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5권 – 19장 : 다섯 검의 주인 – 2화
식스 일항사는 어두운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한 가지뿐이었다.
“죄송합니다, 선장님들. 하지만 승선은 허락할 수 없습니다.”
돌탄 선장은 킬리 선장을 돌아보았고 킬리 선장은 트로포스 선장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계속 이어지던 시선은 두캉가 선장이 하리야 선장을 돌아보 았을 때 끝났다. 하리야는 다시 돌탄 선장을 돌아봐줄까 하다가 꾹 참으며 뱃전 위의 식스에게 말했다.
“자네 분명히 우리들이 온 거라고 말씀드렸지?”
“그렇습니다.”
“그리고 키 선장님이 거부했다고?”
“예.”
누가 본다 해도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모습일 것이다. 남해의 모든 뱃사람들을 진감케 만들던 노스윈드 함대의 여섯 선장들이 문전박대를 당한 채 서로를 애처롭게 바라보는 광경은. 오닉스 선장은 마스크 뒤에서 사나운 숨소리를 내고 있었고 두캉가 선장은 말뚝 위에 걸터앉아 이마를 닦았다. 킬 리 선장은 주저하다가 말을 꺼냈다.
“저, 일항사. 그럼 우리가 여기 무릎꿇고 빌어야 되나? 제발 올라가게 해주세요, 라고?”
“그건 선장님들의 자유입니다만 저는 그런 모습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일 만한 모습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체키랄. 왜 안 퇸타는 컨치 알 수도 없나?”
“예. 이유는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리야 선장님께 특별히 전하는 말씀이 있으셨을 뿐입니다.”
하리야는 그게 무슨 말일지 짐작했지만 질문은 꺼내었다.
“뭔가?”
“열쇠를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선장들의 얼굴이 하리야를 향해 돌아갔고 두캉가 선장이 대표로 말했다.
“저게 무슨 말이야?”
하리야는 씁쓸한 얼굴로 설명했다.
“자유호의 타륜에 쇠사슬을 묶고 열쇠를 채워두었습니다. 벨로린이 그렇게 해두라고 조언하더군요.”
킬리 선장은 놀라서 외쳤다.
“벨로린이? 왜지요?”
“키 선장님은 자유호를 가지러 돌아온 것뿐이니 그와 잠시라도 이야기하고 싶으면 자유호를 묶어두라고 하더군.”
선장들은 놀란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자유호의 뱃전 위에서 식스는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한마디가 더 있습니다. 혹시나 열쇠를 돌려주지 않겠다거나 미적거리는 기색이 보이면 이렇게 말하라고 하시더군요.”
“무슨 말이지?”
“건국이다 뭐다로 바쁜 나머지 잊어버렸을까 봐 말하는데, 과거에 내가 원하는 것을 어떻게 얻었는지를 상기해 보라, 고 하시더군요.”
하리야는 신음을 흘렸다. 그 대답은 단순하다. 키 드레이번은 해적이고,
죽이고 가졌다.
역시나 그 대답을 쉽게 떠올린 다른 선장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마스크 때문에 얼굴빛이 보이진 않았지만 오닉스 선장은 도끼를 불끈 쥐는 것으로 다른 선장들의 경악에 동참했다. 하리야는 그 열쇠가 자신의 목에 걸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고, 그래서 다른 선장들보다 훨 씬 심한 심적 동요를 느껴야 했다. 하지만 하리야가 입을 열었을 때 그 목소리는 차분했다.
“일항사. 이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나.”
“키 선장님의 명령입니다. 돌아가주십시오.”
하리야는 잠시 고민하다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다른 선장들에게 말했다.
“일단 물수리호로 갑시다. 이 사태에 대해서 이야기 좀 해야겠습니다.”
하리야는 거기만큼 사람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곳도 없다는 점에서 물수리호를 거론했다. 하지만 그가 물수리호를 택한 가장 큰 이유는 알버트 선 장도 참석시키고 싶다는 바람 때문일 것이다. 다른 선장들도 무언 속에 하리야의 바람을 이해했고, 그래서 조용히 보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물수리호의 고요한 선원들은 선장들의 승선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래서 잠시 후 물수리호의 갑판에서는 키 드레이번을 제외한 노스윈드의 일곱 선 장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하지만 오닉스 나이트는 갑판 위에 올라가자마자 뱃전으로 걸어가 자유호를 매섭게 노려보기 시작했고 알버 트 선장은 언제나처럼 고요한 시체였을 뿐이다. 물수리호의 일항사가 그들에게 다가와 랜턴을 내려놓고는 감사를 표시하는 킬리 선장에게 아무런 대 답도 하지 않은 채 떠나버린 다음, 다섯 선장들은 서로에게 나는 절대로 먼저 말하지 않겠다고 외치는 듯한 표정들을 보내주기 시작했다.
한숨을 내쉰 하리야가 먼저 말했다.
“그럼, 여러분.”
“전쟁은 안 돼!”
“……두캉가 선장님. 나는 키 선장님과 전쟁하고픈 생각은 없고 다른 선장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킬리와 돌탄, 그리고 트로포스 선장들은 모두 미소를 지음으로써 하리야의 말에 동의한다는 표시를 해보였다. 한결 부드러워진 분위기 속에서 하리 야는 트로포스를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자네에게 먼저 물어봐야 할 것 같군, 트로포스 선장. 잊혀진 탑 근처에서 표류하던 키 선장님을 구했다고 했지? 그런데 키 선장님은 우리 에게 돌아온 것이 아닌가?”
트로포스 선장은 안대를 만지작거렸다.
“몰라. 하리야 선장. 키 선장님은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어. 나는 그가 무의미한 추적을 끝낸 거라고 생각해 버렸고 그래서 물어볼 필요도 느 끼지 못했어. 사실, 바빴거든. 빌어먹을. 자네가 뭐라 할지 모르겠지만 목도리도마뱀을 만들어내신 건 주님의 실수인 것 같아. 그놈들을 붙잡기 위해, 그리고 그놈들이 질풍호의 밑창에 구멍을 내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내가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지는 말로 표현도 못해. 그런데, 벨로린이 뭐라고 했다고?”
“자네가 키 드레이번과 함께 입항한다는 전갈을 보냈을 때 나는 벨로린과 함께 있었어. 나는 그녀에게 키 선장님이 드디어 우리에게 돌아온다고 외 쳤지. 그런데 벨로린은 고개를 가로젓고는 그는 단지 배를 가지러 온 것이며, 따라서 자유호를 묶어두는 편이 좋을 거라고 하더군.”
킬리 선장은 입술 주위를 실룩거리다가 말했다.
“배를 가지러 왔다………… 잠깐. 표류하고 계셨다고 했지요? 그러면 배가 없어져서 자유호를 가지러 돌아온 거란 말인가?”
“아무래도 그렇케 퐈야켔쿤. 첸창.”
“보내드려야 할까? 뭐, 어쨌든 그는 그 날 아침 함대에서 탈퇴하겠다고 했잖아.”
“모르겠습니다. 두캉가 선장. 그런데 그 노스윈드 함대라는 것, 사실 이제는 없어진 거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웃기지 말게, 하리야 선장. 그러면 자네는 왜 이 배로 올라온 건가?”
“예?”
“아버지에게 버림받자 애타게 서로 보듬어주고 싶어하는 형제의 심정인 것 아니냐고 묻는 거야.”
두캉가는 엄지손가락으로 그의 등뒤에 못 박혀 있는 알버트 선장을 가리켜보였다. 그리고 하리야는 씁쓸하게 웃었다.
“할말 없군요. 예. 가장 꺼림칙한 형제까지도 끌어들여서 아버지가 왜 저러시나 상의해 보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바라미나 바스톨 장군을 부르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일 테고?”
“예. 그러고 보니 바스톨 장군께서 인상적인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선장들은 긴장한 표정으로 하리야를 돌아보았고 뱃전에 서 있던 오닉스 선장도 몸을 돌려 하리야를 쳐다보았다. 하리야는 두 손을 모아 집게손가락 들을 서로 부딪히며 말했다.
“다벨의 공격이 있을 것 같다고 하시더군요.”
“녀석들이 또 온다고?”
“예. 제국 기사단 북좌의 침입은 현재 다벨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여실히 드러내어 보여줬고 휘리는 그것을 못 알아차릴 사람은 아니지요.”
트로포스 선장은 북쪽을 흘끔 쳐다보며 말했다.
“그가 안고 있는 그 예쁘장한 문제라는 것이 뭔데?”
“정복지의 확장은 더 많은 수비군을 필요로 하게 된다는 것. 아주 당연한 문제야. 8군단의 용맹이야 이젠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8군단이라고 해서 무적일 수는 없고 ᆞ영예롭게도 그건 우리가 증명했네 설령 무적에 가깝다 하더라도 다벨의 적대 세력은 이제 8군단이 없는 곳에서 공격해 들어 갈 수 있지. 유명한 격언이 있잖나. 공격은 칼 끝으로 하더라도 방어는 전신 갑옷으로 해야 된다는 말. 8군단은 훌륭한 칼이지만, 칼 끝으로 칼 끝을 막을 수야 없는 법이지.”
“흐음. 그래서…”
“휘리는 수비 범위를 줄여야 될 필요성을 느끼게 된 거지. 그 동안은 뭐 너희쯤이야 내버려둬도 어떻겠냐는 심정에서 우릴 내버려뒀지만, 제국 기사 단 북좌라는 현실적인 위험이 등장하자 정신이 번쩍 든 거지. 그가 수비 범위를 줄이고 싶다면 첫 번째 대상은 당연히 우리야. 우리는 라트랑이나 레 모, 록소나 등과는 다르지. 다벨을 향해 으르릉거리고 있는 자들은 모두 이곳에 있다고.”
“이런, 젠장. 나는 사실 서 킬드온에게 응원을 보내고 있었단 말이야. 다벨을 두드려줘서 고맙다고. 그런데 그게 아니었구먼?”
두캉가 선장은 낙담한 듯이 말했고 하리야는 미소를 지었다.
“저도 응원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다벨에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은 채 다만 경각심만 일깨워주고 돌아갔다는 점이 문제군요. 어쨌든 그래서 말입니다만.”
“뭐?”
“모두들 봤겠지만 역시 노스윈드는 키 선장님의 것입니다. 오늘 아침의 그 환영 보셨지요?”
“이봐, 신부, 다벨을 맞아 싸우려면 키 선장님이 있어야 된다는 말을 하는 건가?”
“그래, 트로포스 선장. 키 선장님이 다시 떠나버린다면 놈들은 풀이 죽을 거야. 아니, 솔직하게 말하겠어. 나부터 풀이 죽을 거야.”
선장들은 하리야의 말에 동감하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킬리 선장이 약간 주저하듯 말했다.
“하지만 열쇠를 돌려주지 않으면 키 선장님이 풀이 죽을 텐데…………?”
선장들은 이번엔 질린 얼굴로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중 키 드레이번을 실망시키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서로를 멋쩍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하리야는 팔짱을 낀 채 알버트 선장을 바라보았다.
랜턴은 바닥에 놓여 있었고 그래서 알버트 선장은 아래쪽으로부터 빛을 받아 끔찍한 모습으로 떠올라 있었다. 노회한 선장의 눈으로도 똑바로 바라 보기 힘든 모습이었지만 하리야는 신앙인의 눈으로, 그리고 동료의 눈으로 흔들림없이 알버트 선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찌하면 좋을까요, 알버트 선장.
돌탄 선장이 먼저 하리야의 시선을 알아차렸다. 돌탄은 메인 마스트를 돌아보았고 그러자 킬리도 그렇게 했다. 이윽고 트로포스와 두캉가 선장이, 마지막으로 약간 떨어져 있던 오닉스 선장이 알버트 선장을 바라보았다.
세찬 바람이 불었다.
랜턴이 갑자기 꺼졌다. 어둠은 퍼득이는 나래 되어 주위를 휘몰아쳤지만 고개 돌려 랜턴을 돌아보는 선장은 없었다. 그들은 더욱 어두운 음영이 된 알버트 선장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누군가가 불을 켰고, 하리야 선장은 낮게 말했다.
“어쨌든 부탁해 봅시다.”
율리아나 공주는 침대 위를 청소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아르파데일 공주는 몸을 돌리지 않은 채 계속해서 뭔가를 쓰며 말했다.
“유리. 정신 사나워. 그렇게 침대 위를 굴러다닐 거라면 네 방으로 가거라.”
“나 쫓아내고 리로이 부르려고?”
아르파데일 공주는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내려놓고는 몸을 돌렸다.
율리아나는 침대에 대각선으로 누운 채 끌어안은 베개로 상반신과 얼굴을 다 가리고 있었고 그 너머로 눈만 내밀어 언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르파 데일 공주는 의자를 침대 쪽으로 돌려놓은 다음 본격적으로 율리아나를 바라보았고 잠시 후 베개는 더 올라가 세기의 신부의 얼굴을 완전히 가렸다. 그래서 아르파데일은 베개를 향해 말해야 했다.
“돌아와줘서 기쁘구나.”
“뭐 쓰고 있었어?”
“아까 들었던 것들 간단히 정리해 두는 거야.”
“별로 대단한 거 없었지?”
“글쎄. 내가 원했던 것은 정보는 아냐. 숫자들이나 그에 대한 해석 같은 것들은 폴라 대사 같은 분들이 충분히 마련해 준단다. 그 분 만나봤지? 그래. 나는 정보보다는 인상을 원했고, 그 점에서는 충분히 소득이 있었어.”
“어떤 인상을 받았어?”
“재미있는 시대라는 인상을 받았어. 어쨌든 망국도 아닌 엄연히 존립하고 있는 나라의 공주가 그토록이나 도망쳐다녀야 했다는 것은 이 시대가 예 사 시대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지.”
율리아나는 머리에 뭔가가 닿는 느낌을 받으며 흠칫했다. 어느새 침대로 옮겨앉은 아르파데일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율리아나는 베개 를 도로 내렸고 그녀를 굽어보고 있는 언니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아르파데일은 율리아나의 귀밑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미안해. 그렇게 고생하게 한 것.”
“아냐, 뭐. 재미있었어. 언니나 둘째 언니라면 죽을 때까지도 그런 모험은 못해 볼걸? 그리고 언니 책임도 아닌걸. 그 미친 남자 때문이지.”
“키 드레이번 말이구나. 그리고 또 한 사람, 휘리 노이에스.”
“응?”
“아. 나는 그 둘을 이 시대가 낳은 기린아로 생각해야 되는 건지, 아니면 이 시대의 암이라고 생각해야 되는 건지를 놓고 고민하고 있는 중이야.”
“휘리는 몰라도 키는 확실히 가르쳐줄 수 있어. 암이 아냐. 매독이지.”
아르파데일은 환하게 웃었고 율리아나의 베개는 다시 위로 올라갔다. 아르파데일은 베개 아래에 있을 빨갛게 변한 동생의 얼굴을 생각하며 속삭였 다.
“그 남자를 정말 싫어하는구나.”
“그렇게 도망쳐 다녀야 했는데 이뻐할 수는 없잖아. 미운 정? 그 남자에게는 통하지 않는 말이야.”
“복수할까?”
“응?”
아르파데일은 율리아나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베개를 끌어내렸다. 그러고는 엉망이 된 율리아나의 앞머리를 조심스럽게 고르며 말했다.
“어쨌든 필요한 일이야. 키 드레이번은 현재 폴라리스에 있고 우리 국민들은 네가 당한 일에 대한 복수를 원해. 카밀카르의 자존심 문제거든. 네 문 제가 아니라도 어차피 키는 제국의 공적이고 우리들의 적이야. 일종의 시금석이라고 할까…………”
“시금석?”
“뱃사람들은 누가 더 키를 증오하는지를 놓고 경쟁한단다. 왜 그런지 짐작하겠지? 키 드레이번은 무차별로 공격했고, 따라서 키에게 가장 많은 원한 을 가졌다는 말은 거꾸로 바다에서의 세력이 가장 강하다는 증거도 되지. 불길 가까이 머리를 밀어넣고는 머릿가죽 그을린 자국을 가지고 누가 더 용 감하냐를 경쟁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되지만.”
율리아나는 까르륵 웃었다. 아르파데일은 뒹굴고 다니느라 풀어헤쳐진 율리아나의 잠옷을 정돈해 주며 말을 이었다.
“우리 카밀카르가 그 작은 신생국을 공격하는 것은 어쩐지 몰염치한 일이라고 생각되지만, 거꾸로 생각해 보면 그들은 노스윈드였어. 카밀카르로서 는 용서할 수 없는 상대지. 그들이 배를 타고 다닐 때는 쫓아다닐 수 없었지만 그들이 폴라리스라는 닻을 내린 이상, 미뤄두었던 공격을 시작해도 무 방하겠지. 어떠니?”
율리아나는 아르파데일을 돕기 위해 베개를 머리 뒤로 옮기며 말했다.
“글쎄. 나는 전쟁에 반대야. 내가 고생했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한다는 건 어떻게 봐도 웃기는 일이야.”
“그래서 길게 설명하지 않았니. 꼭 너만의 문제는 아니야.”
“그래. 공주라는 것이 그렇지. 혼자의 문제일 수 없지. 뭘 원하지?”
아르파데일은 조금 후에야 율리아나의 목소리가 이상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율리아나의 얼굴을 돌아본 아르파데일은 그 얼굴에서 날카로운 두 눈 을 발견했다.
“아바마마는 어디로 간 거지? 언니가 공공연하게 왕위 계승자라고 말하게 된 건 또 뭐야. 내가 본토에 있는 동안 이곳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난 거 “지?”
아르파데일은 두 손을 모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걸 물어보기 위해 내 침실에서 함께 자자고 조른 거였니?”
“리로이에겐 내일 사과하지.”
“그런 말 하지 마………… 리로이를 매일 내 침실로 끌어들이는 것은 아냐.”
“알았어. 아바마마는 어떻게 된 거지?”
“아버지는 잘 계시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럼 왜 막내딸이 돌아왔는데 얼굴 한번 안 비치시는 거지? 언니가 유폐시켰어?”
“유리, 어떻게 그런 말을!”
율리아나는 몸을 일으켜 침대 위에 앉아서는 아르파데일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르파데일은 노여워하는 얼굴로 율리아나를 노려보았지만 율리아 나는 그 얼굴을 똑바로 받아내었다. 잠시 후 아르파데일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만하군. 네가 발도 로네스와 결혼하게 되자 내가 다급함을 느꼈다는 거지? 그래서 네가 떠나자마자 행동을 개시한 거라고?”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 거라고 보는데.”
“못된 생각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겠지.”
“미안하군. 못돼서. 하지만, 볼까? 언니는 내 결혼에 반대했어. 언니 자신처럼 보잘것없는 남자에게 시집보내고 싶지 않았어? 아마도 언니는 룸 언 니가 에름 후작님과 결혼하는 것도 반대하고 싶었겠지. 룸 언니를 사랑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남자가 후작님이고, 또 후작님이 워낙 성실한 분이니 왕 좌에 위협될 건 없다고 보고 놔뒀겠지만. 하지만 내가 발도 로네스와 결혼하게 되자, 언니는 자신에게 돌아와야 할 왕위가 그 해적 같은 남자에게 돌 아가는 것을 참을 수 없어서 아바마마를…………”
“닥쳐!”
아르파데일의 손이 뒤로 돌아가는 것을 보며 율리아나는 엉겁결에 눈을 감았다.
하지만 볼이 화끈해지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율리아나는 실눈을 뜨고 큰언니를 바라보았고, 그녀가 울고 있는 것을 보고는 어리둥절해졌 다. 아르파데일은 들어올렸던 손을 다른 손으로 꼭 움켜쥔 채 울고 있었다.
“난……… 난 널 동생이라기보다는………… 딸처럼 생각해 왔어. 그런데 이 보답이…………… 고작 이거야?”
율리아나는 아무 말도 없이 아르파데일을 바라보았다. 아르파데일의 꼭 쥔 두 손은 마치 기도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르파데일은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말했다.
“어머니는………… 널 낳은 후 조리를 잘못 하셔서………… 돌아가셨어. 하, 하지만 난, 난 네가 어머니를 빼앗아갔다고 생각하지,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 어. 그리고 대, 대신 어머니가 되어주려고 했…………어. 너, 너를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었, 들었다는 것을 부정하진 않겠지만 나, 나름대로는 노력했어. 그런데……”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긴 했지만 실제로 확인받는 것은 처음인 말을 들으며 율리아나는 입을 가렸다.
“그런데, 그런데 이제 나는 널 어떻게 봐야 할까? 어머니로 모자라서 내 아버지까지 빼앗아간 동생? 오, 주여, 나는 너를 어떻게 여겨야 할까?” “무슨 소리야, 언니!”
율리아나는 비명을 외치며 아르파데일에게 달려들었다. 그녀는 큰언니의 어깨를 다급하게 움켜쥐었다.
“아바마마를 빼앗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응?”
“아버지는 혼절하셨어. 그리고 깨어나시지 않아.”
“뭐?”
“레보스호가 키 드레이번에게 나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쓰러지셨어. 우리는 일단 그 소식을 숨기고…………… 왕가의 근친들끼리의 회의였어. 그, 그 리고 내가 앞으로 나선 거야. 그래. 네가 오해를 할 정도로 나는 왕위에 대한 집착을 보였으니까, 내가 왕위 계승자로 행동하는 건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어. 그래서….. 유리?”
율리아나는 더 이상 큰언니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의 눈앞에는 더 이상 큰언니의 얼굴은 없었다. 대신 다른 얼굴이 있었다. 그 얼굴을 보기 위해 눈살을 찌푸리던 율리아나는 그것이 키 드레이번의 얼굴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비명을 지르며 기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