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1부 – 8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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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재밌긴 하……”
아차, 사영의 페이스에 말려 들 뻔했다. 나는 무심결에 대꾸하던 말을 끊고 공연히 헛기침을 했다.
“흠, 크허험-! 사영 선배, 이제 보니 농담을 진담처럼 하는 습관이 있나보구려.”
“설마… 진담을 농담처럼 할 때는 있습니다.”
이 양반 이거 안되겠네 싶어, 나는 인상을 긁으며 번쩍 손을 들어 탁자를 탕! 소리나게 내리쳤다.
“…전 혈의문(血意門) 특급 살수 사영 무영! 당신은 이 비화곡의 1급 거민(居民)이요. 죽어 시체가 된다 해도 비화곡 밖으로 나갈 수 없소. 잊었소?”
정말이지 모처럼 곡주다운 위엄(?)을 보이는 나 진유준. 그러나… 으~ 사영은 큰일 날 뻔했다는 표정으로 내가 탁자를 치는 바람에 흔들거리는 술병을 잡아 안정시키는데 더 신경을 쓰고 있었다.
내가 탁자 치는 소리, 언성을 높이는 소리 등에 놀랐는지 자매들이 우르르 방안으로 몰려들어 온다. 자매들 앞에서 지네 아버지에게 뭐라고 그러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은데… 근데 문제는 지금 사영이 내 말은 전혀 귀담아 듣지 않았다는 표정으로 내 잔에 술을 따르며 대꾸하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부,탁, 드리는 겁니다. 곡주께서 데,리,고, 나가 달라고……”
다시 빙긋이 웃으며 ‘부탁’이란 말과 ‘데리고’라는 말을 강조하는 사영…… 으~! 제기랄-! 이제 보니, 이거 어떤 면에서는 성승보다 더 골치 아픈 아저씨잖아? 아무래도 여기서 내가 더 뭐라고 해봤자 겁먹기는커녕 계속 ‘에이- 우리 사이에 뭘 그래~!’ 식으로 반응할 거 같지만, 그렇다고 나도 ‘까짓 거 그럽시다. 같이 강호에 나가서 나와 딩가딩가 유람하다가 성승 만나면 한판 뜨고 오시구려’라고 할 수도 없고, 거참……!
“아, 아버지 곡주님께 도대체 무슨 말을……?”
소교가 먼저 어쩔 줄 몰라하며 더듬댔고 소령이와 미령이도 나와 사영을 번갈아 보며 곤혹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곤란한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본래 1차적인 문제는 이 양반이 밖에 나가서 정말 성승 암살을 시도한다면 그 여파가 보통이 아닐 것이라는 점이었다. 성승이 당한다면, 현재 비화곡 소속인 고수가 그런 짓을 했으니 당연히 소림사에서도 가만있지 않을 것이고 본래도 적이 많은 비화곡에 성승을 추앙하는 무리들이 모조리 칼을 갈 것이니, 자칫하면 화천루와의 대결보다도 일이 커질 것이라는 건 나라도 짐작할 수가 있다.
거꾸로 사영이 당하면…? 그 것도 물론 곤란하다. 대교 자매들 아버지가 내 허락을 받고 나가 죽어버리면 내 입장은 뭐가 되겠는가. 물론, 사영이 암살하려는 대상이 정말 성승의 수염(?)뿐이라면야 위의 염려들은 거의 줄어들지만……
“못난 것들!”
응…? 뭐야? 갑자기 왠 큰소리?
“명색이 곡주의 호위를 맡고 있는 것들이 이게 무슨 꼴이냐!”
사영의 날카로운 질책에 자매들은 찔끔한 표정이 되었으나 거의 동시에 뭔가 깨달았는지 각자의 병기를 뽑아 들었다. 소령이와 미령이는 대뜸 검을 지들 아버지 사영에게 겨누었고 소교는 날 보호하는 태세를 취하며 내게 바짝 다가선다. 에구, 갑자기 분위기 살벌해지네.
“틀렸다. 요인 경호의 기본도 모르는 구나. 지금 적을 제압하는 것이 더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별안간 사람이 달라지기라도 하듯 살벌한 표정이 된 사영은 냉냉한 음성으로 자매들을 훈계하기 시작했다.
“경호를 맡은 자들은 항시 이목을 경호대상에 집중하고 있어야 한다. 헌데 너희들은 실내의 상황을 채 파악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그저 뛰어 들어왔을 뿐이며, 들어와서도 우왕좌왕할 뿐이었다.”
“하지만, 아버지 방금은……”
“미령! 넌 어디까지 선을 그어 놓을 셈이냐. 곡주께 해를 끼치는 자가 나였다면 구경만 할 셈이었느냐?”
“그, 그런 뜻이 아니라. 조금 전 상황에서는……”
“상대가 그 누구든, 어떤 상황이든… 이상을 느끼고 달려들어 왔을 경우 처음부터 너희들이 점했어야 할 위치는 알고 있느냐?”
깨갱~!(기죽는 효과음?) 우리의 당돌 소녀 미령이가 암말도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어이, 이봐요. 얘들은 본래 말이 보디가드지 기냥 여비서 정도라니까, 근데 너무 야단치지 말아요…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어째 내가 끼어 들기 어려운 분위기여서 그냥 더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너희들은 평소 믿는 구석이 있었을 것이다. 바로 이 위에 있는 친구. 안 그런가?”
위에 있는 친구…? 아, 흑주 말이군.
“너희들은 지금 위에 있는 친구의 움직임, 아니 그 존재조차 파악할 능력이 있는가? 그러면서 그를 믿고 마음을 놓는가? 그가 이 순간 곡주 곁에 반드시 있는 지 여부를 알 수도 없는 것들이?”
사영이 계속 무섭게 몰아 붙이자 소교는 고개를 들지도 못한 채 떨고 있었고 소령이는 겁먹은 표정으로 그 큰 눈만을 껌벅 껌벅, 미령이는 몹시 분한 표정이 되어 씩씩 숨을 몰아 쉬고 있다. 아버지가 딸자식 교육시키는 건 좋은데 보는 내가 영 민망하고 부담스럽구만, 역시 말리는 것이……
“오늘은 곡주께서 계신 자리이니 이 정도로 하겠다 만, 곡주를 모시고 강호에 나가기 전에 경호무사의 꼴을 갖추려면 각고의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타이밍 죽인다. 귀신이 따로 없군.
“이거, 곡주 안전에서 제가 너무 소란을 떤 건 아닌 지……”
이제야 안색을 바꾸며 내게 죄송스런 표정을 짓는 사영에게 나는 피식 싱겁게 웃어 줄 수밖에 없었다. 어째 자매들 뿐 아니라 나도 덩달아 당한 기분이 들지만 달리 트집 잡을 것이 없었다.
“부모가 자식 가르치는데 내가 할 건 없고… 그보다 우리 좀 전의 얘기나 마저 합시다. 음… 괜찮으니까, 너희들은 모두 나가있어.”
나는 기죽어있는 자매들을 내보낸 다음, 천천히 술 몇 잔을 더 마시며 다시 생각을 정리해 본 후에야 말을 꺼낼 수 있었다.
“한 가지, 물읍시다.”
“말씀하시지요, 곡주님.”
“성승에게 이길 자신은 있소?”
“정면 승부라면, 없습니다.”
“그럼, 기습… 아니 살수 출신이니 암습 이라면 자신이 있다는 거요? 그 것도 전에 한 번 실패했으면서……?”
“성승이 그 전 그대로라면 성공할 것이요, 그 이상이 되었다면 장담할 수 없습니다.”
말은 참 쉽게 하는 군. 승부를 장담할 수 없다는 말도 망설임 없이 담담하게 해버리니 내 쪽에서 오히려 말문이 막히는 기분이다. 그러나 확실히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 아직 더 있다.
“성승에게 그렇게 집착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묻지 않겠소. 하지만 이 일이 내 직권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건 알지 않소.”
“곡주께서 제가 필요하다 해 주시면… 그러면 저 고집 불통의 아홉 늙은이들도 무시하지는 못하겠지요.”
“그거야… 하지만 그 것도 단지 기회가 주어지는 것뿐, 당신이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면 내 입장은 어떨 것 같소. 아니- 아버지를 잃은 자매들의 심정은…? 성승의 수염을 자르는 것이 그 정도로 가치가 있소?”
이번 질문에는 사영도 잠깐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역시 미리 생각해 봤겠지만 그래도 쉽게는 대답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나도 그 동안 공부 좀 했다. 자아- 여기서 비화곡에 사는 주민들을 분류하는 몇 개의 등급을 살펴보자.
기본적으로 크게 3등급으로 나뉘는 데, 그 외 특수 신분이라던가 등급별 관리 기준이라던가 자세한 사항은 꽤 복잡하므로 기본 개념만 집고 넘어가기로 하자.
먼저, 과거에 주민이 된 마인들의 자손들과 현재 본 단 소속 마인들의 가족들이 3급 거민인데, 비율로 보면 그들의 수가 가장 많아 비화곡 주민이라고 하면 보통 이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1-2급은 모두 당대에 주민이 된 자들인데, 어떤 급이든 갈 곳 없어 기어들어 온 마인들인 건 마찬가지이고 1급이라고 해서 2급 보다 능력이 뛰어난 자에게 주어지는 등급이 아니다. 문제의 1급은 스스로 ‘자원’하는 등급인데, 뭐랄까… 특별 보호 대상이라고 할까?
강호의 그 어떤 단체나 개인의 요청이 있어도 일단 1급 거민이 된 사람은 절대로 내어 주지 않는다. 설사 비화곡에 당장 하나도 도움이 안 되는 자라 할지라도 그 자를 지키기 위해 전쟁을 치르는 한이 있어도 비화곡은 그를 지켜준다. 그래서 보통 강호에 엄청 많은 적을 만들었거나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강력한 원수를 둔 자들이 이 등급이 되길 희망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대신… 1급 거민이 된 자는 그들 역시 결코 비화곡 바깥으로 나갈 수가 없는 것이 규칙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1급 거민은 그리 많지 않다고 했다.
만약 ‘1급 거민’이 비화곡 밖으로 나가려고 한다면…? 그럼 끝이다. 그 당사자와 가족까지 몰살…! 심지어 가족이 비화곡 안에 없으면 밖으로 찾아가서까지 다 죽이는 것이다.
지하 성지에 들어 간 자를 반드시, 예외 없이 죽이는 것과 달리 1급 거민에게는 비화곡을 나갈 기회가 있긴 하다. 뭐,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겠지만……
“제 자식들을 저 보다 더 배려해 주시는 구려.”
응? 또 뭔 소리여.
“애초에 반대하시는 뜻은 저, 아니 남겨진 아이들을 걱정하시는 마음… 하지만 저도 이번에 물러설 수가 없습니다.”
우쒸~! 자꾸 내 속을 콕 집어 버리니까 웬지 열 받네? 첨부터 내가 지 딸들 무지 아끼는 거 알고 배짱으로 밀고 나갈 마음인가 본데, 그냥 확-! 확…! 그러니 까… …술친구 안 해버릴까 보다.
제기랄! 역시 안돼 자꾸 맘이 약해진다. 이래서 정권 주변엔 외척이 득세를 하나보다.
“본래 전 부족한 남편에 몹쓸 아버지였소. 새삼 아이들에게 원망을 듣는다 해도… 아니 원망일랑 제가 다 가져가겠소.”
“칫~! 생각은 해 보겠소. 하지만… 너무 기대는 마시오.”
“이틀 후 다시 오겠습니다.”
“맘대로 하시구려. 이 고집불통 양반아.”
신경질적인 태도로 술을 마시는 나를 사영은 잔잔한 미소… 어찌 보면 성승을 연상케도 하는 초월적인 미소를 띤 채 바라보고 있었다.