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5권 – 20장 : 긴 노래 – 5화
휘리리리릭!
가슴을 저며오는 휘파람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서 소팔라는 그 소리가 끔찍하게 싫다고 생각하며 목청껏 외쳤다.
“엎드려, 엎드려!”
며칠 전의 밤에는 도망치라고 외쳤지만 지금은 8군단 전체 병력이 한 자리에 모여 있다. 도망치는 것도 질서 있게 수행하지 않으면 혼란 속에서 더 큰 피해가 날 것이다. 그래서 서 소팔라는 포탄이 날아오는 자리에 누우라는 명령을 할 수밖에 없었다. 병사들은 벌벌 떨면서 그의 명령을 따랐지만 몇몇 병사들은 공포 속에서 우왕좌왕하거나 비명을 지르며 달려가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머리 위로 명백한 적의로 조준된 포환들이 날아들 기 시작했다.
위기를 가까스로 넘긴 긴박한 상황이었지만 하리야는 이것이 기회라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았다. 8군단의 전체 병력이 강철의 레이디의 사정권에 들 어온 지금은 다시 없을 기회였다. 하리야는 최대한 타격을 줄 수 있도록 광범위 포격을 명령했고, 그래서 여든 발의 포환은 서로 상당한 간격을 두고 격자 포격되었다.
폭음과 불꽃이 8군단의 위쪽으로 파도쳤다.
누군가 하늘에서 이 광경을 내려다보았다면 인간이라는 생물의 가능성에 대해 근엄한 탄성을 질러줄 만한 광경이었다. 여든 발의 포환은 8×10의 거의 완벽한 격자를 그려내었다. 놀랍도록 정밀한 이 사격은, 그러나 의외로 큰 피해를 주지는 않았다. 포환은 그저 높은 운동 에너지를 가진 돌덩이 고 따라서 폭발 에너지는 순수하게 물리적인 것뿐 화학적 폭발은 전혀 없었다. 그 물리적 폭발의 파편들도 엎드린 병사들의 머리 위로 다 날아갔기에 희생된 것은 격자 지점에 있었던 운나쁜 병사들뿐이었다. 서 소팔라의 지시는 정확했다… 그러나 피격 직후 펼쳐진 무시무시한 모습이 병사들의 정신에 준 충격은 거대한 화약 창고의 폭발보다 더 강력했다.
그 사격은 살아 있는 인간의 몸 위에서 펼쳐진 것이었다.
피폭 직후 한때 인간의 부분이었던 것들이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모습이 되어 솟구쳤다. 그리고 잠시 후 엎드려 있는 8군단의 병사들 위로 참혹한 비가 쏟아져내렸다. 후두두둑! 인간의 가능성에 놀라워해야 했을 그 존재는 이제 인간 속에 있는 짐승이 내지르는 끔찍한 비명에 놀라야 할 것이다. “으아아아아!”
병사들은 전우의 육신과 피로 이루어진 소나기를 맞으며 발광했고, 살덩이와 피로 얼룩진 자신의 손발과 몸을 내려다보며 비명을 질렀고, 그런 서로 의 모습을 보며 진저리쳤다. 그들은 일어나서 무턱대고 달려가거나 이 끔찍한 세례의 증거를 지워버리기 위해 제자리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가장 냉 정해야 할 백부장들 중에서도 많은 이들이 충격 속에서 말도 안 되는 소리들을 지르고 있었다. 입에 들어간 것을 무심코 뱉어내다가 그것이 누군가의 손가락이라는 것을 깨닫고 졸도하는 백부장도 있었고 사방에 널린 시체 때문에 어디로도 도망치지를 못해 뱅글뱅글 돌고 있는 백부장까지 있었다.
“정신 차려라, 얼빠진 놈들아!”
서 소팔라는 검집채로 검을 휘두르며 외쳤다. 뒹구는 병사의 등을 후려치고 무턱대로 달리는 병사를 걷어차며 소팔라는 병사들을 제어하기 위해 안 간힘을 썼다. 서 소사라 역시 사방으로 말을 달리며 고함 질렀고 서 켈커와 서 기리우 역시 난동을 부리는 말과 기수들을 달래기 위해 백부장처럼 날 뛰었다. 그러나 병사들은 이미 통제 불가능이었다. 쌍스러운 욕설을 내뱉던 서 소팔라는 기수에게서 군기를 빼앗아 휘두르며 외쳤다.
“도망쳐라! 8군단은 저쪽으로 도망쳐라!”
공포에 질린 병사들에게 똑똑히 들리도록 서 소팔라는 가장 쉽게, 그리고 몇 번씩 똑같은 말을 외쳤다. 그것은 어느 정도 먹혀들었고 병사들은 일제 히 진지 방향으로 도망쳤다. 소팔라는 겨우 비슷한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는 동생을 돌아볼 정도의 여유를 찾았다.
“소사라, 가라! 소리를 내며 달려. 유도하라고!”
서 소사라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고삐를 놓은 채 방패와 검을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서 소사라는 다리로만 말을 달리게 하며 방패에 검을 탕탕 부딪혔다.
“이쪽이다! 8군단, 이쪽이다!”
병사들은 두려움에 떨면서도 더 큰 두려움에서 달아나기 위해 미친 듯이 달렸다. 시체를 밟고 미끄러지고 핏물 속에 나동그라지며 병사들은 죽을 힘 을 다해 달렸다. 후위로 쳐진 서 소팔라는 도망치는 8군단의 뒷모습을 보며 그제야 분통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의 성격은 그 순간에도 사나운 농담으 로써 자신의 분노를 분출시키고 있었다.
“젠장, 지금 한 방 더 날아오면 꼼짝없이 8군단 전멸하겠군. 군단병 전체가 탈영하는 바람에 소멸한 군단이라, 대단한 전설이 되겠군!”
약간 떨어진 곳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서 켈커는 쓴웃음을 지었다. 서 소팔라의 농담은 단순한 농담만은 아니었다. 정말 한 번 더 발사가 이루어질 경우 그가 예측한 결과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강철의 레이디는 더 날아오지 않았다. 폴라리스는 도망병 소 탕용으로 포환보다 훨씬 나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다음 번 그들을 덮친 것은 사람의 심사를 긁는 비웃음 소리였다.
“음훼훼훼! 저게 8군단인가?”
서 소팔라와서 켈커는 뒤를 홱 돌아보았다.
투닥투닥. 묵직하면서도 가벼운 발걸음 소리와 함께 포연 저편으로부터 목도리도마뱀들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그리고 도마뱀들의 등 위에는 어떤 괴물의 머리를 떼어낸 것이 아닌가 싶은 괴상한 투구들을 쓰고 있는 리저드라이더들이 오만하게 앉아 있었다. 그들에게 비웃음을 던진 것은 상체를 다 벗어던져 털이 무성한 가슴을 드러내고 있는 선두의 리저드라이더였다. 그는 자신의 목도리도마뱀의 머리 위에 왼쪽 팔꿈치를 괸 채 서 소팔라와 서 켈커를 내려다보았다. 재미있다는 듯이 두 기사를 바라보던 리저드라이더는 이상한 말을 던졌다.
“나는 다케온의 서 파르치다. 자넨 서 소팔라지? 하나부터 열 사이에 마음에 드는 숫자를 불러봐라.”
“뭐라고?”
“하나부터 열 사이에 마음에 드는 숫자를 대라고.”
서 켈커는 검을 뽑아들며 서 소팔라를 바라보았다. 서 소팔라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여덟.”
“여덟? 좋은 선택이로군. 여덟 세고 나서 추적하겠다. 서 소팔라. 도망쳐봐.”
“뭐야, 이 새끼야?”
“하나, 둘.”
서 파르치는 태연자약한 태도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서 소팔라와서 켈커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지만 그 동안에도 서 파르치 의 숫자 세기는 규칙적으로 계속되고 있었다.
“셋, 넷.”
“이런 제기랄!”
서 소팔라와 서 켈커는 미련 없이 말머리를 돌렸다. 그들은 곧 맹렬하게 도망치기 시작했지만 서 파르치는 친절하게도 남은 숫자 모두를 정확하게 세었다.
“다섯, 여섯, 일곱, 여덟 가자!”
“쐐애애애액!”
하리야의 집무실에서는 밝은 담소가 계속되고 있었다. 하리야 선장은 즐거운 듯이 손을 비비며 말했다.
“서 파르치는 이를 부득부득 갈더군요. 여덟이 아니라 셋 정도만 선택해 줬다 하더라도 충분히 서 소팔라를 낚아올 수 있었을 거라고요.”
바스톨 장군은 웃음을 터뜨렸다. 서 파르치의 이 오만무도한 무용담은 이미 다림 시내에 요란하게 퍼져 있었다. 하리야는 손을 좌우로 벌리며 말했 다.
“어쩌겠습니까? 그렇게 분통을 터뜨리고 있는데 쓸데없는 장난을 쳤다고 꾸중할 수는 없지요. 그래서 포로로 잡아온 것보다 더한 모욕을 줬으니 충 분하다고 말해줬습니다.”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하리야 선장. 그렇잖아도 오늘의 공격은 실질적 피해를 줬다기보다는 적의 사기를 꺾어놓은 공격이었소. 그런 공격의 끝 마무리로서 나쁘지는 않지요. 서 소팔라나 서 켈커는 오늘밤 잠자기는 다 틀렸을 겁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내 부하 중에 누가 그런 장난을 치다 가 중요한 포로를 놓쳤다면 난 그 자의 부모에 조부모까지 욕해 줬을 거요.”
“예. 뭐 다음 번에 서 소팔라를 거꾸러뜨리면 되겠지요. 그렇잖아도 서 파르치는 노예병과 서 소팔라만은 자기들에게 맡기라고 신신당부하고 돌아갔습니다.”
“이해됩니다. 지휘관으로서 부하들의 구원은 풀어주고 싶겠지요. 그래서 말인데, 이제 시작해 볼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용기병은 곧 도착할 겁니 다. 그들이 도착하는 대로 시작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리야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전략가의 제안이겠지요?”
“예. 빌레스 전하 때문은 아닙니다. 기회가 아주 좋습니다. 8군단의 사기는 엉망일 테니 간단한 전술로도 그들을 끝내줄 수 있지요.”
“어떻게 말입니까?”
바스톨 장군은 하리야의 책상 위에서 지도 하나를 가져왔다. 다림시 외곽을 나타내고 있는 지도였고 거기엔 현재 8군단의 진지가 표시되었다. 장군 은 손가락으로 지도를 짚으며 말했다.
“아직 용기병을 본 적이 없어서 그들의 특징을 정확하게는 알 수 없습니다만, 어쨌든 그들이 기병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 포병이라고 생각하기로 한 다면 포진할 장소는 분명해집니다. 리저드라이더와 용기병과 함께 다림에 있는 4천 병력 중 일단 3천을 내보내어 회전을 시도합니다………….”
그리고 바스톨 장군은 상세한 전술 설명을 시작했다. 그의 전술은 8군단을 일정 지점까지 몰아넣는 것이었고 그 일정지점은 바로 강철의 레이디의 사정권 내였다. 장군은 그 지점을 손으로 짚으며 말했다.
“이 해변가로 몰아넣은 다음 일제 포격으로 끝내는 겁니다. 왼쪽의 개펄과 오른쪽의 언덕 때문에 8군단의 기병들도 원활하게 움직이지는 못할 겁니 다. 그리고 전투의 이 시점까지 용기병들의 전투력이 충분히 보존된다면 •설명해 드렸으니 아시겠지만 리저드라이더와의 교차 공격으로 그들의 전 력을 상당히 보존할 수 있다고 봅니다만. 십자포화도 가능할 거요. 설령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페가서스호, 질풍호, 흑기사호 등을 미리 이쪽 바다 로 보내놓으면 비슷한 효과를 얻을 수 있겠지요. 포수장들에게 문의해 본 바 이쪽 바다에서 해변을 향한 포격에는 아무 문제도 없다고 하더군요.”
바스톨 장군이 설명을 마무리지었을 때 하리야는 감동을 받고 있었다.
“정말 놀랍군요, 장군. 저라면 육전 따로 해전 따로 생각하지 그 둘을 하나의 전장으로 사용한다는 생각 같은 것은 할 수 없었을 겁니다. 정말 감탄 했습니다.”
“과찬의 말씀이오. 어느 정도 교육받은 지휘관이라면 누구든 생각해 낼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바로 그래서 지금이 좋다고 말한 겁니다. 사기가 엉 망인 상태에서라면 8군단의 지휘관들도 이 작전을 쉽게 알아차리지 못할 테지요. 이 작전을 꿰뚫어볼 수 있는 휘리 노이에스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 고.” 바스톨 장군은 잠시 기다렸다가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이 작전은 키 드레이번이 없어도 충분히 가능하오.”
하리야는 약간 어두워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바스톨 장군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이해하시겠지만 이 작전의 주요 요소들은 리저드라이더와 용기병이오. 그들에겐 키 드레이번이 없어도 되겠지요. 그리고 마지막 포격 역시 키 드 레이번이 없어도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예. 알겠습니다.”
“하리야 선장. 웬만하면 재촉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길 수 있는 때를 놓치고 싶지는 않소. 휘리 노이에스가 올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을 거요. 마찬가지로 키 드레이번이 나서줄 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고. 이런 표현은 어울리지 않겠지만, 아랫사람끼리 빨리 처리하는 편이 좋을 것 같 소.”
하리야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바스톨 장군은 재촉하지 않고 조용히 기다렸다.
마침내 하리야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용기병이 도착하는 대로, 시작해 봅시다.”
킬리 선장과 돌탄 선장, 그리고 두캉가 선장은 승전의 기쁨을 자기들끼리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부둣가의 적당히 고요한 곳에 모닥불을 피워놓고는 술병을 나누고 있었다. 술병을 한번 크게 들이켠 두캉가 선장은 그것을 옆에 있는 킬리에게 건네었다. 두캉가는 입을 훔치며 자유호 쪽을 바라보았 다.
“곧 나오겠지.”
돌탄 선장은 두캉가의 시선을 따라 쳐다보고는 싱긋 웃었다. 술을 한 모금 들이켠 킬리는 돌탄에게 술병을 건네며 말했다.
“안 나오셔도 도리가 없습니다. 시내에는 짜증을 부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리야는 압박을 느끼고 있고, 조만간 결판을 지어야 될 걸요.”
“크 타음은 뭐하치.”
킬리와 두캉가는 돌탄을 돌아보았다. 돌탄은 술병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천챙 생각만으로토 머리카 꽉 틀어차 있지만, 크래토 생각은 해폴 수 있는 커찮아. 천챙이 끝나면, 우리카 이키면 크 타음은 뭐치?”
킬리는 빙긋 웃었다.
“그 다음이라고? 솔직하게 말하면 이 전쟁을 이기더라도 최소한 향후 10년 동안은 정신이 없을 거다, 돌탄. 아주 끝내주게 바쁠 거야. 전쟁이라는 것은 그런 거야. 더군다나 이 전쟁은 무려 세 개의 나라가 없어졌던 전쟁이지. 하리야는…..”
킬리는 말을 끊고는 주위를 잠깐 둘러보았다. 주위가 고 요하다는 것을 확인한 킬리는 목소리를 약간 낮춰서 말했다.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갈 것처럼 행동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았어. 교활하지. 우리가 휘리를 거꾸러뜨릴 수 있다면 그 다음 부터는 팔라레온, 다케온, 록소나가 우리 적이 될지도 몰라. 그리고 사트로니아나 펠라론, 심지어 페인 제국까지도.”
돌탄은 약간 창백해진 얼굴로 두캉가를 바라보았고 두캉가는 배를 긁적거리다가 말했다.
“그렇게 되나, 킬리?”
“예. 휘리 덕분에 우리는 현재 두 번째로 나쁜 놈이 되어 있고, 덕분에 과녁 중앙에서는 벗어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휘리를 잡으면, 물론 휘리 가 만들어놓은 것도 계승하겠지만 휘리가 덮어써야 될 것도 그대로 계승하는 거죠. 하리야가 재주를 부리겠지만 내가 조금 전에 말했던 나라들 중에 틀림없이 싸워야 될 나라가 최소한 둘 이상은 있을 겁니다. 전부가 아니기를 바라야겠지요. 하지만 분명히 하리야는 넓힐 수 있을 때까지는 넓혀두려 할 겁니다. 그리고 그런 영토 확장에서 상대방의 평화적 이해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두캉가는 탄식하듯 말했다.
“하리야는 대단한 사내야”
“예. 그 신부님에게 진짜 나라라는 것은 하늘의 나라뿐일 테지요.”
“무슨 말인가?”
“하리야가 경외심을 가지고 대하는 나라는 천상의 나라뿐일 거란 말입니다. 지상의 나라나 사람들이 정한 국경선 따위에 대해서 하리야는 아무 신 경 쓰지 않을 테죠. 그는 두려움이나 존경심 어느 것도 갖지 않은 채 무참히, 그리고 확고한 태도로 영토를 얻어낼 겁니다. 내가 10년 동안은 바쁠 거 라고 말한 것도 그의 성격을 알기 때문입니다.”
두캉가는 피식 웃었다.
“만약 키가 없었다면 그가 우리의 우두머리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군.”
“크럴까요?”
돌탄 선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쎄요. 나는 왠치 크렇치 않았을 컷 같습니다. 키 선창님이 아닌 하리야였다면. 최소한 나나 킬리는 노스윈트카 아니었을 수도 있타코 폽니 타.”
두캉가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킬리 선장과 돌탄 선장은 원래부터 해적은 아니었다. 그들은 레갈루스의 해군 장교들이었고 키가 두 척의 터릿 갤리어스를 가지기로 결정했을 때 그를 따랐던 사람들이다. 키가 아닌 하리야였다면 그들은 배를 몰고 레갈루스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킬리는 우 울한 생각을 떨쳐버리려는 듯 밝게 말했다.
“그리고 이런 재미있는 일은 죽을 때까지 못 겪었겠지. 그렇잖아?”
돌탄 선장은 빙긋 웃으며 술병을 기울였다. 그는 다시 두캉가에게 술병을 건네며 말했다.
“크래. 하치만 생칵해 포면 우리뿐만은 아니치. 오닉스 선창만 해토 크럴 텐데.”
킬리와 두캉가는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키가 아닌 하리야였다면, 5년 전 이보레 열도에서 쓰러진 것은 하리야였을 가능성이 높지. 그랬다면 오닉스는 여전히 사트로니아의 대해적이었을 테고 노스윈드는 태어나지도 않았겠지.”
“알버트 선장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리야였다면 그 악마주의적인 배를 받아들이지도 않았을 테고 물수리호 역시 하리야를 받아들이지 않았겠지요. 그리고 트로포스 선장 역시 그 마법 때문에 하리야와 충돌을 일으켰을 테고… 두캉가 선장님은 어떻겠습니까?”
두캉가는 돌탄에게 받아든 술병을 천천히 기울였다. 술병을 다 비운 두캉가는 그것을 어깨 너머로 던졌고 술병은 물소리를 내며 바다에 빠졌다. 두 캉가는 두툼한 손가락을 깍지꼈다.
“모르겠어. 나는 늙은 해적이야. 미안하지만 나는 키가 아닌 하리야였어도 좋았을 거야.”
두캉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웅얼거리듯 말했다.
“그리고 오닉스나 트로포스, 혹은 자네들이었다 해도 좋았을 거야.”
돌탄과 킬리는 싱긋 웃었다. 하지만 두캉가는 우울하게 말했다.
“알잖아? 나는 바스톨 장군과는 달라. 그 나이에도 젊은 대통령을 위해 싸우는 짓은 나와는 관련없어. 이 추한 늙은이는 오히려 젊은이들을 이용해 먹지……”
두캉가는 말꼬리를 흐리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 모습을 보던 킬리는 새 술병을 꺼내어들었다. 그러고는 일부러 요란한 소리를 내며 마개를 뽑았다. 뻥! 두캉가는 그를 돌아보았고 킬리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아, 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위험한 일은, 그러니까 키 선장님을 막아서거나 하는 건 우리한테 맡겨두시고 뒷짐이나 지고 있으시죠. 머리 나쁜 애송이가 교활한 늙은이에게 이용당하는 건 만고불변의 법칙이라더군요?”
오스발은 문을 노크했다.
“?”
“오스발입니다.”
“들어와요.”
오스발은 문을 열고 율리아나의 방 안으로 들어섰다. 벽난로 앞의 양탄자에 앉아 있던 율리아나는 오스발을 향해 미소를 보냈고 공주가 바닥에 앉아 있는 것을 본 오스발은 잠시 주저하다가 들고 온 바구니를 그냥 바닥에 내려놓았다. 바구니 안에는 와인병과 오프너, 그리고 두 개의 유리잔과 샌드 위치 등이 들어 있었다. 술병을 들어올린 공주는 그 레이블을 바라보았다.
“레프토리아.”
“예?”
“이건 레프토리아 회전이 있던 해에 담근 거라서 그런 이름을 가지고 있죠. 그 해에 포도주 생산한 곳은 정말 드물어요. 오랜 전쟁의 끝이었으니까. 포도 수확할 인부도 부족했고 양조장 인부도 다 군대 갔고 그나마 남아 있던 양조장들은 모두 군납용 저급주만 생산하던 시절. 그래서 유명해요. 그런데 맛은 그저 그렇죠.”
오스발은 부드럽게 웃었고 율리아나는 오프너를 들어올렸다. 술병을 연 율리아나는 두 개의 잔에 술을 채워서 한 잔을 오스발에게 내밀었다. 오스발 은 겸연쩍어하는 동작으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율리아나는 자신의 잔을 들어올려 오스발의 잔에 가볍게 부딪혔다.
투명하고 맑은 소리가 울렸다.
30분 후, 율리아나는 볼이 빨갛게 변한 채 재잘거리고 있었고 오스발은 처음 받아든 잔을 그대로 내려둔 채 말없이 미소짓고 있었다.
“어떻게 생각해요, 발? 왕이 된다면 좋은 일을 할 수 있겠지요?”
오스발은 그저 웃었고 율리아나는 혀를 낼름했다.
“어머, 사람 무안하게 하네. 좋아요. 말 실수했어. 내 지위가 높지 않아서 좋은 일을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위선이겠지요. 변방의 야만인들을 모두 물리치고 상하의 질서를 바로 세우고 만민번영을 이룩하는 것도 좋은 일이고 배고픈 친구에게 빵을 쪼개어 주는 것도 좋은 일이겠지요. 에에에. 나도 알아요.”
율리아나는 또다시 잔을 홀짝 비우고 말했다.
“지위나 능력 같은 것은 필요없지요. 어떠어떠한 행동만은 꼭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필요없죠. 그저 사랑하면 되죠. 파킨슨 신부님이 말씀하셨듯 이.”
율리아나는 갑자기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그렇다면, 거꾸로 본다면 왕이 되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는 거죠? 흐음. 그래요. 그리고 사람들을 사랑해 주면 되겠지요. 그런데 왕이 된다면 더 많 은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더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과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 차등을 둘 수 있을까요? 어려워라, 어려 워라.”
오스발은 무심히 말했다.
“데스필드에겐 같겠지요.”
“예? 뭐라고 했지요?”
“너를 사랑하는 것과 그들을 사랑하는 것은, 데스필드에게는 같은 것 아닐까요. 모두가 당신이니까요.”
“우에? 에에에?”
율리아나는 기묘한 감탄사와 함께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스발이 잠깐 망설이다가 술병을 들어 그녀의 잔에 술을 채워놓는 동안에도 율리아나는 계 속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겠군요. 데스필드라면 ‘본인을 사랑하거나 당신을 사랑하거나’라고 했겠지요. 당신 말이 맞아요, 발, 그리고, 우웅, 생각해보니까 그건 다른 사 람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네요. 에고이즘과 앨트루이즘뿐이니까. 하지만 그게 같다면· 같지 않은데요?”
오스발은 물끄러미 율리아나를 바라보았다. 율리아나는 멍한 얼굴로 말했다.
“결혼하는 신랑과 신부를 가리켜 성자나 성녀라고 하지는 않아요.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는데, 만약 2인칭에 대한 사랑과 3인칭에 대한 사랑이 같다 면 세상의 모든 부부들은, 아니 정정, 서로를 사랑하는 모든 부부들은 성인들이에요. 그렇죠?”
“그렇겠군요.”
“하지만 그렇게 부르지는 않죠. 그렇다면, 과감하게 정의를 내리자면, 성인은 3인칭을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에에엑! 뭔가가 꼬이는 것 같아요. 뭐 가 잘못된 거죠?”
오스발은 빙그레 웃었다. 율리아나는 속상하다는 듯이 샌드위치를 집어들고는 옆으로 누워버렸다.
그녀의 머리는 오스발의 왼쪽 무릎에 얹혀졌다. 입으로는 샌드위치를 오물거리며 율리아나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오스발을 올려다보았다. 오스발은 겁먹어 눈치를 보는 눈 같기도 하고 장난기 뚜렷한 눈 같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난 너무 많이 마셨어요. 그래서 생각이 안 되는 거예요.”
“예.”
대화는 정지되었다.
율리아나는 눈을 감은 채 약간 크지만 고른 숨소리를 내고 있었고 오스발은 오른쪽 무릎을 끌어당겨 오른쪽 팔꿈치를 괴고는 오른손 주먹 위에 볼을 얹었다. 폰스파궁 전체가 적막에 감싸인 것 같았고 테이블 위에서 촛불은 계속 자라나지만 크지는 않는 모습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율리아나가 말했다.
“세 번째예요.”
오스발은 고개를 약간 꺾어 율리아나를 내려다보았다. 율리아나의 잠든 것 같은 모습은 조금 전과 마찬가지였고 그래서 그 말소리는 옅은 잠꼬대 같 았다.
“이번만 묻고 더는 묻지 않겠어요. 마지막이에요.”
무게감을 지닌 정적이 율리아나의 가슴을 내리누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를 덮고 있는 것은 오스발이 던지고 있는 그림자뿐이었다.
“나를 줄 테니, 당신을 내게 주지 않겠어요?”
대답은 없었다.
율리아나의 모습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녀의 닫혀진 속눈썹 사이에서 투명한 눈물이 흘러나와 볼을 따라 흘렀다.
그 눈물이 말라버렸을 무렵.
테이블 위의 초가 촛농 무더기로 바뀌었을 무렵.
오스발은 조심스럽게 율리아나의 머리를 들어올려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녀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오스발은 저린 다리를 조심스럽게 끌어당겨 일 어났다. 공주님이 행여나 깰까 봐 오스발의 동작은 모두 고요했다. 일어선 오스발은 발코니 쪽을 향해 걸어갔다.
발코니로 통하는 문을 열자 어둠 속에 서 있는 흰옷의 여자가 보였다. 가지런한 실버블론드를 늘어뜨린 조그마한 여자. 오스발은 고함을 지르려 하 다가 자신이 그녀를 안다는 것을 떠올렸다. 여자는 그를 향해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바라미 님?”
“오래간만이군, 오스발.”
오스발은 밖으로 걸어나와 문을 닫았다. 발코니에 나와 달빛 속에 선 오스발은 바라미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어떻게 카밀카르에· 왜 오신 겁니까? 저를 잡아먹으러……?”
“아니.”
“고맙습니다.”
바라미는 발코니문 너머로 방 안을 바라보았다. 율리아나는 오스발이 눕혀놓은 대로 양탄자 위에 누워 있었고 그 모습을 보며 바라미는 다시 웃음을 머금었다.
“지독한 남자로군, 너.”
“예?”
그러나 라미는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대신 라미는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라미의 손이 다시 나왔을 때 그 손에는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라미 는 칼집을 쥔 채 단검을 앞으로 내밀었고 오스발은 약간 머뭇거리다가 그것을 받아들었다. 단검을 받아든 오스발은 다시 라미를 바라보았지만 라미 는 신비스러운 미소만 지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스발은 단검을 뽑아보았다.
버드나무 잎처럼 생긴 예리한 칼날이 드러났다. 투박하면서도 날카로운, 선원이나 군인이 좋아할 것 같은 단검이었다. 오스발은 멀뚱한 표정으로 라 미를 쳐다보았다.
“그녀에게 사랑을 주지 않았으니, 죽음이라도 줘야지. 어쩌면 같은 것일지도 모르니.”
“죽음이라고요?”
오스발은 어이없다는 듯이 라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만 그 눈에서 시선을 뗄 수 없게 되었다.
라미의 눈은 마치 우물 속에서 타오르는 횃불 같았다. 혹은 소용돌이치는 여러 빛깔의 보석 같았다. 오스발은 참으로 신비한 눈이라고 생각했다. 그 때 라미가 단아한 입술을 열어 말했다.
“오스발.”
“예.”
“들어가서 율리아나를 죽여라.”
말 끝에서 라미는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
폰스파궁의 모든 사람들은 공주와 함께 굴러들어온 정체도 모를 노예놈이 술김에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생각할 것이다. 혹은 오스발이 키 드레 이번의 사주를 받은 노예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어쨌든 일은 간단하게 처리되고………………
반왕은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생각에 빠져 있던 라미는 오스발의 말을 약간 놓쳤다. 라미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뭐라고 그랬지?”
“그러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라미는 잠시 말문이 막힌 채 멍한 시선으로 오스발을 바라보았다. 오스발은 미안하다는 듯이 머리를 조아리고는 단검을 다시 칼집에 꽂은 다음 그것 을 앞으로 내밀었다. 라미는 단검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오스발을 바라보았다.
“너, 내 눈을 보고 있었나?”
“아름다운 눈이십니다.”
“그것 외엔?”
“예? 그것 외라니오? 글쎄요. 신비하다고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라미 님은 인간이 아니시니까 그건 당연하겠지요.”
말을 마친 오스발은 다시 단검을 앞으로 내미는 동작을 반복해 보였다. 하지만 라미는 여전히 단검 쪽엔 아무 신경도 쓰지 않았다. 라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오스발을 올려다보았다.
“넌 왜 못 보는 거지?”
“예? 못보다니오? 저, 말씀드렸습니다만 저는 라미 님의 눈이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눈동자 말고 다른 것. 다른 것은 느끼지 못하나?”
오스발은 이상하다는 듯한 얼굴로 라미를 바라보았다. 그는 뭔가 놓친 것이 없나 하는 눈으로 라미의 눈을 다시 들여다보았고 그 동작은 라미를 더 당황시켰다. ‘피하기는커녕 꼼꼼히 들여다본다고?” 그때 오스발이 뭔가 깨달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그렇군요. 왠지 익숙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언젠가 비슷한 질문을 들었지요.”
“비슷한 질문?”
“예. 키 선장님께서는 저에게 왜 싱잉 플로라의 노래를 듣지 못하냐고 질문하셨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열등한 심미안밖에 가 지지 못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름다운 노래나 아름다운 눈을 잘 느끼지 못하는 것이겠지요. 죄송합니다.”
오스발은 정성껏 대답했지만 그 대답은 라미를 안심시키기는커녕 그녀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라미는 가까스로 질문했다.
“넌 싱잉 플로라의 노래를 못 듣는다고?”
“아니오. 듣기는 듣습니다만 다른 남자들이 느끼는 무엇인가는 느끼지 못합니다.”
라미는 혼란스러운 생각을 떨쳐버리려는 듯이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고 그녀의 길다란 실버블론드가 물결치는 모습은 오스발을 감탄하게 만들었다. 문득 오스발의 손을 본 라미는 그 단검을 집어들며 말했다.
“너에 대해 생각해 보는 건 다른 때라도 가능하겠지. 지금은 일단 급한 일부터 처리해야겠어. 비켜라.”
라미가 비키라고 말한 이유는 오스발이 문 앞쪽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스발은 계속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라미는 눈썹 끝을 올리며 다시 한번 말했다.
“비켜라, 오스발.”
“죄송합니다만 공주님을 죽일 생각이십니까?”
“그래.”
“왜 그런 일을 하시려는 겁니까?”
“알 것 없어.”
오스발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 것 없겠지요. 어차피 비켜드릴 수는 없으니까요. 저는 그분의 노예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먼저 죽어라.”
라미는 조금 전에 받아든 단검을 뽑아들어 뒤로 당겼다. 그리고 주저없이 그것을 내찔렀다.
라미는 팔이 부러질 뻔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틀림없이 부러졌을 것이다. 단검은 뭔가에 걸린 것처럼 갑자기 멈춰 섰고 그래서 라미는 앞으로 쓰러질 뻔했다. 오스발은 당황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라미는 더 해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라미는 단검을 쥐지 않은 손을 들어 오스발의 가슴을 가리켰다.
“셔츠 주머니에 넣어둔 것이 뭐지?”
오스발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셔츠 앞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라미는 잔뜩 긴장한 채 그 모습을 보았지만 오스발이 꺼내든 것은 흰 손수건이었 다.
“손수건? 그건 뭐지?”
“공주님께서 직접 수를 놓아 만들어주신 겁니다.”
“수를 놓았다고?”
오스발은 머쓱해하는 얼굴로 말했다.
“엘핀이 적혀 있다고 하더군요. 저야 페이노도 모르니 읽을 수야 없습니다만. 아, 라미 님은 엘핀을 아시지요?”
오스발은 그렇게 말하며 손수건을 펼쳐보였다. 어두운 밤이었지만 라미는 손수건 위에 수놓아진 글을 쉽게 읽을 수 있었다.
“두 미란 오스발……”
오스발은 잠시 기다렸지만 라미는 더 이상 읽지 않았다. 오스발은 글자가 사라졌나 하는 얼굴로 손수건을 내려다보았지만 손수건은 율리아나에게서 받았을 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오스발은 기억을 더듬었다.
“더 있을 텐데요? 에레 에레로아?”
다음 순간 발코니에 서 있는 것은 오스발뿐이었다.
오스발은 허공을 향해 손수건을 펼쳐든 채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라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오스발은 황급히 방 안을 돌아보았지만 방 안의 모습은 조금 전과 마찬가지였다. 율리아나는 여전히 평안한 얼굴을 한 채 누워 있었다.
오스발은 손수건을 주머니에 집어넣은 다음 방안으로 들어갔다. 율리아나의 옆에 도달한 오스발은 재빨리 무릎을 꿇은 다음 그녀의 코 아래쪽에 손 가락을 가져갔다.
오스발의 얼굴이 밝아졌다. 손가락에는 여전히 따스한 숨결이 와닿았다. 라미는 완전히 떠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