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81화 : 시험받는 자들, 헤르파와 마르시온
시험받는 자들, 헤르파와 마르시온
연합군에 닥친 위기는 해소하기 힘들 것 같았다. 최상의 원군이라 할 만한 판드아의 제왕이 가세했음에도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갔다.
케플러만 없었어도 상황은 정반대였을 터였다. 제왕은 케플러를 상대하느라 다른 곳에 신경을 쓸 수 없었고 자유롭게 된 카르마를 막을 자가 연합군측에는 없었다. 제석과 노군, 분트발이 동시에 상대를 했음에도 이기기는커녕 참담한 패배를 당하고 만다.
그들을 대신해 제왕들 네 명이 동시에 덤벼들었지만 그도 충분치가 않았다. 죽어 가는 자들의 수는 연합군측이 월등하게 많았다.
그걸 모를 리 없는 판드아의 제왕도 제 싸움이 급한데도 보다 못해 새로운 결단을 하기에 이른다. 케플러를 몰아붙여 연합군의 중심에서 멀어지게 한 후, 그는 연합군의 진영 위에 자리를 틀었다. 날뛰던 카르마를 먼저 외곽까지 퉁겨냈다.
그는 파천이 그랬던 것처럼 연합군 전부를 덮어씌울 만큼 큰 보호막을 만들어냈다. 그걸 본 케플러가 조롱했다.
“기껏 생각해낸 것이 보호막인가?”
카르마가 보호막을 해제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쉬잉 후우웅
효과는 있었다. 보호막이 깨지기는커녕 카르마의 힘을 그대로 안았다가 반탄해버렸다.
그제야 이채를 띠어가는 케플러. 공격을 해 보호막의 강도를 파악해본다. 헤르파가 멀리 물러나라고 고함을 질렀다.
헤르파의 예감대로 케플러의 첫 번째 공격은 그대로 반탄되어 동맹군의 진영을 휩쓸어버렸다.
보호막 안에 있던 자들은 왜 제왕이 진작 이 방법을 쓰지 않았는지 그 점이 오히려 의아할 정도였다. 파천이 쳐놓았던 보호막과는 달리 안에서 제왕이 공격해 오는 힘을 조절하면 적당히 쳐내고 있었기에 이런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동맹군 입장에서 보면 어이없는 사태였다. 조금만 더 몰아붙이면 승부의 윤곽이 확실해질 것 같건만 정작 눈앞에 두고서도 해볼 방법이 없다는 것이 속을 태웠다.
하지만 케플러는 아직도 여유 만만이었다. 그는 제왕이 펼친 보호막이 장애가 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을 갖고 있었다. 조금 전의 부딪침으로 갖게 된 자신감이었다.
“더 이상 방법이 없다는 걸 시인하는군. 정말로 바닥을 보인거라면 넌 내게 졌다. 이제 슬슬 끝을 내야할 때가 온 것 같아.”
이제 불안해지는 건 연합군측. 만약 지금의 보호막도 무너진다면 케플러의 말처럼 다른 방법이 없을지도 모른다. 끝까지 싸우다 비굴하지 않을 떳떳한 최후를 맞는 수밖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각오를 새롭게 했다. 케플러가 엉뚱한 짓을 하기 시작했다. 연합군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마계와 제왕의 군대에게 관심을 돌린다.
“이제 너희들도 결정할 때가 왔다.”
무엇을 말인가? 판드아의 제왕이 나타나자 모든 건 끝났다며 좌절감을 표했던 마르시온이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뜬금없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엉겁결에 이곳까지 따라온 건 마령의 본주 케플러가 기대 밖의 활약을 펼쳐줬기 때문이었다. 이길지 모른다는 생각. 하지만 그런 희망이 자력으로 생겨난 것이 아님을 망각하고 말았다. 케플러의 태도에서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건 마르시온만이 아니었다. 헤르파 역시도 케플러의 태도에서 미묘한 여운을 읽었던 것이다.
“이제 태도를 확실히 할 때다. 나냐, 메타트론이냐? 누구를 섬길 것인가?”
마르시온이 떨떠름한 표정을 했다.
헤르파는 긴장했다. 케플러는 자신들로서 상대할 수 없는 강자임이 확인되었다. 더군다나 카르마가 케플러 곁에 가서 호위하듯 서는 걸 보고는 둘이 뜻을 함께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웃음으로 무마할 문제가 아니다.
“지금 선택하라. 날 섬기겠다면 함께 할 것이지만 메타트론을 선택한다면 내 손으로 먼저 죽인다.”
기가 막힌 때에, 이보다 좋을 수 없는 상황에, 적절하게 던져진 강요된 선택이었다.
메타트론은 확인되지 않은 먼 곳에 있다. 하지만 마령의 본주는 바로 눈앞에서 주먹을 들이대고 당장 결정을 내리라고 한다. 동맹군측에 동요가 일었다.
쿠사누스들은 마르시온의 눈치를 살폈다. 사실 그들 입장에서 메타트론이나 케플러나 거기서 거기다. 다 똑같은 놈들이다. 상황을 봐서 기회가 된다면 모든 걸 가지려고 시도는 해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확인된 것만으로도 메타트론이나 케플러는 상대할 만한 자들이 아니다.
판드아의 제왕이 다시 나타난 것만으로도 겁에 질려 있었던 마르시온으로서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죽이겠다는데 어쩌겠는가! 일단은 살고 볼 일이었다.
문제는 헤르파였다.
마르시온이 먼저 대답했다.
“당신을…… 주인으로 섬기겠소.”
쿠사누스들은 그럼 그렇지, 라는 표정들이다 뭐 어쨌든 당장 죽지 않아도 되니 좋은 일이라고 반기는 듯했다.
“너는?”
케플러의 질문이 헤르파에게 던져졌다. 헤르파는 웃었다. 크게 소리 내 웃었다.
“우하하하하하…….”
라아그도 따라 웃었다. 하지만 라넷과 헤렘은 웃지 않는다. 그녀들은 웃을 수가 없었다. 케플러의 눈빛이 싸늘해지고 있음을 보았다. 그는 정말로 거역하는 자들을 모조리 죽일 것이 틀림없다.
“머가 그리 우습지?”
웃음을 멈춘 헤르파가 더 이상 진지할 수 없는 어조로 천천히 말했다.
“네 하는 짓을 보고 웃지 않을 재간이 없다. 너도 생각해보면 알 거야. 내가 왜 웃는지를 말야. 설마 모른다고 하진 않겠지?”
“모르겠는걸.”
“네가 진정 강자라면…… 모든 걸 초월한 절대강자라면, 지금 이런 순간에 그런 우스꽝스런 강요는 하지 않을 거야. 네 서두름은 이후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음을 스스로 밝힌 것이나 다름없어. 이길 자신이 없는 거지. 잠시 우쭐대긴 하겠지만 결국엔 아무것도 손에 넣지도 못한 채 비참하게 죽어갈 자를 섬기고 따르란 말인가?
난 그렇게 어리석지 않아. 아무것도 보장해줄 수 없는 네게 내 전부를 걸 수는 없어 모든 걸 가진 뒤에…… 그때 가서 선택하라고 한다면…… 한 번 쯤은 진지하게 고민해줄 수 있지. 하지만 지금은 아냐.”
“결국 날 인정하진 못하겠다?”
“당연한 것 아닌가? 주인이 출타한 틈을 타서 그 집 종들에게 주인이 바뀌었다고 말해봤자 소용없는 일이야. 마계는 힘 있는 자의 것이다. 너라고 해서 갖지 못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아직은 아냐. 지금 가지려 한다면 우리 중 단 하나도 거두지 못한다. 시체만을 가지게 되겠지. 그것을 원하나?“
보호막 안에서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연합군은 헤르파의 굽힘 없는 기개에 감탄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잽싸게 고개를 숙인 마르시온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설란은 헤르파와 헤렘에게 고정된 시선을 뗄 줄 모른다.
이제 선택은 헤르파에게서 케플러에게로 넘겨졌다. 만약 케플러가 헤르파의 제안에 동의한다면 마르시온만 꼴이 우습게 된다.
“네 말은…… 결정을 유보해 달라는 건가?”
“그렇다고 할 수 있지.”
“흐음.”
마르시온이 끼어들었다.
“수용한다면 형평성에 어긋나는 처사입니다.”
“네 말이 맞다. 영광을 함께 하려면 모든 것이 결정 나기 전에 해야 한다.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혜택만 누리겠다는 심보는 받아들일 수 없지.”
“그럼 더 이상 할 애기가 없겠군.”
“자발적인 복종이 아니면 죽음뿐이다. 난 지금 거래를 제안하는 게 아니다. 살고 싶으면 내 앞에 머리를 조아려라. 그것 이외에 다른 선택의 길은 없다.”
케플러는 궁금해졌다.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너희들의 사령관인 헤르파는 내 지배를 거부했다. 너희들도 같은 뜻인가? 메타트론을 위해 죽음을 당당하게 받아들일 만큼 그에 대한 충정이 갸륵한가?
그는 너희들을 버렸다. 당장 죽음의 손길이 닥쳤음에도 그는 너희들을 지켜줄 수 없다. 그런데도 그를 위해 충성하겠는가? 아직은 기회가 있다. 내게 충성할 자 없는가?”
카르마가 마계 전사들을 한쪽으로 구분해냈다. 그 하나의 움직임이 가져온 효과는 컸다. 일부 갈등하고 있던 아수라, 나찰들이 마계전사들을 따라 함께 이동했고, 헤르파의 뒤에 굳건히 버티고 있던 자들도 내심 갈등을 겪고 있었다.
“기회는 이번뿐이다. 어리석긴 하나 끝까지 의리를 지켜 마계의 일원으로 죽고자 한다면 그렇게 하라. 그것도 멋진 일이지. 하지만 살고자 하면 날 따라야 한다. 선택하라.”
마지막 선택의 기회는 던져졌다. 반수정도가 케플러를 따르겠다며 헤르파를 저버렸다.
헤르파가 외쳤다.
“난 너희들의 생존을 약속해줄 수 없다. 나와 끝까지 뜻을 함께 하겠다면 죽음 이외에 줄 것이 없다. 배신한다 해서 너희들을 원망하지도 비웃지도 않겠다. 결정을 내려라 나화 함께 죽음까지 함께 할 자들만 남아라.”
헤르파는 갈등하고 있는 자들을 붙잡지 않았다. 그는 내심으로는 차라리 마령의 본주에게로 들러붙어, 라고 바라기까지 했다.
‘이대로 죽기보다는 끝까지 살아남는 길을 택해라. 그래서 너희 눈으로 이 혼란의 결말을 지켜보라. 마계의 일원임이 자랑스럽지 않다면 그로 목숨을 잃는 다는 것이 무슨 보람이 되겠는가. 가라, 가거라. 날 떠나 마령의 본주를 택하라.’
하지만 그런 생각을 입 밖에 낼 수는 없었다. 그는 남은 인원을 대충 헤아려보았다. 셋 중 둘이 떠났다. 그런데도 의외로 많이 남았다고 생각했다.
루시퍼와 대마신들이 없는 마계란 이처럼 아무것도 아니다. 결집시킬 구심점이 사라졌으니 그들을 묶어둘 장치도 더불어 해제된 것이다. 메타트론이 마계를 헤르파에게 맡긴 순간부터 이런 일은 예견된 일인지도 몰랐다. 헤르파의 지도력이 부족한 건 아니다. 하지만 그에겐 메타트론이나 루시퍼와 같은 지배적인 장악력이 없었다.
케플러는 망설이지 않았다.
“모두 죽여라.”
잔인한 명령이었다. 자신이 나서서 해결하지 않고 방금 거둬들인 수하들의 손을 빌리고 있었다.
카르마가 마계 전사들을 이끌고 공격의 선봉에 섰고 마르시온이 그에 질세라 곧바로 가세했다.
남은 마계군은 좀 전까지 동료였던 자들에게 지리멸렬해 갔다. 헤르파와 라아그, 헤렘과 라넷이 진두지휘하는 마계군은 얼마 가지 않아 천여명도 남지 않게 되었다.
시체로 산을 쌓고 피가 강이 되어 흐른다. 비명과 함성은 점차 잦아들어 갔다. 헤르파도 부상을 면치 못했다. 대마신에 버금가는 실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카르마를 상대하긴 역부족이었다.
그때 돌연 헤렘이 케플러를 노리고 적진의 방어선을 뚫었다. 두 눈만을 제외하고 전신을 피 칠을 한 채 달려드는 헤렘을 케플러가 반겼다.
“날 죽이고 싶으냐?”
“약속을 지켜. 나와 했던 약속을 지키란 말야.”
살기등등한 헤렘의 공격은 케플러의 근처에 다다르지도 못하고 소멸됐다. 케플러가 웃었다.
“아…… 그 약속? 맞아 그랬었지. 그러고 보니 너와 한 약속을 지키지 못했구나. 그 약속은 아직 유효해. 지금이라도 원한다면 이행할 수 있지.”
헤렘의 공격이 멈췄다. 케플러가 전군에 명령을 하달했다.
“공격을 중단하라.”
마르시온의 군대와 마계군의 공격이 멈췄다. 그들에게 포위된 생존자들 중 멀쩡한 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당장이라도 곧 죽을 것 같은 치명적인 상태인 자들은 공격이 중단되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쓰러져버렸다.
카르마가 케플러에게 물었다.
“왜 멈추게 하는 거지? 이놈들을 살려둘 생각은 아니겠지?”
“기다려 봐라, 카르마. 네가 무얼 원하는지 안다. 내 뜻도 같다. 그 전에 한 가지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았다.”
“처리할 일?”
“헤르파와 라아그를 이리 데려 오라.”
카르마가 케플러가 지목한 둘을 바라보았다. 헤르파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날 죽이기 전엔 어림도 없다. 어서 끝을 보자. 우리 사이에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다.”
헤르파는 지쳐 있었다. 쉬고 싶었다. 죽음이 안식을 줄 수 있다면 그곳으로 어서 빨리 들어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카르마가 입을 열었다.
“서두를 것 없어. 너희들의 운명은 우리가 결정한다. 자, 가자. 케플러가 너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한다.”
케플러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둘러싸고 있던 마계 전사들이 길을 터주었다. 헤르파와 라아그가 그 길을 따라 걸었다.
그들이 빈터로 들어서자 뒤쪽의 무리는 다시 합쳐졌다. 케플러의 근처까지 다다른 순간 마계전사들의 공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헤르파가 뒤돌아서며 외쳤다.
“무슨 짓이야!”
적들에게 둘러싸여 무참하게 죽어가는 자들이 보였다. 헤르파가 그곳으로 날아가려 할 때였다. 어느새 다가온 케플러가 앞을 막아섰다.
“끝났어. 더 이상 미련을 떨지 마라.”
헤르파도 알고 있었다.
‘그래…… 끝났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고 만 거야.’
“헤렘, 이리 와라.”
케플러가 헤렘을 불렀다. 옆에 선 헤렘은 보지도 않은 채 케플러는 헤르파에게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자, 약속을 이행하겠다. 난 분명 헤르파를 한 번 위기에서 구해주겠다고 했었다. 맞나?”
“……!”
“내가 막지 않았다면 그는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었을 거야. 그러니 난 약속을 지킨 셈이다. 그렇지?”
“……”
“이제 우리 사이의 채무는 없다.”
헤렘은 그때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마지막 저항. 마계군 중 이제 살아남은 자는 단 하나, 라넷뿐이었다.
그녀는 마계전사들의 파상적인 공격을 겨우 감당해내며 힘겨워하고 있었다.
헤렘은 라넷과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그녀만의 착각이었다. 라넷의 앞을 한 명이 막아섰다. 카르마였다.
그의 손이 라넷의 팔과 다리를 몸통에서 분리해냈다. 마계전사들의 공격이 그 순간을 노리고 라넷의 몸에 집중됐다.
“라…… 넷.”
작은 소리였다. 헤렘의 입에서 흘러나온 그 작은 소리만으로도 헤르파는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직감했다.
그는 돌아서서 라넷의 최후를 확인하지 않았다. 케플러가 친절하게도 확인하고 싶지 않았던 사실을 알려주었다.
“끝났군. 이제 너희들뿐이다. 어쩔 거지? 너희들도 저들의 뒤를 따를 텐가?”
“죽…… 여라.”
라아그가 체념해 고개를 떨구었다. 저항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헤르파는 달랐다.
“그냥 죽을 순 없다. 싸우다 죽자, 라아그. 끝까지 최선을 다한다. 굴복할 순 없어.”
“흠, 역시나 그놈의 아들답군.”
케플러는 이때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헤르파와 헤렘, 라아그가 어떤 자들인가. 이대로 그냥 죽이기엔 너무 아까웠다.
‘파천이 살아 있는 한 이놈들은 이용가치가 있다. 살려두는 게 내겐 유리하지.’
“난 너희들을 죽일 생각이 없다.”
“고개를 숙일 것 같으냐! 천만에, 우리는 널 인정하지 않는다.”
“물론 잘 알고 있다. 그렇게 재확인시켜주지 않아도 돼. 보고 싶지 않은가? 이 전쟁의 결말이 어떻게 되는지 살려주지. 단 내 곁을 떠나지 마라. 너희들은 그저 내 곁에서 이 영계가 어떻게 내 손에 장악되어 가는지를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어때, 너희들로서도 손해날 제안은 아닌 것 같은데.”
헤르파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헤렘이 재빨리 허락했다.
“좋다. 네 제안에 응하겠어.”
“헤렘!”
헤르파의 분노를 헤렘은 읽었다. 하지만 그녀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더 이상 양보할 수 없는 막다른 길이었다.
“왜! 이대로 죽기엔 억울하지도 않아? 살아남아야 해. 어떤 수모를 당한다 해도 끝까지 살아남을 거야. 그래서 이놈의 마지막 순간을 꼭 지켜보고야 말겠어.”
케플러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살려주겠다고 제안한 쪽은 자신이다. 고분고분하길 바란 건 아니지만 저런 태도는 좀 곤란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번복하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이대로 넘길 케플러도 아니다.
“말을 함부로 하는군. 살려준다고 했지, 너희들을 귀빈으로 대접하겠다고 한 적은 없어.”
“악.”
헤렘의 머리채를 한 손에 틀어쥔 케플러가 헤르파를 노려보았다.
“그래, 바로 그 눈이야. 날 죽이고 싶다면 살려주겠다는 내 제안을 거절하면 안 되지.”
“헤렘을…… 그 더러운 손으로…… 헤렘을 잡지 마. 어서 놓지 못해!”
워낙에 가까운 거리였다. 어쩌면 헤르파의 공격이 케플러를 상하게 할지도 몰랐다. 허나 괜한 기대는 갖지 않는 것이 좋다.
스스스스
헤르파가 전력을 기울여도 케플러에겐 시원한 미풍에 불과했다. 어떤 방법으로도 그를 상하게 할 수 없었다. 이젠 헤르파까지 케플러의 손아귀 안에 사로잡혔다. 양손에 하나씩을 움켜쥔 상태로 케플러는 득의의 웃음을 흘렸다.
“흐흐, 너희들은 내 포로다. 얌전하게 굴지 않으면, 그럴 때마다 사지 중 하나를 자르겠다. 이렇게 말야.”
“아악!”
“커억.”
헤르파와 헤렘의 왼쪽 팔이 몸체에서 떨어져나가 땅바닥을 뒹군다. 흙을 뒤집어쓴 팔이 작게 쪼그라들더니 급기야 사라져 버려졌다.
케플러가 둘을 손에서 털어 내듯 집어던졌다. 라아그가 둘을 안아들지 않았다면 볼썽사납게 바닥을 굴렀을 것이다.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서도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헤르파와 헤렘에게 케플러가 다시 경고했다.
“명심해라. 내 곁에서 도망갈 생각도 하지 말고 대들지도 마라. 난 너희들을 죽일 생각이 없다. 날 자극시키면 너희들의 모습만 추해질 뿐이다. 얌전히 죽은 듯 있는 게 좋을 거야. 카르마!”
케플러가 카르마를 불러 보호막 앞으로 데려 갔다.
보호막 안을 들여다보며 케플러가 말했다.
“이번엔 이들 차례다.”
보호막 안에 있던 연합군도 지금까지의 일을 모두 지켜보았다. 그들 중 설란도 있었다. 그녀는 오열했다. 사랑하는 자식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건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스스로의 무능을 원망했다. 혹시라도 참지 못하고 뛰쳐나갈 게 걱정이 됐든지 그녀 주변엔 대덕을 비롯한 친분이 두터운 자들이 모여서 그녀를 위로했다.
카르마가 물었다.
“보호막을 부술 수 있나?”
“물론이지.”
“그럼 뭘 망설이지?”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무슨 뜻이냐?”
둘이 대화하는 소리는 보호막 안에까지 그대로 전달되었다.
“보호막은 제왕의 원령이다. 제거해봐야 곧 다시 생겨날 테니 소용없다.”
“그럼…… 어쩔 셈이지?”
“다른 방법이 있다. 내게 맡겨 둬. 내겐 비장의 수가 있지. 원령의 보호막도 거침없이 뚫을 수 있는 투명검이 있는 한 저들은 내 먹이일 뿐이다.”
투명검!
그랬다. 그에겐 투명검이 있었다. 그 무엇으로도 막아낼 수 없다는 투명검은 마령의 속성을 지니고 있어 더 위험했다.
케플러의 진단은 정확했다. 보호막을 제거하기 위해선 제왕과 힘겨루기를 해야 한다. 어찌해 그것을 제거했다고 해도 그 순간은 오래 가지 않을 게 분명했다.
케플러의 목적은 하룬의 연합군을 극복시키는 것. 말을 듣지 않으면 전멸시킬 작정이었다. 굳이 제왕과 겨루며 힘을 뺄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아직 확인된 바는 아니나 투명검은 원령의 보호막도 별 어려움 없이 침투해 들어갈 가능성이 컸다. 그것으로 제왕을 다치게 할 수는 없을진 모르나 다른 이들에게 미칠 효과는 틀릴 것이다. 케플러가 여유를 부릴 만도 했다.
마령으로 조정되는, 마령화된 투명검은 여느 강자들의 대결처럼 물리력이 충돌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공격 수단이다. 마음이 굳건하여 흔들림이 없는 부동심의 경지엔 소용이 없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엔 탁월한 효능을 기대할 수 있다.
어느 누가 제 마음을 굴복시켜 완전하게 다스린다 자신할 수 있을까? 물론 충격의 정도도 저마다 달라 그 즉시로 죽기도 하거니와 요행히 견디었다 해도 마령의 영향 아래 놓이거나 그도 아니면 일시 혼이 달아난 듯한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기도 한다.
케플러는 파천을 제외하고 투명검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자가 단 하나도 없을 것이라 여겼다.
그가 투명검을 쓰기로 작정하고 보호막 앞에 서자 방어에만 집중하고 있던 제왕도 긴장했다. 케플러가 입을 열어 그렇지 않아도 긴장하고 있던 자들을 바싹 조여 갔다.
“좀 전에 보았듯이 나는 용서를 모른다. 내 비정을 탓하기 전에 너희 어리석음을 원망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너희들에게도 동일하게 기회는 주어진다. 날 섬기면 위협은 없을 것이되 내 뜻에 반해 대적하고자 한다면 죽음을 맛보게 될 것이다. 판단할 시간이 필요하냐?”
로메로가 케플러를 호통쳤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우리들을 지배하겠다는 것인가? 좀더 강하다는 이유로, 죽음을 내릴 수 있다는 것으로 우리 마음을 굴복시킬 수 있으리라 여겼더냐!
네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우리들로부터 자발적인 복종을 얻어 낼 순 없다. 잠시 힘으로 억압할 수는 있을지언정 영원히 구속할 수는 없다. 제왕들의 지배도, 제석의 권위도, 루시퍼의 두려움도 우리를 속박할 수 없었다.
그 무엇도 자유롭기를 갈망하는 영혼을 가로막지 못한다. 마령화시켜 꼭두각시를 만들지 않는 한 우리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오길 기대하진 마라.“
케플러는 로메로를 잘 알고 있었다. 갑자기 그는 로메로를 시험해보고 싶어졌다.
말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다. 고통과 소멸의 두려움 앞에서조차 태연하긴 어려운 일이다. 로메로는 현재의 연합군에서 중심이라 할 만한 자. 그가 변심하면 그 파장은 대단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때 루딘족장으로 연합군에 참여하고 있던 미스바가 케플러를 비난하며 한편으로는 그를 돌이켜보려고 애썼다.
“당신이 아바돈의 배후라는 게 드러났을 때…… 나는 믿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마령의 본주라는 것이 온 세상에 드러났을 때까지도 부정하고 싶더군요.
그 오랜 시간 동안 당신은 나와 루딘족을 속여 왔습니다. 겉으로는 영계의 평화를 부르짖으면서 뒤에선 야욕을 키워 왔더군요. 어찌 그럴 수 있었나요? 무엇이 당신을 그렇게 변하도록 만들었나요. 무엇이 당신을 욕망의 노예로 삼아버렸나요.
지금도 사실은…… 한때의 실수를 후회하고 있다고…… 과거의 자신을 찾고 싶어 한다고 믿고 싶습니다. 루딘족의 족장이었던 때처럼 진심으로 존경을 받던 그 시절의 당신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고……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아직도 늦지 않았습니다. 이대로, 지금의 모습으로 우리들에게 기억되길 원하나요? 추악한 마령의 본주로 영원토록 기억되고 싶으세요? 그런 게 아니라면 돌이키세요. 더 큰 잘못을 저질러 돌이키고 싶어도 그럴 수 없을 지경까지 가지 말고.”
케플러는 미스바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했다. 아니 무시했다. 그에겐 일고의 가치도 없는 의미 없는 외침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루딘족 족장이란 칭호에서 과거를 떠올리긴 했다.
그러나 그에겐 기나긴 위선의 시간이었기에 고통의 기억일 수밖에 없었다. 예전 루딘족의 족장이었을 때 천상계의 대천주인 제석이나 무한계의 절대자들인 메테우스, 카란과 같은 이들은 감히 쳐다볼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영계는 결코 평등하지 않았다. 무한계는 결코 자유로운 곳이 아니었다. 서로가 서로를 지배하고 있었으며 그런 지배구조는 영원토록 극복될 수 없어 보였다. 그래서 그는 이탈을 꿈꿨다. 신이 외면해버린 세계의 신을 요청했으며, 자신이 신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
이제 힘도 얻었고 기회도 가졌다. 몇 걸음만 더 가면 자신은 신이 될 수 있다. 아무도 거스를 수 없는 절대의 권력을 자신의 힘으로 쟁취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어찌 그 걸음을 딛지 않겠는가.
지금의 위치까지 오르기 위해 애썼던 시간들을 무가치한 것으로 외면할 순 없었다.
“자, 선택하라. 머리를 조아리면 살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 영광과 참담한 죽음 중 하나를 선택하라. 너희를 이 위기에서 구해줄 구원자는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없다.
제왕도 내 손에서 너희를 지킬 수 없다. 신은 너희를 버렸다. 천궁도 너희를 외면했다. 이제 누가 있어 날 막을 것인가! 너희 운명은 이렇게 되도록 정해져 있었다.
그러니 거부할 생각 말고 받아들여라. 나를 거부할 이유가 없다. 난 너희들을 종처럼 부릴 생각이 없다. 지금보다 더 많은 자유를 허락하겠다. 마령의 힘은 너희를 지금보다 더 강하게 할 것이며 내 중재와 조정이 있는 한 서로 분쟁하는 일도 사라질 것이다.
메타트론은 타락한 천사, 그가 너희를 다스려 주길 바라나? 마계를 보라 그들에게 제시했던 그 많은 약속들 중 지켜진 것이 있었던가? 그들은 우리와 다르다. 그들은 우리를 섬기는 위치에 있던, 우리보다 열등한 존재들이었다. 그런 자들의 왕을 섬길 수는 없지 않겠는가.
날 보라 나는 너희들과 같다. 나는 너희들 중의 하나다. 나는 부조리를 없앨 것이다. 나는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만들겠다. 나는 너희들을 괴롭히는 모든 종류의 고통을 제거하겠다.
더 이상 죽지 않아도 되며 기억이 소멸 당하는 일도 없을 것이며 거듭나지 않아도 좋다. 진정한 의미의 완전한 자유를 허락하겠다.
너희 섬김으로 신은 더 이상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 그는 우리의 기억이 다하는 순간 우리와 상관없는 존재가 된다. 그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내가 너희들을 통치하겠다. 절대적인 힘으로 너희들 중에 불만이 없도록 하겠다.
너희들을 지금껏 지배했던 자들의 말을 믿지 마라. 그들은 너희를 선동하는 자들이며, 너희를 속이는 자들이다. 너희를 앞세워 제 욕심을 채우려는 자들이다. 그들은 거짓을 일삼던 입으로 신을 빙자해 너희를 억압하고 있다.
멸망의 길인 줄 알면서 함께 갈 것이냐. 죽음이 입을 벌리고 있음을 알면서도 걸어갈 것인가, 선택하라. 나는 너희를 해방시키려고 왔노라.”
케플러는 연합군을 회유하려 했다. 하지만 먹혀들 리가 없다. 아무리 그럴 듯한 꾸며도 웬만해야 믿는 척이라도 할 텐데 지금껏 해온 짓거리가 있는데 될 리가 없었다.
아바돈이라면 치를 떨며 고개를 젓던 사람들이, 제왕들을 배신한 쿠사누스들을 데리고, 죽음을 두려워 마계를 배신한 무리를 이끌고서, 방금 전까지 살육의 잔치를 명했던 그 입으로 아무리 그럴 듯한 말로 지어서 떠들어본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보내줄 건 차가운 경멸의 시선뿐이었다.
케플러가 결정을 내리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를 죽일 생각은 아니었다. 물론 영계에 퍼져 있는 자들은 여기 모인 수보다 많다. 반대하는 자를 모조리 죽인다 해도 자신을 섬길 자들은 얼마든지 있다.
정 안 되면 죽여놓고 살려도 된다. 케플러에게는 제왕의 구슬이 있다. 그것이면 죽은 자를 살려 따르게 하는 건 일도 아니다. 하지만 케플러의 생각은 다르다.
‘중심이 되는 자들을 우선 제거한 뒤 시간을 두고 회유하면 결국엔 날 인정할 수밖에 없다. 지금은 두려움을 줄 때다 감히 거역할 생각을 할 수 없도록 차원이 다른 능력을 겪게 되면 마음은 저절로 굴복하게 되는 법.’
케플러는 보호막을 펼치고 있는 제왕을 주시했다. 변수. 제왕도 나름의 변수였다. 이런 변수가 또 뭐가 있을지를 생각해봤다.
‘천궁은 일단 제외시킨다. 비밀차원에 든 자들도 제외시킨다. 그들은 후에 염려해도 된다. 그렇다면 단 하나가 남는다. 옛용! 그가 제왕을 여기 보냈을 것이다.
그는 지금 이곳을 살피고 있겠지. 그는 지금껏 메타트론이나 루시퍼, 또는 나와 제왕들의 행사에 간접적으로만 간섭을 해왔다. 단 한 번도 직접 개입하고 나선 적이 없다. 그래서 그의 능력은 미지수다. 유일한 변수, 그의 개입만 없다면 모든 건 내 뜻대로 된다.’
케플러는 이제 마음을 굳혔다.
투명검으로 제압할 자를 가려냈다. 그의 첫 번째 대상들은 로메로와 제석과 노군을 비롯한 연합군의 지도부였다. 그들을 먼저 굴복시키기로 했다.
“모두 나를 보라. 마령이 너희를 새롭게 하리라. 거부하지 마라. 모든 것이 마음먹은 대로 되리니……”
케플러는 마령을 끌어들였다. 흩어져 있던 힘들을 하나로 모았고 극대화시켰다.
마령이 독립된 인격체가 되면 그것이 곧 카오스다. 마령은 그 이전의 불안정한 상태의 힘이라 할 수 있었다.
공간이 비틀리거나 이탈될 때 그 안에 내재된 성질이 다른 안정된 곳으로 합류하지 못한 채 떠돌게 되는데 그것을 케플러처럼 자신에게로 끌어들여 일체화시키면 근원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마령이 일시적으로 착각을 일으켜 숙주의 의지를 받아들이게 된다.
사용할 수 있는 마령의 양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그 힘은 여타의 프리즈마 유동과는 궤를 달리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마령은 다른 안정화된 체계에 영향을 끼쳐 의지를 혼동케 한다. 결국 물리력의 충돌에 있어서도 마령은 프리즈마보다 우위일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의지에 결함이 있을 때 마령은 더 큰 효과가 있다. 마음을 파고드는 마령이 극대화되기 시작하자 주변은 금세 두려움에 잠겨버렸다.
자신들을 주목한 것도 아니건만 뒤에 있던 마르시온 등도 얼굴색이 변했다. 마령의 현상은 단순했지만 그 위력만은 절대 간단치가 않았다. 케플러의 전신을 감고 있는 마령은 분명한 형상을 취하고 있었다.
검고 칙칙한 기류는 뱀처럼 꾸불꾸불한 몸에 거대한 세 개의 뿔을 지니고 있었다. 똬리를 틀고 고개를 쳐드는데 그 길이가 무려 백여 장이 넘을 듯싶었다.
케플러가 보는 곳을 마령도 같이 본다. 그가 고개를 돌리면 마령도 함께 움직였다. 케플러의 앞에 제 몸보다 수배나 됨직한 거대한 검이 생겨나 둥둥 떠 있었다. 투명검을 시전하려 하고 있었다. 상여락이 펼친 것과는 전혀 다른, 제대로 된 투명검이었다.
검은 천천히 보호막을 향해 다가갔다. 제왕도 긴장했던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이걸 보고도 마음이 달라지지 않을 자 있겠는가!”
케플러가 두 주먹을 힘껏 쥐며 상체를 앞으로 살짝 숙이는 모양을 취했다. 그러자 마령이 검을 향해 스며들었고 검의 모양은 서서히 또렷했던 형상을 지워 갔다.
“카악.”
분명하게 들을 수 있는 마령의 괴성이 먼저 들렸다. 검이 쪼개졌다. 쪼개지며 앞으로 쏘아지는데 검신을 마령이 둘둘 감고 있었다. 나중엔 십여 개로 분리된 검의 희미했던 형상마저 사라져 버렸다.
보호막은 여지없이 뚫렸다. 제왕은 투명검이 발출된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것이 사라진 지금 종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분명 방향을 보건대 자신을 향해 오진 않았다. 그럼 도대체 누굴 목표로 했단 말인가?
“으으으.”
“끄억.”
“허억.”
여기저기서 쥐어짜는 비명소리가 소리가 동시에 터졌다. 보호막 밖이 아닌 안에서 나온 소리에 제왕이 급하게 고개를 돌려 살폈다. 로메로가 먼저 보였다.
그의 동공은 활짝 열렸고 초점은 흐려져 있었다. 그런 반응을 나타낸 건 정확하게 열 명이었다.
지도부를 형성하고 있던 자들이 한꺼번에 발작을 하며 부들부들 떨고 있자 연합군에 소란이 일었다. 그들이 투명검에 적중 당한 건 틀림없어 보였다. 어떤 결과가 생길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외상은 보이지 않는다. 대덕이 로메로에게 다가가며 소리쳤다.
“정신차려요, 이겨야 합니다. 지면 마령에 의해…….”
그녀는 보았다. 로메로의 동공 속에 뚜렷하게 나타나는 형상을! 그것은 케플러의 전신을 휘감고 있는 마령의 그것과 한 치도 틀림이 없이 똑같았다. 대덕이 로메로를 흔들었다.
“으악.”
비명을 지르며 대덕이 뒤로 벌렁 넘어졌다.
지혜전사단의 부단주인 홀딘이 모두에게 경고를 했다.
“모두 물러서요. 경계만 하고 건들면 절대 안 됩니다.”
“으하하하하. 그들은 마려의 지배를 받기 시작했다. 그들은 서서히 마령화되어 갈 것이고 내 의지에 반하는 행동을 할 수 없다. 그래도 영계의 최고지도자들이기에 어느 정도는 견뎌줄 줄 알았건만 이제 보니 똑같은 수준들이었군.
마령의 의지를 거부할 정도도 안 되는 것들이 지금껏 잘난 척을 해왔었단 말인가!”
케플러의 조롱에 아무도 반박하지 못했다. 모두는 충격에 휩싸여 있었다. 로메로, 제석, 노군, 분트발, 불칸….. 이들이 어떤 자 들인가! 천상계와 선계와 무한계를 총망라한 연합군에서도 최고 수뇌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한꺼번에 마령에 씌워버린 것이다. 한 번 경험이 있었던 칠대부족장들은 탄식하며 말했다.
“저들도 마령을 거부하지 못했다.”
“이 일을 어쩐단 말인가?”
“저자를 당해낼 재간이 없구나.”
“마령은 사람의 의지로 이겨낼 수 있는 게 아니다.”
뒤로 넘어졌던 대덕을 설란이 부축해 일으켰다. 대덕은 말했다.
“모두 뒤로 물러나세요. 이들이 어떤 짓을 저지를지 모릅니다.”
수뇌들의 곁에서 떨어지는 자들의 심정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그걸 본 제왕 역시나 충격에 빠져들었다. 마령의 위력이란 게, 투명검이라는 게 이 정도였던가 싶었다.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케플러가 작정한 이상 이 정도로 넘어가진 않을 것이다. 막을 방법이 없었다. 아무도 해결책을 생각해내지 못했다. 그냥 처분만 기다리고 있는 비참한 처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