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4권 – 18장 : 산폭풍, 평야로 – 5화
파웨이브호의 선원들과 공주 일행은 눈이 뒤통수에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정신 없이 좌우를 둘러보았다. 파웨이브호를 천천히 둘러싼 목도리 도마뱀들의 원진은 갈수록 두터워지고 있었다. 케틀은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선, 선장님?”
“닥쳐, 케틀. 뛰어오르진 못해.”
“이, 이놈들 힘이 얼마나 좋은데요.”
“뛰어오르려면 힘 가지고는 안 돼. 물 속 깊이 잠수한 다음에 빠르게 솟구쳐 올라야 한다고. 그런데 이놈들이 그만한 수영 실력이 있을까? 겨우 물 속을 오갈 정도는 되겠지만 그 정도는 어림없어. 다리가 달린 놈의 속도는 한계가 있다. 젠장, 수영 잘하는 네놈이라면 물 속에서 배 위까지 단숨에 뛰어오르겠냐?”
케틀은 그 말에 약간 안심한 듯한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그 안심은 길지 못했다.
쿠쿵.
둔한 소리와 함께 배 위의 사람들은 질겁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물에서부터 고물까지 배 전체가 크게 울렸다. 잭스 선장은 이를 악문 채 외 쳤다.
“놈들이, 놈들이 용골을 친다!”
쿠쿵, 쿠쿵!
용골뿐만이 아니었다. 파웨이브호를 둘러싼 목도리도마뱀들은 그 거대한 꼬리와 단단한 머리로 뱃전을 두드리고 있었다. 충돌이 일어날 때마다 파 웨이브호는 떠 있는 구조물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선원들은 뱃전을 꽉 움켜쥐었고 율리아나는 얕은 비명을 지르며 돛 대에 매달렸다.
현재까지는 흔들림뿐이었고 목도리도마뱀들도 별로 난폭해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잭스 선장은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바다를 바라보았다. 이 괴 물들이 물 위에 떠 있는 이상한 물체에 장난을 치는 것을 뭐라 할 수는 없겠지만, 모든 배는 평압에는 강해도 점압에는 취약한 구조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문제였다. 해머로는 못 뚫어도 송곳으로는 손쉽게 뚫을 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목도리도마뱀이 배 밑바닥을 물어뜯기라도 한다면 파웨이브 호는 당장 침몰할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장난치고 있는 것을 괜히 건드렸다가 더 난폭해진다면? 잭스 선장은 목도리도마뱀들이 흥미를 잃고 물러날 가능성과 그 전에 배에 구멍이 나버릴 가능성을 놓고 무서운 고민을 시작했다.
하지만 목도리도마뱀과 케틀은 그에게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쿠쿵! 다시 한번 목도리도마뱀의 꼬리가 뱃전에 작열한 순간 케틀은 괴성을 지르며 일어났다. 그는 자루가 달린 긴 스페이드를 들고 있었고 그것을 곧장 수면을 향해 휘둘렀다. 탁월한 솜씨에 의해 케틀의 스페이드는 가장 가까이 있던 목도리도마뱀의 두개골 가운데를 정확히 꿰뚫었다.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선혈이 튀어오르며 바다가 순식간에 분홍색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목도리도마뱀들의 공격이 멈췄다. 선원들이 불안한 눈초 리로 서로를 쳐다보는 가운데 스페이드를 세워든 케틀은 헉헉거리면서도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놈들, 이제야 좀 알아 모시겠느냐!”
그러나 목도리도마뱀들은 케틀을 알아 모신 것이 아니라 피 냄새 때문에 잠깐 주춤한 것뿐이었다. 그리고 더 나쁜 것은, 데스필드나 파킨슨 신부가 이미 발견했듯이 이들이 동족을 먹는 데 별 거부감을 가지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쐐애애애액!”
“쐐애애애액!”
물보라가 거칠게 끓어올랐다. 목도리도마뱀들은 머리가 쪼개진 놈이 가라앉기 전에 한 점이라도 더 뜯어먹기 위해서 무서운 기세로 몰려들었다. 그 리고 그 난동의 한가운데 있던 파웨이브호는 폭풍 한가운데 던져진 것 같은 진동을 경험해야 했다.
배 곳곳에서 충돌음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선원들은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졌다. 목도리도마뱀들이 진로를 막고 있는 것은 뭐든 뚫고 지나가겠다는 듯이 배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잭스 선장은 알고 있는 모든 욕설을 케틀에게 퍼부어주었고 그 외에는 다른 일을 전혀 생각해 내지 못했다. 서 슈마허 가 외쳤다.
“선장! 지금 빠져나갑시다!”
“어떻게 말이오! 우리 아래는 바닷물이 아니라 목도리도마뱀 카펫인데! 그것도 미친 듯이 난동을 부리는!”
서 슈마허는 다시 뭐라고 외치려 했으나 그 말은 영영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 순간 맹렬한 폭음이 울려퍼졌기 때문이다.
콰아아앙!
잊혀진 탑 쪽에서 천둥 소리 같은 폭발음이 울려퍼졌다. 오스발은 고개를 돌렸고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오른 탑신의 하단부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음을 발견했다.
탑 안쪽에서는 데스필드가 귀를 막은 채 고함 질렀다.
“잘했소, 신부님 당신. 그럼 가시오!”
“좋다. 이따가 보자, 데스필드! 이랴-하!”
파킨슨 신부는 재빨리 성호를 그은 다음 윈디어를 출발시켰다. 환형 통로를 내달리던 윈디어는 눈앞에 생긴 구멍을 보고는 잠시 어이가 없다는 심정 을 느꼈다. 하지만 그 등에 타고 있던 파킨슨 신부는 그대로 윈디어를 밀어붙였다. 윈디어가 말을 할 줄 알았다면 아마도 꽤 험악한 욕설이 터져나왔 겠지만, 대신 윈디어는 그 기수의 명령대로 벽에 생긴 구멍을 향해 몸을 던졌다.
다음 순간은 이미 허공이었다. 윈디어는 애처롭게 발을 굴렀지만 발굽에 와닿는 것은 세찬 바람뿐이었다. 그리고 파킨슨 신부는 안장에 달라붙듯이 한 채 비명을 질렀다.
“우와아아아!”
첨벙! 요란한 물보라와 함께 파킨슨 신부와 윈디어의 모습이 사라졌다. 재빨리 달려온 데스필드는 불안한 눈으로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요란한 입수 의 파문이 바다 위에 그려졌지만 곧 다가온 파도가 그것을 지웠다. 데스필드는 여기저기를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아무 쓸모 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데스필드가 고함을 질러보려 했을 때였다.
다시 물보라가 끓어오르며 갑자기 파도 사이로 윈디어의 머리가 솟구쳤다. 데스필드는 환성을 질렀고 잠시 후 윈디어의 등에 매달려 있는 파킨슨 신 부를 보고는 더 큰 함성을 질렀다. 파킨슨 신부는 안장을 놓치지 않았다. 윈디어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물기를 털어내었고 파킨슨 신부는 조금 후 에야 정신이 나간 듯한 얼굴을 들어올렸다. 젖은 머리를 뒤로 쓸어넘긴 파킨슨 신부는 그제서야 자신이 말 위에 앉아 있음을, 그리고 윈디어가 힘차 게 헤엄치고 있음을 발견했다. 파킨슨 신부는 승리의 함성을 지르며 탑 쪽을 돌아보았다.
“데스필드!”
“해내셨소, 신부님 당신! 우오 ・아! 이건 정말 기적이라고!”
“다음에는 네가 말 타고 뛰어!”
데스필드는 껄껄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벽에 있는 구멍이 거의 가려질 때까지 물러났던 데스필드는 배낭끈을 단단히 고쳐맨 다음 호흡을 가다듬었 다. 그러고는 맹렬한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구멍 앞에 이른 데스필드는 바닥을 박차며 조금 전 파킨슨 신부가 그랬듯이 가장 빠른 속도로 잊혀진 탑 섬을 벗어났다.
파웨이브호를 뒤흔들던 요동은 삽시간에 사라졌다. 하지만 파웨이브호의 선상에 있던 사람들은 환성을 지르지는 못했다. 그들은 윈디어와 파킨슨 신부를 향해 헤엄쳐 가는 목도리도마뱀들을 공포에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윈디어는 사흘 동안이나 제대로 먹지 못한 것 치고는 굉장한 힘으로 헤엄치고 있었다. 물론 빠져 죽을지도 모른다는 절실함이 이 바람사슴으로 하여 금 죽을 힘을 다 쓰게 만드는 것이겠지만 파킨슨 신부는 태평하게도 ‘과연 명마구나!’ 등의 바람사슴 복장 뒤집는 소리를 하며 핸드건을 뽑아들었다.
“데스필드! 놈들이 우리 쪽으로 온다. 파웨이브호는 안전해졌지만 우리는 어쩌지?”
배낭까지 둘러맨 채로 날렵한 수영 솜씨를 뽐내던 데스필드는 어푸거리며 말했다.
“다가오기 전에 쏘쇼! 식사 대접을 하라고!”
“아, 그래 알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파웨이브호의 선상에 있던 사람들은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광경을 보게 되었다.
콰아아앙! 맹렬한 폭음과 함께 물보라가 솟아올랐다. 엄밀하게 말하면 물보라라기보다는 피보라, 혹은 고기보라 등의 흉측한 신조어가 만들어져야 할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솟아오른 물보라의 절반쯤은 박살난 고깃덩이와 피였기 때문이다. 파킨슨 신부는 서부 최고의 건맨다운 연속 발사를 시도했고 수면 곳곳에서 그 비슷한 물기둥들이 솟아오르는 가운데 잊혀진 탑 앞쪽의 해상에서는 지옥의 풍경화가나 좋아할 것 같은 광경이 펼쳐졌 다.
케틀은 딸꾹질을 심하게 하며 말했다.
“신부님이라고?”
율리아나는 멋쩍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잭스 선장은 아예 손을 부들부들 떨며 저 작자들을 선상에 끌어들이는 것이 과연 주님의 뜻에 맞는 일일 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여덟 마리의 목도리도마뱀들을 파도 속에 흩어놓은 파킨슨 신부는 핸드건을 입 앞으로 가져와 가볍게 불었다.
“훅!”
그리고 파킨슨 신부는 목도리도마뱀들의 동태를 면밀히 관찰했다.
케틀을 싹 무시했던 목도리도마뱀들도 주위의 해역이 몽땅 핑크빛으로 바뀔 정도의 살벌한 공격을 받게 되자 파킨슨 신부를 알아 모시기’ 시작했 다. 목도리도마뱀들은 뿔뿔히 흩어졌고 그래서 파킨슨 신부와 파웨이브호 사이에는 텅 빈 해역이 나타났다. 잭스 선장은 깊은 고민 끝에 일단 배를 전진시키기로 결정했다. 그의 넘치는 인류애나 성직자에 대한 존경심 때문은 아니다. 그들을 놔두고 갔다가는 조금 전 목도리도마뱀에게 가해졌던 공격이 자신들에게도 가해질지 모른다는 위기 의식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잭스 선장의 마음을 알 리가 없는 파킨슨 신부는 환호를 지르며 손을 흔들 었다.
“여어! 그래, 어서 오시오! 말이 지쳐가고 있소. 빨리!”
하지만 스쿠너에는 노가 없고, 그래서 정지 상태에서 빠르게 출발하지는 못한다. 파킨슨 신부는 급속히 지쳐가는 윈디어를 도와주기 위해 안장 옆으 로 뛰어내렸다. 윈디어 옆에 뜬 파킨슨 신부는 그 안장을 부여잡았고 데스필드 역시 빠르게 다가와 안장 반대쪽을 붙잡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각자 핸드건과 스완대거를 뽑아든 채 물결을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며 주위를 매섭게 응시했다.
목도리도마뱀들은 데스필드의 소망대로 핸드건에 피격당한 동료들의 시체를 뜯어먹지는 않았다. 핸드건의 끔찍한 위력은 이 내키는 대로 살아가는 난폭한 생물에게도 경계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했고, 그래서 그들은 식사보다는 자기 보호에 더 신경 쓰게 되었다. 목도리도마뱀들은 그들과 거리를 둔 채 조심스럽게 헤엄치고 있었고 가끔 그들을 향해 달려들듯이 움직이다가 곧 멀어지곤 했다. 데스필드와 파킨슨 신부는 여전히 주위를 경계하며 초조하게 파웨이브호의 접근을 기다렸다.
파웨이브호의 선상에서는 율리아나 역시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그때 오스발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
“저, 공주님?”
“뭐죠, 발?”
“이상한 것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오스발은 고물 쪽의 바다를 가리켜보였고 율리아나는 오스발이 가리킨 것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율리아나는 재빨리 잭스 선장을 향해 외쳤 다.
“선장님! 고물 쪽에 이상한 모습이 보여요. 마치 바다가 쪼개지고 있는 것 같은데요?”
잭스 선장은 이 이상한 표현에 당황하여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그 표현이 매우 정확한 것이었다는 사실에 다시금 당황했다. 고물 쪽의 수평선에서 바다는 율리아나의 말대로 ‘좌우로 갈라지고 있었다. 잭스 선장은 망원경을 들어올렸다.
망원경의 초점을 맞추자 잭스 선장은 바다가 갈라지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가 굉장한 속도로 다가오고 있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 물체의 앞쪽에 서 갈라지는 파도가 좌우로 크게 일어나 마치 바다가 절단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잭스 선장은 일단 세상이 파멸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 했다. 하지만 곧이어 잭스 선장은 저 정도의 끔찍한 속도를 내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의문에 빠졌다.
“배? 아니, 배라니?”
망원경 안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확실히 배였다. 찢어질 듯 부푼 돛 아래로 쾌속을 내며 날아오고 있는 이물이 보였다. 잭스 선장은 지독한 쾌속 때문에 수면 위로 1피트쯤 떠오른 이물을 보며 질린 얼굴이 되었다.
“배입니다. 맙소사, 말도 안 되는 속도…………… 돌고래보다 빠릅니다!”
“뭐라고요?”
“정말입니다, 공주님. 저조차도 믿지 못하겠습니다만, 오오, 저런 속도라니. 아! 사람이 보입니다. 제기랄, 다행입니다. 저건 악마들의 배는 아닌가 봅니다. 하지만 저건…………? 검은 옷을 입고 있군요. 날려갈까 봐 잔뜩 웅크리고 있는데도………… 꽤 키가 큽니다.”
율리아나 공주는 현기증을 느꼈다. 그녀는 돛대를 끌어안았고 그 동안에도 잭스 선장은 계속 말했다.
“음? 스쿠너군요. 아무리 스쿠너라도 저렇게 빠를 수가………… 잠깐. 저 모습 왠지 눈에 익은데? 저건… “
잠시 후 잭스 선장은 망원경에서 눈을 떼며 비명을 질렀다.
“라이트버드호!”
라트랑의 뱃사람이었던 잭스 선장은 물론 라이트버드호를 알고 있었다. 잭스 선장은 허옇게 질린 얼굴로 율리아나 공주를 돌아보았고 율리아나는 몸서리를 치며 외쳤다.
“빨리 파킨슨 신부를 끌어올려요!”
“예?”
그리고 서 슈마허도 가세했다.
“잭스 선장님! 빨리 신부님, 신부님을 끌어올려야 합니다. 핸드건으로 저 배를 쏴야 합니다!”
“아, 알겠습니다. 이봐! 신부님에게 구명 부이를 던져! 빨리!”
라이트버드호라는 말에 사색이 되어 있던 선원들은 황급히 구명 부이에 밧줄을 연결했다. 그 동안에도 라이트버드호는 맹렬한 속도로 달려오고 있 었다.
키 드레이번은 허리를 굽힌 채 전방을 주시했다. 바람은 그의 코트 자락을 사정없이 흔들어대고 있었고 그래서 키의 모습은 마치 라이트버드호에 새 로 생긴 돛대처럼 보였다. 그의 등뒤에는 세실이 갑판에 주저앉아 진짜 돛대를 끌어안고 있었다.
“너무 빨라. 정신을 못 차리겠어!”
세실은 필사적으로 돛대에 매달린 채 고함 질렀다. 하지만 이물에 선 키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세실은 한번 더 고함 질렀다.
“너무 빠르다고!”
키는 그제서야 고개를 돌렸다.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세차게 흔들고 있었지만 세실은 그 머리카락들 사이로 넌더리를 내는 것이 분명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키는 그렇게 세실을 돌아보다가 잔뜩 억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다.”
세실은 환하게 웃었고 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시 앞쪽을 바라보았다. 세실은 그 등을 향해 히죽거렸다.
“늙으면 사소한 것에 예민해진단 말이야. 그런데 말이야…………”
“또 뭔가?”
“정말 카밀카르에 없으면 필마온 섬까지 갈 생각이었냐?”
“물론.”
“젠장. 늙은이 장사 치를 뻔했군. 공주에게 고맙다고 인사라도 해야겠는데.”
세실은 조금 더 중얼거리고 싶었지만 바람이 너무 세차서 더 이상 말을 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세실은 한 손으로 돛대를 꼭 끌어안은 채 다른 손으로 는 사납게 나풀거리는 머리카락을 내리눌렀다. 그때 이물에 서 있던 키가 복수의 칼자루를 쥐며 말했다.
“복수를 뽑겠다.”
“아, 다 왔나? 그래. 알았어.”
“속도가 갑자기 줄면 배가 심하게 흔들릴 거다. 주의해라.”
세실은 고개를 끄덕이며 돛대를 꽉 움켜잡았다. 그리고 키는 복수를 뽑아들었다.
라이트버드호를 밀어붙이던 마법의 바람이 갑자기 취소되었다. 물론 마법이 취소된 것일 뿐 공기의 흐름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하지만 라이트버드 호의 속도는 급격히 줄어들었고 그래서 바닷물은 거친 저항으로 라이트버드호를 뒤흔들었다. 라이트버드호는 심한 롤링과 피치를 동시에 일으키며 요동쳤다.
그리고 그 덕분에 초탄은 빗나갔다.
콰아.
앙!
폭음과 함께 라이트버드호의 좌현 쪽에서 물보라가 피어올랐다. 그렇잖아도 흔들리던 라이트버드호는 더 심한 롤링을 일으켰고 그래서 세실은 비명 을 내질렀다. 키 역시 바닷속으로 곤두박질치지 않기 위해선 갑판에 엎드리다시피 해야 했다. 그리고 그런 그들 위로 바닷물이 소낙비처럼 쏟아져내 렸다. 비어 있는 손으로 갑판을 짚으며 키는 경악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대포가 있다니!”
세실 역시 어이가 없다는 투로 외쳤다.
“자, 잠깐만! 천둥소리랬잖아!”
“제길. 포성은 아니었어.”
“웃기지 마, 내 말대로 그건 포성이었어!”
“내가 포성과 천둥도 구별 못하는 줄 아낫!”
뭐라 응수하려던 세실은 곧 입을 다물었다. 키 드레이번은 제국의 공적 제1호고, 어쨌든 그 말은 제국의 공적 제1호라고 불릴 수 있게 될 때까지 상 대를 거꾸러뜨려 온 노련한 뱃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키 드레이번이 포성과 천둥도 구별 못할 리는 없다.
“그럼 이건 뭔데! 왜 포환이 날아오고 있는 거야?”
세실의 말대로 파웨이브호는 분명한 포격을 가하고 있었다. 포성과 함께 두 번째로 날아든 포환은 라이트버드호의 우현 쪽 바다에서 물보라를 일으 켰고 그래서 세실과 키는 다시 물벼락을 맞아야 했다. 억수 같은 바닷물에 맹폭당하면서 키는 끔찍한 상상을 떠올렸다.
“설마, 그 신부가?”
“신부라니?”
“철탑 앞의 그…………”
“파, 파킨슨 신부! 핸드건이라고?”
“제기랄, 정말 못 쏘네! 하긴 그때 그 큰 대사 당신도 못 맞췄을 때 알아봤어야 했어.”
“이놈아, 그땐 일부러 철탑을 쏜 거라고 했잖냐!”
“그러면 지금은 일부러 바다를 맞추고 있는 거요?”
“…..젠장. 저 배가 저렇게 흔들리고 있잖아? 그리고 나 팔에 기운도 별로 없단 말이다. 솔직히 여기 올라왔을 땐 긴장이 풀려서 그대로 졸도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파킨슨 신부의 주장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파웨이브호 선상의 모든 사람들은 데스필드와 기운 넘치는 입씨름을 벌이고 있는 신부를 보며 저 신부가 과연 잊혀진 탑에 사흘 동안이나 갇혔고 맹렬한 수마를 했으며 조금 전에는 가까스로 갑판 위에 끌어올려진 그 사람이 맞는지 의심했 다. 아직까지 의심을 풀지 못한 케틀 같은 경우 자꾸만 파킨슨 신부의 엉덩이 쪽을 바라보기도 했다.) 머리에 수건을 얹어놓은 채 윈디어를 보살피던 데스필드는 귀 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아, 그래 그래. 자꾸 빗맞추다 보면 도망가기라도 하겠지, 뭐. 계속하쇼!”
“말 다했냐? 자식아, 맞추면 어쩔래?”
파킨슨 신부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신부는 왼팔을 신중하게 굽혀 눈높이로 들어올린 다음 그 위에 핸드건을 얹었다. 그리고 입 속으로는 짧게 기도문을 외웠다. ‘주님, 제발 맞게 해주십시오.’
핸드건이 세 번째로 불을 뿜자 라이트버드호의 돛대에서 강력한 폭발이 일어났다. 그리고 돛대는 곧 옆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돛대는 갑판을 강력하게 때리며 쓰러졌다.
파웨이브호에서 함성이 일어났다. 공주는 오스발의 어깨를 부여잡은 채 팔짝팔짝 뛰었고 그래서 서 슈마허는 더 요란하게 발광함으로써 모든 이의 시선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는 충성스러움을 발휘했다. 파킨슨 신부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데스필드를 돌아보았지만 윈디어의 몸을 닦아주고 있는 데 스필드를 발견하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주위의 함성에 고개를 돌린 데스필드는 라이트버드호를 보고는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
“뭐요, 맞추셨소? 호오. 대단하군요.”
파킨슨 신부는 곧 인상을 풀며 머쓱하게 말했다.
“하하, 뭘 그까짓 것을 가지고.”
“아니, 아니지. 저 넓은 바다 놔두고 실수로 돛대를 맞추다니, 정말 대단해.”
“……잭스 선장님. 미안하지만 포환과 큰 자루 좀 준비해 주시겠습니까?”
데스필드를 수장시켜 버리겠다고 발광하는 파킨슨 신부를 달래며 잭스 선장은 서 슈마허에게 질문을 던졌다.
“서 슈마허. 서 슈마허! 그만 좀 좋아하시고 저 좀 봅시다.”
“예? 아, 말씀하시오, 선장.”
“어떻게 할까요?”
서 슈마허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율리아나 공주가 먼저 끼여들었다.
“놔두고 가요!”
“놔두고 가다니오? 확인 사살을 해야 합니다. 아니, 그보다도 놈의 목에 걸린 현상금은……”
현상금이라는 말에 선원들의 눈빛이 확 바뀌었다. 그들 모두는 6,000만 데리우스라는, 돈주머니에 넣어 휘둘렀다가는 공성 무기가 되고 말 금액을 떠올리며 입을 쩍 벌렸다. 하지만 율리아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안 돼요. 놔두고 가요. 저기에는 마법사가 있어요. 조금 전의 그 얼토당토않은 속도 보셨지요? 접근했다가는 우리가 당할 수도 있어요.”
“마법사라면.. 그건 좀 귀찮군요.”
잭스 선장은 찌푸린 얼굴로 라이트버드호를 바라보았다. 돛대가 부러진 라이트버드호는 완전 침묵한 채 서서히 회전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돛대가 쓰러지면서 갑판의 여러 부분이 손상당한 것 같았다. 하지만 파킨슨 신부는 못마땅한 어조로 말했다.
“공주님. 그렇다고 해서 저 자를 이곳에 그냥 내버려두고 가자는 겁니까?”
“신부님.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만 방법이 없어요. 우리는 저 자에게서 복수를 빼앗을 수도 없는걸요. 게다가 세실은 마법사예요. 여기 있는 사람들만으로는 저 둘을 강제로 체포해 갈 방법이 있나요? 우리는 저기에 안전하게 접근할 방법도 없는 걸요. 그리고, 우리가 구조해 줘도 어차피 키 드레이번은 교수대 행이에요. 그러면 차라리 바다에서 죽게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파킨슨 신부는 끙 하는 소리를 내었지만 율리아나의 말에 반박할 수는 없었다. 잭스 선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완전히 침몰시키는 편이 좋을 텐데요. 솔직히 노스윈드를 저 지경까지 몰아넣고 침몰시키지 않았다고 말하면 온 바다의 뱃놈들이 저희들 을 씹어먹으려 들 겁니다. 신부님께서 한번 더 쏘시면……”
파킨슨 신부는 어두운 표정으로 잭스 선장을 바라보았고 잭스 선장은 자신이 신부에게 살인 청부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선장님. 이대로 놔두고 가면 우리 대신 키 드레이번을 처리해 줄 자들이 있으니까요.”
잭스 선장은 율리아나의 말에 주변 해역을 둘러보았다. 그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공주님. 대해적의 말로는 끔찍하겠군요. 그러면 출발하겠습니다.”
잭스 선장의 명령에 따라 선원들이 재빨리 흩어졌다. 선원들은 현상금에 대한 아쉬움을 완전히 떨쳐내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키 드레이번에 게 접근할 만한 용기를 끌어내지도 못했다. 게다가 마법사가 있다는 말은 그들의 남아 있던 용기마저도 깨끗이 증발시켰다. 그래서 그들은 현상금에 대한 미련을 털어내며 서둘러 돛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