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73화 : 우리는 아퀴나스를 믿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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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검 – 173화 : 우리는 아퀴나스를 믿지 않는다


우리는 아퀴나스를 믿지 않는다

선발대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별 힘들이지 않고 쉽게 제거할 수 있으리라 여겼건만 전개되는 상황은 예측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부서지고 조각난 것들은 제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우수수 떨어져 내린다. 그것까지는 좋았다. 딛고 있는 대지가 한 번에 요동을 치며 새로운 개체들을 만들어냈으며, 그 움직임은 시선의 움직임으로 잡아낼 수 없을 정도로 속도를 더했다.
그 모든 것은 하나였으며 공격의 동선은 무언가에 의해서 일사불란하게 조종되고 있는 듯싶었다.
선발대는 지금 질퍽거리는 진흙구덩이 속에 갇혀 있는 듯한 기분을 동시에 느껴야만 했다.
도무지 종적을 잡아내기도 힘든 빠른 움직임에 어찌 반응해야 좋단 말인가? 하지만 그들은 노련하다. 수호자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한곳으로 모였고 각기 방향을 분담해 외부로부터의 공격에 대비했다.
갑작스레 수세에 처하게 된 지금의 상황이 좀 황당하고 어이없긴 했지만 그렇다고 심각한 위협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다행이라면 거신들의 움직임이 빠르고 공격이 날카롭긴 했지만 그 방법에 있어서는 지극히 단순하다는 것. 손과 몸통을 이용한 물리적인 공격은 단단한 외벽을 치고 막아내기만 해도 되는 것들이었다.
날카로운 창과도 같은 거대한 손이 라미레스의 손길에 밀려났다. 라미레스가 고함을 질렀다.
“이것들 대체 뭡니까?”
수호자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그에게서 어떤 의견도 들을 수 없었다. 그 역시 지금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던 것이다. 위력이 아닌 변화로 인한 의문이었다. 현재 자신들을 공격해 오고 있는 것들의 정체도 모를뿐더러 이해하기 힘든 돌연한 변화에도 어안이 벙벙했다.
비밀차원에 이런 존재들이 있다는 것 또한 파천에게 들어보지 못했다. 자기 혼자서도 방비할 수 있을 정도로 위협감이 없는 단순한 공격이었지만 수호자는 그 배경에 주목했던 것이다.
‘뭔가가 있다. 생명체라 할 수 없는 기묘한 존재들의 급습. 우리의 전력을 감안했다면 이런 정도로 목적을 달성할 수 없으리란 건 알고 있을 터. 뭔가? 이것들 뒤에 도사리고 있는 놈의 의도는?
모르는 걸 아는 척해봐야 소용없다. 이건 싸움도 뭣도 아니었다. 서로 치열하게 공방을 주고받고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성과를 달성할 수 없었다. 선발대의 가공한 공격력에도 적의 수는 일정했다. 사라진 만큼이 그대로 채워지니 그런 것이다.
그다지 힘들 것도 없으니 이대로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으면 되는가? 수호자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는 선발대원들에게 하늘 높이 몸을 띄우라고 지시했으며 곧바로 대지를 뒤엎어버렸다. 수십 줄기의 거대 무비한 힘이 땅속을 마구 헤집어버렸다.
하지만 반전은 일어나지 않는다. 별 효력이 없었던 것이다. 상식은 무너졌다. 땅은 물과도 같았다. 틈은 어느새 채워지더니 한바탕 극심한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 봐도 마찬가지. 선발대를 졸졸 따라다니는 건지 아니면 비밀차원 전체가 이렇게 변한 것인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선발대는 공중에 높이 뜬 채 그런 식의 공격만 되풀이했다.

아퀴나스는 동료들에게로 돌아가며 달라진 주변 환경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렇게도 아름답고 휘황찬란하던 낙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전경은 황폐하고 삭막하고 메마른 모습들뿐이었다.
그것은 어쨌든 좋았다. 외형적인 환경이 달라졌다는 사실만으로 아퀴나스의 관심을 집중시킬 수는 없었다.
아퀴나스는 평소와는 다르게 가벼운 흥분에도 전율하는 스스로의 반응에 무척이나 고무되어 있었다. 비밀차원 전체에 진득하게 흐르고 있는 미묘한 기운! 아퀴나스는 강렬한 도전의식에 사로잡혔다.
‘가d하다. 강력하다. 미래 따위는 어찌 되어도 좋다. 이 힘의 실체를 겪어보고 싶다.’
이런 충동에 사로잡힐 수 있다는 것이 너무도 신기했다.

돌아온 아퀴나스는 모두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그가 조금 전 빠르게 쏟아놓은 말들 때문이었다. 침략자들에 대한 척결을 선언해야 할 아퀴나스가 생각지도 못했던 엉뚱한 내용들을 풀어놓았다.
카오스, 카오스라니.
잊고 있었던 이름이었다. 다시는 떠올리지 않아도 될 줄 알았던 의미였다. 불쾌한 기색을 보이는 이도 있었고 화들짝 놀라 진정하지는 못하는 이도 보였다.
그들의 표정은 카오스의 탈출이 자기와는 무관함을 강변하고 있기도 했다. 아퀴나스는 굳이 누구의 소행인지를 캐물을 생각도 없었다. 파천의 말처럼 지금은 그런 것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카오스의 존재감이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달라졌으며 당장에 상대해야 할 침입자들보다 더 비중 있게 다뤄져야 한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었다.
그의 어조는 스스로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점차 강렬해져 갔다.
카오스에 대해 알려지지 않았던 비밀들이 하나씩 벗겨질수록 모두는 덤덤해져 갔다.
“키케로는 그런 사실을 어찌 알았을까?”
캄파넬라의 지적이었다. 출처가 키케로라면 신뢰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했다. 다른 이들의 눈빛도 캄파넬라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퀴나스는 되려 반문했다.
“그가 광명을 얻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마라. 그리고 내가 그 정도쯤 가려내지 못할 정도로 우매한 줄 알았는가?”
그럼에도 모두는 완전하게 승복할 수 없다는 기색들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카오스가 어떤 존재인가?
자신들이 직접 굴복시켜 봉인시키지 않았던가? 지금까지도 완전하게 파악하긴 힘들지만 세계의 종말을 거론해야 할 정도로 대단스럽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가당치도 않은 말이었다.
하긴 파천이 들려줬던 말을 가감 없이 던져놓았으니 그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아퀴나스가 한 말을 요약하면 대충 이랬다.
어떤 관념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전해질 때 필연적으로 그 둘 사이에는 어떤 변화가 발생하지만 실제로 그 관념 자체도 새로운 생명력을 지녀 판단하거나 새로운 파동을 일으키기도 한다.
대부분 억제되어 있으나 때로 이것이 활성화되어 전체를 새로운 조건으로 심부름을 보냈다. 종은 주인의 심부름의 내용물이 무언지, 그것을 전달하는 목적이 어디 있는지,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지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일이 반복됨에 따라 의도치 않았음에도 약간의 정보를 저절로 취득하게 되었다. 심부름의 결과도 알게 되었고 내용물도 어느 정도는 짐작하게 되었다. 점차 많은 것을 알아 가게 되면서 종은 자신의 신분도 잊고 욕심을 부리게 된다. 자의식이 생겨난 것이다.
카오스는 정보 체계에서 상위개념의 동인에서 하위개념의 동인으로 또는 상위입자에서 하위입자로의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을 했었다.
그러다 자의식이 생겨나며 전체에서 자신을 분리해냈고 그 자의식은 점차 관계에서 여러 가지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것이 카오스가 생겨난 이유다.
이제 종은 주인의 심부름을 거부하기 시작했으며, 자신과 비슷한 위치에 있던 다른 종들에게 주인의 심부름을 거역하라고 부추기기까지 했다. 결국 이일 저일 여러 곳에 관계하다보니 더 많은 정보를 얻게 되고 힘은 점차 강해져 갔다.
카오스가 각성하는 것은 최초의 동인인 신으로부터 전달되는 핵심적인 정보를 취득하면서 시작된다. 전체 중 일부분만 알고 있던 종은 주변에 세력이 쌓이고 힘이 생겨나자 주인이 되고 싶어진 것이다.
실상 이 우주는 개체도 전체도 없다는 것을 어느 날 인식하게 되었다. 오직 관계만이 있을 뿐이다. 현상계는 이러한 관계의 정보처리를 인식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그 체계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바꿀 수만 있다면 최초의 동인이 될 수도 있다. 이것이 곧 카오스의 각성이라는 것이다.
바르트가 물었다.
“그렇다면 카오스가 이 세계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 거란 말인가?”
아퀴나스의 긍정은 확신이 서려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가 각성을 이루었다면 분명 그런 시도를 하게 된다.”
“설마 … 아퀴나스, 너도 그렇게 믿고 있나?” “충분히 … 가능성이 있는 말이다.”
“왜 그렇지?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지? 난 도무지 모르겠거든. 내가 미련해서일까? 좀더 논리적으로 날 설득시켜줄 수는 없나? 무조건 네 말을 믿으라고 하는 건 좀 무리일 것 같거든.”
비아냥거리는 어조가 다분했음에도 아퀴나스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
아퀴나스는 지켜보는 다른 눈길에서도 흡사한 느낌을 읽어냈다. 그는 한참이나 망설이다 자신만의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견해를 어렵게 정리해냈다.
그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주의 원리와 실체에 대한 핵심적인 견해였으며, 그것은 상당 부분 키케로에게서 던져진 충격의 파편들이었다.
좀 전까지 반박하고 싶었던 남의 생각을 사유적인 걸러냄도 없이 원래부터 자신의 것이었던 양 이처럼 흡착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그 자신도 이해하기 힘든 경험이었다. 반박을 준비하고 있는 다섯 명의 적을 숨쉴 틈 없는 맹공을 퍼부어 단숨에 항전의 의지를 꺾어버리고 싶은 열망이 아퀴나스를 자극했다. 기대와 우려의 시선들이었다면 이런 기분은 들지 않았을 것이다. 아퀴나스의 입은 포화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여기 나, 아퀴나스가 있다. 내 안에는 너희들이 관찰할 수 있는 부분이 있고 그럴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말들은 바로 이 관찰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말들은 바로 이 관찰할 수 없는 영역에 관한 것이다.”
아퀴나스의 견해는 해괴하고 낯설기만 했다.
“최소 단위의 입자가 모여 단위입자를 만들고 … .”
그러한 수 없이 많은 단위 입자가 모여 하나의 개체를 이룬다. 어떤 결정된 형태로 보이는 개체도 실상은 단위 입자의 집합체일 뿐 그 자체로 독자적이지는 않다.
입자들은 끊임없이 결정을 내리고 있고 다른 입자들이 내린 결정을 즉각 알고 있으면 이러한 정보체계는 항시 상호적이다. 입자들은 갇혀 있는 것도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닌, 역동적으로 교류하며 전체를 이루고 있다.
어떤 상태로 머물고 있으며 그런 가운데 전달자로서의 역할을 다 하고 있다. 특정한 단위 입자는 상위입자의 정보를 구체화시킬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자료와 정보가 수록되어 있다.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는 우주만물은 실제로 모든 것을 포용하는 하나의 유기적 체계이며, 그 모형의 어느 부분도 전체에서 또는 상호 간에 분리될 수 없다.
우주의 기본 구조는 미세한 낱알의 연합체이며 불연속적이거나 연속적인 교차에 의해 끊임없이 변동된다.
여기까지는 그럭저럭 이해가 갔고 딱히 수긍 못할 난감한 부분도 없었다.
바르트의 질문에 이은 아퀴나스의 대답 이후에 수용자들은 점차 격렬하게 저항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급속하게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너와 나는 단위입자가 모인 집합체란 말이군. 네 말에서 입자가 교류한다는 것과 전달자의 의미가 모호한데 자세하게 설명해줄 수 있나? 무엇이 어떤 식으로 교류한다는 거지? 그리고 그것이 카오스의 존재를 입증하는데 무슨 연관성이 있다는 거지?”
“너와 나 그리고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과 현상은 실제 이 교류의 과정 중 일부분만이 형상화된 것뿐이다. 너를 이루고 있는 단위자의 성격과 수준에 따라 네가 보고 느끼는 과정은 한계 지어진다.
실제 더 많은 교류가 일어나고 있지만 네가 처리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이 거기까지이기 때문에 현재의 네 의식은 그것만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지. 너무 미세하거나 너무 큰 것은 인지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때론 너무 복잡하거나 광범위한 것도 넌 이해하지 못한다.”
물리적인 현상이나 상태가 변화하는 활동성은 단위입자의 특정성질을 원활하고 지속적으로 방출할 때 나타나며 다 닳아서 없어질 때 다른 조건으로 환원된다. 전체에 귀속되는 것이다.
이때도 완전하게 소멸된 것은 아니다. 이 소모현상은 반드시 물리적 변화가 동반된다. 서로 관계 짓는 입자들끼리 자극을 교환하고 고유의 파동을 일으키면서 소모되는-개체가 전체로 환원되는-현상이 일어난다. 여기에는 자극이란 동인이 필요한테 입자내 배열 형태에 따라 요구 값이 각기 달라진다.
개체가 전체로 환원되는 순서는 일정하지 않고 점진적이거나 순차적이지도 않다. 이것은 동시적으로 일어나며 조건이 갖추어지는 순간 폭발적으로 일어난다. 그 환원의 순간에 우주의 신비가 담겨 있다.
“그렇다면 개체는 어떤 경우에 단위입자의 집합체로 유지되는 걸까? 개체를 이루는 요소는 불안정하거나 안정된 미세개체들이 그것들을 관계 짓게끔 하는 어떤 규칙에 부합할 때 생겨난다.
내 안에는 서로 원활하게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반드시 하나 이상의 공통 요소를 지닌 단위입자만이 존재하지. 이를테면 동일계열이란 의미이다.
의지가 핵을 이루고 있고 그 주위를 정보를 받아들인 미세개체가 싸고 있다. 그리고 끊임없이 다른 개체들과 상호교감을 한다. 내가 살아 있다, 또는 활동한다는 의미는 곧 이들 간의 교류를 뜻하고 이것이 곧 변화다.
개체가 전체화되는 환원의 순간에 같은 성질의 체계끼리 흡수되거나 발산하며 새롭게 개체화될 때 동일계열 간에 뚜렷한 다른 현상을 나타내지.”
교류는 고유의 빛을 지니고 있다. 핵을 이루고 있는 의지의 파동은 즉각 관계 짓고 있는 동일계열의 입자들에게 파동을 일으키고 이 자극은 동시적으로 전달된다.
“입자 간 파동의 매개체인 최소입자의 파동이 일정 이사일 때 입자에서 이탈하게 되며, 그 속도와 양의 차이에 의해서 정보의 전달과 경로가 다르게 결정되나.”
아퀴나스는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관념을 전달하는 데 상당히 애를 먹고 있었다. 뜸을 들이거나 했던 말을 고쳐 말하거나 다른 적당한 말로 바꾸기로 했다.
언어의 한계성을 이때처럼 절감해본 일도 없었을 듯싶었다. 어쨌든 그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고 듣고 있는 이들도 점차 흥미를 보였다. 동의하고 안 하고의 문제와는 별개였다.
“빛의 파동은 배열의 특성상 상대적인 상위개념과 하위개념이 있고 상위개념으로 갈수록 전체 환원의 속도가 높아진다.”
파동은 언제나 상호적이다. 하나의 파동과 다른 파동의 정점이 겹칠 때는 강화되고 파동의 정점과 골이 겹칠 때는 상쇄되기도 한다. 이러한 개체 간의 파동 교류가 곧 물리적 변화를 낳는다.
“이 파동은 어떤 것에도 제한을 받지 않는다. 때로 그렇게 보일 때도 있는데 그것은 어떤 사건을 인지하는 개체가 그 과정과 정보를 순차적으로 처리하기 때문이다. 사실은 파동의 시도가 있었다가 철회된 것이다.
좀 전에 단위입자가 내린 결정은 다른 단위입자가 즉각적으로 인지한다고 했던 것을 상기해보면 이해가 쉽겠지.
파동의 결과는 갖가지 경우의 수를 모두 시도한 상태이며, 가장 이상적인, 가능한 형태로만 나타난다. 결국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다. 단지 개체의 정보인식이 그렇게 판단하는 것뿐이다.”
놀라운 말이었다. 시간은 존재하지 않고 개체가 받아들인 정보를 처리하는 과정이 그렇게 인지하게끔 한다는 의미였다. 사실은 모든 것이 동시적이란 의미이기도 했다.
“그래서 최초 자극의 동인인 신만이 시간에 제한을 받지 않는 것이다. 그에게서도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동시적인 것에 불과하지. 파동은 또한 동시에 입자이기도 하다.”
코모라가 머리를 짚으며 뇌까렸다.
“계속 듣고 있어야 하는 건가? 결론만 간단하게 말해주면 안 되니?”
분위기는 어느새 역전되어 있었다. 모두가 그를 쏘아보았기 때문이다. 아퀴나스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카오스는 파동이었다. 동시에 스스로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되는 입자이기도 하며 지금은 자의식을 지닌 개체가 되어 있다.
문제는 다른 모든 파동이 일반적으로 규칙성을 띠는데 비해 카오스의 파동은 변칙적이고 이단적이지. 카오스의 각성이 위험한 것은 모든 개체의 파동전달을 혼란스럽게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금 이곳이 카오스에게 통제되고 있는 것도 그와 같은 이치에서 비롯된다. 지금부터는 나도 동의할 수 없는 키케로만의 견해이다. 이해하기 쉽게 서로 분류해 설명했지만 실상 우주엔 개체의 구분이 없으며 파동과 입자와 의지만이 있다.
파동은 입자이며 의지는 파동이기도 하고 입자이기도 하다. 하나에서 시작돼 셀 수 없는 체계를 낳았지만 마지막은 다시 하나로 모여들게 된다. 개체 간의 관계성에서 중요한 것은 의지이며 의지의 결합이 무수한 경우의 수를 만들며 이 세계를 어떠한 상태의 것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아퀴나스의 견해는 비밀차원의 지도자들이 받아들이기엔 벅찬 것이었다.
그들이 견지해 온 입장을 통째로 재수정하지 않고서는 곤란한 것들이 상당했다. 빈델반트의 지적은 그런 성향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결국 우리 또한 신에게 귀속될 수밖에 없다는 말이로군. 모두 사실이라고 쳐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야.
네 말대로 하자면 모든 것은 애초에 결정되어 있다는 것인가? 그리고 그 짓을 계속적으로 반복하는 이유는 대체 뭐지? 최초의 자극인 신도 결국엔 파동에 불과하겠군. 의지의 유무에 관계없이 법칙성 안에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처지로 전락하는 거로군.”
“나 또한 그런 질문을 했었다.”
“키케로의 대답은?”
“그건 자신도 모른다고 했다. 그는 과정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의지이며 최초의 동인인 신의 의지 또한 그런 점에서 해석해볼 수 있을 뿐이라고 했다.
“왜 하필이면 이런 상태로 결정되었지? 하긴 뭐 매번 다르겠군.”
캄파넬라의 중얼거림에도 아퀴나스는 성의껏 답변했다.
“어떤 현상이 일어났다면 왜 그것으로 결정되었는가? 결과의 배경엔 언제나 의지의 동의가 있다. 개체의 의지가 지향하는 총합의 값이 바로 현재의 모습이다.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과정 중에 있는 어떤 단면이다. 모든 것이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맞다. 하지만 전체에서 분리된 개체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다. 결정되어 있는 것은 오직 파동의 전달과 그 규칙성뿐이고 의지는 여전히 그 영역 밖의 고유한 것으로 남아 있게 된다.
그래서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한 것이 되고야 만다. 모든 가능성의 영역은 관념 안에서 실재하며 그것이 최종적인 현상으로 결정되면 현상계의 실재가 된다. 모든 것은 결정된 듯 보이나 그 구성원의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의미이며, 그것은 언제나 최선의 결과이다.
다양한 가능성의 실재를 때로 우리는 우연찮게 엿보기도 하는데 그것이 바로 기적이며 신비현상이다. 의식체계는 복잡하게 뒤엉켜 있는 실타래와 순차적으로 반응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그건 또 뭐지?”
“직관이나 영감과 같은 것들이지. 순차적인 반응경로를 거치지 않고서 최초의 동인이나 최상위 파동으로부터 직접적으로 공급받는다.”
아퀴나스가 키케로로부터 전해 들었던 말 중에 끝내 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최초의 파동은 신으로부터 시작되었고, 그것이 전달이 지금의 현상계이다.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최초법칙이 신의 의지이며 그 성격은 사랑이라고 했다.’
할 말은 다했다. 이제 결정만이 남은 것이다. 헤르바르트가 다소 굳은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
“카오스가 각성했느냐 아니냐가 중요하겠군.”
“각성 후라면?”
“전이든 후든 달라지지 않는다. 우선 선결 과제가 카오스로 바뀌었을 뿐이다.”
동시에 치자고도 했다. 그들이 공격해 오지 않으리란 보장이 어디 있느냐고 했다. 하지만 코모라는 생각이 달랐다.
“카오스와 그들 간의 대결을 지켜보자고. 괜히 나서서 심력을 낭비할 이유가 없을 듯한데.”
그 다운 판단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동의하는 자들이 많았다.
“먼저 나서봐야 전력 손실만 있을 뿐이지 이익은 하나도 없다. 그렇게 하자.”
아퀴나스는 듣고만 있었다.
“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 하지. 일단은 상황을 좀더 지켜보면서 동태를 살피자고.”
반대가 없으니 그렇게 어물쩍 결론이 날 듯싶었다.
당장에라도 손을 쓰자고 하지 않는 걸 보면 그들 역시나 카오스가 찜찜하긴 한 듯싶었다. 하지만 아퀴나스의 생각은 달랐다.
“나가자. 이곳은 우리의 세계. 외부의 존재들에게 맡겨두고 나 몰라라 하는 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지. 카오스가 휘젓도록 내버려둘 수도 없다. 이 세계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모두에게 보여줘야 한다.
아퀴나스는 제 주장을 굽힐 것 같지 않았다. 그의 기세가 평소와는 사뭇 다르게 매우 격렬해 보인다는 사실을 모두 주목했다. 반대는 나오지 않았다.

서로 자기 것은 숨기고 남의 것만 훑어내려 하니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닐 수밖에.
서로 오가는 말만 무성하고 실속은 없었다. 보아서 알 수 있으면 이런 짓거리는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모양으로 대치하는 것이 속을 끓였는지 카오스가 먼저 속내를 드러낸다.
“너와 나는 타협이 되지 않으니 결국엔 대립하다 싸워야 마땅하겠지만 서로가 우위를 점하지 못하니 매 쓸데없는 싸움일 뿐이다. 네가 전력을 내고 내가 온 힘을 쓰면 이 세계인들 무사하겠는가?”
그래서 어쩌자는 걸까?
“아직은 남은 기한이 있으니 무르익을 동안 이곳을 경계 삼아 지낼 터이니 너도 네 있을 자리로 물러나 때를 살피는 게 옳을 것이다. 속히 이곳을 떠나거라.”
이쯤 되면 파천은 얻을 걸 다 얻은 것이나 진배없다. 카오스가 준비해온 것이 사실은 빈손이라는 걸 드러낸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말해놓고 보니 카오스도 아차 싶었던지 한마디 덧붙이는 걸 잊지 않는다.
“이번엔 전례를 깨고 새로운 일을 도모할 참임을 말했다시피, 그러기엔 여의치 않아서 그러는 것이니 행여 다른 오해를 해서 날 자극시키는 일은 없길 바란다.”
내심으로야 안심하여 ‘이젠 됐다’ 싶었지만 굳이 그런 걸 드러내 일을 어렵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각성은 하였지만 완전한 것이 아니고 힘은 얻었지만 충분치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카오스를 온전하게 제압할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니니 아직은 좀더 지켜볼 일이었다.
어쨌든 최악의 상황은 면한 셈이었다.
“오지 않았다면 모를까, 온 김에 상황은 정리하고 가야겠다.”
파천의 목소리에 한층 힘이 더해졌다.
‘완성되지 않은 카오스라면 실체만 찾아내 봉인하면 된다.’
방법이 생겼으니 쾌재를 부를밖에.
“아직 사태의 심각함을 모르나본데 다시 말해주지. 고집을 부려내 도모함을 훼방하면 근심과 슬픔이 더해진다. 너와 함께 하는 자들, 그들을 내 손아귀 아래서 보호할 자신이 있나? 널 어쩌지 못한다 해서 그들까지 안전할 거란 기대는 어리석지. 일을 그르친 뒤에 후회하지 말고 물러나는 게 좋을 텐데.”
“각성하지 못한 카오스의 자신감이 내게 되리라고 보진 않아. 네가 몸을 감추면 나 또한 널 어찌할 방도가 없으니 차라리 그쪽을 택하라고 권고해주고 싶다.”
이제 상황은 되려 역전된 것이다.
카오스의 이른 등장은 자신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뜻밖의 상황에 기댄 오판이라 할 수 있었다.
여러 가지 조건이, 활동이 원활한 정도로 무르익었다는 판단을 내리게 된 데는 최악의 경우라도 천적인 광명이 자신을 소멸시키거나 제압할 수는 없다는 계산에서였다.
하지만 그것도 경험에 기초한 확신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카오스의 분노는 분열을 가져 왔고, 그 분열은 비밀차원에 죽음을 불러 오기 시작했다.
황폐화된 차원의 터에, 숨겨진 공간 깊숙한 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이한 생명력은 혼돈이 잉태한 것이었다.
카오스가 제 힘을 뽐내기 시작했음을 파천은 즉각 알아챘다. 통제하기 시작한 공간 내 생명체들을 소멸시키려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파천이 외쳤다.
“중단하라. 너와 내 다툼을 확대시키지 마라.”
“어찌할 테냐? 이제 시작되었으니 얼마든지 막아봐라. 끝내 내 충고를 거부했으니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주겠다.”
카오스의 형체가 공간 중으로 스며들었다.
카오스를 삼킨 하늘이 꿈틀거리며 급변하고 있었다.
파천은 주변의 변화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선발대의 위치를 포착해보았다. 카오스에 의해 통제되기 시작한 공간은 파천의 능력으로도 쉽사리 정리되지 않는다. 수십 겹 구름 사이로 작은 점 하나를 찾아내는 것도 이보다는 쉬울 것이었다.
‘카오스가 내게 집중하고 있는 한 그들을 포착해내기란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 .’
한 손이 바닥에 가 닿았다. 카오스의 통제력은 허공중이 더 밀도가 높다. 대지도 카오스의 영향권 아래 있었지만 파천의 집중을 훼방할 정도는 아니었다.
파천은 익숙하게 비밀차원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메타트론과 루시퍼 일행과 비밀차원의 지도자들 그리고 무수한 생명체들의 기운이 혼재되어 있었지만 파천은 즉각적으로 성질을 분류해냈다.
그리고 선발대의 위치가 처음 헤어졌던 곳에서 얼마 벗어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파천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진다. 대지 중으로 스며들어 간 듯이 보였다. 파천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다시 카오스가 나타났다.
“광명을 얻었다지만 너 또한 나처럼 완전한 각성을 이룬 것은 아니다. 내 등장을 염두에 두지 않은 선택이었겠지. 시간이 지날수록 내 힘은 커지지만 네 완전성은 네 선택에 의해 유보되었지. 이번에야말로 내가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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