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3권 4화 – 떠도는 다크의 운명
떠도는 다크의 운명
“그래, 지하에서의 산책은 즐거웠나?”
다크가 꽁꽁 묶여서 돌아오자 미네르바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면서 반겨 맞이했다. 그녀가 미들 소드를 휘두를 힘도 바닥나 버려 지쳐 쓰러진 것을, 여태껏 고생한 기사들이 지근지근 밟아놨기에 군데군데 멍이 들어 있었지만 그런 건 아예 미네르바의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녀는 일단 상대가 건강하게 돌아왔다는 것에 만 족했던 것이다.
“지…하…라고?”
“그럼. 황궁 깊숙이 마련되어 있는 지하 궁전이었지. 요소요소에 마련되어 있는 거점만 막고 있다면 마법사가 아닌 한 절대로 탈출할 수 없는…….”
“그랬었군.”
이제야 다크는 그 괴상했던 실내 구조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봐, 시작하기로 하지.”
“전하, 정말 정신계 마법을 써도 상관없겠사옵니까?”
지오그네가 이렇게 물어본 것은 따로 이유가 있었다. 고문 같은 것은 행해 봐야 육체만 절단 날 뿐이지만 정신계 마법은 달랐다. 훨씬 힘이 적게 들고, 빨리 알아낼 수 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상대의 정신에 심각한 타격을 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네르바의 입장은 달랐다. 다크가 바보가 돼든, 아니면 또 다른 어떤 후유 증이 생기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정신은 엉망이 되어도 상관이 없었지만 육체는 말짱해야만 했던 것이다. 코린트에 넘겨줘야 했으니까 말이다.
“잠깐만 기다려!”
“뭐지?”
미네르바는 궁금한 듯 물었다. 상대는 정신계 마법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일이 좀 더 쉽게 풀릴 수도 있었다.
“마법을 걸든 뭘 하든 상관은 안 하겠는데,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어서…….”
곧 있다가 다크의 운명이 어떻게 풀릴 것인지 대충 짐작하는 미네르바는 호기롭게 응해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을 텐데, 죽기 전에 소원이나 들어주겠다는 심정으로.
“좋아, 뭐냐? 크게 중요한 것만 아니면 가르쳐 주지.”
“나한테 쓴 약이 뭐지? 나도 꽤 조심한다고 했는데, 왜 그렇게 되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단 말이야.”
“호호홋, 그거야 간단하지. 검술의 고수에게 내가 미련하게 독약을 썼겠냐? 수면제를 썼지. 그것도 아주 특이한 것으로 말이야. 먼저 음식에다가 약을 썼고.”
“음식은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그리고 너도 같이 먹었잖아.”
“물론 같이 먹었지. 그리고 또 하나 술에도 약을 썼지.”
“술은 시녀가 시음을 했었는데? 그년은 멀쩡했잖아.”
“물론이지. 술과 음식에 들어간 약은 서로 달라. 그리고 그 둘은 합쳐져야 약효를 발휘하지. 코끼리도 잠들 정도로 강력한 약효를 말이야.”
다크는 이제야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왜 그렇게 조심했는데도 약에 당했는지 말이다. 그리고 다시는 그딴 방법에 당하지 않을 거라고 속으로 다짐했다. 그 런 그녀를 보며 미네르바가 이죽거렸다.
“아마도 다시는 그런 약물에 속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겠지?”
다크는 미네르바를 빤히 올려다봤다. 속으로는 당연하지 하고 대답하면서 말이다.
“내가 이렇듯 친절하게 알려 준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아마 짐작도 못 하겠지. 내가 이렇듯 알려 준 이유는, 너에게 다시는 그런 약을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알아? 너는 이제 죽은 목숨이라구. 호호홋! 자, 지오그네. 빨리 시작해.”
미네르바가 지시하자 지오그네는 곧장 정신계 마법을 썼다. 다크는 적의 마법 공격을 막아 주는 그 어떤 마법 도구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적의 정신계 공 격을 막기 위해 마나를 구동시킬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거기에다가 설상가상으로 그녀가 쌓은 마나의 근원은 모든 사악한 대법을 저절로 막아 준다는 정종(正宗)의 내공심법인 태허무령심법도 아니었다. 그녀는 공력 을 상실한 후 태허무령심법으로 내공의 기초를 쌓다가 나이아드의 방해에 가로막히자 그것을 포기하고, 곧장 무리를 해서 매우 불안정하기 그지없는 마교의 정통 심법을 이용하여 속성으로 내공을 쌓았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의 정신력이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정신계 마법 공격을 막을 수는 없었다.
“끼야아아아악!”
머리가 빠개지는 듯한 지독한 고통에 다크는 드디어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강력한 정신력이 정신계 마법이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막으면 막을수록 그 고통은 엄청나게 가중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다크의 눈빛은 뭔가에 홀린 듯 흐리멍텅하게 바뀌었다. 그리고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그 고통도 멎었다.
“다 되었사옵니다, 전하.”
“좋아.”
미네르바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다크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대의 이름은?”
[묵향.]
“무키앙? 이상하군. 그래, 그대는 누구에게 검술을 배웠나?”
[여러 사부들에게 배웠다.)
지오그네를 바라보며 미네르바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거 어느 나라 말인지 알아듣겠나?”
“잘 모르겠사옵니다, 전하. 이게 말로만 전해 듣던 저 머나먼 서방 땅의 언어가 아닐지……. 그녀가 가지고 있는 검의 모양도 그렇고…….”
“서방 땅이라고? 그렇게 먼 곳에 있는 녀석이 왜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또 왜 크라레스의 일에 간섭하고 있는 거고?”
“글쎄요.”
“이봐, 너는 왜 크라레스를 돕는 거지?”
미네르바의 질문에 다크는 몽롱한 어조로 대답했다.
〔나에게 자신들을 도와주면 그 대가로 고향에 돌아갈 수 있게 해 준다고 했으니까.〕
미네르바는 짜증난다는 듯 외쳤다.
“이쪽 말로 해.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까.”
“나에게 자신들을 도와주면 그 대가로 고향에 돌아갈 수 있게 해 준다고 했으니까.”
“고향에 돌아간다고?”
그로부터 몇 시간에 걸쳐 미네르바의 심문은 계속되었다. 그런 후 미네르바가 알아낸 사실은 너무나도 놀라운 것이었다. 상대가 다른 세계에서 날아온 인물이라는 점은 미네르바에게 가히 충격적인 것이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그녀를 이쪽에서 이용할 수도 있다는 결론이 나오지 않나?”
“물론 그럴 수도 있을 것이옵니다, 전하. 이쪽이 크라레스 따위보다는 훨씬 더 마법이 발달한 상태니까요.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그녀를 잡아온 이상 분노로 이성 을 잃은 그녀가 협상에 응할까요? 또, 그녀 같은 강자가 만약 약속을 저버리고 배신한다면 도저히 손 쓸 방법이 없사옵니다.”
지오그네의 말에 미네르바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확실히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풀려난 후에 다크가 약속을 지킨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글쎄……. 그건 그래. 그녀가 풀려났을 때 제어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지.”
“이렇게 하면 어떻겠사옵니까?”
“어떻게 말인가?”
“여태껏 타국의 기사를 체포했을 때 했듯이 세뇌를 하는 것이옵니다. 그렇게 하면 그녀를 마음껏 써먹을 수가 있지 않겠사옵니까?”
그 말에 미네르바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녀가 만약 혼자였다면 이런 궁리를 할 이유가 있었을까?
“만약 그랬다가 그녀의 아버지라는 그 드래곤이 찾아온다면?”
미네르바의 말은 잠시 지오그네가 잊어버리고 있던 사실을 떠올리게 했다.
“그렇군요. 우리가 그녀를 써먹는다면 분명히 소문을 듣고 드래곤이 찾아오겠죠.”
“과거의 기억만을 봉인한 채 코린트에 넘기는 것은 어떨까? 코린트가 그녀를 이용할 수 있는 근원을 제거해 버리는 거지.”
“그럴 필요가 있겠사옵니까? 기억을 봉인하는 마법은 마법사가 조금만 조사를 해 보면 금방 눈치 챌 것이옵니다. 그리고 능력 있는 마법사라면 손쉽게 풀 수 있겠 지요. 그냥 코린트에 넘겨준다고 해도, 코린트가 그녀를 이용하려고 들 이유는 없사옵니다.”
“왜 그런가?”
“코린트는 그녀가 없다고 해도 현재 최강의 자리를 잡고 있사옵니다. 물론 기사단 전력을 회복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말이옵니다. 그런 상황에서 언제 누 군가가 또다시 그녀에게 좋은 조건을 제시한다면 돌변할지도 모르는 것을 뻔히 알면서 그녀를 이용하는 모험을 감행할까요? 오히려 그들은 변수를 없애기 위해 그 녀를 즉각 없애려고 들 것이 분명하옵니다. 그녀의 힘을 빌릴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들은 강하기 때문이옵니다.”
“그들이 그녀를 반드시 죽인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드래곤이 있는데.
미네르바의 말에 지오그네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염려 마시옵소서. 코린트에서는 그녀가 드래곤의 양녀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사옵니다. 전하께옵서도 그 브로마네스 사건 이후에 아르티어스의 레어에 찾아가신 후에야 아시지 않으셨사옵니까?”
미네르바는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말했다. 자신이 그녀와 드래곤의 연관 관계를 알아낸 것은 그야말로 운명의 수레바퀴가 돌다가 한 곳에서 일치했기에 얻어 낸 행 운이었던 것이다. 다크는 절대로 그녀의 아버지가 드래곤이라고 떠든 적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코린트는 그 사실을 절대로 알지 못할 것이다.
“그렇군……. 하지만 그들이 그녀를 세뇌한다면?”
“그건 방금 말씀드렸듯이 드래곤의 존재로 인해 오히려 더 피해가 클 것이옵니다. 만약 본국이 세뇌당한 그녀에게 기습을 당한다면 상당한 타격을 받을 것이옵니
다. 하지만 그 사실을 드래곤에게 넌지시 알려 주면 어떻게 될까요? 바로 그날로 코린트는 끝장이옵니다. 안 그렇사옵니까? 헤헤헷.”
“그렇군. 경의 말이 옳아. 자, 이제 그녀에 대한 처리 방법이 결정되었으니, 타이탄부터 빼앗아야 하겠지? 그런 다음 곧장 코린트에 넘겨줘!”
“옛, 전하.”
지오그네는 다크를 다그쳐서 타이탄과의 계약을 해지하도록 했고, 이미 이성을 잃고 있는 다크는 그 맹세를 따라했다. 그러자 공간이 열리면서 거대한 타이탄이 슬쩍 모습을 드러냈다.
<전에도 말했지만 너와 헤어지고 싶은 마음은 하나도 없다. 앞으로도 그딴 일로 나를 성가시게 하지 마라.>
그런 후 타이탄은 다시금 공간 저편으로 모습을 감춰 버렸다.
계약을 해지한 타이탄이 갑자기 모습을 감춰 버렸기에 당황한 미네르바가 외쳤다. 계약을 해지한 타이탄이 모습을 감춘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의도적으로 미스릴을 입히지 않은 헬 프로네라면 혹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계약이 해지되면 거의 반 장님이나 다름없는 타이탄은 그 자리에 남아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어떻게 된 일이냐?”
타이탄과 주인 간에 이루어지는 대화가 다른 사람에게 들릴 리가 만무했기에, 지오그네 또한 어떻게 일이 돌아가는 것인지 알지 못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렇기에 지오그네는 다크에게 물어봤다.
“왜 갑자기 모습을 감춰 버린 것이지?”
다크는 멍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안드로메다는 나와의 계약을 해지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럴 수가 있나? 타이탄이 주인의 말을 거역하다니 있을 수 없어!”
그런 지오그네를 바라보며 미네르바가 조용히 말했다.
“아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야. 헬 프로네 정도만 해도 자아가 강한데…, 그보다 더 강력한 청기사라면 능히 그럴 수 있겠지.”
“그렇다면 치레아 대공을 없애지 않는 한은 타이탄을 뺏을 수 없겠군요.”
“그렇다고 없앨 수는 없지 않나? 그녀를 죽이는 것은 코린트에게 떠넘겨야 할 테니까 말이야.”
“그냥 넘겨줄까요?”
“아깝긴 하지만 어쩔 수 없군. 언제 또다시 드래곤이 찾아올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타이탄 한 대 빼앗자고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지. 빨리 코린트로 데려가게.” “옛, 전하.”
“현재 각 군단들은 예정된 목표지를 향해 순조롭게 진격 중에 있사옵니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예정대로 5일 후에 알카사스의 전위군(前衛軍)과 만날 수 있게 될 것이옵니다. 그렇게 되면……..
로체스터 공작이 기사들 및 군의 고위급 장교들과 함께 회의를 열고 있는 도중에 마법사 한 명이 슬쩍 들어오더니 공작에게 다가가서 귓속말을 건네 왔다. “전하! 크루마에서 사신이 도착했사옵니다.”
공작은 한 장교의 보고를 경청하던 중이었기에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퉁명스레 말했다.
“크루마에서 사신이 한두 번 온 것도 아닌데 뭐가 급하다고 회의 중에 들어온 것인가?”
공작의 질책에 마법사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보고를 올리지 않을 수도 없었다. 매우 중요한 보고였기에 회의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보고 를 올렸다가는 경을 칠 우려가 있었던 것이다.
“크루마의 사신이 한 소녀를 데리고 왔사옵니다. 그의 말로는 그 소녀가 치레아 대공이라고 하옵니다.”
드디어 미네르바가 약속을 지킨 것이다.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던 공작의 안색이 활짝 펴졌다.
“뭣이? 흐흐흐……. 드디어 그녀가 우리의 손에 들어왔군.”
공작은 모여 있는 기사들 및 장교들을 향해 외쳤다.
“경들! 대단한 희소식이 접수되었소. 치레아 대공이 본국의 손에 넘어왔다는 보고외다.”
그녀로 인해 엄청난 고생을 했던 코린트군에게 있어서 이것은 그야말로 경사스러운 소식이었다. 회의장에 모여 있던 기사들 및 장교들이 회의고 뭐고 까맣게 잊어 버리고 이 경악할 만한 소식을 두고 저마다 쑤군거리는 가운데, 로체스터 공작은 한껏 희열에 들뜨기 시작했다. 이제 드디어 복수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가장 큰 장애물을 제거할 수 있게 되었다는 흥분감이 과도한 탓인지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로체스터 공작과는 반대로 용병대장의 눈빛은 착잡하게 가 라앉아 있었다. 총사령관인 로체스터와 달리 권력의 전면(面)에서 물러난 용병대장에게 있어서 그녀는 더 이상 얄미운 적이 아니었기에 냉정할 수 있었던 것이 다. 그렇기에 오히려 뛰어난 무인이었던 상대가 이렇듯 허무하게 생을 종료해야 하는 것에 대한 동정심까지 느끼고 있었다.
“당장 그 계집을 처형할 준비를 하도록 하여라.”
로체스터 공작은 마법사에게 지시한 후 다시금 회의장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통쾌하게 외쳤다.
“나는 경들에게 가장 큰 방해물이었던 그녀가 처형되는 모습을 직접 보여 주겠다!”
로체스터 공작은 포로를 공개 처형할 생각임을 공식적으로 선포한 것이었다.
“우와!”
부하들의 환희에 찬 함성을 들으며 로체스터 공작은 여태껏 자신이 이 말 한마디를 하기 위해 살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까지 들었다. 그만큼 통쾌했던 것이다. 로체스터 공작에게 있어서 그녀는 검술이나 뭐 그런 것에 대한 경쟁자가 아닌, 오로지 모든 일에 사사건건 방해를 놓는 훼방꾼 이상의 의미가 없었다. 그렇기에 손 쉽게 죽여 버리려고 하는 것이다.
로체스터 공작은 명령을 내려놓고 이제 손 안에 들어온 ‘웬수’를 구경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로체스터 공작이 막 자리에서 벗어나려는 순간 그를 가로막는 사내가 있었다.
“잠깐!”
용병대장은 친구가 이렇게 빨리 손을 쓰려고 들 줄 몰랐기에 당황했다. 그리고 당황한 김에 평소에 하던 대로 친구의 앞을 막아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를 이해 해 줄 수 있는 것은 진실을 알고 있는 로체스터 공작뿐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와 동시에 주변에 있는 기사들이 벌 떼와 같이 달려들었던 것이다. 감히 천한 용병대장 따위가 총사령관의 가는 길을 막아섰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로체스터 공작은 기사들을 물리친 후 용병대장에게 낮은 어조로 말했다. “무슨… 일인가?”
용병대장은 주위의 눈을 의식한 탓인지 아주 정중한 어조로 부탁했다.
“전하, 잠시만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사옵니까? 긴히 말씀 올릴 의견이 있사옵니다.”
“허락하네. 경은 나를 따라오게나.”
로체스터 공작은 용병대장을 이끌고 멀찍이 떨어진 후 속삭였다.
“무슨 일인가?”
“그녀를 이렇듯 급하게 죽일 필요가 있을까?”
“그렇다면 자네는 어쩌자는 건가?”
“그녀에 대해 좀 더 조사해 보는 것이 좋겠지. 아무래도 그녀의 아버지라는 드래곤도 좀 마음에 걸리고 말이야. 또 크루마가 순순히 그녀를 이쪽에 넘겨준 것도 좀 의외거든. 그들의 속셈도 좀 더 철저히 분석해 본 후에 처리하는 것이 좋을 듯하네.”
용병대장의 얘기를 들으면서 로체스터는 감정을 가라앉혔다.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니 친구의 말이 꽤나 일리가 있었다. 적은 손아귀에 들어온 상태인데, 서둘러서 죽여 버릴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로체스터는 기사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되돌아가서는 최종적인 명령을 내렸다.
“죄수를 지하 감옥에 가둬라.”
기사들이 웅성거렸지만 로체스터 공작은 그들의 의견을 간단히 무시하며 외쳤다.
“좀 더 조사해 볼 것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니 경들은 자숙하고 해산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