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3권 7화 – 그대들의 뜻대로 하라
그대들의 뜻대로 하라
치레아 대공과 그녀를 비호하던 드래곤이 갑자기 사라진 것이 알려진 그날. 그날은 크라레스 고위층이 멸망이란 단어를 떠올린 암울한 날이었다. 그날 이후 다론 은 아무래도 스승의 상태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그는 수십 년이 넘게 토지에르를 곁에서 모셨던 수제자였다. 그렇기에 그는 스승의 습관이라든지 말투 따위를 매우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스승은 뭔가 조금 바뀌었다. 그것을 느끼자마자 다론은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고 조용히 황궁을 떠났다. 이런 증상은 흑마법 사들을 상대하면서 간혹 보아 왔기에,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는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르르르르~.
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자 다론은 재빨리 탁자 위에 놓아 두었던 짐 꾸러미를 꾸려 등에 지면서 투덜거렸다.
“젠장! 빨리도 찾아냈군.”
건물 내의 몇 군데에 쳐놨던 알람(Alarm) 마법에 누군가가 걸렸는지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침입자가 실내로 들어왔다는 말이었다. 빨리 탈출하는 것만이 살길 이었다. 자신을 쫓고 있는 인물은 다론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다론은 짐을 들고는 미리 만들어 뒀던 공간 이동 마법진 위로 올라선 후 서둘러 시동어를 외쳤다. 상 대와 싸워봐야 승리할 가능성은 조금도 없는 만큼 오직 도망만이 살길이었다.
“콰쾅!”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지붕이 와르르 먼지를 뿜어내며 내려앉았다. 상대는 다론이 지하실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아냄과 동시에 지하실 입구를 찾을 생각은 처음부 터 하지도 않고 과격하게 지하실 지붕을 통째로 날려 버린 것이다.
시커먼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는 그 추격자는 희뿌연 빛과 함께 다론이 사라지는 것을 보며 화가 머리끝까지 난 듯, 희미한 빛이 아직 남아 있는 곳을 향해 재빨리 검붉은 덩어리를 날렸다. 그와 함께 또다시 대 폭발이 일어났다. 자신의 발밑에서 대폭발이 일어났기에 그는 먼지를 흠뻑 뒤집어 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것 따위는 개의치 않고, 강력한 흑마법에 직격당해 엄청난 열기와 고약한 냄새가 뿜어져 나오고 있는 지하실로 뛰어내려서는 이리저리 살펴봤 다. 하지만 어디에도 시체의 흔적은 없었다.
“쥐새끼 같은 놈.”
추격자는 자신의 공격이 조금 늦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놈이 있는 곳을 조금만 빨리 찾아냈어도 공간 이동이 되기 직전에 죽여 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추격자는 품속에서 주먹만 한 수정 구슬을 꺼낸 후 땅바닥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고는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곧이어 수정 구슬 안에는 토지에르의 모습이 보였 다. 추격자는 토지에르의 모습이 보이자, 곧이어 땅바닥에 엎드리며 사죄했다.
“놈을 놓쳤사옵니다, 폐하. 지금 현재로서는 놈이 어디로 도망쳤는지 알 수 없사옵니다. 지시를 내려 주시옵소서!”
토지에르는 불같이 분노했다. 그놈은 자신의 정체를 눈치 챈 놈이었다. 그놈이 어딘가 가서 나불거린다면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 때문에 서둘러 죽이려고 했 는데, 바보 같은 부하 놈이 실패한 것이다.
“멍청한 놈, 겨우 시답잖은 마법사 한 놈 못 죽인단 말이냐?”
“죽여주시옵소서!”
“닥쳐라! 네놈은 죽일 가치도 없다.”
그 말을 들은 추격자는 머리통을 더욱 땅바닥에 푹 가져다가 붙였다.
“내 생각 같아서는 네놈을 찢어죽이고 싶다만, 아직도 네놈에게 시킬 일이 남아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라.”
“감사하옵니다, 폐하!”
“단서도 찾기 어려운 놈을 잡는 것은 포기하고, 네놈은 즉시 1단계 작업을 시작해라.”
“옛, 폐하.”
그와 동시에 수정 구슬에서 토지에르의 모습이 사라졌다. 추격자는 한숨을 내쉬며 공간 이동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토지에르, 아니 어둠의 마왕 크로네티오 의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설혹 그것이 죽음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그것이 흑마법사들만이 가지는 상하 관계에 따른 율법이었다.
크라레스는 완전히 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청기사도 3대 정도밖에 파괴되지 않았고, 카프록시아급 타이탄도 139대나 남아 있었다. 웬만한 국가들이 가지 고 있는 전력으로 미루어 봤을 때 이것은 결코 작은 전력이 아니었다. 거기에다가 최고 고위층이라고 할 수 있는 루빈스키나 토지에르도 사망한 것은 아니었다. 하 지만 그들은 항복이라는 최후의 카드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다크라는 인물의 지원이 없이 코린트, 알카사스, 아르곤의 3국 연합군과 싸운다는 것은 자 살 행위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크라레스는 와리스 후작의 주도하에 최소한의 대가만을 치른 상태에서 항복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전세는 협상할 건덕지라고는 남아 있지 않 을 정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조금이라도 피해를 줄이려면 상대가 원하는 대로 다 내줘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크라레스가 항복 문서에 서명하지 않고 있었던 것은, 와리스 후작의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순전히 승전국들 간의 이해관계가 얽혀 서로 간
에 갑론을박(甲乙駁하는데 엄청난 시간이 소모되었기 때문이었다.
승전국들 간의 분쟁의 원인은 처음 동맹을 맺으면서 알카사스는 스바시에 공국을, 아르곤은 크로나사 평원의 서부와 치레아 공국의 동부를 차지하는 것을 코린트 로부터 약속받았었다. 하지만 코린트의 군대가 크라레스로 단 한 명도 진군해 들어가지 않았기에 코린트는 단 한 치의 땅도 확보하지 못한 것에 문제가 있었다.
아르곤은 협상을 질질 끌면서 서쪽으로 군대를 계속 이동시켜 더 넓은 땅을 확보하려 했고, 그것은 알카사스도 마찬가지였다. 그 때문에 코린트는 서둘러서 크로 나사 평원의 각처에 병력들을 파견하여 상대가 점령지를 넓히지 못하게 막는 한편, 협상을 빨리 종결지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 두 나라는 말을 듣지 않았다.
어쨌든 이렇게 서로 간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기에 협상은 계속 늦춰지고 있었지만, 무한(無限)의 법칙은 없는 것이기에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코린트는 양국에 최후통첩을 넣어 서로 간의 의견 일치를 도출해 내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그리고 코린트는 크라레스의 황제에게 항복의 조건 중에 하나로 황제가 직접 케락스시에 와서 아그립파 4세 황제에게 사죄의 뜻을 표시한 후, 항복 문서에 서명할 것을 요구했다. 물론 사색(死色)이 다 된 와리스 후작이 통신을 통해 그 보고를 올리자, 기 사들과 마법사들은 벌 떼와 같이 일어서서 그것이 불가함을 역설했다. 그리고 사건은 그다음 날 터졌다.
“무슨 일이냐?”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워지면서 기사 한 명이 거의 피투성이가 된 채 달려 들어오자 황제는 크게 놀라서 외쳤다. 적의 침입이란 말인가? 항복을 위한 사신까지 보 낸 상황에서? 복잡한 생각들이 황제의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그 순간, 기사는 그 바쁜 와중에도 예법대로 황제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는 비장한 어조로 외쳤다. “폐하, 속히 피하소서. 반란이옵니다.”
“뭣이? 반란이라고?”
황제는 경악하여 벌떡 일어섰다가 서 있을 기력도 없는 듯 자리에 주저앉으면서 중얼거렸다.
“여기까지 반란군이 들어오다니. 근위 기사단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토지에르 경은?”
“토지에르 그 사악한 놈이 반란을 일으켰사옵니다.”
황제는 그때서야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지금 스바시에 대공은 치료 중이었고, 치레아 대공은 행방불명이었다. 그렇다 보니 자연히 군대의 지휘권은 토지에르가 가지고 있었다. 토지에르는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할 수 있는 근위 기사단과 수도에 주둔 중이던 제5전대를 어딘가로 보내 버린 후 반란을 일으켰을 것 이다.
“시간이 없사옵니다, 폐하. 빨리 피신을……. 으악!”
보고를 올리던 기사는 갑자기 뒤에서 날아온 붉은 불덩이를 맞고는 재가 되어 버렸다. 황제가 불덩이가 날아온 방향을 바라보니 그곳에는 토지에르가 음흉한 미소 를 지으며 서 있었다. 황제는 허리에 찬 검의 손잡이를 꽉 그러쥐었다. 그의 손은 분노로 인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감히 네놈이……. 짐이 그렇게 너를 믿었거늘…….?
황제는 불같이 치밀어 오르는 노기로 인해서 목소리까지 떨리고 있었다. 바로 이때 요란한 발소리가 들려오며 기사들과 병사들이 도착했다. 그들은 토지에르 쪽에 가담한 인물들인 듯, 저마다 손에는 피에 젖은 무기를 들고 있었지만 그것을 토지에르 쪽으로 겨누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것을 황제 쪽으로 겨누지도 않았다.
황제는 실내로 들어선 기사들의 얼굴들을 보고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내에 모습을 드러낸 기사들은 크라레스를 향해 충성을 다하던 명망 높은 기사들이었 다. 그리고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던 인물들이었다. 이들까지 가세했다면 대세는 기울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경들까지도…….?
토지에르는 황제를 향해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폐하, 소신이 어쩔 수 없이 거사를 일으켰사오나, 결코 폐하와 국가에 대한 충성심만은 변함이 없사옵니다. 이 점을 이해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토지에르와 함께 달려 들어온 기사들도 같이 외쳤다.
“이해해 주시옵소서!”
황제는 검에서 손을 놓으며 허탈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일이 이 지경까지 갔단 말인가? 허탈하도다! 어찌 황제된 자로서 신하들의 뜻을 그렇게도 모를 수 있었단 말인가? 다 짐의 잘못이로다. 그래, 그대들의 뜻대로 하 라.”
황제는 저항의 뜻을 버렸다. 물론 자신도 그래듀에이트니만큼 일전을 불사할 수도 있을 테지만, 그래 봐야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신하들의 충성 심이 약해서 반란을 일으켰겠는가? 오히려 반란에 참가한 이들은 크라레스 황가에 대한 충성심이 지나치게 강한 자들이었다. 누가 그들의 행위를 비난할 수 있다는 말인가? 기사들은 항복의 뜻을 전하는 황제 앞에 꿇어 앉아 눈물을 흘렸다. 이렇게 자신의 뜻을 전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들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그날 황제는 황궁의 지하 깊숙이 마련되어 있는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끝까지 황제를 옹호했던 신하들 역시 감옥에 갇혔다. 토지에르는 수도에서의 반란이 성공적으로 일단락되자 반란의 주모자들 중의 하나인 지그발트 폰 안티노스 후작을 불러들였다. 크라레스 제국의 모든 정보를 통괄하던 인물이 안티노스 경이었기 에 토지에르도 반란을 일으키면서 그를 포섭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안티노스 후작.”
“예, 공작 전하.”
“각 기사단의 지휘관 및 부지휘관들을 즉시 수도로 소환하도록 하시오.”
“예? 지금 말씀이시옵니까?”
“조금이라도 시간이 늦으면 안 될 것이오. 마법 통신망은 본인이 통제해 버렸기에 아직까지 수도에서의 변고를 그들이 모르고 있을 때 소환해야만 하오.”
“예, 전하. 하지만 꼭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사옵니까? 그들에게도 설명을 하면 충분히 이해할 것이옵니다.”
토지에르는 혀를 차며 상대를 책망했다.
“쯧쯧, 경은 황궁에서 피를 흘린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타이탄을 앞세워 대규모 전투를 벌이고 싶소? 만약 말로 해서 그들이 듣는다면 상관없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어떻게 하겠소?”
“소신의 생각이 짧았사옵니다, 전하. 하지만 지휘관이라면 몰라도 부지휘관까지 소환한다면 그쪽에서 의심하지 않겠사옵니까? 지휘관이 자리를 비웠을 때 그 자 리를 메워야 하기에 둘 다 부르는 경우는 없었지 않사옵니까?”
“전쟁은 이미 끝났소. 패전에 따른 대책 회의라고 하면 그들까지 소환이 가능할 거요.”
“예, 전하.”
“그들이 수도에 도착한 후 각 기사단에 전문을 띄워 수도로 집결시키도록 하시오. 그 편이 기사단들을 통제하기 쉬울 거요. 안 그래도 어려운 시기요. 우리끼리 자 중지란을 일으키면 아무것도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하시오.”
“예, 전하.”
안티노스 후작이 서둘러서 통신실 쪽으로 달려간 후, 홀로 남은 토지에르는 천천히 창가로 걸어갔다. 창문 밖으로는 크라레인시의 야경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 다. 그것을 바라보는 토지에르의 눈은 벌겋게 물들어 갔다. 그리고 얼굴 가득 광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 토지에르의 얼굴을 누군가가 봤다면 악마라고 할 만큼 여태까지의 중후한 토지에르의 얼굴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토지에르는 살기를 잔뜩 머금은 미소를 지 으면서 뇌까렸다.
“1천5백 년 만인가? 크하하하핫! 드디어 쾌락의 시간이 도래했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