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88화 : 메덴으로 진군하는 카오스의 군대

황제의 검 – 188화 : 메덴으로 진군하는 카오스의 군대


메덴으로 진군하는 카오스의 군대

마령의 본주 케플러는 메덴 입구까지 오긴 했지만 들어가는 게 썩 내키지는 않았다.
카오스의 요구는 끈질겼다. 케플러를 완전하게 장악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지금보다 상황은 더 악화된다. 그렇다고 순순히 따르자니 결과가 암담하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당장에 아쉬운 대로 이용해 먹고 나 몰라라 하는 건 똑같다. 케플러 자신이 그랬듯이 카오스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더했다. 이런 망설임을 카오스가 놓칠 리가 없었다.
카오스는 재촉했다. 좋은 자리에 등을 떠다밀면 못 이기는 척 발을 떼놓겠지만 되돌아 나올 수 없는 함정과 수령으로 들어가라 하면 누가 있어 즐겨 유쾌하게 수긍하겠는가.
케플러는 이 위기를 어떻게 모면할까를 생각했다. 이리 저리 뇌리를 굴려보아도, 아무리 꾀를 내어보아도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카오스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기 전에 결정을 내려야 했다. 케플러는 될 수 있는 한 천천히 메덴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뒤를 따르는 플로렌서는 전사들에게선 작은 감정의 기복도 보이지 않는다. 생각하고 행동하되 살아 있다 할 수 없는 존재들. 그래서 그들에겐 망설임이 없었다. 카오스가 케플러를 그런 존재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일단은 그들에게로 가자. 가서 기회를 보자. 카오스가 파천을 두려워하는 것 같으니 차라리 그곳에 살길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걸음이 더욱 힘차고 씩씩해졌다.

카오스는 메덴의 중심까지 제 힘을 투입시키진 않고 있었다. 그는 좀더 시간을 두고 상황을 관찰할 생각이었다.
그가 염려하는 건 오직 파천 하나뿐이었다. 그가 주는 부담감이 카오스를 신중하게,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또 하나의 결정적인 이유는 자신의 본체를 담고 있는 코모라에 대한 염려 때문이었다.
코모라의 신체가 훼손되고 결국엔 가서 죽음까지 이르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다른 대상을 물색해야 한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보다 조건이 나은 이를 찾기 힘들 것이다. 더군다나 그럴 여유도 없었다.
카르마와 케플러를 소모용으로 여기는 것도 코모라가 여러면에서 우월했기 때문이지 그 외 다른 이유는 없다. 코모라보다 더 흡족했다면 미련 없이 갈아치웠을 것이다. 카오스가 흥미를 느낀 자는 사실 따로 있었다.
메타트론!
그야말로 그가 그토록 원했던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메타트론은 카오스가 장악하기엔 너무 버거운 상대였다. 동의를 얻어내면 가능하겠지만 그 전엔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카르마는 안절부절못했다.
제 품에 인질이 있다는 사실조차 그를 안심시키진 못했다. 메타트론이 유독 위험해 보였다. 인질의 안전 따위엔 관심도 없다고 공공연히 말하지 않았던가. 카오스의 지시에 따르긴 했지만 영 마음이 놓이질 않는다.
한편 카르마에게 제압당해 옴짝달싹도 못하는 헤르파는 제 신세가 한심하고 처량해 한숨만 나왔다. 마계군 사령관 헤르파가 이와 같은 수모를 당할 줄이야 누군들 알았겠는가.
그보다 더 그를 절망에 빠트리는 이유가 있었다. 루시퍼와 메타트론이 카르마에게서 자신들을 보호할 수 없었을까?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자신을 대하는 그들의 차가운 태도도 내내 마음에 걸렸다.
‘헤렘과 내 안전은 저들에게 관심권 밖이다. 우리가 인질로서 가치가 있는 건 우리들이 부정한 또 하나의 아버지 때문이다. 그마저 우리를 외면한다면 죽음을 피할 길은 없다. 죽음에 두려운 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이 세계의 운명을 결정짓는 분수령이다.
제외되고 싶지 않다. 끝까지 이 순간을 함께 하고 싶다. 끝까지 남아 지켜보고야 말겠다. 내 운명마저 바꿔버린 저들의 선택이란 것이 어떤 결실을 맺는지 내 눈으로 지켜보고 말겠다.’
그러자면 살아남아야 한다.
카르마는 라아그만 제외시킨 채 헤르파와 헤렘만 노렸다.
그것은 다분히 파천을 의식한 선택이었다. 카오스의 명령이 있었다지만 그가 판단하기에도 파천과 메타트론을 제외한 자들은 들러리쯤으로 비쳐줬다.

지금도 상황은 묘했다. 어느 쪽도 주도하지 못하고 서로가 상대에게 약점을 잡혀 있는 상태처럼 보였다.
카오스로 인해 메타트론은 파천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 입장이었고, 파천은 아이들을 포함한 연합군의 안전을 도외시할 수 없다는 취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 약점을 잡고 위협하고 있는 카르마는 메타트론의 눈치를 살펴야만 했다.
이처럼 맞물려 있다 보니 누구도 경솔하게 처신하지 못했다. 자기 원함만 요구하고 청구한다 해도 반대쪽의 눈치 때문에 성사되기 쉽지 않다. 적어도 대치구도만으로 따져보면 그렇게 생각될 수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파천은 침착했으며 결코 동요함이 없었다. 얼굴 표정만으로는 아무런 근심거리도 없는 편안한 상태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헤르파와 헤렘이 한 팔이 잘린 채로 나타난 걸 보고, 카르마의 손에 인질이 된 채 불안해하고 있는 모습을 대하고 어찌 태연할 수 있으랴.
그의 가슴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파천은 자신의 그런 감정에만 충실할 수 없었다.
‘나 하나로 끝날 일이 아니다. 후에…… 그런 기회가 온다면…… 용서를 빌리라. 너희들에게 좋은 아버지가 되지 못해…… 미안하구나.’
파천은 불길한 예감을 떨처버리려 애썼다. 아이들이 무사하길 빌었다.
그 하나만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 영계의 운명은 지금의 대립이 어떤 모양으로 발전되느냐에 따라 졀정된다.
마령의 본주 케플러가 나타난 건 메타트론이 파천에게 ‘아이들을 네게 다시 돌려줄 테니 내게 협조하라. 그들뿐만 아니라 연합군 수뇌를 포함한, 선발대 등의 네 측근들까지 네 소유임을 인정하겠다. 그들은 날 섬기지 않아도 좋다. 그들을 관여하지 않겠다.’ 라는 파격적인 제안을 하고 나서였다.
막 등장한 케플러는 다른 이들에게서 예전과 같은 큰 주목을 받진 못했다.
메타트론이 케플러와 카르마를 가리키며 말을 덧붙였다.
“뿐만 아니라 저 둘을 내 손으로 제압해 네 앞에 꿇리겠다. 나는 널 존중하고 인정한다. 그리고 그것은 앞으로도 변함없을 것이다.
자, 어떠냐? 이 정도면 나로서도 최대한의 성의를 보인 것 아니가? 이젠 네가 선택할 차례다.”
이래도 내 말을 안 들을래? 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메타트론은 의기양양해 있었다. 메타트론이 지금 한 제안은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파격적인 것이라 할 만했다.
메타트론과 파천은 수호자와 메타트론이 그랬던 것처럼 직접적인 싸움을 벌일 입장도 아니었다. 하나가 죽으면 나머지도 죽는다. 또한 그들 정도의 측정할 수 없는 절대자들 간의 부딪침은 비밀차원의 예에서 보았듯이 반드시 차원의 붕괴로 이어질 공산이 컸다.
파천과 메타트론의 대결이면 영계도 무사할 순 없을 것이다. 그런걸 알면서도 파천이 끝까지 반대의 입장을 고수한 채 방해를 해온다면 메타트론의 선택도 연합군을 몰살시키는 쪽으로 맥을 잡아갈 수밖에 없었다.
파천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그것까지 막을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상황들을 감안하고 파천의 측근들에게만은 예외적으로 다른 잣대를 적용하겠다고 하니 그것만으로도 메타트론이 지금 어느 정도로 많이 양보했는지는 분명하게 답이 나온다.
그럼에도 파천은 강경했다.
“타협은…… 없다.”
“그럼 정말로…… 끝장을 보자는 거냐? 너와 나 그리고 이 세계 모두가 공멸하자고? 그걸 원해?”
“난…… 너와 카오스를 비롯해 이 세계를 지배하고 구속하려는 자들을 용납할 수 없다. 너희가 뜻을 돌리면 네 말처럼 우리가 서로 싸울 일은 없다. 허나…… 끝가지 집착을 보인다면 난 내가 할 수 있는 수단을 모두 동원해서 너희들의 의지를 꺾어놓겠다.”
“어떻게? 어떻게 막겠다는 거지? 진정, 진정 네가 연합군이 전멸하는 걸 보고 싶은 거로군.”
“설사 내 힘이 미치지 못해 저들을 모두 잃는다 해도, 이 세계가 내 눈앞에서 부셔져 사라진다 해도 난 네 뜻에 동조할 수 없다.”
“왜, 왜! 이유가 뭐냐?”
“옳은 일이기 때문이다. 난 순리를 거역할 수 없다.”
“한심한…… 좁혀지지 않는 끝없는 평행선이야. 지겹군, 지겨워. 수호자와 그리 오랫동안 해왔던 짓거리를 이젠 너와 해야 하는가? 하하하하하…….“
이제 서로의 의지는 확인했다.
메타트론은 결정을 내렸다.
‘그래, 보여주마. 내가 힘이 없어서 네가 굽히는 줄 알았다면 오산이다. 내 힘을 보여주도록 하지. 깡그리 쓸어버리겠다. 그걸 보고서도 후회하지 않을지 기대하며 지켜보겠다.
넌 날 이길 수 없다. 너는 약점이 있지만 내겐 그런 약점이 없다. 그것이 얼마나 큰 차이인지를 깨닫게 해주겠다.’
잠시 떠밀렸다 해서 본래의 의지마저 버린 건 아니다. 큰 소리로 인해 작은 소리들이 잠겼다 해서 어찌 아예 입을 닫았으리라 할 수 있으리요, 저마다 말하고 있고 저마다 표현하고 있음을.
때로 의문을 담고 때로 탄식하고 침울해졌다 환하게 밝아지는, 그들의 눈은 보는 것으로 참여하고 있었고 그 가운데 자신을 나타내고 있었다.
케플러는 자신이 그런 나약하고 힘없는 무리 중에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이, 다시 예전의 그로 돌아간 것 같아 불만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카오스가 엉뚱한 지시를 내린다. 그건 카르마에게도 동일하게 전달되었다.
‘미친놈! 지금은 가만있어도 생명을 부지할지 장담할 수 없거늘 그런 짓을 하고 성하길 기대하란 말이냐.’
카오스는 둘에 돌연 공격 명령을 내렸다. 메타트론과 파천 간에 흐르고 있는 터질 듯한 긴장감을 일시에 폭발시키려는 의도였다.
연합군에 대한 공격. 전사들에게 그런 명령을 내리라는 것이었다. 제왕의 구슬로 강하게 단련된 전사들이면 연합군의 정예라도 혼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얻을 게 무언가? 큰 승부와는 전혀 상관없는 작은 싸움일 뿐이다. 케플러는 무시했다. 그런데 카르마는 달랐다.
‘저 죽일 놈이. 자칫하다간 나까지 휩쓸리겠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크게 웃는 걸 보고 그가 지금 무엇을 하려는지를 케플러는 알아챘다. 헤르파와 헤렘을 죽이려는 것이다.
그런 뒤, 그는 망설임 없이 연합군 진영을 향해 돌진을 감행할 것이다. 카오스의 지배력이 강해지자 그는 두려움도, 망설임도 없었다. 품에 안고 있던 인질들을 터트리려고 힘을 가하는 카르마.
“크크크크.”
전신을 감싸고 검은 기류가 확 피어올랐다. 저항할 수 없는 아이들로서는 속수무책일 밖에.
하지만 그보다 더 빨리 파천이 움직였다. 움직였다고 느낀 순간 그의 손은 카르마의 이마를 짚고 있었다.
“경거망동하지 마라.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용납해야 하는가! 내 인내는 한계에 도달했다. 카오스, 네 간악함은 이제 곧 내 앞에 발가벗겨지리니 서둘지 마라. 네 차례를 기다려라.”
이상한 일이었다. 금방이라도 미쳐 날뛸 것 같던 카르마가 두려움에 젖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단지 이마에 한 손을 갖다댄 것만으로 파천은 카르마를 완벽하게 억제시키고 있었다. 그 상태로 파천은 고개를 돌려 메타트론을 응시했다.
“메타트론, 내가 왜 완전자가 되는 걸 포기했는지 아느냐?”
“……!”
“완전자로서는 이곳에 머물 수 없다는 걸 알았지. 그래서 그 길을 포기했다. 그리고 일부의 성품을 제한시켰다. 바로 이런 때를 위해서.
너희들에게 심판을 내리기 위해서다. 더 이상은, 그래 더 이상은 너희를 참아줄 수 없다. 신을 요청한 너희에게 신의 심판을 대신 내리기 위해 난 잠시 악마가 되기로 했다. 난 너희에게 선택할 기회를 주었다. 집착을 끊을 기회를 주었다.
다시 묻겠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포기하라. 더 이상 이 세계에 관여하지 마라. 어찌할테냐?”
“할 수 있거든 어디 마음껏 해봐라.”
파천은 웃었다. 맑은 웃음소리는 점차 커져 갔다. 웃음을 멈춘 파천이 카르마의 품에서 아이들을 떼어냈다.
그들 사이에 짧은 눈맞춤이 있었다. 헤르파는 시선을 돌렸고 헤렘은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파천은 둘을 안고 수호자에게로 걸어갔다. 아이들이 파천의 품에서 수호자에게로 건네졌다. 파천은 돌아섰다. 이제 결심은 굳었다. 더 이상의 번복은 없다.
‘이런 순간이 오지 않길 바랐는데…… 이런 방법 밖에 없다면…… 거부하지는 않는다.’
파천이 외쳤다.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말했다.
“내 싸움은 시작되었다. 경고한다. 이후로 내게 용서를 기대하지 마라. 싸우려 하는 자에겐 처절한 응징만이 있을 것이다.
나서라. 누가 나와 싸울 것인가? 메타트론, 너인가?
비밀차원의 지도자들, 너희들도 싸우고 싶으냐?
모두 나서라. 자, 봐라. 이것이 너희를 상대할 내 모습이다.”
파천의 전신에서 폭발하듯 흘러나온 금빛은 주변을 금세 물들었다.
더 이상 밝은 수 없는 금빛의 광휘는 파천을 신비롭게 보이게 했다. 억압에서 풀려난 카르마가 파천을 향해 덤벼들었다. 장막위를 거닐던 천사들의 노랫소리가 더 커졌다. 마치 파천의 승리를 기원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날 원망하지 마라.”
파천은 하나가 아니었다. 파천은 그 어디에도 있었다. 주변은 그의 그림자로 덮여버렸다.
절대의 손길, 거부할 수 없는 손길은 쏟아지는 달콤한 잠처럼 거부할 수 없는 것이었다.
카르마는 환상을 보았다고 느꼈다. 아름다운 새의 날갯짓이 저러할까? 얼굴을 감돌며 흐르는 바람결의 속삭임인들 이리 부드러울까! 카르마는 넋을 놓고 환상에 몸과 정신을 맡겨버렸다.
원령체! 완전한 원령체의 의지를 거부하기엔 카르마는 너무도 약했다. 쏟아져 내린 손길은 카르마의 전신을 스쳤을 뿐이다. 카르마는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즉시 분해되어 버렸으며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파천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마령의 본주 케플러. 그는 자신에게는 모르지만 다른 이들에겐 위험한 존재였다. 막을 수 없는 투명검! 그것이 펼쳐지면 희생이 클 것이다.
카르마의 소멸을 본 케플러는 이어 자신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는 파천을 보았다. 아득한 심정이었다. 피할 수도 피할 곳도 없는 막다른 곳에 내몰린 심정이었다. 케플러는 왜냐고 했다.
자신은 어떤 의사도 아직 밝힌 바가 없다며 항변했다. 아직은 그와 부딪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너와 싸우겠다고 한 적이 없다.”
“기회를 보는 자. 너는 지난 날 수도 없이 많은 악행을 저질렀다. 너 하나의 만족을 위해 흘린 피가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루고도 남음이 있다. 너는 이 자리에 오지 말았어야 했다. 너만은 돌이킨다 해도 용서할 수 없다.”
“이이…… 나는 싸우지 않겠다. 저항하지 않는 자를 상대로 광명의 능력을 쓸 참이냐?”
케플러도 강자다. 메타트론이나 파천만 없었다면 그가 원했던 걸 얻었을지도 모를 초강자였다. 그도 보는 눈은 있다. 좀 전의 파천이 보인 힘은 솔직히 부딪쳐도 승산이 없어 보였다. 패할 걸 알면서 사우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했다.
“저항을 하든 하지 않든 그건 네 뜻일 뿐 내 뜻은 아니다. 난 널 소멸시키기로 결심했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 날 상대해야 덜 억울하겠지.”
이렇게 된 이상 케플러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죽여!”
전사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렸다. 백여 명이나 되는 전사들이 파천 하나를 노리고 성난 야수처럼 용맹하게 돌진했다. 마계전사보다도 더 단단한 몸뚱이를 자랑하는 최강의 비밀병기들이었다. 파천은 몰려오는 자들을 향해 별다른 대비 없이 그냥 걸어 들어갔다.
스스스
모두가 놀랐다. 메타트론도 수호자도, 비밀차원의 지도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무리 지어 떼 지어 몰려오는 전사들 사이엔 틈이 없었다. 바람조차 피해 가기 힘들 것 같았다. 파천은 그들을 그대로 통과해버렸다.
교묘한 발놀림으로 피해 간 것이 아니라 그들 몸을 뚫고서 그냥 지나가버린 것이었다. 관전자들도 놀랐지만 정작 파천의 목표가 되어 있는지라 목이 타들어 가던 케플러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옆에 있던 플로센서를 파천에게 집어던지며 공중으로 몸을 솟구쳤다. 그리고 그가 자랑하는 마령의 투명검을 일으켰다. 거대한 검이 메덴을 단번에 두 쪽 낼 듯한 기세로 쏘아졌다.
파천은 연어가 물살을 헤치고 오르는 듯한 부드러운 몸짓으로 케플러를 따라 오르다 투명검을 보았다. 번개가 무색할 속도로 쏘아 오던 것이 어느 순간에 사라졌다. 투명검이 파천을 뚫었다. 케플러가 쾌재를 불렀다.
“됐다.”
너도 별수 없구나, 라는 탄성이었다. 하지만 그건 너무 이른 속단이었다. 파천은 아무런 피해도, 충격도 받지 않았다.
마령이, 더군다나 케플러 정도가 조종할 수 있는 한정된 양의 마령이 원령을 무력화시킬 수는 없었다. 다급해진 케플러가 자신이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로 움직였다. 파천의 눈을 속일 양으로 그런 것인지 분신이 수십 개나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그러기를 여러 번. 케플러는 처음의 그 자리에 와 있었다. 케플러는 다급하게 파천의 위치를 찾았다. 방금 전까지 있었던 그 지점엔 보이지 않는다.
케플러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파천을 찾기에 바빴다. 보고 있던 메타트론이 케플러를 비웃었다.
“저리 허둥대서야.”
케플러가 허둥대느라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듯싶었다. 하지만 케플러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네가 나라면 다를 것 같은가, 라고.
보기 안쓰러웠던지 루시퍼가 파천의 위치를 일러주었다.
“네 뒤에 있다.”
“헉.”
케플러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굳어버렸다. 파천이 뒤에 있다지 않은가? 그렇다면 승부는 났다. 아니, 투명검이 통하지 않는 이상 승부는 바로 그때 결정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에겐 파천을 상대할 수단이 더 이상 없었다. 케플러는 죽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살길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스스로 부인해봐도 광명을 얻은 완전자다. 지금이라도 굽히면 살길은 있다.’
케플러는 살고 싶었다. 이대로 죽기엔 너무도 억울했다. 케플러는 파천을 자극시키지 않기 위해 그 상태로, 최대한 간절한 어조로 애원했다.
“나를…… 죽여서…… 네게 무슨 이득이 있겠나. 내게 기회를 다오. 날 살려준다면…… 다시는 이런 과욕을 부리지 않겠다. 약속하겠다. 앞으로는 영계를 위해…… 예전처럼 헌신하며 봉사하며 살아가겠다. 그러니 제발…….”
살려주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 하나를 살림으로 해서 죽어갈 자들을 생각했다. 파천은 말로써 상대를 판단하지 않는다. 말은 얼마든지 속일 수 있다. 그가 진심으로 참회했다면 살려달라는 얘기는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간절하게 제 목숨을 구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파천은 마령에 주목했다. 그의 결심엔 변함이 없었다.
“기회는 내가 주는 것이 아니다. 네게 기회는 있지만 지금은 아니다. 죽음은 네게서 많은 것을 뺏어 갈 것이다. 네가 지금껏 애착을 가져 왔던 것이 얼마나 허망했었던가를 생각하라. 그리고 네가 예전에 어떤 사람이었던가를 떠올려라.
다시 삶이 주어지거든 이런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를 바라겠다.“
파천의 냉정한 선고가 떨어졌다.
“안 돼!”
케플러는 발악적으로 돌아섰다. 파천의 의지가 케플러를 해체시켰다. 케플러는 마지막으로 제왕의 구슬을 떠올렸다.
‘그것이 내 몸 안에 있는 한 난 죽지 않는다.’
케플러의 몸이 은은한 빛으로 물든다. 점차 몸이 투명해지는가 싶더니 먼저 팔이 사라졌다. 케플러는 그 과정을 지켜보고 있어야 했다. 고통은 없었다. 어찌 보면 신기하기도 했다. 자신의 몸이 조금씩 해체되는 광경을 볼 수 있다니.
하지만 그걸 보고 그런 심정을 느낄 리는 없었다. 두려움과 안타까움이야말로 이 순간 케플러를 지배하고 있는 감정이었다. 팔이 사라지고 다리가 사라지고 몸통이 조금씩 허물어졌다. 그리고 케플러는 더 이상 거기에 없었다.

무언가가 땅으로 떨어졌다.
제왕의 구슬!
자신의 배를 찢고 넣어두었던 구슬이 의지할 곳을 잃고 땅으로 떨어져 내린 것이다. 경사면을 타고 메타트론의 앞까지 굴러가섰다. 메타트론은 구슬을 손으로 집었다. 영롱한 빛깔을 내는 것이 묘하기도 했다.
케플러의 어이없는 죽음은 시사하는 바가 컸다.
파천의 능력이 어디에 미쳐 있는지를 따지기엔 턱없이 부족하지만 두 번의 간단한 싸움만으로도 그의 능력이 어느 정도일지 두렵기만 하다. 캄파넬라는 예전 키케로였던 때와 지금을 비교해 보았다.
‘어림도 없다. 그때도 강하긴 했지만 지금 정도의 두려움을 주진 못했다. 키케로는 아직 제대로 자신을 보이지도 않고 있다.
두렵다. 그가 우리까지 적으로 돌리면 우리 역시 이곳에서 마지막을 맞아야 할지도 모르겠구나.’
파천의 기에 눌린 것인지 메타트론도 비밀차원의 지도자들도, 루시퍼도, 아사셀도 말들이 없다.
수호자는 파천이 메타트론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를 추측해보았다. 메타트론을 지금껏 상대한 자들과 같이 생각할 수는 없다.
‘둘 다 전력을 다해 서로를 공격할 수는 없다. 하지만 메타트론은 연합군을 이용해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들 것이다. 파천, 진정 대책이 있단 말인가?’
그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메타트론을 막을 방법은 없어 보였다.
자신이 파천이라고 해도 물러서는 것 밖에는, 양보하는 것 외에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메타트론을 상대로 도박을 해선 안 된다. 그는 연합군을 전멸시키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다. 그에 비해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한정돼 있다. 어쩔 것인가, 파천.’
“이제 내 차례인가?”
구슬을 만지작거리며 여유를 부리는 메타트론.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너는 날 막을 수 없다. 너를 희생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방법도 어림없다. 날 죽이려면 전력을 다해야 한다. 그럼 날 죽이기 전에 이 세계가 먼저 사라진다.’
파천과 메타트론이 마주섰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길은 평온했다.
연합군은 긴장하고 있었다. 메타트론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둘 사이의 대결이 어떤 식으로 이뤄질 것인가에 대한 호기심이 적당하게 섞여 있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자세히 관찰해보면 파천을 향한 시선에 동일하게 표현되고 있는 것은 기대요, 신뢰였다. 파천이 해낼 것이라는. 그라면 불가능도 가능하게 만들 것이란 기대와 신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