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5권 – 19장 : 다섯 검의 주인 – 4화

폴라리스 랩소디 5권 – 19장 : 다섯 검의 주인 – 4화


퓨아리스 4세는 피곤한 표정으로 의자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 오른손을 들어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양쪽 관자놀이를 세게 눌렀다.

눈꺼풀 바깥쪽 어디에서 찰그랑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법황은 눈을 뜨지 않았다. 대신 귀로 방 안의 정경을 관찰했다. 조금 전의 그 소리는 크리 스털 디캔터가 열리는 소리. 그리고 와인이 잔 속에 쏟아지는 가느다란 소리. 그리고 발자국 소리가 들려와야겠지만 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맨발이므로 소리가 나지 않는다. 

“성하.”

퓨아리스 4세는 손을 내리고 플로라를 향해 미소 지었다. 플로라의 손에서 와인잔을 받아든 법황은, 그러나 그것을 마시는 대신 사이드테이블에 내 려놓고는 플로라의 오른손을 두 손으로 감싸쥐었다. 플로라는 법황에게 오른손을 내맡긴 채 고요히 서 있었다.

법황은 허리를 숙이며 그 손을 입가로 가져왔다 플로라의 손가락 관절에 입술을 댄 채 법황은 낮게 웅얼거렸다.

“죠르지오 신부가 일을 끝냈어.”

플로라는 약한 탄성을 지르며 말했다.

“예상보다 빠르군요?”

“그래. 죠르지오 신부도 그러더군. 꽤 괜찮은 제자들이었다고. 물론 파킨슨 신부의 기록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는 말을 덧붙이기는 했지만.”

“축하드립니다. 성하.”

“글쎄. 축하받을 일인지 모르겠군. 칼로 일어선 자는 칼로 망하는 법인데, 나는 법황청이 감히 뽑기 두려워하던 칼을 뽑아들고 말았어. 펠라론이 그 칼에 의해 망하게 된다 해도 나는 내 결정을 후회하지 않을까?”

“미래에 떨어질 벼락을 피하기 위해 오늘의 나무를 심지 않을 수는 없지 않을까요.”

“옳은 말이야.”

“성하. 걱정하지 마세요. 성하께서 불안을 느끼시고 자신의 결정을 자꾸만 되돌이키는 것은 성하의 성격이 그런 파격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하께선 혼돈과 불안 속에 빠진 것처럼 느끼시겠지만 다른 이들은 그런 성하의 모습에서 자신의 결정을 언제나 재고해 보는 신중함을 볼 것입니다. 과잉 불안으로 넘어가지 않는 침착함 속에서 그렇게 자신을 단속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요.”

퓨아리스 4세는 피식 웃었고 플로라 역시 미소로 대답했다. 퓨아리스 4세는 플로라의 손에서 입을 뗀 채, 하지만 그 손을 놓지는 않은 채 말했다. “플로라. 약속해. 나는 그늘이 넓은 나무가 되겠어. 꼿꼿이 서서 네게 그늘을 드리울 뿐 아무것도 원하진 않겠어. 이런 약속을 입밖으로 꺼내는 것은 나 스스로를 구속하기 위해서야.”

“어떻게………… 어떤 말이 이 감사함을 표현할 수 있을까요. 그런 단어가 있을까요.”

“하지만 가끔은 봄바람에 취한 나무가 그 뿌리를 꿈틀거리는 일쯤은 있을 거라고. 주의해.”

법황은 그렇게 말하며 플로라의 손등에 입술을 눌렀다. 플로라는 깜짝 놀란 척하며 그 손을 잡아당겼고 곧 사람과 꽃은 웃음을 터뜨렸다.

퓨아리스 4세는 두 손으로 머리를 받치며 다시 의자에 기대었고 플로라는 그 팔걸이에 걸터앉았다. 손가락으로 법황의 머리카락을 빗어내리던 플로 라는 흰머리가 보인다고 놀려대었고 퓨아리스 4세는 격분한 얼굴로 그건 새치라고 주장했다. 결국 플로라는 직접 그것을 뽑아 퓨아리스 4세에게 내 밀었지만 법황은 그것을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그러나 조금 후 말소리는 없어졌고 푸근하고 부드러운 침묵만이 법황 집무실을 가 득 메웠다.

황금의 햇살이 오후를 관통하고 커튼의 올에 부딪혀 복잡하게 산란되었다. 가을 햇살을 바라보던 법황은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말했다.

“그들은 모레 출발할 거야. 물론 비밀스러운 출발이니까 아침에 내가 안 보이면 그들의 출정식에 갔다고 생각해.”

“모레? 그렇게 빨리요?”

“그래. 휘리 노이에스는 폴라리스까지 점령한 다음 겨울을 맞겠다는 심정인 것 같아. 그리고 나 또한 겨울이 오기 전에 다벨을 공중 분해시켜 줄 작 정이고, 서로 반대 방향이지만 어쨌든 시기 선택에서는 공통점을 발견한 것 같아.”

“그렇군요. 폴라리스에는 연락을 보냈나요?”

“아니. 내 서신과 함께 도착하게 할 거야. 완전 비밀이니까.”

“알겠습니다. 뜻밖의 선물에 몹시 기뻐하겠군요.”


그러나 플로라의 예상과는 달리 그것은 뜻밖의 선물이 아니었다. 물론 예상하지 못했던 선물이긴 하지만 하리야 선장은 그들이 도착하기 전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미리부터 기뻐하고 있었다.

“정말인가, 벨로린?”

“그래.”

“이건, 기막히군! 그러면 기병처럼 움직이고 포병처럼 공격한다는 말인가? 맙소사!”

“드래군(dragoon)이라고 하지.”

하리야는 얼떨떨한 얼굴로 벨로린을 바라보았다. 벨로린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핸드건보다 더 비밀스러운 법황청의 무기지. 상설 단체는 아니고 필요시마다 조직되는 부대야. 실제로 조직되어 활동한 예는 1,700년 역사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 그나마 비밀스럽게 목적을 달성한 다음 바로 해체되곤 했으니까 잘 모르겠지. 네가 말한 대로 말을 타고 대포를 사용하는 그 법황의 병사를 용기병이라고 불러.”

“용기병이라. 그 이름 멋지군. 그런데 좀 위험하지 않을까?”

“위험?”

“그 바이올 기사단이라는 건 사실 애져버드지. 열강의 야합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었던 자들이니까, 그들도 세상에 대한 증오를 꽤나 심하게 가지고 있는 자들일 텐데. 그런 자들에게 핸드건을 쥐어준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 아닐까.”

“그래서 200명만 보내는 거야. 퓨아리스 4세는 그들에게 만약 목적을 달성한 다음에 해체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다른 용기병 부대를 만들어서 박살내줄 것임을 분명히 전달했지. 위험하지는 않지만 도움은 되어야 한다는 고려에서 200명이라는 숫자가 나온 거야.”

“으음.”

“그리고 어쨌든 그들은 법황청에 대한 애정을 잊지 않고 있어. 비록 법황청이 그들의 몰락을 막지는 못했지만 아이언블러드라는 이름으로 살아남게 해준 것, 그리고 바이올 기사단이라는 이름으로 부활하게 한 것은 분명한 은혜니까.”

“부활? 그러고 보니 퓨아리스 4세 성하는 부활의 법황이셨지. 실로 재미있는 일이군.”

하리야는 싱글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조금 후 하리야는 뭔가를 떠올렸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왜 성하께서 우리를 돕는 거지? 생각해 보니 그 이유를 모르겠군.”

“아리스 4세는 휘리 노이에스를 싫어하거든. 너희들을 도와 그를 물리치고는 다케온, 팔라레온, 록소나를 원래대로 돌리겠다는 거지. 오 왕자의 검이 하나로 모이면 대륙에 너무 큰 혼란이 찾아올 테니까.”

“원래대로?”

“그래. 그의 곁에 있는 싱잉 플로라…………”

벨로린은 잠시 플로라에 대한 생각을 떠올리며 속으로 웃었다. 플로라는 자신이 벨로린의 마음을 읽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사실 그 관계는 거꾸로였다.

“………의 평가를 따르자면 그는 보호자의 성벽을 타고난 자니까. 흔히들 보수주의라고 간단히 말하지만 그보다는 더 복잡한 것, 알지?”

“무슨 말인지 알겠어. 퓨아리스 4세에 대한 평가가 그렇지. 질서의 재편이 요구되는 시점에서의 최적임자. 그 분께서는 이 남부의 혼돈도 재편하시 겠다는 것이군・・・・・・ 원래대로.”

“자꾸 그 말을 반복하는군. 왜 그래?”

하리야는 약간 머쓱한 얼굴로 말했다.

“이봐, 벨로린. 혹시 속마음도 읽나?”

벨로린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하리야를 바라보았고 하리야 역시 혀를 차며 자신의 생각 짧음을 비난했다. 조금 전까지 벨로린이 한 일이 바로 퓨 아리스 4세의 속마음을 들려주는 것이었다.

“그 질문은 잊어줘. 멍청한 질문을 했군.”

“네 속마음이 문제로군.”

벨로린은 싱긋 웃었다.

“원래대로 돌아가면 곤란하다고 생각하고 있군?”

“폴라리스가 새로 생겼으니까.”

“법황이 남부의 질서를 재편하면서 혼란중에 생겨난 일시적인 괴뢰 집단에 불과한 폴라리스도 사라져야 된다, 고 판단할까 봐 무서워하고 있군. 아 니, 그게 아닌가? 좀더 큰 것을 보고 있군.”

“말해 봐.”

“다벨이 차지했던 땅들을 그대로 꿀꺽할 생각이군?”

벨로린은 웃으며 말했고 하리야는 변명하듯 손을 흔들었다.

“전부 다는 아냐. 그건 지금 우리에게 망명해 있는 자들에 대한 배신이 될 테니까.”

“그래도 챙길 수 있는 한 챙긴다는 생각은 하고 있군. 대단한 배포야. 휘리 노이에스에게 짓밟히지나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되는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눈앞에 닥친 일만 생각할 필요는 없잖아.”

“아, 신경 쓰지 마. 나는 반왕이 탄생하게 되는 일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기를 쓰고 나서는 바라미가 아냐. 하지만 바라미가 알게 되면 너를 유혹해 버릴걸?”

하리야는 약간 창백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젠장.”


“그림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바스톨 장군은 진을 잔에 따르며 말했고 맞은편에 앉아 있던 바라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빌레스 국왕과 서 파르치는 완전히 화해했습니다. 마왕이 말이 아닌 목도리도마뱀에 몸을 싣는다는 건 상당한 화해의 제스처였고, 그래서 리저드 라이더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리고 단순히 상징적인 행동으로 끝난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서 파르치가 혀를 내두르더군요. 마왕은 예 상 외로 훌륭한 리저드라이더라고 합니다. 말과 목도리도마뱀에 무슨 공통점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로서는 한 분야에서 달인까지 이른 사람은 다른 분야에서도 저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대단하군. 너희들은 그 나이에 승마도 새로 배우지는 못할 텐데.”

“예? 아아, 그렇습니다. 이런 말 들으면 그분께서는 노인 취급하냐고 어이없어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실로 대단한 노익장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그 나이는 뭔가를, 특히 몸을 사용하는 뭔가를 새로 배우기는 힘든 나이지요. 정말 말타기도 새로 배울 수는 없는 나이에 리저드라이딩을 배우시다니 무인으로서 존경스럽습니다.”

“괜찮은 남자로군, 빌레스 국왕은.”

“예. 어쨌든 록소나와 다케온의 화해로 대표되는 정리 작업은 성공적입니다. 폴라리스 내에 몰려든 각국의 인사들은 공통의 적 앞에 과거의 원한을 잊고 손을 잡았다, 정도로밖에 표현이 안 되는군요.”

“무장에게 그 정도의 표현력이면 충분하겠지.”

“감사합니다. 그리고 성은 완공되었고, 리저드라이더 부대의 훈련도 좋은 성과를 보이고 있는 데다가 법황 성하께서는 200기의 용기병 부대를 파견 해 주셨습니다.”

라미는 빙긋 웃으며 두 손을 조금 펼쳐보였다.

“거기에 이 시대 최고의 전략가이자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전략들을 정리해 두며 차분히 기다리고 있는 당신이 그들 위에 있고.”

“최고? 당치 않습니다.”

“서 브라도가 전사했으니 이젠 그런 호칭도 낯부끄럽지는 않겠지.”

“아니오. 페인 제국을 공격하고 있는 타르타니어스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상대인 휘리 노이에스가 있고요. 그들이 아니더라도 저는 그런 칭호 를 사용할 만한 그릇은 못 됩니다.”

라미는 별 대답 없이 싱긋 웃었다. 바스톨 장군은 술잔을 반쯤 비우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든, 그림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솔직히 가슴 떨리는 기분을 억누를 수가 없군요. 마치 레프토리아로 돌아온 것 같습니다.”

라미는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무수한 대군들이 한 자리에 집결하여 벌이는 회전이야말로 무사의 낭만이라는 건가?”

“부인하지는 못하겠습니다.”

바스톨 장군 역시 빙긋 웃으며 잔을 마저 비웠다. 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은 장군은 약간 우수 어린 눈으로 다림항 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 장대한 그림의 마지막 붓질이 문제군요.”

“키 드레이번.”

“예. 저로서는 노스윈드와 키 드레이번의 관계를 짐작밖에 못합니다만, 이 관계는 단순히 가깝다 멀다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운 명공동체라고 할까요? 이번에도 표현력의 한계를 느끼는군요. 어쨌든 저는 노스윈드의 선장들 사이에서 ‘키 드레이번이 나서주지 않으면 우리는 볼 장 다 봤다’는 식의 전망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해가 잘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만 그들은 진지하게 그렇게 생각하더군요. 한 나라를 세울 수 있 을 정도로 냉철하고 노련한 남자들에게서 그런 것을 보는 건 기이한 경험이었습니다.”

“나는 합리적으로만 움직이는 인간을 본 기억이 없어.”

“그렇겠지요. 노스윈드와 노스윈드의 관계를 정의 내리는 것은 좀더 여유로울 때의 일일 테고,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저 또한 그에게서 승낙이 떨어 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무 대답도 안하고 돌아갔다지?”

“예. 그리고 하리야 선장은 열쇠도 보내줬습니다.”

“그렇지만 안 떠나고 있군.”

라미 또한 저 멀리 아래쪽의 다림항을 바라보았다. 무수한 배들이 그곳에 정박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자유호의 위용은 눈에 확 들어올 정도였다. 석양을 받아 반짝이는 황금 물결들 속에 자유호는 검고 거대하게 보였으며 그 선교 난간에 걸터앉아 검을 매만지고 있는 사내의 모습 역시 검고 거대 하게 보였다.

키 드레이번은 복수를 무릎에 놓은 채 손수건으로 그 검신을 닦고 있었다. 거리가 너무 멀었지만 그곳에서 그런 일을 하고 있을 사람은 하나밖에 없 기에 라미는 그가 키 드레이번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복수를 닦고 있는 건가?”

바스톨 장군은 빈 잔에 다시 진을 따르며 말했다.

“그런가 보군요. 서 브라도의 일도 있지만, 그래도 저는 저 모습을 미워할 수 없군요.”

“당신도 저 검이 탐나지는 않은가?”

“글쎄요. 저런 검은 탐낸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 정도의 검이라면 주인을 찾겠지요.”

“무슨 말이지?”

“저 검은 적합하지 않은 자가 쥐면 그 목을 찌릅니다. 주인을 가린다는 것이겠지요. 그런 검은, 시대의 흐름과 사람들의 손 사이를 움직이며 자신의 주인을 찾습니다. 물론 적합하지 않은 자는 무참하게 죽이겠지만 그래도 주인을 찾는 것을 멈추지는 않겠지요. 주인 없는 검은 쇠토막이나 다름없으 니까요. 그러니 스스로 주인을 찾게 놔두는 편이 나을 겁니다…………. 라미? 왜 그러십니까?”

라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바스톨 장군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 눈은 바스톨 장군을 보고 있지는 않았다. 아주 먼 것, 혹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바라보던 라미의 눈이 다시 바스톨 장군에게 돌아온 것은 조금 후의 일이었다.

“조금 전에 뭐라고 했지?”

“예? 스스로 주인을 찾게 놔두는 편이……”

“아니, 그 앞에 말이야!”

“어, 주인 없는 검은 쇠토막이나 다름없다는 말 말입니까?”

바스톨 장군은 당황하고 실망해야 했다. 또다시 충격받은 얼굴이 되었던 라미는 뭔가를 설명하는 대신 갑자기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떠나버렸기 때 문이다.


물수리호의 갑판에 앉아 알버트 선장을 향해 노래를 불러주고 있던 벨로린은 갑자기 어깨를 잡아당기는 손에 노여움을 느꼈다. 이 배에서 그런 짓을 할 사람은 아무도 없고 따라서 벨로린은 그 손의 주인이 벌쳐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개를 돌린 벨로린은 엉뚱한 얼굴을 보게 되었 다.

“라미?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 거지?”

“그를 지배하는 자가 있나?”

귀신 같은 얼굴을 하고 있던 바라미는 무턱대고 질문했다. 되물을까 했지만 벨로린은 대신 자신의 전지성을 발휘해 보기로 했다.

“휘리 노이에스 말인가?”

“그래!”

“글쎄. 아버지에 대한 증오가 대단하지. 그것도 지배는 지배겠지.”

“아니, 그런 것 말고. 정말로 휘리를 지배하는 자. 그의 명령이라면 뭐든 따르게 되는, 그런 자가 있냐고.”

“그런 것은 알기 어렵지. 인간은 자기 감정을 한곳으로 집중시키는 능력이 부족해. 게다가 거기에 대해 아쉬움도 별로 느끼지 않기 때문에 고치지도 않지. 아달탄 같은 인간이 오히려 드문…………”

“그의 이야기는 됐어! 내가 묻고 싶은 것은 휘리 노이에스를 지배하는 자야. 그거나 대답해!”

벨로린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라미를 바라보았다. 여상스러운 광경이지만, 라미의 얼굴은 악마의 얼굴 그 자체였고 그 얼굴을 담대하게 마주볼 수 있었던 것은 벨로린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벨로린은 어깨를 으쓱인 다음 눈을 감았다.

“있군.”

“있다고? 그 놈이 누구야?”

“여자야. 이건 부성에 대한 증오에 의해 가지게 된 모성에의 경외감 때문일까. 어쨌든 그에겐 천사가 하나 있군.”

“천사, 라고?”

“그가 그렇게 부른다는 말이야.”

“그 년이 누구야?”

“딜비움 그랜다이 레보라 아크 리 바레린 길리데아 율리아나 카밀카르. 보통은 율리아나 카밀카르라고 부르는 그 셋째 공주.” 심드렁하게 대답하던 벨로린은 라미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라미의 얼굴은 고통과 당혹으로 크게 일그러져 있었다.

“맙소사, 그렇다면…………..!”

“왜 그러는 거야, 라미?”

벨로린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라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라미는 거꾸로 갑판 바닥에 주저앉았고 그래서 벨로린은 얼떨떨한 얼굴로 다시 한 쪽 무릎을 꿇었다. 라미는 물수리호의 갑판에 주저앉은 채 머리를 내저었다.

“네 개의 검과 그 주인이 아냐… 다섯 개의 검이야. 휘리는 다섯 번째의 검이고. 그래. 그렇게 되는 거야. 검에는 주인이………… 오, 맙소사! 그녀는 내 탑까지 왔었어! 거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려보냈다니, 알아보지 못했다니! 그녀가………… 그녀가 반왕이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