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78화 : 영계대전쟁의 최전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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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검 – 178화 : 영계대전쟁의 최전선에서


영계대전쟁의 최전선에서

평소 사이가 그다지 원만하지 못했음에도 위기에 처하게 되자 그들은 힘을 하나로 모았다. 아사셀을 중심으로 뭉쳤고 부족한 능력을 단결된 힘으로 메우려 했다.
하지만 빈델반트와 바르트는 노련했다. 어떤 식으로 다뤄야 자기네들에게 유리한지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먼저 그들은 뭉쳐 있는 대열을 흩는 데 주력했다. 대지가 뒤집히고 아래에서 시작된 힘의 폭발은 대마신들과 어둠의 천사들을 모조리 공중으로 띄웠다.
벌려진 그들 사이의 간격, 바로 그 틈 속으로 둘은 들어갔다.
중앙에서 등을 맞대고 사방으로 공격을 해대니 자연 대마신들과 어둠의 천사들은 넓게 포진한 형세를 취하게 된다. 그들 간의 간격도 점차로 넓어져 갔다. 그 순간을 둘은 놓치지 않는다.
바르트는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계속 공격을 퍼부었고, 빈델반트는 하나씩 처리하는 쪽으로 분담해서 맡는다.
둘이 장악한 흐름은 상대들에게 공격할 엄두는커녕 방어하기에만도 급급하게 만들었다. 거센 압력은 몸을 가누기조차 힘들게 만들었고 빠른 변화는 적응도 쉽지 않았다.
방어벽은 종잇장처럼 쉽게 찢어지고 날카로운 경기는 전신 곳곳에 작니 않은 상처를 남겼다. 바르트가 집중시키고 있는 힘의 여파는 반경 수백 장을 진공 상태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가공했다.
그런데도 공격권 밖으로 퉁겨져 나가기는커녕 중심에서 당기는 힘까지 있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었다. 그나마 견뎌내는 건 아사셀 하나 정도에 불과했다.
그는 이대로 가다간 제대로 저항 한 번 못해보고 당할 거라 생각했다. 급했다. 자신이 뭔가를 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급박함이 그를 서둘게 했다.
“으아아아아.”
혼신의 힘을 다했다. 살갗이 터지고 피가 배어나올 정도로 잠력을 모조리 격발시켰다. 그러자 놀랍게도 힘의 분배가 다시 재조정 되는 것이었다. 바르트가 그에게 더 많은 압력을 분배한 결과였다.
기세 좋게 뻗어 나가던 아사셀의 공격이 일정 지점을 벗어나지 못하고 주춤했다.
한 자리에 멈춰 있다는 건 상대를 돕는 일이다. 최대한 신속하게 움직이며 적에게 혼란을 줘야 유리하다. 그걸 모르는 이는 없다.
문제는 움직이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힘의 격차는 이 정도로 컸던 것이다. 애초에 상대가 안 되는 싸움이었던 것이다. 그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빈델반트에 의해 하나씩 사라져 가는 어둠의 천사들.
그들이 짓는 마지막 표정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억울함과 분함 그리고 안타까움. 아사셀이 처음으로 화신했다. 거대한 용의 화신체는 빠르게 전염되었다. 입에서 토해지는 거대한 불줄기를 시작으로 사방에서 이와 같은 장면이 동시에 연출되었다.
모두가 화신한 것이다. 그들의 마지막 선택이 화신이었다.
화염의 줄기는 공간을 가득 채우고 집중되었다. 뿐만 아니라 한꺼번에 몰아친 날갯짓의 압력 또한 무시무시할 정도였다.
그들의 공격이 집중되는 가운데에 빈델반트와 바르트가 서 있다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했다.
“최후의 수단이란 게 고작 용으로의 화신인가?”
사방에서 몰려온 화염은 그들의 근처까지 다다르긴 했지만 더 이상 근접하진 못했다.
불길은 벽면을 거슬러 오르듯 위로 솟구쳤을 따름이었다. 빈델반트의 몸이 그 자리에서 회전을 하자 되려 화염의 줄기들이 이리저리 춤을 추며 왔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바르트도 손을 놀고 있진 않았다. 그의 손에 머리통만한 빛의 덩어리가 생겨났다.
오색으로 물든 구는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양손에 쥔 빛의 덩어리가 바르트의 손을 떠나 빠른 속도로 용들에게 날아갔다.
위압적인 거대한 체구 때문인지 움직임을 방해하는 기운의 흐름 때문인지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빛의 구가 폭발을 일으켰다.
파악
“끄아악.”
용들이 하나, 둘씩 사라져 갔다. 모두는 화신을 푼 채로 망연자실해져 있었다. 형체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망가진 자들도 여럿 있었고 간신히 치명적인 상태를 모면한 이들도 보였다.
아사셀이 절망했다. 어떤 방법으로도 눈앞에 있는 적들을 막아 낼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할 뿐이었다. 모두가 마지막을 예감했다. 바르트와 빈델반트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들의 주변에 거대한 빛의 회오리가 생겨나 하늘 높이 휘말려 올라가고, 거기에 휩쓸린 것은 먼지조각 하나라도 성치 못했다. 빈델반트가 엄숙하게 마지막 선고를 했다.
“우리 세계에 침입한 죄를 묻겠다. 모두 편히 안식하라.”
콰아아아
몰려온다. 죽음을 안겨줄 거대한 빛의 폭발이 몰려온다. 화려한 빛은 어둠을 선나할 것이다. 어둠은 영원한 안식을 줄 것이다. 아무도 저항할 생각을 못했다.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누구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고 아무런 대비책도 없는 그때에 그가 나타났다.
그는 그 막대한 힘을 온몸으로 맞서고 있었다.
빈델반트가 외쳤다.
“아퀴나스, 네가!”
아퀴나스의 등장. 그리고 의외의 행동.
그가 적을 살렸다. 아무도 막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적어도 대마신들이나 어둠의 천사들에겐 그렇게 비쳐졌던 그 불가사의한 힘이 아퀴나스의 전신에 부딪쳐 흔적 없이 사라지는 광경을 그들은 충격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의문이 들었다. 왜 저자가 우리를 살리는가?
바르트도 항의했다.
“지금 행동은 무슨 뜻이냐?”
아퀴나스가 되려 그렇게 물었다.
“내가 너희들에게 무엇이냐?”
대답이 없다. 그럼에도 아퀴나스는 질문을 되풀이했다. 대답은 없어도 좋다는 듯 할 말을 이어 갔다.
“내가, 이 아퀴나스가 너희들에게 어떤 존재인가?”
아퀴나스의 지금 행동은 아무리 수용해보려 해도 용납되지 않는 이적행위에 다름 아니었다. 바르트는 얼굴을 실룩이며 간신히 이렇게 말했다.
“우리와 적이 될 생각인가? 진정 그런 건가?”
“나는 아퀴나스, 너희들이 세운 지도자다. 아직은 내 뜻이 너희들 개별적인 의지에 앞선다. 그렇지 않은가? 부정하고 싶은가?”
빈델반트가 웃었다.
“네 오만의 끝이 어디인지가 궁금했었다. 너를 제외시킨 결정이 널 자극시켰나본데 … .”
“천만에.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하지만 이런 조잡한 음모를 꾸며야 할 만큼 우리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건 인정할 수 없다.
설사 그렇더라도 이런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악취가 난다. 우리를 지탱해 온 최소한의 긍지마저 버리고 무엇을 얻길 바라는 거지? 그새 카오스를 핑계 삼아 이런 협잡을 벌일 정도로 너희들이 썩었단 말이냐? 부끄럽지도 않나?
코모라가 그렇게 주장할 수도 있다. 캄파넬라라면 충분히 이런 계획을 구상할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어찌 너희들이 이런 짓에 동조할 수 있지? 무엇이 너희를 이처럼 나약하게 만들었는지 판단해 보라.
그래도 결행하겠다면 먼저 날 넘어서야 한다. 이런 식으로 지켜질 세계라면 차라리 내 손으로 부숴버리겠다.”
빈델반트와 바르트는 전율했다. 아퀴나스의 말처럼 부끄럽기도 했다. 망설이긴 했지만 좀더 강하게 반대하지 못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결국엔 동참하게 되었을 때 앞으로 더 이상 어떤 주장도 당당하게 할 수 없으리라 직감했었다.
그리고 지금, 아퀴나스의 꾸짖음이 자신들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미 선택은 내려졌고 결행되었다. 이제 와서 돌이키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 그리고 어차피 소멸시키기로 결정했던 적들이 아닌가?
“우리가 어떻게 하길 바라지?”
“부끄럽지 않을 당당한 싸움을 하자.”
“어떻게? 어떻게 하는 것이 당당한 싸움이란 거지?”
“모든 걸 원점으로 돌린다.”
말릴 새도 없었다. 아퀴나스가 캄파넬라가 만든 공간을 정확하게 찾아내더니 순식간에 찢어버렸다.
스스스스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한참 싸움에 열중에 있던 자들이 영문을 몰라 하며 그 자리에 나타났다.
빈델반트도, 바르트도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퀴나스에 대해 그들이 알고 있었던 것이, 사실은 전부에 비하면 아주 작은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빈델반트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감지했다. 아퀴나스가 나타났을 때 순간적인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싸움을 걸기라도 했다면 곤란을 겪은 쪽은 자신들이었을 거란 결론 때문이었다.
캄파넬라와 코모라 등은 아퀴나스가 등장해 있고 빈델반트와 바르트가 굳어 있는 걸 보곤 일이 틀어지기 시작했다는 걸 간파했다. 아퀴나스가 용케 어떻게 알았는지 때맞춰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나선 것이다.
하지만 어떤 과정을 거쳐 공간이 열렸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
한편 메타트론은 펼쳐진 전경을 살펴보다 몇 가지 사실을 알아냈다. 끝까지 싸움에 참여하지 않고 관전만 하고 있던 빈델반트와 바르트가 사실은 공간 밖에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들에 의해 수하들이 방금 전까지 참담한 지경에 처해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일부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사라졌다는 것.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은 그 어떤 항의나 비난보다도 강력한 적의를 담고 있었다. 그리고 반드시 어떤 식으로든 채무는 받아 내리라 다짐했다.
캄파넬라가 계획한 일도 일부분 수포로 돌아간 셈이었다. 메타트론이나 루시퍼를 회생불능으로 만든 것도 아니고 수하들을 완전히 제거한 것도 아니다.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에서 진행은 멈춰져버린 것이다.
이 모든 게 아퀴나스 때문이라 생각하니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처음부터 제외시키자고 한 것도 이런 경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강직함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너인가?”
지난 기억들 중에 캄파넬라가 좌절을 맛본 순간마다에는 아퀴나스가 버티고 있었다. 매번 넘어서지 못하고 결국엔 그의 통치를 어느 정도 인정하게 되기까지 그가 겪었던 참담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어렵게 가자고 할 거면 말하지 마라.”
아퀴나스가 제 얼굴을 캄파넬라의 얼굴 가까이에 밀착하듯 가까이 들이댔다.
“분명히 경고했었다. 내가 있는 한 네 결정만으로 혼란을 주지 말라고. 책임지지도 못할 짓은 시작도 하지 말라고. 정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 날 권좌에서 밀어내라고 했었다.
그럴 자신이 없으면 고개 쳐들지 말고 숨죽이고 처분만 기다려. 그 짓도 못하겠거든 너 혼자서 하라, 다른 이들을 끌어들이지 말고.”
모욕적인 말이었다. 한두 번 겪어본 것도 아니었지만 이번의 경우엔 예전보다 수위가 높았다. 이를 바드득 갈아붙이는 캄파넬라를 대신해 코모라가 언짢은 심경을 토로했다.
“지나치잖아. 네 독단을 이젠 모두가 지겨워하고 있다. 우리 얼굴을 봐라. 캄파넬라가 계획하긴 했지만 우리가 자진해서 따랐다. 너만 빠지면 우리 사이엔 문제가 없어. 이런 말도 이제 신물이 날 정도로 지겹군.
이 세계를 유지하고 지탱시키는 것이 마치 너 하나의 공로인 양 생각하는 널 우리가 언제까지 용납해주길 바라나.
다수의 결정에 따를 생각이 없다면 그냥 … 우리 일에 간섭이나 안 해줬으면 좋겠어. 그게 우리가 네게 바라는 거야.”
아퀴나스가 코모라와 캄파넬라를 가리키며 말했다.
“너희들도 이 둘과 같은 생각인가? 결정을 내려. 나와 함께 할 것인지 아니면 이 둘과 함께 갈 것인지.”
아퀴나스가 빠진 비밀 차원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빈델반트와 바르트, 헤르바르트는 약간씩 충돌은 있었을지언정 아퀴나스야말로 이 세계의 최고지도자로 적임자라고 생각해 왔었다.
그가 있었기에 반목이 더 번지지 않았고, 캄파넬라와 코모라의 충동적이고 즉흥적인 경솔함을 이만큼이나마 억제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의 태도는 그 도를 지나치고 있었다. 막다른 곳에 몰린 채 강요받고 있는 심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자신들이 마무리 짓지 못한 치부의 현장에서 말이다.
그것은 묘하게도 심리적인 반발심을 부추겼다. 차가운 이성은 아퀴나스를 선택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지만 뜨거운 감성은 캄파넬라와 코모라의 자기들 사이에 끊을 수 없는 동료의식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헤르바르트는 망설임 없이 선택한다.
“나도 더 이상 널 용납할 수 없을 것 같다.”
바르트와 빈델반트도 자기 의사를 분명히 했다.
“갈 길은 정해진 것 같군. 너와 우리가 선택한 길이 다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더 이상 널 의지해서는 안 될 것 같구나. 네가 했던 고백처럼 너도 모르는 새 넌 키케로를 완벽하게 닮아가고 있다. 그와 우리가 다른 것처럼 그의 길과 우리의 길이 같을 수는 없다.”
아퀴나스를 의지하고 의존했던 자들의 독립선언이 이어졌다. 그들은 나중엔 후회할지언정 당장은 의사를 번복할 생각이 없었다. 그 선언들이 자신에 대한 지지라도 되는 것처럼 착각한 캄파넬라가 의기양양해졌다.
“이제 확실해졌군. 너는 더 이상 우리 중 하나가 될 수 없다. 적이 되는 여길 떠나든 결정은 네 것이다. 우리 뜻을 확인했으니 더 잇아 우리 일에 간섭하지 마라. 지금부터의 간섭은 훼방으로 간주하겠다. 부디 … 우리가 서로 격돌하는 일만은 없었으면 좋겠다.”
메타트론은 어쨌든 간에 공동의 적이다. 그 적을 앞에 두고서 내분이 일어난 것이다. 지켜보던 메타트론은 이런 상황이 자신에게 불리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파악된 적의 능력은 자신을 능가하는 것은 아니다. 충분히 해볼만했다. 문제는 아퀴나스. 그가 합류한다면 좋을 게 없었다.
좀더 확실한 결과가 생길 때까지 메타트론은 참고 기다렸다. 지금 나서는 건 여러모로 손해라는 판단이 들었다.
이제 아퀴나스의 결정만이 남았다. 이렇게 될 걸 누가 알았을까? 그토록이나 경계했던 일이건만 극단의 선택은 소리 없이 그들 운명을 바꿔놓으려 하고 있었다.
지금껏 비밀차원을 유지해 올 수 있었던 까닭은 서로의 의견이 비록 차이를 보인다 할지라도 극단적인 대립을 지양하고 공통의 의지를 찾으려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대의 의지를 존중해주는 것, 그것이 그들 간 조화의 출발점이었다.
그런데 서로를 부정하기 시작했다. 네가 없어도 나는 존재한다는 대립적인 선언은 어느 한쪽이 포기하지 않는 한 충돌을 야기할 것이다.
아퀴나스는 동류들의 배척에도 그다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적어도 메타트론이 보기엔 그렇게 보였다.
“내가 너희들을 버릴 수는 있어도 너희가 그럴 수는 없다.
왜인 줄 아나? 너희에겐 현 상황을 조정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지. 날 다시 찾게 되는 때가 올 것이다. 그때까지 내 결정을 유보하겠다.
명심해둬라. 내 잠시의 떠남은 너희들의 의지를 존중해서임을. 하지만 이곳을 떠나지는 않는다. 이곳은 너희뿐만 아니라 내게도 유일한 안식처다. 하지만 너희 행사에 간섭하진 않겠다. 행운을 비마.”
아퀴나스는 그렇게 무대에서 사라져 갔다. 그가 반발 없이 이렇게 쉽게 물러설 줄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메타트론의 입장에서는 아퀴나스가 제외되었다는 것만으로도 큰 소득이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이왕이면 서로 싸워줬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을 터인데.”
남의 비밀차원의 지도자들의 표정은 제각각이었다. 홀가분해하는 이가 보이는가 하면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내비치는 자도 있었다.

격전은 치열했다.
그 치열함은 수위가 높아질수록 훈련된 체계 내에서의 통제는 불가능한 것으로 되고 만다.
혼전의 범위가 넓어져 어떤 강력한 지도력에도 장악되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그 혼란의 와중에 휩쓸리지 않는, 그래서 전투를 객관적으로 관전할 위치를 확보할 수 있었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 현장을 보라, 무엇이 있어 이 처절한 몸부림을 제어하고 장악할 수 있으리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던 오만이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던 것이다. 오직 그곳엔 살고자 하는 본능만이 유일한 가치였으며 최고의 미덕이었다.
존재를 유지하고자 하는 욕구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래서 그 목적만이 절실할 뿐이었다. 그 부딪힘 속에는 대립된 이념도, 가치도 드러나지 않았고, 죽는 자와 죽이는 자만 있을 따름이었다.
최후까지 살아남기 위해서는 적당한 운과 비열한 수단이 되려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강하다는 것도 상대적이었으므로 끝까지 자신을 지켜줄 확정된 약속이 될 수는 없었다.
모두가 매우 뚜렷한 미지의 두려움에 포로가 되어 기계적인 살생을 거듭한다.
두드러지는 자들은 역시나 익히 명성이 있던 자들이었다. 그동안의 축적된 힘과 경험을 바탕으로 생존하는 법을 터득한 자들은 위기의 순간에도 빛나는 재지로 위험을 비껴가곤 했다.
천상계의 천주들과 선계의 팔선, 무한계의 이름난 지도자들이 그랬고, 제왕들이나 그레고스, 로메로 등의 쟁쟁한 강자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마르시온을 추앙하고 숭배하는 쿠사누스들도 승리를 쟁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참으로 기이한 것은 우연일 수 없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살아남을 확률이 높은 강자들일수록 버거운 상대를 본능적으로 피하는 듯했으며 철저하게 자신만의 영역을 확보하고 있었고, 또한 그것을 서로가 인정하고 있는 상황을 연출했다.
이 모두가 예기치 않았던 혼전의 흐름이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살상력이 크면 클수록, 그 범위가 넓으면 넓을수록 아군의 피해도 그만큼 커진다. 그러니 자연 하나를 지목해 최소한의 범위 내에서 적을 제거하는 방편을 택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예외란 언제나 존재하는 법이다. 제왕들이 마르시온과 쿠사누스들을 찾아 대적하기 시작했다. 이건 또 하나의 중요한 흐름을 만들어냈다.
적의 머리를 쳐라. 로메로와 불칸을 위시해 지혜전사들이 대거 마계의 핵심전력인 마계전사들을 몰아가고 있는 것도 새로운 변화였다.
감정의 변화도, 기복도 없는 그들만이 조직적인 전투를 펼치고 있었는데, 그들이 철저하게 보호하고 있는 대상은 헤르파를 비롯한 마계의 지도부였다.
어쩌다보니 전장의 중심에까지 들어가게 된 마계전사들은 사방에서 혈투를 벌이고 있던 자들의 시선을 한 번에 끌게 되었다. 그들을 제거하면 모든 정황이 손쉽게 정리될 것 같았다.
헤르파는 매서운 눈길을 돌려 전장의 형편이 어떤지를 살폈다. 누가 우세를 점하고 있는지 아직은 판단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런 식이라면 최후까지 가봐야 윤곽이 드러날 것 같았다. 기습을 해 초반의 기세를 뺏으려던 시도는 상대의 기세가 꺾이지 않고 물러서지도 않은 채로 뒤섞이는 바람에 지금의 혼전 양상을 빚게 됐다.
지금의 상황에서 흐름을 주도해 가려면 적의 수뇌들을 찾아내 하나씩 제거해 나가는 편이 최상이다. 하지만 자신은 그런 일을 하기에 적임자라고 할 수 없었다.
카르마, 카르마를 찾아야 했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마계전사들이 팔방을 보호하고 있어 아직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헤르파의 양쪽엔 라넷과 라아그, 헤렘이 나란히 서 있었다.
그들 역시나 아직은 전투 중에 뛰어들지 않고 관망만 하고 있었다.
마르시온과 쿠사누스들이 대거 모여 있는 곳을 살피니 그들 주변으로 몰려든 제왕들과 막 싸움이 시작되고 있었다.
라넷이 유독 눈에 띄게 활약하고 있는 적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버려두기엔 너무 두드러지는데.”
그녀가 가리킨 대상은 지혜전사단의 부단주인 홀딘이었다. 라미레스가 없었다면 지혜전사단주로 낙점됐을 강자. 그의 활약이 눈에 띄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 외에도 아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강자는 많았다. 마계가 루시퍼와 대마신을 빼놓고 보니 강자들의 수가 무 한계 하나만도 못하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그나마 정예화된 마계전사들이 아니었다면 이번 싸움은 제왕의 군대만의 버거운 버티기가 될 뻔했었다. 나찰들이나 아수라들이 홀딘 정도의 강자를 막아내기엔 무리가 따랐다.
보다 못한 라아그가 헤르파에게 자원했다.
“내가 저자를 잠재우겠다.”
헤르파는 말리지 않았다. 허락이 떨어지기 전에 라아그는 이미 홀딘 근처에까지 다다라 있었다.
만만찮은 기세가 몰려옴을 느꼈던지 홀딘도 경계하며 주변을 살폈다. 그의 주변은 좀 전에 펼쳐진 공격으로 일정 공간이 확보되어 있었다.
홀딘의 눈이 자신을 향해 짓쳐 오는 라아그를 주시했다. 두 팔을 교차하며 내뻗는 손길에 무시무시한 힘이 실려 있었다. 결코 경시 할 수 없는 적임을 알아본 홀딘 오히려 신이 나서 외쳤다.
“이제야 제대로 된 놈이 나서는군.”
물러서지 아노고 마주친 두 사람은 그보다 빠른 속도로 퉁겨지는가 싶더니 적의 숨결을 끊어놓고자 재차 격돌했다.
숨 가쁜 공방이 이어지는 사이에도 둘의 눈빛은 상대의 약점을 찾아내기 위해 번뜩였다. 위인가 하면 아래에서, 아래인가 싶으면 배후에서,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공격인 것 같은데도 둘은 약속한 부딪힘을 선이라도 보이듯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막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홀딘의 우세가 점차 두드러져 갔다. 변화에선 라아그가 다양했지만 빠름과 정확함에서 그리고 유효한 공격 빈도에서 홀딘이 앞섰다.
그런 미세한 차이가 홀딘을 유리하게 만들었다. 홀딘은 원거리와 근거리의 공격을 교대로 사용하며 상대적으로 전투 경험이 적은 라아그를 압박해들었다.
그런 와중에도 근처에 있는 아수라나 나찰이 보이면 가차 없는 살수를 펼쳐 격살시키는 여유까지 보였다.
라아그는 화가 났지만 결정적으로 적을 무릎 꿇릴 회심의 수단을 갖고 있지 못했다.
지켜보던 라넷이 걱정하며 말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저자는 라아그의 수를 훤히 읽고 있어.”
헤렘이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공격이 너무 정직하니 그렇지. 전체적인 전황이 우리 쪽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 같은데 어쩔 거야? 막상 펼쳐놓고 보니 우리가 되려 밀리고 있잖아.”
마계의 무서운 점은 루시퍼를 정점으로 한 대마신들의 활약이 더해졌을 때만 빛을 발한다.
그들이 빠져나간 상태에서 마계는 허점이 너무도 많아 보였다. 실제로 아수라들이 하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무한계 중부 전사들보다 약하지는 않다. 오히려 강세라고 할만했다.
그런데도 이런 결과가 나타내는 건 마계측엔 하룬의 두터운 수뇌층을 상대할 전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 때문이었다.
마침 로메로와 그레고스도 잠시 혼전 중에서 빠져나와 전황을 면밀히 살피고 있는 중이었다. 로메로의 진단은 희망적이었다.
“희생이 크겠지만 이대로 간다면 우리 쪽이 승리할 것 같군요.”
그레고스도 그런 확신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런 것 같군. 그렇지만 아직은 속단할 때가 아니야. 저쪽엔 보호막을 제거한 강자가 있어. 그가 나선다면 상황은 순식간에 반전될지도 몰라.”
그 하나가 그렇게까지 미치는 영향이 클까 싶지만 그레고스의 그 말은 사실이었다. 메타트론이 루시퍼를 포함한 마계 전력보다도 더 위협적이었다.
어느 쪽에 강자가 포진하고 있느냐에 따라 승부가 갈릴 것이란 예측은 오래전부터 있어 왔었다. 막상 뚜껑을 열어놓고 보니 현재까지는 하룬이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그 이유가 제왕들을 비롯한 하룬 수뇌들의 활약 덕분이라는 걸 반박할 여지는 없었다.
그래도 문단속은 철저하게 해두는 게 여러모로 좋다. 로메로는 수뇌들 한 사람, 한사람에게 영언을 전달해 위치를 재조정해 갔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미지의 강자가 출현하더라도 한 번에 무너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였고, 효과적인 방어를 위한 최소한의 조치였다. 또한 불필요한 희생을 줄이는 효과도 동시에 거두기 위함이었다.
적진 깊숙이 침투해 있던 수뇌들을 뒤로 물려 일정 방위를 담당시키니 자연히 전선이 형성됐고, 예하의 수하들도 자연히 그 뒤를 따르니 필요 없는 희생이 줄어든다.
수뇌들을 위시한 정예들이 최전선을 형성한 채 조직적으로 적을 압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로메로의 지휘 덕분에 혼전은 정돈된 전투로 돌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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