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1부 – 6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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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대에게서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자. 웬일인지 지천공의 표정이 조금 이상해지며 뭔가 망설이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 날밤.. 그 날밤 그녀가 날 찾은 것도.. 당신의 뜻이었소..?”
음, 그거 물어 보려고 망설였군.
“대답하시오! 당신이 그녀를 이용해 내 심기를…”
“닥쳐라, 이놈! 처음부터 네가 잘난 체하여 그 아이를 거부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이다.”
…..역시 고증이 확실치 않아서 그런가? 대사가 어째 애매 모호하다. 자신이 시켰다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이 것이 보이느냐? 이제 네 놈만 없어지면 금마표국은 내 것이 될 것이다.”
성천표국의 국주는 품에서 어떤 문서 같은 것을 몇 장 꺼내어 흔들어 보였다.
“이, 이럴 수가.. 그렇다면 당신들은?”
지천공이 몸을 부르르 떤 후 다른 복면인들을 노려보자 그들은 하나 둘 씩 복면을 벗어들기 시작했다.
“강사표국의 상관국주.. 민용표국의 민국주.. 금의 표국의 마국주.. 장전표국의 장국주.. 그리고 정동표국의 금국주 까지…?”
“흐흐- 우리도 이렇게 까지는 할 생각이 없었다.”
“나는 본시 네 놈의 애비 때부터 금마표국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들놈까지 다른 작은 표국을 눈 아래로 두는 거만한 꼴이라니…”
“그간 사라진 봉물의 주인들에게 관례의 배 이상 배상한 것도 주제넘은 짓이었다.”
“네 놈이 우리에게 빛을 져가며 그 짓을 하는 통에 앞으로 우리도 더욱 피곤하게 되었다. 알기나 하느냐?”
“지국주, 그대의 경영수완은 훌륭했으나 너무 주위를 돌아보지 않더구려.”
배신감에 몸을 부르르 떨고 있는 지천공에게 한 마디씩 하는 다른 표국의 국주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니 혼자 잘 나가는 꼴 못 보겠다’는 건데 좋은 주먹 아니 좋은 칼 놔두고 뭐 이리 말이 많아?
“이- 비열한 모리배들!”
이 바램에 부응하여 별안간 카악! 외치며 검을 뽑아 드는 지천공.
촤앙-!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검이 뽑히는 것과 성천국주를 향해 몸을 날리는 것은 거의 동시였다. 검을 앞으로 뻗은 채 약 10여 장 정도를 눈부신 속도로 날아 찔러 들어가자, 성천국주의 안색이 순간적으로 굳어진다.
“이노옴-!”
성천국주는 일갈과 함께 검을 휘둘러 지천공의 검을 쳐 올렸다. 그 순간 그 탄력을 이용한 듯 지천공의 몸이 휘릭, 돌며 뒤쪽으로 날아간다. 처음부터 이 것을 노렸을까? 허공을 나는 지천공이 무언가를 내 던진다. (몽몽이 보통의 영화처럼 액션씬에서는 중간중간 슬로우 모션으로 보여줘 웬만한 건 다 알아볼 수 있다.)
콰앙~! 폭발음과 함께 수레 위의 봉물이 연기와 함께 산산이 부서져 흩어지고 있다. 그 연기 사이를 뚫고 숲 속으로 달아나는 지천공.
“이 여우 같은 놈! 쫒아라!”
지천공이 우거진 나무 숲 사이를 정신없이 달리고 있다. 그 뒤 어디선가 역시 다급한 태도로 달려오고 있는 추적자들…. 음, 왕가위 감독 특유의(?) 단절적이고 흐릿한- 그럼에도 역동적인 느낌의 추적씬이다. 지천공과 추적자들의 가쁜 호흡 소리가 현실처럼 생생하게 울리며 나 자신조차 화면 속에서 함께 달리는 느낌을 준다. 애초에 ‘가상 현실’이니까 그럴 법도 하지만 어쨌거나 지금 화면은 좀 어지럽다. 좀 쉬었다 볼까…? 음, 다음 장면까지는 보고 쉬자. 지천공이 숲을 벗어나자마자 놀라며 걸음을 멈추는 걸 보아 앞에 뭔가 있나 보다.
“헛-! 이..럴..수가!”
기막혀하는 그의 시선을 따라 화면은 그의 앞에 펼쳐진 너무나 아름답고 멋진 절경을 비추기 시작한다.
신비롭고 환상적인 절경은 절경인데, 그게.. 안개 같은 구름이 조금 아래쪽에 걸쳐진 까마득한 ‘절벽’이라는 것이 문제이다. 확인해 주듯 화면이 절벽 아래를 조금 비추어 주지만 바닥은 안 보인다.
뭐 뻔한 거지만, 지천공이 아무리 주위를 둘러 봐도 다른 길은 없다. 다시 돌아가려는 순간 숲에서 일제히 추적자들이 튀어나오는 것도 정해진 수순이고…
비장한 각오를 한 표정으로 선 지천공에게 추적자들이 비웃음을 담은 얼굴로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보나마나 열심히 싸우다가 중과부족으로 절벽에서 떨어질 테고, 절벽 아래에는 깊은 물이 흐르고 있거나 아니면 절세의 고수.. 일단은 마도의 고수겠지만 하여간 고수가 순전히 우연히(?) 거기 있다가 떨어지는 주인공을 터억 받아 줘서 목숨을 건지거나 뭐 그러겠지?
생략하고 다음에 봐? 아니면 마저 볼까?
망설이는 사이 싸움이 벌어졌는데, 싸우는 장면이 재미있어서 일단은 좀 더 두고 보기로 했다.
표국이란 말하자면 ‘보디가드’ 회사. 그 짱 이어서 그런지 지금의 총관에 비할 바는 못 되도 상당히 날렵하군. 다섯 명의 합공을 상대로 상당시간 동안 버티고 싸우며 몇몇 사람들에게 부상까지 입힌다.
그 동안 내 안목도 무지하게 늘었기 때문에 가만히 분석을 해 보면, 청년 지천공의 무공이 상당한 수준이기는 했으나 적들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도 각각 표국의 짱들이니 그런 것이 당연하겠지만.. 하여간 문제는 그들이 합공 자체를 잘 못하는 것 같았다.
두 어명이 동시에 덤벼들었다가도 서로의 병기가 얽히며 머뭇대기 일쑤여서 결국에는 계속 일대일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싸움은 조금 지루할 정도로 계속 되었고 아무리 젊은 지천공이라고 해도 땀에 범벅이 되어 점점 지쳐 가는 것이 눈에 보이고 있다.
“금국주, 마국주는 물러나시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사태를 관망하던 성천국주가 별안간 고함을 지르며 앞으로 튀어나온다.
“하핫~! 내 오늘 지씨 가문의 검술이 위인지 성씨 가문의 검술이 위인지 확인해 봐야겠다.”
상대가 형편없이 지칠 때까지 기다렸다 튀어나오면서 참 뻔뻔하기도 하다. 그래도 어쨌든 다른 표국 국주들보다 잘나긴 했는지 순식간에 지천공을 절벽 끝으로 몰아 넣고 있다. 떨어지는 건 시간 문제인데, 한 칼 먹고 떨어지려나 아니면 그냥 스스로 떨어지려나.
“으흑-!”
일단 한 칼 먹었군. 전통적인 주인공의 부상 부위는 ‘어깨’와 허벅지인데, 이번엔 허벅지다.
“허헉~! 으윽!”
에-? 어깨에도 또 한 방, 오.. 가슴 한 복판이 찌익 그어지기까지?
“으아아아아아아…..!”
힘든 과정 끝에 예정된 코스 ‘절벽 낙하’에 성공(?) 하는 우리의 주인공 지천공..!
이런- 까마득한 절벽 밑에 물이 있긴 한데 엄청나게 물결이 거칠다. 살았으니까 지금 총관이 존재하는 거긴 하겠지만, 이봐 몽몽.. 니가 반영한 데이터가 믿을 만 하긴 한 거냐? 저런 물 속에서 어떻게 살아?
상당히 흔한 스토리임에도 그래도 어느 정도는 ‘현실적인’ 전개가 마음에 들어 주욱 보아 온 건데, 여기부터는 좀 그렇군.
우선 멈춤! 화면 좀 뒤로 백..! 천천히 replay..!
음.. 일단은 떨어지는 자세가 어찌 어찌 일직선이 되어 있어서 입수 동작은 괜찮은 거 같다. 저 높이에서 배부터 철퍼덕 떨어졌으면 부상이 없었어도 즉사였을 텐데 말이다. 스토리상으로는 물가에 기절해 있는 그를 누가 발견하여 구해주는 장면으로 바로 넘어간다거나 하는 식으로 생략해도 되겠지만…
타닥, 타닥, 탁, 탁(타자치는 소리?)
< 몽몽, 물 속을 휩쓸려 가는 과정을 한 번 시뮬레이션 해 볼래? >
이제부터의 장면은 실제 상황 재현이라기보다는 이렇지 않았다면 살 수 없었을 것이다..라는 개념이 될 것이다.
잠깐 이지만 저런 계곡 물에 빠져 본 경험이 있는 나로써는 저 때 얼마나 썰렁한 기분인지 조금은 안다.
천둥처럼 귓가를 때리는 굉음과 함께 사방에서 괴물처럼 달려드는 흙탕물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공포를 안겨 주는 것인지….
청년 지천공… 거친 물살에 휩쓸려 있는 그는 의식을 잃지 않고 있다. 분명 수영을 잘하며 게다가 저 순간에도 침착함을 잃지 않은 사람의 몸짓…
세 군데의 검상을 입고 수십 미터 아래의 절벽에 떨어졌음에도 의식을 잃지 않고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 물살을 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약간 감동 같은 것을 느끼며 얼마간을 멍하니 그의 분투를 지켜보았다.
[ 지천공이 나중 목격되었다는 지역을 추정해 보면 추락 지점으로부터 약 7 KM 하류까지 떠내려갔다고 여겨집니다. 현 상황에서 이 시대 성인 남성의 추정 평균 체력치로는 3 KM 가 한계입니다. ]
몽몽의 보충 설명대로… 체력으로 버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운도 물론 따라 주었을 것이고, 체력을 능가하는 정신력이 없고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
몽몽이 적당히 생략한 건지 내가 시간의 흐름을 잊고 정신없이 지켜 본 건지.. 지천공은 이제 어느 정도 느려지고 완만해진 물 위에 떠 있다.
이윽고 지천공은 얕은 물가로 기어 나오고 있다.
처절한 몰골로 기어 나온 그는 몇 번 콜록이며 물을 토해내고는 이내 흙바닥 위에 길게 누워 버린다.
거칠게 오르내리며 숨을 몰아 쉬던 그의 가슴이 차츰 잦아들고 있다. 잠이 든 건지 의식을 잃은 건지…
따스한 느낌의 햇살이 그의 전신을 비춰주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 것도 약해지며 의식을 잃은 상태인 지천공은 오한을 느끼는지 간혹 경련을 일으키며 신음하고 있다. 주인공을 구해 줄 어떤 손길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쳇-! 현실적인 이야기를 원했지만 막상 이러니까 웬지 기분이 이상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