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91화 : 네 기억이 다하지 않는 한 난 너로 인해 영원하다
네 기억이 다하지 않는 한 난 너로 인해 영원하다
사람들은 파천을 보고 있었다.
천사들도 파천에게로 내려왔다.
얼마나 혹독하게 다뤘는지 비밀차원의 지도자들은 성한 자가 하나도 없었다.
메타트론은 그들 중에서 가장 멀쩡했다. 메타트론이 말했다.
“독한 놈! 어떻게 그렇게 태평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을 수 있는거지? 곧 죽게 될 놈의 얼굴 치고는 너무 평화롭군.”
“난들 왜 미련이 없겠는가. 하지만 이 방법 외에는 내가 선택할 길이 없음이니 집찪해봐야 더 괴롭기만 하지.”
“그런가?”
메타트론도 이젠 포기하고 있었다. 파천은 수호자에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
“미안하다.”
그 말 외에는 달리 해줄 말이 없었다. 메타트론을 지우면 그도 지워진다. 그래서 미안한 것이다.
수호자는 웃었다.
“그런 말은 필요가 없다. 이제 곧 모두가 사라지겠지. 그 동안 참…… 지겹게도 싸워 왔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다시 기회가 있다면 이번엔 사람으로 살아보고 싶다.”
“정 떨어지는 놈!”
메타트론이 비웃는다. 하지만 표정의 숨겨진 한 부분에서는 그의 옅은 열망이 설핏 엿보였다.
파천은 드디어 완전자의 세계를 열기 시작했다. 헤르바르트가 애원했다.
“돌아가겠다. 우리를 제외시켜 다오. 비밀차원에서 다시는 나오지 않을 테니 우리를 풀어다오.”
파천은 냉랭하게 말했다.
“늦었다.”
완전자의 세계가 열리고 있었음에도 사람들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주변의 사람들과 손을 잡았다. 카오스는 마지막 발악을 했다.
“이 세계가 사라져도 너와 나는 결국엔 싸워야 할 운명이다. 그때가 지금은 아니겠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완전자의 세계가 열리는 모습을 사람들은 경외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기존의 생각을 송두리째 바꿔버릴 전경이었다.
어떤 새로운 세계의 유입이라기보다는 기존의 이 세계가 서서히 해체되고 있었다. 구별됐던 것이 하나로 모이고 해체된 것들이 결합되엇다.
사람들의 모습이 하나 둘씩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공간도 서서히 지워져 갔다.
수호자가 마지막으로 제안했다.
“파천, 나도 너와 겨뤄보고 싶다.”
엉뚱한 말이었다. 파천은 그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일체화된 우리와 겨뤄보고 싶지 않나? 우리가 하나가 되면 너도 버거울 텐데.”
그제야 무슨 뜻인지 안 파천은 웃었다. 이제 주변에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으나 한 번 경험이 있던 메타트론 등은 알고 있었다.
비밀차원에서 그랬듯 그들 역시나 아직 존재하고 있으며 자신들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한편 파천에게 염원을 모아줬던 천사들은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그들이 쳐둔 장막은 완전자의 세계가 열려도 영향을 전혀 받지 않고 있었다. 완벽히 분리되어 있었다. 파천이 곧 원령을 폭발시킬 것에 대비하고 있었다.
미카엘이 천사들에게 한 번 더 주지시켰다.
“원령의 폭발로 완전자의 세계가 닫히면 곧바로 우리의 힘으로 세계를 안정시켜야 한다. 여파에 대비해야 한다. 전력을 다 기울여야 할 것이다.”
파천과 하나가 된 메타트론이 마주서 있었다.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는 유일한 두 존재가 마주섰다. 파천은 어차피 원령을 폭발시켜야 했다. 그래야 그 힘의 반동으로 완전자의 세계가 닫히며 사라졌던 세계가 다시 복원된다.
처음부터 이렇게 계획되어 있던 일이었다.
“시간이 많지 않다. 나는 한 번에 내 전력을 쏟겠다.”
“나도 마찬가지야. 오래 버틸 것 같지가 않거든.”
메타트론이 먼저 힘을 쏟아냈다.
사실 조금 전부터 그에게서도 해체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그런 중에도 마지막 힘을 뽑아내고 있었다. 잠력까지 끌어낸 최후의 일격이었다.
세계가 파괴되는 걸 저어해서 단 한 번도 발휘해보지 않았던 힘이었다.
더군다나 수호자와 메타트론이 합쳐진 원래의 메타트론이었으니 그 힘이 어느 정도이겠는가.
파천도 광명의 의지를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고오오오
우우우웅
두 힘은 어떤 현상으로 구체화되지 않았다. 초극의 힘은 오히려 고요했다. 존재를 부정하는 힘. 그 실체를 어찌 말로 설명 할 수 있으리요.
파천과 메타트론의 승부의 결과가 어떠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나는 사라졌고 하나만 남았다. 그것으로 파천이 이겼다고 단정할 수만은 없었다.
다만 그 충돌로 인해 완전자의 세계는 닫혔고, 사람들의 모습이 하나 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공간이 생겨나고 사람들이 나타나고 그리고 변화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 아직까지도 희미한 잔상으로 남아 있는 파천이 있었다.
그는 빛에 둘러싸인 채 점차 지워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 주변으로 몰려왔다. 마지막 파천의 모습을 기억해두기 위해서였을까?
파천은 그들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 점차 희미해져 가는 얼굴 윤곽이 안타깝기만 하다.
파천의 얼굴이 한쪽 방향에서 멈춰 섰다.
그곳엔 설란과 환아, 화아, 천아, 라미레스, 대덕, 아난다, 카이로, 페리칸, 소군 등이 있었다.
얼굴의 윤곽마저 완전히 사라졌다. 팔이, 다리가…… 끝부분부터 서서히 지워지고 있었다. 그곳에서 파천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죽음은 우리를 갈라놓지 못한다…… 너희들이 있는 곳에 나도 있겠다…….. 잊지마라. 잊는 순간 혼란은 또다시 시작된다.”
그리고 그가 사라졌다. 하지만 마지막 음성은 그곳에 남아서 모두에게 전달되었다.
“내가 있는 곳에 소망을 두지 마라. 네가 선 자리, 바로 그 자리에 네 소망이 있다. 바로 그 자리에서부터, 거기서부터 시작해라.
네 기억이 다하지 않는 한 난 너로 인해 영원하다.”
그가 마지막을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누구에게 한 말이었을까?
“아빠,아빠!”
환아의 목소리였다.
“아빠, 어서 일어나세요.”
환아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장삼봉 진인께서 오셨어요. 빨리 오시래요.”
‘장삼봉! 짱삼봉이라고?’
파천은 벌떡 일어났다. 환아의 얼굴이 보였다.
“무슨 낮잠을 그리 오래 주무세요?”
‘낮잠? 낮잠이라니…… 그리고 여긴? ……그렇다면!’
“아빠,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하게 하세요?”
‘그 모든게…… 꿈…… 이었단 말인가!’
파천은 너무도 어이가 없었다. 실실 헛웃음만 나오다. 하지만 좋았다. 이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파천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외쳤다.
“꿈, 꿈이란 말이지. 그 모든 게 꿈이었단 거야. 하하하, 이 얼마나 다행인가.”
“아빠…….”
환아는 아버지 파천이 어딘가 모르게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환아야!”
“네?”
“환아야!”
“네!”
“아니다. 나가자. 누가 오셨다고?”
“장삼봉 진인께서…….”
“그래? 그럼 나가봐야지.”
파천은 부리나케 밖으로 뛰어나가다 움찔 멈춰서고 말았다.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코끝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갔다.
홱 돌아선 파천이 환아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이상스런 파천의 행동에 겁먹은 환아의 얼굴이 질려 갔따.
“왜…… 그러세…… 요?”
“너! 이리 좀 와바라.”
주춤주춤, 머뭇거리며 가까이 온 환아의 얼굴을 파천은 노려보고 있었다. 파천의 얼굴에 미세한 경련이 일었다.
파천은 손을 들어 환아의 이마를 가리고 있던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파천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는 본 것이다. 환아의 얼굴에 뚜렷하게 나타나 있는 마계의 표식을 뱀이 꼬리를 물고 있는 표식은 분명 마계의 표식이었다.
파천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정도로 놀랐다.
‘그럼…… 그것이….. 꿈이 아니라…… 오!이런일이……’
더 이상 생각은 이어지지 않는다.
“이봐, 파천. 뭐하고 있는 거야? 무슨 낮잠을 그리 오래 자고 있…….”
막 방으로 들어서던 천마가 환아의 질려 있는 얼굴을 먼저 보았따. 그리고 파천의 격정을 목격했다.
“파천, 파천? 이봐 파천!”
“으, 으응?”
“너 왜그래?”
“아, 아니다. 그래, 나가봐야지. 자 나가자.”
파천과 천마가 밖으로 나오고 곧 이어 환아가 뒤따라 나왔다.
환아는 제 이마에 뭐가 있나 싶어 자꾸만 손으로 쓱쓱 문질러 본다.
마침 집밖에서 놀고 있던 천아를 발견하고 환아가 불렀다.
“이리 좀 와바.”
“왜?”
가까이 온 천아에게 환아는 이마를 들이밀었다.
“뭐가 있어?”
“무슨 말이야?”
“뭐 묻었냐고?”
“응, 묻었어.”
“뭐가? 뭐가 묻었는데?”
“안 씻어서 뗏국이 줄줄 흐르고 있는데.”
“에라이!”
꽁
환아가 천아의 머리통을 있는 힘껏 쥐어박았다. 순간 천아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너어! 아빠한테 이른다.”
“그래, 일러라, 일러. 이 고자질쟁이야.”
“피. 걸핏하면 주먹질이야. 너 그러다 나중에 커서 어른 되면 분명 나쁜 사람 될 거야.”
“어휴, 요게!”
위기를 느낀 천아가 얼른 그 자리를 냅다 피해 달아난다 그는 아버지 천마가 있는 곳을 향해 냅다 뛰었다.
환아는 천아가 또 일러바칠까 봐 따라가며 눈치를 슬금슬금 봤다.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파천의 안색은 좋지 못했다. 장삼봉이 그런 파천을 유심히 살피며 물었다.
“왜 그러나, 무슨 이 있었어?”
“아, 아닙니다. 별일…… 별일 아닙니다. 그래 이번엔 또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내가 꼭 무슨 일이 있어야 오는 사람인가? 놀러 왔네.”
주변에 모여 두런두런 담소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을 파천은 하나씩 살펴보았다.
천마와 적루아, 제갈초홍과 소군, 광마준과 자운, 율극과 사라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천마가 말했다.
“진인, 조금 전 하셨던 얘기나 마저 해보시죠.”
“그럴까요? 파천, 마계가…….”
파천은 놀라서 진인의 말을 자르고 나섰다.
“마계가 침입했습니까?”
“허, 왜 그리 놀라느냐?”
“결국은 마계가 침입했군요.”
‘그럼 그 모든 꿈이 장차 있을 일을 미리 본 것이란 말인가? 아…….’
파천은 절망했다. 장차 어떤 비극을 겪어야 할지를 알기에 그의 낙담은 컸다. 장삼봉은 말은 이었다.
“마계가 별 움직임이 없다는 구나.”
“네? 그게 무슨……?”
“왜? 마계가 침입해 오길 기대했었나 보지?”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파천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너무 조용해. 선계에서도 최근 마계의 동향이 납득이 가지 않을 정도라며 의문을 표하더군.
글쎄 마황이 명령을 내려 마신들이 무한계로 들어서는 걸 금지시켰다는 소식이 있는가 하면 대마신들이 천상계의 천주들과 화답을 갖자고 제안까지 했다는 거야. 별일이 다 있지.
그걸 보면…… 뭔가 꿍꿍이속이 있긴 한데 그 구린 속을 도무지 종잡을 수가 있어야지.”
파천의 얼굴이 환해졌다.
“진인! 그게 사실이라면…… 마계가 이곳을 침략하는 일은 없을겁니다.”
“응? 그렇게 낙관할 일만은 아냐.”
천마도 진인의 편을 들었다.
“그들이 야욕을 접길 기대할 바에는 내일 태양이 한꺼번에 두개가 솟길 바라겠다.”
파천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럼 내일 태양이 두 개가 떠오를지도 모르겠는걸. 하하하하.”
천마는 파천을 기이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별일이네. 어제까지만 해도 땅이 꺼져라 한숨만 푹푹 내쉬던 놈이 오늘은 왜 이래?’
파천이 별안간 엉뚱한 제안을 했다.
“자, 여기서 무거운 얼굴들을 하고 있을 게 아니라 오랜만에 중원 나들이나 해보는 게 어떻겠어?”
“아빠, 그 말 정말이지? 이야! 신난다. 천아야, 우리 먼저 가서 준비하자.”
아이들이 제일 좋아했다.
그동안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태산을 내려가길 극도로 꺼려 왔던 파천이었던지라 이런 즉흥적이고 돌발적인 제안을 해오자 모두가 어리벙벙해 하는 건 당연했다.
어쨌든 그가 우기니 따르지 않을 수도 없게 되었다.
아이들은 신이 나서 앞을 휘젓고 다니고, 어른들은 아직도 그리 썩 내키지 않는 지 억지로 파천을 따라나섰다.
태산을 내려가는 파천의 얼굴이 밝기만 하다. 그는 맑은 공기를 폐부 깊숙이 빨아들이며 상쾌한 기분을 만끽했다.
‘너무도 좋다. 어느 쪽이 꿈인들 무슨 상관이랴.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라면 족한 것을. 나 있는 곳 여기가 내 소중한 곳이며 먼 미래가 아니 바로 지금이 내 전부인 것을. 다시는 오지 않을…… 내 마음 속의 낙원인 것을.’
(<황제의검>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