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5권 – 21장 : 별의 꿈 – 6화
서 소사라는 책상에 걸터앉아 오른발을 왼쪽 무릎에 올려놓고는 그 발바닥을 침통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용기병들의 습격 때 맨발로 진지 내를 뛰어 다닌 그 발에는 갖가지 상처들이 아로새겨졌고 지금은 붕대로 꽁꽁 묶여져 있었다. 서 소사라는 두 배로 부푼 것 같은 그 발을 힘겹게 신발 속으로 쑤 셔넣으며 투덜거렸다.
“차라리 칼에 맞고 말지, 걸을 때마다 짜증나게시리 발바닥을 다치냐.”
부서진 침대 대신 의자에 반쯤 기대어 누워 있던 서 소팔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근엄하게 말했다.
“곤란하게 되었군. 서 켈커는 포로 신세, 나는 다리가 부러지고, 넌 족하면지속성 격통에 시달리고 있으니 8군단 지휘관들은 궤멸의 위기로군.” “알았어. 안 투덜거리지. 비꼬지 말라고.”
“다리 부러진 형 앞에서 투덜거리지 말라는 의미도 있었다만, 정말 큰일은 큰일이다. 너 말은 탈 수 있겠냐?”
“등자를 깃털로 만들어준다면 더 좋겠지만, 제길, 탈 수 있어.”
“객기 부리지 말고 일단 더블원 센츄리온에게 명령해 둬. 유사시에 지휘권 계승할 준비를……………”
“말해 뒀어.”
“잘했어. 가르친 보람을 느끼게 하는구나.”
소사라는 ‘형이 나를 언제 가르쳤다는 거냐!’고 고함 지르지는 않았다. 그는 그의 형을 잘 알고 있었고, 그런 대답이야말로 소팔라의 화법에 휘말리 게 되는 것이라는 점도 잘 알고 있었다. 소팔라는 기대했던 반응이 나오지 않자 약간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책상 위를 가리켰다.
“지도 위에서 엉덩이 좀 치워봐라. 바이올 기사단은 모두 얼마쯤 되더냐?”
소사라는 옆으로 비켜 앉으며 대답했다.
“200기 가량.”
서 소팔라는 그 대답을 들으며 찬찬히 지도를 바라보았다. 바스톨 장군이 가진 것과 거의 똑같은 지도였다. 서 소팔라는 수염이 드문드문 돋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200기라. 기병의 속도를 가지고 있지만 공격 가능 거리가 포병의 거리란 말이지. 게다가 팔을 돌려서 옆으로 쏘고 뒤로도 쐈다고? 그건 옆을 쏘려 면 한참 대포를 돌려야 되는 포병보다 훨씬 민첩하다는 의미야. 결국 이놈들의 공격 범위는 자신을 중심으로 상당히 큰 원이 되겠군.”
“끔찍하군. 이놈들 앞에서 일반적인 부채꼴 형태는 포기해야 된다는 말이군.”
“네가 폴라리스라면 그놈들을 어떻게 써먹겠냐?”
“접근시키지는 않아. 그럴 필요가 없는 데다 숫자가 적으니까. 말이 움직일 수 있는 지형이면서 몰리지 않는 곳을 죽 이어보지. 음? 잠깐. 서 소사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소팔라 또한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형제는 동시에 말했다.
“리저드라이더!”
“그래, 맞다. 아우야. 그 놈들은 접근전만 하지. 하지만 지형에 구애되지 않고 어디든 움직여. 성격이 완전히 반대되지만, 바로 그렇기에 하나 더하 기 하나가 둘 이상도 될 것 같지 않냐? 물론 둘도 못 될 수도 있지만 바스톨 장군이 저기 있으니 그런 희망은 버리는 편이 좋겠지.”
소사라는 싱긋 웃으며 악담했다.
“다리 부러져 꼼짝 못하니 오래간만에 머리 쪽으로도 피가 통하는 모양이군. 좋아. 생각 좀 해보자. 먼저 확실히 해둘 것은 고정 관념을 다 포기한다 는 거야. 저기엔 상식 밖의 녀석들만 있으니까.”
“아, 조금만 기다려. 고정 관념과 작별할 시간이 필요해. 오랫동안 정들었던 거라 보내기가 여간……………”
“그만해, 그만. 어디 볼까.”
그리고 잠시 후 다리 부러진 형과 발바닥 다친 동생은 각자 의자와 책상 모퉁이에 앉아 지도를 노려보며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상대방의 지능을 가장 처참한 수준으로 무시하며 고성을 질렀고
“제기랄, 엉덩이 말고 머리로 생각해, 머리로! 거기에 왜 목도리도마뱀을 쓰냐!”
“아무래도 머리에 피가 더 통하려면 팔까지 부러뜨려야 될 것 같은데. 좀 도와줄까?”
그래서 막사 주위를 지나던 8군단 병사들은 깜짝 놀라서 기리우에게 달려갔다. 그러나 얼마전 이 형제 기사를 광인으로 의심했다가 창피를 당한 경험이 있는 서 기리우는 인자한 표정을 지으며 ‘그들은 원래 미쳤지만 다행히도 쓸모 있게 미쳤으니 내버려둬도 된다’는 체험에서 우러나온 귀중한 지혜를 병사들에게 전해 주었다.
그리고 그 시각, 폴라리스의 정부 청사 지하에서는 서 켈커가 묵묵히 철창의 문이 열리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철창이 열리고 세 명의 사내가 안으로 들어왔다. 감방에 들어선 세 사내들 중 좌우의 두 사내는 양손에 검과 횃불을 들고 있었다. 가운데 서 있던 남 자가서 켈커를 향해 말했다.
“일어나십시오, 서 켈커.”
켈커는 침대에서 일어나 남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남자는 미소띤 얼굴로 말했다.
“나는 하리야 헌처크라고 합니다.”
“하리야 선장이시군요.”
“그렇습니다. 좋은 대답을 못 들을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형식적으로나마 질문은 해둬야겠군요. 우리에게 협력하시겠습니까?”
“형식적으로나마 얼굴에 침을 뱉어드릴까요?”
“사양하겠습니다. 그러면 다른 부탁을 하겠습니다.”
“무슨 부탁입니까?”
“당신을 돌려보내겠습니다. 서 휘리에게 제 말을 전해 주십시오.”
서 켈커는 당혹한 시선으로 하리야를 바라보았다.
“몸값 협상이……”
“아니오. 그냥 풀어드리는 겁니다. 그러니 심부름꾼 정도의 일은 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서 켈커는 완전히 당황했다. 그는 미심쩍은 눈으로 하리야를 쏘아보았지만 그 얼굴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당신이 아무리 적이지만 이런 말 정도는 해주는 것이 기사의 예의일 듯하군요. 나를 풀어주는 것은 다시 없이 우둔한 짓입니다. 당신의 적을 이롭 게 하는 일입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를 모욕하는 겁니까?”
“아니오. 당신을 돌려주는 것이 다벨을 이롭게 하는 일이라는 것에는 나 역시 동감입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우둔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 다. 서 소팔라가 부상을 입었으므로 당신을 돌려보내줘야 다벨에게 좀 공평한 싸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서 켈커는 이런 말에 벌컥 화를 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눈살을 찡그린 채 하리야를 바라보았다. 하리야의 말이 단순히 약올리기 위한 말인 것이 분명한 이상 거기에는 신경 쓸 만한 것이 없다. 서 켈커는 하리야가 어떻게 서 소팔라의 부상을 알고 있는가, 그리고 왜 자신을 풀어주는가에 대해 고 민했다.
“좋습니다. 당신 스스로 실수했음을 인정하게 해드리지요. 전할 말이라는 것은 뭡니까?”
“첫째. 내일 하루 시간을 줄 테니 이곳에서 떠나길 바란다. 모레 아침에는 공격을 시작하겠다.”
“보편적인 전투 신청이군요. 모레 아침에 전투 개시라는 말로 이해해 두겠습니다. 둘째는 뭡니까?”
“넷째까지 있습니다. 적어드릴까요?”
서 켈커는 피식 웃었다.
“괜찮으니 말씀해 보시죠.”
“알겠습니다. 둘째, 내가 전에 제시했던 제안은 아직도 유효하다. 그 제안이라는 것이 뭔지 알고 싶다면 서 랜달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조건들을 이행해 준다면 우리는 다벨과 평화롭게 이야기해 볼 용의가 있다. 셋째, 다벨 •필마온 협약을 문서로 남겨두지 않는 것은 잘한 일이다. 다벨이 몰락하더라도 필마온 기사단까지 수렁으로 끌어들이지는 않게 될 테니 기사다운 처사로 생각하며 환영한다. 필마온 기사단은 안전하게 그들 의 소굴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넷째, 개인적으로 당신의 천사와 재회하게 된 것을 축하한다.”
서 켈커는 둘째 조항은 듣자마자 망각해 버렸지만 셋째 조항에서는 움찔했고 넷째 조항에서는 혼란에 빠져버렸다. 비록 서 켈커는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지만 뭘 봐야 할지 알고 있었던 하리야는 그 표정들을 남김없이 읽어내었고 그래서 약간 심술궂은 즐거움을 느꼈다. 서 켈커는 의심스럽 기 짝이 없다는 시선으로 하리야를 노려보았지만 하리야는 몸을 돌리며 말했다.
“나가시지요. 경의 말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물론 무장은 떠나기 직전에 돌려드리겠습니다.”
말에 오른 서 켈커는 옆을 돌아보았고 오닉스 나이트는 묵묵히 그의 검을 건네주었다. 마상에서 검을 받아든 서 켈커는 오닉스를 내려다보다가 칼자 루를 살짝 쥐어보았다. 그러자 오닉스는 재빠른 손짓을 보내었다. 서 켈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을 때 옆에 있던 해적 하나가 그 손짓을 설명해 주었 다.
“오닉스 선장님께서는 경에게 나가거든 마음대로 해도 좋으나 여기서는 칼을 뽑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기사의 예의를 생각하라고도 하셨고요.”
서 켈커는 빙긋 웃으며 오닉스의 마스크를 향해 말했다.
“혹시 땜질이라도 해뒀을까 봐 그런 거요. 무장을 돌려준다는 것에 좀 놀랐거든.”
오닉스는 ‘뭣하러? 그런 장난을 칠 바에는 아예 돌려주지 않는다’에 해당하는 손짓을 보내었고 옆에 있던 해적이 그 손짓을 말로 번역했다. 서 켈커 는 고개를 약간 숙여보였다.
“옳은 말이군. 실례했소.”
서 켈커는 검을 허리에 찼고 그러자 오닉스는 그의 창도 돌려주었다. 창을 받아든 서 켈커는 예의 있게 그것을 거꾸로 들며 앞을 보았다.
둔중한 소리와 함께 성문이 열렸다.
서 켈커는 다시 옆을 보았지만 오닉스나 주위의 해적들 모두 아무 말이 없었다. 서 켈커는 어정쩡한 기분을 느끼며 창대로 말의 엉덩이를 두드렸다. 그가 성문을 빠져나올 때까지 아무도 말을 하거나 제지하지 않았고, 그래서 밖으로 나온 서 켈커는 자신이 혹 여전히 감방 안에 누워 있으며 이것은 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도 해보았다.
하지만 그렇게 믿기엔 너무 실감 넘치는 현실이었다. 서 켈커는 망상을 뿌리치고는 혹여나 있을지 모를 화살 공격을 피하기 위해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했지만 빠르게 말을 달렸다. 성벽이 삽시간에 멀어지며 어느새 서켈커는 어두운 숲속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서 켈커는 그제야 랜턴이라도 하나 달랄걸 하는 후회를 하며 말의 속도를 늦추었다.
밤하늘의 날씨는 맑았다. 하지만 달은 이미 저문 시각이었고 그래서 주위는 어두웠다. 그나마 약한 조명이 되어주던 별빛도 숲속에서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다만 길 옆의 덤불에서 들려오는 귀뚜라미 소리와 바람 소리가 있어 외롭지는 않았다. 서 켈커는 고삐를 헐겁게 잡으며 느긋하게 말을 몰았다. 그리고 그는 생각에 잠겼다.
‘하리야는 왜 내통자가 있다는 것을 과시하는 듯한 말을 한 걸까.’
서 켈커는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내통자가 있다면 숨겨야 할 것이다. 만일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려 가상의 내통자를 꾸며대는 것이라면 그가 말한 정보들이 너무 뚜렷하다. 서 켈커는 다벨. 필마온 협약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고 천사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더욱 짐작되지 않았지만, 그것 은 휘리에게 물어보기만 하면 당장 판명될 이야기이므로 거짓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생각을 계속하던 켈커는 갑작스러운 익숙함을 느꼈 다. 서 켈커는 추억의 갈피를 더듬어보았다.
‘천사 천사라고?”
서 켈커에게도 그렇게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실제로 입밖에 내어 그렇게 부른 적은 한번도 없었지만 마음속으로는 항상 그렇게 불렀었다. 그리고 지금은 분명히 천사가 되었으리라 믿고 있다.
‘아밀리아’
서 켈커는 레갈루스 주재 다벨 대사관의 무관이었던 적이 있다. 그것은 대외적인 직책일 뿐 실제로 그는 강철의 레이디의 제조법에 관한 비밀을 캐 내기 위해 파견된 첩자였다. 끝내 그 극비 중의 극비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대신 켈커는 레갈루스에서 그만의 보물을 찾아낼 수 있었다. 다벨의 그의 전우들은 모두 이 과묵한 동료가 레갈루스에서 가져온 보물에 대해 축하를 보내기보다는 우려를 느꼈다. 하지만 켈커는 조용히 미소만 지을 뿐이었 다.
그와 아밀리아는 겨우 2개월 정도만 함께 있을 수 있었다. 켈커는 아직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88일이었지.’
그리고 아밀리아는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 켈커는 아내가 임신한 상태라는 것을 알고 결혼했었기에 놀라지는 않았다. 대신 깊은 슬픔 속에서, 켈커는 그 남자를 찾아내어 죽일 것을 조용히 서원하려 했다. 하지만 그 서원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켈커는 아밀리아가 낳은 아기도 사 랑하려 했다. 그렇다면 아밀리아가 사랑했던 남자 또한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켈커는 그것이 아밀리아의 뜻일 거라 믿었다.
그 이후로 그는 바뀐 것이 없는 듯했다. 원래 여인에게 별 관심이 없었던 켈커는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인이 죽고 나서는 여자에 대한 관심을 모조리 잃었다. 그의 고요함과 성실성은 원래 그의 특징이라 할 만한 것이기에 전우들은 그에게서 달라진 모습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 이후 켈커는 매일 밤 잠들기 전 두 개의 문장을 말하는 버릇이 생겼다.
‘주여. 일생 동안 겨우 88일이라니오.’
그리고 켈커는 곧이어 말하는 것이다.
‘주여. 저에게 88일이나 되는 행복한 시간을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켈커는 어두운 숲을 바라보며 아밀리아의 얼굴과 그 행동을 떠올렸다. 그녀는 겁이 많았고 그처럼 고요한 성격이었다. 켈커는 그녀의 주위에 감도는 그 고요함에 매혹되었다. 그녀가 유일하게 목소리를 약간이라도 돋우는 것은 아미라고 불렸을 때뿐이었다. 그녀는 그 애칭을 싫어했다.
뭔가가 앞에 있었다.
“누구냐?”
켈커는 창을 똑바로 고쳐잡아 앞으로 내밀며 삼엄하게 외쳤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반가워하는 외침이었다.
“서 켈커! 탈출한 건가?”
“자작님이십니까?”
갑자기 불빛이 확 피어올랐다. 켈커는 랜턴의 가리개가 치워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랜턴을 높이 들어올리고 있는 것은 바로 휘리 노이에스였 다. 휘리는 그처럼 말에 타고 있었고 혼자였다. 그는 반가워하는 얼굴로 말에서 내렸고, 켈커 역시 말에서 내려 휘리에게 다가갔다.
휘리는 켈커의 팔을 붙잡으며 놀라워했다. 켈커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자작님께서 이곳에 어떻게 홀로 계신 겁니까?”
“응? 아아, 나는 필마온 기사단과 회담을 나누다가 진지로 돌아가는 길이었어. 그런데 멀리서 말발굽 소리와 갑옷 소리 같은 것이 들려오던걸. 그래 서 불빛을 죽이고 바라보고 있었지. 그런데 맙소사, 도대체 어떻게 탈출한 거지?”
“심려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그리고 저는 탈출한 것이 아닙니다.”
“뭐? 아니라니?”
“그들이 그냥 보내줬습니다.”
서 켈커는 휘리에게서 랜턴을 받아든 다음 자신이 겪은 일을 간략하고 정확하게 전달했다. 이야기 도중 휘리는 몇 번이나 끼여들려 했지만 끝까지 꾹 참은 채 켈커의 이야기를 다 들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일단 진지로 돌아가자, 서 켈커.”
“알겠습니다.”
서 켈커는 랜턴을 높이 들며 불빛이 생겨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휘리는 그 옆을 함께 걸으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멀리 진지의 불빛이 보일 무렵, 휘리는 갑작스럽게 말했다.
“모레 아침이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그거 안됐군.”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작님?”
“폴라리스는 내일 끝나거든.”
서 켈커는 주춤하며 휘리를 돌아보았다. 휘리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필마온 기사단과는 이야기를 다 끝내고 돌아왔다. 우리는 내일 밀물시, 그러니까 제4시를 기해 폴라리스를 공격할 거다. 그러니 자네가 말해 준 대 로 자넬 돌려보낸 건 실수야. 공격 바로 전날 자네를 돌려보내다니.”
“죄송합니다만 필마온 기사단과는 어떤 협약을 하신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우리는 폴라리스를, 그리고 그들은 노스윈드의 모든 전함과 보물을 가지기로 했지.”
서 켈커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자작님. 우리 손해가 더 큽니다. 폴라리스는 물론 훌륭한 무역항이었지만 각국은 이제 우리와의 무역을 달가워하지 않으므로 그건 별 소용 없는 특 색입니다. 무역항의 특색을 제외한다면 폴라리스에는 남는 것이 없습니다. 땅이 넓은 것도 아니고 무슨 자원이나 수확이 많은 것도 아닌, 별 쓸모 없 는 땅입니다. 하지만 노스윈드의 함대는 제국의 공적 제1호라 불릴 만큼 최강의 함대입니다.”
“자네 말이 맞아, 서 켈커. 그리고 그래야 해.”
“예?”
“노스윈드 함대가 제국 제일의 함대여야 한다고. 그래야 필마온 기사단을 쓸어버릴 수 있겠지.”
켈커는 놀라워하는 눈으로 휘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지만 막상 그의 입이 열렸을 때 그의 대답은 간략했다.
“알겠습니다.”
용기병의 지휘관 서 퀵핸드는 다림 수도원장 조슈아 신부를 향해 어리둥절한 시선을 보내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나도 차분히 생각해 볼 여유는 없었습니다.”
“저, 이런 말씀 드리는 것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신부님. 전임 수도원장께서는 분명히….”
“도리언 원장님은 분명히 그 해적들에게 살해되었소. 그리고 나는 주님께 맹세코 그 복수를 하려고 없는 말을 지어내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것 은 순종의 서약에 위배되는 일이지요.”
서 퀵핸드는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가 받았던 명령과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새 명령이 왔습니다.”
조슈아 원장은 굳은 얼굴로 품속에서 서신을 꺼내었다. 서 퀵핸드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그 서신을 집어들었고 조슈아 원장은 그 동안에도 설명을 계 속했다.
“당신들의 속도가 너무 빠르기 때문에 전령이 당신들을 따라잡지 못했던 거요. 물론 용기병은 최단시간 내에 작전을 끝내야 하니 그것을 힐난할 수 야 없겠지만. 어쨌든 그 전령은 목숨을 걸고 달려왔고 당신들이 그 해적들과 함께 있다는 것을 알고는 서신을 나에게 전했소. 똑똑한 젊은이였고, 그 래서 사태가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전에 경을 여기로 불러올 수 있게 되었지.”
서 퀵핸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신을 읽었다. 차분한 얼굴로 읽기 시작했던 퀵핸드는, 그러나 곧 눈을 크게 뜨고 정신없이 그것을 읽어내렸다. 두 번 이나 서신을 읽었던 퀵핸드는 몸을 떨며 신음을 토했다.
“맙소사……”
“성하의 서신이 확실하지요?”
서 퀵핸드는 서신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예, 그렇군요. 그렇다면 이 말은……”
조슈아 원장은 노한 얼굴로 말했다.
“나 또한 그들에게서 악마의 분위기를 느끼고 있었소. 그 파렴치한 것들은 감히 악마의 상징을 선장으로 모시고 이 도시에서는 성직자를 살해했소. 게다가 저흰 서펜트나 요괴의 노래 같은 노랫소리들이라니! 경이 만약 내가 있었던 기간 동안 여기 있었다면 지금 내가 그 말씀들을 믿는 것만큼이 나 믿게 되실 거요.”
“저, 그러니까 저는 악마어는 모릅니다. 혹 아십니까?”
“나 또한 자세히는 모르지만 악마어라는 건 사실 엘핀의 약간 변형된 형태요. 그리고 귀공도 아시겠지만 핸솔 추기경은 훌륭한 학자며 엘핀의 대가 시지요. 그분께서 로스왈로의 추측을 확인하셨으니 그것은 확실할 겁니다.”
그리고 조슈아 원장은 서 퀵핸드가 내려놓은 서신에서 문제의 지점을 노려보며 말했다.
“야만인의 카드점에서 알카나라는 것이 있소.”
“예, 저, 면구스럽습니다만 저도 그 점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아시겠군. 그 알카나라는 이름은 엘핀어 아카나에서 유래된 거요. 아카나의 원래 뜻은 조커. 그리고 세야는 황금. 따라서 세야의 아카나는 황금의 조커를 의미하오.”
카밀카르 함대는 폴라리스의 남쪽 해안으로 꽤나 먼 곳에 떠 있었다. 보통 이 정도의 거리에서는 지휘관도 느긋해지는 법이지만 흰 서펜트의 활동을 보게 된 데아첵 제독은 이 밤중에도 빈틈없는 경계 활동을 요구했다. 밤바다에서의 척후 활동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 서펜트의 독특한 흰색은 이 경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이 제독의 판단이었고, 그래서 카밀카르의 함대의 모든 감시대 위에서는 병사들이 삼엄한 눈으로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기함 스톰라이더의 감시대 위에도 역시 감시원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배의 감시원들보다 월등히 고생스러워하고 있었다. 병사 의 의무와 남성의 본능이 동시에 그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참으로 딱한 모습으로 목례를 계속하고 있었는데, 결코 누군가에 게 인사를 보내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절망적인 심정으로 차라리 갑판 위에 있는 율리아나 공주가 빨리 배 안으로 들어가 줬으면 하고 바라 고 있었다.
스톰라이더의 감시원들을 그런 곤경에 빠뜨리고 있던 율리아나 공주는 그때 북쪽을 향한 뱃전에 서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멀리 폴라리스의 불빛 이 가늘게 비치고 있었고 그 위쪽으로는 북극성이 찬연하게 빛나고 있었다.
율리아나는 두 개의 폴라리스를 동시에 보고 있었다.
율리아나는 폴라리스라는 이름이 그렇게까지 우스운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림이 최남단에 있다는 것은 오직 육지인들의 관점에서 그럴 뿐이 다. 남해를 오가는 뱃사람에게 다림은 어디까지나 북쪽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바다에 떠서 보고 있을 때, 다림은 북극성의 빛 바로 아래에서 빛나고 있었다.
율리아나는 나직하게 속삭였다.
“난, 혜성이에요.”
“예?”
그녀의 등뒤에서 오스발의 반문이 돌아왔지만 율리아나는 밤바다를 보며 말했다.
“나는 떠돌이별이지요. 기억나나요? 테리얼레이드에서였지요. 세실은 나와 당신에게 목적이 뭐냐고 묻는 대신 어떤 별을 좇고 있느냐고 말했어요. 그녀는 역시 마법사군요.”
율리아나는 뱃전 너머로 불어오는 바람을 향해 가슴을 내밀었다.
“나는 집을 잃고 방황하는 별이에요. 길게 꼬리를 끌며 정신없이 날아다니지만 멈춰 쉴 수는 없어요. 미노에서 다림으로, 그리고 다림에서 대륙을 가로질러 라트랑으로, 다시 바다를 넘어 카밀카르로. 하지만 거기서도 멈추지 못한 나는 마침내 이곳으로 왔어요. 발, 떠돌이별이 가장 부러워하는 것은 뭘까요?”
“고정된 별인가요?”
“폴라리스.”
가슴을 펼쳤던 율리아나는 다시 어깨를 움츠렸다. 가을의 바닷바람은 차가웠다.
“하늘의 모든 별 중 움직이지 않는 단 하나의 별. 태양과 달마저도 뜨고 지지만 북극성은 움직이지 않아요. 저 아름다운 멜바골조차도 당긴 활을 어 쩔 줄 몰라하는 모습으로 밤하늘을 숨가쁘게 달려가지만 북극성만은 그러지 않아요. 이곳이 다림이었을 때 나는 떠나버렸지만………… 나는 처음부터 이 곳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었나 보군요. 내가 좇고 있는 것은 움직이지 않는 하나의 별이지요. 어떤 흐름에도 휩쓸리지 않는 자유로운 별. 휩쓸려 비명 지르지만 휩쓸리지 않으면 더 불안해하는 모든 얼간이들 가운데 홀로 자유를 즐기는……………”
율리아나는 오른손으로 왼팔을 감싸안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몰라요. 나는 바보가 되었어요.”
문득 율리아나는 무엇인가가 그녀의 목 뒤를 간지럽힌다는 것을 깨달았다. 흠칫한 율리아나는, 그러나 곧 그것이 전에도 한번 느껴본 감각이라는 것 을 깨달았다.
팔라레온의 밀밭에서처럼.
그녀의 등뒤에 있던 오스발이 그녀에게 숄을 덮어주고 있었다. 율리아나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까끌까끌한 숄 위에 볼을 문질렀다. 오스발은 공주 의 어깨 위로 숄자락을 정돈해 주고는 손을 치우려 했다. 그때 공주의 왼손이 뻗어와 오스발의 오른손을 붙잡았다.
율리아나는 오스발의 오른손을 자신의 오른쪽 어깨 위에 누른 채 가만히 서 있었다.
감시원들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오스발은 공주에게 자신의 손을 내맡긴 모습으로 공주의 머리카락을 내려다보았다. 공주는 오스발의 손을 자신의 어깨 위에 세게 누르며 말했다.
“발.”
“예.”
“이 숄, 가지고 나왔나요?”
“예. 그렇습니다.”
“날씨가 싸늘하니까?”
“예.”
“당신은 숄을 가지고 나오지 않았어요.”
오스발은 대답하지 않았다.
“피나드 부인의 농장에서 당신은 지금처럼 나에게 숄을 둘러주었지요.”
“기억합니다.”
“예. 하지만 당신이 자고 있던 별채는 원래 쓰지 않는 텅 빈 건물이었어요. 피나드 부인은 하인들을 다 해고했으니까요. 따라서 그곳에는 당신이 그 때 나에게 둘러준 것 같은 깨끗한 숄은 있을 수 없지요.”
오스발은 대답하지 않았다.
“취한 상태에서 보았고 그래서 꿈이라고 생각한 모습이 있었지요.”
“무슨 모습입니까?”
“우리가 마차에 숨어서 저 도시를 떠나던 날, 당신과 바탈리언 남작은 취한 나를 안에 앉히고 나란히 마부석에 앉아 있었지요.”
“그랬습니다.”
“나는 누군가가 ‘병신’이라고 외치는 소리에 잠을 깼어요. 그건 남작의 목소리였지요. 난 창문 사이로 밖을 훔쳐보았지요. 바탈리언 남작은 무슨 말 끝에 괴로워하며 우필을 꺾어 마차 옆으로 팽개쳤죠.”
“기억합니다.”
“그리고 잠시 후 당신은 남작님에게 우필을 건네었지요.”
오스발은 대답하지 않았다.
“라트라인의 그 언덕 위에서 대드래곤이 나타났을 때, 모두가 대드래곤을 바라보고 있을 때 당신은 서 레빌의 검으로 우리를 묶고 있었던 밧줄을 끊 었지요.”
“예.”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라오코네스가 우리 머리 위를 뒤덮기 직전 당신이 멀리 떨어져 있던 그 검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던 것이 기억나요. 그 검은 우리에게서 꽤 떨어진 곳에 있었지요.”
오스발은 대답하지 않았다.
“발.”
“예.”
“카밀궁에서, 나는 당신에게 부탁했던 적이 있지요.”
“어떤 부탁 말씀입니까?”
“태풍을 치워달라고 했어요.”
“기억합니다.”
“뭐라고 대답했지요?”
“명령이신지 여쭤봤습니다.”
율리아나는 오스발의 손을 밀어내려 했지만 그녀의 손은 오히려 그 손을 더 세게 움켜쥐고 있었다. 율리아나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고여 흘러내리 고 있었다. 율리아나는 떨리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가 겨우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명령이었다면, 당신은 어쩔 생각이었지요?”
오스발은 대답하지 않았다. 율리아나는 오스발의 오른손을 끌어당겼다. 오스발로 하여금 자신의 목을 두르게 한 율리아나는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 다. 바르르 떨리는 몸을 오스발의 품에 기대어놓고서, 율리아나는 울먹이며 말했다.
“지금 아무도 우리를 안 보고 있지요?”
“예.”
“어떻게…………? 이 배에만도 세 명. 그리고 다른 배에서도 많은 감시원들이 눈을 빛내며 밤바다를 감시하고 있는데………… 발, 대답해 줘요. 만약 그게 명 령이었다면, 당신은 어쩔 생각이었지요?”
“공주님은 바보가 아닙니다.”
율리아나가 원하던 대답은 아니었다. 하지만 율리아나는 푸근한 기분을 느꼈고 그래서 눈물을 흘리면서도 빙긋 웃었다. 오스발은 오른팔로 율리아 나를 끌어안은 채 나직하게 말했다.
“공주님께서 움직이지 않기에 오히려 자유로운 별의 꿈을 꾸는 것은 절대로 바보 같은 일이 아닙니다.”
“별은 있나요?”
“있습니다.”
“당신인가요?”
오스발은 대답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