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5권 – 20장 : 긴 노래 – 3화

폴라리스 랩소디 5권 – 20장 : 긴 노래 – 3화



벨로린은 약간 우울한 표정으로 뱃전을 바라보고 있었다. 애당초 사고를 친 것은 벌쳐였지만 그는 다림 시내 어디론가로 사라져버렸고 그래서 키 드 레이번의 방문을 맞이하는 것은 그녀의 몫이 되었다. 노 소리가 멈추고 잠시 후 뱃전 저편에서 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승선 허가를 바란다.”

어둠 속을 미끄러져온 물수리호의 일항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어둠 속으로 물러났다. 곧이어 키 드레이번이 갑판 위에 올라섰다. 키 드레이번의 시선은 메인 마스트를 향했고 알버트 선장의 발치에 앉아 있는 벨로린을 보고는 곧장 걸어왔다.

“너는 뭐냐, 벨로린.”

벨로린은 아무 대답 없이 키를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키는 고함을 질렀다.

“너는 뭐냐!”

벨로린은 무릎을 끌어당겨 그 위에 턱을 얹으며 말했다.

“상대가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은 설명할 수 없다, 키 드레이번. 어린애에게 추억의 무게에 짓눌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어 떤 남자에게도 아기를 가진 여자의 느낌을 전달할 수는 없는 것처럼. 하지만 무의미한 단어로 만족하겠다면 말해 주겠다.”

벨로린은 몸을 뒤로 눕혔다. 알버트 선장의 다리에 기댄 벨로린은 두 손을 배 위에 얹으며 키를 올려다보았다. 그 작고 여린 모습과 무시무시한 등받 이의 조화는 그로테스크한 아름다움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의 신분에도 어울리는 왕좌였다.

“나는 판데모니엄의 하이마스터, 노래의 불꽃 벨로린이다.”

키는 그 이름을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하이마스터. 그 구울의 왕자와 같은 종자인가.”

“범주라는 것은 언제나 본질의 파편만을 가리킬 뿐 본질 그 자체에 대한 인식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지. 너는 하리야나 킬리, 혹은 돌탄 등과 같은 종자냐?”

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자신과 벨로린의 눈높이가 안 맞아도 너무 안 맞다는 것을 깨달은 키는 갑판에 주저앉았다. 벨로린은 가만히 웃으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키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렇다면 아까 그 놈도 악마인가.”

“그래. 하지만 그의 이름을 말해 줄 수는 없어. 그가 너에게 준 이름으로 만족하는 것이 좋겠군.”

“벌쳐라고 했다.”

“그렇다면 벌쳐야. 그리고 벌쳐는 판데모니엄의 하이마스터지.”

“지옥의 일곱 지배자라는 말을 들었지. 너희들이 바로 그들인가?”

“유보적으로, 그래. 네가 사용하는 지배자라는 말과 내 지위가 완벽히 일치하는 것 같지는 않으니까. 이번에도 너희들의 예를 들어 볼까? 너와 다른 선장들을 가리켜 노스윈드의 여덟 지배자라고 하지는 않지. 선장은 선장일 뿐이야. 하이마스터는 하이마스터일 뿐이고.”

“하이마스터의 본질 따위에는 관심없다. 내가 궁금한 것은 지옥불에 튀겨지고 있어야 할 잡것들이 둘씩이나 이 함대에 있는 이유야.”

벨로린은 피식 웃었다.

“구울의 왕자의 기분이 어땠는지 알겠군. 넌 자기 자신이 판데모니엄의 하이마스터에게 벌레만도 못한 존재로 보여질지도 모른다는 생각 같은 것 해본 적이 없나?”

“나를 어떻게 보느냐고 물어본 적 없어.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냐고 물었다.”

“그런 질문은 해본 적이 없지.”

“뭐라고?”

“앞쪽의 것. 나를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 너는 평생토록 그런 질문 한번도 해본 적이 없지. 나는 알아. 그것이 얼마나 웃기는 질문이 될까. 거울이 상 대방에게 나를 어떻게 보느냐고 물으면 모두들 자기 모습을 본다고 대답하겠지… 하하하!”

벨로린은 정말 즐겁다는 듯이 웃었지만 키는 묵묵히 그 웃음을 바라볼 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웃음을 그친 벨로린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래. 말해 주지. 우리는 어떤 설명하기 모호한 투표를 하고 있다.”

“투표라고 했나.”

“그래. 투표지. 일곱 개의 선택… 따라서 가부 동수는 나타나지 않아.”

“기권이 없다면 그렇겠군.”

“기권은 없어. 시체말로 반쯤 죽었다는 말을 쓰긴 하지만 정말 반쯤 죽은 상태가 있나? 살았거나 죽었거나일 뿐이지. 우리의 선택도 그래. 둘 중 하 나일 수밖에 없어.”

“그게 어떤 선택인지는 말해 주지 않을 모양이군.”

“그래. 가르쳐주지 않아. 하지만 꽤 중요한 거라는 것은 말해 주겠어. 아주 중요해.”

“그것과 너희들이 이곳에 있는 것은 무슨 관계지?”

“내가 이곳에 있는 이유야 알 텐데. 나는 알버트 선장에 의해 리포밍된 싱잉 플로라야. 어쨌든 시간의 이 지점에서는 그렇지.” 벨로린은 몸을 조금 뒤틀어 알버트 선장의 다리를 쓰다듬었다. 

“그래서 나는 여기 있는 거지.”

“그렇다면 벌쳐는?”

“그는 자신의 선택을 위해 이곳에 있는 거야. 그리고 내게서 뭔가를 얻어내기 위해서지. 둘 중 뒤쪽의 이유가 더 크겠지.”

“너희 일곱 악마놈들이 투표를 마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냐?”

벨로린은 고개를 들어 알버트 선장의 턱을 바라보았다.

“결정하겠지. 우리의 배례의 주이자 증오의 주 xaxos daiuwv을 어떻게 할 것인지.”

키는 자신이 들었던 이상한 말에 약간 당혹했다.

“뭐라고 말했지?”

“더 이상 알 것 없어. 나는 이미 너무 많이 말해 줬어. 이것이 내 약점이겠지만………… 키 드레이번. 더 이상 묻지 마. 나나 벌쳐의 존재가 너나 이곳의 다른 이들에게 해되지는 않을 거라는 점만 알아둬.”

“악마가 해되지 않는다고?”

“키 드레이번. 너는 도대체 악마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지?”

키는 악마에 대한 자신의 관점이나 견해를 피력하는 대신 몸을 일으켰다. 벨로린의 곁을 떠나려던 키는 문득 생각난 것처럼 질문했다.

“바라미는 어디로 간 거지? 벌쳐가 찾던데.”

“라미? 그녀는……”

벨로린은 잠시 말을 끊고 바라미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언제나 그러했던 것처럼 그녀에 대한 동정심을 느꼈다. 무한자의 그리움은 그 끝이 없다. 벨로린은 깊은 한숨처럼 말했다.

“천년의 그리움을 이으러 갔지.”


필마온 기사단장 발도 로네스는 침실에서 홀로 서신을 읽고 있었다.

발도 로네스는 촛불빛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고는 읽던 서신을 내려놓았다. 그 순간 서 발도는 등 뒤쪽에서 무엇인가가 그를 노려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서 발도는 고개를 홱 돌렸다.

창문 바로 뒤의 허공에, 그것이 떠 있었다.

어둡게 번득이는 눈빛. 어둠을 덮는 어둠으로 서 있는 그것은 필멸자들의 한없는 공포 그 자체인 것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 을 상황에서, 그러나 발도 로네스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여기까지 왔나? 다 나은 모양이군.”

이 대범함은 판데모니엄의 하이마스터조차 맥빠지는 기분을 느끼게 했다. 서 발도는 한술 더 떠서 말했다.

“내일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와주니 잘됐군.”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창문이 부르르 떨렸다. 다음 순간 걸쇠가 박살나며 창문은 폭발하듯 좌우로 열렸다. 그러나 구울의 왕자는 안으로 들어오는 대신 허공에 뜬 채 서 발도를 바라보았다.

서 발도는 손에 서신을 든 채 창가로 걸어갔다.

거대한 파도 소리가 가까이 다가왔다. 창문 아래는 그대로 대성벽이다. 150피트 아래편에서는 페리나스 해협의 거대한 파도가 하얗게 부서져 치솟 아오르고 있었고 거무튀튀한 성벽은 밤 속으로 녹아들어 더 거대하게 보였다. 일반적인 성에 익숙한 이라면 이렇게 높은 성벽이 왜 필요한지 의아해 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병사보다 훨씬 거대하고 강력한 전함을 상대하는 성벽, 검독수리의 성채인 것이다.

그 까마득한 높이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창턱에 걸터앉은 서 발도는 허리를 숙여 튕겨나간 걸쇠를 들어올렸다. 잠시 그것을 들여다보던 발도는 창 밖으로 집어던졌다. 걸쇠 조각은 150피트의 까마득한 깊이 속으로 사라져 갔다.

“내 창문 부수지 마라, 프린스.”

페리나스 해협 위에 떠 있던 구울의 왕자는 그 말에 코방귀도 뀌지 않았다.

“서신은.”

“휘리의 서신이다.”

“뭐라고적혀있는가.”

“나를 사랑하고 싶은데 사랑스러운 짓 좀 해줄 수 있냐는군.”

“되어먹지못한소릴.”

“나는 그대로 읽은 거다. 프린스, 휘리의 서신이라는 말은 제법 들어보았지만 직접 받아보니 듣던 것보다 더하군. 싱거운 놈인데.”

발도 로네스는 웃음기도 없는 얼굴로 휘리를 그렇게 평가했다. 구울의 왕자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웃음 소리는 폭풍에 휘말린 신천옹이 내는 것 같은 소리였다.

“하긴네놈이그런농담따위를할수있을리가없지공포를모르는자는농담을할수가없다좋다그게무슨뜻인지는짐작할수있는가.”

“어느 정도는. 녀석에겐 함대가 없어. 메르데린 공작이 제아무리 온 다벨을 사관학교처럼 만들었다 한들 바다가 없는 그곳에서 해군을 만들 수야 없 었지. 따라서 공작의 상속자인 휘리 역시 해군은 가지지 못했고, 놈은 필마온 기사단을 원하고 있겠군.”

“그렇다면놈은어디를치기위해너의해적들을원하는것일까.”

“폴라리스겠지. 휘리가 아무리 뱃일을 모른다 해도 노스윈드 해적들을 상대할 함대를 아무데서나 구할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겠지.”

“내생각도그러하다기회는왔다.”

“어째서 기회인지 설명하라.”

“네녀석도알것아닌가.”

발도 로네스는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대성벽을 타고 치솟던 바람이 그의 백발을 휘저어대길 수십 회, 서 발도는 고개를 들며 차 분하게 말했다.

“폴라리스 공격을 약속해 놓고, 대신 오왕자의 땅을 넘겨받으라는 건가? 제국은 혼 족 때문에 꼼짝 못하고 있다. 따라서 폴라리스와 다벨의 전투에 서 어부지리를 노리는 것은 용이하겠지. 하지만 명분은? 펠라론에 제출할 명분이 필요한데.”

“악마신봉자토벌.”

“무슨 말이지?”

“알버트선장과트로포스선장에대해알고있는가.”

“알버트 선장이라면………… 무슨 말인지 알겠군. 교회가 진저리를 치는 악마의 증인이지. 그런데 트로포스 선장은 왜 거론되는 거지?”

“그놈또한악마의수하니까.”


아르파데일 공주는 고개를 옆으로 약간 기울인 채 눈앞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스발은 의자에 곧은 자세로 앉아 있었고 율리아나 공주는 바닥 에 앉아 오스발의 무릎에 기대어 앉은 채 무릎 위에 놓아둔 커다란 책을 읽고 있었다. 율리아나의 목소리를 듣던 아르파데일은 그것이 『남해 해전사』 라는 책임을 알아차렸고 시폭스 남작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거의 마지막 부분이라는 것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율리아나가 오스발에게 책을 읽어주는 것이 분명했고, 도서실의 창문에서 흘러떨어지는 햇살 속에 그 모습은 한 폭의 고전주의 그림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아르파데일 공주는 코믹한 기분밖에 느끼질 못했다. 『남해 해전사』라는 것은 어쨌든 전사 서적이었고 도대체 읽을 재미라곤 없는 딱딱한 책 이었다. 하지만 율리아나는 열성적으로 그것을 읽고 있었고 오스발은 고문의 한계에 도달한 자의 다 죽어가는 얼굴로 그것을 듣고 있었다.

하지만 잠시 후 아르파데일 공주는 자신의 판단을, 즉 이것이 율리아나가 오스발에게 가하고 있는 폭행이라는 판단을 조금 수정하기로 결정했다. 율 리아나는 그 재미없는 책을 정말 재미있게 읽어주고 있었다. 그녀의 풍부한 독서량과 훌륭한 시각 때문에 율리아나는 접속사와 문장부호 등을 제외 하면 그대로 도표가 되고 말 『남해 해전사』를 한편의 장대한 이야기로 만들어내고 있었다.

“자신의 선원들이 공포에 질려 있다는 것을 간파한 시폭스 남작은 드디어 데샨 카라돔에 비싼 값을 치르고 가져온 무기를 꺼내기로 결정한 거예요. 시폭스 남작의 명령에 따라 마법사들은 드디어 갑판 위로 올라왔어요. 와아…… 생각해 보니 당신도 이 자리에 있었지요? 하지만 노를 젓고 있었을 테니까 트로포스 선장이 어떻게 데샨 카라돔의 마법사들을 물리치는지는 못 봤겠군요.”

“예, 못 봤습니다. 공주님.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만 그것은 배 위에 오가는 이야기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도저히 사실로 생각되지 않는 이야기들 이었습니다.”

“걱정 말아요. 이제부터 내가 정확하게 이야기해 줄 테니까.”

오스발은 다시 죽어가는 얼굴이 되었다. 아르파데일 공주는 율리아나의 이야기 자체는 그렇게 재미없는 것이 아니라는 판단을 이미 내렸고, 그래서 오스발이 저런 얼굴을 하는 것은 그가 정말 관심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르파데일은 약간 괘씸하다는 생각을 하며 작게 헛기침을 했다.

율리아나는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악!”

아르파데일과 오스발, 그리고 비명을 지른 율리아나 자신까지도 얼이 빠져버렸다. 그리고 율리아나가 비명을 내지를 때 집어던져버린 『남해 해전 사』는 책장에 부딪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아르파데일은 가슴을 누르며 간신히 말했다.

“유리? 왜 그러니?”

“어, 어, 언제 들어온 거야?”

“조금 전에 책 읽고 있느라고 못 들었나 보지. 그런데 왜 그렇게 놀라는 거야? 누가 보면 너와 오스발이 무슨 이상한 짓이라도 하고 있었던 줄…

“언니잇! 갑자기 다른 사람 목소리가 들려서 놀란 거잖아!”

“그래? 놀라게 해서 미안하구나.”

아르파데일은 웃으며 걸어갔고 조금 전부터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오스발은 그제야 인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목례하는 오스발을 향해 아르파데일 은 문 쪽을 가리켜보였다.

“잠깐 나가 있지 않겠어요, 오스발? 유리와 할 이야기가 있어서 찾아온 것이거든.”

오스발은 율리아나를 쳐다보았고 율리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스발이 도서실 밖으로 나가자 아르파데일은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책 읽어주고 있었니?”

율리아나는 자신이 집어던진 남해 해전사』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응. 발은 페이노를 읽을 줄 모르거든.”

“너야 책 보고 있어서 모르겠지만 오스발은 아주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더구나.”

율리아나는 남해 해전사를 끌어안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랬어? 어, 재미없었나 보구나. 다른 사람들의 독서 취향이 나와 같지 않다는 것을 생각했어야 되는데, 내가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읽으니까 다른 사람들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좀 쉽고 재미있는 걸로 고를걸.”

그리고 율리아나는 안쓰럽다는 눈으로 자신의 가슴에 안겨 있는 책을 내려다보았다. “재미없으면 재미없다고 말을 하지 이 두꺼운 책 다 읽을 때까지 말없이 듣고 있다니.”

고개를 든 율리아나는 아주 재미있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큰언니를 보게 되었다.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 거야?”

“글쎄. 잠깐 동안 들었던 거지만 넌 참 재미있게 읽던데. 거의 재창작을 하더구나. 그래서 난 오스발이 괘씸하다고 생각했어. 우리 시대 최고의 미녀 가 저렇게 정성껏 읽어주는데………….”

“우에에에, 이렇게 직접적으로! 사람 무안하게!”

“시끄러워요, 율리아나 카밀카르. 어쨌든 세기의 신부가 저렇게 열심히 책 읽어주는데 재미없다는 표정을 짓다니, 저게 무슨 남자냐고 생각했지.” 

“발은 원래 그래.”

“원래 그렇다고?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구나. 지금 내 관심사도 아니고.”

율리아나는 높은 서가에 다시 책을 꽂아넣기 위해 팔을 뻗어올리며 말했다.

“아, 그래. 무슨 관심사로 찾아온 거야?”

“오스발을 사랑하니?”

율리아나는 책을 꽂아넣던 자세로 굳어버렸다. 잠시 정물처럼 굳어 있던 율리아나는 갑자기 몸을 홱 돌렸다. 그러고는 책장에 몸을 기대며 아르파데 일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렇게 보여?”

“유리, 위험해.”

“나 아직 아무 대답도 안했어. 그런데 뭐가 위험하니 어쩌니 하는 거야.”

“그게 아니고 그 책…… 윽! 괜찮아?”

불안한 모습으로 반쯤 꽂혀 있던 『남해 해전사』는 그대로 율리아나의 머리를 강타했고 그래서 율리아나는 머리를 감싸쥔 채 쭈그려 앉아 다 죽어가 는 신음을 흘려야 했다. 황급히 의자에서 일어난 아르파데일은 율리아나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괜찮아? 손 좀 치워봐, 유리, 머리 깨지지 않았나 모르겠구나. 어서 손 치워봐.”

율리아나는 머리를 꼭 움켜쥔 채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고 그래서 아르파데일은 억지로라도 율리아나의 손을 떼어내려 했다. 그때 율리아나가 갑자 기 앞으로 쓰러지며 아르파데일에게 안겨들었다. 아르파데일은 잠시 당혹했지만 곧 미소를 지으며 동생의 등을 토닥였다.

“이런, 유리.”

율리아나는 언니의 허리를 꼭 끌어안은 채 낮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직접적으로………… 사람 무안하게…”

“미안하구나. 이건 의례적으로 하는 말이 아냐. 정말 미안해. 하지만 너는 카밀카르의 공주고, 정확히 해둘 필요가 있어. 안된 일이지만 넌 아슬아슬 하고 조마조마한 자기 감정을 즐겨볼 시간 같은 건 태어날 때부터 갖지를 못했어. 나처럼 말이야. 그러니 말해 주렴. 그를 사랑하니?”

“결혼 말이야?”

“그래. 바로 그게 문제지.”

율리아나는 큰언니의 허리를 감싸안은 두 팔은 그대로 둔 채 언니의 치마폭에서 얼굴을 들어올렸다.

“이상한 말투네. 뭐가 문제라는 거야?”

아르파데일은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잠시 주저했다. 하지만 그녀는 곧 빠른 어조로 말했다.

“머리 좋은 너니까 괜히 돌려 말하다가 망신당하고 싶지는 않아. 사실 그대로 말하지. 볼지악 자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율리아나는 깜짝 놀란 얼굴로 언니를 바라보았다. 아르파데일은 동생에게 이런 말을 해야 된다는 것은 참 한심스러운 처지라고 생각하며 이마를 찡 그렸다.

“발도 로네스 대신으로 말이야. 아직 결혼식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파혼은 어렵지 않아. 만약 볼지악 자작을 네 신랑으로 삼겠다면 우리는 네 지참 금으로 폴라리스를 선물할 수 있겠지.”

“그런 제안이 왔어? 함대를 지원해 달라고?”

“아니. 오지 않았어. 그 남자는 메르데린 공작의 결혼 건이라면 얼마든지 추진하지만 자기 결혼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이 없어. 하지만 우리들은 그 가 세기의 신랑감이 될 많은 요건을 갖추고 있다고 판단했지.”

“구체적으로?”

“오 왕자의 땅을 정복한 것 이외에 무엇이 더 필요할까? 우리는 그가 제국 기사단 북좌의 공격으로 대표되는 제국의 압력 아래 무너질 거라 판단했 지만, 혼 족의 침입으로 그는 기사회생했어. 행운마저도 그의 편인가 싶은 대목이지. 그는 이제 레프토리아 회전 이후 하이낙스에 가장 가까이 다가 간 사람이야. 아직은 여러 모로 불안하지만 무엇을 더 따져보려다가는 너무 늦겠지. 투자는 상대방이 불확실할 때 하는 거지. 그리고 그의 불안한 입 지도 우리 카밀카르와 결합한다면 확실한 것으로 바뀌지 않을까.”

“많이………… 생각했네.”

“나 혼자 생각한 것은 아니지. 나와 대신들의 토론의 결과야. 생각해 보렴. 유리. 너는 카밀카르 다벨의 여왕이 될 수 있어.”

“고, 공동 통치?”

아르파데일은 단호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 제안할 수 있어. 그의 아내로 만족하겠다면 폴라리스를 선물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아. 노스윈드가 없어진 것을 마지막으로 이제 남해는 더 이상 대륙과의 벽이 아냐. 폴라리스 토벌에는 그런 의미도 있어………… 남해는 신제국의 내해가 되는 것이고 미리온 산맥이 새로운 벽이 되는 거지. 그리고 너는 미리온 산맥 남쪽에 생기는 그 신제국의 여왕이 되는 거지.”

율리아나는 숨이 막힌다는 얼굴로 언니를 바라보았다. 아르파데일은 빙긋 웃으며 동생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요런! 무슨 생각 하는지 알겠어. 너는 내가 카밀카르의 여왕이 되지 못할 바엔 죽어버리기라도 할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아아아 !”

“못된 동생아, 잘 들어라. 부정하지는 않겠어. 나는 카밀카르의 왕좌에 관심이 많아. 하지만 카밀카르가 더 번영할 수도 있는데 내 것이 아니라는 이 유로 거부하고 싶지는 않아. 솔직하게 말해서 이런 생각까지 해봤어. 내가 그와 결혼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

이번에야말로 율리아나는 완전히 숨이 막혀버렸다. 그녀가 꺽꺽거리는 동안에도 아르파데일은 계속 태평하게 말했다.

“어쨌든 나는 정식으로 결혼한 적이 없잖아? 응? 그 눈길은 뭐야. 아줌마 주책이라는 눈길이야? 훗, 그래. 내 나이가 좀 많지. 하지만 휘리 노이에스 라는 남자가 정략 결혼에서 그런 것을 신경 쓸 것 같지는 않은걸. 그렇게 되면 리로이는 여왕의 애인이 되는 것이고………… 하지만 나보다는 네가 더 조 건이 좋아. 너는 세기의 신부고, 휘리가 박색을 선호하는 괴벽을 가지지 않았다면야 네 미모에 설마 넘어오지 않겠니? 호호호. 게다가 넌 나처럼 애인 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냐.”

당황과 혼란 속에서 표류하던 율리아나는 마지막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율리아나는 커다랗게 뜬 눈으로 언니를 바라보았고 아르파데일은 잔잔 하게 말했다.

“그래서 묻는 거란다. 유리.”

“……”

“오스발을 사랑하니? 만일 그렇다면 애인과 남편을 적당히 구분할 자신이 있는 거니? 그렇다면 볼지악 자작에게 청혼을 넣어볼 수 있어. 그렇지 않 다면 오스발을 면천시키고 그와 정식으로 결혼하고 싶은 거니? 네가 그렇다면, 내가 결혼하는 쪽으로 제안을 넣을 수도 있어.”

“너무 갑작스럽고………… 너무 큰…….. 모르겠어. 혼란스러워.”

율리아나는 힘들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몇 달 전 우연히 만나게 된 휘리 노이에스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그 만남 이후로 휘리 노이에스는 저런 정복 행각을 벌이고 있다. ‘나는 그의 변화에 대한 책임이 있어.’ 율리아나는 마음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와 결혼해 야 하나? 코미디잖아!’

아르파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갑작스러운 말이겠지. 하지만 단도직입적으로 다 말해 두는 편이 좋을 것 같았어. 그게 네게는 더 편하겠지. 그러니 이젠 생각해 보렴. 다그 치지는 않아…………… 중요한 문제니까. 하지만 빠를수록 좋다는 것은 짐작하겠지?”

“그래, 알아. 알고 있어.”

“그럼 이만 일어나자. 유리. 가서 일단은 푹 쉬거라.”

율리아나는 아르파데일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섰다. 충격은 컸지만, 그것은 감정적인 충격이라기보다는 이성적인 충격이었고 그래서 율리아나는 이 미 충격을 잊은 채 언니가 말해 준 사실들에 대해 면밀히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도서실을 나설 때쯤 율리아나는 이미 ‘그 나이에 파릇파릇한 총각을 넘보다니, 도둑놈 심보군?’ 등의 농담을 할 정도로 냉정을 회복했다.

아르파데일과 율리아나가 나가자 도서실은 고요만이 남게 되었다. 잠시 후 그 고요 속에서 무엇인가가 조용히 움직였다.

서가 사이에서 미끄러지듯 나타난 그녀는 폰스파궁에 소속된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폰스파궁 경비병들 중 누구를 붙잡고 물어보더라도 그녀에게 입궁 허락을 내어준 적은 없다는 말만 돌아올 것이다. 누구에게도 허락받지 않은 채, 하지만 거리낌없이 들어와 있는 그녀는 조금 전 율리아나가 기 대었던 책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창문을 통과한 햇살이 그녀의 흰 옷에서 눈부시게 부서졌다.

바라미는 마치 그곳에 율리아나가 서 있다는 듯이 책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입은 조금 전 자신이 들었던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공동 통 치………… 신제국의 여왕……………

바라미는 갑자기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보았다.

“벌써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었나. 한 인간이 천년 전에 짐작해 낼 수 있는 것은 다른 인간 또한 생각해 낼 수 있다는 건가.”

바라미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아르파데일과 마찬가지로 나 또한 그 대답을 기다리겠어. 율리아나. 잘 생각해서 대답해야 될 거야.”

잠시 후 도서실 어디에서도 바라미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