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5권 – 21장 : 별의 꿈 – 3화
폴라리스 정부 청사의 지하 감옥에서 서 켈커는 밀짚이 깔린 침대에 앉아 감옥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대우는 어떻다고 딱부러지게 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서 켈커는 대접받기를 즐기는 성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군 고급 장교에 대한 처우를 잘 검 토하면 폴라리스가 다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추측해 낼 수 있는 법이다.
그러나 서 켈커는 폴라리스가 다벨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 작정인지 짐작해 내기 어려웠다. 고문이나 폭행은 없었으며 무장은 물론 해제당했지만 옷 은 그대로 입고 있도록 했다. 여기까지는 충분히 호의적이지만 감옥에 가둔다는 것은 기사에 대한 예우라고 하기 어렵다.
‘적절한 방에 유폐하는 것이 훨씬 세련될 텐데. 해적들이라서 모르는 건가, 아니면 나를 모욕해 보겠다는 것일까?’
그때 저쪽에서 둔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서 켈커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철창 바깥을 바라보았다. 발자국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걸어와 철창 앞에 섰다. 늙고 젊은 두 명의 기사였다. 젊은 기 사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곧 의자 하나를 가져왔고 늙은 기사는 그 의자에 앉아 철창 안쪽의 서 켈커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젊은 기사는 부동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록소나 국왕이신 빌레스 전하십니다.”
서 켈커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럼 당신은 서 하빈저겠군.”
부드러운 말투지만 국왕을 무시한 채 그 옆사람에게 말을 건 행위는 상대방에 대한 모욕이다. 서 하빈저는 눈살을 약간 찌푸렸다. 그때 마왕이 입을 열었다.
“뒤통수를 좀더 세게 쳐줄걸 그랬군.”
“당신이? 하지만 리저드라이더였는데. 당신이 목도리도마뱀을 타셨소?”
마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서 하빈저는 딱딱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서 켈커. 기사답게 예의를 지켜주시오.”
“예의? 아아. 전하라고 부르라는 말입니까? 미안하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록소나를 정벌하지 않았습니까. 설마 나더러 거기에 대해 미안 해하라고 요청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서 하빈저는 한숨을 쉬었다. 서 켈커의 말은 틀린 바가 없었다. 서 켈커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마왕 역시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서 켈커. 마왕이라면 어떻겠나? 그건 내 별명이니까 괜찮겠지?”
“저는 좋습니다. 마왕.”
“그럼 먼저의 질문에 대답해 주지. 그래, 나는 목도리도마뱀을 타고 있었다. 말보다 낫다고는 못하겠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동물이더군.”
“새로 얻은 취미가 즐거우시길 바랍니다.”
“그럼 이제 내가 질문 좀 할까. 하리야는 그대에게 무슨 질문을 하던가?”
“하리야? 미안하지만 제가 여기 갇힌 이후로 사람 얼굴을 본 건 식사를 가져다준 간수 외에는 당신들이 처음입니다.”
마왕은 고개를 갸웃하며 서 하빈저를 바라보았다. 서 하빈저는 서 켈커를 훑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고문을 당한 것 같지는 않군요. 그런데 취조도 없었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솔직히 심심하던 참이었지요.”
마왕은 본격적으로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하리야 선장은 정말 이상하군. 부상병은 치료해서 놔주더니 고급 장교를 잡아왔는데 얼굴도 안 비춘다? 천천히 고문할 생각일까? 하지만 이런 전 쟁통에 천천히라는 것도 말이 안 되고.”
“아, 그건 제가 좀 묻고 싶은 바입니다. 정말 당신들이 우리 부상병을 치료해 주고 간 겁니까?”
“그렇다. 하리야 선장의 명령이었지.”
“정말 이상한 행동이군요. 포로를 발견했는데 잡아가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하리야 선장은 독실한 신앙인이라는 농담을 들었던 것 같군요. 해적과 신앙인이라는 것이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만.”
하빈저가 끼여들었다.
“이단이 아닐까 의심스럽습니다만 어쨌든 그가 신앙을 가진 것은 맞다고 봅니다. 서 켈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치료해 준 것은 그의 신앙에 따른 일이고, 포로를 잡지 않는 건………… 흐음. 포로가 필요없기 때문입니까? 깨놓고 말해 봅시다. 폴라리스는 현재 포로를 수용하고 감시하는 인력도 아쉬운 처지일 거라 짐작합니다만.”
“글쎄요. 넉넉하다고 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서 켈커는 속으로 아픈 감정을 삭였다. 내통자로군. 포로가 필요없고 고급 장교에게도 관심이 없다면, 림파이어 형제들의 의심대로 8군단에 내통자 가 있기 때문이군.
“네 예측대로야. 서 켈커는 배신자에 대한 의심을 하고 있어.”
하리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벨로린은 의자에 앉아 다리를 흔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하리야는 문득 자신이 얼마나 쉽게 기적에 익숙해지고 있 는지를 깨닫고는 조금 놀랐다. 벨로린은 의자에 몸을 파묻듯 비비적거리며 말했다.
“그럼 몸값을 받고 돌려주는 건가? 글쎄. 잘하는 일인지 모르겠군. 서 켈커는 훌륭한 무인이야. 그가 8군단 내에 야기할 불안감보다 8군단이 그를 돌려받았을 때 가지게 될 힘이 더 크지 않을까.”
“미래에 대해서는 너도 가정형이나 의문형밖에 사용할 수 없구나.”
엉뚱한 대답에 약간 놀란 벨로린은 고개를 갸웃하며 하리야를 바라보았다.
“알고 있었잖아?”
“알고 있었지. 하지만 조금 전에 난 너에 대해 놀라워하던 참이었거든. 의자에 앉으면 방바닥에 발도 닿지 않는 조그마한 소녀가 자신의 눈에 보이 지도 않는 사람의 속마음에 대해 태연하게 말하고 있다니. 더 놀라운 것은 내가 그것을 태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점이야. 넌 정말 놀라운 존재 야.”
벨로린은 문득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천장을 가리켰다.
“저 분만큼?”
하리야는 정색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늘 아래 그 분만큼 놀라운 것은 있을 수 없다, 벨로린. 가장 놀라운 것이라 하더라도 바로 그 분께서 만드신 것이니까.”
“내가 그 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나? 그 분이 꼭 점잖고 잘생긴 남자로만 나타나야 되는 것은 아닐 텐데. 조그맣고 까무잡잡한 여자아이로 나타날 수도 있잖을까?”
“물론 그 분께서 원하신다면 어떤 모습으로도 나타나실 수 있겠지. 하지만 너는 아냐.”
“왜지?”
“킬리 선장을 위해서 나를 돕고 폴라리스를 도우니까. 내가 그 분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하긴 어렵겠지만 난 그 분께서 저 다벨군 또한 사랑하시리 라 믿는다.”
벨로린은 고개를 반대쪽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너의 신앙은 도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건지. 그 분이 사랑하는 자녀들을 속이고 베고 죽이고 있는 너는 그렇다면 뭐지? 그 분의 적인가?”
“그 분에게 적이란 있을 수 없다, 벨로린, 성급하고 신앙이 얕은 이들이 신의 적이니 뭐니 하는 말을 하면서 그 분을 모욕할 뿐. 그 분께 어떻게 적이 라는 것이 있겠니. 그러나 그 분께서는 그런 우자들도 사랑하시겠지.”
“그렇다면 네 신앙은 뭐냐. 네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분은 변함없이 너를 사랑할 테니 아무런 걱정 없이 마음대로 행동하겠다는 식인가?”
“그것이야말로 독신이겠지.”
벨로린은 말을 멈춘 채 가만히 하리야를 바라보았다.
문득 하리야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너무 무거운 이야기로군. 그런 이야기는 다른 때 하자꾸나. 더 알려줄 이야기는 없니?”
“내일 제9시쯤 이곳 사람들이 깨진대포만이라고 부르는 만에서 다벨, 필마온, 카밀카르의 대표자 회담이 있을 거다. 그곳을 급습할 수 있다면 이 전 쟁을 끝낼 수 있을 거야. 하지만 포기하는 편이 좋을 것 같군.”
“호위가 어마어마하겠지?”
“그렇기도 하지만 그 회담 동안 필마온 함대와 8군단은 이곳을 위장 공격해서 다른 데 눈돌리지 못하도록 할 생각이거든. 너도 알다시피 그들은 이 미 내통자에 대한 의심을 하고 있으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군. 그렇다면 그 말을 해주는 이유는……”
“그 위장 공격에 대비하라는 것 말고도 하나 더 있어. 내일 8시에 여기로 오겠어. 회담 내용을 들려주지.”
“알았어, 고마워.”
벨로린은 의자에서 깡총 뛰어내렸다. 하리야는 의자에서 일어난 다음 문까지 걸어가 벨로린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벨로린이 하리야의 집무실을 나서려 할 때였다. 하리야는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다.
“벨로린. 그 분은 너도 사랑하신단다. 끝이 없을 만큼.”
벨로린은 잠시 멈춰 섰다. 하지만 고개는 돌리지 않았다. 잠시 통로를 바라보며 서 있던 벨로린은 곧 문을 나섰다. 하리야는 미소를 지으며 방문을 닫았다.
물수리호의 갑판 위에서 가장 많이 찾아볼 수 있는 표정은 언제나 무표정이었다. 그리고 그 갑판 위에 앉아 있던 라미는 자신의 팔을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희디흰 그녀의 팔에는 어울리지 않게도 푸르스름한 멍자국 같은 것이 남아 있었다. 라미는 치마를 살짝 걷어올렸고 종아리에도 비슷한 흔적들이 있 는 것을 발견했다. 라미는 ‘호’ 하는 짧은 한숨을 쉬고는 피곤한 듯 덱체어에 몸을 기대었다.
그녀의 정면에 앉아 있던 벌쳐는 조롱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무리가 많았군, 라미. 탑을 너무 오래 떠나 있었던 것 아냐? 아니면 이 땅 위에 너무 오래 있었던 것이거나, 마지막으로 판데모니엄을 본 것이 언제 “지?”
“지금도 보고 있어. 내 앞에 앉아 있군.”
“이크. 사납게 쉬식거리는군.”
“네가 뻔뻔하다는 거야 잘 알지만, 너를 가장 싫어하는 하이마스터들이 둘이나 있는 곳에 이렇게 버티고 앉아 있을 수 있다니 정말 놀랍군.”
“지금 새와 뱀의 오랜 원한 관계를 재확인하고 싶어하는 거라면 미안하지만 사절이야. 지친 상대를 괴롭혀주고 싶은 생각은 없는걸.”
“물론 거짓말이겠지, 변명은 관둬. 저기 벨로린이 오고 있으니까.”
벌쳐는 뱃전을 올라오는 벨로린의 모습을 보았다. 벨로린은 알버트 선장의 앞쪽에 앉아 있는 라미와 벌쳐를 흘끔 쳐다보고는 그 사이를 가로질러 걸 어갔다. 알버트의 발치에 주저앉은 벨로린은 둘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는 너희 둘이 당신 앞에서 소란을 부리는 것을 달갑잖게 생각하고 있어.”
벌쳐는 폭소를 터뜨렸고 라미 역시 약간 곤혹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벨로린은 웃음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얼굴로 벌쳐를 노려보았다. 가까스 로 웃음을 멈춘 벌쳐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좋아, 미안해. 하지만 벨로린. 아버지라니, 웃음밖에 안 나오는걸.”
“웃으라고 한 말이 아닌데.”
벌쳐 역시 정색을 했다. 벌쳐는 벨로린을 똑바로 바라보다가 엄숙하게 말했다.
“원한다면 사과하겠어. 하지만 그 녹아내리다가 만 인간이 아닌 너에게 하는 거야.”
“마음대로 해. 그리고 라미? 내일은 나가지 마.”
“왜지?”
“지금 필마온 기사단은 모든 배에 성전과 성물을 비치하고 있어. 지브라호의 창고엔 그런 물건이 많거든.”
“곤란하군. 발도 로네스가 어떻게 그 사실을 짐작한 거지?”
“구울의 왕자가 귀띔해 준 거야. 녀석의 선택은 발도 로네스였지.”
라미는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떨구었다. 그때 벌쳐가 싱글거리며 말했다.
“이봐, 라미. 왜 이들을 돕고 있는 거지? 벨로린은 킬리 선장을 선택했으니까 그런다 하더라도 넌 아직 선택하지 않았잖아.”
라미는 눈을 조금 치켜떠 벌쳐를 쏘아보았다. 하지만 벌쳐는 기죽은 기색 없이 계속 말했다.
“네가 그토록이나 저지하고 싶어하는 그 반왕 때문이라면, 그래도 이상하잖아. 반왕은 카밀카르의 그 셋째 공주라면서? 카밀카르를 공격해야 되는거 아냐?”
라미는 씹어뱉듯이 말했다.
“반왕을 막는 것은 결국은 제국을 지키기 위해서다. 휘리는 반왕이 아니더라도 제국에 해될 존재고 역시 격퇴해야 돼. 그 점에서 나와 폴라리스는 목적의 일치를 보고 있지.”
“천년이나 제국을 지켜줬으면 그 남자에 대한 의리는 충분한 거 아냐?”
라미의 눈에서 불길이 용솟음치는 것과 동시에 그녀의 목에서 뱀의 포효가 울려퍼졌다. 쉬이이 ・잇! 하지만 벌쳐는 웃음을 머금은 표정 그대로 라 미를 마주보았다. 그때 벨로린이 차갑게 말했다.
“이 배 위에서는 안 돼. 둘 다 교양 있게 행동하는 것이 좋을걸. 그리고 한 가지 더 말해 준다면, 너희들은 둘 다 선택하지 않았어. 어쩌면 같은 쪽을 선택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잖아.”
라미는 얼음덩이가 깨지는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놈이 나와 같은 쪽을? 어림없는 소리야.”
“함부로 단정하지는 마, 바라미. 네가 말하는 그 자는 시간의 패스파인더고 어쩌면 비니힐만큼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하이마스터지.”
벌쳐는 곤란하다는 듯이 웃었다.
“이보라고. 앞에 놔두고서 여기 없는 것처럼 말하지 말라구.”
라미는 다시 한번 사나운 시선으로 벌쳐를 노려보았지만 벌쳐는 싱글거릴 뿐이었다. 라미는 벨로린을 돌아보았고 그녀의 어깨 너머로 알버트 선장 의 흉측한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라미는 입을 다물었다.
벨로린은 눈을 감은 채 뒤통수를 알버트 선장의 다리에 비비며 말했다.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 하리야 선장 말인데, 아무래도 나나 라미에 대해 뭔가를 짐작하고 있는 것 같아. 그리고 벌쳐 너도.”
벌쳐는 감탄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 놈이 우리 정체를 알았다는 건가?”
벨로린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말했다.
“뭔가를 느낀다에 가까워. 그는 요 근래 계속 성격이 변화해 가고 있어. 폴라리스 건국 이전의 하리야와 지금의 하리야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지. 익어가고 있는 건지 닳아가고 있는 건지는 말하기 어렵지만.”
벨로린은 눈을 감은 채 갑자기 빙그레 웃었다.
“계속 변화하는 생물은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나, 벌쳐? 그것이 어떤 변화든 간에, 너라면 좋아할 것 같은데. 시간 저편에 있는 목적지보다는 흘러 가는 시간 자체를 사랑하는 시간의 패스파인더여.”
해안가의 가을은 그 물빛에서부터 찾아든다.
무거워지고 멀어지는 가을의 파도가 해안에 부딪히며 지칠 줄 모르는 열성으로 창세기부터 그려온 그림을 모래 위에 그려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한 번도 같은 그림이 그려진 적은 없을 것이다.
휘리 노이에스는 말발굽이 모래에 박히며 나는 서걱거리는 소리에 정신을 판 채 백사장 위를 걷고 있었다. 모래밭을 걷는 말이 힘들어할까 봐 그는 말에서 내려 고삐를 쥔 채 걷고 있었고 고삐를 쥐지 않은 쪽 손에는 신발을 모아쥔 채 맨발로 걷고 있었다. 그가 걷는 방향으로 앞쪽 멀리 모래밭 저 편에는 천막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 주위에는 상당히 많은 수의 기사들이 도열해 있었다. 그 앞바다에는 두 척의 전함이 해변을 향해 대포를 겨냥한 모습으로 떠 있었다. 하지만 휘리는 여전히 모래 소리에만 귀를 기울인 채 고요히 걸어갔다.
기사들은 다가오는 휘리에게 의아한, 그리고 불신의 시선을 보내었다. 휘리가 20피트 전방까지 다가갔을 때 천막 바로 앞에 있던 기사 중 하나가 날 카롭게 외쳤다.
“정지! 누구냐?”
“휘리 노이에스다. 서 발도와 약속이 있는데.”
기사들은 당황하여 서로를 쳐다보았다. 먼저 입을 열었던 기사가 온 얼굴로 당황을 표시하며 더듬거렸다.
“서…………… 휘, 휘리십니까?”
“그렇다.”
기사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휘리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바지를 걷어올려 드러낸 맨발에서부터 시작된 시선은 단출한 녹색 평상복을 거쳐 곧 얼굴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기사의 시선은 휘리의 어깨 너머의 뒤쪽을 향했다. 그러나 기사는 휘리의 뒤편에서 찾던 것을 발견하지 못했고 그래서 다시 더듬거려야 했다.
“혼, 혼자 오신 겁니까?”
“난 벙어리가 아니니 대변인은 필요없고 제국어도 할 줄 아니 통역 또한 필요없는데.”
“호위병 말입니다만?”
“날 죽일 건가?”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됐잖아. 안내 좀 부탁할까.”
어제 저녁부터 거울로 써도 될 만큼 문지르고 닦아댄 무기와 갑주로 성장하고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밭에서 한 시간 동안 근엄하기 짝이 없는 모습 으로 서 있었던 필마온 기사들과 카밀카르의 병사들은 현실을 부정하고픈 욕망에 머리끝까지 빠져들고 말았다. 그때 천막의 휘장이 젖혀지며 하얀 머리의 기사가 밖으로 걸어나왔다.
발도 로네스는 조금 전의 기사가 그랬듯이 휘리를 위아래로 죽 훑어보았다. 그러나 발도는 더듬거리는 대신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발도 로네스요.”
“휘리 노이에스입니다.”
현재 교회와 대륙의 많은 이들을 두려움과 적개심으로 몰아가고 있는 두 사내는 너무도 간단히 인사를 마쳤다. 악수를 끝낸 발도 로네스는 휘리의 발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신발은 신는 편이 좋겠습니다. 안에는 레이디가 기다리고 계십니다.”
“율리아나 공주님이 벌써 오셨습니까?”
“그렇습니다.”
휘리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말고삐를 옆으로 내밀었다. 기사들 중 하나가 황급히 말고삐를 받아들자 휘리는 발을 탁탁 턴 다음 신발을 꿰어 신기 시 작했다. 묵묵히 그 모습을 바라보던 발도는 휘리가 다시 똑바로 서자 천막의 휘장을 들어올렸다.
천막 안쪽에는 테이블과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테이블 저편에는 한 여인과 한 기사가 앉아 있었다. 휘리는 여인이 율리아나 카밀카르일 것 이라고 짐작했지만 그 모습을 보며 약간 의아함을 느껴야 했다. 셔츠와 바지, 그리고 재킷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복장이야 이곳이 전쟁터 근처임을 놓 고 본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여인은 거기에 덧붙여 얼굴에 베일을 두르고 있었다. 의아한 눈초리로 그 베일을 보고 있는 휘리를 향 해 여인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자신있나요?”
휘리는 왠지 그 목소리가 낯익다고 생각하며 반문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베일 위편으로 보이는 여인의 두 눈에 약간의 실망감이 떠올랐다. 하지만 여인은 다시 조용히 말했다.
“노래는 할 줄 아나요?”
휘리는 다음 순간 감탄과 창피함을 동시에 느꼈다. 황급히 무릎을 꿇은 휘리는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말했다.
“이렇게 하지요. 내 노래가 마음에 드신다면 그 베일을 올려주겠습니까?”
정확한 대답을 하면서도 휘리는 창피함에 얼굴이 확확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율리아나 카밀카르는 음유시인의 자격으로 전쟁에 참가하고 있는 휘리를 위해 작은 막간극을 준비했지만 휘리는 미처 그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맙소사. 음유시인에 관련된 가장 유명한 이야기를 깨닫지 못하다니!’
“노래가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에는 어떻게 하지요?”
“당신의 노예가 되어드리겠습니다.”
“노예? 나는 그런 것 필요없어요.”
“당신의 노예가 되어 영원히 당신만을 위해 노래 부르지요. 그 베일을 들어올릴 때까지. 그럼으로써 내 자존심과 내 자유와 내 사랑을 동시에 얻겠 습니다.”
율리아나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재미있군요. 하지만 노예는 주인의 손에 죽임당할 수도 있을 텐데요? 내가 베일을 벗게 될까 봐 두려워 그런 일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 않나 요? 만일 그렇게 된다면 당신의 자존심과 당신의 자유와 당신의 사랑이라는 것은 도로 찾기 어려우실 뿐만 아니라 목숨까지 잃게 되실 텐데.”
“나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노래해도 되겠습니까?”
“언제라도 좋아요. 목숨을 걸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