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1부 – 7화
“음… 으..으… 제기…”
목이 마른 것도 마른 거지만, 다른 무엇보다 머리가 아파서 더 못 자겠다.
“저기, 대교…”
오, 채 부르기도 전에 벌써 눈앞에 꿀물 대령이군.
꿀꺽! 꿀꺽! 꿀꺽!
으- 좋다! 꿀 말고도 또 뭘 섞었는지 아침에 이거 한잔 아니, 한 사발 마시면 숙취가 상당히 사라진다.
성분을 알아 가지고 우리 시대에 돌아가서 ‘숙취 해소음료’를 만들어 팔면 떼돈을 벌 수 있지 않을까?
“간밤엔 좀 과하셨습니다. 제가 만류치 못해 송구스럽습니다.”
“아냐, 나 원래 그래. 좀 들어가면 술이 사람을 마셔버리지. 근데, 나.. 혹시 무슨 실수라도?”
대교는 곱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주독(酒毒) 때문에 주무시면서 괴로워하시는 것이 소녀가 보기 괴로웠을 뿐입니다.”
“뭐, 자면서 그런 건 괜찮아. 기억도 안 나니까…”
나는 대교가 챙겨주는 옷을 대충 걸치고 창가에서 88한대를 피워 물었다.
음… 좋아. 그렇게 퍼마셨음에도 숙취는 별로 없는 것 같고…
간만에 바쁜 하루를 좀 보내 볼까?
“대교, 가서 도시락.. 그러니까 야외에 갖고 다니면서 두 세끼 먹을 음식을 좀 준비해 줄래?”
얼마 후, 내가 찾아 간 곳은 ‘야외’가 아니었다.
나는 대교 자매를 대동하고 비화곡의 메인 건물 지하 깊숙이 위치한 비밀서고로 향했다.
조명도 어둡고 음습하여 아주 썰렁한 분위기의 지하 1층에서도 가장 으슥한 구석에 입구가 있는데, 거기부터 이음새가 없는(어떻게 깍아 냈을까?) 돌 벽으로 이루어진 석굴을 20여 미터 정도 걸어 내려가면 첫 번째 입구가 나타난다.
삼중으로 관리되는 서고의 첫 번째 입구를 지키는 두 명의 흑의 무사가 내가 나타나자 긴장하여 두 손을 모으며 상체를 깊이 숙였다.
원판이 특별히 선정한 특급 무사들로.. 흑쌍살(黑雙殺)이라던가? 하여간 눈빛이 장난이 아니다.
그래서 내가 오면 무조건 ‘눈깔아’라고 지시해 놓았었다.
“응..? 뭐해?”
살벌한 무사들이 열어 준 두꺼운 철문을 통과하던 나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대교 자매가 어정쩡한 표정으로 날 따라 오지 못하고 있었다.
“이봐, 거기 두 명, 그 애들은 괜찮으니까 막지마.”
그래도 대교 자매는 내 눈치를 보며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원판 외에는 심지어 장로급들도 들어오지 못하는, 말하자면 ‘금단의 지역’에 들어서는 것이 너무나 두려운 표정들이었다.
음… 그러고 보니 한 5년 전인가에 예외적으로 원판이 시비들 몇 명을 데리고 들어갔었는데, 나올 때는 혼자였더라… 하는 ‘극악괴담’이 있다던가?
“…그럼 대교만 들어와. 미령인 그 도시락 언니 주고…”
미령이는 두려움에 찬 얼굴로 망설였으나 대교는 주저하지 않고 막내 미령이가 들고 있던 도시락 바구니를 건네 들었다.
흠.. 그러고 보면, 첫인상에 비해 대교는 가끔 상당히 대담한 면모를 보일 때가 있다.
구여운 것…(버릇이 되어 가나보다…-_-;;)
암튼, 첫 번째 문을 통과하면 적어도 5분 정도는 더듬거리며 지하실 계단을 내려가야 한다.
양쪽 벽에 일정하게 박혀있는 매우 작은 야광돌(진짜 명칭은 모르겠다)이 어슴프레 앞을 밝혀주지만, 어쩌면 그것이 이 지하계단을 더욱 음산하고 귀기 어린 분위기로 만드는 지도 몰랐다.
기분 탓인지, 가끔 귀신이 흐느끼는 듯한 섬뜩한 소리가 벽 속에서 들려 올 때도 있다.
이렇게 음산한 지하의 공간 속에서는 그 소리가 어딘가의 틈을 통과하는 공기 소리일 거라는 이성적인 판단을 하기에 무리가 있었다.
벌써 세 번째 오는 길인데도, 벽 속에서 흘러나오는 귀곡성(鬼哭聲)은 번번이 내 살갗에 소름이 돋게 한다.
나는 대한민국 특공대 진유준 하사다.
막강, 선봉 특공 3중대 전투력의 상징인…
제기… 지난번처럼 그렇게 되뇌어 보았지만, 개뿔! 그래도 무섭다.
옆에서 따르고 있는 대교를 의식한 ‘자존심’ 때문에 지난번에 혼자 온 것보다는 덜 무서웠지만…
암튼, 어찌 어찌 내려가다 보면 앞이 슬쩍 넓어지고, 약 3,4평 정도 넓이의 공터에 도착하게 된다.
사실, 양쪽 벽 사이의 거리나 천장까지의 높이는 역시 어둠 때문에 정확하게 가늠하기는 어렵고… 확실한 것은 정면이 매끈한(지난번에 만져봐서 안다) 대리석 같은 석벽으로 막혀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 공터의 한가운데 걸음을 멈추고 마음의 준비(?)를 했다.
“..도련님….”
“..도련님….”
으흐…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저 소름끼치는 이중 목소리…
두 남녀(목소리로는 나이도 짐작할 수 없다)는 어둠 속, 아니 어쩌면 저 석벽 속 어딘가에 숨어있기라도 한 듯 보이지 않는 가운데 말을 걸어온다.
가뜩이나 서늘한 목소리들인데, 거기다 두 사람이 마치 한 사람이 말하듯 완벽하게 동시에 입을 여는 것이다.
두 번째 관문을 지키는 자들의 이 개성 있는(?) 음성 때문에 나는 그들을 ‘아수라 백작’ 쯤으로 상상하곤 했다.
“..격조..하셨습니다….”
“..격조..하셨습니다….”
“아, 뭐.. 이런저런 일로 바빠서…”
어지간하면 나도 ‘그 동안 잘 지냈어?’ 하겠는데, 이 괴이망측한 인간들한테는 그런 인사가 잘 안 나온다.
말이 소름끼치는 음성이지, 이 보이지 않는 남녀의 음성은 마치 칼 같은 것으로 금속면을 긁어대는 듯이 사람의 전신 피부를 쭈볏거리게 하고 솟아오르게 한다.
옆의 대교를 보니 애써 태연한 척하려 하고 있지만, 내가 쥐고 있는 그녀의 손을 통해 그녀가 격렬하게 떨고 있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
어랏? 내가 언제부터 대교의 손을 잡고 있었던 거지?
그, 그..그긍–!!
분위기를 더욱 살리는(?) 어두운 음향과 함께 정면의 벽이 좌우로 갈라지고 있었다.
지난번까지는 놀라는 데 급급했지만 이번엔 좀 침착하게 거대한 돌문이 열리는 것을 바라볼 여유가 있었다.
소음은 좀 그렇지만, 어쨌든 저 몇 톤 무게의 거대한 돌문이 저런 식으로 작동하려면 우리 시대의 기술로도 굉장한 각오(돈이 많이 드니까)로 제작된 기계장치가 필요할 것이다.
근데 이게 정말로 이 시대에서 가능하다니…
호기심이 모락모락 솟아나는 것을 참으며 나는 벽이 열려진 곳으로 들어섰다.
[한 가지 잊지 마십시오. 주인님.]
내 손목의 미래 로봇 몽몽이 유난히 기계적인 음성으로 경고해 왔다.
알아, 짜샤…라고 속으로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