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5권 – 22장 : 세상의 주인 – 5화
킬리 선장은 끊임없이 명령을 생각해 냈고 동시에 그 명령들이 어떻게든 통상적인 명령처럼 들리게끔 애썼다. 그 결과로 그랜드머더호의 승무원들 은 돛을 펼치고 밧줄을 당기고 캡스턴에 매달리고 심지어 서로에게 시비를 걸기까지 했다. 하지만 노는 젓지 않았다. 킬리 선장은 허공에 노를 저어 야 되는 노예들이나 그 모습을 보고 있어야 하는 선원들의 심리 상태가 어떤 식으로 변화될지 상상하기도 두려웠다. 그래서 킬리는 가장 상식적인 명 령만 내렸다.
“선내의 기름을 다 끌어모아라! 화약 주머니도 몇 개 갑판으로 옮겨와! 모조리 아래에 뿌린다. 어, 그렇게 많이 가져올 필요는 없다. 생각을 해, 생각 을! 허공에 화약이 떠다닐 정도가 되면 폭발이 일어났을 때 우리까지 위험하잖나! 기수! 성벽으로 신호를 보내라. 리저드라이더들 다 불러들이라고해!”
성벽 위의 그레고리는 가혹한 명령을 받고 신음을 흘렸다. 그들의 머리 위를 날아가고 있는 두 척의 배를 보았을 때 다른 모든 이들은 경이감에 몸이 굳었다. 하지만 그레고리만은 그랜드파더호로부터 날아온 깃발 신호를 보며 낭패감에 젖어들었다.
‘사격각을 말해라.’
그레고리는 자신의 선장답다고 생각하며 투덜거렸다.
“허, 젠장이군. 난 하늘에서 대포 쏴본 적이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레고리는 계산을 해내었다. 기적적인 일이었다. 충분히 숙련된 포수라면 대포와 타격 목표 양자 모두와 떨어진 제삼자의 위치 에서도 관측을 해낼 수 있으며 그레고리가 성벽 위에서 해온 일 또한 그런 묘기였지만, 그 대포가 공중에 떠 있다는 것은 이야기가 전혀 다르다. 게다 가 높이차가 전혀 없는 바다의 전투에 익숙한 그레고리에게 지금처럼 높이차가 심한 경우는 난생 처음이었다. 육지의 포수라도 이런 고각도 사격엔 진땀을 흘릴 테지만 그레고리는 주저없이 깃발을 들어올렸다. 하늘에서 성벽 위를 내려다보던 돌탄은 그레고리가 보내는 깃발 신호를 보며 씩 웃었 다.
“그렇치! 크래야 내 포수창이치. 키수! 크랜트머터호에 천탈해!”
그 모든 일은 구름처럼 허공을 떠가던 두 척의 터릿 갤리어스가 성벽 바로 위를 통과할 때 일어났다. 다벨 중장보병대는 그들의 머리 위를 떠가는 거 대한 배의 선복을 바라보며 질려버렸지만 리저드라이더들은 황급히 전선을 이탈했다. 전지형을 달릴 수 있는 그들다운 초고속 이탈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빠져나간 자리 위로 하늘에서 기름과 화약이 바람을 타고 쏟아져내렸다.
높이 때문에 기름은 가장 가는 빗방울보다 더 가늘게 뿌려지고 있었지만 다벨군을 적실 정도는 되었고 다벨 중장보병들은 자신의 팔다리와 전우의 몸에서 번들거리는 기름을 보며 패닉에 빠져버렸다. 그들은 모든 방향으로 도망치려 했고 그래서 어디로도 도망치지 못했다. 오닉스 나이트는 그 모 습을 보며 묵직한 한숨을 흘렸다. 그때 그의 등뒤에서 다급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오닉스는 성벽 위로 올라오는 바스톨 장군을 발 견했다.
“어떻게 되었소?”
오닉스는 ‘보시죠’ 하듯 손을 내밀었다. 바스톨 장군이 땀에 젖은 이마를 훔치기 위해 손을 들어올렸을 때 두 척의 배가 사격을 개시했다. 그리고 장 군은 손을 내리지 못했다.
“쾅쾅콰콰콰쾅!”
두 척의 배로부터 분수처럼 불꽃이 튀어나왔다. 그레고리는 강철의 레이디가 발사 가능한 최고 각도를 지시했고 동시에 160개 대포 모두가 서로 등 각을 이루도록 배려했다. 그 결과 앞뒤로 나란히 선 두 전함의 선체로부터 모두 160개의 화염이 튀어나와 하늘을 향해 맹렬히 솟아올랐다. 허공에 화 산이 생긴 듯한 모습을 보며 바스톨 장군은 감탄을 토했다.
쏘아져 올라간 포환들은 올라갔던 속도 그대로 떨어져내렸다. 그레고리는 대포가 겨우 발사될 정도의 화약량을 지시했기 때문에 포환들은 거의 지 근 거리라 할 만한 거리를 두고 전함 주위로 떨어져내렸다. 그리고 전함의 아래쪽에는 몸에 기름과 화약을 바른 다벨군들이 동공이 튀어나올 듯한 모 습으로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잠시 후 초원 위로 살육의 비가 쏟아져 내렸다.
“아ㅡ델토? 황금의 조커?”
“오오, 기쁘오! 즐겁소! 행복하오! 그렇소. 바로 그런 보잘것없는 이름으로도 불리곤 하오. 왕의 권세마저도 그 혀 위에 놓고 짓뭉갤 수 있으나 내 재 담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철부지의 발에도 걷어차여 눈물짓는 이 자는 바로 황금의 조커라오. 하나의 눈으로도 그 정도의 혜안을 보이시니 두 개의 눈이 있었다면 어떠했을지 상상도 가지 않는구려!”
트로포스는 무슨 소리인가 하다가 가까스로 자신의 안대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며 상대를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네가….. 그 지팡이였냐? 세야의 아카나?”
“오오, 선생께서는 그 한쪽 눈을 빼어주고 대신 100인의 지혜를 얻으신 거요? 그러하오이다. 기담요설에 능한 자 많다 하나 그 중에서도 남보다 우 월한 이 있으니 참으로 금강석과도 같은 혀를 가진 그 이름 린타! 그 분께서 이 가엾은 광대에게 무려 아흐레 밤낮의 시간을 베푸시어 스스로의 치욕 을 알게 하신 바 이 광대는 감당할 수 없는 수치에 혀가 얼어붙고 몸이 굳어 정신을 차려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한 자루 지팡이가 되고 말았소이다. 또다시 그 이야기를 꺼내려니 눈물이 앞을 가리오.”
트로포스는 굳어 있던 것 치곤 혀가 너무 매끄럽게 돌아간다고 생각했지만 그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그 용기병들이 왜 나를 공격한 건지 알겠군. 악마가 있기 때문에…………”
그때 트로포스는 갑자기 자신의 손등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열두 개의 점이 완전한 원을 그리고 있었다. 트로포스는 손등을 바라보던 눈을 들어 아델토를 바라보았다.
“내가 널 풀어준 거냐?”
아델토는 손뼉을 치며 환하게 웃었다.
“그렇소, 그렇소. 이 자만큼의 자만심을 가진 분이 또 계실 줄은 정말 몰랐군요.”
“자만이라니?”
“여드레째라도 도망쳤으면 되었을 거요. 하지만 아흐레째 밤이 올 때까지도 난 도망치지 않았소. 내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 이 광대는 자신 의 파멸이 다가오는 줄 알면서도 그렇게 했소. 그런데 그런 뚜렷한 신호를 보냈는데도 굳이 파멸의 문턱을 넘으시는 분이 여기 또 계셨구려.”
트로포스는 자신의 위아래 턱이 딱딱 부딪히는 것을 느꼈다. 그의 허리가 뒤로 빠졌고 그에 따라 발걸음도 두어 발자국 물러났다. 트로포스는 두려 움 가득한 눈으로 악마를 바라보았다.
“나는 죽나?”
“아니오. 지팡이로 만들어드리리다. 그렇지만 선생의 경우에는 123,456,789개의 점이 필요할 거요. 하루에 열 번씩 사용해도 2만 6천 년 정도 걸 리지. 그리고 선생의 장기 지배력으론 대단한 지팡이는 못 되겠는데? 하하하!”
트로포스는 검을 뽑아들었다. 하지만 그 스스로도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었다. 그의 걱정대로 아델토는 트로포스의 검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아델토는 환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가 몸을 이리저리로 흔드는 것에 따라 모자에 달린 방울이 딸랑거렸고 허리 뒤로 늘어 뜨린 새시 자락 역시 나풀거렸다. 아델토는 그런 경쾌한 모습으로 이곳저곳을 둘러보았고 그녀가 움직이는 것에 따라 검 끝을 이리저리 옮기긴 했지 만 트로포스는 자신의 모습이 기하급수적으로 한심해진다고 생각했다. 아델토는 뱃전으로 달려가 바다를 바라보다가 트로포스를 돌아보았다.
“여기는 전쟁터요?”
“이봐. 뭐 하는 거야? 덤벼!”
“쯧쯧. 성급하시긴. 선생에게 들을 거 좀 듣고 천천히 지팡이로 만들어주겠소. 호옹. 전쟁 때문에 이 자를 쓰셨나 보군. 응? 이 눈 좀 보게. 이상한 것 이 보이네?”
아델토는 두 손을 올려 자신의 눈꺼풀을 위아래로 잡아당겼다. 트로포스는 그 동작에 김이 빠졌지만 이어서 나온 말에는 더 혼란을 느꼈다. 아델토 는 해변가를 바라보며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음란이 있네?”
“무슨 말이야?”
아델토는 트로포스의 말을 들은 체만 체하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더 놀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웨엑? 저기엔 질투까지? 어떻게 된 일이오, 이거.”
황당해하던 트로포스는 문득 아델토가 등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닉스는 구울의 왕자의 등을 찔렀지. 그럼…….
트로포스는 검을 잔뜩 움켜쥐며 뒤로 끌어당겼다. 그때 그의 등뒤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나도 있다. 아델토.”
아델토는 몸을 빙그르르 돌렸고 그래서 트로포스는 움찔했다. 하지만 아델토는 트로포스를 보는 대신 고개를 들어 돛대를 바라보았다. 트로포스는 고개를 돌렸다.
돛대 위에는 벌쳐가 무릎 위에 깍지낀 두 손을 올려놓고 앉아 있었다. 아델토는 놀랐다는 듯이 외쳤다.
“탐욕까지! 이게 어떻게 된 일이오, 공작님? 하이마스터가 넷이라니?”
하이마스터라는 말에 트로포스는 등골이 쭈뼛해지는 것을 느꼈다. 뒷갑판까지 물러나 있던 질풍호의 선원들도 하얗게 질린 얼굴로 앞갑판을 바라보 고 있었다. 하지만 벌쳐는 태연하게 말했다.
“구울의 왕자도 있다. 거기 그 친구가 불러냈지. 지팡이였던 자네를 이용해서.”
아델토는 놀란 표정으로 트로포스를 바라보았고 트로포스는 자신이 뭔가 굉장한 일을 저지른 것 같다는 기분을 느끼며 어딘가로 숨고 싶다고 생각 했다. 아델토는 나풀나풀 걸어와서는 여전히 트로포스의 검을 무시한 채 그의 얼굴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선생께서 분노를 불러내셨다고?”
트로포스는 쭈뼛거리며 대답했다.
“구울의 왕자를 말하는 거라면, 뭐, 그렇긴 한데.”
“그래? 그러하오? 대단하시오! 잠깐. 대식은 저기 미노 만에 항상 계시고, 그럼 여섯씩이나? 아니, 잠깐. 나태가 있잖소! 그 자야 있는지 없는지도 잘 모르니까…..”
“미안하지만 잊혀진 탑이 있지.”
벌쳐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고 그러자 아델토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트로포스가 멍한 눈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아델토는 갑자기 손뼉을 딱 치며 뒤 로 공중제비를 넘었다. 똑바로 선 아델토는 날카로운 휘파람을 불어 트로포스의 귀를 멍하게 만든 다음 외쳤다.
“xards daily!”
“맞아. 광대.”
“좋아, 이 자는 복수요!”
“이보라고, 광대, 찾고 나서 말해.”
벌쳐는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지만 아델토는 이제 벌쳐까지 무시하고 있었다. 아델토는 한쪽 손을 위로 들어올리고 다른 손은 허리에 얹은 채 제자리 에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트로포스는 아델토가 회전하면서 그 행전과 새시, 그리고 셔츠의 색깔이 계속 바뀌는 것을 보고 기겁했지만 아델토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계속 춤을 추었다.
타이호 !트랄라라, 네가 죽으면 관 속에
꼬리 없는 수코양이 한 마리 집어넣지.
에구머니 아주머니 치마 속에 뭘 숨겼지?
저 녀석이 맡긴 건가? 틀림없이 그 꼬리.
늙어빠진 악마가 네 관에 걸터앉아
네녀석의 갈빗대 우물거리며 외치겠지.
어이쿠, 내 꼬리. 이놈이 자른 내 꼬리.
성 요를룸의 축일에 이놈이 자른 내 꼬리!
타이호 -!트랄라라, 그랬어. 내 말 맞지?
놈이 내놓은 건 악마의 꼬리라니까.
으스대며 산의 꼬리라 자랑하고 다녔지만
한 눈에 알아봤지. 그건 악마의 꼬리!
아델토는 빙글빙글 돌면서도 마치 가만히 서 있는 것처럼 씩씩하게 노래를 불렀다. 앞뒤로 둘씩이나 되는 판데모니엄의 하이마스터에게 둘러싸여 있었지만 트로포스는 왠지 유쾌해진다고 생각했다. 주위를 둘러본 트로포스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질풍호를 바라보고 있는 필마온 기사들을 보고 는 더욱 즐거워졌다.
아델토는 갑자기 회전을 멈추며 고개를 숙이며 양팔을 좌우로 쫙 펼쳤다. 트로포스는 그 한쪽 손이 자신을 향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다른 손이 어디 를 향하는지 바라보았다. 그 손은 자유호를 가리키고 있었다. 트로포스가 뭐라 말하려 할 때 아델토는 고개를 들어올리며 트로포스를 향해 함뿍 웃음 을 지어보였다.
“선생이셨구려! 싸랑하오!”
“…..사랑한다고?”
“그렇소. 선생이오. 나는 지지점이 아닌 지렛대를 선택하오. 선생 원하는 거 다 들어드리리다! 이 자는 선생을 선택했다고오오옷!”
아델토는 제자리에서 팔짝팔짝 뛰면서 외쳤다. 그리고 트로포스는 도저히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 전엔 지팡이로 만든다며? 그것도 2만 6천 년 동안?”
트로포스의 머리 한구석에서는 조금 째째한 트로포스가 ‘하루에 한번씩이면 26만 년이고 1년에 한번씩이면 1억 2천 년이야’라고 중얼거리고 있었 다.
하지만 아델토는 계속 웃으며 말했다.
“아하? 그 농담 말이오?”
“……안 웃겼어.”
“다음엔 꼭 웃겨드리리다!”
그리고 아델토는 트로포스의 허리를 꽉 껴안았다. 트로포스는 비명을 꽥 질렀지만 아델토는 트로포스를 껴안은 채 빙글빙글 돌았다. 그리고 뒷갑판 에 서 있던 스우 및 다른 해적들은 이 남녀의 역할이 완전히 바뀐 동작, 더군다나 애꾸눈에 체구 당당한 해적 선장이 여자에게 안겨 허공을 돌고 있는 광경을 보며 난생 처음 배멀미를 느꼈다.
질풍호에 접근하고 있던 필마온 기사단의 전함들에서도 ‘웬만하면 내버려두자’는 의견이 팽배해지고 있는 가운데 벌쳐는 눈을 가늘게 떠 수평선 쪽 을 바라보았다.
“선택이 나에게 넘어왔나.”
외성 바깥쪽에는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1만의 다벨 보병이 화염과 폭발 속에 불타고 있었다. 그랜드파더호와 그랜드머더호가 분수처럼 포환을 쏘아올릴 때마다 그것은 ‘머리 바로 위로 떨 어지는 강철의 레이디’라는 전무후무한 공격이 되어 초원에 작렬했다. 게다가 두 척의 전함은 포환뿐만 아니라 불타는 것은 뭐든 뿌리고 던지며 폭발을 증폭시켰다. 이제 누구도 다벨군의 파멸을 의심하지 않았다. 바스톨 장군은 이 엄청난 대승에 목이 메어 오닉스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약간 어 이없어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오닉스 선장? 어떻게 그런 얼굴을 하고 있으시오?”
오닉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 그랜드파더와 그랜드머더는 허공이 아닌 불의 바다 위를 항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그러자 그 유령선다운 모습이 더욱 두드러졌다. 게다가 그 아래의 불이 연료로 삼고 있는 것이 인간의 육체인 바에야. 얼굴을 완전히 가려주던 마스크가 사라지자 이제 오 닉스는 미신에 뼛속까지 빠져든 선원의 보편적인 얼굴을 보여주고 있었다.
오닉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흉벽에 손을 짚었다. 불과 얼마 전 하리야를 놀라게 했던 그 목소리가 이번엔 바스톨 장군을 놀라게 했다.
“우리는 벌을 받을 거요.”
다벨군의 진영에서는 서 소사라가 형의 말과 자신의 말의 고삐를 한손에 모아쥔 채 처연한 얼굴로 불타는 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발 치에 주저앉은 서 소팔라는 목을 놓아 울고 있었다.
“말이 돼야, 도, 도무지 말이 돼야지! 꺼허어어어!”
소팔라는 투구를 벗어 팽개친 다음 더욱 서럽게 울었다. 내버려두면 숨이 막힐 것 같았지만 소사라에게는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형을 말릴 여 력이 없었다. 그래서 소사라는 묵묵히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저편에서는 서 기리우가 하늘을 향해 가슴을 풀어헤치며 ‘나를 쏴! 이놈들아, 나를 쏘라 고!’라고 울부짖고 있었다. 서 켈커가 어디 있나 찾아보던 소사라는 저 아래의 초원에서 어떻게든 병사들을 구출해 내기 위해 좌우로 뛰며 고함을 지 르는 켈커를 발견했다. 켈커는 망토를 벗어 불 붙은 병사를 내리치며 도와달라고 고함 지르고 있었지만, 소사라에게는 발을 뗄 힘조차 없었다.
소사라는 휘리 노이에스를 돌아보았다.
휘리는 말 안장 위에 꼿꼿이 앉아 있었다. 얼굴은 약간 창백했고 아무 표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무표정하다기보다 시체의 얼굴 같았다. 화재가 일어 난 초원에서는 열풍이 불어닥치고 있었고 그 바람은 휘리의 머릿결을 어지러이 흩날렸지만 휘리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초원을 바라보았다. 문득 휘리의 입술이 열렸다.
“이토록 가소로운 세상, 이슬 속에 담긴 천년.”
소사라는 굳은 얼굴로 휘리를 바라보았다. 그를 한 대 후려치고 싶었고, 동시에 그의 발에 매달려 울고 싶었고, 동시에 그에게 등을 돌리고 떠나버리 고 싶었다. 그러나 소사라는 다시 형에게 고개를 돌려 형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
“일어나, 형.”
소팔라는 몸을 돌려 동생의 다리를 부둥켜 안았다.
“소사라, 소사라. 이건 너무해. 너무하다고! 지는 건 상관없어. 하루에 세 번씩 져도 웃으라고 하셨지? 아버님께선 그러셨지. 하지만 이럴 수는 없다 고! 이런 말도 안 되는 개수작이라니!”
소사라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형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소팔라는 말을 더 잇지 못한 채 다시 울음을 터뜨렸고 소사라는 형의 어깨에 팔을 두른 채 불 타는 전장을 바라보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군사들을 구출해야 된다는 생각도, 적에 대한 적개심도 떠오르지 않았다. 소사라는 마치 남의 일을 보듯 덤덤하게 전장을 바라보았다.
그의 귀에서 무슨 말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소사라는 피로한 눈을 돌려 다시 휘리를 바라보았다. 휘리는 저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바탈리언 남작에겐 너무 많은 기대를 하지 마라. 그는 재미가 없어지면 떠나버릴 사람이다. 그를 다루는 법은, 짧은 기간 내에 할 수 있는 거대한 일을 계속 주는 것이다. 그러면 그는 다른 사람들이 몇 년 걸릴 일도 한 달 만에 해치울 거다.”
“….자작님?”
“사트로니아를 주의해라. 놈들의 2인자 근성을 잘 이용하도록. 그들은 1인자의 가능성을 가진 자를 쓰러뜨리지만 스스로 1인자가 되지는 못한다. 그들을 가장 만족시키는 것은 소제국의 이름임을 유념해라. 라트랑 — 레모 ᆞ바이스라의 중부 동맹이 절대로 흐지부지되지 않도록 조심해라. 그건 기회다. 그들을 계속 긴장시키도록.”
“자작님.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나머지는 네 의도대로 해라. 서 소사라.”
휘리의 돌로 깎아 만든 것 같은 얼굴이 서서히 아래로 내려왔다. 소사라는 그 얼굴을 마주보며 다시는 느끼기 어려울 생경함을 느꼈다.
“막을 내릴 때가 되었다.”
휘리의 손이 고삐를 움켜쥐었다. 바람이 일어났나 싶을 때 휘리의 모습은 이미 없어졌다. 소사라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고 저 아래로 불타는 초원을 향해 달려가는 휘리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그가 뭐라 고함을 지르려 할 때 확 피어오른 불의 장막은 이미 휘리의 모습을 삼켜버렸다.
그리고 소사라는 휘리의 첫 번째 말을 듣지 못했다는 것에 정도를 넘어선 안타까움을 느꼈다.
흉벽에 몸을 기대고 있던 오닉스는 멀리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 같은 것을 느꼈다. 치솟는 화염의 아우성과 병사들의 비명, 그리고 계속되는 포성 이 주위를 가득 메우고 있어 들릴 까닭이 없는 소리였지만 오닉스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오닉스는 뭔지 모를 공포를 느끼며 흠칫흠칫 고개를 들 었다.
그때 초원에서 불어오던 열풍이 오닉스의 얼굴에 확 불어닥쳤다. 열풍은 오닉스의 수건을 휘감아 날려올렸고 오닉스는 맨얼굴로 불의 바다를 응시 하게 되었다.
그 얼굴에는 그림자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