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5권 – 19장 : 다섯 검의 주인 – 1화
추억마저 바래지는 아득한 저편에
잃어버린 내 꿈, 아직 있을까.
흩어진 별빛 어깨 위에 쌓일 때 나,
과거의 슬픔에 고개 떨구지.
하룻밤의 동행도 거부하는 달
구름 뒤로 사라져 나를 피하고
밤의 신음이 바람 되어 울부짖을 때마다
내 속 어딘가가 또 바스러진다.
어깨 뒤로 돌아본 밤하늘이 무서워
지친 발걸음은 앞으로만
그러나 어디에도 잉걸불 하나 없고
모든 것 위로 흐르는 내 눈물.
잊혀진 탑에서 미노 만까지.
아흔아홉 눈의 섬에서 하늘의 다리까지.
그러나 어디에도 잉걸불 하나 없고
모든 것 위로 흐르는 내 눈물.
“무슨 노래입니까?”
휘리는 고개를 돌렸다. 바탈리언 남작은 싱글거리며 그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휘리는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했다.
“무슨 용무지?”
바탈리언 남작은 갑자기 부동자세를 취하고는 경쾌하게 말했다.
“서 소팔라로부터의 보고입니다. 제국 기사단 북좌가 탄기 계곡을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서 소팔라가 사용한 표현을 약간 순화하여 전해 드리자면 그들은 신체의 중요 기관을 분실할 정도의 속도로 북쪽을 향해 달려갔다고 합니다.”
“그 말을 다시 환원시켜 보자면, 불알이 빠질 정도로 내뺐다는 건가?”
“바로 그렇습니다!”
바탈리언 남작은 입을 큼직하게 벌리며 웃었고 휘리는 희미한 미소로 화답해 준 다음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발 아래로 이레다벨의 전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레다벨의 시민들에게도 제국 기사단 북좌의 후퇴 소식은 전해졌을 것이다. 혼 족의 대대적 습격을 보고받은 북좌는 더 이상 이 따스한 남쪽에서 복수 놀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님을 깨달았다. 물론 그들에게 그것은 단순한 놀이는 아 니었겠지만, 14만의 혼족 전사가 제국을 공격한 것보다는 중요도가 덜한 일임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들은 후퇴할 때도 제국 기사다웠다. 그들을 추 격하던 림파이어 형제 기사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엄정한 기세를 유지하며 탄기 계곡을 벗어난 북좌는 계곡을 벗어나자마자 맹렬한 속도로 멀어져 갔다. 서 소팔라가 비속어를 사용한 것은 다벨의 영토에 발을 들여놓은 상대에게 별 피해도 주지 못한 채 돌려보내야 한다는 사실에 심술이 났기 때 문일 것이다.
바탈리언 남작은 아직까지도 싱글거리며 말했다.
“대천사들이 강림해서 우리를 도왔다 하더라도 이토록이나 놀랍지는 않았을 겁니다. 혼 족의 도움을 받다니, 그게 어디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이겠 습니까?”
휘리는 발코니 난간 바깥으로 늘어뜨린 두 발을 조금씩 흔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탈리언 남작은 그제야 휘리의 자세가 약간 조바심나는 자세임을 깨닫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실수하시면 위험합니다. 내려오시지요.”
“실수하면 위험하지.”
“예………… 예?”
“실수하면 정말 위험해. 만약 혼족이 움직이지 않았다면?”
“무슨 말씀입니까?”
휘리는 두 손바닥으로 난간을 치며 다리를 재빨리 끌어당겼다. 다음 순간 휘리는 난간 위에 서서 이레다벨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남작은 불안감이 더 증폭되는 것을 느꼈다. 휘리는 앞만 바라보며 말했다.
“말해 보라, 바탈리언 남작. 만약 혼 족이 이 시점에서 움직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우리는 북좌와 싸워야겠지요. 그렇지 않으면 항복하고…………… 자작님께서는 아마도 그들에게 목숨을 맡기거나 자살하셔야 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 게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았지. 실수가 벌어졌으니까.”
“행운입니다.”
“실수는 뭐고 행운은 뭐야? 둘 다 예정에 없는 일이지. 똑같아. 북좌의 움직임은 뭐지? 역시 예정에 없던 실수였어. 놈들이 움직일 거라고는 생각하 지 못했어. 빌어먹을, 빌어먹을!”
휘리는 갑자기 몸을 돌렸다.
바라보고 있던 바탈리언 남작이 아찔할 정도의 급한 움직임이었다. 휘리가 서 있는 곳은 메르데린궁의 2층 발코니였지만 1층의 천장이 워낙 높기 때문에 2층이라도 만만찮은 높이였다. 바탈리언 남작은 자신도 모르게 앞으로 걸어가려고 움찔했다. 그때 휘리가 자르듯 말했다.
“멈춰.”
“예?”
“내 연주의 시작도 누군가의 실수였고 내 연주의 중반부까지도 누군가의 실수에 의존하고 있어.”
“자작님?”
“가당찮은 일이야.”
그리고 휘리는 뒤로 누웠다.
물론, 허공이었다.
바탈리언 남작은 숨막히는 비명을 내지를 뿐 꼼짝하지 못했다. 뭔가 요란한 소리가 나며 저 멀리에서도 비명 같은 것이 들려왔다.
“노이에스 자작님!”
그리고 그 비명이 들렸을 때에서야 남작은 튕겨지듯 앞으로 뛰어나갔다. 서두르던 남작은 난간을 헛짚는 바람에 자신도 떨어질 뻔했다. 허리가 거의 난간 너머로 넘어간 다음에야 가까스로 난간을 움켜쥔 바탈리언 남작은 그 불안한 자세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휘리는 두 팔과 두 다리를 사방으로 던진 자세로 드러누워 있었다. 두 눈은 감겨 있었고 마치 잠든 것처럼 평화로워 보였다. 얼굴에 고통의 표정이 없는 것을 볼 때 그 추락의 시간 동안에도 휘리는 태연하게 하늘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고통을 느낄 사이도 없이 즉사했을 것이다……………
휘리는 눈을 떴다.
소스라치게 놀란 바탈리언 남작은 다시 떨어질 뻔했다. 발버둥을 치고 몇 번이나 허우적거린 다음에야 남작은 가까스로 균형을 회복했다.
“괘, 괜찮으십니까?”
휘리는 볼썽사납게 쓰러진 자세 그대로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
“저,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살아 있다는 것만 제외하면.”
휘리의 대답은 남작을 더욱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휘리는 남작의 당황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두 팔을 끌어당겨 팔베개를 베었다. 그러고는 하늘을 바라보며 낮게 한숨을 쉬었다.
이 사태를 설명하기 위해 모든 집중력을 끌어모은 남작은, 그러나 너무도 간단하게 대답을 찾아내었다. 휘리는 정원수로 심어져 있는 키 작은 관목 들 위에 떨어졌고 그 관목들이 완충 작용을 해주며 휘리의 몸을 받아낸 것이었다. 물론 끔찍하게 아프기는 할 테고 그래서 휘리의 몸은 조금씩 경련 을 일으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얼굴은 푸근한 미소를 지은 채 가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멀리서는 휘리의 추락을 본 사람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휘리는 심드렁하게까지 느껴지는 어조로 말했다.
“바탈리언 남작.”
“예, 예!”
“폴라리스를 치자.”
“폴라리스요?”
“그래. 놈들을 내버려두기로 한 것은 실수였다. 그 때문에 켈커와 기리우는 끌어오지도 못했어. 소팔라와 소사라만으로 재주를 부려야 했지. 나는 그것으로도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 하지만 가능한 것만으로는 부족해.”
휘리는 이제 왼쪽 무릎을 세우고는 그 위에 오른쪽 다리를 얹었다. 발코니에서 추락한 사람이라기보다는 하오의 오수를 즐기는 사람처럼 보였다.
“언제 어느 놈이 오든 다 죽일 수 있어야 해. 폴라리스, 북좌, 혼 족. 모두 내 스테이지에 허락한 적이 없는 것들이다. 특히 폴라리스, 그런 얼빠진 나 라 따위가 생기다니. 치워버려야겠어.”
물수리호는 고요했다. 그리고 고요한 배는 물수리호뿐이었다. 물수리호의 앞마스트 가로대에 걸터앉아 있던 벌쳐는 옆에 앉아 있는 벨로린에게 말 했다.
“저게 프린스의 칼을 막아내고 인슬레이버를 패배시킨 인간인가?”
“그래. 키 드레이번이야.”
벌쳐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항구를 죽 둘러보았다. 높은 곳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벌쳐는 항구의 많은 부분을 한눈에 볼 수 있었고 그래서 더욱 감동 했다. 벌쳐와 벨로린이 앉아 있는 물수리호는 마치 함성과 소란의 바다 한가운데 외로이 떠 있는 침묵의 섬 같았다. 항구의 골목골목에서 해적들은 벗어 든 윗도리나 술병, 혹은 칼붙이를 마구 흔들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눈으로 보이는 것 이상으로 인상적인 모습이었다. 폴라리스의 건국 이후 하리야는 더 이상 융화 정책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 했다. 이제 같은 폴라리스 국민이 있을 뿐 해적과 시민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 어제까지의 하리야의 판단이었다. 하지만 키 드레이번의 도착 소식이 다림 시내에 퍼진 순간 어제까지만 해도 점잖은 시민이던 그들은 순식간에 난폭한 노스윈드 해적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것은 욕구 불만에 기인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만일 그랬다면 해적들은 시민들에 대한 무차별 폭행 사건을 일으켜 이 아침을 피로 물들였을 것이 다. 하지만 그들은 단순히 환호하고 즐거워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토박이 다림 시민들은 눈이 휘둥그레진 채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두툼한 손으로 뱃가죽을 득득 긁던 두캉가 선장은 하리야 선장의 옆얼굴을 보고는 크게 웃었다.
“어쩌겠나, 하리야. 저놈들은 아직 ‘폴라리스 국민’보다는 ‘노스윈드 해적’으로서의 자신에 더 익숙하다구.”
하리야는 두캉가를 웃게 만들었던 그 기괴무쌍한 표정을 유지한 채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 문제는 놈들이 후자를 더 좋아한다는 거지. 하지만 그거야 어쩔 수 없는 거지, 뭐. 너무 신경 쓰지는 말게.”
하리야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모두 저주받은 인간들이군요. 어떻게 후자를 더 좋아할 수가 있지요? 살인과 방화, 약탈을 일삼았던 그때를? 포환에 직격당해 가루가 될 수도, 배 와 함께 바다 밑바닥에 가라앉아 버릴 수도, 교수대에 걸려 파리 휴게실 노릇을 하게 될지도 몰랐던 그때를?”
“그러게 말이야. 개탄스러운 노릇이지.”
잠시 후 두 선장은 크게 웃기 시작했다. 그들에게서 꽤 떨어진 물수리호의 돛대 위에 앉아 있었지만 벌쳐는 둘의 이야기를 다 들었고 그래서 어깨를 으쓱였다.
“바보는 부질없는 목숨값이 확인되는 순간에 환호를 지르지.”
벨로린은 조용히 응수했다.
“그 잘난 체하는 거리감을 보니, 그 말이 인간에게만 통한다고 생각하나 보군.”
벌쳐는 의아한 얼굴로 벨로린을 돌아보았다.
“벨로린. 너는 정말 하이마스터들이………… 그래야 된다고 생각하나?”
“내 선택을 알 텐데.”
“번복할 수 있어. 나는 이 모든 것이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아.”
“그러면 당장 저편으로 가시지 그래? 캐스팅보트에 대한 미련이 그렇게 큰가?”
“커.”
“지랄맞을 녀석 같으니. 뭘 원하는 거냐?”
“원하는 것? 이봐. 나는 시간의 패스파인더라고. 목적지는 없어. 패스가 있을 뿐이지.”
“……그 패스는?”
“영원한 자기 기만. 새매의 공작이 원하는 것이 달리 있겠나?”
벨로린은 의혹에 찬 눈으로 벌쳐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포성이 울려퍼졌다. 바다를 바라본 벨로린은 질풍호가 내항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았다.
질풍호의 이물에는 검은 옷차림의 남자가 서 있었다.
정박해 있던 배들에서 연달아 대포가 발사되었다. 명령 내려진 바도 없었고 그래서 제멋대로의 발사였지만 그렇기에 더욱 열광적이었다. 다림 시민 들을 놀라게 하거나 경계심을 품게 할까 봐 예포를 명령하지 않았던 하리야는 퍽이나 우울한 표정을 지었고 두캉가는 그런 하리야를 보며 배를 잡고 웃어대었다.
부두에는 해적들이 잔뜩 몰려선 채 폭풍 같은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가장 앞쪽에 있던 몇몇 해적들은 등뒤를 떠밀려 바다에 빠지기까지 했다. 풍덩, 풍덩!
하지만 그들은 물 위로 솟아오르자마자 팔을 허공으로 내던지며 환호했다.
“키 드레이번! 키 드레이번!”
키 드레이번은 아무런 대답도 보내지 않았지만 그의 존재 자체가 노스윈드 해적들에게는 충분한 대답이었다. 그는 단지 질풍호의 이물에 서 있을 뿐 이었고 실수로라도 미소 같은 것은 지어보일 것 같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해적들은 울부짖는 듯한 환호를 보내었다.
“키 드레이번! 키 드레이번!”
부두에서 약간 떨어진 언덕받이의 길에 한 마차가 정지해 있었다. 얇은 베일이 드리워진 창문에서는 다림 시의 저명 인사가 질풍호의 입항을 바라보 고 있었다.
“탕자의 귀환은 아니군요.”
폴라 대사는 조용히 단정 지었다.
“저건 누가 뭐라고 하든 왕의 귀환이군요. 저자들은 왜 저렇게 환호하는 걸까요?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키 드레이번이 무슨 대승이나 큰 업 적을 세우고 귀환한 것으로 착각하겠군요.”
“저 자들이 왜 저리도 환호하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대사님. 저들의 곁에 꽤 오랜 시간 같이 있었지만 사실 저들이 나라를 세울 거라는 것도 짐작할 수 없었습니다.”
“라스 각하. 그걸 짐작할 수 있었던 사람이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카밀카르의 법무대신 라스는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폴라 대사는 치맛자락을 펴며 고개를 끄덕였다.
“휘리 노이에스의 일 때문에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정말 대단한 일이지요. 어쨌든 나라 하나를 세워버린 일이니까요.”
“그러고 보니 그 노이에스 장군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제국 기사단 북좌의 서 킬드온이 그에게 칼 세례를 내려주고 싶어한다고 들었습니다만.”
“그게 참 공교롭다고 해야 할지. 제국 기사단 북좌는 회군했습니다.”
“회군이오? 허어. 노이에스 장군에게 그 정도의 정치적 능력도 있었습니까?”
“그의 정치적 능력은 아직 시험대에 오르진 않았습니다. 이번의 회군은 느닷없이 평지로 내려와버린 산폭풍 때문이지요. 아직 이름은 정해지지 않 았습니다만………… 대개의 경우 무미건조한 이름을 선호하는 역사가들은 이것을 제2차 혼족의 반란이라고 이름짓겠군요.”
“혼족의 반란이라고요?”
“아니, 그것은 정확한 명칭은 아니군요. 1차 반란이 끝난 적이 없으니. 그렇다면 이건 제2회전이라고 불러야 되나요? 어쨌든 타르타니어스 장군은 다시 한번 모든 부족의 동의를 얻어내었습니다. 그리고 북좌가 비워놓고 떠난 하르타틱 요새를 짓밟아버렸습니다.”
“저런, 맙소사!”
라스 대신은 말 그대로 소스라치게 놀랐다. 폴라 대사는 우울한 표정으로 치맛자락을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북좌는 복수 놀이 따위를 하고 있을 수 없게 된 거죠. 그들은 부리나케 돌아갔고 목하 최대의 위기를 맞았던 휘리 노이에스는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예?”
“재미있지 않습니까? 폴라리스만이 휘리 노이에스의 손길을 피한다고는 보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휘리 노이에스는 이제 정지 작업을 할 수 있는 시 간을 얻었습니다.”
라스 대신은 더듬거리며 간신히 말을 만들어내었다.
“폴라리스가 다음 목표?”
폴라 대사는 쑥스럽다는 듯이 씩 웃었다.
“이 나이에………… 아무래도 망령인가 보군요.”
“예?”
“폴라리스가 휘리의 다음 목표가 된다고 해도 별로 놀랄 일은 아니지요. 그리고 그 시점에서 이들의 영혼을 한 주먹에 움켜쥔 것 같은 사내가 저기 돌아오고 있군요. 나는 이곳이 터프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청년들의 대결장이 될지도 모른다는, 매우 불길하면서도 가슴 뛰게 만드는 상상을 지울 수가 없군요.”
폰스파궁의 메인홀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것을 확인한 율리아나 공주는 곧 멋대로 행동하기 시작했고 공주를 바라보던 오스발은 몹시 곤혹스러 워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저, 공주님. 그것은 카밀카르의 전통입니까?”
“그럴 수도 있죠!”
“예?”
“몇백 년쯤 지나면 전통이 되어 있을 수도 있잖아요? 그리고 전승학자들은 ‘몇백 년 전, 오래간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어느 공주가 처음으로 시행했 고 그 이후 카밀카르의 전통이 된 행위’라고 설명할 수도 있을 거예요. 그렇잖아요?”
“죄송합니다만 기둥을 껴안고 거기에 키스를 하는 것이 전통이 될지 극히 의심스럽습니다.”
“미래는 모르는 거예요. 아아, 폰스파궁! 내가 돌아왔어! 음, 음음음!”
율리아나 공주는 다시 폰스파궁의 메인홀 기둥에 열렬히 입을 맞추어대었다. 오스발은 겸연쩍은 얼굴로 서 슈마허를 쳐다보았지만 ‘이도 저도 모두 키 드레이번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듯한 얼굴로 궁륭 천장을 험악하게 쏘아보고 있는 서 슈마허를 발견하고는 이내 외면해 버렸다.
그러나 험악하게 바라보기엔 너무 아름다운 모습이다. 폰스파 궁의 메인홀은 본토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완벽한 육각 교차 궁륭으로 만들어져 있 었고 그 교차점마다 희고 가느다란 대리석 기둥들이 뻗어내려와 마치 숲속에 들어온 듯한 기분을 느끼게끔 했다. 게다가 천장 자체도 입체적이어서 가운데는 높고 홀의 좌우 부분은 낮았다. 이런 천장과 기둥은 열주나 평면 천장에 비해 산만하게 보이기 십상인데도 불구하고 편안함만을 느끼게 하 고 있었고, 따라서 건축가의 솜씨가 예사롭지 않음은 문외한의 눈에도 분명했다. 황금이나 보석으로 치장되어 있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돌의 미학 속 에서 오스발은 순박한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서 슈마허는 언짢은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종의 안내를 받아 메인홀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여기서 누가 기다릴 것으로 생 각했다. 하지만 홀 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그래서 서 슈마허는 홀 기둥에 키스하느라 정신없는 공주와 홀을 구경하느라 정신없는 오스발의 몫까지 세 배의 당혹을 느껴야 했다. 그때 그의 등뒤에서 율리아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기둥은 내 거죠.”
“예?”
공주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서 슈마허와 오스발은 고양이 같은 미소를 짓고 있는 율리아나를 발견했다. 율리아나는 조금 전까지 입을 맞추던 기둥 에 등을 기댄 채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건 카밀카르 왕족들의 비밀이지요. 이 기둥들 꽤 복잡하게 배열되어 있지요? 이 기둥들의 배치에는 몇 가지 비밀이 있어요. 그리고 왕족과 몇몇 사람들은 그 중 몇 개씩의 비밀을 알고 있고 모든 비밀을 다 아는 사람은 아바마마와 첫째 언니뿐이지요.”
율리아나는 자신이 기대어 있던 기둥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하지만 이 기둥의 비밀은 나도 알아요.”
오스발뿐만 아니라 서 슈마허도 호기심이 동한다는 얼굴로 율리아나 공주를 바라보았다. 율리아나는 옆으로 걸으며 오스발에게 손짓했다.
“발? 내가 조금 전에 했던 것처럼 여기에 기대어 봐요.”
오스발은 순순히 시키는 대로 섰다. 율리아나는 그 옆에서 말했다.
“뭐가 보이죠?”
“글쎄요? 기둥이 보이고, 반대편의 화병도 보이는군요.”
서 슈마허는 오스발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화병을 발견할 수 없었고 그래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오스발을 쳐다보았다. 율 리아나는 싱긋 웃었다.
“그 화병이 있는 테이블은 다른 곳에서는 기둥 때문에 잘 안 보여요. 하지만 거기 기대어 있으면 보이지요.”
오스발과 서 슈마허는 몇 번 자리를 바꿔가며 실험해 보고는 공주의 말이 사실임을 깨달았다. 반대편 벽의 햇살도 닿지 않는 어두운 위치에 있는 조 그마한 화병은 오로지 공주가 가르쳐준 기둥에서만 볼 수 있었다. 다시 기둥 앞에 서게 된 오스발은 율리아나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죄송합니다만 별로 대단한 비밀처럼 여겨지지는 않는군요. 저 화병이….”
오스발은 화병 뒤의 벽이 갑자기 뒤로 물러나는 것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벽은 마치 문처럼 뒤로 열렸고 그 뒤로부터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나왔다. 옷차림은 간소했고 긴 머리는 어깨 위에 마음대로 풀어놓고 있었다. 부드 러운 얼굴을 하고 있던 남자는 오스발과 눈이 마주치자 약간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남자가 기둥들 사이로 걸어오는 동안 오스발은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그냥 가만히 기다렸다.
잠시 후 서 슈마허와 율리아나도 남자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오스발은 서 슈마허의 얼굴이 약간 어두워지는 것을 보았으나 그에 대해 생각해 볼 겨 를은 없었다. 율리아나가 곧장 말했기 때문이다.
“아, 리로이?”
리로이라 불린 남자는 공주를 향해 조용히 목례했다. 그가 다시 고개를 들자 율리아나는 약간 이상한 방식으로 말했다.
“오래간만이에요.”
율리아나는 입을 크게 벌리며 정확하게 발음하려 애썼다. 그리고 리로이는 차분히 공주의 입을 바라보고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율리 아나는 다시 입을 큼직하게 벌리며 말했다.
“나를 마중하러 온 건가요?”
리로이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오스발은 리로이가 귀머거리이고 입술 모양을 읽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율리아나는 혼자말처럼 중얼거렸 다.
“이상하군. 왜 비밀방에서…나만?”
리로이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오스발과 서 슈마허를 한번씩 바라보았다. 누구에게든 잘 이해되는 몸짓이었고 그래서 서 슈마허는 어깨를 으쓱인 다 음 말했다.
“안내해 주시오. 리로이.”
리로이의 안내를 받아 비밀문에 들어선 오스발은 복잡한 돌통로를 발견했다. 건축에 별 조예가 없는 오스발이었지만 그들이 걷고 있는 것이 이중벽 사이로 뚫려 있는 통로라는 것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외벽 쪽을 향해 작은 창문들이 있어서 그다지 어둡지는 않은 비밀통로를 걸어가면서 오스발 은 귀머거리 청년이 폰스파궁의 심장부(어쨌든 비밀문에 비밀통로니까)에서 태연히 행동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았다. 시종이라기에는 청각 장애가 문제가 될 테고 왕족이라고 보기엔 서 슈마허의 태도가 별로 공손하지 못하다. 그때 그의 의문을 눈치 채기라도 한 것처럼 율리아나가 불쑥 말했다.
“리로이는 알프 언니의 애인이에요.”
서 슈마허는 기겁했고 오스발은 깜짝 놀라서 율리아나를 돌아보았다.
“애인이오?”
“그 표현이 가장 점잖겠네요. 정부라고 하기엔 좀 그렇고.”
“예?”
서 슈마허는 불쌍하게도 딸꾹질을 시작했다. 하지만 율리아나는 리로이의 등을 바라보며 태연하게 말했다.
“재기 넘치는 시인은 많지만 리로이의 역할에 어울리는 좋은 표현을 만들어낸 사람은 없군요. 저속하게 말할 수 있겠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아요. 그 냥 애인이라고 하죠. 그리고 저 정도면 완벽한 애인이잖아요? 카밀카르의 왕좌에 군침 흘릴 일은 없으니까요.”
오스발은 그 말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러니까, 첫째 공주님께서는 왕위를 이으실 건가 보지요?”
율리아나는 감탄했다는 듯이 웃었다.
“역시 빠르군요. 예, 그래서 카밀카르를 잡아먹으려고 덤빌 정도로 거창한 신랑감은 사절인 거죠. 리로이는 애인이면서 동시에 언니에게 들어오는 청혼에 대한 반대 카드로도 활용되는 거죠. 서 슈마허. 딸꾹질 그만해요. 별로 비밀 같지도 않은 공공연한 사실이잖아요.”
서 슈마허는 ‘그러나 외국인, 그것도 노예에게 자랑스럽게 떠벌릴 만한 일도 못 됩니다. 하물며 왕가의 일인 것을!’이라고 외치고 싶은 얼굴로 율리 아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딸꾹질 때문에 외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때 앞장서던 리로이가 통로 옆벽으로 다가섰다.
리로이가 다시 비밀문 같은 것을 열자 그들은 아담하지만 화려한 방 안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어떤 용도에 쓰이는 것인지 짐작하기 어려운 방이었 다. 무슨 창고처럼 보였지만 창고라고 보기엔 장식이 꽤 훌륭했다. 한쪽 벽을 가득 채운 책장과 푹신한 카펫을 이곳을 서재처럼 보이게 만들고 있었 지만 반대편에 놓인 침대와 옷장은 웬만한 침실이나 의상실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게끔 꾸며져 있었다. 게다가 침대 옆에는 화구들이 놓여 있 었고 방 중간에는 서류들이 가득 쌓인 테이블도 있었다.
그리고 테이블 뒤에는 어떤 여인이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서 슈마허는 당황해 버렸다. 지위상 먼저 인사말을 꺼내야 하는 것은 율리아나 공주였기에 그는 공주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리려 했다. 하지만 공주 는 리로이가 침대 옆에 놓인 조그마한 의자에 돌아가 앉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리로이는 침대 옆에 놓여 있는 캔버스 앞으로 돌아가서는 팔레트 와 붓을 들어올렸고 천장에 붙다시피 뚫려 있는 창문이 방에 있는 유일한 창문이었다)은 리로이의 화폭에 똑바로 햇빛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오스발 은 그 옆에 꽤 많은 수의 화폭이 쌓여 있음을 보았다.
그때 테이블의 여인이 입을 열었다.
“어서 오거라, 유리, 리로이가 있어도 괜찮겠지? 그는 이 시간이 아니면 그림을 그릴 수 없거든.”
“조명 때문인가 보구나. 초를 많이 준비해 주지, 그래?”
“촛불빛은 색깔을 변질시켜서 안 된다고 하더군.”
“그래도, 저렇게 햇빛이 들어오는 시간은 너무 짧을 텐데.”
“조금 기다리면 재미있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거야. 리로이가 캔버스을 들고 햇살을 따라다니는 모습.”
“너무했다. 창문 좀 크게 뚫어주지. 아니면 햇빛 좋은 작업실을 주든가.”
“창문은 안 되지. 이곳에 저 창문을 뚫는 것만으로도 이미 위험한걸. 그리고 다른 작업실은 리로이가 싫어해. 그는 암살을 두려워하거든.” 율리아나는 그런가 보다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얼굴을 굳히며 그녀의 언니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언니가 오스발을 훔쳐보 는 것을 보고는 더 큰 불안을 느꼈다. 그녀가 막 뭐라 말하려 할 때 그녀의 언니는 의자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어서들 와요. 서 슈마허, 그리고 오스발이지요? 나는 아르파데일 카밀카르 카밀카르의 왕위 계승자입니다.”
엘라샤 수도원은 카밀카르에서 가장 오래된 수도원이며 제국 전체에서도 가장 유서 깊은 수도원들 중에 하나이다. 그리고 그런 수도원이 흔히 그렇듯이 엘라샤 수도원 역시 많은 법황을 배출해 낸 법황의 산실이다. 하지만 공통점은 거기까지다. 엘라샤 수도원은 고풍스러운 규율을 엄격하게 준수 하고 있는, 성전 원리주의자들이 보면 찬사를 아끼지 않을 훌륭하고 장중한 기풍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본토와 단절된 지정학적인 위치가 이 수도원 이 1,700여 년 전의 순결한 모습을 보존하고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따라서 엘라샤 수도원의 마당을 오가던 젊은 수도사들이나 수련사들이 그들의 담장에 걸터앉아 입에서 연기를 뿜어내고 있는 괴인을 보았을 때 자 지러질 듯이 놀란 것도 크게 탓할 일은 못 된다.
“악마다! 요괴다!”
데스필드는 일곱 번째로 달아나는 수련사의 등을 보며 히죽 웃었다. 평소 단련이 잘 되어 있었는지 그는 비명을 지르면서도 날렵한 솜씨로 성호를 긋고 있었고 그 묘기를 감상하며 데스필드는 사심 없는 박수를 보내어주었다.
그때 본관의 정문으로부터 파킨슨 신부가 걸어나왔다. 데스필드는 손을 번쩍 들어올리며 외쳤다.
“요!”
“요? 이 망할 자식아, 그게 신부를 부르는 말이냐?”
“신부님 당신 말투부터 어떻게 해야 하지 않겠소? 어쨌든 그렇게 걸어나오는 것을 보니 회담은 잘 된 모양이군.”
“아아. 법황청은 우리에 대해 아무런 의도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의도?”
파킨슨 신부는 휘적휘적 걸어와서는 데스필드가 앉아 있던 낮은 담장 위에 뛰어올랐다. 그러곤 곧 욕설을 중얼거렸다. 담장 뒤편은 곧장 파도가 맹 렬하게 부서지는 해안 절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파킨슨 신부는 도로 담장 아래로 내려서며 으르릉거렸다.
“간 떨어질 뻔했네. 인마, 이런 데서 그렇게 태연하게 앉아 있었냐?”
“바닷바람이 시원한걸. 본인 생각이지만 이렇게 낮은 담장은 당신들에게 자살 유혹을 느끼게 할 것 같은데.”
“이곳은 유서 깊은 수도원이다. 그런 끔찍한 말은 입밖에도 내지 말거라.”
“그러면 의도 이야기나 합시다.”
파킨슨 신부는 낮은 담장에 등을 기댄 채 담 위에 두 팔을 얹으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말 그대로다. 아무 의도가 없다는 거야. 체포나 자발적 출두,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아.”
“흐음. 세례교인인 당신이 펠라론 게이트에 들어간 것에는 아무런 하자가 없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그 암살 저지까지 덮어주겠다는 건가?”
“그래. 그러니 우리는 법황청에 대해서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러면 당신 문제로 돌아갑시다. 펠라론, 펠라론 게이트, 잊혀진 탑, 그리고 카밀카르의 엘라샤 수도원까지 온 지금, 신부님 당신 문제는 해결된 거 요?”
파킨슨 신부는 잠시 주저했다. 데스필드는 다시 파이프를 채워놓은 다음 바닷바람을 피해 조심스럽게 불을 붙였다. 그가 연기 한 모금을 마셨을 때 파킨슨 신부는 나직하게 말했다.
“모르겠다.”
데스필드는 바람에 갈가리 찢어지는 연기 사이로 신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파킨슨 신부는 여전히 하늘을 보며 말했다.
“후회라는 이름의 그리움은 뒤쪽뿐만 아니라 앞쪽으로도 작용하는 것 같다.”
“미래를 후회한다는 거요?”
“후회했다는 거다.”
멀리서 기러기의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파도 소리는 현실에서, 그리고 그들의 상념 속에서 울리고 있었다. 파킨슨 신부는 길고 옅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하늘빛이 너무 곱지 않느냐?”
데스필드는 히죽 웃었다.
“오늘 아침에 새로 칠해 놓은 것 같소.”
“그래. 저 하늘 아래 어디쯤엔 테리얼레이드도 있겠지. 그곳은 지금 어떨까.”
“살인, 방화, 약탈, 강간, 폭력, 사기가 두서없이 행해지고 있겠지.”
“충분하구나.”
“뭘 하기에 충분하다는 거요?”
파킨슨 신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몸을 일으키며 등뒤를 툭툭 털었다.
“가자, 데스필드.”
“어디로?”
“부두로, 이 나라를 떠나는 배를 알아봐야겠다. 너도 이 섬 안에서 패신저를 찾아내긴 힘들겠지?”
데스필드는 두 다리를 약간 들어올렸다가 반동을 주며 앞으로 뛰었다. 경쾌하게 수도원 마당에 내려선 데스필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천만에. 벌써 하나 찾았소. 부두까지의 길은 누구에게 찾아달라고 하실 생각이오?”
비밀방 안에는 다기와 물주전자도 준비되어 있었다. 아르파데일 공주는 손수 차를 만들기 시작했고 율리아나는 그녀를 도왔다. 그래서 불쌍한 서 슈 마허는 ‘왕국 카밀카르의 가장 고귀한 두 여성에게 차를 끓이게 해도 되는 건가’ 하는 의심에 빠져 혼수 상태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리로이와 오스발 은 각자의 일 – 그림 그리기와 그 모습 구경하기를 태연히 수행했다. 아르파데일 공주는 다기에 차를 채워넣으며 율리아나 공주에게 말했다.
“신부님과 패스파인더는 오지 않았니?”
“응. 교회의 일로 엘라샤 수도원으로 가셨어. 내가 그러라고 했는데, 그 분들도 와야 되는 거야?”
“오시면 좋았겠지. 하지만 상관없어.”
잠시 후 테이블에는 다향이 은은하게 풍기는 찻잔들이 놓여졌다. 아르파데일 공주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 리로이 옆에 찻잔 하나를 내려놓은 다음에 야 테이블로 돌아왔다. 하지만 회담은 속개되지 못했는데, 화폭을 노려보던 리로이가 찻잔 속에 붓을 집어넣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 광경을 본 율리 아나가 잠시 당황한 비명을 질렀지만, 리로이는 듣지 못했고 아르파데일 공주는 어깨를 으쓱였다.
“리로이가 저걸 마시기 전에 치워야겠구나.”
아르파데일이 두 번째 찻잔을 가져다놓고 리로이의 어깨를 두드려 주의를 준 다음에야 정상적인 회담이 시작되었다.
“먼저, 초대에 응해 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라고 말해야겠지만, 이 자리가 딱딱해지는 것은 원하지 않으니까 그건 넘어가지요. 인원도 얼마 안 되고 율리아나와서 슈마허는 가족 같은 사람이니까.”
율리아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지만 서 슈마허는 감동의 눈물을 흘릴 듯한 얼굴이 되었다. 아르파데일 공주는 오스발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리고, 당신은 유리의 노예지요? 당신에게 예의를 지키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점잖은 사람들의 사회에서 경원시당할 일은 없겠지요. 그러니 좀 편 하게 가도 되겠지요?”
“당연한 말씀입니다.”
“이곳은 원래 좀 덜 존경받는 카밀카르의 국왕이 만들어놓은 피신처예요. 그 덜 존경받는 국왕이 누군지는 말하지 않겠지만 암살당할까 봐 이런 방 따위를 만든 것을 보면 시덥잖은 작자라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겠지요.”
서 슈마허는 헛바람을 삼켰지만 아르파데일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이 방을 알게 되고 나서 지금처럼 꾸며놓았지요. 원래는 사람들에게 진력이 나면 피하기 위한 장소로 계획했지만 요즘은 거의 리로이의 아뜨 리에로 사용되는군요. 한 가지는 아주 좋아요. 이곳에서는 엿듣는 귀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
아무 말도 듣지 못한 채 그림을 그리고 있는 리로이 때문에 아르파데일 공주의 말은 매우 복잡한 뉘앙스를 가지게 되었고, 그래서 율리아나와서 슈 마허와 오스발 모두가 한번씩 리로이의 등을 쳐다보았다. 그 모습에 미소 짓던 아르파데일은 찻잔을 들어올려 한 모금 마셨다.
“편하게 이야기하자는 것과 엿듣는 것을 피하자는 두 가지 이유로 여러분들을 여기로 모셨어요. 그럼 이제 내 목적을 말하지요. 당신들은 현장 증인 입니다.”
율리아나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현장 증인?”
“대륙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한. 물론 많은 경로를 통해 이야기를 전해 듣고 있지만 나는 여러분들의 시각에도 관심이 있군요. 고백하지만 특 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너의 시각이야, 유리. 다른 사람보다 유리한 지위도 그렇지만 그것보다는 너의 두뇌와 훌륭한 관찰력을 신뢰하니까.”
“미안해서 어쩌지? 내가 한 일이라고는 도망다닌 일뿐이었는데.”
“글쎄. 내 생각에 너는 홍수에 떠내려가면서도 네 곁을 떠다니는 표류물들의 목록을 작성할 수 있는 눈과 머리를 가지고 있어.”
“홍수 나면 연락해 줘. 언니의 추측을 확인해 줄게.”
율리아나는 부드럽게 웃었고 아르파데일 공주는 서 슈마허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자랑스러운 서 슈마허.”
“예!”
“……기립할 필요는 없으니 자리에 앉아요. 나는 당신에게서 완벽하게 카밀카르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만 사태를 설명해 줄 시각을 기대해요. 유리 를 데려온 것으로 당신의 카밀카르에 대한 충성과 헌신은 이미 입증되었지요.”
“자격을 가지고 있는지 의심스럽지만, 저는 기사입니다. 따라서 거짓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겸양할 필요는 없어요. 당신이 카밀궁에서 반란군을 맞아 어떤 활약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잘 알아요. 에름 후작님과 룸에게 많은 감사를 들었을 것 으로 짐작하지만, 나 역시 그대에게 감사하고 싶군요. 고마워요, 서 슈마허.”
서 슈마허는 갑자기 찻잔을 들어올려 한 입에 다 마셔버렸다. 그가 눈물이 글썽이는 눈을 감추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은 모두가 짐작할 수 있었지만 아르파데일과 율리아나, 그리고 오스발은 서 슈마허의 입의 안위를 몹시 걱정해야 했다. 하지만 서 슈마허는 강철 같은 의지로 뜨겁다는 내색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 아르파데일은 약간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 어쨌든 유리의 넓고 정확한 시각과 서 슈마허의 목적성 뚜렷한 시각이 더해지면 나는 대륙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카밀카르에 미칠 영향에 대해 정확하게 알 수 있겠지요. 그리고, 오스발.”
“예, 공주님.”
“솔직하게 말하지요. 당신에게는 별로 기대하는 것이 없어요.”
오스발은 부드럽게 웃었고 반응은 오히려 율리아나에게서 나타났다. 율리아나는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그도 눈이 있다고, 언니. 섣불리 단정짓는 거 아냐?”
아르파데일은 잠시 재미있다는 듯한 눈으로 율리아나를 바라보았고, 그러자 율리아나는 곧 턱을 내리며 테이블보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 스발은 그 모습을 보며 마치 꾸중받을 짓을 한 철없는 딸과 조용히 미소 짓는 어려운 어머니 같다고 생각했다. 그의 짐작을 확인시켜 주듯 아르파데 일 공주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리. 나도 괜히 그의 기분을 우울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기만하고 싶지는 않군. 그리고 그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도 않고, 나는 그가 말 할 수 있는 것만 말하면 된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말했을 뿐이야.”
“그래, 알았어.”
“들었지요, 오스발? 나는 당신에게 적극적으로 묻지는 않을 거예요. 하지만 생각나는 것이 있으면 뭐든 자유롭게 말해도 좋아요.”
“모르겠습니다만.”
“예?”
오스발은 찻잔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다.
“글쎄요. 건방진 말로 들리겠습니다만 저는 좀 이상하다고 생각되는군요. 아르파데일 공주님. 저야 보잘것없는 노예이지만 율리아나 공주님이나 서 슈마허께는…………… 질문해도 되는지부터 물어보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오스발의 조용한 말은 일종의 폭탄이 되어 티파티 자리를 강습했다. 율리아나는 눈을 커다랗게 떴고 서 슈마허는 아예 물고기의 흉내를 내기 시작 했다. 하지만 지금껏 차분함을 잃지 않았던 아르파데일 공주는 오스발의 말에도 그 차분함을 흐트러뜨리지는 않았다.
“미안하군요, 오스발. 당신은 지금 지배자의 나쁜 버릇을 꼬집는 건가요? 누구에게도 양해를 구하지 않는 것? 그렇군요. 먼저 질문을 받아줄 것인지 를 묻고 나서 질문을 시작해야겠지요.”
“그냥………… 그런 생각이 듭니다. 죄송합니다.”
“아니, 괜찮아요. 당신 말이 옳으니까. 서 슈마허, 유리? 부탁인데 내 질문에 대답해 주겠어요? 내 목적은 이미 설명된 것 같으니까 말하지 않겠어 요.”
“물론입니다!”라고 외친 것은 서 슈마허였고, “얼마든지.”라고 말한 것은 율리아나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전부 오스발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래서 그 대답하는 모습은 퍽 이상하게 보였다. 아르파데일 공주는 다시 웃으며 오스발을 쳐다보았다.
“당신은 어떤가요, 오스발?”
“저는 율리아나 공주님의 노예입니다.”
“그건 모호한 대답이군요. 하지만 더 묻지는 않겠어요. 아까도 말했듯이 당신에겐 별로 기대하는 것이 없거니와 당신이 뭔가 하고 싶지 않은 말을 흉중에 가지고 있다는 기분이 드니까.”
오스발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