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1부 – 13화


  • 13 –

결국,
난 참지 못하고 살짝 실눈을 떴다.

허걱!

대교의 눈부신 나체는 그렇다 치고, 장면 자체가 너무 그로테스크했다.

내 손목의 몽몽에서 무수히 뻗어 나온 가늘고 긴 촉수 같은 것들이 대교의 몸 여기저기에 달라붙어 있었고,
그 촉수들이 대교의 몸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 대교는 길지 않은 시간이었음에도 전신이 땀에 젖어 연신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누가 봤다면 몽몽이… 아니, 그런 걸 손목에 차고 다니는 내가 무슨 악독한 외계인쯤 되어서
지구 여자의 생체 실험을 하는 것으로 보일지 모르겠다.

“아, 아아아- 흐응-!”

…신음소리가 갈수록 야릇해진다.

[이 여성 신체의 신경계 전반에 걸친 반응 속도를 체크 중입니다.
일부 신경계통에 주어진 가상 신호는 여성이 심한 운동, 혹은 성행위 시와 유사한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떴다.

그리고 또…

몇 번을 반복했지만 역시 태연하게 대교의 땀에 젖어 꿈틀대는 알몸과 신음소리에 태연하기가 어려웠다.

원판의 몸은 이미 흥분할 대로 흥분하여 아랫도리가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자신의 몸에 발생하는 현상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텐데도,
내 명령에 따라 여전히 굳게 눈을 감은 채 버티고 있는 대교…

나는, 나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이번에는 몽몽이 또 무슨 짓(?)을 시작했는지
대교가 부들부들 몸을 떨기 시작했다.

“아앗!”

대교의 입에서 낮은 비명이 터져 나왔고, 그녀의 양손이 허공을 휘저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상체를 숙이며 오른손을 내밀어 그녀의 한 손을 잡았다.

그녀도 나도 흠칫 놀랐다.

그러나 나는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빌어먹을!
성욕 따위(?)가 사라진 지 오래다.

이 무대뽀 불사파 정신의 충성 소녀가 안쓰러워 죽겠다.

또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몽몽의 촉수(?)들이 일제히 거두어지고 있었다.

일단 회수되자, 몽몽의 몸체에는 촉수가 뻗어 나왔던 자리조차 구분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재질로 만들어졌는지 궁금해지는 미래 로봇이다.

[신체 스캔은 완료되었습니다. 소요 시간은 7분 24.34초.
‘각막 스크린’ 기능으로 브리핑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나는 몽몽의 말을 씹고, 대교에게 명령했다.

“…대교, 이제 끝났다. 눈을 떠도 좋아. 그리고 일어나서 옷을 입어.”

“…존명!”

내가 약속을 어기고 눈을 뜨고 있었다는 것을 따지지도 않은 채,
대교는 몸을 일으켜 옷을 걸치기 시작했다.

[그녀의 신체는 ‘영약’의 흡수와 무공 습득에 적합한 체질입니다.
재계산을 해봐야 하지만, 원하시는 수준의 행성 에너지를 갖추는 데 소요되는 기간이 더 짧을 수도 있습니다.
참고로, 제가 제작된 시대의 프로 스포츠맨 상위 10% 안에 드는 우수한 신체이기도 합니다.
무공 운용에 필요한 지능지수는 뇌를 스캔하는 것만으로 판단하기 어려우므로,
그녀에게 무공서를 과제로 주고 학습능력을 테스트해야 합니다.]

나는 몽몽의 말을 또 씹었다.

“왜… 묻지 않지? 내가 너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옷을 입은 후,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다음 명령을 기다리던 대교가 고개를 들고 날 올려다보았다.

“방금 네 몸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겠어?”

“소녀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소녀가 알고 있는 것은 곡주께서 비록 ‘천형’의 사슬 때문에 무공을 익힐 수 없으시기는 하나,
천하무쌍의 의술을 지니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소녀의 몸을… 어떤 형태로든 시험하셨다면, 실망시켜 드리지 않았기를 바랄 뿐입니다.”

톡! 톡! 톡!

“몽몽, 방금 씹어서 미안타.
그 ‘마봉후’라는 옛날 여자 대장로의 무공서는 어디에 있지?”

[3번째 책장의 4번째 칸, 좌측으로부터 24번, 25번째 서적입니다.
서명은 수라진경(修羅眞經), 요하검결(曜夏劍訣)…]

몽몽과 대교… 내가 무슨 말을 해도 화를 내는 법도, 의심하는 법도 없다.
하나는 로봇이고, 하나는 로봇처럼 되기를 강요받으며 성장한 소녀… 젠장!

톡! 톡! 톡!

“대교, 3번째 책장의 4번째 칸이다.
수라진경과 요하검결, 그 두 권을 가져와.”

대교는 무협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날렵한 동작으로 책장까지 순식간에 날아갔다가 돌아왔다.

나는 두 손으로 공손히 책을 받쳐 들고 내미는 대교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내가 아니야. 그건 네가 봐야 할 책이야.”

대교의 눈이 평소의 두 배쯤 커지고 있었다.

대교의 지금 표정은 시비에서 곡주 직속의 ‘호위무사’가 되었을 때와 비슷하다.

이번엔 울지도 못하고, 그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몸을 떠는 것이 다를 뿐…

결정적으로 다른 상황은 내가 그때처럼 장난기 어린 기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부터 넌 여기서 지낸다.
음식은 내가 직접 이곳으로 가져올 것이고… 넌 내가 시키는 대로 따르며,
당분간 이곳에서 상승무공을 익힌다.
모든 것을 잊고, 생각하지 말아라.
오직 무공에만 집중한다.
그래… 마봉후… 이 비화곡 역대 유일의 여자 대장로…
너라고 못될 법은 없지, 안 그래?”

“고, 곡주님… 저, 전…”

“우는 소리 하지 마.
너의 무공 습득 진도가 늦으면, 그걸로 끝이다.
널 초고수로 키우는 것도, 널 살리는 것도 전부 취소할 거야.
명심해! 어설픈 마음이면 진짜 죽는다!”

사실은… 대교에게 한 말이라기보다, 나 자신에게 한 말이었다.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를 벌여 놓고도 여자의 알몸에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어설픈 정신 상태의 변태바보…
제기, 그래… 이건 군대에서 분대원 이끌고 야간 독도법(오밤중에 산 속에서 지도대로 목표물을 찾는 훈련..–;;) 할 때와는 다르다.

그때는 잠 못 자고 산 속을 헤매다가 분대원들을 돌아보며 비장한 외침,
‘이 산이 아닌게벼!’라고 해도 분대원들이 죽지는 않았다.

비록 맨땅에 헤딩해 죽고 싶은 표정, 혹은 분대장인 날 죽이고 싶어 하는 표정을 보이긴 했어도…

암튼, 일이 잘못되면 대교는 짤 없이 죽는다.

그리고 또, 이번 일이 잘못 풀리면 나는 어떨지 몰라도, 장청란이란 계집애 일파와 우리 측 인간들…
어쨌든 수많은 인명이 죽을지 모른다.

정신… 차리자.

이건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다!

나는 그렇게 사태의 심각성을 되새기며 스스로를 다잡고 비밀 서고를 나섰다.

영약을 먹이는 건 하루 사이에 대교가 어느 정도 ‘마봉후’의 무공을 소화해내는지 본 후에 하기로 했다.
그리고 장청란이란 계집애가 언제쯤 이곳에 나타날지를 대략이나마 알아야 일정을 짤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쨌든, 내일은 대교가 먹을 음식을 잔뜩 싸 가지고 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걷는데,
두 번째 문을 지키는 소위 ‘이중 목소리’의 년 놈들이 말을 걸어왔다.

“…노파심에… 드리는… 말씀…”
“…노파심에… 드리는… 말씀…”

젠장! 또 뭐냐!

“…시체는… 화로에… 처리하시면… 말끔…”
“…시체는… 화로에… 처리하시면… 말끔…”

우쒸-! 내가 대교를 처치하고 나오는 걸로 아는 건 좋은데, 시체를 뭐 어째?

“…그런 건 말 안 해 줘도 돼. 이 아수라 백작 같으니라구!”

“…아수라 백작… 무슨… 뜻입니까…?”
“…아수라 백작… 무슨… 뜻입니까…?”

“어, 그건 그냥…”

“…노복들의… 별호는… 음양쌍마…”
“…노복들의… 별호는… 음양쌍마…”

“쳇! 아수라 백작이란 먼 동방의 한 섬나라에서… 그래, 그곳의 ‘신화’에 나오는 남녀 한 몸에
얼굴도 반씩 나누어 가지고 있는 괴물… 아니, 마인의 이름이야.
댁들 말하는 거 들으니까 생각이 나서 말이야. 아예 별호를 그걸로 바꾸는 건 어때?”

흐… 졸지에 만화 ‘마징가 Z’가 ‘일본 신화’가 됐다.

응…? 어랏-? 근데 왜 이 놈들이 대꾸가 없지?

[상대의 에너지 반응이 급격히 상승하고 있습니다.
주인님을 목표로 하고 있지는 않지만, 대규모 살상이 가능한 형태의 에너지입니다.
대피할 것을 권고합니다.]

뭐라고라고라고라–!!
에구구- 내 농담에 화가 난 건가?
별호를 딴 걸로 바꾸라는 말이 그렇게 불쾌한 건가?

물론 날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자들이지만, 극악서생 일파(?)인 만큼 성질도 드러울 테고,
열받아서 에이- 썅-! 하면서 가볍게 손만 뻗어도 난 기냥 즉사일 것이다.

“아,하,하- …그냥 농담한 거야. 농담… 거참… 뭐 그런 거 가지고…”

얼버무리면서 나는 잽싸게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무슨 공격이 있지는 않았고, 대신 그들의 인사 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히……”
“…어떻게……”

응? 뭐?
나는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었다.

“…..노복들의 별호… 뜻대로 따르겠습니다….”
“…..노복들의 별호… 뜻대로 따르겠습니다….”

이것 봐라? 뭔가 좀 이상한데?

[에너지 반응이 사라졌습니다.]

웬지 기분은 이상했지만, 위기는 사라진 것 같고… 일단 웃기다.

노복들이 누군지 아느냐?
바로 ‘아수라 백작’이시다!

살벌한 분위기 속에 등장한 특급 마두들이 이 시대 군웅들을 향해 이렇게 외치는 것을 상상하니,
정말이지 웃긴다.

대교의 세 동생들은 첫 번째 문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려면, 첫 번째 문지기인 ‘흑쌍살’들과 농담 따먹기라도 하고 있을 것이지,
눈치를 보니 소교, 소령, 미령… 모두 처음 탄약고 근무 서는 이등병처럼 경직된 자세로
왠 종일 서 있었던 것 같다.

무심한 대빵(나)이 어디 가서 좀 놀다 오라거나 하는 말을 깜박했으니…

“…가자, 얘들아! 그럼 흑쌍살, 너그들은 계속 수고해라.”

“존명!”

“…그 말, 쓰지 마!
내가 뭐라 그러면, ‘예-!’ 하고 대답만 해, 알았지?”

지난번에 내가 오면 ‘눈깔아’라고 지시했을 때처럼 약간 의아해하고 당혹해하는 흑쌍살들을 뒤로하고,
나는 천천히 지하실 출구를 향해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