워하지는 않는 담담한 어조로 자신을 해부해 보였다.

“명예욕이라고 부르는 것이겠지만, 더 본질적인 의미에서 심사(審査)라고 해도 좋소. 나 자신의 생을 객관적인 누군가에 의해 심판받고 싶다는 것이 지. 수십 세대 후의 필부필부인 후예들이 공정한 심사관들이 되는지 어떤지는 따지고 싶지 않아요. 어쨌든 그 심사를 받았고 좋은 점수를 받았다는 것 자체가 나에겐 중요한 것이었으니까. 당신들도 아마 알 거요. 은빛 갑주로 성장하고 퍼레이드를 해본 경험이 있을 테니.”

무스타파는 피식 웃었다.

“짜릿하죠.”

무스타파의 눈은 과거를 보고 있었다. 그는 목을 조금 울리며 말했다.

“오로지 나를 위해 환호하는 사람들의, 서로 잘 구분되지도 않는 얼굴들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서라면, 거의 다시 태어나는 기분이 들지요.”

“내게 필요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소. 늙은이의 주책이지.”

솔로처는 지팡이를 세워들며 말했다.

“나는 자랑 삼아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오. 솔직히 말하자면 혼자서 그 기쁨을 그러안고 무덤으로 돌아가고 싶소. 내가 이 이야기를 꺼내는 까닭은 당신들을 위해서요.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 속에 응어리진 것이 무엇인지 찾아보길 바라오. 난 당신들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알지는 못해요. 그리고 이 시대에서, 당신들은 당신들 자신만큼이나 당신들을 잘 아는 사람을 결코 찾아내지 못할 거요. 그러니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스스로 찾아내 시오. 그럼 당신들은 다시 죽을 수 있을 거요.”

말을 마친 솔로처는 딤라이트의 이마를 바라보았다. 딤라이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테이블을 쏘아보고 있었다.

솔로처는 근심스러웠다. 저 강직한 성기사는 자신 속에 응어리져 자신이 평생 동안 섬겨온 진리를 거부하게 될 정도로 강력한 안타까움이 존재한다 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내 속에 있는 알 수 없는 안타까움 때문에 나는 기사의 본분도, 오렘의 명예도 저버린 채 이 지상에 다시 돌아왔단 말인가? 딤라이트는 고래고래 고함질러 부정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딤라이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솔로처는 한숨을 내쉬며 테이블에 앉아 있던 네 번째 사람을 바라보았다.

“레티의 검이여.”

레틴드롤스는 처연한 얼굴로 솔로처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젖어 있는 눈가를 못 본 척하며 솔로처는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절대적 위기에서 자신을 파괴한 당신의 결정, 누가 보더라도 과연 그래야 했을까 의심되는 것은 당연하오. 더군다나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이라면 더욱 그렇지. 그러니 그렇게 죄책감 가질 필요 없소.”

“말씀 감사합니다. 하지만 부끄럽습니다.”

“아니,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소. 그런 결정을 내리면서도 마음속에 한 점 의혹이나 주저함이 없었다면 그자야말로 비인간적이오. 보통 사람이라면 자신의 손가락이나 발가락 하나를 희생하라고 해도 우선 거절부터 할 것이오. 당신은 인간적이었고, 인간들 중 그 누구도 당신을 힐난할 수 없을 거 요. 그리고 설령 레티께서 현신하신다 하더라도 나는 당신을 변호하겠소.”

레틴드롤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솔로처 님, 저는 들었습니다. 제가 죽은 다음에 많은 형제들이 저와 같은 결정을 내렸다는 것을. 하지만 그 형제들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저만이 레티에의 길을 거부하고 이 지상에 미련을……”

“그게 아니오!”

솔로처는 거칠게 외쳤다. 레틴드롤스는 입을 다문 채 솔로처를 바라보았다.

“그래요! 그 전투에서, 많은 레티의 검이 당신을 따라 자신을 파괴했소. 그리고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소. 하지만 거기엔 분명히 차이가 있소! 당신은 다른 누구의 본보기도 없는 상태에서 가장 먼저 그것을 시도했소. 당신의 불안이 가장 큰 것은 당연하잖소? 다른 형제들은, 제길. 내 입을 용서하시 오. 그 작자들에게는 화려한 군중 심리의 응원이라도 있었을 거요. 네가 하니 나도 한다는 식의. 하지만 당신에게는 그런 응원도 없었단 말이오. 도대 체 뭘 부끄러워하시오? 당신은 힘든 길을 갔고, 혼자서 가야 했던 그 여정에서 당신이 받았을 고통은 동정의 소지는 있을지언정 결코 경멸받을 수는 없는 것이오!”

레틴드롤스는 고개를 숙였다. 솔로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레티께서 당신들에게 그런 권능을 부여한 것은 스스로의 생존을 경멸하라는 뜻은 아니실 게요. 그분은 파괴신이시지만………… 아니, 관두겠소. 성직자 와 교리를 논하려 드는 것은 마법사의 자세가 아니지. 부탁이니 스스로를 부정하지 마시오. 당신 역시 스스로를 똑바로 봐야 하오. 고개 돌려 외면해 버리기만 하면 똑바로 볼 수 없소. 당신의 Hjan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서라도 당신은 당신을 직시해야 할 거요.”

“명심하지요.”

할 말은 끝났고, 솔로처는 천막의 휘장을 젖히며 밖으로 나왔다. 천막 안에 남겨진 사람들에게는 나름대로 숙고해 볼 만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야전 막사의 바깥에는 거대한 검을 지팡이처럼 짚고 선 채 조용히 주위를 응시하고 있는 전사가 있었다. 지나가던 켄턴 시민들 모두가 한두 번씩 돌 아보고 있었지만, 전사는 무심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솔로처가 나오자 전사는 부드럽게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솔로처는 턱을 긁적이며 말했 다.

“에카드나 거기 그렇게 서 있는 것, 힘들지 않나?”

용아병 에카드나는 솔로처가 그에게 왜 이런 이상한 이름을 붙였고, 그런 작명을 통해 어떤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 다. 그는 그저 묵묵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힘들지 않습니다.”

“자네 종족에 대해서 심도 있게 연구해 본 바가 별로 없어서 내가 잘 모르는 바가 많군. 자네에겐 어떤 욕망이 있지? 만일 내가 자네의 봉사가 필요 없다고 말한다면 자네는 어떻게 되는 건가.”

“지금 대답해야 합니까?”

“어렵지 않다면.”

에카드나는 솔로처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은 맑고 그 안에서는 어떤 종류의 감정의 일렁거림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어렵군요.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는 것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무엇을 하기 위해 태어나셨습니까?”

“흐음…………. 지내다 보면 목적이 생길 거란 말인가.”

“그렇게 생각됩니다. 저는 현재로선 아기와 마찬가지니까요. 세계에 대한 어떤 은원이 생겨난다면 제 목적도 생겨날지 모르지요.”

“나는 단수가 아니니까? 하하하.”

에카드나는 솔로처가 웃는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별말 하지 않았다. 솔로처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

“좋아. 하지만 한 가지 부탁은 하지.”

“말씀하십시오.”

“내 복수를 하겠다느니 뭐니 하는 말은 하지 말게. 내가 어떤 방식으로 죽든. 특별히 말해 두는 이유는, 내가 자네의 소환자이기 때문이야. 어쩐지 부모가 된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걸.”

에카드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솔로처는 허허 웃었다.

“즐거운 인생이 되길 바라네. 아무런 미련도 남지 않는. 남겨진 미련을 발에 묶고 걷기에 저승길은 너무 길다네. 그런 건 훌훌 털어버리고 걸어야 하 지.”

“솔로처?”

솔로처는 들고 있던 지팡이를 힘차게 휘두르며 걷기 시작했다. 그는 에카드나의 곁을 지나치며 말했다.

“경험에서 나온 말이야. 명심해.”

에카드나는 잠시 솔로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솔로처는 인사를 건네오는 켄턴의 경비대원들과 시민들에게 미소와 따스한 인사말들을 건네며 걸 어가고 있었다. 지팡이를 쥔 손은 힘차게 움직이고 있었고 햇살 아래 그의 뒷모습은 꼿꼿했다.


루손은 글레이브의 칼날을 움켜잡을 뻔했다.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자신의 몸에 익숙하지 않았던 탓이었다. 가까스로 손바닥만 조금 베어 먹은 루손은 손을 재빨리 입으로 가져가 피를 핥았다. 그러고 나서 루손은 다시 글레이브를 꼬나들었다.

레이저는 담담하려 애쓰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당신은 거기서……?”

계곡 바닥에 앉아 있던 거인은 피로한 얼굴로 절벽 위의 레이저와 루손을 바라보았다. 거인이 앉은 계곡 바닥은 까마득하게 깊었지만 그래도 거인은 여전히 레이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래. 기다릴 것이다.”

루손은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취아악! 누가 그냥 죽게 내버려둘까! 츄, 츄칫!”

목숨을 걸고 발악하듯이 외친 고함 소리였지만 거인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레이저는 손을 들어 루손을 제지하며 말했다.

“그만, 루손. 복수는 성립될 수 없어. 나크둠은 살아났잖아.”

“어? 츄, 그런가?”

루손은 얼떨떨한 얼굴로 레이저를 바라보았다.

“취치! 하지만 거인이 나크둠을 죽인 건….”

“관두자, 루손.”

혼란스러워하는 얼굴이었지만 루손은 입을 다물었다. 레이저는 다시 거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당신은 그덴 산을 정복하러 돌아온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

거인은 눈을 들어 주위로 펼쳐진 산자락과 계곡의 흐름을 굽어보았다. 레이저 역시 무의식중에 거인을 따라 그덴 산 주위로 펼쳐진 신록의 파도를 바라보았다. 대지를 박차고 솟아오른 절벽과 봉우리들, 녹색의 숲 사이로 우뚝 솟아 있는 붉은 암벽과 그 위로 휘감아 도는 구름의 물결. 밀생한 자작 나무의 숲 옆으로 켜켜이 쌓인 암석들은 시간의 비망록처럼 그곳에 고요히 자리하고 있었다.

레이저는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놀라움에 경직했다. 그는 이런 그덴 산을 본 적이 없었다. 바로 이 장소에서 보는 그덴 산의 아름다움은 그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레이저는 불현듯 알아차렸다. 거인은 이 장소를 알고 있었겠지. 그는 그덴 산의 주인이었으니까. 그는 이곳에서 바라보는 그덴 산의 이 아름다움을 기억하고, 그래서 이곳으로 돌아온 것이겠지.

거인은 약간 졸음이 섞인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 아름다운 그덴 산이 아니면 나는 어디서 최후를 기다리겠는가.”

레이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갑자기 질투심까지 느꼈다. 방랑자가 촌락의 농부에게 느끼는, 그리고 유목민이 농경민에게 느끼는 질투심과 비슷한 질투심. 레이저는 일그러진 눈으로 세상 그 어느 곳엔가, 최후에 그곳에 있고 싶은 장소를 가지고 있는 자를 바라보았다.

거인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조그마한 자들은 시간의 수원(水源)까지 거슬러 올라 갈 것이라 믿어지네. 그리고 그들은 막혔던 수원을 뚫고 새로운 시간이 세상에 흐르게 할 것 이네. 그때 세상에 흘러넘칠 시간의 강물은 나를 씻기고 과거로 나를 돌려보내겠지. 과거의 먼지는 씻겨 나가고, 과거의 추억은 강물 속에 흩어져 사 라지겠지.”

거인은 이대로 산이 되고 암석이 될 것이다. 기다림 자체를 뛰어넘어서. 레이저는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먼 곳을 바라보던 거인은 보고 싶은 것을 다 보았다는 듯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무릎에 고개를 떨구기 직전, 거인은 희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시작되어 영원히 계속될 내 휴식을 방해하지 말아주게.”

그리고 거인의 눈꺼풀은 닫혔다. 거인은 무릎에 얼굴을 묻었고, 그리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갑자기 불어온 바람은 나뭇잎들을 한 움큼 날라와 거인 의 바위 같은 어깨에 뿌렸다. 그것은 그덴 산이 그 유일하고 진정한 주인에게 보내는 마지막 작별 인사였다.

레이저는 목이 메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떨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