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 워커 4권 – 9장 기다림의 해변 8

퓨처 워커 4권 – 9장 기다림의 해변 8


8

더 이상 태양은 지지 않는다. 흰 윤곽만 남아 있을 뿐 열기를 잃어 똑바로 바라볼 수 있을 정도가 되어버린 태양은 지평선을 따라 흐르듯 움직일 따 름이다. 결코 땅 아래로 사라지지도 하늘 위로 올라오지도 않는다. 지평선을 따라 굴러가는 하얀 공처럼 보이는………………

하지만 그런 태양이라도 제대로 볼 수 있는 시간은 드물다. 빙점 이하로 얼마나 낮은 온도인지 상상할 수도 없는 극한의 추위 속에서 불어 닥치는 강 풍은 사람을 선 채로 갈가리 찢어놓을 것만 같았다.

바람소리, 귓속에서 고막을 찢어낼 것 같은.

차가운 기온 때문에 고압대인 극지의 날씨는 놀라울 정도로 평화롭다. 하루 종일 걸어도 산들바람 한 점 만나지 않을 수 있는 것이 극지의 날씨다. 하지만 때때로 바람이 불어 닥치면 공기 중에서 파박거리는 불꽃이 튀길 정도의 지독한 블리자드가 일어났다. 어쨌든, 산들바람은 없는 것이다. 무풍 이거나 폭풍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블리자드가 불어 닥칠 때 인간의 두 발은 비참할 정도로 무력하다.

콜리의 프리스트들은 필사적으로 썰매에 매달렸다. 거추장스러운 짐으로 여겨진 지 오래된 썰매를 부득불 끌고 다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가없 는 바람의 횡포 앞에서 썰매는 사람들의 닻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자다가 바람에 날아가 버리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썰매에 몸을 묶고 잠들었고, 걷 다가 날아가 버리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썰매에 매달리다시피 한 채로 그것을 밀고 끌고 있었다. 이 지독한 폭풍설 속에서 콜리의 프리스트들은 죽을 힘을 다해 썰매에 매달린 채 폭풍이 잠들기를 기다렸다.

“기론!”

도르네이는 잘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턴빌에서 조그마한 책방을 경영하고 있었고, 책을 모조리 불질러 놓겠다는 말로 주정 을 삼아 학자가 되지 못한 자신을 야유하며 동시에 끝까지 책을 버리지 못하여 책에 기대어 살고 있는 자신을 동정하는 취미가 있던 기론은 블리자드 의 손아귀에 붙잡혀 날아올랐다. 버둥거리는 두 팔은 속절없이 눈밭을 긁어대었고 온몸이 바람개비처럼 핑그르르 돌았다. 뜻 없는 비명 소리를 내지 르며 기론은 폭풍설 저편으로 사라져갔다. 도르네이가 그를 볼 수 있었던 시간은 극히 짧았다. 눈바람 때문에 시계가 0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기론!”

도르네이가 썰매를 놓고 일어서는 순간 그의 팔을 잡아당기는 손이 있었다. 주블킨은 도르네이를 끌어내리며 고함질렀다.

“미친 짓 하지 마! 썰매를 붙잡아!”

“기론, 기론이 저기……”

“놔둬! 그는 살아 있다. 살아 있다!”

도르네이는 끔찍한 충격 속에서 굳어버렸다. 도르네이가 멍한 얼굴로 비틀거리는 동안 주블킨은 간신히 그를 썰매 밑으로 쑤셔 박을 수 있었다. 다 시 썰매에 매달리며 도르네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죽지 않는다. 그들은 썰매에 실어 가져온 음식물에 더 이상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갈무리도 제대로 하지 않아 이미 꽁꽁 얼어붙은 그것들은 본래의 목적을 잃은 채 오로지 무게추의 역할만을 하고 있었다. 썰매가 날려가지 않게 하기 위한 무게추. 그들은 먹지도 않았고 잠들지도 않았다.

신스라이프는 그들을 죽게 내버려두지 않고 있었다. 도르네이가 이미 한번 그러했던 것처럼.

주블킨은 도르네이의 머리를 아래로 짓누르듯 하며 악을 썼다.

“살아 있어! 되돌아올 거야. 이 폭풍이 지나가면 되돌아온다. 미안한 듯이 웃으면서 되돌아올 거란 말이다!”

눈더미에 머리를 쑤셔 박힌 도르네이는 급한 기침을 토했다. 입으로 눈가루가 날려 들어와 숨이 막혔고, 얼어붙은 옷은 이제 고행대처럼 온몸에 상 처를 내고 있었다. 하지만 차가워진 몸은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폐가 뒤집혀 튀어나올 것 같은 지독한 기침을 하면서도 도르네이의 정신 은 오히려 말짱했다.

돌아오지 못한다. 사방은 눈을 멀게 만드는 백색의 천지. 그 어디에도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태양을 보고 방향을 가늠하는 것조차도 불 가능하다. 하지만 죽지 않는다. 기론은 죽지 못한 채 방향도 무엇도 없이 영원히 계속되는 이 설원 위를 방랑해야 할 것이다. 폭풍이 불어 닥칠 때마 다 그의 발걸음은 뒤죽박죽이 될 테니 이곳에서 빠져나가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그는 온몸이 찢어져 설원 위에 흩어질 그날까지 이곳을 계 속 방황해야 할 것이다.

“기로오온! 크훌럭! 쿨, 쿨럭.”

그러고 보니 해괴하기 짝이 없는 일, 왜 이 땅 위에서 태양은 지지 않는 것일까? 이곳은 이미 시간이 정지한 땅인가? 그들이 잠들지 않는 이유 중 하 나는 밤이 찾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바람이 없는 동안 계속해서 묵묵히 걸어 나갔다. 살을 발라낼 것 같은 바람 속을 걷고 또 걷는 동 안, 그들은 더 이상 허기를 느끼지 않게 되었다. 먹지도 자지도 않은 채 계속해서 유령처럼 걷고 있는 그들이 잠시나마 살아 있다는 것을 느낄 때란 이런 지독한 블리자드 속에서다. 아이러니컬한 일이었다.

‘이건 말이 안 돼.’

도르네이는 그렇게 규정지었고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건 정말이지 말도 안 돼.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어. 지금 내 몸 위에 덮이고 있는 이 눈송이들은 사실 눈이 아니야. 내가 매달려 있는 이 썰매 다리는 사실 썰매가 아니야. 난 온몸에 이불을 휘감고 침대 기둥에 매달려 있는 거야. 그래. 털옷에 덕지덕지 매달리는 눈덩이를 떼어내며 도르네이는 히죽 웃었다. 이것 봐. 차갑지 않아. 이것이 눈이라면 당연히 차가워야 할 텐데 이 눈덩이 는 차갑지 않아.

‘그래. 다 꿈이야. 모조리 꿈이야………….’

“바람이 그쳤다.”

신스라이프가 일어서서 말했다. 하지만 도르네이는 그 말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도르네이는 헤벌쭉 웃으며 신스라이프를 바라보다가 다시 눈더미 속에 얼굴을 가져다박았다. 차가움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눈은 포근했다.

“일어나!”

신스라이프는 도르네이의 뒤통수를 붙잡아 단숨에 끌어올렸다. 머리가 뽑혀나갈 것 같은 고통을 느껴야 당연하겠지만, 도르네이는 짐짝처럼 달려 올라가는 자신의 몸과 아무 힘없이 우쭐거리는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보며 킬킬 웃었다. 신스라이프는 기막힌 시선으로 그런 도르네이의 얼굴을 쏘아 보다가 옆으로 팽개쳤다. 도르네이는 얼굴에 와 부딪치는 눈더미의 느낌이 너무 아득하다고 생각했다.

신스라이프는 썰매에 주저앉았다.

눈바람이 가라앉자 희미한 연기 덩어리 같은 태양이 다시 시야에 들어왔다. 결코 하늘의 중앙으로 오르는 일이 없는 태양은 정신 착란을 일으킬 듯 한 모습으로 지평선 위쪽을 게으르게 떠가고 있었다.

신스라이프는 자신이 원탁 중앙에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동그란 지평선, 동그란 태양의 궤적. 콜리의 프리스트들은 썰매를 중심으로 한 눈더미 곳곳에 파묻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끝없는 백색의 벌판에서 유일하게 시선을 사로잡을 만한 것이 바로 그들의 그런 모습이라는 데 신스라이프는 분 노했다.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없었기에, 신스라이프는 시간에 신경 쓰지 않았다. 질식해 죽기 알맞은 모습으로 처박혀 있는 콜리의 프리스트들에게도 신경 쓰지 않았다. 가장 높이 치솟아 올랐던 눈송이 몇 개가 조용히 떨어진 것을 마지막으로, 설원에는 더 이상 움직임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어졌다.

그래서 신스라이프는 파에게 말했다.

‘거기 있느냐’

‘아니오’

‘여기 있느냐.’

‘아니오’

‘거기도 아니고 여기도 아니란 말이군. 하긴.’

신스라이프는 발을 조금 움직여보았다. 뽀드득. 높고 둔한 소리와 함께 발이 눈 속으로 파고들었다. 신스라이프는 눈의 차가움이 발등에 전달되다가 마침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게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발을 뺐다. 눈덩어리들이 파헤쳐지며 다시 흰 눈 위로 그의 발이 드러났다.

‘당신은 죽을 거예요.’

‘사실과 비슷하지도 않은 말이야. 나는 살기 위해 이 모든 일들을 해냈다. 그리고 이제 곧 이 모든 일을 완료할 거야.’

“당신은 죽을 거예요.”

신스라이프는 자신의 입을 통해 새어나온 파의 말에 당황했다. 그러나 파는 곧 말했다.

“당신의 입이 아니죠. 제 입이에요.”

‘너! 무슨 짓을 하는 거냐!’

“당신의 피조물이 무엇을 원하는지 관찰하지 않았다면, 당신은 창조자로서 실격이군요.”

‘원한다고? 넌 아무것도 원할 수 없어!’

“당신은 무엇을 원하지요?”

신스라이프는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파가 자신을 바보 취급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생명이다. 조건 없이, 불안 없이, 종말 없이 끝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타오르기 때문에 아름다운 생명 그 자체다!’

“그리고?”

‘뭐?’

“그리고? 사는 것은 사실 그렇게 어려운 문제가 아닐걸요. 당신은 본질을 피하고 있군요.”

본질이라고? 신스라이프는 당황했지만, 자신이 그 당황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조금치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에 더욱 놀랐다. 어느새 그의 몸은 완전히 파의 지배권 하에 놓여 있었다. 그는 그야말로 눈꺼풀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당신은 영원히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

‘사랑?’

“영원히 살기 위해선 영원히 한 사람을 사랑해야 하지 않나요?”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어리석은 처녀 같으니, 소녀의 꿈 같은 걸 말하는 거냐? 사랑에 살고 사랑에 죽고? 사랑만이 무의미한 인생에 의미 를 부여하고? 세상엔 그런 건 없어!’

“당신은 아직도 본질을 회피하고 있군요. 꼭 직접적으로 물어야 하는 건가요.”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파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극히 자연스러웠고 이제 파의 몸은 완전히 파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울분에 미쳐 날뛰는 신스 라이프를 향해 파는 나직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당신은 영원히 자신을 사랑할 수 있나요?”


신차이는 목검을 지팡이처럼 짚고는 그 위에 두 손을 얹어둔 자세로 보트 위에 똑바로 서 있었다. 그리고 탄느완의 부두에 서 있던 운차이 역시 꼼짝 도 하지 않은 채 그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물결을 헤치던 노들이 정지하고 보트가 부두에 닿자 신차이는 가벼운 동작으로 뛰어올랐다. “운차이!”

운차이는 반가운 목소리로 ‘신차이!’ 하고 부르는 대신 재빨리 롱 소드를 뽑아들었다.

칼날이 빠져나오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단련된 손놀림은 대단한 것이었지만, 일행들은 몹시 당황해 버렸다. 그들은 입항 절차를 갖추기 위해 먼저 내려온 일등 항해사 이시도로부터 이 배의 이름과 신차이와 운차이의 관계에 대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제레인트는 나름대로 추측했다.

“이건 자이펀 전통의 인사법일 거야. 칼을 높이 들어 ‘신차이 만세!’라고 외친다든가….”

그러나 제레인트의 추측은 완전히 빗나갔다. 운차이는 롱 소드를 정확히 중단 겨누기의 자세로 내밀어 신차이를 겨냥했던 것이다. 설령 저런 동작을 인사법으로 채용하고 있는 민족이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민족의 오해를 받아 이미 오래 전에 멸망당했을 만한 동작이었다. 그란 하슬러는 일단 그 자 세에 합격점을 준 다음 운차이가 그 자세를 취한 이유에 대해 어리둥절해했다. 하지만 신차이는 별로 놀라지 않은 표정이었다.

“Ahn barkedo.”

“Youkchi une ghetta mi fheirja?”

네리아는 고개를 홱 돌려 파하스를 쏘아보기 시작했다. 파하스는 곧 숨소리마저 낮춘 채 둘의 대화에 집중하며 그 말들을 통역했다.

“반갑군.”

“가문의 영광을 지키기 위해 온 건가?”

“무슨 말이냐.”

“내 수급을 가지러 온 거냐고 묻는 거야.”

네리아는 기겁하며 파하스를 바라보았다.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이들이 정확한 통역인지 의심스럽다는 눈초리를 보냈지만 파하스는 통역하느 라 바빠서 그 시선들에 대해 화를 낼 시간이 없었다.

“수급? 글쎄. 가지고 다니기 귀찮은가? 나도 가끔은 머리를 가지고 다녀야 된다는 것이 귀찮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말해 두겠는데, 난 나를 죽이려 드는 모든 상대방을 용서하지 않아.”

파하스는 재빨리 저것은 자이펀식의 관용구로서 상대방을 협박하는 것이 아니라 자살하지 않는다는 뜻임을 설명했다. 설령 자기 자신이라도 해도 자신을 죽이려 들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뜻인 것이다. 그러나 신차이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함으로써 파하스의 설명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자살을 거부하겠다는 건가.”

“그래. 어떤 비난을 하더라도 내 결심을 돌리진 못할 테니 그럴 마음이라면 포기하시지.”

“헤어진 지 오래지만, 네 사촌 형에겐 꺾을 수 없는 결심이 있을 때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이 있다는 것을 잊어먹을 만큼 오래되지는 않았을 텐데.”

“그 목검이 꺾이지 않는 이상 형의 결심도 꺾이지 않는다는 것은 나도 잘 들어 알고 있지. 이제리스의 군주에게 특별한 호감은 없지만, 내가 그의 복 수를 맡게 된 것에 대해 화를 내지는 않을 거야.”

“아주 좋아하겠지. 내가 사촌 동생의 손에 쓰러진다면.”

“허, 험악한 형제다. 형제가 똑같아.”

네리아는 신음을 토하며 낮게 속삭였고 아프나이델과 엑셀핸드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불길한 예감에 칼자루로 손을 가져가던 그란은 이시도가 태평한 모습임을 발견하고는 의아해졌다. 그때 운차이가 검을 아래로 내렸다. 운차이는 칼을 다시 꽂아 넣으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죽일 생각은 없나 보군.”

신차이는 부두에 올라선 이후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죽으면 곤란하지. 발탄으로서도, 나로서도 사랑하는 동생의 죽음을 바라지는 않네.”

그리고 두 사람은 팔을 내밀어 서로를 포옹했다. 희디흰 빙하를 배경으로 펼쳐진 사촌 형제의 상봉은 꽤나 감동적일 수도 있는 모습이었지만 일행들 은 기만당한 느낌 때문에 감동을 느끼기보다는 화를 내고 싶어졌다. 그때 그란은 이시도가 태평했던 이유를 추측할 수 있었다. 두 사람에게서 살기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란은 쓰게 웃어버렸다.

그들의 닮은 성격을 짐작할 수 있을 만큼 빠르게 포옹을 해치워 버린 두 사람은 곧 진지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돌아와서 발탄 가를 계승해라. 선주 연합과 내가 너를 비호하겠다. 몇 년 동안의 유형으로 해결할 수 있을 거야. 남해의 별장들 중 하나에서 몇 년 쉬는 걸로 끝내지.”

“나는 이미 모든 인연을 끊었어.”

“운차이.”

“꿈속에서조차 카레한 탑을 본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겠어. 하지만 내가 돌아간다면 형과 발탄을 곤경에 빠뜨릴 뿐이야. 죽은 사람으로 취급해 주면 좋겠군.”

“……그 이야기는 천천히 하도록 하지.”

그리고 신차이는 헤게모니아 어로 말했다.

“이곳의 관습이 어떤지 모르겠지만, 친지들의 대화도 통역당하는 분위기는 이야기를 나누기 좋은 여건은 아니군.”

파하스는 붉으락푸르락했지만 네리아는 재빨리 비난하는 눈초리로 그를 쏘아봄으로써 파하스를 한층 더 깊은 배신감 속에서 좌절하게 만들었다. 그 란이 “가문의 전통이었군.”이라는 이상한 말을 중얼거릴 때, 이루릴은 커다란 배낭을 가볍게 어깨에 걸치고 보트에서 부두로 오르는 한 키 큰 남자를 발견했다.

“당신이 쳉인가요.”

쳉은 자신에게 말을 건 사람을 찾다가 검은 머리의 엘프를 발견하고는 조금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습니다. 엘프 아가씨는?”

“이루릴 세레니얼입니다. 잠시 당신과 동행했던 네리아 씨, 운차이 씨, 그란 씨의 친구입니다.”

“아, 그러신가요. 말씀 많이 들었다는 말은 못하겠군요.”

이루릴은 고개를 조금 갸웃했다. 쳉은 배낭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건 저희들이 잘 나누는 인사말입니다. 하지만 저분들과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어서 당신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습니다.”

“그런가요. 하지만 저는 당신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알아보는 것은 쉽더군요.”

“쉽다고 하셨습니까?”

“체격과 표정 모두에서 골렘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고 하더군요.”

쳉은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쳉이 벌겋게 변한 네리아의 얼굴에서 다시 이루릴에게로 시선을 옮기자 이루릴은 차분한 어조로 질문했 다.

“아일페사스를 만나셨나요.”

“예.”

“그리고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골드 드래곤께서는 할슈타일 후작과 미와 함께 북으로 가셨습니다. 저는 도중에 돌아온 것입니다.”

“도중에 돌아왔다고요?”

쳉과 이루릴은 고개를 돌렸다. 네리아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쳉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리아는 재빨리 달려와 쳉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잠깐만요, 쳉!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에요? 도중에 돌아왔다니, 헤어졌단 말인가요?”

“예. 네리아.”

“왜, 어째서지요? 왜 그녀를 내버려두고……………”

“빙하와 육지 때문에 배가 더 나아갈 수 없는 지점에서 미는 하선했습니다. 내게는 배와 함께 돌아가라고 하더군요. 저는 상륙하면 하루도 견디지 못하고 죽을 거라고 말하면서.”

“가, 가라고 해서 왔다는 거예요?”

“예.”

“말도 안 돼요!”

네리아는 쳉의 셔츠 자락을 거머쥐었다. 그녀는 쳉을 흔들려고 했지만 쳉의 거대한 체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네리아는 자신의 몸을 흔들 며 고함지르게 되었다.

“왜! 당신은 하루도 견디지 못한다고요? 그럼 미는! 미도 마찬가지잖아요. 왜? 당신들은 헤어지면 안 돼요. 돌아오려면 같이 돌아왔어야지요! 어떻 게 혼자 돌아온 거예요. 어떻게!”

네리아는 당신들이 가진 시간은 겨우 4년밖에 없다는 말을 외치려고 했지만, 그때 쳉이 나직하게 말해서 겨우 그 말을 삼킬 수 있었다.

“미는 아일페사스라는 그 골드 드래곤이 자신을 도울 거라고 여기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만.”

“아일페사스가? 골드 드래곤이니까? 그럼 당신은! 당신은 그녀를 돕지 않을 건가요?”

“저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고 하더군요.”

네리아는 입을 쩍 벌린 채 쳉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쳉의 얼굴에는 아무 표정이 없었다. 쳉은 그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네리아의 어깨를 살 짝 잡아 밀어냈고 네리아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뒤로 몇 걸음 물러나게 되었다. 쳉은 천천히 허리를 구부려 발 옆에 던져둔 배낭을 집어들었다.

“더 할 말이 없다면, 저는 바쁜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고 싶습니다.”

“바쁜 일……? 바쁘다니, 당신에게 무슨 바쁜 일이?”

쳉은 대답하지 않았다. 쳉은 그대로 배낭을 어깨 위로 둘러멘 채 훌쩍한 몸을 꼿꼿이 세우고는 일행들 사이를 걸어갔다. 사람들은 그를 위해 비켜주 었고 쳉은 그대로 탄느완의 시내를 향해 사라지는 검은 점이 되었다.


쳉에게 무슨 바쁜 일이 있는지 네리아가 알게 된 것은 바로 그 다음날이었다.

쳉은 탄느완의 주민들로부터 삽과 곡괭이, 도끼 등을 빌린 다음 수레 하나에 그것을 싣고는 탄느완의 교외를 주욱 탐사하며 돌아다녔다. 네리아는 쳉에게 그런 재주가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지만, 실제로 쳉은 간단한 몇 마디 말로 탄느완의 주민들이 기꺼이 연장들을 내놓게 만들었다. 파하스가 고래를 향해 노래를 부르던 언덕 위에 다다른 쳉은 만족하고 수레를 세웠다.

그리고 쳉은 무쇠 같은 끈질김과 엑셀핸드도 감탄할 만한 완력으로 빙퇴석들을 주워 모으기 시작했다. 빙하의 흐름이 상류로부터 가져와 빙하 끄트 머리에 내려놓는 빙퇴석들은 꽁꽁 얼어붙어 있는 데다가 거칠고 투박하다. 물의 흐름과 달리 빙하의 흐름은 돌의 표면을 다듬는 데 별로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쳉은 묵묵히 그것을 모은 다음 수레를 이용해 언덕 위로 실어 날랐다. 그가 도대체 몇 번이나 언덕을 오르락내리락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때까지도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기에 그를 관찰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쳉은 언덕 위에 거대한 돌무더기를 만들어놓은 다음, 곧 삽을 들어 언덕의 얼어붙은 땅을 파내기 시작했다.

야영에 능숙한 호위 무사의 지혜를 모두 동원해 선택한 그 위치는 해풍으로부터 자유로우면서도 시야가 좋은 근사한 장소였다. 물론 여건이 근사하 다는 말이지 풍광이 근사하다는 말은 전혀 아니다. 그곳은 휑뎅그렁하고 메마르고 헐벗은 땅이었다.

쳉은 동토를 파낸 다음 거칠고 모난 빙퇴석들을 솜씨 좋게 쌓아올렸다. 말이나 소도 없고 기중기도 없었지만 쳉은 빙퇴석들을 맞물려 튼튼한 돌벽을 쌓고 지붕을 올렸다. 돌 움막을 완성한 쳉은 다시 언덕 아래로 내려왔다. 이미 그 몰골은 엉망진창이라는 말도 과분할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쳉은 부드럽고 간결한 말씨로 탄느완의 주민들과 대화를 나누었고, 그리 어렵지 않게 집기들을 구할 수 있었다. 취사도구들은 배낭 속에 가지고 다녔기에 쳉이 구한 것은 배낭 속에 가지고 다니지 않는 것들이었다.

오래된 작은 난로는 원래 배에서 쓰이던 것으로, 은퇴한 선장이 보관하고 있던 것이었다. 대장간의 고철더미 속에서 아직 쓸 만한 연통을 구한 쳉은 잔돈을 조금 지불한 다음 그것을 수레에 실을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쳉은 쓰레기 취급을 당하고 있던 물건들을 이것저것 모아들였다.

탄느완의 시민들은 그들이 그렇게 많은 쓰레기들을 다락방이나 헛간에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쳉은 커다란 낡은 담요를 구했고 우그러진 냄비와 구멍 난 주전자와 부서진 책상을 끌어 모았다. 그것은 수레에 실려 언덕 위로 옮겨진 다음 쳉의 손을 거쳐 이끼로 속을 채운 침대와 잘 펴진 솥과 굴뚝과 선반으로 변했다.

그리고 쳉 자신도 변해 갔다. 그는 제멋대로 자란 수염 때문에 바늘꽂이처럼 된 턱을 한 채, 탄느완의 선원들이 쓰는 두꺼운 방한복을 개량해 만든 조끼와 바지를 걸치고 맨발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물론 언덕 위에서 발을 다치게 할 만한 것들은 샅샅이 찾아내 모두 치워버린 지 오래였다. 쳉은 가지고 있던 것들 중 돈이 될 만한 것은 전부 팔아치우고, 그것으로 음식물을 구입했다.

그 시점에서 탄느완의 주민들과 네리아는 그가 무엇을 만드는 것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흔한 감시 초소 같은 것이 아니었다. 쳉이 잠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정말 거기에 살 작정을 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의 눈에도 분명했다.

쳉은 집을 만들고 있었다.

“그녀를 기다릴 거예요?”

“예.”

“만일 그녀가 오지 않는다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겁니다.”

“그녀에겐 배가 없어요. 못 돌아올지도 몰라.”

“돌아올 겁니다.”

“그렇다면 영원히 이곳에서 기다릴 거예요? 늙어 죽을 때까지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사랑도 하지 않고 사람들을 만나지도 않고 그저 이곳에서 살며?”

“예.”

네리아는 눈물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