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82화 : 케플러의 변수, 옛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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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검 – 182화 : 케플러의 변수, 옛용


케플러의 변수, 옛용

아퀴나스의 부름에 호응한 비밀차원의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들고 있었다. 그들의 수는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았다. 아퀴나스는 상처받고 지친 자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먼저 앞섰다.
그들은 침입자에 의해 자신들의 세계가 유린되었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있었다. 그 분노는 잠재우기 힘들 정도로 큰 것이었다. 하지만 아퀴나스에 의해 그것이 오해였다는 것이 곧 밝혀진다. 아퀴나스는 선언했다.
“우리 세계에 혼란을 가져 온 것은 카오스다. 날뛰는 카오스를 잠재우는 것이 먼저이고, 그 다음은 우리 중 하나이나 잠시의 조급함을 이기지 못하고 그 혼란에 장단 맞춰 춤을 춘 자들을 징치하는 것이다.
분별없는 서두름이 더 큰 혼란을 가져 오게 했다. 이대로 용납함은 더 큰 화를 불러오니 그들이 돌이켜 긍지를 깨닫고 우리와 함께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자 하면 같이 하되 그렇지 않으면 거리낌 없이 버릴 것이다.
이대로 둔다면 우리 세계는 사라지고 만다. 어찌 하겠는가, 나와 함께 하겠느냐?”
그들의 힘이 무슨 큰 도움이 될까만 일단은 의견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 첫째이고, 그 지지를 바탕으로 동류들을 돌이키려는 것이 두 번째이며, 그도 아니면 최소 모아놓고 카오스의 공격을 방어하고자 함이었다. 흩어지면 카오스의 먹이뿐이 더 되겠는가.
그리고 우라노스들은 여럿이 모이면 제법 큰 힘이 되니 그로서도 반길 만한 동조세력이었다. 이곳으로 오며 보고 겪었던 일이 참고가 되어 동류들에게 전해지니 비밀차원의 나머지 지도자들이 적을 잡는 데 신경이 팔려 자신들을 돌볼 기색도 보이지 않더란 얘기가 오간다.
그것이 우라노스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결정적으로 아퀴나스를 중심으로 뭉치게 했다. 위기를 해소하는데 구심점이 있어야 함은 당연하겠고 마땅한 적임자야 아퀴나스가 제일이다. 결국은 그런 모양으로 하나가 되기에 이른다.
카오스는 보이는 족족 흔들어놓고, 함정에 빠트려 위협하고, 포박하고, 쫓기를 반복하며 결국엔 모두 죽였다. 카오스의 함정은 교묘하기 그지없어 설사 통제함을 알고 있다 해도 우라노스가 아닌 비밀차원의 다른 계급의 사람들이 견뎌 내기엔 역불급이었다.
아퀴나스의 재빠른 조치로 인해 카오스는 원하는 걸 모두 달성해내진 못했다. 그럼에도 어느 정도는 흡족해했다.
‘이제는 메타트론에게 달렸다. 달리 그 일을 해줄 이가 없으니 그를 조급하게 만들자. 반쯤은 그런 염두를 굴리고 잇을 터이니 내 계획이 어렵진 않겠다.’
카오스는 메타트론을 집중해 살폈고 그와 상대하는 자들의 처지도 더불어 보았다.

루시퍼와 아사셀이 한 자리에서 딱 마주쳤다. 아사셀을 피해 도망가던 캄파넬라가 한참 격전 중이던 바르트와 루시퍼의 사이에 뛰어든 것이다. 마침 떨어지던 중이라 그의 등장은 교묘하게 판을 갈라버린 형국이 되었다.
루시퍼는 대마신들과 함께 있던 캄파넬라가 장중에 모습을 드러내자 모두가 그 손에 작살이 났다는 걸 짐작했다.
이제 둘을 상대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게 께름칙했다. 하나는 해볼 만했지만 둘은 무리였고 욕심이었다. 그가 얼굴을 굳히고서도 쉽게 수작을 부리지 못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그런데 정작 캄파넬라는 루시퍼 쪽은 보지도 않고 뒤를 가리키며 난감한 기색을 했다. 그가 하는 말을 듣다보니 루시퍼도 얼른 믿음이 가지 않는 내용이었다.
“대마신 중에 마지막 남은 놈이 기이하기 그지없다. 술법을 하는 놈이 그놈에게 무슨 짓을 해놨는지 도무지 상대할 방법이 없어.”
바르트는 하도 다급하게 쏟아놓는 말인지라 얼른 이해하지 못했던지 되물었다.
“무슨 소리인가?”
“부끄럽지만 아사셀이란 놈을 혼자서 당해낼 재간이 없어서 이리 도망 왔다.”
“지금 도망을 왔다고…… 했는가?”
“그렇네.”
루시퍼가 짚이는 게 있었던지 얼굴색이 썩 밝아졌다.
‘술법이라 했으니 분명 메피스토를 이르는 말이다. 아사셀이 아무리 재주를 부린다 해도 이자를 패주케 하긴 어렵다. 그렇다면 메피스토가 술법으로 아사셀에게 농간을 부렸음이 틀림없다.’
라곤의 왕이라 불렸던 메피스토의 술법은 그의 주인이었던 루시퍼조차도 다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이 어떤 수법이든 관계없었다. 캄파넬라를 곤란하게 할 정도로 아사셀이 강해졌다는 사실만이 반가울 뿐이었다.
아사셀이 등장하자 의문은 풀렸다. 드러난 모양새가 벌써 기괴하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주변에 거느리듯 끌고 온 것들이 또한 범상치 않다. 루시퍼가 아사셀의 투명한 눈을 바라보며 반겼다.
“아사셀, 죽지 않았구나.”
아사셀이 루시퍼를 바라보지만 거기엔 다른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루시퍼는 뭔가 이상하단 생각을 했다.
‘나를 몰라본단 말인가?’
“아사셀.”
다시 불렀다. 막 캄파넬라에게 공격하려던 아사셀이 흠칫했다. 이번엔 좀더 오랫동안 루시퍼를 응시했다.
“나를 못 알아보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요.”
루시퍼는 아사셀이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건 신경 쓰지 않는다. 자신을 알아본다는 사실에 우선 만족했다. 아사셀이 다시 말했다.
“놈들을…… 먼저 죽이고 나서…….”
그에겐 그 일이 무엇보다 우선이었다. 당해보지 않은 바르트는 아사셀이 자신들을 죽이는 일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그도 역시 제 몸으로 겪어보지 않는 일은 도통 믿으려 하지 않는 부류였다.
“네 놈이 기괴한 꼴을 한 것을 보아하니 술법을 사용하는 가 본데…… 그것으로 날 어찌해볼 요량이면 한참이면 잘못 짚었다.”
아사셀은 쓰다 달다 대꾸도 없이 무작정 달려들고 본다. 의문도 없다. 두려움도 없다. 상대를 살피거나 연막을 펼쳐 상대의 수를 읽어볼 기색도 없다.
바르트의 매운 손길이 아사셀을 휘감아 올렸다. 여기저기서 출몰하기 시작한 정령의 몸짓엔 마음도 쓰지 않는다. 그 역시나 대범한 공격 일색이었다.
근데 뭔가 이상했다. 술법을 쓰는 자치곤 공격이 너무 단순했고 술법이라 할 만한 것도 주변을 휘둘고 다니는 정령이 전부였다. 그것들도 관여할 일이 아니라는 듯 멀찍이 떨어져 빙글빙글 돌고만 있다.
치고 때리고 비틀고 던지길 수차례. 타격이 제대로 들어갔는지 살이 발라지고 뼈가 뒤틀린 게 보였다. 피가 튀어 옷섶을 적셨으니 그만하면 내부야 엉망이 아니겠는가.
끝낼 작정하고 사방에서 압력을 몰아 찍듯 눌러버렸다. 그것만으로도 안심이 안 돼 모공을 파고들 정도로 미세한 기류를 흘러 내부로 통하게 했다. 안에서 터진 공격은 반드시 걸레짝으로 만들어놓을 것이 틀림없다.
캄파넬라는 여기까지 자신이 겪었던 그대로라고 생각했다.
“별 것도 아닌 것이 기세만 흉험했군.”
어쩌면 자신이 했던 말을 그대로 뱉어낼까. 슬쩍 돌아서며 캄파넬라를 향하는 바르트의 얼굴엔 한심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캄파넬라는 그런 바르트의 기색을 살필 겨를이 없었다.
“조심하는 것이 좋을걸. 놈이 아직 멀쩡하거늘 한눈팔다 무슨 봉변을 당하려고…….”
바르트가 설마 하고 돌아보다 못 볼 걸 봤는지 아연실색했다. 그러기도 할 것이 아사셀이 멀쩡한 신색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데 전신을 태우듯 타오르고 있는 빛이 선연한 핏빛이다.
‘이놈 보게’
그제야 캄파넬라가 기겁하며 도망을 온 이유가 납득이 갔다. 조금 전 공격이 비록 전력을 쏟아 부은 것은 아니라지만 공격을 모조리 허용하고도 멀쩡하다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아사셀을 경시하던 생각을 떨쳐버리고 제대로 상대하고자 마음먹었다. 하지만 뒤에 선 캄파넬라는 바르트도 제 꼴이 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으니.

마령을 근원으로 삼은 투명검이 이제는 판드아의 제왕을 목표로 했다. 하나로 집중시킨 힘이라 여간한 게 아니었다. 얼마나 큰 힘을 내었는지 마령의 울부짖음이 좀 전과의 차이가 많이 났다.
듣기만 해도 소름이 돋고 으스스해질 것 같은데다가 형체를 숨기고 달려드는 투명검이 어디까지 미쳤는지, 그 공격의 결이 어떠한지조차 가늠하지 못하니 막는 것도 난감했다.
방어막을 견고하게 치고 원령을 극한으로 모아서 대충 어림짐작으로 내치는 수밖에 없었다.
두 힘 간의 충돌은 없었다. 투명검은 이번에도 부딪침 없이 스며들었고 그 힘은 저항 없이 제왕의 미간을 꿰뚫고 말았다. 이마의 중심이 화끈한 기분이 들더니 전신에 맥이 풀리고 사방 분간이 가지 않으며 정신이 혼미해져 갔다.
그러자 보호막도 일시에 제거되고 말았다. 상황이 그에 이르자 연합군은 우왕좌왕하기에 이른다. 중심을 잡아줘야 할 수뇌들이 정신을 놓고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마령과의 싸움에 혼신의 기력을 다하고 있는 와중에 제왕마저 일시에 보호막을 풀어버리자 마령의 울부짖음에 마음이 쫓겨 그렇게 된 것이다.
케플러는 모든 정황이 의도한 대로 되어 가자 더할 수 없이 마음이 흡족했다.
“아직도 마음을 바꿀 생각들이 없더냐?”
또다시 물어본다. 마령을 일으켜서인지 음색마저 음산하다.
“닥쳐라.”
“저 악마를 죽이자.”
“저놈을 죽여야 우리가 산다.”
그나마 아직은 정신을 차리고 있던 몇이 그렇게 외치자 용기 있는 자들이 먼저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들은 채 다다르지도 못하고 바닥으로 속절없이 떨어져 내렸다. 케플러가 제한적으로 움직이던 마령을 일시에 풀어버렸기 때문이다.
전면을 통째로 세운 마령이 공간을 직단하며 활보했다.
“크악.”
“으으으, 오지 마, 오지…….”
팔을 휘두르는 자, 무기를 빼들고 휘젓는 자, 몸을 빼내 멀리 달아나 보려고 발버둥치는 자들…… 연합군에 한바탕 난리가 났다. 야단법석을 떠는 자들 틈에서 그나마 몸을 낮추고 케플러에게로 돌진해 오는 자들도 있었지만 마령의 움직임은 그들의 전진을 더 이상 허락하지 않았다.
견디지 못하고 머리를 짚으며 쓰러지는 자들이 속출했다. 이쯤되면 승부는 결정 난 것이나 다름없다. 연합군의 생존은 이제 케플러의 마음에 달린 것이다.
마르시온은 마령이 상대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괴물처럼 여겨졌다. 설마하니 판드아의 제왕마저 속수모책으로 당할 줄은 진정 예상 밖이었다.
‘내가 정말 결정을 잘했구나. 괜히 오기를 부려 대항했다면 나도 저 꼴이 났을 것 아닌가.’
생각만 해도 눈앞이 아찔했다.

수호자가 영계에 닥칠 혼란을 준비하는 과정에 만난 자들을 사람들은 일곱별이라 불렀다. 그것은 수호자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한 은밀한 암시가 저절로 싹이 터 생겨난 것이었다.
수호자가 했던 말처럼 그들이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칠지는 그들 스스로의 결정일 뿐 사실 특별한 안배가 되어 있던 것이라 보기엔 어려웠다. 여기 수호자가 만난 일곱별 중 또 하나의 존재가 있었다.
옛용!
그가 갈등하는 일은 드물다.
그는 지금껏 사람들에게 이런 저런 모양으로 도움을 줘 왔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직접 나서서 그들을 좌우할 만한 영향을 끼친 적은 없었다.
자신으로 인해 메타트론과 사람들의 타락이 시작되었다는 자책감을 씻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는 스스로 형벌을 주며 그 집착에서 벗어나 보려고 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더 깊은 늪 속으로 빠져 들어감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는 한시도 영계에서 눈을 떼놓은 적이 없다. 그래서 영계 소식엔 그보다 빠른 이도 드물었다. 지금도 그는 연합군이 마령의 본주에게 형편없이 무너지고 있는 현장을 살피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조급해졌다.
‘판드아의 제왕이 마령의 본주를 제압하리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메덴까지 이끄는 데엔 무리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 예측이 빗나간 것이다. 이제 연합군을 돕기 위해 보낼 자도, 도움을 청할 곳도 없었다. 그들의 일이니 나 몰라라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옛용은 그럴 수 없는 자였다.
‘어찌해야 하나. 파천, 널 믿었는데…… 네 힘으로도 비밀차원은 벅찬 곳이었던가?’
옛용은 비밀차원에 카오스란 변수가 생겨나 모든 게 엉망이 되었다는 걸 모른다.
‘이젠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이대로 두면…… 영계의 맥은 끊어지고 만다. 자력으로 회복할 길이 없어진다. 그렇다고……’
자신이 개입하는 수밖에 없다. 지금 도움을 줄 수 있는 자는 자신 하나뿐이었다.
‘이대로 모른 척하면 파천에 의해 영계는 공멸을 맞을지도 모른다. 더 이상 지킬 것이 없어진 파천은 이 세계의 멸망을 원하게 될지도 모른다.’
옛용이 앞질러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좋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옛용의 개입.
그것은 케플러를 당황하게 만드는 일대 사건이었다.
케플러 또한 유일한 변수로 지목했었던 옛용이었다. 하지만 설마하니 정말로 개입할 줄은 그도 몰랐다. 대담하게도 케플러는 옛용마저 안중에 두지 않는 오만한 말을 했다.
“그래 언젠가는 너도 정리해야 할 존재이긴 하지. 그 시기가 좀 더 빨리 온 것뿐이야.”
옛용의 방법은 기상천외했다. 연합군을 모조리 메덴으로 공간이동 시켜버린 것이다. 그의 특별한 능력이 발휘된 것이다.
케플러는 허탈한 심정을 추스르며 옛용과의 대결을 기대하며 군대를 메덴으로 이끌었다.

“드디어 때가 되었다.”
파천이 몸을 떨치고 일어섰다. 카오스의 관심이 머문 곳은 메타트론이었다. 하지만 파천은 메타트론이 아닌 아퀴나스를 향해 움직였다.
그의 행보는 의외였으며 무척이나 더뎠다. 좀더 적극적으로 카오스를 제한하고 비밀차원의 피해를 줄일 수도 있었지만 그러질 않았다. 왜 그래야만 했던 걸까? 꼭 그래야만 햇던 이유가 무엇인지는 파천만이 알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 어떤 계획이 도사리고 있는지는 다른 이들이 짐작할 수 없었다. 그 계획의 최후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도 그만이 알고 있었다.
비밀차원의 사람들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다. 아퀴나스는 무리를 헤아려보았다. 턱없이 부족한 수였다. 오지 않은 자들, 올 수 없었던 자들은 카오스의 먹이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아퀴나스는 굳이 그들 하나하나를 떠올려 애도하지 않는다. 비밀차원의 사람들은 다시 채워질 것이다. 터전을 지키는 게 중요했다. 이들에게 소멸은 한 번의 좌절일 뿐이다. 잊어버리면 그만인 아쉬운 기억일 뿐이다.
아퀴나스의 관심은 혼란을 잠재우는 것에만 집중돼 있었다. 카오스를 이대로 두면 언제까지 그가 주는 혼란을 감당해야 한다. 늘 긴장한 채로 카오스의 위협이 있지 않을까를 심려하다가 그 쫓김에 다툼이 더해져 서로 미워하고 증오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도록 방치할 수는 없었다. 정리해야 한다.
아퀴나스는 파천을 기다렸다. 그가 오기로 돼 있었다. 그와의 밀약은 이 순간을 대비한 것이다.
‘나는 그에게 늘 빚만 지는구나. 하지만 거절할 수 없었다.’
자신의 방법대로라면 카오스를 견제할 수단을 내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근본적인 방책은 될 수 없었다. 카오스를 제거할 방법을 갖고 있지 못했다.
달리 마땅한 대책이 없어 전전긍긍하는 자신과는 달리 키케로는 자신 있게 방법을 이러 가르쳤으니 그 모습을 대하고 어찌 마음이 동하지 않으리요.
하지만 그와 자신은 좁힐 수 없는 입장 차가 분명했고 지키고자 하는 것도 달랐다. 그 차이를 무시하고 잠시 편승한다 해서 목적지까지 일치되길 바라는 건 어리석다. 그래서 아퀴나스는 일면으로는 키케로의 도움을 받기로 했고, 일면으로는 경계하는 마음을 늦추지 않는다.
키케로의 비밀차원의 운명을 맡기겠노라 하면 동류들 중 어느 누가 잘했다고 하겠는가. 동의를 구하기보단 숨겨두고 암암리에 행사를 진행시키고자 마음먹었다.
키케로는 카오스의 현 상태가 자신들에게 미치지 못할 터이나 그렇다고 해서 제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그가 더욱 요란을 떨며 기승 하는 때를 보자고 했다. 그러자면 참고 기다려야 하는데, 그러다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잃게 될까봐 크게 염려가 되었다.
그 마음의 흔들림을 눈치 챈 키케로가 하는 말이 ‘너희가 소멸을 당한다 한들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가는 것도 아니니 염려할 게 무언가. 네 터를 지킴이 그래도 낫지 않겠는가’한다. 곰곰이 짚어보니 그 말이 틀리지도 않았다.

파천이 선발대를 끌고 아퀴나스에게로 왔다. 우라노스들이 동요했다. 그들의 눈에 선발대는 침략자일 뿐이었다.
그런 그들을 선선히 반기는 아퀴나스가 이해되지 않으면서도 섣불리 물어보지도 못한다. 그를 향한 신뢰는 여전하건만 의심이 고개를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퀴나스가 그들을 이해시키기엔 곤혹스러운 점이 많았다. 의문을 지니고 있음을 알면서도 모른 척할 밖에 없었다. 단지 둘의 대화를 통해 우라노스들은 단편적으로나마 카오스를 방비하기위해 일시 힘을 합했음을 짐작할 뿐이었다.
아퀴나스가 다시 키케로의 의중을 캐물었다.
“이제 어찌할 텐가. 지금까지는 네 말처럼 되었다. 기다리기만 하면 되나?”
“그가 우리에게로 오면 몰아붙여 더 조급하게 만들고 그들에게로 가면 지켜보면 된다.”
“정말로 네 장담이 실현 가능한 일인가?”
“물론이다. 날 믿어도 좋다.”
“하긴 너 또한 동료들을 데려 왔으니 믿지 않을 수도 없구나. 아무쪼록 실수가 없기를 바란다.”
“그래 너는 먼저 저들이 놀라는 일이 없도록 안정시켜두어라. 나도 이제 슬슬 준비를 서둘러야겠으니.”
아퀴나스가 뜻을 바꿔 의문을 표하는 무리들을 진정시키고자 설명을 이어가는 동안 파천은 그들 모두를 포함한 공간을 정체에서 구별시켰다.
아퀴나스의 목소리가 크고 힘찼다.
“그 동안 우리는 우리 이외의 존재를 한사코 부정해 왔다. 그것을 선동한 몇몇의 의지가 그대들의 결의를 강요한 꼴이었다. 회귀할 곳도 없었고 돌이킬 방법도 없었으며 그럴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지금까지는 굳이 그들을 우리 중에 편입시킬 일도, 우리가 그들에게로 나갈 일도 없었기에 관계 짓지 않아도 되었다. 또한 우리를 지탱시켜 왔던 자존심이 그 일을 허락지 않았다.
하지만 다시 말하거니와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그들이 우리에게로 왔으며 관계를 맺게 되었다. 카오스의 의지가 우리 세계를 바른 질서 가운데서 일탈시키고 보다 적극적으로 혼란을 조장하고 있다. 이대로 두면 우리세계는 그의 의지에 잠식당해 더 이상 평안은 없을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극단적인 방법을 써서라도 더 이상의 준동함을 용납하지 않기로 작정하였다. 이제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적극적으로 침입자들과 싸워 몰아낼 것인가, 아니면 그들과 화합하는 길을 택할 것인가.
아직은 그 무엇도 정해진 바가 없다. 내 선택은 이렇다 공동의 적인 카오스를 물리칠 때까진 그들과 우리는 일시적으로 힘을 합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본다. 그 뒤의 일은 후에 결정해도 늦지 않다. 왜 내가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제부터 설명하겠다.
이들이 우리에게로 온 이유에 대해 나름의 짐작들을 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이들이 우리 세계를 멸하고자 온 줄 알았다. 지금도 경계함을 버리진 않았다. 하지만 이들은 그것이 목적이 아니라고 말한다. 여기 영계에서 사람들을 이끌고 우리에게로 온 이가 바로…… 키케로다.”
몰랐던 자들은 아퀴나스의 입에서 키케로라는 이름이 나오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는 한때 우리들 중 의지할 만한 자였으며 지금은 영계의 지도자로 우리를 찾아왔다. 솔직하게 말하겠다.
나를 비롯한 그 누구도 카오스를 완전하게 제거할 방법을 모른다. 그에게서 제한적으로나마 너희들을 보호할 수는 있으나 그를 봉인하거나 제거하는 건 불가능하다. 이 세계에서 내몰 방법도 없다. 그런데 키케로가 그것을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어찌해야 하는가! 고집을 부려 그가 내민 손을 거절해야 마땅한가. 아니면 예전처럼 그에게 의지해야 하는가. 어떻게 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인가?”
우라노스들은 이제 상황을 명백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프뉴마와 에레츠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복잡한 심경을 나타내듯 얼굴들이 저마다 찡그러져 있다.
아퀴나스 단독의 결정인지, 다른 지도자들이 동참한 것인지조차 명확하지 않았지만, 지금의 상황만으로는 그들은 어떤 연유인지 모르나 배제된 것이 분명해 보였다.
무리의 성향은 하나가 아니다. 지지하는 지도자도 저마다 다르다. 하지만 공동의 목표. 비밀차원의 유지라는 측면에서는 양보가 없었다. 아퀴나스가 설사 독단으로 일을 그르칠 수는 있고 여러 성향의 사람들을 모두 만족시키지 못할지는 모르나 비밀차원을 보호하고자 하는 의지에서만은 의심하는 이가 없었다.
우라노스들은 다른 두 계급의 사람들보다도 더 정확한 판단을 하고 있었다. 지금에 와서 방법은 키케로를 의지하는 것뿐이다. 그가 다른 의도를 가지고 왔다면, 그리고 약속한 바를 이루지 못하게 되면 그때 가서 책임을 물어도 된다는 생각이었다.
슬슬 분위기가 아퀴나스의 의도를 받아들이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 가고 있었다. 우라노스 몇이 찬동하는 발언을 하고, 뒤 이어 여러 소리가 더해져 결정을 뒷받침했다.
한편 선발대는 파천의 주변에 서고 앉은 채로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과 싸움을 해야 한다는 가정을 했을 때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이 없었다. 백여 명의 우라노스들만으로도 솔직히 벅찰 것 같았다. 파천은 대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선발대원들은 저마다 추측해보았지만 아무리 애써보아도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이번엔 파천이 말했다.
“어떤 돌발적인 상황이 벌어져도 여기를 벗어나선 안 된다. 날 신뢰할 수 없거든 여기 아퀴나스를 믿어라. 마음을 굳게 하고 염원하라. 이 세계를 지켜내고 싶거든 내 말을 명심해야 한다.
지금 카오스는 큰 힘을 얻었고 점차 더 큰 힘을 얻어 가고 있다. 그가 자신감을 가지게 되면 지금과는 달리 자신을 드러내놓고 모든 걸 한 번에 가지려 시도할 것이다.
그때가 오히려 우리에겐 기회가 된다. 곧 그 순간이 올 것이다. 모두 마음을 진정시키고 외부의 변화에 마음을 쓰지 마라. 설사 이곳 비밀차원이 송두리째 사라진다 해도 격동하면 안 된다.
내 말을 잊지 말고 명심하길…… 진정으로 부탁하겠다.”
아퀴나스는 파천의 지시에 따라 무리를 원형으로 모아 앉혔다. 선발대도 그 중심에 앉았고, 파천과 아퀴나스가 제일 중심축을 이루었다.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다행히 카오스가 날 의식하지 않고 실체를 회복하는 무리수를 둔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겠지.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라도 상관없다. 어쩌면 그의 출현이야말로 내 근심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한다.
모든 계획은 완성되었다. 이제 실행만이 남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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